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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디즈니의 일생과 창의력·성공 비결

wis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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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개요

월트 디즈니는 단순히 미키 마우스를 만든 만화가가 아니라, '이야기 기반 경험 산업'을 처음으로 제대로 사업화한 창업자이자 프로듀서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수차례의 실패, 파산과 배신, 건강 악화까지 겪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와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내며 회사를 키워 갔습니다. 한 사람이 상상한 캐릭터와 이야기로 시작한 회사가, 이후 영화·테마파크·미디어·라이선스를 아우르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스타트업 창업자에게 매우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이 글은 월트 디즈니의 생애를 시간 순서대로 간략히 살펴본 뒤, 그가 보여준 창의력의 패턴과 사업적 성공의 비결을 정리합니다. 특히 "창의적 비전 + 집요한 실행 + 시스템화"라는 관점에서, 오늘날 스타트업 비즈니스에 적용할 수 있는 인사이트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합니다. 그의 삶을 전기처럼 감상적으로 바라보기보다, 한 명의 창업자로서 어떤 선택과 사고법을 가졌는지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어린 시절과 형성기: 결핍이 만든 상상력

월트 디즈니는 1901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대체로 가난하고 불안정한 환경에서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여러 사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으며,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녔고 경제적 여유는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월트는 만화 그리기와 상상 속 이야기 만들기에 몰입하며, 현실에서 얻기 힘든 만족을 그림과 이야기를 통해 얻었습니다.

그는 신문 배달 같은 고된 일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고, 학교 수업보다 미술과 극 예술에 더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화려한 예술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쥐어짜듯 시간을 확보하고 스스로 실력을 키웠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없는 것 안에서 해내는 법"과 "작게 만들어 시험해 보는 법"을 몸으로 익혔습니다.

청소년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나이를 속이고 적십자 운전병으로 유럽에 갔는데, 이 경험은 그에게 세상을 넓게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낯선 환경과 여러 나라 사람들을 접하며, 자신이 가진 상상과 이야기를 더 넓은 세계로 가져가고 싶다는 야망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창업자 관점에서 보면, 이 시기가 "로컬에서 글로벌로 사고가 확장된 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 창업과 첫 실패: 러프-아이웍스와 래플-디즈니 스튜디오

전쟁 후 미국으로 돌아온 디즈니는 광고 회사와 필름 제작사 등에서 일하며 애니메이션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는 곧 "남의 회사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보다, 내 이름으로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고, 동료들과 함께 캔자스시티에서 '래플-디즈니 스튜디오(Laugh-O-Gram Films)'를 창업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단순 아티스트가 아니라, 수익 구조와 인건비, 계약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사업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초기에는 지역 극장용 짧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며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지만, 견고한 비즈니스 모델과 자금 관리 능력은 부족했습니다. 작품은 인기가 있었지만, 수금과 계약 구조가 허술해 돈이 남지 않았고, 결국 회사는 파산하게 됩니다. 디즈니는 이 첫 실패로 "좋은 콘텐츠만으로는 회사를 지킬 수 없고, 사업의 숫자를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파산 후 그는 사실상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더 큰 시장을 찾아 로스앤젤레스로 향합니다. 이 시점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는 실패를 개인 재능의 부족으로 보기보다, "시장 선택과 계약 구조, 자금 운영을 잘못한 결과"로 해석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스타트업 창업자에게도 첫 실패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이후 궤도를 크게 좌우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장면입니다.

헐리우드로의 도전과 오스왈드 사건: 배신에서 태어난 미키 마우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디즈니는 당시 아직 관심이 크지 않았던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혼합한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를 만들며 배급 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했고, 점차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형 로이 디즈니와 함께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조금씩 안정된 제작 환경을 갖추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디즈니는 '오스왈드 더 럭키 래빗(Oswald the Lucky Rabbit)'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지만, 배급사인 유니버설과 계약을 둘러싸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캐릭터의 권리가 배급사에 있었기 때문에, 유니버설은 디즈니를 배제하고 오스왈드를 계속 활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스태프 대부분을 데려가 버립니다. 디즈니 입장에서는 대표 IP와 인력을 한 번에 잃는, 거의 회사 붕괴에 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위기에서 미키 마우스가 탄생합니다. 뉴욕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는 새로운 캐릭터를 구상했고, 그렇게 탄생한 미키 마우스는 이후 세계적인 상징이 됩니다. 오스왈드 사건은 "IP의 중요성"과 "지적 재산권을 스스로 소유하는 것의 가치"를 몸으로 깨닫게 해준 계기였습니다. 스타트업 입장에서 보면, 핵심 기술·브랜드·데이터에 대한 통제권을 벤더나 파트너에 넘기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미키 마우스와 사운드 혁신: 타이밍과 기술의 결합

1920년대 후반, 영화 산업에는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라는 큰 기술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많은 제작사들이 이 변화에 망설이거나 뒤늦게 대응했지만,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에 사운드를 본격적으로 결합하는 데 과감히 투자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1928년의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로, 이 작품은 본격적으로 음향이 동기화된 최초의 인기 애니메이션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때 디즈니가 보여준 강점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이야기 경험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사운드는 단지 배경음이 아니라, 미키의 움직임과 감정을 강조하고, 관객의 몰입도를 크게 끌어올렸습니다. 기술을 먼저 보여 주고 나중에 의미를 찾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야기를 더 잘 들려주기 위해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스타트업의 관점에서 보면, 디즈니는 '기술 드리븐'이 아니라 '경험 드리븐'이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쫓는 대신, 고객이 느끼는 경험과 감정의 변화를 중심에 두고 그에 맞는 기술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AI, VR, 블록체인 같은 화두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이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지?"보다는 "고객 경험을 어떻게 바꾸고 싶은가, 그에 적합한 기술이 무엇인가?"를 먼저 묻는 태도입니다.

장편 애니메이션의 도전: '백설공주'와 모두의 냉소

1930년대 중반, 디즈니는 당시로서는 거의 미친 도전으로 여겨지던 '풀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기획합니다. 그것이 바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입니다. 당시 업계와 언론은 이 프로젝트를 "디즈니의 바보 같은 꿈"이라고 비웃었고, 심지어 '디즈니의 광기'라는 표현까지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은 짧고 가벼운 코미디 쇼로 여겨졌지, 한 편의 극장용 장편으로 관객을 붙잡을 수 있는 장르로는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작 과정은 비즈니스적으로도 매우 위험했습니다.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갔고, 디즈니는 회사의 미래를 통째로 걸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애니메이션을 단지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시대는 끝날 것이며, 진짜 감동과 서사를 담은 영화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였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캐릭터의 감정 표현과 연기를 강화하는 교육 시스템을 만들고, 스토리 팀과 작화 팀을 분리해 협업 구조를 정교화하는 등 조직 차원의 혁신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937년에 공개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디즈니의 광기"는 "디즈니의 혁신"으로 평가가 뒤바뀝니다. 이 성공으로 디즈니 스튜디오는 자금을 확보해 이후 '피노키오', '판타지아', '덤보', '밤비' 등 고전 애니메이션의 시대를 열 수 있었습니다. 창업자 입장에서 보면, 이 사례는 "시장과 업계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비전을 접지 않는 태도"와 "거대한 베팅을 할 때 내부 시스템을 같이 끌어올려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전쟁과 침체, 그리고 재도약: 유연한 포트폴리오 전환

2차 세계대전은 디즈니에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유럽 시장이 붕괴하면서 해외 수익이 급감했고, 많은 인력이 군에 징집되거나 전쟁 프로젝트에 동원되었습니다. 이 시기 디즈니는 선전용 단편, 교육용 애니메이션 등 정부와 군을 위한 작품 의뢰를 수행하며 회사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이는 장기적인 비전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었지만, 현실적으로 회사와 인력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상황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파업과 내부 갈등, 경영난이 겹치면서 디즈니 스튜디오는 흔들렸고, 애니메이션만으로는 회사를 성장시키기 어렵다는 현실이 드러났습니다. 이때 디즈니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기로 결심합니다. 실사 영화, TV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리스크를 분산하고, 새로운 수익원을 개척했습니다.

이 과정은 스타트업에게 "코어 비즈니스를 지키되, 환경 변화에 따라 포트폴리오를 조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지만, 그것만 고집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과 제작 역량을 다른 포맷으로 확장하면서, 위기를 버티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즉, 브랜드의 '핵심 능력'은 유지하되, '표현 방식과 사업 형태'는 유연하게 바꾸는 전략이었습니다.

디즈니랜드의 탄생: 콘텐츠를 공간·경험 비즈니스로 확장

디즈니의 가장 큰 발명 중 하나는 아마도 '디즈니랜드'라는 개념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애니메이션 속 세계를 단지 스크린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로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IP를 이용한 오프라인 경험 비즈니스"의 선구적인 사례로, 오늘날 테마파크 산업과 IP 비즈니스의 기본 모델이 되었습니다.

디즈니랜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그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 "가족 단위의 완전한 경험"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놀이기구 자체보다, 입장부터 퇴장까지 이어지는 스토리, 직원 복장과 말투, 길거리 음악, 음식, 상점 구조까지 모두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설계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엔드 투 엔드 고객 경험 디자인'이었으며, 브랜드의 세계관을 물리적 세계로 확장한 시도였습니다.

사업적으로 디즈니랜드는 엄청난 초기 자금이 필요했고, 많은 회의적인 시선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디즈니는 TV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디즈니랜드의 콘셉트와 공사 과정을 미리 보여 주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일종의 '콘텐츠를 통한 제품 런칭 마케팅'을 한 셈입니다. 개장 후 디즈니랜드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세계 곳곳에 디즈니 테마파크가 건설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타트업 관점에서 보면, 이는 하나의 제품·서비스를 여러 비즈니스 레이어로 확장하는, 일종의 '플랫폼 전략'의 초기 사례로도 볼 수 있습니다.

월트 디즈니의 창의력 패턴: 세 가지 자아 - 꿈꾸는 자, 현실가, 비평가

월트 디즈니의 창의적 사고를 설명하는 유명한 모델 중 하나는 '디즈니 크리에이티브 전략'입니다. 후대에 정리된 것이지만, 디즈니가 실제로 일할 때 보여준 패턴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꿈꾸는 자(드리머)', '현실가(리얼리스트)', '비평가(크리틱)'라는 세 가지 자아를 구분해 번갈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먼저 그는 드리머 모드에서 "돈, 기술, 시간 제약이 없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를 자유롭게 상상했습니다. 이 단계에서 아이디어의 비현실성이나 실현 가능성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상상일수록 가치 있게 여겼습니다. '백설공주'나 '디즈니랜드' 같은 프로젝트는 이 드리머 단계에서 실질적인 제약을 무시한 채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 단계가 리얼리스트 모드입니다. 여기에서는 "이 아이디어를 현실에서 구현하려면 어떤 팀, 어떤 기술, 어떤 예산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으로 내려옵니다. 디즈니는 이 단계에서 스토리 구조를 세분화하고, 제작 일정과 조직 구조를 설계했습니다. 전문 애니메이터 교육, 스토리보드 도입, 팀 간 역할 분리 등은 이 현실가 모드에서 탄생한 실행 전략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평가 모드가 작동합니다. 그는 완성되었거나 진행 중인 작업을 보며 냉정하게 "관객 입장에서 무엇이 부족한가, 어디서 지루해지는가, 감정선은 잘 전달되는가"를 집요하게 검토했습니다. 스토리 회의에서 아이디어를 수십 차례 갈아엎는 문화가 이 단계의 산물입니다. 스타트업에서도 제품 아이디어를 내는 '드리머 역할', 실행계획을 짜는 '리얼리스트 역할', 냉정하게 데이터와 피드백을 보는 '크리틱 역할'을 분리해 생각하면 디즈니식 창의성을 팀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디즈니의 성공 비결 1: 스토리 중심의 모든 것

월트 디즈니의 사업은 겉으로 보면 애니메이션, 영화, 테마파크, 캐릭터 상품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지만, 그 바탕에는 항상 "이야기(스토리)"가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사업을 고민할 때도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를 먼저 묻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적절한 형식이 무엇인지 이후에 결정했습니다. 즉, 형식과 채널보다 '내러티브'가 우선이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미키 마우스는 그림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이고, 디즈니랜드는 놀이기구 모음이 아니라 이야기를 걷는 공간입니다. 디즈니가 추구한 것은 콘텐츠의 단편적인 흥행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캐릭터의 성격, 세계관의 규칙, 이야기가 전달하는 감정 톤을 매우 세심하게 관리했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이 원리를 적용하면, 제품 기능이나 기술 스펙보다 "우리 회사가 고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먼저 정하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변화를 만들고 싶은 회사인가?", "사용자가 우리 서비스를 쓸 때 어떤 감정을 느끼길 원하는가?" 같은 질문입니다. 그런 다음, 그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제품 구조와 브랜드, 채널을 선택하는 것이 디즈니식 접근입니다.

디즈니의 성공 비결 2: 디테일 집착과 '완전한 경험' 설계

디즈니는 현장에서의 디테일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캐릭터의 표정 하나, 배경의 작은 움직임, 음악이 들어오는 타이밍까지 꼼꼼하게 검토했습니다. 디즈니랜드에서도 쓰레기통의 간격, 직원의 인사 방식, 놀이기구까지 걸어가는 동선 등 관객이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직접 챙겼습니다.

이러한 디테일 집착은 단순히 까다로운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고객 경험은 작은 요소들이 합쳐져 만들어진다"는 이해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한두 개의 화려한 포인트보다, 전체 경험에서 '깬다'고 느끼는 점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프론트에서 보이는 모습뿐 아니라, 백스테이지 시스템까지 정교하게 설계했습니다.

스타트업에서도 사용자 여정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 편의 스토리"처럼 보고, 작은 마찰과 불편을 줄이는 데 집착하면 디즈니식 경험 설계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앱의 온보딩 텍스트, 이메일 제목, 고객센터 응답 톤, 결제 후 보여주는 문구처럼 사소해 보이는 요소들이 모여 브랜드에 대한 인상을 결정합니다. 디즈니는 이 영역을 남들보다 10배 더 신경 썼고, 그 결과 고객은 "디즈니니까 믿고 간다"는 수준의 신뢰를 갖게 되었습니다.

디즈니의 성공 비결 3: IP와 시스템, 사람에 대한 투자

디즈니는 오스왈드 사건 이후 IP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핵심 캐릭터와 이야기 세계관에 대한 권리를 회사가 갖도록 하는 데 매우 신경을 썼습니다. 동시에, 좋은 IP가 지속적으로 나오려면 개별 천재의 번뜩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스튜디오의 인재 양성과 제작 시스템에 지속적으로 투자했습니다. 애니메이터 교육 프로그램, 스토리 회의 프로세스, 음악·음향 팀과의 협업 구조 등은 모두 체계적으로 설계되었습니다.

그는 사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동료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과 실험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갈등과 파업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디즈니 스튜디오는 하나의 '창의적 공장'이자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만드는 엔진'으로 기능했습니다. 월트 개인의 상상력은 이 시스템 위에서 증폭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회사가 새로운 IP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스타트업의 관점에서 보면, 디즈니의 성공은 "좋은 아이디어"보다 "아이디어를 계속 만들어 내고 실행할 수 있는 시스템과 팀"에 더 크게 의존했습니다. 창업자가 모든 걸 직접 통제하려 들기보다, 자신의 비전을 공유하고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인재와 프로세스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특히 IP 또는 기술 중심 스타트업이라면, 핵심 자산을 보호하면서도 조직이 자율적으로 실험하고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하게 해 줍니다.

디즈니의 말년과 유산: 개인의 죽음, 시스템의 지속

1966년, 월트 디즈니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생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특히 플로리다에 "미래 도시"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비록 그 완전한 비전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월트 디즈니 월드와 EPCOT 등은 그의 아이디어 일부를 구현한 결과물입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회사는 계속해서 새로운 애니메이션과 영화, 테마파크, 미디어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이는 디즈니가 단지 개인적 카리스마로 회사를 이끌던 리더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조직의 시스템과 문화로 심어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스토리 중심 사고, 고객 경험에 대한 집착, IP와 창작 시스템에 대한 투자, 새로운 기술과 포맷에 대한 호기심 등은 디즈니 개인이 아닌 디즈니 회사의 DNA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월트 디즈니라는 사람은 떠났지만, "디즈니식 세계관"은 여전히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 속에 살아 있습니다.

스타트업 창업자 입장에서 그의 유산을 바라보면, "창업자의 비전이 회사의 문화와 시스템으로 어떻게 전이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디즈니는 자신의 취향이나 감정만으로 회사를 운영하려 하지 않았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긴 가치를 구체적 프로세스와 교육, 조직 구조로 떨어뜨리려 노력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스타트업이 추구해야 할 '지속 가능한 창업자의 유산'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스타트업을 위한 디즈니식 인사이트 정리

월트 디즈니의 삶에서 스타트업 창업자가 가져갈 수 있는 메시지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큰 상상은 언제나 시대보다 앞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상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구체적 시스템과 팀을 만드는 데 집착해야 합니다. 백설공주와 디즈니랜드는 한 번의 영감이 아니라, 다년간의 준비와 조직 설계가 만들어 낸 결과였습니다.

둘째, 기술은 도구일 뿐이고, 중심에는 항상 '이야기와 경험'이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쫓기보다, 고객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지,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은지부터 설계하는 것이 디즈니식 접근입니다. 그래야 기술 선택과 제품 설계도 일관된 방향을 갖게 됩니다.

셋째, 실패와 배신의 경험을 '내가 끝났다'는 신호로 보기보다, 전략과 구조를 수정하라는 강력한 피드백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오스왈드 사건은 디즈니에게 IP 소유 구조를 바꾸게 만든 계기였고, 초기 파산은 자금 관리와 비즈니스 모델을 다시 설계하게 만든 계기였습니다. 디즈니는 실패를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받아들였고, 매번 그 안에서 다음 도약의 단서를 찾아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업자의 역할은 초기에는 '꿈꾸는 자'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현실가'와 '비평가'를 포함한 세 가지 모드를 모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 세 가지 역할이 창업자 개인이 아니라 팀과 조직 전체에 분산되어 작동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월트 디즈니는 그 자체로 하나의 위대한 창업자이자, 창의적 조직을 구축한 시스템 설계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