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H. W. 부시: 미국 제41대 대통령의 생애와 업적
조지 H. W. 부시: 미국 제41대 대통령의 생애와 업적
인물 개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1924–2018)는 미국의 제41대 대통령(1989~1993)이자 제43대 부통령(1981~1989)이었다. 공화당(Republican Party) 소속인 그는, 부통령 이전에도 여러 연방 공직을 역임했다. 부시 대통령은 외교 및 국내 정책 양면에서 미국 현대 정치에 크나큰 족적을 남겼다.
성장 배경 및 교육
부시는 1924년 매사추세츠주 밀턴에서 출생하였으며, 그 가족은 금융계에서 출중한 입지를 가진 유복한 집안이었다. 자라면서 그는 코네티컷주 그리니치에서 성장했고, 필립스 아카데미(Phillips Academy)에서 지도력을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Second World War) 중 18세의 나이에 해군 항공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여러 차례 임무를 완수했으며, 이때의 경험은 그의 인생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역 후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사업과 가족
졸업 후 부시는 가족과 함께 텍사스 서부로 이주하여 석유 산업에 진출했다. 사업가로서의 성공과 동시에, 그는 바버라 피어스(Barbara Pierce)와 결혼해 여섯 자녀를 두었다. 부부의 결혼생활은 퍼스트 레이디가 된 바버라의 대중적 인기로도 주목받았다. 이 가운데 장남 조지 W. 부시는 훗날 제43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차남 젭 부시는 플로리다 주지사와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도전했다.
정치 입문과 연방 공직
1960년대 초 정치에 뛰어든 부시는 일관되게 공화당을 고수했다. 1966년 텍사스 제7 선거구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후 유엔대사,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 중국 주재 미 연락사무소장,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 다양한 연방 요직을 역임했다. 중도적이며 실용적인 정치 성향을 보이며, 외교와 국가안보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부통령 재임(1981~1989)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 치하에서 부통령을 지내며, 조율과 현안관리 등 조용한 조력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는 '탈규제(deregulation)' 추진, 국제 마약 단속, 위기관리 등에서 실질적 임무를 맡았다. 이 시기 그는 공화당 내 보수 세력에도 손을 내밀었고, 이란-콘트라 스캔들(Iran-Contra Affair) 등 주요 사건들과도 거리를 두려 했다.
대통령 재임(1989~1993)와 시대적 전환
부시는 1988년 대선에서 공약으로 '새로운 세금은 없다'고 선언했고, 이후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의 임기 동안 냉전(Cold War)은 소련 붕괴와 독일 통일로 마무리되었으며,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도약했다.
외교 정책
부시 대통령의 외교는 격변하는 국제질서를 관리하는 데 중점을 뒀다. 소련 총리 고르바초프와 독일의 콜 총리와의 협력으로 독일 통일과 나토(NATO) 내 편입을 실현했다. 파나마 침공(Operation Just Cause)으로 노리에가 체제를 종식시켰고, 걸프전(Gulf War)을 통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억제하고 대규모 국제연합 연대를 이끌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체결 추진도 그의 주요 업적 가운데 하나였다.
국내 정책
국내적으로는 예산 적자 해소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나, 세입 증대(즉, 증세)로 정책 전환을 하며 정치적 반발을 샀다. 대표적인 입법으로 '장애인 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ADA)', '청정대기법 개정안(Clean Air Act Amendments)' 등이 있다. 연방 대법관에 데이비드 수터(David Souter)와 클래런스 토머스(Clarence Thomas)를 임명하였다.
대선 패배 및 이후의 삶
1992년 대선에서 경제 침체와 보수 지지층 이탈, 제3후보 페로트(Ross Perot)의 영향 등으로 빌 클린턴(Bill Clinton)에게 패배했다. 그는 재임 말기에 이란-콘트라 관련 6명에게 사면을 단행하며 정치적 논란을 남겼다.
퇴임 이후 인도주의와 자원봉사 활동에 헌신하며, 클린턴 전 대통령과는 초당적으로 재난 구호에 협력했다. 아들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에 오름에 따라 부자(父子)가 모두 미국 대통령이 된 두 번째 사례가 되었다.
만년과 서거
바버라 부시와의 오랜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그는 2018년 11월 휴스턴 자택에서 향년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장례식에는 여러 전·현직 대통령과 각계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유산과 평가
역사적으로 부시는 중도 실용주의와 타협정신, 외교적 리더십으로 기억된다. 동서 냉전 질서의 해체와 이라크전 승리 등 외교 성과는 높이 평가되며, 국내 정책 측면에서는 큰 틀의 변화보다는 보수와 진보 양측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분석이 있다. 재임 후반기의 '정책적 비전의 부재(the vision thing)'라는 대중적 평가는 지금까지 언급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협치와 절충능력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그는 공공 봉사와 가족의 가치 이상, 기독교 신앙, 자선 활동, 사회통합 등을 강조한 지도자였다. 명칭과 기념사업으로는 조지 H. W. 부시 기념 도서관, 여러 공공시설과 군함 명명이 있다. 대통령 사후, 그에 대한 평가는 미국 현대 정치에서 중상 이상의 위치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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