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는 부족하지 않다: 진짜 문제는 '시장'이다
경제 성장이 느려진 이유를 두고 "좋은 아이디어가 바닥났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죠.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아이디어는 여전히 넘치는데, 그 아이디어가 돈이 되는 과정, 다시 말해 '시장'에서 막히고 있다는 겁니다.
이 글에서는 왜 아이디어가 중요하게 여겨져 왔는지, 왜 '아이디어 고갈론'이 인기를 얻었는지, 그리고 새로운 연구들이 무엇을 뒤집어 놓았는지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가 실제로 어디에 집중해야 성장과 혁신을 되살릴 수 있는지도 정리해볼게요.
경제 성장을 떠받치는 진짜 엔진, 아이디어
경제학자들이 지난 100년 가까이 붙잡고 씨름해온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실질 GDP가 이렇게 오랫동안, 거의 일정한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전쟁, 금융위기, 대공황, 냉전, 정치적 격변이 수도 없이 있었는데, 미국의 1인당 실질 GDP는 장기적으로 연 2% 정도의 속도로 꽤 안정적으로 올라왔습니다.
이 정도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성장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자본과 노동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데 있었습니다.
공장을 짓고 기계를 더 산다고 해서 끝없이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자본에는 '체감수익'이 있어서,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더 투자해도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죠.
여기서 노벨상을 받은 폴 로머가 등장합니다.
로머는 공장에 들어가는 투입 요소를 노동, 자본만 보지 말고, 설계도와 공정, 아이디어까지 포함해서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같은 노동자와 같은 기계로도, 더 나은 설계도와 공정을 쓰면 생산량을 훨씬 늘릴 수 있다는 겁니다.
아이디어는 한 번 만들어지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쓸 수 있고, 복제 비용도 거의 없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바로 이 특성 덕분에 '규모에 따른 수익 체증', 즉 경제 전체가 두 배로 커질 때 생산은 두 배 이상 증가하는 현상이 가능해지고, 우리가 관찰하는 장기적인 지수 성장도 설명됩니다.
그래서 '아이디어 생산 능력'이 흔들리면 성장의 토대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생겼고, "혹시 아이디어가 정말 바닥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 힘을 얻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인기 있는 주장
2020년에 발표된 한 유명 논문이 논쟁의 불을 제대로 붙였습니다.
니컬러스 블룸과 동료 연구자들은 "아이디어를 찾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데이터들을 제시했습니다.
핵심 논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어떤 분야의 생산성 성장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는데, 그 분야에 투입되는 연구 인력과 R&D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면, 연구자 1인당 성과는 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곧, 새로운 아이디어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비용이 과거보다 훨씬 커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반도체의 무어의 법칙이 대표적인 사례로 등장합니다.
칩 집적도는 50년 넘게 꾸준히 비슷한 속도로 개선되었지만, 그 개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연구 인력은 18배나 늘어났습니다.
농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주요 작물의 단위 면적당 수확량은 오랫동안 일정한 속도로 개선되었지만, 그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들어간 연구 노력은 작물에 따라 6배에서 24배까지 늘어났습니다.
경제 전체를 통틀어 보면, R&D 투자는 1930년대 이후 약 20배 증가했지만, 생산성 성장률은 오히려 둔화되었습니다.
이 데이터를 보고 있다 보면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끌려갑니다.
"연구는 이렇게나 많이 하는데, 성과는 예전만 못하다. 아이디어가 정말 더 이상 잘 안 나온다."
이 시점에서 많은 경제학자와 정책 담당자, '진보 연구(progress studies)' 진영은 연구비 확대, 과학 제도 개혁, 연구 문화 개선 등을 우선 과제로 삼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가정이 깔려 있습니다.
"생산성 성장 = 아이디어 생산성 × 연구자 수"
다시 말해, 생산성 성장을 아이디어 하나로 거의 전부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문제는, 이 가정이 틀렸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특허 데이터로 본 '아이디어 생산성'의 반전
최근 연구들은 이 단순한 공식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생산성 성장만 보고 아이디어 생산성을 추정하는 게 과연 타당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방향을 완전히 바꾼 논문이 하나 등장합니다. 제목부터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힘들어진 건 성장이지, 아이디어가 아니다."
이 연구는 생산성 성장률에서 간접적으로 아이디어를 추정하는 대신, 아이디어 그 자체에 좀 더 가까운 데이터를 들여다봅니다.
바로 특허입니다.
특허는 최소한 두 가지 기준을 통과한 아이디어입니다. 새롭고, 경제적 가치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연구진은 기업의 R&D 지출과 특허 데이터를 연결해, "R&D 1달러당 몇 개의 특허가 나오고 있는가"를 시간에 따라 추적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일 정도로 블룸의 이야기와 다릅니다.
평균적인 기업의 특허/연구비 비율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오히려 약 50% 정도 상승했습니다.
적어도 특허 데이터를 기준으로 보면, "R&D를 하면 예전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많은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반문이 따라옵니다.
"요즘 특허는 다 사소한 것 아닌가? 진짜 '한 방'은 없어진 거 아니냐?"
이 의심에 답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특허 텍스트를 분석해 '돌파형 특허'만 따로 골라 봤습니다.
이 돌파형 특허는 이후 나온 수많은 특허들이 그 기술을 기반으로 삼는, 말 그대로 새로운 가지를 여는 기술들입니다.
엘리베이터, 전화기, 타자기, 냉동식품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예로 꼽힐 정도로, 이 측정법은 꽤 설득력 있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놀랍게도, R&D 1달러당 나오는 돌파형 특허의 수는 1977년 이후 세 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즉, 새로운 아이디어 중에서도 '질 좋은 한 방'의 비율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난 셈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연구비를 기준으로 봤을 때, 기업들은 예전보다 더 많은, 그리고 더 강력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경제 전체의 생산성 성장률은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 아이디어가 경제 성과로 연결되는 '중간 과정' 어딘가에 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왜 훌륭한 아이디어가 '돈'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이제 퍼즐이 뚜렷해집니다.
"좋은 아이디어는 여전히 잘 나오고, 어떤 기준으로 보든 오히려 더 좋아졌는데, 왜 성장률과 생산성은 떨어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생산성을 "기업들의 단순 평균"이 아닌 "시장 점유율로 가중한 평균"으로 봐야 합니다.
경제 전체의 생산성은 각 기업의 생산성과 그 기업이 차지하는 시장 비중의 조합입니다.
아무리 혁신적인 기업이 있어도, 시장에서 점유율을 거의 못 얻으면 전체 생산성에는 미치는 영향이 작습니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인 기업이 높은 점유율을 유지하면, 경제 전체의 생산성은 끌어내려집니다.
이때 중요한 개념이 '할당 효율성(allocative efficiency)'입니다.
더 생산적인 기업이 더 큰 시장 점유율을 가져가는 정도, 다시 말해 "잘하는 회사가 시장에서 이기는 정도"를 뜻합니다.
미국 기업 데이터를 장기간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개별 기업의 생산성 향상 속도는 과거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덜 생산적인 기업들이 더 생산적인 기업들보다 시장 점유율을 더 많이 가져가는 현상이 관찰됩니다.
즉, "기업들은 예전만큼 잘 개선되는데, 시장이 그 '잘하는 기업' 편을 덜 들어준다"는 구조입니다.
여기에 또 다른 연구가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뒤쳐진 기업이 선두 기업을 따라잡는 속도, 즉 후발주자의 '추격 속도'가 장기적으로 떨어졌다는 겁니다.
이 말은, 한 번 시장을 장악한 기업이 그 자리를 더 오래 유지하고, 더 생산적인 경쟁자가 나와도 빠르게 자리를 넘겨주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결국 전체 그림은 이렇습니다.
혁신은 계속되고, 좋은 아이디어도 많이 나오지만, 덜 생산적인 기존 강자가 시장 지위를 더 오래 유지하는 구조가 강해졌습니다.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이 시장에 진입해도, 충분한 규모로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죠.
이 현상이 왜 생겼는지는 아직 명확한 합의가 없습니다.
기존 기업의 시장 지배력이 강화되었을 수도 있고, 규제나 인허가 장벽이 높아졌을 수도 있고, 금융 시장이 혁신적인 기업을 잘 골라내고 지원하는 능력이 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건 하나입니다.
요즘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디어가 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아이디어가 시장에서 제 값을 못 받는 구조"라는 점입니다.
'아이디어 부족'이 아니라 '성장 번역 실패'의 시대
이 지점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완전히 바뀝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을까?"보다
"어떻게 하면 이미 만들어진 아이디어를 더 빨리, 더 크게 시장에서 활용할 수 있을까?"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만약 진짜로 아이디어가 고갈되고 있었다면, 과학 연구비를 늘리고, 연구 제도를 개혁하고, 논문 문화와 평가 시스템을 바꾸는 게 핵심 해법이었을 겁니다.
물론 이런 노력들도 여전히 의미 있지만, 최근 연구 결과들을 보면 '우선순위 1번'은 아닐 수 있습니다.
지금 드러난 문제는 연구실 이전, 즉 시장 쪽에 더 가깝습니다.
더 정확히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이 핵심 고민거리가 됩니다.
혁신적인 기업이 시장에 진입하고 성장하는 데 걸리는 보이지 않는 마찰은 무엇인지.
덜 효율적인 기존 기업들이 시장 지위를 유지하는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정책·규제·세제·경쟁법·금융 시스템이 혁신 기업의 성장을 얼마나 돕고, 혹은 방해하고 있는지.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내러티브는 인간 창의성 자체에 어떤 한계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반대로, '성장이 시장에서 막히고 있다'는 관점은 훨씬 실천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우리가 설계를 잘못한 부분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라는 질문 말이죠.
저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낮은 가지의 열매는 다 따버렸다"고 걱정할 때가 아니라, "이미 따놓은 열매를 시장까지 제대로 가져가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고요.
결국 성장을 되살리는 핵심은, 아이디어를 더 많이 짜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좋은 아이디어가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있을지 모릅니다.
시사점: 지금 필요한 건 '더 나은 시장 설계'
지금까지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는 여전히 잘 나오는데, 그 아이디어를 성장으로 바꾸는 시장의 번역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의 논의와 정책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더 많이 쏠릴 가능성이 큽니다.
연구비를 더 쓰자는 논쟁에서, 어떻게 하면 혁신 기업이 더 빨리 성장하고, 덜 생산적인 기업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나도록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으로의 전환입니다.
개인에게도 이 관점은 시사점이 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아이디어 내는 건 다 끝났어"라고 자조하기보다, "좋은 아이디어를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시장에 연결할 수 있는지"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창업가라면 기술 자체 못지않게 규제, 자본 조달, 시장 진입 전략을 설계하는 능력이 중요해지고,
정책 입안자라면 연구비 증액보다, 혁신 기업의 진입과 성장,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는 장벽이 무엇인지 먼저 점검해야 할 겁니다.
성장을 고민하는 학자들과 실무자들에게도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이제 진짜 승부처는 실험실이 아니라, 시장 구조와 제도 설계입니다.
앞으로의 '진보 연구(progress studies)'는 더 자주 경제학, 경쟁 정책, 기업 금융, 규제 설계와 만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아이디어가 부족한 시대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시대.
지금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바로 그 간극을 줄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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