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노 히데아키의 창작법: 에반게리온으로 보는 창작과 재창조의 방식

개요
안노 히데아키의 창작법은 거대한 설정이나 종교적 상징보다도, 자신의 내면과 현실을 어떻게 허구 속에 이식하느냐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애니메이션이 "전부 거짓말과 환상"이라는 점을 전제로, 그 안에 가능한 한 많은 '현실감'을 주입함으로써 에반게리온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1 이 현실감은 특히 인물의 심리와 관계 묘사에서 드러나며, 주인공 신지를 포함한 모든 인물에 제작진 각자의 성격과 경험이 녹아 있다고 밝힌다.1

또한 안노의 창작법은 한 번 만든 이야기를 끝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기술과 상황, 심리 상태에 따라 여러 번 다시 쓰고 재구성하는 방식이 특징적이다. TV 시리즈, 극장판, 리빌드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세계와 인물을 수십 년에 걸쳐 반복해서 다루며, 당시 자신이 가진 기술과 정신 상태에 맞는 다른 형태의 결말과 표현을 시도해 왔다.12 이런 과정에서 그는 팬들의 반응과 시간·예산의 압박, 제작 현장의 긴장감까지 작품의 일부로 포함시키며, 창작과 현실, 관객이 서로 뒤섞이는 독특한 창작 방식을 보여 준다.2
작업 선택 기준과 동기
안노는 다음에 어떤 작품을 할지 선택할 때, "자신에게 가장 잘 맞고, 지금 가장 흥미로운 오락이 무엇인지"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말한다.1 즉,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업적 제안이나 유행을 따라가기보다는, 현재의 자신에게 진짜로 흥미로운 소재와 장르를 우선시한다는 의미다. 에반게리온의 리빌드 시리즈 역시, 단순히 과거의 히트작을 반복 소비하기보다는 새로운 기술과 표현 수단을 이용해 자신이 처음 구상했던 이야기를 다시 시도해 보고 싶다는 욕구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1
그는 에반게리온 TV판이 끝난 뒤에도 여러 버전의 결말을 만들고, 결국 4부작 리빌드 극장판까지 이어가며 같은 세계를 끊임없이 재검토했다. 이는 하나의 작품을 완결된 상품이라기보다, 자신의 변화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오래 지속되는 실험"으로 보는 태도에 가깝다.12 이처럼 안노의 창작 동기는 자신의 관심과 한계, 당시 가능한 표현 수단을 시험해 보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허구 속 현실감: 인물과 경험의 반영
안노는 애니메이션이 본질적으로 허구라는 사실에서 출발해, 그 속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였다고 밝힌다.1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신지는 흔히 '특이한' 캐릭터로 받아들여지지만, 안노는 그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반영한 결과이며, 현실에서 느끼는 불안과 소외를 솔직하게 투영한 인물이라고 설명한다.1 즉, 영웅적인 행동보다는 우유부단함과 회피, 자기혐오 같은 감정이 전면에 드러나는 이유는, 그것이 작가가 실제로 겪은 감정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신지만이 아니라 모든 캐릭터에 제작진의 성격이 나뉘어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안노는 애니메이션이 집단 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각 인물의 성격에는 자신뿐 아니라 여러 스태프의 인격이 섞여 있다고 말한다.1 이 때문에 에반게리온의 인물들은 전형적인 장르 캐릭터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고민과 욕망이 뒤섞인 복합적인 존재가 된다. 이런 방식은 결과적으로 캐릭터들에게 비현실적인 설정과는 다른 방향의 생동감과 현실감을 부여한다.
반복과 재구성: 끝나지 않는 이야기 다루기
에반게리온은 초기 TV판부터 극장판, 리빌드 시리즈까지 여러 번 다른 방식으로 결말을 맞이한 독특한 사례다. TV판의 마지막은 제작진과 시청자 모두에게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았고, 안노 역시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고 한다.1 그래서 그는 후반부 에피소드를 재편집해 다시 내고, 이를 기반으로 한 극장판 「Death and Rebirth」, 그리고 전혀 다른 결말을 제시한 「End of Evangelion」을 연이어 발표했다.12 이후에는 아예 새로운 4부작 리빌드 영화 시리즈를 계획해, 처음 영화는 원작을 비교적 충실히 따라가되, 두 번째 이후부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와 방향으로 전개하도록 설계했다.1
안노는 리빌드 기획 당시부터 "첫 번째 영화는 TV판과 비슷하게, 두 번째부터 점점 달라지며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완전히 다르게 만들 생각이었다"고 설명한다.1 이 말은, 그가 과거의 성공을 복제할 생각이 없었고, 같은 세계관을 이용해 새로운 질문과 결말을 탐색하려 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25년 전에는 사용할 수 없던 3D CG 기술과 연출 방법 덕분에, 이제서야 자신이 원했던 파괴와 비주얼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1 이렇게 기술과 자신의 심리 상태, 관객의 반응에 맞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재구성하는 태도는 안노 창작법의 큰 특징이다.
기술과 시대에 맞춘 표현의 진화
안노는 영화 제작이 "당대의 기술에 크게 의존"한다고 말하며,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따라 전혀 새로운 비주얼을 만들 수 있게 된다고 본다.1 에반게리온 TV판이 방영될 당시에도 3D CG는 존재했지만, 지금처럼 고급스럽게 활용하기에는 기술 수준이 충분치 않았다고 회상한다.1 리빌드 시리즈에서는 진화한 3D 기술과 디지털 합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천사들의 파괴력과 전투 장면을 훨씬 더 압도적으로 그려냈다. 예를 들어 라미엘이 탱크와 미사일을 날려 버리는 장면은 TV판에서는 평범한 폭발이었지만, 리빌드에서는 인간의 무기가 순식간에 하얀 슬래그로 녹아내리는 광경으로 표현된다.1
이처럼 안노에게 기술은 단순한 보조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감정을 얼마나 솔직하게 재현할 수 있는지와 직결되는 요소다. 그가 이후 「신 고지라」나 「신 가면라이더」 같은 실사 작품으로 활동 영역을 넓힌 것도, 특정 매체에 머무르기보다는 그때그때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에 가장 적합한 기술과 형식을 선택하겠다는 태도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1 즉, 안노의 창작법은 "새로운 기술 → 새로운 표현 → 같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순환을 통해 계속 진화해 왔다.
제작 환경과 긴장: '역경 속 예술'의 태도
에반게리온 TV 시리즈의 공동 연출가인 츠루마키 카즈야는, 이 작품이 특히 뛰어났던 이유 중 하나로 "역경 속에서 탄생한 예술"이라는 점을 든다.2 그는 시간과 예산의 제약이 심해 제작 일정이 무너지고, 작화 퀄리티가 눈에 띄게 떨어진 부분도 있었다고 솔직히 인정한다.2 그럼에도 그는 이런 극한의 일정과 피로가 오히려 스태프들의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올려, 정신은 "칼날처럼 날카롭지만 육체는 완전히 지친" 상태였다고 표현한다.2 이 긴장감이 곧 작품의 분위기와 실험적인 연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제작 시스템이 무너져 내릴 때 "이 정도 퀄리티라면 아예 그만두는 게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지만, 츠루마키는 "우리의 붕괴 과정까지 포함해 전부 보여 주자"는 쪽을 지지했다는 대목이다.2 완성도가 충분치 않은 작품이라도, 나중에 돌아보면 "술 취한 상태에서 만든 것 같아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2 이는 작품 내부에 제작의 실패와 좌절, 한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겠다는 태도이며, 결과적으로 에반게리온 후반부가 종종 "작품이 스스로 무너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객 반응을 흡수하는 '라이브 공연'식 제작
츠루마키는 TV 시리즈 제작 경험을 돌아보며, TV 애니메이션만이 가진 장점으로 "제작 중에도 관객의 반응을 즉시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2 새로운 에피소드가 방영될 때마다 "오늘 화는 반응이 좋았다"거나 "이번에는 혹평이었다"는 식의 반응을 바로 접하고, 이를 곧바로 다음 에피소드 제작에 반영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2 그는 이를 "라이브 공연"에 비유하면서, 에반게리온이 그런 의미에서 관객과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는 작품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안노는 팬들의 극단적인 비난 메일이나, 서브컬처 잡지에서 과도하게 추켜세우거나 왜곡된 해석을 내놓는 기사들을 직접 확인해야 했고,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2 하지만 츠루마키는 이러한 오해와 과잉 해석, 공격적인 반응까지 포함해서 "에반게리온이 다루고자 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라고 본다.2 즉, 안노의 창작은 작품 외부에서 발생하는 '작품에 대한 반응'까지도 서사의 일부처럼 다룬 셈이다. 이는 이후 「End of Evangelion」에서 관객을 직접 겨냥한 듯한 장면과 메시지가 등장하는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대사와 연출: 메시지 전달 방식의 변화
에반게리온에는 "우리는 좋아하는 것들만으로 인생을 엮어갈 수는 없다" 같은 인상적인 대사들이 등장한다.2 츠루마키는 이런 대사가 사실은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아주 직접적인 메시지였지만, 실제로는 많은 시청자가 대사를 귀로만 듣고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2 자신 역시 TV 애니를 볼 때 대사를 '듣기만' 하고 곱씹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고 인정하면서, 안노가 이러한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 결과 안노는 점점 대사 속에 은근히 메시지를 숨기기보다는, 보다 직접적으로 감정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을 많이 쓰게 되었다고 한다.2 이는 후반부로 갈수록 인물의 내면 독백과 심리 묘사, 실험적인 이미지와 편집이 강화되고, 서사적 인과보다 감정과 의식의 흐름이 전면에 나서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다시 말해 안노의 창작법은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녹이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감정과 메시지 자체를 화면에 전면 배치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간 것이다.
자전성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중심 테마
에반게리온은 흔히 "안노의 정신 세계를 반영한 작품"으로 불린다. 츠루마키 역시 이 작품이 본질적으로 안노의 내면 풍경을 많이 담고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신지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동기화하지는 못했다고 말한다.2 다만 시나리오 회의에서 신지가 지나치게 영웅적으로 행동하려 할 때 "안노는 그렇게까지 영웅적이지 않다"고 지적하며, 신지의 행동을 안노의 실제 성격에 맞춰 잡아 가려고 했다고 회상한다.2 이는 주인공의 행동과 결정을 실제 감독의 성격과 경험에 맞추려는 의도적인 조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에반게리온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커뮤니케이션의 이야기"였다고 강조한다.2 초기 2화에서부터 미사토와 신지가 서로 거리를 두고 대화하는 장면, 문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 보지 않는 장면, 아침 식사 장면에서 서로를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장면 등은 모두 "가까워지고 싶지만 어색하고, 상대의 진심을 알 수 없는 거리감"을 표현하기 위한 연출이었다.2 신지와 레이, 신지와 아버지 간의 어색한 거리감 역시 같은 테마의 변주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에반게리온의 창작법은, 거대한 종교적 상징과 로봇 액션을 외피로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전적인 질문을 중심에 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안노 창작법의 시사점
안노 히데아키의 창작법은 몇 가지 지점에서 일반적인 창작자에게도 참고할 만한 시사점을 준다. 첫째, 그는 허구를 만들면서도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솔직하게 투영해 인물과 상황에 현실감을 부여했다.12 이는 장르와 매체를 불문하고, 창작자가 스스로 겪은 모순과 불안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때 작품이 더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둘째, 한 번 완성된 작품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시간이 지나 자신의 생각과 기술, 환경이 바뀔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어 재구성하는 태도는, 창작을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대화"로 바라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1
셋째, 그는 제작 환경의 실패와 긴장, 팬들의 오해와 비난까지도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창작과 현실의 경계를 흐린다.2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한계와 붕괴 과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역시 하나의 정직한 표현 방식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에반게리온 전체를 관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이라는 테마는, 화려한 설정과 상징을 넘어 결국 인물 사이의 거리와 이해, 그리고 자신과 타인 사이의 관계를 질문하는 것이야말로, 안노 창작법의 핵심임을 시사한다.2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거대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 인간이 세상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개인적인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
1'Evangelion' Creator Hideaki Anno Offers Insights into Its Audacious Conclusion - https://www.animationmagazine.net/2022/11/evangelion-creator-hideaki-anno-offers-insights-into-its-audacious-conclusion/
22013 April - Looping Wor(l)d (Tsurumaki interview commentary) - https://loopingworld.com/201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