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AI 시대, 인간의 역할은 '질문'과 '선택'이다
AI 덕분에 이제 시나리오를 쓰는 일은 더 이상 소수의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니다. 초보도, 비전공자도, 아이디어만 있다면 AI의 도움을 받아 첫 장면을 펼칠 수 있는 시대다. 이 책이 목표로 삼았던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시나리오를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AI와 함께라면 누가, 어떤 태도로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를 묻는 것 말이다.
AI는 구조를 제안하고, 장면을 생성하며, 캐릭터의 대사를 끝없이 변주한다. 그러나 AI는 스스로 "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만들지 못한다. 이야기의 방향을 정하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 선택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결국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그 앞에 놓이는 첫 입력값은 당신의 질문이며, 마지막에 남는 결정권도 당신의 선택이다.
질문은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이 캐릭터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이 장면은 정말 필요한가", "이 갈등은 지금 시대와 어떤 대화를 나누는가" 같은 질문들이 플롯을 깎고 다듬는다. AI에게 던지는 프롬프트 역시 결국 질문의 한 형태다. 대충 던진 질문에는 대충인 결과가 돌아오고, 맥락과 의도가 또렷한 질문에는 예상보다 정교한 제안이 돌아온다. AI 시대의 작가는 글을 "잘 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묻는 사람"으로 재정의된다.
선택은 책임의 다른 이름이다. AI가 제시하는 수많은 옵션들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장면을 살리고, 어떤 장면을 버릴지 골라야 한다. 전개를 빠르게 가져갈지, 여백을 남길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할지, 쓴맛이 남는 결말로 끝낼지 결정해야 한다. 이 선택들에는 세계관, 윤리, 취향이 녹아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는 비로소 "당신만의 것"이 된다. AI가 쓴 텍스트가 아니라, 당신이 선택해 책임진 서사로 거듭나는 것이다.
AI와 함께 쓰는 시나리오는 결국 협업이다. 협업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똑똑한지가 아니라, 역할을 어떻게 분배하느냐다. 구조화, 변형, 패턴 탐색 같은 반복 가능한 일은 AI에게 넘기고, 방향 설정, 의미 부여, 감정의 미세 조율은 인간이 맡을 때 시너지가 발생한다. 처음에는 어색하더라도, "여기까지는 AI, 여기부터는 나"라는 경계를 실험해 보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작법 훈련이 된다.
이제 "AI를 쓰면 내 창의성이 사라지는 것 아닐까?"라는 걱정은 관점을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AI는 창의성을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라, 당신이 더 과감한 시도를 하도록 리스크를 낮추는 안전망에 가깝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수십 가지 버전을 만들어 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빨리 발견하게 된다. AI는 결과를 대신 만들어 주는 존재라기보다, 당신의 취향과 선택을 선명하게 떠오르게 해 주는 거울이다.
이 책의 여정은 기본적인 시나리오 구조를 이해하고, AI에게 말을 거는 법을 배우며, 실전 프로젝트로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해 보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다. 여기서 배운 것은 완성된 정답이 아니라, 계속 써 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 모음일 뿐이다. 도구는 손에 익을수록 가치가 올라간다. 자주 쓰고, 자주 고치고, 자주 실패하면서 비로소 "당신만의 사용법"이 만들어진다.
AI 시대에 좋은 작가가 된다는 것은, 남들보다 더 기가 막힌 문장을 즉석에서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지고, 더 정직한 선택을 내리며, 그 선택의 결과에 책임질 준비가 된 사람을 의미한다. AI는 당신의 손을 대신 움직일 수 있지만, 당신의 양심과 호기심까지 대신 움직일 수는 없다.
이 책을 덮는 지금, 아마도 당신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을 것이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당장 다음 이야기를 시작해 볼 것인가." 인공지능은 이 질문에 답을 줄 수 없다. 오직 당신만이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쌓여 당신의 필모그래피가 된다.
AI는 점점 더 많은 일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선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끝까지 남는 인간의 역할은, 잘 묻고, 끝까지 선택하는 일이다. 이야기를 시작할지 말지를 정하는 것도, 어떤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낼지를 고르는 것도, 언제나 당신의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