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뎃사와 니시비스: 아시리아 동방 교회의 역사와 유적 탐방
시리아·동남부 터키(에데사, 니시비스) 성지 순례- 동방 아시리아 교회 역사 학술 탐방
Edessa and Nisibis: History and Relics of the Assyrian Church of the East
들어가는 말
우리는 단순한 순례객이 아닌, 기독교 역사의 가장 지적이고 역동적이었던 순간을 추적하는 연구자(Researcher)로서 이 땅을 밟으며 주님과 함께 걸어갔던 믿음의 선진들의 흔적을 기억하고 오늘의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된 세계에 동방 교회가 찬란했던 그 시대를 연구하며 개척해보려고 한다.
이 지역, 특히 오늘날 시리아와 터키 남동부, 그리고 고대 도시 에데사(Edessa, 현 샨르우르파)와 니시비스(Nisibis, 현 누사이빈)를 잇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광활한 지대는 기독교 역사, 특히 동방 기독교의 정체성 형성에서 가장 결정적인 산실이었다. 5세기 격렬했던 기독론 논쟁의 폭풍우 속에서, 이 지역은 로마 제국의 교의(특히 칼케돈 공의회 이후)와는 구별되는 동방 아시리아 교회(Church of the East, 네스토리안 교회)의 독자적인 신학적, 교회적 정체성이 확립되고 공고해진 핵심 무대였다.

두라 유로포스 회당 발췌:https://tinyurl.com/28pxrcl6
이번 역사 탐방 연구의 핵심 목표는 바로 이 정체성의 여정을 가능한 학문적 관점으로 추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학문의 이동과 성립: 기독교 초창기부터 번성했던 학문의 중심지인 에데사 학파(School of Edessa)는 489년 로마 제국(비잔티움) 황제 제논에 의해 폐쇄되면서, 그 학자와 지성들이 국경을 넘어 페르시아 제국령에 위치한 니시비스로 대거 이동하였다. 이 학문의 이동은 단순한 지리적 이전이 아니라, 동방 교회 신학의 정수를 담은 세계 최초의 니시비스 신학교(School of Nisibis)의 설립으로 이어져,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신학적 '모교(Alma Mater)'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지정학적 경계와 독자적 신학: 에데사와 니시비스가 위치한 이 지역은 수세기 동안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파르티아, 사산 왕조)이라는 거대 문명의 군사적, 문화적, 정치적 경계선이 되어 왔다. 이러한 지정학적 환경은 동방 아시리아 교회가 로마의 정치적·교회적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신학(Dyophysitism, 양성론)을 발전시키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이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신성/인성)의 완전한 구별과 연합을 강조하며, 서방 교회 및 기타 오리엔탈 정교회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갖는다. 여기서 우리는 동방 교회(Church of the East)는 오리엔탈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es) 및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를 수용한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와 신학적으로 구별되는 독자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습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방 교회는 기독론적 해석, 수용한 공의회의 범위, 그리고 지리적·정치적 환경의 차이로 인해 칼케돈 기독론을 수용한 동방 정교회와, 칼케돈 이전의 단성론적 경향을 띠는 오리엔탈 정교회와 명확히 구분되는 신학적 정체성을 확립했다.
교육 시스템과 선교의 발판: 니시비스 신학교를 중심으로 구축된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교육 시스템은 단순한 신학 교육을 넘어, 동방 아시리아 교회가 이후 중앙아시아, 인도, 심지어 중국(경교)에까지 선교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인적, 지적 자원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동방 교회는 주로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Sasanian Empire) 내, 특히 메소포타미아(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로마 제국 밖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황제나 공의회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덜 받으며 독자적인 신학적, 교회 행정적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로마 제국 국경선이던 유프라테스강 동쪽에 위치하여 "동방"(East)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조사 연구는 이 고대 학문 이동 경로를 따라가며, 국경의 역설 속에서 피어난 독자적인 신학(Dyophysitism)과 그것을 배태하고 확산시킨 교육 시스템의 흔적을 현장에서 깊이 있게 확인하고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다.
초기 교회 건축 및 유물
I. 에데사 (Şanlıurfa, 샨르우르파): 동방 기독교의 요람이자 분열의 현장
연구 주제: 에데사 학파(School of Edessa)의 흥망과 '페르시아 학파'의 추방
역사적 배경: 에데사는 시리아어(Syriac) 기독교의 발상지이다. 이곳은 초기에는 기독교 학문의 중심지였으나, 5세기 기독론 논쟁(에베소 공의회 이후)이 격화되면서, 안티오키아 학파(양성론)를 따르는 학자들과 알렉산드리아 학파(단성론/합성론)를 따르는 주교들(특히 라불라 Rabbula) 사이의 갈등이 폭발한 곳이다.
핵심 사건: AD 489년, 황제 제논(Zeno)은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온상'이라며 에데사 학파를 폐쇄하고 학자들을 추방한다. 이 사건은 동방 아시리아 교회가 로마 제국을 떠나 페르시아 제국으로 지적 중심을 완전히 옮기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현장 체크포인트] 에데사 지역에서 발견된 동방 아시리아 교회 관련 초기 교회 및 고고학 유물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전개해 나가려고 한다.
에데사(Edessa, 현재의 샨르우르파 Şanlıurfa): 동방 기독교의 요람과 그 유산
에데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사이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로,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이곳은 동방 기독교의 발상지 중 하나로 여겨지며, 시리아어 기독교 문화와 신학의 중심지 역활을 하였다. 동방 아시리아 교회(Church of the East), 즉 '네스토리우스파'로도 알려진 이 교회의 초기 역사와 관련하여 에데사 지역에서 발견된 교회 건축물과 고고학적 유물들은 그 역사적 중요성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에데사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건축:
에데사는 서기 3세기 초에 이미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왕국 중 하나인 오스로에네 왕국의 수도였다. 이로 인해 초기에 상당한 규모의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지하 교회나 가정 교회 형태를 넘어선 공공 예배 공간의 필요성을 낳았다.
유적 발굴: 비록 대규모의 초기 교회 건물 자체는 도시의 지속적인 파괴와 재건으로 인해 온전히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지만, 주변 지역의 발굴을 통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와 활동을 입증하는 건축적 잔해가 발견되었다. 이는 당시 기독교 예술과 건축 양식이 주변 로마 및 헬레니즘 문화와 어떻게 융합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비문과 명문:
이 지역에서 발견된 초기 기독교 묘지와 관련된 시리아어 비문과 묘비명은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신학적 용어, 교리, 그리고 지역 사회 구조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이 비문들은 종종 순교자나 중요한 성직자, 혹은 교회의 기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교회의 영향력과 사회적 지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침례당(Baptistery) 및 초기 예배 장소:
침례는 초기 기독교에서 핵심적인 의식이었다. 에데사 지역 및 주변 유적지에서 발견된 초기 침례당 터는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초기 기독교 신앙의 실천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침례 공간의 구조와 크기는 당시 공동체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도자기, 등잔, 그리고 일상 유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십자가 문양이나 기독교적 상징(예: 물고기, 비둘기 등)이 새겨진 도자기, 점토 등잔 등의 생활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종교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일반 신자들의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인 것이다.
에데사 신학 학교와 문헌적 유산
에데사는 단순한 종교 중심지를 넘어, 기독교 학문의 중심지인 에데사 신학 학교(School of Edessa)가 있던 곳이다. 비록 이는 직접적인 고고학 유물은 아니지만,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사상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유물의 해석에 중요한 문맥을 제공해준다.
이 학교에서 수많은 성서 번역(특히 시리아어 성경인 페쉬타), 신학 논문, 찬송가 등이 제작되었으며, 이는 훗날 동방 교회가 아시아 전역으로 선교를 확장하는 데 지적 토대가 되었다. 489년 학교가 폐쇄된 후, 그 학자들이 니시비스(Nisibis)로 이동하여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새로운 중심을 형성하였다.
이처럼 에데사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들은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초기 발전, 그들의 예배 방식, 사회적 역할, 그리고 고유한 신학 및 문화적 정체성을 복원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적 증거를 제공한다.
에데사 지역의 초기 기독교와 동방 교회 유물
에데사(현 샨르우르파)는 시리아어권 기독교의 발상지이자, 동방 아시리아 교회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학문의 중심지였다.
1.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정 교회 (두라 유로포스)
관련성: 에데사 지역(시리아 북부)과 연결되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두라 유로포스 (Dura-Europos)에서 AD 23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정 교회(House Church) 유적이 발견되었다.
유물의 의미: 이 가정 교회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공식화되기 이전, 소규모 공동체 형태로 존재하며 침례실(Baptistery) 등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어, 동방 교회의 초기 형태를 짐작하게 한다.
2. 에데사 성채와 비문 (오스르에네 왕국)
유물: 에데사 성채(현재 아브라함 연못 (Balıklıgöl)) 유적지.
유물의 의미: 에데사는 초기 기독교를 받아들인 오스르에네(Osroene) 왕국의 수도였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초기 비문 중에는 시리아어(Syriac)와 헬레니즘 문화가 혼재된 흔적이 나타난다. 특히 고대 시리아 문자인 Estrangela 서체는 이 지역 초기 기독교 문헌의 주류였으며, 에데사 학파의 성서 번역(페쉬타, Peshitta)과 학문 활동의 기초가 되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브라함 전설을 보지만, 연구자는 이곳이 오스르호에네(Osroene) 왕국의 심장부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브가르 왕조의 궁전이 있던 곳이자, 초기 기독교가 왕실의 보호 아래 성장했던 배경을 지리적으로 보여주는 의미있는 도시였음을 확인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3. 샨르우르파 고고학 박물관의 모자이크 및 석비
유물: 터키의 마르딘(Mardin) 동남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상메소포타미아(Upper Mesopotamia) 지역에 자리한 다라 고대 도시 박물관에 소장된 고대 모자이크, 석비, 묘비 등.
유물의 의미: 이 유물들은 에데사 사회가 헬레니즘, 로마, 페르시아 문화의 교차로였음을 증명한다. 특히 기독교적 도상이나 시리아어 비문이 포함된 유물들은 5세기 에데사 학파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적 환경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곳에 전시된 모자이크와 비석에서 초기 시리아어(Estrangela script) 비문의 해독을 조사해보면 에데사 사회가 헬레니즘과 오리엔트 문화가 혼재된 곳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왜 이곳에서 독특한 성서 해석학이 발달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유물들은 동방 아시리아 교회가 단순한 교파 분열의 결과가 아니라, 로마와 페르시아의 경계에서 독자적인 언어(시리아어)와 문화적 기반 위에서 성장했음을 증명하는 핵심적인 고고학적 증거인 것이다.
4. 울루 자미 (Ulu Cami - 구 성 스테판 교회 추정지):
현재의 대사원(Ulu Cami) 자리는 과거 성 스테판 교회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며, 에데사 학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도시의 중심부에서 신학 논쟁이 벌어졌을 당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시릴 주교(Cyrillians)와 안디옥 학파의 콘스탄티노블의 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 (Nestorians/Dyophysites) 사이의 물리적, 정치적 긴장감이 어떠했을지 도시 구조를 보며 유추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II. 니시비스 (Nusaybin, 누사이빈): 망명자들의 요새이자 지적 수도
연구 주제: 니시비스 학파(School of Nisibis)의 설립과 세계 최초의 대학 시스템
역사적 배경: 에데사에서 추방당한 나르사이(Narsai)와 학자들은 국경을 넘어 페르시아 영토인 니시비스로 망명하게 된다. 이곳의 주교 바르 사우마(Barsauma)의 보호 아래, 그들은 니시비스 학파를 재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신학적 척추가 되었으며, 이후 800년간 지속된 동방 교회의 지적 전성기를 열게 되는 모판의 역활을 담당하였다.
에데사 학파가 489년 로마 황제 제논에 의해 폐쇄되면서, 지도자 나르사이(Narsai)를 비롯한 학자들이 사산조 페르시아 영토인 니시비스로 망명하여 재건한 학문 공동체이다.
동방 교회의 탄생과 영향:
1. 정체성 확립: 니시비스 학파의 재건은 동방 아시리아 교회가 로마 제국의 신학적, 정치적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신학(Dyophysitism, 양성론)을 페르시아 영토 내에서 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 세계 최초의 대학: 이곳은 '니시비스 학칙'에 따라 운영되었으며, 조직적인 교과 과정(성경, 신학, 수사학)과 기숙사 제도를 갖춘 현대 대학 시스템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이 학파는 수백 년간 동방 교회의 모든 성직자와 선교사를 배출하는 지적 심장부 역활을 하였다.
신학 발전과 동방 확산:
1. 신학적 발전: 네스토리우스주의로 비판받았던 안티오키아 학파의 성경 해석학을 계승하고 심화시켜나갔다. 특히 문자적-역사적 해석을 중시하며 독자적인 주석 전통을 확립했다.
2. 실크로드 선교의 원천: 니시비스 학파에서 훈련받은 학자들과 선교사들이 페르시아 제국 전역과 더 나아가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경교)에까지 기독교를 전파하는 지적, 인적 원동력이 되었다. 즉, 니시비스는 동방 교회의 선교적 대확장을 가능하게 한 지적 수도 역활을 하였다.
니시비스 지역에서 발견된 동방 아시리아 교회 관련 초기 교회 및 고고학 유물에 대해 자세하고 심층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니시비스 (Nisibis/Nusaybin) 지역의 역사적 중요성
니시비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중요한 도시로,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국경 지대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기독교 역사에서 니시비스는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신학 및 학문의 중심지였던 니시비스 학당(School of Nisibis)으로 유명하다. 이 학당은 5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번성하며 기독교 신학, 철학, 과학 등을 가르쳤고, 동방 교회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 교회 및 고고학 유물
니시비스와 그 주변 지역에서 발굴되거나 보존된 유물들은 이 지역의 풍부한 기독교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1. 니시비스 학당 유적
위치 및 특징: 현재 터키의 누사이빈(Nusaybin) 지역에 위치하며, 비록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학당의 일부 잔해와 관련된 초기 건축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중요성: 이 유적은 동방 기독교 신학 교육의 산실이었던 학당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며, 이곳에서 페르시아어(시리아어 방언)로 신학 텍스트들이 번역되고 저술되었음을 시사한다. 학당의 도서관은 당대 동방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의 보고였다.
2. 성 야곱 교회 (St. Jacob's Church of Nisibis)
특징: 4세기 초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이 교회는 니시비스의 가장 중요한 기독교 유적 중 하나이다. 이 교회 지하에는 니시비스의 주교이자 위대한 신학자였던 성 야곱(St. Jacob of Nisibis)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건축 양식: 초기 비잔틴/시리아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며, 특히 침례당(Baptistery)과 지하 묘역의 구조는 당시 기독교 전례와 건축 기술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3. 초기 기독교 수도원 및 교회 터
니시비스 주변 지역(예: 투르 아브딘 고원)에는 동방 아시리아 교회 전통을 따르는 수많은 초기 수도원과 교회의 폐허가 발견된다.
발견 유물: 이 유적지들에서는 초기 기독교 상징(물고기, 알파와 오메가, 십자가)이 새겨진 석재 조각, 모자이크 바닥, 그리고 시리아어 명문이 새겨진 묘비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명문들은 당시 공동체의 구성, 성직자들의 이름, 그리고 신앙 생활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4. 시리아어( Syriac) 필사본
비록 현장에서 직접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니시비스 학당과 관련된 학문적 활동 덕분에 수많은 중요한 시리아어 필사본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
내용: 이 필사본들은 동방 교회의 성경 주석, 교부들의 저작(예: 에프렘 시리아인), 전례서, 그리고 신학 논문 등을 포함하며, 이는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정체성과 신학적 발전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이다.
[ 현장 체크포인트]
성 야곱 교회 (Mor Yakup Kilisesi) & 니시비스 학파 유적:
성 야곱 교회: 신앙과 학문의 거점이 된 4세기의 성소
성 야곱 교회(Mor Yakup Kilisesi)는 단순한 예배당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웅장한 건축물은 동방 아시리아 교회 역사의 가장 중요한 초기 인물 중 한 명인 성 야곱(St. Jacob of Nisibis, 4세기) 주교의 영원한 안식처를 품고 있다. 4세기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격렬한 경계에서, 성 야곱은 니시비스의 신앙을 굳건히 지켰던 인물이다. 여러분이 지하 묘역을 묵상하실 때, 이 교회가 단순한 순교의 장소가 아니라, 이후 니시비스 학파가 재건될 수 있는 정신적, 교회적 기반을 닦았던 신앙의 원천이었음을 기억하였으면 한다.
니시비스 학파 유적: 지성이 망명하여 세계를 비춘 곳
교회와 연결된 넓은 유적지는 에데사 학파가 489년 로마 제국의 핍박을 피해 망명하여 재건된 니시비스 학파(School of Nisibis)의 강의실과 기숙사 터로 추정된다. 이 폐허는 동방 아시리아 교회가 로마-비잔틴 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했던 현장인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니시비스 학칙'(Statutes of the School of Nisibis)의 정신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엄격한 금욕 생활을 요구하며, 성경 3년 과정을 필수로 하고 수사학과 신학을 체계적으로 교육했던 이 학칙은, 단순한 신학교를 넘어 현대 대학 시스템의 원형이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에데사에서 쫓겨난 지성들이 이 땅에서 피어올린 학문의 불꽃은 이후 페르시아 전역을 넘어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동북 아시아 심장부까지 뻗어 나간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선교적 대확장을 위한 지적, 인적 자원의 심장부가 되었다. 이 유적은 망명자가 어떻게 세계 문명의 스승이 될 수 있었는지를 증언하는 역설적인 승리의 현장이기도 하다.
국경선 (터키-시리아 국경):
우리는 지금 고대 로마와 페르시아 제국의 숨결이 맞닿았고, 현재는 터키와 시리아의 긴장된 국경이 가로지르는 누사이빈(Nisibis)과 그 맞은편 시리아의 카미실리(Qamishli)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이곳은 단순한 지리적 경계가 아닙니다. 이곳은 동방 아시리아 교회(The Church of the East)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경계인(Borderland)'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땅이다. 고대에 누사이빈은 로마 제국의 가장 동쪽 요새였으며, 페르시아와의 끊임없는 충돌 속에서도 위대한 신학 중심지, 즉 누사이빈 학교(School of Nisibis)를 꽃피웠다.
철조망 너머 카미실리를 바라보십시오. 이곳은 고대 문명 충돌의 현장이자, 동시에 기독교 지성이 번성했던 곳이다. 로마 제국의 핍박이 거세질 때마다, 누사이빈 학교의 학자들과 주교들은 이 국경을 넘어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영역으로 피신해야 했다. 지식이 담긴 두루마리와 신앙을 가슴에 품고, 그들은 강제된 '경계인'이 되었던 것이다.
동방 아시리아 교회는 바로 이 경계를 넘나들며 생존했고, 더 나아가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역동적인 선교 공동체로 변모했나갔다. 그들의 정체성은 '제국의 중심'이 아닌, '경계에 선 자'였으며, 이 경계인의 정신이 그들을 인도로, 중국(당), 발해(만주)로 이끌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곳에서 느끼는 국경의 긴장감은 1,700년 전 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혜를 보존하고자 국경을 넘어야 했던 학자들의 고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사이빈과 카미실리는 동방 교회가 어떻게 고난 속에서 가장 깊은 신학과 가장 넓은 선교를 꽃피웠는지 묵상하게 하는 살아있는 역사 현장인 것이다.
니시비스 지역에서 발견된 초기 교회 및 고고학 유물은 동방 아시리아 교회가 고대 세계의 중요한 지적, 종교적 중심지였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성 야곱 교회와 니시비스 학당 유적은 단순한 건축 잔해를 넘어, 동방 기독교의 학문과 신앙이 꽃피웠던 역사적 현장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III. 투르 압딘 (Tur Abdin, 마르딘 & 미디야트): 수도원 운동의 비교 연구
연구 주제: 이즐라 산(Mt. Izla)의 수도원 개혁과 동방 교회의 영성
역사적 배경: 니시비스 인근의 이즐라 산(Mount Izla)은 '동방의 아토스 산'이라 불린다. 이곳의 대수도원(The Great Monastery)은 아브라함 카쉬카르(Abraham of Kashkar)에 의해 설립되어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수도원 제도를 개혁한 곳이다. 비록 현재 투르 압딘 지역은 대부분 시리아 정교회(서방 시리아 전통, 단성론)가 점유하고 있지만, 초기 동방 교회의 수도원 흔적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이다.

[현장 체크포인트]
모르 아브라함 수도원 (Mor Augin Monastery) 터:
이즐라 산 비탈에 위치한 이 고대 수도원 터는 동방 아시리아 교회 수도원 운동의 시발점 중 하나이다. 접근이 어렵지만, 멀리서라도 그 위치를 확인하며 고립된 환경에서 피어난 영성을 묵상해봄직하다.
데이룰 자파란 & 모르 가브리엘 수도원 (시리아 정교회):
비록 교파는 다르지만, 시리아어 전례(Liturgy)와 고대 건축 양식은 공유하고 있다. 이곳에서 시리아어 챈트(Chant)를 들으며, 니시비스 학파 시절 나르사이가 작곡한 찬송(Memre)의 운율을 유추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방 시리아 전례 (East Syriac Liturgy)의 공유와 계승
동방 시리아 정교회(시리아 정교회, 서방 시리아 전통)와 동방 아시리아 교회(동방 시리아 전통)는 신학적으로 분리되었지만, 공통의 시리아어(Syriac) 문화와 초기 기독교 유산을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특히 전례(Liturgy) 면에서 다음과 같은 공유 지점과 계승의 역사가 있다.

1. 아다이와 마리 예식 (Liturgy of Addai and Mari): 핵심 공유 유산
가장 오래된 예식: 이 예식은 현존하는 기독교 성찬례(Eucharist) 중 가장 오래된 형태로 추정되며, 동방 교회의 두 사도인 아다이(Addai)와 마리(Mari)에게 기원한다.
공유: 이 예식의 초기 형태와 정신은 두 교파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주류 전례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시리아어 전례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유산이다.
2. 시리아어 사용과 전례 음악 (Chant)
언어: 두 교파 (동방 시리안 전통, 서방 시리안 전통) 모두 예배에서 시리아어(주로 고대 시리아어인 Estrangela 서체와 관련 언어)를 사용한다. 이는 라틴어, 그리스어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동방 기독교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음악: 전례에서 사용되는 챈트(Chant, 찬송) 양식과 멜로디 구조에 공통된 뿌리가 있다. 니시비스 학파의 지도자였던 나르사이(Narsai)가 작곡한 운율 찬송(Memre) 등은 동방 기독교 음악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며, 이는 이후 시리아 정교회와 동방 아시리아 교회 전례 음악 모두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3. 계승의 차이 (분열 이후)
동방 아시리아 교회: 아다이와 마리 예식 외에도 테오도르(Theodore) 및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예식을 사용하며,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석적-신학적 전통을 전례에 강하게 반영하였다.
시리아 정교회: 서방 시리아의 전통을 따라 성 야곱 예식(Liturgy of St. James)을 주로 사용하며,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단성론(혹은 합성론) 신학을 반영하였다.
결론적으로, 두 교파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 동부와 페르시아 경계에서 확산되던 초기 시리아 기독교의 전례적 유산을 공유하고 있으나, 5세기 신학 분열 이후 각자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전례를 발전시키고 특화했나가게 된다.
IV. 시리아 (현재 접근 제한적, 문헌 연구와의 연결)
연구 주제: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흔적과 동방으로의 확장로
현재 시리아 내전 상황으로 인해 직접 방문은 매우 위험하거나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구자로서 다음 장소들의 역사적 좌표는 반드시 인지해야 할 것이다.
두라 유로포스 (Dura-Europos):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정 교회(House Church, AD 230년경)가 발견된 곳. 유프라테스 강변의 이 도시는 기독교가 제도화되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라 유로포스 교회의 유적 발췌: https://tinyurl.com/2caq64fq
알레포 (Aleppo) & 하사카 (Hasakah):
현대 시리아 내에서 동방 아시리아 교회 및 시리아 정교회 공동체가 잔존해 있는 지역. 고난 속에서도 이어지는 '남은 자'들의 신앙을 증언해준다.
초기 동방 교회의 요람: 고대 시리아 주요 도시에서의 활동 심층 분석
초기 동방 교회, 특히 동방 아시리아 교회(Church of the East)의 활동은 지정학적으로 로마와 페르시아 제국이라는 두 거대 세력의 경계에 놓여있던 고대 시리아 북부와 메소포타미아 서부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지역은 단순한 선교지가 아니라, 시리아어(Syriac)를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기독교 문화와 신학이 탄생하고 세계로 확산되는 문명의 요람이었다.
다음은 이 지역 주요 도시들이 동방 교회의 정체성 확립과 확산에 기여한 역할에 대한 상세 내용이다.
1. 에데사 (Edessa): 시리아 기독교의 발상지와 지적 심장부
| 구분 | 내용 상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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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및 의미 | 에데사는 시리아 지역 기독교 복음화의 중심지였으며, 시리아어 성경 번역본인 페쉬타(Peshitta)가 완성된 곳이자, 성서 해석과 신학 연구의 본산인 에데사 학파가 번성했던 도시이다. 이곳의 신학적 전통은 훗날 동방 교회의 기반이 되는 안티오키아 학파(양성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초기에는 토마스 사도의 전설과 아브가르 왕의 이야기(가상의 기독교 개종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 문화의 정통성을 구축하려 했다. |
| 동방 교회와의 관련성 | 에데사는 동방 교회의 신학적 뿌리를 제공했지만, 5세기 후반 신학적 논쟁(네스토리우스 논쟁)으로 인해 로마 제국 황제 제논에 의해 489년 학파가 강제로 폐쇄되게 된다. 이로 인해 수많은 학자와 지도자들이 페르시아 영토인 니시비스로 대거 이동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동방 아시리아 교회가 로마-비잔틴 교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교단으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2. 니시비스 (Nisibis): 지적 수도와 세계 선교의 전진 기지
| 구분 | 내용 상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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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및 의미 | 니시비스는 에데사 학파가 망명하여 새롭게 세운 학문 공동체의 중심지이다. 이곳에서 재건된 니시비스 학파는 조직적인 교육 과정과 학위를 제공하며 세계 최초의 대학 시스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신학뿐만 아니라 의학, 철학, 천문학 등 광범위한 학문을 연구했으며, 특히 바르 사우마(Bar Sauma)와 니시비스의 나르사이(Narsai) 같은 거장들이 배출되었다. |
| 동방 교회와의 관련성 | 니시비스는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지적이고 행정적인 수도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학자와 선교사들은 페르시아 제국 전체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인도(말라바르 기독교), 그리고 당나라 시대의 중국(경교)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의 인적·신학적 원천이 되었다. 이곳의 신학은 동방 교회의 정통 신앙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
3. 두라 유로포스 (Dura-Europos): 초기 공동체의 고고학적 증거
| 구분 | 내용 상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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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및 의미 |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이 도시는 군사 요충지였다. 이곳에서 발굴된 AD 230년경의 가정 교회(House Church) 유적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식 인정되기 한 세기 전에 이미 조직적인 예배와 세례(침례) 의식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실물 증거이다. 교회 건물 외에도 유대교 회당과 미트라교 신전이 함께 발견되어, 초기 기독교가 다양한 종교 환경 속에서 성장했음을 시사한다. |
| 동방 교회와의 관련성 | 두라 유로포스의 발견은 기독교가 지중해 연안을 넘어 페르시아로 향하는 동방 경로를 따라 초기부터 확산되었음을 증명해준다. 이는 동방 아시리아 교회가 사도 시대부터 독자적인 흐름을 형성하며 발전해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근거를 제공해준다 |
4. 하란 (Harran): 이교 문화와의 대면 및 복음 전파 현장
| 내용 상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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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및 의미 | 에데사와 니시비스 사이에 위치한 하란은 구약성경에서 가나안 정착 이전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알려져 상징적 중요성을 가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의 신(Sin)을 숭배하는 사비 신앙(Sabianism)의 강력한 이교 중심지로 명성이 높았다. 이곳은 중세 이슬람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교 신앙이 유지될 정도로 기독교 전파에 큰 저항이 있었던 지역이다. |
| 동방 교회와의 관련성 | 하란은 동방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이교 문화 및 종교와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문화적·종교적 투쟁을 벌인 주요 현장 중 하나였다. 기독교는 이곳에서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이는 동방 교회가 지닌 선교적 역동성을 잘 보여준다. |
🎓 심화 연구 제안 (Fieldwork Note)
비문 연구 (Epigraphy): 샨르우르파와 마르딘 박물관에 있는 비석에서 Estrangela(고대 시리아 문자)와 Serta(서방 시리아 문자), Madnhaya(동방 시리아 문자)의 서체 변화를 비교해 보면서 상호 공유했던 전통과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교회의 분열이 서체에 미친 영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전례 비교: 기회가 된다면 마르딘의 시리아 정교회(Jacobite) 전례와, 이라크/이란 지역의 동방 아시리아 교회(Nestorian) 전례 영상을 비교하며 '아다이와 마리 예식(Liturgy of Addai and Mari)'의 흔적을 찾아보며 동방과 서방 전례의 차이점을 연구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학파의 이동 경로 답사: 에데사에서 니시비스까지는 차로 약 2시간 30분 거리이다.
학파의 이동 경로 답사: 에데사에서 니시비스까지의 여정
에데사 (Edessa)와 니시비스 (Nisibis) 이동 경로 개요: 시리아와 터키 동남부 지역의 고대 기독교 역사, 특히 동방 아시리아 교회의 학문적 전통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한 필수 답사 코스이다. 에데사(現 샨르우르파, Şanlıurfa)에서 니시비스(現 누사이빈, Nusaybin)까지는 차량으로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되는 짧지 않은 거리이다. 이 짧지 않은 육로 이동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을 넘어, 5세기 후반 나르사이(Narsai)와 그의 제자들이 에데사 학파에서 추방된 후 걸어야 했던 고난의 길을 재현하는 의미를 가진다.
역사적 배경 및 이동의 의미: 489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제논(Zeno)은 에데사 학파가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학교를 폐쇄하였다. 당시 학파의 학장이었던 나르사이와 수많은 교사 및 학생들이 에데사를 떠나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영역이었던 니시비스로 피신했다. 이 '학파의 이동'은 동방 교회의 학문적 중심이 로마 제국에서 페르시아 제국으로 옮겨가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 길을 따라 이동하며, 비잔틴과 페르시아라는 두 제국의 경계선이 만들어낸 지리적 단절과, 신학적·학문적 유산이 계승되고 발전된 문화적·신앙적 연속성을 온몸으로 체감해 보자.
학문적 순례의 주요 초점:
지리적 체감: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의 지형과 기후를 직접 경험하며, 고대 사람들이 겪었을 이동의 어려움과 그들이 만났던 환경을 이해한다.
역사적 상상: 나르사이와 제자들이 이 길을 걸으며 품었을 종교적 신념, 학문 수호의 의지, 그리고 새로운 보금자리에 대한 기대를 상상해 본다.
경계선의 이해: 현재의 국경(터키-시리아)과 고대의 제국 경계(비잔틴-페르시아)를 비교하며, 종교적 박해가 어떻게 학문의 지형도를 바꿨는지 성찰한다.
이 여정은 동방 교회의 위대한 학문 전통이 어떻게 박해 속에서 살아남아 니시비스 학파라는 새로운 꽃을 피웠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학문적 순례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