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방 기독교의 동방 선교: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여정 (1~13세기)
동방 기독교의 동방 선교: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여정 (1~13세기)
요약
동방 교회는 사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깊은 역사를 지닌 기독교 교파로, 로마-비잔틴 제국의 동쪽 경계 너머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발전했다. 5세기 그리스도론 논쟁 이후 서방 교회와 독자적인 길을 걸었으며, '네스토리우스 교회'라는 명칭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외부 명칭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본고에서는 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에데사에서 시작하여 중국과 몽골 제국과 발해해에 이르는 동방 교회의 확장을 추적한다.
초기에는 에데사가 시리아 기독교의 요람이자 학문의 중심지였고, 니시비스 학교는 신학 교육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르티아 제국의 종교적 관용 정책 덕분에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조용히 확산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4~7세기)에 동방 교회는 셀레우키아-크테시폰을 중심으로 공식적으로 조직화되었고, 파파 바르 아가이와 마르 이사악 같은 인물들이 교회의 중앙집권화를 이끌었다. 410년 셀레우키아-크테시폰 공의회는 교회 조직화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동방 교회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의 신학적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그리스도론을 발전시켰고, 바바이 대제는 이를 체계화했다. 사산조의 종교 정책은 관용과 박해 사이를 오갔지만, 교회는 생존하고 성장했다. 레이, 니샤푸르, 메르브가 주요 교회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수도원주의는 선교 확장의 핵심 동력이었다.
아랍 칼리파국 시대(7~10세기)에 기독교인들은 딤미 지위를 부여받아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 아바스 칼리파국 시대는 동방 교회의 '황금기'로 불리며, 총대주교 티모테오 1세는 중앙아시아, 티베트, 인도, 중국으로 교회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했다. 메르브, 니샤푸르, 레이는 여전히 중요한 중심지였고,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같은 소그드 도시들에서도 기독교가 번성했다. 탈라스, 네바케트, 발라사군, 악베쉼 등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지역은 투르크족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투르판 오아시스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으로, 현지 언어로 된 기독교 필사본들이 발견되었다. 동방 교회는 시리아 문자를 소그드어와 투르크어에 적용하는 등 문화적 적응 노력을 보였다.
셀주크 및 서하 제국 시대를 거쳐 몽골 제국 시대(13세기)에 동방 교회는 다시 한번 부흥을 맞았다. 몽골 제국의 종교적 관용 정책 덕분에 카라코룸과 베이징(칸발리크) 등 몽골 수도에 기독교 공동체가 번성했다. 야발라하 3세와 라반 사우마의 동서 교류 여정은 동방 교회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보여준다. 중국 원나라 시대에는 주로 몽골인과 중앙아시아 이주민들로 구성된 동방 교회 공동체가 중국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발해와 고려 시대 한반도까지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논의된다.
그러나 14세기부터 몽골 칸국들의 이슬람화, 티무르의 파괴적인 박해, 명나라의 외국 종교 배척 정책으로 인해 동방 교회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에서 급격한 쇠퇴를 겪었으며, 메소포타미아와 인도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했다.
서론
동방 교회(Church of the East)는 동방 시리아 교회(East Syriac Church) 또는 역사적으로 (때로는 경멸적으로) 네스토리우스 교회(Nestorian Church)로도 알려져 있으며, 그 기원은 사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적으로 성 토마스, 성 타대오(아다이), 성 마리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의 초석을 놓았다고 알려져 있다.[1, 2, 3, 4, 5, 6, 7] 로마-비잔틴 제국의 동쪽 경계 너머, 주로 파르티아 제국과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발전한 동방 교회는 [1, 2, 3, 8, 9, 10] 5세기 그리스도론 논쟁 이후 서방 기독교와는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1, 5,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네스토리우스 교회"라는 명칭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외부에서 붙여진 꼬리표이며, 교회 자체는 "동방 교회"라는 명칭을 선호했고 그 그리스도론은 바바이 대제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5, 15, 22, 23]
실크로드는 단순한 교역로를 넘어 종교적 신념을 포함한 문화 전파의 중요한 통로였으며 [24, 25, 26, 27], 동방 교회는 이 길을 활용한 대표적인 선교적 종교였다.[1, 14, 21, 24, 28, 29] 본 보고서는 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에데사에서 시작하여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몽골 제국의 수도에 이르기까지 동방 교회의 광대한 동진(東進) 과정을 시대별 왕조와 주요 거점 도시, 그리고 핵심 주교 인물들을 중심으로 추적하고자 한다.
동방 교회는 로마 제국 및 이후 비잔틴 교회의 구조 외부에서 주로 발전한 기독교의 중요한 한 갈래를 대표한다. 그 동방으로의 여정은 지리적 확장뿐만 아니라 독특한 신학적, 예전적 전통의 발전 과정이기도 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의 기원 [1, 2], 안티오키아로부터의 독립 [3, 15], 그리고 종종 "네스토리우스파"로 분류되는 독특한 그리스도론적 입장 [1, 15, 30] 등은 서구 중심의 교회사가 간과하기 쉬운, 기독교 중심지의 또 다른 축과 발전 과정을 시사한다.[1] 로마/비잔틴 세력권 외부라는 정치적 현실은 그 독자적 발전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또한 실크로드를 따라 동진하는 과정에서 동방 교회는 다양한 문화 및 종교와 필연적으로 조우하게 되었다. 이는 일방적인 전파가 아닌 복잡한 상호작용의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실크로드는 다양한 종교(그레코-로만 다신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마니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용광로였으며 [24], 동방 교회의 선교사들과 상인들은 이러한 다양한 신념 체계와 교류하며 때로는 적응하고, 논쟁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혼합주의적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현지 언어와 문자를 채택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9, 29, 31, 32, 33, 34]
I. 기초 및 초기 확장 (1~4세기 초): 로마와 파르티아 시대
A. 에데사: 시리아 기독교의 전설적인 요람
에데사(현 터키 우르파)는 시리아 기독교의 가장 초기 중심지 중 하나로 전통적인, 비록 전설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3, 8, 11, 15, 35, 36, 37] 아브가르 전설은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 5세 우카마와 예수 그리스도 간의 서신 교환 및 이후 사도 타대오(아다이)의 에데사 파견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전설은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지역 초기 기독교화 노력과 사도적 기원을 확립하려는 열망을 반영한다.[8, 11, 35] 유세비우스는 그리스어본을 보존했고, 시리아어 문헌인 《아다이의 교리》는 또 다른 버전을 제공한다.[11, 35]
에데사는 시리아어를 문학 및 교회 언어로 발전시키는 데 주요한 중심지였다. 성경을 시리아어로 번역한 페시타(Peshitta)는 이 지역 환경에서 비롯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11, 36, 37] 초기 에데사에는 유대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으며, 이들은 이후 이방인 기독교와 상호작용하며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했다.[11] 마르 마리 행전과 아브가르 전설은 메소포타미아의 첫 기독교화 및 에데사의 성화상(만딜리온)과 에데사를 연결시키며, 동방으로의 기독교 확산과 에데사의 광범위한 역할을 보여준다.[38] 아르메니아와 조지아가 일찍이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고, 파르티아 제국 하에서 기독교가 동쪽으로 확산되었으며, 사도 토마스가 전통적으로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인도와 연결된다는 점은 에데사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광범위한 지역적 맥락을 제공한다.[36]
B. 니시비스: 초기 지성의 중심지
니시비스(현 터키 누사이빈)는 기독교 학문과 신학의 중요한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특히 교리문답 학교로 유명했다.[21, 22, 37, 40, 41] 니시비스 학교는 원래 350년경 니시비스의 야곱에 의해 설립되었다.[40] 363년 페르시아가 니시비스를 점령하자, 시리아의 성 에프렘과 다른 교사들은 에데사로 옮겨가 그곳 학교를 강화했다. 그러나 489년 제논 황제가 에데사 학교를 "네스토리우스주의" 경향으로 인해 폐쇄하자, 학교는 사실상 니시비스로 돌아와 번성했다.[40, 41]
주요 인물로는 시리아 기독교의 기초를 닦은 다작의 신학자이자 시인, 찬송가 작가인 성 에프렘(약 306-373년) [37, 40]과 에데사 학교 폐쇄 후 니시비스 학교 재건의 핵심 인물이자 네스토리우스 신학을 형성한 저명한 교사 나르사이(502년경 사망) [40, 41]가 있다. 학교는 신학, 철학, 의학을 가르쳤으며 [40], 안티오키아 전통을 따라 문자적 해석 방법을 따랐고 테오도로스 몹수에스티아의 저작이 중심이 되었다.[40, 41] 학교는 모든 시리아 교회에서 학생들을 유치했고 그 가르침은 규범적이었으며 [40], 그리스 사상을 시리아어로 번역하여 후일 아랍 학문에 영향을 미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1]
C. 파르티아 통치 하 메소포타미아 및 페르시아 초기 기독교 (약 1~3세기)
동방 교회는 1세기경 사도 토마스, 타대오(아다이), 마리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서 수행한 선교 활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2, 3, 36] 특히 마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복음화와 셀레우키아-크테시폰 주교좌 설립에 공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38, 42] 파르티아 제국(기원전 247년경 – 기원후 224년)은 일반적으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쳐 유대교, 그레코-이란계 신앙, 그리고 초기 기독교 등 다양한 신앙이 공존하고 확산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15, 36, 43, 44] 이러한 환경은 기독교 공동체의 초기 정착과 조용한 확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43]
2세기와 3세기경에는 메소포타미아와 서부 페르시아 등 파르티아 제국 여러 지역에 기독교 공동체가 설립되었다.[3, 8, 15, 36, 43] 《사도들의 교리》(기원후 250년경)는 아가이라는 선교사를 통해 일찍이 120-140년경 카스피해 남서부 부족(고그와 마고그)에게 기독교가 전파되었다고 언급한다.[9, 28] 또한 바르 다이산은 196년경 길란인과 박트리아인 사이에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기록했다.[36] 아람어(시리아어)는 이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공용어로서 소통과 결속을 촉진했으며 [2, 43], 초기에는 분산적이었으나 점차 주요 도시 중심지에 주교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43]
II.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시대의 통합과 성장 (4~7세기)
A. 셀레우키아-크테시폰 총대주교좌: 공식적 조직화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셀레우키아-크테시폰은 동방 교회의 행정적, 정신적 중심지가 되었다.[1, 2, 3, 4, 10, 12, 13, 15, 17, 45] 셀레우키아-크테시폰의 주교였던 파파 바르 아가이(Papa bar Aggai, 약 280-328년)는 페르시아 교회를 조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사산조 제국 내 다른 주교구들에 대한 자신의 주교좌의 우위성을 주장했으며, 교회의 행정을 효과적으로 중앙집권화한 최초의 인물로 여겨지며 카톨리코스(Catholicos)라는 칭호를 사용했다.[2, 3, 4, 10, 46, 47]
410년 사산조 왕 야즈데게르드 1세(Yazdegerd I)에 의해 소집된 셀레우키아-크테시폰 공의회(마르 이사악 공의회, Synod of Mar Isaac)는 동방 교회를 사산조 제국 내에서 공식적으로 조직화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2, 3, 4, 10, 12, 13, 15, 30, 45, 48, 49, 50, 51] 이 공의회는 셀레우키아-크테시폰의 대주교 마르 이사악(Mar Isaac)을 "대 관구장주교(Grand Metropolitan)"이자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했으며, 그는 이후 카톨리코스로 불리게 되었다.[2, 30, 45] 또한 니케아 공의회의 모델을 따라 교회를 관구(ecclesiastical provinces)로 나누고 관구장주교(metropolitan bishops)를 두는 구조를 확립했다. 초기에는 셀레우키아-크테시폰, 베이트 라파트(Beth Lapat), 니시비스, 프라트 데 마이샨(Prat de Maishan), 아르벨라(Arbela), 카르카 데 베이트 슬로크(Karka de Beth Slokh) 등 6개의 "내부 관구"가 설정되었다.[45]
B. 교리적 정체성과 독립
동방 교회는 특히 그리스도론에서 안티오키아 학파, 특히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Theodore of Mopsuestia)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신학적 정체성을 발전시켰다.[5, 10, 12, 13, 14, 15, 18, 19, 20, 21, 22, 40, 41] 에페소 공의회(431년)와 그 여파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에페소 공의회의 정죄를 동방 교회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네스토리우스와 테오도로스 몹수에스티아를 계속 존중함으로써 서방 교회로부터 "네스토리우스파"라는 딱지가 붙게 되었다.[1, 3, 5, 6, 7, 10, 12, 13, 14, 15, 16, 18, 19, 20, 21, 36, 40, 49, 53]
베이트 라파트 공의회(484년)와 424년 다디쇼 1세 공의회(Synod of Dadisho I) 등을 통해 동방 교회는 행정적, 교리적 독립을 공고히 했다.[10, 12, 13, 15, 18, 19, 20, 28, 30, 45, 49] 바바이 대제(약 551-628년)는 동방 교회의 그리스도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중추적인 신학자였으며, 특히 그의 저서 《일치서》(Book of Union)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파르소파, parsopa) 안에 혼합되지 않았으나 영원히 연합된 두 개의 고유한 본성/본질(크노메, qnome)을 강조하여, 미묘한 양성론적 입장을 제시했다.[5, 10, 12, 15, 22, 23, 37]
C. 사산조의 종교 정책: 관용과 박해 사이의 항해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224-651년)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이는 다른 신앙에 대한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28, 48, 49, 52, 54, 55, 56, 57, 58, 59] 야즈데게르드 1세(399-420년)와 같은 일부 통치자들은 관용 정책을 채택했으나, 샤푸르 2세(309-379년)와 같이 로마/비잔틴 제국과의 전쟁과 맞물려 기독교인들을 혹독하게 박해하는 경우도 있었다.[22, 28, 36, 45, 48, 49, 50, 52, 54]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산조 제국 내에서 생존하고 성장했으며, 이는 강력한 공동체 구조와 정치적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D. 페르시아 내 주요 교회 중심지
1. 레이(라가): 주교구 설립
레이(고대 라가, 현 테헤란 인근)는 메디아의 중요한 도시였으며 페르시아 초기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다.[2, 3, 5, 8, 10, 29, 50, 51, 55, 61, 62] 레이(베이트 라지카예) 주교구는 410년 셀레우키아-크테시폰 공의회 때부터 언급되었으며 [50], 레이의 주교들은 424년 다디쇼 공의회에서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50]
2. 니샤푸르(아바르샤흐르): 초기 기독교 존재
호라산의 니샤푸르(사산조 시대에는 아바르샤흐르로 알려짐)는 기독교가 뿌리내린 또 다른 중요한 도시였다.[8, 28, 36, 50, 60, 63, 64, 65, 66, 67, 68, 69, 70, 71] 아바르샤흐르(니샤푸르)의 동시리아 교구는 5세기 초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36, 50, 60, 65], 아바르샤흐르의 다비드 주교는 424년 다디쇼 공의회에 참석했다.[36, 50, 60, 65]
3. 메르브: 중요한 기독교 중심지로의 부상
호라산의 메르브(고대 마르기아나)는 동방 교회의 가장 중요한 동방 전초기지 중 하나이자 결국 주요 관구장좌가 되었다.[9, 24, 28, 36, 50, 60, 65, 70,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바르샤바(Barshabba) 주교는 424년 다디쇼 공의회에 메르브 주교로 참석했으며 [9, 36, 50, 60, 65, 83], 메르브는 554년 요셉 공의회에서 관구장좌로 인정받았다.[9, 28, 36, 60, 65, 70, 73, 83] 메르브에서는 기독교 수도원, 네크로폴리스, 십자가 주형틀과 같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9, 72, 75, 83, 84, 85]
E. 선교 세력으로서의 수도원주의: 학교와 필사본 제작소
수도원주의는 동방 교회의 핵심 요소이자 선교 확장의 주요 동력이었다.[3, 21, 22, 23, 24, 26, 27, 28, 32] 수도원은 기도, 금욕, 학문, 필사본 제작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22, 27, 28, 32, 34, 37], 종종 교역로를 포함한 전략적 위치에 설립되었다. 수도사들은 신학, 언어(시리아어, 그리스어, 현지어), 의학, 서예 교육을 받아 선교 사업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었다.[28, 34, 37] 성경, 예전서, 신학 저술을 시리아어와 소그드어, 팔라비어, 후에는 위구르어와 중국어 같은 현지 언어로 번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9, 14, 24, 27, 28, 29, 31, 32, 33, 34, 37, 87, 88, 89, 90]
표 1: 주요 총대주교 및 그들의 공헌 (1~7세기)
총대주교 | 대략적인 재위 기간 | 주요 업적/교회 조직 및 확장에 대한 중요성 |
---|---|---|
타대오(아다이) & 마리 | (전설적, 1세기) | 전통적 창시자, 에데사 및 메소포타미아 복음화 [2, 3, 4, 15, 36] |
파파 바르 아가이 | (약 280년 – 약 327/328년) | 셀레우키아-크테시폰 주교; 페르시아 교회 중앙집권화 시작, 최초로 카톨리코스로 칭함 [2, 3, 4, 10, 46, 47] |
이사악 | (399년 – 410년) | 셀레우키아-크테시폰 대관구장주교; 셀레우키아-크테시폰 공의회(410년) 주재,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내 교회 공식 조직화, 니케아 신경 수용 [2, 4, 10, 30, 45] |
다디쇼 1세 | (421년 – 456년) | 카톨리코스; 마르캅타 공의회(424년) 주재, 서방 교회로부터의 행정적 독립 선언 [4, 10, 12, 13, 15, 28, 30, 45, 50, 60] |
바바이 대제 (총대주교는 아님) | (약 609년 – 628년) | 총대주교 공석 기간 동안 교회의 비공식적 수장; 그리스도론 체계화 (한 파르소파 안의 두 크노메), 수도원 개혁가 [5, 10, 12, 15, 22, 23, 37] |
III. 아랍 칼리파국 시대의 동방 교회 (7~10세기)
A. 연속성과 적응: 딤미 지위와 기독교인의 삶
633년에서 654년 사이 아랍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딤미(dhimmi)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는 지즈야(jizya, 인두세)를 납부하는 대가로 생명과 재산 보호, 그리고 종교 실천의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었다.[3, 10, 14, 15, 21, 61, 65, 91, 92, 93, 94] 아바스 칼리파국(750-1258년) 시대는 동방 교회에게 "황금기"로 여겨지며, 총대주교좌는 바그다드로 이전했고 기독교인들은 지성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3, 13, 17, 22, 28, 65, 91, 92]
B. 총대주교 티모테오 1세 (780-823년): 확장 정책
총대주교 티모테오 1세는 동방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선교 확장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유명했다.[4, 10, 22, 37, 50, 96, 97, 98, 99, 100] 그는 중앙아시아("베이트 투르카예")에 투르크인들을 위한 관구장주교를 서임했으며, 티베트, 인도, 중국 등에도 관구장주교를 임명하여 교회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했다.[4, 10, 50, 96, 97, 98, 99, 100]
C. 번성하는 관구장좌와 지성 생활
1. 메르브: 주요 관구 중심지
메르브는 아랍 통치 하에서도 동방 교회의 최고 관구장좌로서 호라산 기독교의 핵심 중심지이자 더 동쪽으로 향하는 선교의 발판 역할을 계속했다.[9, 28, 36, 50, 60, 65, 70, 73, 83]
2. 니샤푸르: 지속적인 교구 활동
니샤푸르(아바르샤흐르)는 호라산 관구 내에서 중요한 교구 중심지로서, 아마도 메르브의 관구장주교 관할 하에 계속 활동했다.[8, 28, 36, 50, 60, 63, 64, 65, 66, 67, 68, 69, 70, 71]
3. 레이: 중요한 주교좌로의 발전
레이(라가)는 계속해서 중요한 기독교 중심지였으며, 790년 총대주교 티모테오 1세에 의해 관구장좌로 승격되었다.[50, 100]
4. 사마르칸트 & 부하라: 소그드 기독교, 주교구/관구장좌 설립, 고고학적 발견
소그디아나 문명은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와 같은 주요 중심지를 가졌으며, 동방 교회가 중앙아시아로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지역이었다.[9, 29, 34, 83, 84, 85, 89, 101,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123, 124, 125] 사마르칸트는 일찍이 6세기 중반 [9, 50, 83, 101, 115, 117, 119, 122, 123, 125] 또는 8세기 초 총대주교 슬리바즈카(714-728년) 치하에 [50] 관구장좌가 되었으며, 중앙아시아 교회의 핵심 중심지였다.[83, 101, 117] 고고학적 증거로는 기독교 상징이 있는 납골 단지, 비문 [83, 115, 119, 121], 그리고 가능한 교회 유적 [121] 등이 있다.
부하라는 기독교가 존재했던 또 다른 중요한 소그드 도시였으며 [9, 83, 84, 117, 118, 121, 123, 126, 127, 128, 129, 130], 관구장좌로 언급된다.[84] 나르샤키는 709년 아랍 정복 후 부하라의 한 교회가 모스크로 개조되었다고 언급한다.[9, 84, 121]
소그드 기독교인들은 상인과 선교사로서 실크로드를 따라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기독교 문헌을 소그드어로 번역하고 시리아 문자를 차용했다.[9, 29, 31, 32, 33, 34, 83, 88, 89, 117, 119, 124]
5. 투르크족 선교의 중심지: 탈라스, 네바케트, 발라사군, 악베쉼
동방 교회의 선교는 소그드인을 넘어 다양한 투르크 부족에게까지 확장되었다. 특히 오늘날 키르기스스탄에 위치한 세미레치예(Semirechye, '일곱 강' 지역)는 투르크계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이 지역의 주요 도시였던 탈라스, 네바케트, 발라사군, 악베쉼에서는 동방 교회와 관련된 수많은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탈라스 (Talas): 탈라스는 751년 당나라와 아바스 칼리파국 간의 전투로 유명하지만, 그 이전부터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동서 교역의 중요한 길목이었으며, 선교사들이 투르크 유목민들과 접촉하는 주요 거점이었다.
네바케트 (Nevakat) 와 발라사군 (Balasagun): 네바케트는 실크로드 상의 주요 도시였으며,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발라사군은 카라한 왕조의 수도 중 하나로, 다문화, 다종교 도시였으며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거주했다. 이 도시들에서 발견된 시리아-투르크어 비문이 새겨진 묘비들은 당시 기독교 신앙이 현지 투르크 문화와 융합되었음을 보여준다. 묘비에는 십자가 문양과 함께 투르크식 이름과 칭호가 기록되어 있다.
악베쉼 (Ak-Beshim): 악베쉼(고대 수얍, Suyab) 유적지에서는 두 개의 동방 교회 유적이 발굴되었다. 하나는 8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다른 하나는 10-11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이들 교회 유적과 함께 발견된 기독교 관련 유물들은 이 도시가 세미레치예 지역 기독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음을 명확히 증명한다.
이 도시들에서 발견된 수백 개의 기독교 묘비들은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활발한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묘비명 분석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이름, 직업(성직자, 상인, 군인 등), 그리고 사망 연도 등을 파악할 수 있어, 투르크 기독교 공동체의 사회 구조와 역사를 엿볼 수 있다.
D. 동방으로의 관문: 투르판 오아시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위치한 투르판 오아시스는 실크로드의 북쪽 경로에 자리한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곳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만나는 용광로였으며, 동방 교회 또한 일찍부터 이곳에 정착했다. 투르판 인근의 불라이크(Bulayiq) 유적지에서는 동방 교회 수도원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이곳에서 수많은 기독교 관련 필사본들이 출토되었다.
이 필사본들은 시리아어뿐만 아니라 소그드어, 고대 위구르어 등 다양한 언어로 작성되어 있어, 동방 교회가 현지 문화와 언어에 깊이 적응했음을 보여준다. 번역된 텍스트에는 시편, 복음서, 성인전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투르판의 기독교 공동체가 활발한 신앙 및 지성 활동을 펼쳤음을 시사한다. 특히 위구르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시리아 문자를 변형한 위구르 문자가 발전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투르판은 동방 교회가 중국 본토로 진출하기 위한 중요한 중간 기착지이자 문화 번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E. 사회문화적 영향: 문자 해독 능력, 번역, 시리아 문자의 적응, 소그드인과 투르크인의 역할
동방 교회는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과 다양한 투르크 부족들 사이에서 상당한 사회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시리아어는 교회의 주요 예전 언어였지만 [4, 9, 27, 28, 29, 32, 33, 34, 37, 39, 89], 교회는 현지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소그드어는 중앙아시아 기독교 공동체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많은 시리아어 텍스트가 소그드어로 번역되었다.[9, 29, 31, 32, 33, 34, 83, 88, 89, 117, 119, 124, 131] 시리아 문자는 소그드어뿐만 아니라 일부 투르크어를 표기하는 데에도 적용되었다.[9, 33, 34, 132]
F. 마니교 및 조로아스터교와의 상호작용: 공존과 갈등
중앙아시아의 다종교 환경 속에서 동방 교회는 마니교,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다른 주요 종교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불교 등 여러 종교의 요소를 통합한 혼합주의적 종교로서 [24, 133, 134, 135], 실크로드를 따라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확산되었다.
IV. 셀주크 및 서하 제국 시대 (11~13세기 초)
A. 셀주크 제국의 종교 정책: 딤미 지위, 관용과 압박
셀주크 제국(1037-1194년)은 수니파 이슬람을 국교로 삼았으며 [137, 138], 그들의 통치 하에 있던 동방 교회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딤미 지위를 유지했다.[91, 92, 93, 94] 셀주크 술탄들은 대체로 비무슬림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비잔틴 제국과의 군사적 대립 관계는 때때로 기독교 공동체에 압박으로 작용하기도 했다.[93]
B. 니샤푸르와 메르브의 기독교 공동체 (셀주크 시대)
셀주크 시대에도 니샤푸르와 메르브는 동방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사브리쇼 3세(Sabrisho III Zanbur)는 니샤푸르의 주교를 거쳐 1064년부터 1072년까지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를 역임했다.[140]
C. 서하(탕구트) 제국으로의 확장
동방 교회는 동쪽으로 계속 확장하여 서하(탕구트) 제국(1038-1227년) 지역에도 도달했다. 13세기 말 원나라 시대에 탕구트 관구장좌가 창설되었다는 사실은 [32] 이전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V. 몽골 제국 시대 (13세기 중반): 새로운 지평과 도전
A. 몽골 제국의 종교적 관용 정책
칭기즈칸과 그의 초기 후계자들 치하의 몽골 제국(13세기)은 다양한 종교에 대해 일반적으로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다.[91, 102, 145, 146, 147] 동방 교회는 몽골 제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케레이트, 나이만 등 여러 몽골 부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몽골 황실에도 소르칵타니 베키와 같은 기독교 신자들이 다수 존재했다.[102]
B. 카라코룸: 몽골 제국의 종교 중심지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윌리엄 루브룩(William of Rubruck)의 기록에 따르면, 카라코룸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공동체가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가지고 종교 활동을 이어갔다.
C. 야발라하 3세와 라반 사우마: 동서 교류의 가교
13세기 말, 중국 출신의 위구르족 수도사 라반 사우마와 그의 제자인 온구트족 출신 마르코스(후일 총대주교 야발라하 3세)의 여정은 동방 교회의 광범위한 네트워크와 동서 교류의 정점을 보여준다.[96, 102, 132, 148, 149, 150] 이들은 예루살렘 순례를 목표로 중국을 떠나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했으며, 야발라하 3세는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라반 사우마는 몽골 일칸국의 사절로서 유럽을 방문하여 교황과 여러 군주들을 만나기도 했다.[149, 150]
D. 원나라 시대 중국에서의 기독교 확장과 베이징(칸발리크)
몽골 제국이 중국을 정복하고 원나라(1271-1368년)를 세우면서, 동방 교회는 중국에서 다시 한번 부흥기를 맞이했다.[1, 10, 32, 102, 151] 원나라 수도인 칸발리크(Khanbaliq, 현 베이징)는 이 시기 동방 교회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카타이와 온그"(북중국 및 온구트족 지역) 관구의 중심지는 칸발리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 관구장주교좌가 설치되었다.[32] 야발라하 3세와 라반 사우마가 여행을 시작한 곳도 칸발리크였다는 점은 이곳이 당시 동방 교회의 주요 도시였음을 시사한다. 13세기 이탈리아 선교사 몬테코르비노의 요한(John of Montecorvino)의 기록에 따르면, 칸발리크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공동체가 있었고, 그는 이들과 경쟁하며 가톨릭 선교 활동을 펼쳤다. 이는 수도에 상당한 규모와 영향력을 가진 동방 교회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중국의 동방 교회는 주로 몽골인, 그리고 소그드인, 위구르인, 온구트인 등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민들(색목인)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원나라의 행정, 군사, 상업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중국 전역으로 전파했다. 전장(鎭江), 항저우(杭州), 취안저우(泉州) 등 남부 해안 도시들에서도 교회와 비문이 발견되는 것은 원나라 시대 동방 교회의 광범위한 활동 범위를 증명한다.
E. 동쪽 끝의 흔적: 발해와 고려에서의 기독교 가능성
동방 교회의 동진이 한반도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한 문제는 학계에서 여전히 논의 중인 흥미로운 주제이다. 직접적인 문헌 기록이나 명확한 고고학적 증거는 부족하지만, 몇 가지 정황 증거들이 발해와 고려 시대에 동방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발해 (698-926): 발해는 당나라 및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위구르 등과 활발히 교류했다. 당나라 수도 장안(시안)에는 발해의 사절단이 머무는 발해관이 있었으며, 이곳은 경교(동방 기독교) 사원인 대진사와도 가까웠다. 발해인들이 장안에서 경교를 접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일부 학자들은 발해의 유물에서 발견되는 십자가 형태의 문양이나 특정 장례 풍습이 동방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확증하기는 어렵다.
고려 (918-1392):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 또는 강한 영향력 하에 있었던 시기(원 간섭기)에 몽골 및 중앙아시아 출신 기독교인(색목인)들과의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고려에는 몽골의 공주들이 시집와 있었으며, 이들을 따라 많은 몽골인과 색목인들이 고려에 거주했다. 이들 중 일부가 동방 기독교 신자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돌십자가(혹은 십자형 유물)는 그 형태가 동방 교회 십자가와 유사하여 주목받았으나, 이것이 동방 기독교의 직접적인 증거라고 단정하기에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고려가요 '쌍화점'의 가사에 등장하는 "회회(回回)아비"가 중앙아시아 출신 상인을 의미한다면, 이들을 통해 기독교가 간접적으로나마 소개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발해와 고려 시대에 동방 기독교가 전래되었다는 주장은 아직 가설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당시 활발했던 국제 교류와 원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동방 기독교의 문화적 영향이나 신앙을 가진 개인 및 소규모 집단의 존재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는 연구 과제이다.
VI. 쇠퇴와 지속 (13세기 말 이후)
A. 쇠퇴의 요인: 몽골 칸국의 이슬람화, 티무르의 박해, 명나라 정책
14세기에 접어들면서 동방 교회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에서 급격한 쇠퇴를 경험했다.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몽골 제국 분열 이후 각 칸국에서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부상한 것이다.[10, 24, 151, 152] 특히 일칸국에서는 가잔 칸(Ghazan Khan, 재위 1295-1304년)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기독교도들은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잃고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152]
티무르(타메르란, Timur/Tamerlane, 1336-1405년)의 등장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1, 10, 14, 24, 26, 153, 154] 그의 군대는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하고, 수많은 기독교인을 학살하거나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10, 24, 153] 중국에서는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1368-1644년)가 들어서면서 외국 종교에 대한 배척 정책이 강화되어 중국 내 동방 교회 공동체는 거의 소멸하게 되었다.[10, 24, 151]
B. 티무르 제국의 영향: 메르브, 사마르칸트, 니샤푸르의 파괴
티무르의 군사 원정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동방 교회 공동체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정복 활동은 종종 대규모 학살과 도시 파괴를 동반했으며,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폭력의 주요 대상 중 하나였다.[153, 154] 티무르는 자신의 정복을 비무슬림에 대한 지하드(성전)로 선포하기도 했다.[153] 메르브, 사마르칸트, 니샤푸르와 같은 도시들은 티무르의 침략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 지역에서 동방 교회의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VII. 결론
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친 동방 교회의 동방 선교 여정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역동적인 확장 과정 중 하나였다. 에데사와 니시비스의 초기 지적 기반에서 출발하여, 사산조 페르시아의 복잡한 정치적, 종교적 환경 속에서 셀레우키아-크테시폰을 중심으로 교회를 조직하고 독자적인 신학적 정체성을 확립했다. 파파 바르 아가이, 마르 이사악, 바바이 대제와 같은 지도자들의 노력은 교회의 내부 결속을 다지고 외부 확장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실크로드는 동방 교회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과 투르크 부족들, 그리고 마침내 당나라 중국과 몽골 제국의 심장부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메르브, 니샤푸르, 레이, 사마르칸트, 부하라, 탈라스, 네바케트, 투르판, 시안(장안), 베이징(칸발리크), 카라코룸과 같은 도시들은 동방 교회의 주요 거점 도시이자 선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동방 교회는 시리아어라는 공통된 예전 언어와 문자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소그드어, 투르크어, 중국어 등 현지 언어로 성경과 예전 문헌을 번역하고 현지 문화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선교의 흔적은 동쪽 끝 발해와 고려에까지 그 영향의 가능성을 남기고 있다.
동방 교회는 각 시대별 왕조와 제국(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 아랍 칼리파국, 셀주크 제국, 탕구트 제국, 몽골 제국)의 종교 정책에 따라 관용과 박해를 번갈아 경험하면서도 놀라운 생명력과 적응력을 보여주었다. 딤미 지위 하에서의 제약 속에서도 지적 활동을 꽃피우고, 정치적 격변기에도 선교의 열정을 잃지 않았다. 특히 몽골 제국 시대에는 일시적으로나마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몽골 칸국들의 이슬람화, 티무르의 파괴적인 군사 활동, 그리고 명나라의 외국 종교 배척 정책 등은 동방 교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던 기독교 교파였던 동방 교회는 급격히 쇠퇴하여 메소포타미아와 인도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그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 교회의 천년에 걸친 동방 선교는 세계사, 특히 아시아 기독교사와 실크로드 문명 교류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장을 차지한다. 그들의 여정은 신앙의 전파가 단순한 종교적 현상을 넘어 문화적, 지적, 정치적 상호작용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비록 오늘날 그 규모는 크게 축소되었지만, 동방 교회의 역사적 유산과 문화적 기억은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종교와 문명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인류가 만들어 온 복잡하고 풍부한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