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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 다시 읽기: '침묵자'의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서

네스토리우스 다시 읽기: '침묵자'의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서

서론: 침묵당한 목소리

천오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교회의 역사는 승자들의 목소리로 가득채워졌다. 그 속에서 5세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모습은 불타는 책의 연기와 황제의 파문이라는 무거운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자신을 적대자로 여겼던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에 의해 '그리스도를 두 인격으로 나누는 이단자'로 몰려,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죄받은 뒤 이집트의 황량한 사막으로 유배되어 생을 마감한다. 그의 모든 저서는 불태워졌고, 그의 신학은 왜곡된 캐리커처로만 남아 있다.

이처럼 네스토리우스 논쟁은 단순한 신학적 오류에 대한 단죄가 아니었던 것임을 인지해야한다. 그것은 플라톤 철학에 뿌리내린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안티오키아 학파라는, 두 거대한 신학 세계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또한, 정통 교리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치열한 정치적 암투와 개인적 야망이 뒤얽힌 비극이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시리아어 번역본인 그의 마지막 변론서, 『헤라클레이데스의 책』(일반적으로 『헤라클레이데스의 시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더 정확한 번역은 『헤라클레이데스의 책』 또는 『논고』이다)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상은 네스토리우스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도 알 수도 없이 묻혀있었다. 천 년이 넘는 침묵을 깨고 나타난 이 문서는 우리에게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제공해준다. 이 글은 키릴루스가 덧씌운 '이단자'라는 낙인 뒤에 가려진 네스토리우스의 진짜 신학과 그의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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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세계의 충돌: 알렉산드리아 학파 vs. 안티오키아 학파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적 대립은 개인적인 갈등 이전에, 그들이 속한 두 신학 학파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두 학파는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달랐다.

1.1. 신학적 패러다임 비교

두 학파의 핵심적인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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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학적 경향의 귀결

각 학파의 신학적 강조점은 특정 이단으로 흐를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 알렉산드리아 학파

    • 위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거나 단순히 신성을 나타내기 위한 외관에 불과하다고 보는 경향을 초래할 수 있다.

    • 관련 이단: 이는 훗날 그리스도에게는 신성이라는 하나의 본성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단성론(Monophysitism)이나, 그의 인간적 모습이 환상에 불과했다는 가현설(Docetism)로 이어질 수 있었다.

  • 안티오키아 학파

    • 위험: 신성과 인성의 뚜렷한 구분에 집중한 나머지, 그리스도가 마치 별개의 두 존재, 즉 신적 존재와 인간적 존재가 도덕적으로만 결합한 것처럼 분리될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 관련 이단: 이는 키릴루스가 네스토리우스를 비판했던 핵심 논리이자, 그리스도 안에 두 개의 독립된 인격(Persons)이 존재한다고 보는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로 비판받았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신학적 토양에서 자라난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의 충돌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다. 이제 두 인물의 신념과 야망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2. 논쟁의 중심인물: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

이 논쟁은 단순히 추상적인 신학 이론의 대결이 아니었으며,  여기에는 굳건한 신념과 정치적 야망을 가진 두 명의 거인간의 신학적 대립이 있었던 것이다.

2.1.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루스

키릴루스는 '정통 교리의 수호자'라는 명예와 '야심에 찬 책략가'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 입체적 인물이다.

  1. 신학적 신념: 위대한 교부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적 후계자로서, 그는 '성육신'의 신비를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 즉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hypostasis) 안에서 분리(혹은 구별)될 수 없이 연합되었다는 교리를 확립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2. 정치적 수완: 그는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명예를 걸고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훗날 에베소 공의회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황실의 유력자들에게 금, 타조알, 최고급 카펫 등 막대한 뇌물을 보내는 정치 공세를 펼치며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려하였다.

  3. 성격: 여러 기록은 그가 '갈등을 사랑하는' 면모를 가졌으며, '신학적 정쟁'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능숙했음을 보여준다.

2.2.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충실한 계승자이자, 정치적으로는 미숙했던 열정적인 개혁가였다.

  1. 신학적 배경: 안티오키아 학파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의 제자로서, 그의 신학은 안티오키아의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2. 개혁가적 면모: 42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되자마자 그는 아리우스주의와 같은 이단들을 척결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황제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인물이다. "폐하, 저에게 이단이 정화된 제국을 주시면, 저는 당신께 하늘나라를 드리겠습니다."

  3. 정치적 약점: 그의 열정은 종종 스스로를 해치는 독선으로 변질될 위험도 있었다. 그는 아리우스파 교회를 불태워 '방화범(the Incendiary)'이라는 악명을 얻었으며, 황제의 경건한 누이인 풀케리아를 소외시키는 등 수도에 오자마자 키릴루스가 개입하기도 전에 이미 강력한 적들을 만들었다. 키릴루스와 비교했을 때 그의 정치적 수완 부족은 그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두 거인의 배경을 이해했으니, 이제 전 교회를 뒤흔든 논쟁의 도화선, 즉 '테오토코스' 칭호 문제를 파헤쳐 보려고 한다.

3. 논쟁의 불꽃: '테오토코스(Theotokos)'

'테오토코스(Theotokos)'는 '하나님을 낳은 이(God bearer)', 즉 '하나님의 어머니'로 번역되는 마리아의 칭호이다. 이 논쟁은 단순히 마리아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마리아가 낳은 아들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기독론의 심장부를 건드리는 문제였던 것이다.

3.1. 네스토리우스는 왜 '테오토코스(Theotokos)'를 반대했는가?

네스토리우스는 '테오토코스'라는 칭호가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신학적으로 심각한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그의 반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신의 불변성 수호: 그는 "하나님께 어머니가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창조되지 않고 영원하신 신(로고스)이 피조물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신을 시간과 공간 속에 가두고 고통받을 수 있는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이는 신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2. 아폴리나리우스주의에 대한 경계: 그는 '테오토코스' 칭호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에 완전히 흡수시켜 버리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이단으로 흐를 위험이 크다고 경계하였다. 인성이 신성에 녹아 없어진다면,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게 되고 인류를 구원할 수 없게 된다고 보았다.

  3. 대안 제시: 그는 무조건적인 반대가 아니라,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 그리스도를 낳은 이, Christ bearer)'라는 대안을 제시하였다. 이 칭호는 마리아가 '그리스도', 즉 신성과 인성이 연합된 한 분을 낳았음을 인정함으로써 두 본성을 모두 존중하는 가장 균형 잡힌 표현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3.2. 키릴루스는 왜 '테오토코스(Theotokos)'를 옹호했는가?

키릴루스에게 '테오토코스' 칭호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보루였다.

그에게 '테오토코스'는 마리아를 신격화하는 표현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 칭호는 마리아가 낳은 '그분'이 분리(혹은 구별)될 수 없는 단 한 분의 인격, 즉 '성육신한 로고스' 바로 그 자신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만약 마리아가 단순한 '인간의 어머니(Anthropotokos)'라면, 그녀가 낳은 예수는 신과 분리된 한낱 인간에 불과하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키릴루스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만약 마리아가 테오토코스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다."

이 첨예한 대립 속에서 네스토리우스는 결국 정죄받고 유배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막에서 기록된 그의 마지막 변론서, 『헤라클레이데스의 책』이 그의 진의를 밝혀줄 것이다.

4. 사막의 변론: 『헤라클레이데스의 책』을 통해 본 네스토리우스 신학

유배지에서 기록된 『헤라클레이데스의 책』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 정면으로 맞서며, 자신의 신학이야말로 진정한 정통 신앙임을 변호한다. 그의 변론의 중심에는 시리아어 '크노마(Qnoma)'와 그리스어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사이의 의미론적 심연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사소한 언어적 문제가 아니라 이 신학적 비극 전체를 떠받치는 핵심 기둥이었다. 그는 키릴루스의 신학이야말로 각종 이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역공을 펼치며 자신의 신학을 변호한다.

4.1. 정통 신앙의 확립: 이단들에 대한 반박

아리우스주의 반박: 아리우스파는 "말씀이 고통받았다"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고통받는 존재는 완전한 신일 수 없으므로 말씀(로고스)은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는 본성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이 주장을 논파했다. 그는 "고난받은 것은 성전(인성)이지, 성전에 거하시는 분(로고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신성의 완전한 무감각성(impassibility)을 옹호했다. 오히려 그는 '위격적 연합'을 통해 신성을 고통받는 존재로 만들어버린 키릴루스가 아리우스파의 전제를 정당화해주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반박:  "가정되지 않은 것은 치유되지 않는다(What is not assumed is not healed)"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유명한 격언에 따라,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이성적 의지를 온전히 취하지 않으셨다면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키릴루스를 '새로운 아폴리나리우스'로 간주했다. 키릴루스가 주장하는 '자연적 연합'(영혼과 육체의 결합 같은)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의지 없는 불완전한 조각으로 축소시켜 버린다고 비판했다.

마니교(가현설) 반박: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의 본성이 혼합되거나 혼동된다면, 성육신은 실제 사건이 아닌 하나의 환상으로 전락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성의 고유한 실체(우시아, Ousia)를 확고히 고수해야만,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고난받고 죽으셨음을 확증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렇지 않다면 신이 고통받는 척 연기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4.2.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 프로소폰 연합

네스토리우스는 키릴루스의 '위격적 연합(Hypostasis Union)'을 대체할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합 모델인 '프로소폰 연합(Prosponic Union)'을 제시하였다.

  • 핵심 용어 정리

    • 우시아 (Ousia, 본성): 사물의 추상적인 본질. "신성", "인성"과 같이 '무엇'인가를 규정.

    • 휘포스타시스 (Hypostasis / 시리아어: Qnoma): 본성의 구체적인 실현. 네스토리우스에게 본성(우시아)은 반드시 구체적 실체(휘포스타시스)를 가져야만 실재한다고 하였다. 이는 후대의 '인격(Person)' 개념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용어이다.

    • 프로소폰 (Prosopon / 시리아어: Parsopa):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현(顯現), 관계 속에서의 '인격'. 연합이 일어나는 장소.

  • 왕과 군인의 비유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의 '프로소폰 연합'을 설명하기 위해 "군복을 입은 왕"의 비유를 사용했다. 한 왕이 자신의 군대를 구하기 위해 평범한 군인의 복장을 하였다고 본다. 그는 군인처럼 행동하고 군인의 위험을 감수하지만, 그의 왕으로서의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왕은 군인의 프로소폰(외적 모습, 역할)을 취했지만, 군인의 본성이 된 것은 아닌 것이다. 이처럼 로고스(신성)는 인간의 프로소폰을 취하여 인간으로 나타나셨지만, 신성 자체의 본질을 잃거나 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4.3. 두 연합 모델의 비교

네스토리우스의 관점에서 본 키릴루스의 '위격적 연합'과 자신의 '프로소폰 연합'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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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정교한 신학 체계를 가졌던 네스토리우스는 왜 이단자로 낙인찍혔을까? 이제 그를 파멸로 이끈 에베소 공의회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들여다봄으로써 당시 상황을 좀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정의의 오류: 에베소 공의회(431년)의 비극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공의회는 공정한 신학 토론의 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키릴루스에 의해 주도된, 네스토리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숙청의 장을 만들기 위한 전략적 공의회의 모습에 가까웠다.

5.1. 절차적 문제점

키릴루스는 공의회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기 위해 여러 절차적 원칙을 무시하였다.

  1. 조급한 개회: 네스토리우스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안티오키아의 요한 총대주교와 동방의 주교들이 폭풍우로 인해 도착이 늦어지고 있었다. 키릴루스는 2주를 기다린 후, 황제 대리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공의회 개회를 선언하여 진행한다.

  2. 일방적인 정죄: 네스토리우스는 공정한 심의를 기대할 수 없다며 공의회 출석을 거부했다. 그러자 키릴루스는 그의 저술만을 근거로 궐석재판을 진행하여 단 하루 만에 그를 면직하고 이단으로 선고하였다.

  3. 분열된 공의회: 며칠 뒤 도착한 안티오키아의 요한 총대주교와 동방 주교들은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였다. 그들은 즉시 별도의 '맞불 공의회'를 열어, 오히려 키릴루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파문하고 이단으로 정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5.2. 정치적 해결과 네스토리우스의 몰락

두 개의 공의회가 서로를 파문하는 혼란 속에서,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개입하게 된다.

  • 황제는 처음에는 사태의 책임을 물어 네스토리우스, 키릴루스, 멤논(에베소의 주교) 세 지도자 모두의 면직을 승인하며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 그러나 여기서 키릴루스는 그의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하며,  키릴루스 측은 '축복헌금(benedictions)'이라는 이름으로 황실에 금, 타조알, 최고급 카펫 등 막대한 뇌물을 보내고, 거지로 변장한 전령을 통해 수도의 수도원들을 동원하는 등 강력한 정치적 압력을 가하며 선동하였다.

  • 결국 황제는 압력에 굴복하게 된다. 키릴루스는 영웅처럼 복권되었고, 네스토리우스만 안티오키아의 수도원으로 은퇴하라는 명령을 받아 쫒겨나게 된다.

  • 이후 435년, 황제는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한 최종 칙령을 내리게 된다. 그의 모든 저서는 불태워졌고, 그는 그의 숙적인 키릴루스의 교구 내에 있는 이집트의 외딴 오아시스로 영구히 유배되었다.

에베소 공의회(431)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키릴루스의 기독론을 정통으로 인정하게되는데 기독론에 대한 그 핵심사항은 예수님이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신앙을 확정하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칼게돈 공의회(451)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입장이 더 설득력을 얻게 되었으며 여기서 기독론에 대한 에베소 공의 내용이 대폭 수정하여 네스토리우스의 지나친 구별 과 키릴루스의 지나친 결합을 조정하여 두본서의 구별과 한 인격의 이치를 동시에 지키는 기독론을 확정하였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칼케돈은 네스토리우스의 우려를 반영한 키릴루스적 기독론”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정치적 희생양이 된 네스토리우스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듯 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신학은 후대에 다른 방식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다.

6. 결론: 네스토리우스의 변호는 성공했는가?

네스토리우스의 비극은 그의 신학이 단순한 오류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시리아어 '크노마(Qnoma)'와 그리스어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사이의 의미론적 오해, 즉 이 신학적 비극의 중심 기둥이었던 언어적 장벽과 키릴루스의 무자비한 정치적 야망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는 '두 인격체(two persons)'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구체화된 실체(two concrete realities)'가 '하나의 외적 현현(one prosopon)' 안에서 연합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섬세한 구별은 정쟁의 소음 속에 묻혀버렸던 것이다.

역사는 놀라운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네스토리우스는 그의 유배지에서, 자신이 파문된 지 20년 뒤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칼케돈 공의회는 교황 레오의 교서를 바탕으로 "한 인격(Person) 안에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는 두 본성(Natures)"이라는 정통 기독론의 최종 공식을 확립하게 된다. 『헤라클레이데스의 책』에서 네스토리우스는 바로 이것이 자신이 평생을 바쳐 주장했던 바라고 외치며, 자신의 신학적 승리를 선언하였다.

네스토리우스의 변호는 단순히 역사적 호기심에 그치지 않았다. 20세기 후반, 그의 신학적 통찰은 놀라운 현대적 결실을 보게 되었다. 199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을 계승한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총대주교 마르 딘카 4세는 '공동 기독론 선언'에 서명하였다. 이 선언은 양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해 동일한 신앙을 고백함을 확인하며, "그의 신성과 인성은 한 인격 안에서 혼합이나 변화, 분열이나 분리 없이 연합되어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네스토리우스가 『헤라클레이데스의 책』에서 필사적으로 변호했던 바로 그 언어와 놀랍도록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네스토리우스라는 이름은 단죄받았지만, 그의 핵심 사상(두 본성의 뚜렷한 구별)은 역설적으로 정통 교리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를 침묵시키려 했던 바로 그 고독한 유배의 시간 속에서,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헤라클레이데스의 책』이라는 기적적인 형태로 살아남아 오늘날 우리에게 그의 잃어버린 진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교리의 역사가 단순한 진리의 여정이 아니라, 언어와 권력, 그리고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투쟁의 역사임을 상기시켜 준다.

네스토리우스는 칼케돈 공의회 결정과 교황 레오의 교서에서 키릴루스의 "두본성의 결합 혼돈"에 맞선 평생의 투쟁의 정당성을 확인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그의 신학의 정당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를 이단자로 정죄하어 오랫동안 서방교회의 영향하에서 학습되었던 우리는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시각에서 서방의 관점과 동방의 관점을 모두 아우르는 양날개를 펼쳐 창공을 나를 때가 되었다. 이같은 과업에 중앙아시아에 나와 있는 선교사들과 사역자들은 올바른 역사관과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나아가야할 때인 것이다.

네스토리우스 자신은 서방 교회에 "모순의 표식"으로 남아 있었지만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신앙을 구하고 지켰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Nestorius#Christology#Theotok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