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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시리아 에데사에서 중앙아시아를 넘어 몽골 카라코룸을 거쳐 발해까지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최갈렙 소장 (전문가) / 박갈렙 교수(진행자)

©2025 무단복제.전제를 금합니다. 개인 학습용으로 사용을 허락합니다.


숨겨진 실크로드의 천년의 신앙 여정

서론: 숨겨진 실크로드의 천년의 신앙 여정

A (진행자): 안녕하세요, 「에데사에서 카라코룸을 거쳐 장안 발해까지: 실크로드를 따라간 복음의 발자취」 대담프로그램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저는 진행자 박갈렙이고, 오늘 이 흥미로운 긴 역사 여정을 함께해 주실 이분야 20년 넘게 연구해오신 전문가 최갈렙 연구소장님을 모셨습니다. 오늘은 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무려 천년에 걸친 동방 기독교 동진 선교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주로 서방 교회의 역사에 익숙한 분들이 대부분일텐데, 오늘은 지중해를 넘어 동쪽으로 향한 기독교의 여정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먼저 전체 지도를 한번 보시죠.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1

사진 1 동방기독교 동진 전체 지도

B (전문가): 안녕하세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통 기독교 역사를 생각하면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크에서 소아시아를 거쳐, 로마로 퍼져나간 서방 중심 이야기를 떠올리지만, 사실 동쪽으로도 놀라운 복음의 행진이 있었어요. 오늘은 그 잊혀진 동방 교회의 이야기를 살펴볼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시대별로 나눠서, 각 시대의 제국 상황주요 도시들을 따라가며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동방 교회라고 하면 지금의 아시리아 동방교회(종종 네스토리우스파로 불리기도 했던)로 이어지는 교회를 말합니다. 이 교회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에서 시작해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심지어 몽골의 카라코룸을 거쳐 발해까지 복음이 동진한전 과정이 오늘의 주요 주제입니다.

A: 와~, 정말 기대됩니다. 기대가 되면 “아-멘”해주세요. 천년 이상 이어진 대장정이라니, 오늘 한 번으로 끝나는 여정은 아니겠지만 복음의 동진에 대한 전체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B: (웃음) 분량이 방대하긴 하지만 차근차근 시대별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필요하면 지도나 연대표도 머릿속에 떠올려 보시면 좋아요. 실제 역사 현장에 우리가 가있는 사람처럼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여러 왕조와 제국의 변화 속에서 동방 기독교가 어떻게 적응하고 성장했는지, 또 어떤 주요 인물들이 활약했는지도 짚어볼 겁니다.

A: 네 좋습니다. 그럼 맨 처음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가볼까요? 동방으로 향한 복음의 여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나요? 우리가 알기론 시리아의 에데사인데요.

1~3세기: 에데사와 페르시아, 동쪽 교회의 태동에 대해서 알아보죠.

B: 전통적으로 동방 교회의 기원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에데사(Edessa)에서 찾습니다. 에데사는 오늘날 터키의 우르파 지역으로, 고대 왕국 오스로에네의 수도였어요.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에데사의 왕이었던 아브가르 5세가 예수님께 편지를 보내 (나병) 치유를 청했고,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사도 다대오(타대오)가 에데사에 와서 왕을 개종시켰다고 전해집니다en.wikipedia.org. 이 아브가르 왕의 개종 전설 때문에 에데사는 1세기에 이미 세계 최초의 기독교 왕국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전승의 성격이 강하지만, 실제로도 2세기경에 이미 에데사에는 활발한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한번 에데사 지도를 보시죠.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2

[지금 튀르키에 산우르파]

전승에 따르면 아브가르 5세(기원전 4년~서기 7년 및 서기 13~50년)가 최초의 기독교 왕이었습니다.

이야기에 따르면(서기 400년경 아다이 교리) 아브가르 왕은 나병(또는 통풍?)을 앓고 있었고 예수에게 편지를 써서 와서 고쳐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예수는 답장을 보내 자신의 땀과 흙으로 얼룩진 천사진을 보내고 나중에 제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그는 72명의 제자 중 한 명(내부의 12명은 아님)인 아다이 또는 다대오를 보냈고 아브가르는 개종했고 전해짐.

사진 2 에뎃사 지도

A: 전승이든 사실이든 , 에데사가 아주 이른 시기부터 기독교와 인연을 맺은 건 확실한가 봅니다?

B: 그렇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 기록도 있지요. 에데사 연대기에 따르면 서기 201년에 큰 홍수가 나서 에데사 시내에 있던 기독교 교회 건물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en.wikipedia.org. 201년에 “기독교인들의 교회”가 있었다는 기록은, 에데사에 이미 상당한 기독교 공동체와 예배당이 존재했음을 뜻하죠. 또한 232년에는 인도에서 순교한 사도 도마의 유해를 에데사로 가져왔다고 해요en.wikipedia.org. 이렇듯 에데사는 예루살렘이나 로마 못지않게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이 뿌리내린 곳이었고, 동방 선교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A: 에데사라... 초기 동방교회의 씨앗이 심어진 보금자리 도시네요. 그럼 에데사에서 퍼져나간 복음은 어떻게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나요? 당시 로마 제국의 동쪽 경계 너머에는 파르티아 제국(Persian Empire)이라고 불리던 이란 지역이었는데요? 한번 당시 제국의 지리를 살표보시죠.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3

파르티아제국

1세기경 파르티아제국 영토

위쪽에 스구디아 제국:스키타이인은 이란 계 유목 민족 , 뛰어난 승마 기술과 전사 문화로 유명함. 이들은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 경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로 이주하여 기원전 7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트라키아에서 몽골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에 걸쳐 번영했던 강력한 제국

--- 사진 3 파르티아 제국 지도

B: 맞아요. 에데사는 로마와 파르티아 제국의 접경지에 있었는데, 이 덕분에 두 제국 사이에서 신앙의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에데사 출신 신자들이 파르티아 영토로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도마(토마스)가 예루살렘을 떠나 동쪽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선교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지금도 인도 남부 케랄라에서는 자신들을 “도마의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오래된 기독교 공동체가 있어요. 이런 전승들이 시사하듯, 2세기경에는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지역 곳곳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봐야 합니다file-xn5vnqrwu58ya9agho18qw.

A: 당시 파르티아 제국에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어땠나요? 로마 제국에서는 1~3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는데, 파르티아 쪽은 달랐을까요?

B: 흥미롭게도 파르티아 제국에서는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 기록이 거의 없어요. 로마처럼 기독교를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파르티아는 다양한 종교에 관대했는데, 그 덕에 메소포타미아 동쪽으로 복음이 비교적 자유롭게 퍼질 수 있었죠. 예를 들어 아디아베네 지역(지금의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이나 아르빌(Arbela, 지금의 아르빌) 같은 도시에 일찍부터 교회가 생겨났어요.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아르빌에는 1세기에 이미 첫 번째 주교가 있었다고도 하지요. 실제 역사가 어떻든 간에, 3세기 초쯤 되면 페르시아 내에도 독자적인 기독교 공동체와 지도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증거들이 나타납니다.

A: 아, 그래서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을 때 페르시아에서도 주교가 참석했었다죠?

B: 정확해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페르시아와 대(大)인도의 주교” 요한이라는 사람이 서명했다는 기록이 있어요roger-pearse.com. 이는 페르시아 교회가 그때 이미 자치적인 교회 조직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까지 페르시아 지역 기독교인들은 안티오키아나 에데사 등 시리아 교회와 교류하면서 신앙을 키워 왔는데, 로마 제국의 박해 시기에는 오히려 페르시아 쪽이 신앙의 피난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니케아공의회 사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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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공의회(Councils of Nicaea)

소아시아의 니케아(현재 터키의 이즈니크)에서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된 세계적 규모의 종교회의.

1차 회의는 325년, 2차 회의는 787년에 열렸다. 회의의 목적은 기독교 교리(유월절, 파스카논쟁, 아리우스 논쟁)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 사진 4 니케아 공의회 사진

A: 에데사를 비롯해 파르티아 통치하의 도시들에서 신앙이 자라난 거군요. 그중에서도 셀레우키아-크테시폰은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쌍둥이 수도였는데, 거기에도 교회가 있었나요?

B: 네. 셀레우키아-크테시폰(Seleucia-Ctesiphon)은 티그리스 강변의 대도시로 파르티아와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였는데, 기독교 선교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였지요. 3세기 초쯤 이 도시에 비숍(주교)이 부임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훗날 이 주교가 페르시아 전역의 대주교, 즉 카톨리코스(총대주교)로 점차 위상이 높아져요. 그리고 410년에 페르시아 교회 주교들이 모여 셀레우키아-크테시폰 공의회를 열죠file-xn5vnqrwu58ya9agho18qw. 이 공의회에서 페르시아 교회의 자치권이 공식화되었어요. 로마 제국 교회(안티오크 등)로부터 독립적으로 자기들만의 최고 지도자를 두기로 한 거죠. 그 결과 셀레우키아-크테시폰의 대주교가 “동방의 가톨리코스”로 불리며 페르시아 교회를 총괄하게 됩니다. 셀레우키아-크테시폰 지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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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키아-크테시폰

2008년 찍은 호스로 2세의 황궁 아치 유적의 사진. 타크 카스라(Taq Kasra)

크테시폰은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도시이며 행정구역상 이라크 바그다드마다인 군의 살만 팍에 위치한다. 아르사케스 왕조사산 왕조수도 역할

[출처:나무위키]

사진 5 셀레우키아-크테시폰 도시 지도

A: 페르시아 교회가 일찌감치 독립적인 체계를 갖춘 거네요. 그만큼 신자 수도 늘어났고 조직도 커졌다는 의미일 텐데요.

B: 그렇습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는 이미 페르시아 전역에 여러 교구들이 있었고, 동쪽 변방까지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페르시아 동쪽 변경의 메르브(Merv)라는 오아시스 도시가 있어요.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는 메르브인데, 420년까지 주교가 파견되었고nestorianstudies.org, 5세기경엔 벌써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을 향한 선교 거점 역할을 했다고 해요nestorianstudies.org. 메르브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로 된 신앙 서적들을 현지 언어로 옮기는 작업도 했습니다nestorianstudies.org. 이러한 움직임은 복음이 페르시아 국경을 넘어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로 뻗어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죠.

A: 와~~, 생각보다 정말 이른 시기부터 저 멀리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까지! 그러니까 3세기까지 동방 교회의 모습이 어느 정도 그려지네요. 에데사 같은 시리아 도시에서 시작해서 파르티아-페르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가 조직이 정비되어 갔네요...

B: 맞아요. 정리해보면 1~3세기 동안 동방 기독교는 에데사에서 씨앗이 뿌려져 니시비스(Nisibis), 아르빌, 셀레우키아-크테시폰 같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도시들에 교회가 생겨나고, 더나아가 트랜스옥시아나(옥수수강 건너) 메르브 같은 동쪽 변경까지 파고들었어요. 이 시기의 제국은 로마와 파르티아(3세기 초까지)였는데, 파르티아에서는 상대적으로 평온하게 신앙이 전파되었고 로마 제국 영역에서는 박해가 있었지만, 에데사 등지에서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동방 교회 전통이 단단히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4세기 이후로 넘어가서,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로마의 국교화 시대 이야기를 해볼까요? 사산조 페르시아 영도 지도 제시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6

사산조페르시아제국

사산 제국은 파르티아 제국을 계승하여, 페르시아를 이웃한 대립국인 로마 제국(395년 이후 동로마 제국)과 함께 고대 후기의 주요 강대국으로 재편하였다.[[[제국은 아랍의 페르시아 정복으로 끝이 났다.
[출처:위키피디아]

사진 6 --사산조 페르시아 영토 지도

4~6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시대

4~6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시대로 넘어와 , 네스토리우스파의 형성 과정으로 가보죠.

A: 4세기부터 6세기까지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동로마(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지는 시기이죠. 반면 페르시아에서는 사산 왕조(224~651년)가 통치하고 있었고요. 이 시기에 동방 교회는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지 궁금해지네요?

B: 큰 변화의 시대였죠. 우선 로마 제국이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니까,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그전까지는 그냥 여러 종교 중 하나였던 기독교가 정치적 색깔을 띠게 된 겁니다. 즉, “기독교 = 라이벌 제국 로마의 종교”라는 인식이 생긴 거에요file-xn5vnqrwu58ya9agho18qw. 그래서 4세기 중엽에 사산조의 샤푸르 2세 왕은 페르시아 내 기독교인들을 로마의 잠재적 협력자로 보고 무려 40년간 박해를 시작합니다. 특히 340년대에 잔혹한 순교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어요. 당시 페르시아 교회의 수장이었던 마르 시몬 대주교도 순교했을 정도였죠.

한번 당시 핍박 사진을 상상해보시죠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7

샤푸르2세때 기독교 핍박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하던 나라에 기독교가 세력을 키워가자, 자신이 전쟁에 나간 뒤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개종하도록 명령

4세기 중엽에 사산조의 샤푸르 2세 왕은 페르시아 내 기독교인들을 로마의 잠재적 협력자로 보고 박해를 시작

사진 7 -- 샤푸르2세때 기독교 핍박 사진

A: 페르시아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시련이 닥친거군요. 그런데 한편으론 410년 공의회로 교회 조직도 갖췄다고 했는데,. 박해만 계속됐던 건 아니었나 봅니다?

B: 그렇습니다. 사산조도 상황에 따라 기독교 정책이 달라졌어요. 야즈데게르드 1세(재위 399-420년) 같은 왕은 비교적 관대해서, 410년에 셀레우키아-크테시폰 공의회를 열도록 허용했고 기독교인들을 좀 너그럽게 대해줬어요file-xn5vnqrwu58ya9agho18qw. 하지만 그 아들 바흐람 때 다시 박해가 있고... 이렇게 완화와 탄압이 교차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로마 제국 내부의 신학 논쟁이 동방 교회의 향방을 바꾸는 일이 생기는데요, 바로 네스토리우스 논쟁입니다.

A: 아, 드디어 네스토리우스 이름이 나오네요. 5세기 초에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논쟁에 휘말리어 이단 선언을 받게 된 거죠?

B: 네.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 교리가 정죄되었고, 이후 451년 칼케돈 공의회까지 거치며 기독교 세계가 교리로 시끌시끌했죠. 그런데 로마 제국에서는 이단으로 몰린 디오피소파(네스토리우스파) 신학자들이 핍박을 피해 대거 페르시아로 망명하게 됩니다file-xn5vnqrwu58ya9agho18qw.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잘 된 거예요.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로마에서 이단 취급받는 다른 버전이다”라고 함으로써, 로마 교회와 선을 긋고 정치적 의심을 피할 수 있었거든요file-xn5vnqrwu58ya9agho18qw. 실제로 페르시아 교회는 484년 베트 라팟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의 교리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입니다file-xn5vnqrwu58ya9agho18qw. 이때부터 아시리아 동방교회, 흔히 말하는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색채가 확실해졌죠. 한 마디로 동방교회 = 네스토리우스파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겁니다.

A: 아하, 페르시아 동방교회가 스스로 네스토리우스파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로마의 교회와 완전히 분리된 거군요.

B: 정확합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는 불행한 분열이지만, 페르시아 교회 입장에서는 생존 전략이었어요. 이로써 사산조 당국도 “이들은 로마 교회와 달라”라고 인정하게 되었고, 이후로는 비교적 공존이 가능해집니다. 그렇게 5세기 후반 이후 페르시아 교회는 자치적이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어요.

A: 그 시기 동방교회의 내부 상황은 어땠나요? 주요 인물이나 지적 발전 측면에서요.

B: 이 시기에 신학적·교육적 중심지로 떠오른 곳이 니시비스(Nisibis)예요. 니시비스는 원래 로마 제국 영토였는데, 363년에 페르시아에게 넘어갔거든요. 그때 로마 쪽에 있던 에데사 학교의 교사들과 신학자들이 니시비스로 옮겨옵니다en.wikipedia.org. 왜냐하면 489년에 로마 황제 젠온이 에데사 학교를 네스토리우스파 가르침 때문에 폐쇄해버렸거든요en.wikipedia.org. 쫓겨난 학자들은 페르시아 땅 니시비스로 가서 학교를 재건했죠. 이게 바로 유명한 니시비스 신학교입니다. 그곳의 학장으로 나르사이(Narsai) 같은 걸출한 신학자가 활약했고요. 또한 페르시아 교회의 영적 문학도 발전해서, 시리아어로 된 아름다운 찬양시를 남긴 성 에프렘(Ephrem) 같은 인물도 이 시대 사람입니다 (에프렘은 4세기말 에데사에서 활동했지만, 그의 전통은 동방교회 전역에 영향).

니시비시 신학교 사진 제시

니시비스신학교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8

Mar Ephrem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9

- 사진 8 니시비시 신학교와 마르 에프럼

A: 니시비스에는 어떤 유적이 남아 있나요? 혹시 그때 지은 교회나 수도원이라든지...

B: 네, 지금 터키의 누사이빈(Nusaybin)이 옛 니시비스인데, 거기에 마르 야쿱 교회(Mor Yakup Church)라는 오래된 교회 건물 터가 남아 있어요. 니시비스의 야곱 주교가 313년에 직접 세운 성당이라고 전해지고, 이 야곱 주교와 제자 에프렘이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도 참석했다고 합니다whc.unesco.org. 그 교회 유적에 4세기경의 세례당 비문도 발견되었는데, 그걸로 미뤄 4세기 중엽에 이미 니시비스가 대형 성당과 신학교를 갖춘 기독교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어요whc.unesco.org.

A: 와~, 정말 초창기 동방교회의 살아있는 흔적이군요! 니시비스가 기독교 중심지로서 역할을 감당했군요.

B: 세계 최초 니시비스 신학교에서 키운 인재들이 페르시아 전역과 더 동쪽으로 파견되면서 교세를 넓혔습니다file-xn5vnqrwu58ya9agho18qw. 또한 수도원 운동도 활발했는데, 바바이 대제(6세기 말~7세기 초) 같은 이는 수도원을 개혁해서 교회의 영성을 강화했어요file-xn5vnqrwu58ya9agho18qw.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점: 동방교회 신학자들은 그리스어 서적들을 시리아어로 번역해서 자기들 신학 교육에 활용했는데file-xn5vnqrwu58ya9agho18qw, 이 전통이 나중에 아랍 세계로 지식이 전달되는 밑바탕이 됩니다. (이 부분은 뒤에 다시 이야기할게요.)

A: 이야기가 아주 풍부해 지는데요. 자-, 6세기쯤 되면 한쪽에서는 동로마 제국이 국력을 떨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산조도 전성기를 누렸잖아요. 그러다 7세기 중반에 역사적 전환점이 찾아오게 되죠? 이슬람 칼리프 제국 지도 제시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10

이슬람 (압바스) 칼리파 제국의 등장

아랍어할리파(خليفة / Khalīfah), 튀르키예어로는 할리페(Halife), 영미권에서는 칼리프(Caliph)로 통칭.

예전에는 회교 황제, 회교 교황, 회황(回皇), 회교주 등으로 번역되었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표현은 칼리파[출처: 나무위키].

진 9 이슬람 칼리파 제국의 등장

B: 그렇죠. 바로 이슬람의 등장입니다. 7세기에 아라비아에서 이슬람교가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중동을 정복해버리죠.

A: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이슬람 칼리파 시대와 당나라 시기를 다뤄야겠네요.

7~9세기: 이슬람 칼리프 와 당나라 시대

7~9세기는: 이슬람 칼리프 와 당나라 시대가 되는데 이때 동쪽 끝인 중국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죠.

A: 그러니까 7세기로 접어들면서 이슬람 세력의 급속한 확장이 시작되었고, 651년에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그 땅들이 아랍 칼리프의 통치 아래 들어가죠file-j48fyadwwyzaeu6cfqhzcr. 이런 정치·종교 환경의 대격변이 동방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궁금해집니다.

B: 엄청난 전환점이었죠. 651년에 마지막 사산왕조 황제가 죽고 페르시아는 이슬람 제국의 일부가 됩니다. 기존의 조로아스터교 국가가 사라지고, 대신 무슬림 통치자들이 들어선 거예요. 하지만 이슬람은 "책의 민족"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습니다. 이슬람법 아래 기독교인과 유대인딤미(dhimmi)라고 해서, 일정한 인두세(지즈야)를 내는 대가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초기에 급격한 박해보다는 조세 부담과 사회적 제약이 있었지만, 종교 공동체로서 존속은 허용된 거죠. 그래서 페르시아 동방교회는 이슬람 통치 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file-xn5vnqrwu58ya9agho18qw.

A: 다행이네요. 그러면 오히려 사산조 때보다 나은 면도 있었을까요?

B: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시기마다 의심받고 박해받던 사산조 말기보다는, 통치자가 아예 이슬람으로 바뀌고 나서는 "소수 집단"으로서 안정된 면이 있었어요. 우마이야 왕조(78세기) 때도 큰 박해 기록은 없고, 압바스 왕조(813세기) 시대에는 바그다드 같은 데서 기독교인들이 학자나 의사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바그다드에 아시리아 동방교회 총대주교 좌석이 마련되어 교회 행정의 중심이 거기로 이동했고요. 유명한 네스토리우스파 의사 가문Bukhtishu 일가가 칼리프들의 시의를 지냈고, 후나얀 이븐 이스하크(Ḥunayn ibn Isḥāq) 같은 번역자도 나왔죠. 후나얀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으로 칼리프 궁정의 주치의 겸 번역가였는데, 고대 그리스 철학서와 의학서를 아랍어로 번역해서 이슬람 학자들에게 전수했어요britannica.com.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 갈렌 같은 이들의 저작이 아랍 세계에 알려졌고, 후대에 유럽으로 다시 전해지는 지식의 다리가 놓였습니다britannica.com. 이런 측면에서 동방 기독교인들은 문화와 학문의 중개자 역할도 했습니다.

A: 오, 동방교회 선교사들이 단순히 복음만 전한 게 아니라 학문과 문화도 함께 전파되었네요!

B: 맞아요. 실크로드를 따라 다니면서 복음뿐 아니라 책과 지식도 함께 가지고 다녔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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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활동했던 수도사와 선교사들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12

사진 10 학문적 활동했던 수도사와 선교사들 사진

A: 그런데 7세기에는 중요한 또 다른 사건이 있죠. 바로 중국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인데요.

B: 아, 네. 이건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당나라 시대인 635년에 아라본(Alopen, 알로펜)이라는 페르시아계 선교사가 장안(지금의 시안)에 도착합니다en.wikipedia.org. 당 태종 황제가 그를 직접 접견했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대진국의 경교”, 즉 로마로부터 온 밝은 종교라는 뜻으로 경교(景敎)라고 명명했어요en.wikipedia.org. 황제는 불경과 도경을 검토하듯이 이 기독교 경전도 살펴보고는, “이 가르침은 훌륭하다” 하며 수도에 경교 사원을 세우도록 허락했습니다en.wikipedia.org. 이렇게 해서 당나라에 기독교(경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거죠.

A: 7세기 중국 당나라 황제가 기독교 경전을 읽어보고 괜찮다고 한 거네요!

B: 당시 당나라는 굉장히 개방적이었어요. 장안 같은 도시는 국제도시여서, 페르시아인, 소그드인, 인도인 등 다양한 상인과 외국인이 드나들었거든요. 불교도 이미 중국에 깊이 들어와 있었고,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 신자들도 있었고요file-j48fyadwwyzaeu6cfqhzcr. 그중 경교, 즉 동방교회 기독교도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거죠.

A: 당나라에서 경교의 존재를 오늘날 알려주는 유물이 있다면서요? 바로 시안 비석 말이에요. 시안 돌비석 사진 제시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13

대진경교비

  • 세워진 시기: 당(唐) 건중 2년(781년).

  • 위치: 장안 서녕방(西寧坊) 대진사(大秦寺).

  • 내용: 중국에 경교가 전래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재발견 및 보관: 명대(明代)에 재발견되어 시안비림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 비문의 작성자와 건립자: 비문의 작성자는 경정(景淨, 시리아 명 아담)이며, 비의 건립자는 이사(伊斯, 이지드부지드)입니다.

  • 경교(Nestorianism): 예수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로,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 사진 11 시안 돌비석 사진 제시

B: 그렇습니다. 시안(장안) 비석은 781년에 세워진 큰 돌비석인데, 경교의 초창기 150년 역사가 새겨져 있습니다en.wikipedia.org. 중국 한문과 시리아어로 적혀 있어서, 당시 이 교회가 중국에서 어떻게 뿌리내렸는지 생생히 알 수 있어요. 비문을 보면, 태종 황제(당 태종)가 635년 아라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경교를 공인했다는 내용이 나와요en.wikipedia.org. 또한 당 고종 때 경교가 더욱 퍼졌고, 지방 여러 곳에도 경교 사원이 세워졌다고 하지요. 이 비석은 9세기 중엽 845년에 있었던 회창의 폐불(불교 등 외국 종교 탄압) 때 땅에 파묻혔다가, 1625년에 재발견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en.wikipedia.org.

A: 그 네스토리우스 비석에는 어떤 사람들의 이름들이 나오나요?

B: 네, 비문을 작성한 사람은 경교 수도사 '경경(景淨)', 즉 아담이라는 시리아 사람이에요en.wikipedia.org. 그리고 초기 선교사 아라본의 이름도 나오고, 많은 주교와 사제들의 직함이 적혀 있죠. 이를 통해 당나라에서 경교가 하나의 교구 조직을 갖추고 활동했음을 알 수 있어요en.wikipedia.org. 실제로 당나라 도시에 경교 사원이 있었고, 신자들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당나라의 중서령 두환이라는 고위 관료는 경교로 개종해서 묻힐 때 묘비에 십자가 문양을 새겼다는 기록도 있어요.

A: 대단하네요. 당나라 장안에서 십자가가 있는 묘비와 교회가 있었다니 당시 그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상상이 가지 않네요.

B: (웃음) 실크로드의 끝자락인 중국까지 복음이 전달된 모습이죠.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도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아까 잠깐 언급한 메르브에서 더 동쪽으로, 소그디아나 지역, 즉 지금의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일대에도 교회가 확산되었어요file-xn5vnqrwu58ya9agho18qw. 대표적인 고대 도시 사마르칸트부하라 같은 곳이죠. 이 도시들은 소그드 상인들의 활동 중심지였는데, 소그드인들 중 경교로 개종한 이들이 있어서, 사마르칸트에는 6~7세기경 주교좌가 설치된 것으로 전해져요. 실제 후대 기록을 보면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 경교의 대본산 중 하나였습니다. 소그디아나 상인들의 선교 활동 사진 제시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14

소그드 상인 비즈니스 미션

소그드인들은 실크로드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중국과 아시아 여러 지역 간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 상인 사회를 발전

기동성, 다국어 구사 능력, 그리고 고도의 기술을 갖춘 소그드인들은 서로 다른 지역을 연결하고, 장거리를 가로질러 상품과 기독교 사상을 전달

사진 12--소그디아나 상인들의 선교 활동 사진

A: 실크로드의 상인들이 신앙 전파에도 한몫 했군요. 우리나라에도 방물장수가 있어 사대부집 여성들은 최신 여성 장식품이나 화장품, 바느질 도구도 사고 바깥소식을 들으며 세상 물정을 알게되는 행상이 있어던 처럼요.

B: 맞습니다. 상인 선교사들이랄까요. 특히 소그드인들은 언어 능통하고 이동이 자유로워서, 경교 경전을 소그드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중앙아시아 사막의 터키 유목민들도 이들로부터 복음을 접했어요. 8세기경 한 기록에, 동방교회의 총대주교였던 티모테오 1세(Timothy I, 재위 780~823년)가 한 “투르크 왕”의 회심 소식을 전합니다nestorianstudies.org. 이 투르크 왕이 누구인가 한참 논쟁이 있었는데, 현대 학자인 마크 디킨스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카를룩족의 지도자였다고 해요nestorianstudies.org. 그 왕이 세례를 받고 자기 백성 수천 명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새로 주교좌도 설치되었다고 합니다nestorianstudies.org. 그 주교좌가 있던 곳이 탈라스(Talas)라는 곳으로, 지금의 카자흐스탄 탈라스 강 근처(Taraz)로 추정돼요nestorianstudies.org. 흥미롭게도 탈라스 하면 751년에 당나라와 이슬람이 싸운 탈라스 전투로 유명한데, 그 부근이 8세기 말에는 기독교 중심지였던 거죠!

A: 우와, 탈라스까지! 이건 정말 새롭네요. 그러니까 8세기 말이면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의 부족들까지 복음이 전달된 거군요?

B: 그렇습니다. 티모테오 1세 총대주교의 서신들을 보면, 중앙아시아 대부분인도인, 중국인, 투르크인, 티베트인까지 자기 관할에 있다고 자부했어요file-j48fyadwwyzaeu6cfqhzcr. 실제로 그의 시기 동방교회는 최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중국 당나라에도 교구가 있었고, 인도 남부에도 교회가 있었고, 티모테오는 심지어 티베트 지역에도 대주교를 임명했다고 해요taylorfrancis.com. 그의 치세에 새로운 관구(대교구)만 7곳 이상이 생겼는데, 그 중에는 라이(레이)(지금의 이란 테헤란 근처)도 있고, 뒷쪽 중국 서쪽 변경인 Kashgar 쪽 '동투르크스탄', 그리고 말씀드린 티베트까지 포함되었죠biblicaltraining.org.

A: 와~ 정말 지도가 넓어지네요. 그때 규모를 숫자로 따지면 어느 정도였을까요?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15

교구위치

에데사 - 니시비스-바그다드-아르벨-라이-니샤푸르-메르브-사마르칸트-네바갓-카쉬카르-알마티-탕구트-시안-카라코룸-

사진 13 교구전체지도 사진

B: 구체적인 신자 수는 모르지만, 참고로 역사학자 필립 젠킨스가 이런 말을 했어요: “8세기 당시, 기독교는 아직 독일인, 러시아인에게 전해지기도 전이었는데, 이미 동방교회의 총대주교는 19개 관구85개 교구를 감독하고 있었다nestorianstudies.org고요. 물론 이 숫자는 시대에 따라 변했겠지만, 티모테오 1세 시대에 동방교회가 광대한 영역을 목양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A: 19개 관구, 85개 교구라니... 중세 초 유럽을 빗대어 생각해보면, 진짜 세계교회였네요.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했어네요.

B: 네. 9세기 초쯤 동방교회는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중국에 이르는 실크로드 전체에 퍼진 거대 네트워크 교회였습니다.

A: 하지만 9세기 중엽에 당나라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아까 잠깐 언급하셨죠? 845년 회창 폐불(불교와 함께, 장안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삼이교(마니교·조로아스터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 배척) 때 경교도 같이 탄압받았다고 했죠.

B: 맞아요. 845년에 당 무종 황제가 불교와 함께 외래 종교들을 금지했는데, 이때 경교 사원들이 폐쇄되고 승려들이 환속되면서 중국에서 경교가 자취를 감춥니다en.wikipedia.org. 장안의 경교 비석도 이때 땅에 묻혔던 거고요. 그래서 9세기 후반부터 중국 본토에서는 기독교의 존재가 드물어졌어요. 하지만 중앙아시아에는 여전히 교회들이 살아남았습니다. 예를 들어 투르판(Turpan, 오늘날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 같은 오아시스에는 경교 공동체가 계속 있었어요. 투르판 지역의 불라이크(Bulayiq)라는 옛 수도원 터에서 시리아어·소그드어 경교 문서들이 발견되었거든요. 이런 걸 보면 당에서 물러난 신자들이 서쪽 변경에 머물렀던 것 같아요.

A: 9세기까지 동방 기독교의 동진 파노라마를 그려주셨네요. 요약해보면 이슬람 초기 칼리프 시대에 동방교회는 이슬람 세계 속에서 학문과 선교를 이어갔고, 한편 실크로드를 통해 동쪽 끝 중국 당나라까지 복음이 전해진거죠... 정말 파란만장합니다.

B: 네, 긴 시간 동안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공동체를 포용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거죠file-j48fyadwwyzaeu6cfqhzcr. 9세기 이후로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는데요, 바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왕조들과 몽골 제국의 등장입니다.

10~13세기: 이슬람화된 투르크 왕조들과 이어서 몽골 제국 시대

A: 네, 이제 10~13세기, 즉 이슬람화된 투르크 왕조들과 이어서 몽골 제국 시대를 살펴볼까요? 10~12세기에는: 투르크 왕조들과 숨겨진 교회, 그리고 프레스터 존 전설이 전해지고 있지요.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세계사적으로는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들이 세력을 떨친 시기입니다. 예를 들어 셀주크 튀르크나 그보다 앞서 사만조, 가즈니 왕조, 중앙아시아에 카라한조(Qarakhanids) 등이 있었죠. 이 시기 동방 기독교는 어떤 상황이었나요?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16

셀주크제국

셀주크 튀르크, 셀주크 왕조 혹은 셀주크 제국

1040년부터 1157년까지 중앙아시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지배한 제국이다. 셀주크 시대에는 사회, 종교, 문화적으로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셀주크 제국의 아래에서 튀르크계 인구는 처음 중동으로 이주하여, 현대 튀르키예의 토대

사진 14 --셀주크 튀르크 제국 지도

B: 10세기 전후로 큰 흐름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입니다. 카라한 왕조가 10세기 중엽 이슬람으로 집단 개종하면서, 투르크계 유목민들 사이에도 이슬람이 빠르게 퍼져나가게 되지요. 덕분에 이전 시대에 중앙아시아에서 번성하던 불교, 마니교, 기독교 공동체들이 점차 주류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file-j48fyadwwyzaeu6cfqhzcr. 예를 들어 카슈가르사마르칸트, 부하라 같은 도시들은 10~11세기에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변모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어요. 소수 공동체로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A: 소수 공동체로 명맥을 유지했다면 은밀하게 신앙을 지킨 건가요?

B: 은밀하다기보다, 딤미 신분으로 그냥 살아간 거죠. 이슬람 치하에서 교회 건물을 새로 짓거나 선교를 활발히 하기는 어려웠겠지만, 기존 교인들은 가정을 통해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사실 중앙아시아의 유목 부족들 중에는 끝까지 기독교를 간직한 집단들도 있었어요. 대표적인 예가 케레이트(Kerait)족인데, 이들은 11세기 초(1007년경)에 집단으로 네스토리우스파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en.wikipedia.org. 케레이트는 몽골고원에 있던 유력 부족인데,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소식이 나중에 유럽에 “프레스터 존” 전설을 낳게 됩니다en.wikipedia.org. 유럽인들이 “동방에 그리스도교도 왕국이 있다더라” 하는 소문을 듣고 환상을 키웠는데, 일부는 바로 이 케레이트족 왕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죠. 실제 역사 속 케레이트의 왕 토그릴은 12세기에 서방에서 존 왕(Prester John)으로 소문나기도 했어요.

A: 아, 프레스터 존 (존 왕 전설)! 중세 유럽 사람들이 동방에 기독교 왕국이 있다고 믿어서 제3차 십자군 때도 동맹을 기대했다는 그 전설이군요.

B: 맞아요. 그 전설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 논쟁이 있지만, 중앙아시아에 숨어 있는 동방 기독교 왕국에 대한 서구인의 상상력이었죠file-xn5vnqrwu58ya9agho18qw. 아마도 케레이트족이나, 혹은 12세기에 이슬람을 격파했던 카라키타이(서요, Western Liao) 제국에 기독교도가 있을 거라는 추측 등에서 나왔을 거예요file-xn5vnqrwu58ya9agho18qw. 카라키타이 제국은 사실 불교색이 강했지만, 그 치하에서도 기독교 공동체는 존재했습니다file-xn5vnqrwu58ya9agho18qw. 그러니 유럽 입장에선 동방에 강대한 기독교 동맹군이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한 거죠.

A: 중앙아시아 상황이 그랬다면,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쪽 동방교회 본거지는 어땠나요?

B: 이슬람 세계 안에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지속됐어요. 바그다드에 있던 총대주교좌는 유지되었고, 11-12세기에도 교회 조직은 살아있었습니다file-xn5vnqrwu58ya9agho18qwfile-xn5vnqrwu58ya9agho18qw. 다만 셀주크 튀르크 같은 수니파 술탄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사회적 제한은 분명히 있었죠. 하지만 공식적인 박해는 드물었고, 여전히 동방교회 신자들은 자신들 교회를 지키는 데 성공했습니다file-xn5vnqrwu58ya9agho18qw. 특히 몽골 고원에 흩어져 살던 네스토리우스파 부족들—예컨대 케레이트, 나이만, 옹구트 등—과도 계속 연락망을 유지했어요file-xn5vnqrwu58ya9agho18qw. 11-12세기 동안 동방교회는 서쪽으론 예루살렘의 성지 순례를 갔다 오기도 하고, 동쪽으론 몽골 귀족들과 통혼 관계도 생기고 하면서, 조용하지만 넓은 지리적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A: 통혼 관계라면 무슨 뜻이죠?

B: 예를 들어, 카라키타이케레이트 같은 중앙아시아 부족들과 동방교회 가문들이 혼인 동맹을 맺는 일들이 있었어요. 그만큼 중앙아시아 기독교 공동체가 현지 사회에 녹아 있었다는 얘깁니다.

A: 그렇군요. 그리고 12세기 말, 13세기 초가 되면 등장하는 대제국 몽골 제국이죠. 드디어 카라코룸까지 가 보겠습니다!

13세기에는: 몽골 제국때 동방 교회의 황혼기를 맞이했다고합니다.

A: 13세기는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대부분을 정복한 시대입니다. 이 시기에 동방 기독교는 어떤 모습이었나 궁금해집니다? 몽골 제국은 여러 종교에 관대했다고 들었는데, 동방교회에는 유리하게 작용하였나요?

B: 네, 몽골 제국의 등장은 동방교회에 새로운 기회이자 도전이었어요. 아시다시피 몽골인들은 본래 샤머니즘 신앙을 가졌지만, 정복 전쟁을 하면서 다양한 종교를 접하게 됩니다. 칭기즈 칸이 여러 부족을 통합했을 때, 그 연합 부족들 중 최소 일곱 개 부족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는 부족이었습니다nestorianstudies.org. 대표적으로 아까 말한 케레이트족, 그리고 나이만족, 옹구트족, 위구르족 등인데요nestorianstudies.org, 칭기즈 칸이 1206년 몽골 제국을 세울 당시 이 기독교도 부족들이 전체 몽골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어요. 케레이트족만 해도 20만 명 정도의 크고 강한 부족이었는데, 이들이 몽골 제국의 중추가 되었습니다nestorianstudies.org. 그러니 칭기스칸과 그 후계자들이 기독교를 박해할 이유가 없었죠.

A: 몽골 황실과 기독교의 관계도 꽤 가까웠다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칭기즈 칸의 며느리 소르칵타니 베키가 기독교인이었다던가요?

B: 맞아요.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 톨루이의 아내인 소르칵타니 베키(Sorghaghtani Beki)가 케레이트족 공주 출신으로 열렬한 네스토리우스파 신자였어요en.wikipedia.org. 그녀는 몽골 제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영향력 있는 여성이죠. 그녀 슬하에 몽케, 쿠빌라이, 헐레구 같은 훗날의 대칸들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들을 어머니로서 기독교 신앙에도 익숙하게 키웠다고 해요ebsco.com. 물론 아들들 중 누구도 공식 개종하진 않았지만, 몽골 황족들이 기독교를 호의적으로 대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소르가흐타니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ebsco.com. 그녀 자체가 여러 종교에 관대하고 현명해서, 몽골 제국의 종교정책에도 영향을 주었죠en.wikipedia.org.

A: 몽골 제국 초기의 관용 정책 아래, 동방교회는 다시 살아나게 되는 기회가 찾아 온 것 같네요?

B: 네. 몽골 시대에 동방교회는 새로운 부흥을 누립니다. 예전에 당나라에서 사라졌던 경교도 몽골의 중국 지배 아래서 부활했어요. 몽골 제국은 종교자유 정책을 펴서 이슬람, 불교, 기독교, 도교 모두 허용했고, 심지어 세금 면제 같은 혜택도 성직자들에게 줬어요. 그러니 중앙아시아와 중국 곳곳에 오랫동안 침체되었던 교회가 다시 활기를 띠었습니다.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17

몽골제국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윌리엄 루브룩(William of Rubruck)이 1254년에 카라코룸을 방문했을 때, 그 도시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두 곳이 있음을 기록

몽골 제국을 배경으로 서방으로 파견된 사절 라반 바르사우마가 있습니

다. 한마디로 “동방의 마르코 폴로”라고 할 만한 인물

사진 15 몽골제국 – 카라코룸

A: 카라코룸 얘기를 좀 해주시죠. 카라코룸은 몽골 제국의 수도였는데, 거기에 교회가 있었다고요?

B: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윌리엄 루브룩(William of Rubruck)이 1254년에 카라코룸을 방문했을 때, 그 도시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두 곳이 있음을 기록으로 남겼어요. 그중 한 곳에서 그는 부활절 예배도 참석합니다. 몽골 고위층 중 기독교도가 많았던 덕에, 카라코룸뿐 아니라 몽골령 중국 대도시들에도 교회가 세워졌어요. 베이징(원 대도)에도 네스토리우스파 대주교가 주재했고, 돌곤(Dadu)과 항저우 같은 도시에까지 신자들이 있었죠. 심지어 원나라 시기에는 중국인들도 일부 개종해서, 한족 신자 이름이 새겨진 묘비들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A: 이 시기에 기억할 만한 동방교회 인물이 있을까요?

B: 13세기라 하면, 저는 라반 사우마(Rabban Bar Sauma)를 꼭 언급하고 싶어요. 중국 출신의 네스토리우스파 수도사인데요, 그는 몽골 제국을 배경으로 서방으로 파견된 사절이 됩니다. 한마디로 “동방의 마르코 폴로”라고 할 만한 인물이죠britannica.com. 그는 베이징 근처에서 태어난 위구르계 기독교인이었는데, 예루살렘 순례를 가려다 여의치 않자 바그다드에 머물게 돼요britannica.com. 마침 그곳 총대주교의 신임을 받아 원나라 황실의 부탁을 받은 일칸(Ilkhan) 아르군유럽 사절로 지명됩니다britannica.com. 1287년부터 그는 콘스탄티노플, 이탈리아 로마, 프랑스 파리, 잉글랜드 보르도 등 서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교황과 왕들을 만나 몽골-유럽 동맹을 논의했어요britannica.com. 그는 중국인이자 동방교회 성직자로서는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사람으로 기록됩니다. 그가 남긴 여행기는 아주 흥미로워요. 당시 교황청에서 그에게 "네스토리우스 신앙 고백을 한번 해보라"고 요구했다가, 서방 교회와 교리가 달라 곤란해하는 에피소드도 있어요britannica.com.

A: 정말 굉장한 시대네요. 몽골 제국하에서 그런 문명의 교류가 이루어졌다니!

B: 네, 몽골 제국은 말하자면 실크로드를 하나의 통일 국가 안에 둔 셈이어서, 사람들이 동에서 서까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고, 동방 기독교인들도 그 혜택을 보았습니다.

A: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완전히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13세기 이후로 동방교회가 크게 쇠퇴했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B: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13세기 말부터 몽골 제국이 이슬람화되기 시작하고, 또 14세기에는 흑사병 같은 재앙도 닥치면서,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교회들은 급속히 쇠퇴합니다. 예를 들어 몽골 제국의 페르시아 지배자였던 일칸국이 1295년 이슬람을 국교로 삼으면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이 줄어들었고, 14세기 중반에는 티무르 제국의 정복으로 많은 교회가 파괴되었죠. 그러나 이것은 13세기 이후의 이야기이고, 오늘 우리 대담프로그램의 범위를 벗어나는 주제가 되네요.

A: 네, 오늘은 13세기까지였으니까요. 그래도 그 이후 역사는 다음 기회에 또 들어보고 싶네요. 한번 전체를 요약해주시죠.

B: 요약하자면, 1세기 에데사의 작은 씨앗으로 시작한 동방 기독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카라코룸의 대제국 궁정까지 도달했어요. 그 과정에서 로마, 페르시아, 이슬람, 중국, 몽골 등 온갖 제국들의 흥망 속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수많은 언어와 문화를 넘나들며 영향을 끼쳤습니다. 잊혀졌던 이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점도 많을 거예요.

A: 정말 귀중한 동방기독교의 동진에 대한 감춰졌던 이야기였습니다. 동방의 교회가 남긴 복음의 발자취가 이렇게 장구하고도 드라마틱할 줄 몰랐네요. 오늘 함께해주신 최갈렙 소장님 감사합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재미있으셨나요? 재미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내년에 또 흥미로운 주제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대담 : 실크로드를 따라간  천년의  동방 기독교 복음의 발자취 image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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