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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동방 교회의 메아리 서평

요약

1. 개요

이 책[1]은 특히 아시리아 동방 교회와 관련된 중앙아시아 시리아 기독교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증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인  마크 디킨스(Mark Dickens)는 네스토리우스, 티모시 1세, 야바라하 3세와 같은 주요 인물을 조명하고, 세미레치예(키르기스스탄 및 카자흐스탄)의 기독교 묘비 비문과 투르판(중국)에서 발견된 기독교 필사본 파편에 대한 연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필사본의 다국어적 특성, 시편 및 기타 성경 텍스트의 존재, 기도 및 달력 조각의 중요성, 그리고 투르판에서 발견된 기독교 필사 관행에 대한 증거를 탐구한다. 저자는  중앙아시아 기독교의 황금기를 기억하는 동시에, 이 잊혀진 존재를 재구성하는 데 따르는 도전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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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방 교회의 교리적 특징 및 역사적 논쟁: 네스토리우스 재평가

저자인 마크 디킨스는  동방 교회를 흔히 '네스토리우스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강조하며, 교리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네스토리우스를 재평가한다.

네스토리우스 논쟁의 본질: 이 논쟁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 특히 알렉산드리아 학파(로고스-육신 신학, 단성론적 경향)와 안티오키아 학파(양성론) 간의 강조점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알렉산산드리아 학파: 말씀이 육신을 취하여 그리스도 인격의 유일한 논리적 주체가 되었으며, 신성이 인성을 가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안티오키아 학파가 두 아들이나 분열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고 비난했다.

안티오키아 학파 (네스토리우스):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physes)이 있다고 주장했다.

'테오토코스' 용어 거부: 네스토리우스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대신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라는 용어를 사용하려 했다. 이는 신성이 인간에게서 비롯된다는 함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는 대중에게 "주님(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마리아 숭배자들에게는 종교적 공격으로 비쳐졌다.

키릴로스의 역할: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를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문시하는 것으로 보았고, "마리아가 테오토코스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를 비난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움직였다.

에페소스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 에페소스 공의회(431년)에서 네스토리우스는 비난받고 폐위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신앙 정의가 역설적으로 "네스토리우스의 신념의 본질을 그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확인했다"고 주장한다.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physeis)과 한 인격(prosopon), 한 위격(hypostasis)이 있다"고 인정했는데, 이는 네스토리우스의 안티오키아적 입장에 더 가깝다.

네스토리우스 재평가: 저자는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이 아니라, 정통적이며 칼케돈에서 분명히 밝힌 신학에 동의했다"고 주장하며, "그의 비평가들, 특히 키릴로스는 그의 '결합'(synapheia) 개념을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간성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비판했다"고 설명한다. 네스토리우스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머리(God-head)와 인간성(manhood)의 두 본질과 본성을 하나로 합치려는 모든 개념을 피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도 인격의 통일성을 강조했고, 안티오키아는 그의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의 이중성을 강조했다." 궁극적으로 네스토리우스는 "정통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네스토리우스'라는 용어의 부적절성: 동방 교회는 스스로를 '네스토리우스'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이 용어는 주로 반대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저자는 "동방 교회의 구성원들을 묘사하는 데 '네스토리우스'라는 용어의 신학적 부적절성"을 인지하고 이 용어를 "아껴서" 사용하여 왔다.

3. 중앙아시아 기독교 유적: 비문과 유물의 증거

중앙아시아, 특히 세미레치예(Semirechye) 지역에서 발견된 시리아어 묘비들은 동방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와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묘비의 발견과 특징: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기독교 비문은 묘비에서 발견되었다.

1885년부터 러시아 정착민들에 의해 발견된 약 610개의 묘비는 1200~1201년에서 1344~1345년 사이의 연대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 시리아어, 약 30개는 시리아 문자이지만 튀르크어로 기록되었다.

묘비에 나타난 연대 기록은 셀레우코스 시대(SE)와 12년 동물 별자리(12 Zodiac Signs) 주기(튀르크족 사용)를 병행했다.

"이 묘비 비문을 분석한 결과, 사망자들은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 즉 동방 교회의 구성원이었으며, 대부분 13세기와 14세기에 사망한 튀르크족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또한 "사망자 중 상당수가 성직자였다."

묘비의 서체는 당시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던 위구르 문자의 영향을 받아 시리아 문자가 수직으로도 쓰여졌다.

묘비에서 드러나는 언어 및 문화적 특징:

언어 혼용: 묘비 비문에는 시리아어와 튀르크어가 혼용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 타슈켄트 박물관의 묘비 1호는 '교사'를 의미하는 소그드어 차용어 quštānč를 사용했다. 묘비 2호는 용띠 해를 나타내는 시리아어 ātliyā와 튀르크어 luu(중국어 차용어)를 함께 사용했다.

문법 및 철자 오류: 많은 비문에서 문법적, 철자적 오류가 발견되는데, 이는 "기독교 공동체가 교회 행사에서 시리아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석공들은 시리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았고, 문맹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름의 다양성: 시리아어 이름과 튀르크어 또는 페르시아어 이름이 혼용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묘비 2호의 "Dawlat-eši"는 페르시아어 "Dawlat"과 튀르크어 "eši"의 조합이다. 묘비 5호에서는 "Urug" (튀르크어 "씨앗, 자손")과 "Tuz-tāy" (튀르크어 "소금처럼") 같은 튀르크어 이름이 나타난다. 묘비 8호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 같은 인기 있는 시리아어 이름이 발견된다.

직책명: 묘비에는 '교회 책임자'(rišʿedta), '자선 책임자'(rišḥubā), '선교사'/'순회 사제'(periodeutes/saʿurā), '학자'/'학생'(scholastics) 등 다양한 직책이 언급된다. 이는 공동체 내의 다양한 역할과 계층을 보여준다.

여성의 지위: "묘비 명문에 기록된 여성의 높은 비율(약 30%)은 일반적으로 무슬림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 여성에게 높은 지위를 부여했던 튀르크 사회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일치한다."

투르판 문서: 투르판에서 발견된 기독교 문서들은 시리아어, 소그드어, 위구르어의 혼합 사용을 보여준다.

다국어 성경 사본: 시리아어와 소그드어가 혼용된 시편 사본 및 교독 사본은 "교회가 복음 전도 노력에 있어 언어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했음"을 보여준다.

필사자들의 언어 능력: 일부 위구르어 필사본에는 시리아어 구절이 위구르 문자로 음역되어 있는데, 이는 필사자들이 시리아어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만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이는 공동체 말기에 시리아어 지식이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달력 기록: 달력 파편들은 시리아어, 소그드어, 12년 동물별자리 주기(중국 및 튀르크 사용) 등 세 가지 달력 시스템의 사용을 보여주며, 이는 투르판 기독교 공동체의 다국어적, 다문화적 특성을 증명한다.

4. 튀르크족의 기독교 개종과 동방 교회의 확장

티모테오스 1세 총대주교 시대(780-823년)는 동방 교회의 중앙아시아 선교에 중요한 시기였다.

튀르크족 왕의 개종: 티모테오스 1세의 서신(XLVII)에 따르면, 그의 재임 기간 중 "Ṭurkāyē (튀르크족)의 왕이 그의 거의 모든 영토와 함께 고대의 불경스러운 오류를 버리고 메시아의 위대한 능력의 작용으로 기독교를 알게 되었다." 이 개종은 780년에서 783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대주교 임명 요청: 튀르크족 왕은 티모테오스에게 "자기 왕국의 영토에 대주교를 임명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이는 왕이 자신의 영역에 대주교를 임명하고 싶어했음을 시사한다.

개종의 동기:

정치적, 이념적 독립: 카자르족의 유대교 개종과 위구르족의 마니교 개종이 주변 강대국(이슬람 칼리프 제국, 비잔틴 제국)으로부터의 정치적, 이념적 독립 선언이었던 것처럼, 튀르크족의 기독교 개종도 유사한 동기였을 수 있다.

경제적 이점: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소그드인 기독교 상인, 학자, 장인들이 튀르크 영토를 방문하고 정착하도록 유도하여 경제적 이점을 가져왔을 것이다.

정치적 유대 강화: 8세기 후반과 9세기 초반의 카를룩-티베트 연합은 티모테오스의 "총대주교좌"와의 상호 관계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개종 주체: 티모테오스의 서신에는 그가 직접 왕을 개종시켰다는 언급은 없다. 대신 "중앙아시아에 있는 시리아 기독교인, 아마도 주교나 대주교, 또는 기독교 상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개종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대주교구 설립: 티모테오스는 792/93년경 튀르크족을 위한 첫 번째 대주교구를 설립했다. 이 대주교구가 사마르칸드 대주교구의 권위 아래에 놓이기를 원치 않아 별도의 대주교구를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대주교구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지만, 나중에 언급되는 '튀르키스탄 대주교구'와 동일시될 수 있다.

역사적 맥락: 이 시기는 제2 튀르크 제국이 무너지고 위구르 제국이 등장한 시기(742-744년)와 겹친다. 튀르크족 왕은 당시 중앙아시아 서부의 주요 세력이었던 카를룩 튀르크족의 야브구(yabghu)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의 개종은 9세기 대부분 동안 튀르크 세계의 상당 부분이 기독교권의 일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5. 마르 야흐발라하 3세: 튀르크족 총대주교의 삶

마르 야흐발라하 3세(1281-1317년 재위)는 동방 교회의 역사에서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인물이다.

튀르크족 출신 총대주교: 그의 본명은 마르코스였으며, 옹구트(위구르) 튀르크족 출신이다. "마르 야흐발라하 3세는 시리아와 몽골의 측면과 당시 교회의 요소를 종합한 것을 상징한다." 동방 교회의 역대 총대주교 중 유일한 튀르크족 총대주교였다는 점이 여러 시리아어 문헌에 명시되어 있다.

솔로몬 바스라의 "꿀벌의 책"에는 "튀르크 마르 야흐발라하가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지 와르다가 쓴 성가집에는 "튀르크족 혈통인 선출된 마르 야흐발라하"라고 언급되어 있다.

"마르 야흐발라하의 역사"에도 그의 튀르크족 배경이 강조된다.

총대주교로 선출된 배경:

1258년 훌라구 칸의 아바스 칼리프조 정복 이후, 동방 교회는 몽골 통치자들의 호의를 얻고자 했다.

마르코스가 중국의 대주교였기 때문에 "몽골 칸들이 교회를 호의적으로 대하고 동방 기독교인들에게 자유를 허락할 것"이라는 희망에서 1281년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바르 헤브라에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종족의 아들이었던 아미르 에슈무트가 야흐발라하를 '왕들의 왕'(즉 아바카 칸)에게 추천했다." 바그다드 기독교인들도 그가 몽골인들과 언어적으로나 혈통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어적, 문화적 능력:

야흐발라하는 "시리아어 학습과 쓰기에는 약했으나, 천성이 착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며, 우리와 함께 있는 백성들에게 큰 사랑을 보였다"고 바르 헤브라에우스는 기록한다.

"마르 야흐발라하의 역사"에서는 그의 선출 이유가 "몽골인들의 생활 방식과 언어에 정통한 사람이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명확히 밝힌다. 시리아어에 대한 무지가 일반적으로 자격 미달 사유였지만, 몽골 세계에 대한 그의 지식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고난과 죽음: 그의 재위 후반기는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어 "고통으로 끝났고, 그 자신도 고문을 당했다." 1310년 7월 4일에는 일칸 올제이투의 지시로 에르빌 요새에 살던 아시리아 기독교인들의 학살을 막지 못했다. 그는 1317년 11월 13일 마라가에서 사망했다.

총대주교 인장: 마르 야흐발라하의 인장은 몽골-튀르크어로 새겨져 있으며, 이는 그의 리더십이 튀르크 문화적 맥락과 몽골 제국의 지원을 받았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인장은 총대주교가 몽골 통치자와 그 후손들을 위해 전례적 기도를 드리고 공덕을 쌓는 역할을 수행할 것을 명시한다. 또한 인장 없이는 주교, 사제/수도사, 일반 신자들이 총대주교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없도록 했다. 이는 몽골 왕실이 총대주교로부터 특정 혜택을 기대했으며, 그 대가로 그에게 권위를 부여했음을 시사한다.

6. 투르판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

투르판 지역의 기독교 유물과 문서는 중앙아시아 기독교 공동체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다국어 환경: 투르판의 기독교 공동체는 시리아어(예배 언어), 소그드어(주요 상업 언어), 위구르어(튀르크 언어)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다.

시리아어 사본: 투르판에서 발견된 시리아어 사본은 대부분 예배용 문서(70%), 성경 사본(20%), 기타 장르(10%)로 구성된다.

소그드어 및 위구르어 사본: 소그드어와 위구르어로 된 비성경적, 비전례적 문서가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이는 위구르어가 투르판의 주요 언어였음을 반영한다.

필사 관행 및 오류:

필사 스타일: 대부분 에스트랑겔라 시리아어 서체로 쓰여졌으며, 이후 동시리아어 서체로 발전한 일부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 후기 동시리아어 서체는 13세기 이후에야 중동에서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투르판에서는 드물다.

오점 및 정정: 많은 필사본에서 오류가 발견되고 이후 수정되었는데, 이는 필사자들이 시리아어에 대한 유창성이 부족했음을 시사한다.

발음 기반 철자 오류: 시리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필사자들은 발음에 기반한 철자 오류를 범했다(예: 무음 'ه'의 생략, 모음 기호 추가, 치음과 연구개음 혼동).

전례적 관행:

시편의 중요성: 동방 교회의 예배에서 시편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투르판의 수도원 공동체에서는 매일 시편 전체(21개의 훌랄레)를 암송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달력의 활용: 기독교 달력 파편들은 투르판 기독교인들이 다른 지역의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사순절과 부활절 같은 중요한 전례 날짜를 정확히 결정하는 데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문화적 융합:

공덕 이전 (Merit Transfer): 위구르어 기도문 중에는 불교적 관행인 '공덕 이전'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투르판 기독교인들이 주변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시리아 기독교와 불교 개념의 융합을 나타낼 수도 있다."

튀르크어 찬송가: 튀르크어 찬송가("나는 흠 없는 영원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이 공동체가 튀르크 문화에 깊이 뿌리내렸음을 보여준다.

이름 혼용: 시리아어, 튀르크어, 페르시아어 이름의 혼용은 공동체의 다문화적 구성을 증명한다.

7. 기독교의 쇠퇴

티무르의 침략: 야흐발라하 사후 중앙아시아에서 동방 교회의 선교 활동은 점차 쇠퇴하여, 1399-1400년 '절름발이' 티무르의 군사 작전으로 결정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티무르는 동방의 기독교 인구를 대량 학살하여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극소수의 수로 줄였다."

흑사병: 1338-1339년에 중앙아시아를 휩쓴 흑사병은 묘비의 수가 급증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기독교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화: 카를룩 튀르크족의 이슬람화(960~961년) 등 이슬람 세력의 확장은 기독교 공동체에 지속적인 압력을 가했다.

8. 결론

"잊혀진 존재의 메아리"는 중앙아시아에서 동방 교회의 번성, 언어적, 문화적 융합, 그리고 궁극적인 쇠퇴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을 제시한다. 특히 마르 야흐발라하 3세와 같은 튀르크족 총대주교의 존재는 동방 교회가 중세 시대에 중앙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환경에 적응하고 융합하려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묘비와 투르판 문서들은 이 지역 기독교인들의 삶, 신앙, 그리고 주변 문화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저자는 중앙아시아 기독교의 황금기를 기억하는 동시에, 이 잊혀진 존재인 “동방 시리아 교회”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증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결론적으로, 『잊혀진 존재의 메아리』는 동방 교회가 중앙아시아에서 겪었던 선교의 도전을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이 자료들은 시리아 기독교의 뿌리를 유지하면서도 주변 문화적 환경에 적응하며 신앙을 전파했던 동방 교회의 유연성과 생존력을 잘 보여줍니다.

마치 깊은 강물이 여러 지류로 갈라져 멀리까지 흘러가면서도 그 근원적인 물줄기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처럼, 동방 교회는 중앙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와 언어 속에 스며들면서도 그들의 신학적, 전례적 유산을 지키려 애써 지켜왔다고 역설하고 있다.


[1] 마크 디킨스(Mark Dickens)의 "잊혀진 존재의 메아리: 중앙아시아 동방 교회의 역사 재구성(Echoes of a Forgotten Presence: Reconstructing the History of the Church of the East in Central Asia)"은 2009년부터 2016년 사이에 출판된 10개의 글과 새로운 1개의 글을 포함한 11개의 논문 모음집 형태로 1317년에 서거한 동방 교회의 카톨리코스-총대주교 마르 야흐발라하 3세의 700주기를 기념하며, 중앙아시아에서 동방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글들을 모아 놓은 선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