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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시리아 기독교 - 과거와 현재 담론

동방 시리아 기독교 - 과거와 현재 담론

(The Assyrian Christian, Past and Present podcast)

1부: 동방교회와 실크로드의 확장

진행자 1:
자, 우리가 실크로드를 생각할 때 보통 낙타나 끝이 안 보이는 먼 거리, 그리고 이국적인 물건들을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만약 이 같은 네트워크가 종교 운동도 함께 전파했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것도 그냥 종교가 아니라 고대 세계의 학문 일부를 보존한 운동이었다면요? 오늘은 그 얘기를 깊이 있게 다뤄보려고 해요. 오늘 참고할 프레젠테이션은 두 가지입니다. 킹스대학교의 마크 디킨스는 실크로드를 따라 확산된 동방교회에 대해 발표했고, 노스웨스턴대학교의 조너선 룹스트라는 동방교회와 고대 지식의 전달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진행자 2:
맞아요, 오늘 다룰 내용이 정말 많아요. 대략 2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아주 긴 시간대를 다루거든요. 그리고 ‘동방교회’라는 역사적 용어가 지금 우리가 말하는 ‘아시리아 동방교회’를 의미한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해요. 이 교회가 어떻게 페르시아에서 시작해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확산된 국제적 운동이 되었는지 살펴보고, 또 이 교회가 고대 지식을 어떻게 전파했는지도 알아볼 거예요.

진행자 1:
그럼 먼저 동방교회의 규모부터 짚고 넘어가죠. 마크 디킨스의 발표를 보면 이 교회가 그냥 작은 소수 집단이 아니었다는 게 분명해요. 정말로 엄청난 존재였거든요. 구체적으로 얼마나 넓게 퍼졌는지 어떤 증거가 있을까요?

진행자 2:
8세기 후반에 활동한 티모시 3세 총대주교가 한 말이 인상 깊어요. 그는 기독교가 바벨론, 페르시아, 아시리아에서 번성하고 있고, 더 나아가 인도인, 중국인, 티베트인, 투르크인 등에게도 전파되었으며 이 모두가 자신의 관할 하에 있다고 했어요.

진행자 1:
정말 대담한 선언이네요. 그만큼 영향력이 있었다는 얘기겠죠.

진행자 2:
맞아요. 그런 영향력을 그 당시 어떻게 유지했는지 상상이 안 갈 정도죠. 디킨스는 중앙아시아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거든요.

진행자 1:
지리적으로도 중앙아시아는 이란, 인도, 중국을 연결하는 중심지였잖아요. 심지어 후에 러시아가 되는 지역까지 영향을 줬고요. 거긴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언어와 사상이 교차하는 곳이었죠. 투르판 같은 지역에서는 소그디아어, 몽골어, 중세 페르시아어 등 여러 언어가 함께 쓰였다는 증거도 있어요.

진행자 2:
언어뿐 아니라 신앙도 섞였죠. 중앙아시아는 종교의 용광로였어요. 조로아스터교, 애니미즘, 샤머니즘 같은 토착 종교는 물론, 실크로드를 따라 불교, 마니교,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이후에는 이슬람까지 들어오게 되죠.

2부: 동방교회의 확산과 사역

진행자 1:
그럼 이렇게 다양한 종교가 모여 있던 중앙아시아에서, 이 특정한 형태의 기독교—즉, 시리아 전통의 기독교—는 어떻게 동쪽으로 전파된 걸까요? 마크 디킨스가 언급한 초기 증거에는 어떤 것들이 있죠?

진행자 2:
꽤 이른 시기부터 연결고리를 볼 수 있어요. 2세기 후반의 바르데이산은 『나라들의 법』이라는 저작에서 쿠샨 제국[i], 그러니까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일대에 기독교인들이 있었다고 언급해요. 그리고 250년경에는 『사도들의 교리』라는 시리아어 문헌에 복음 전파가 동쪽으로 확장되었다는 기록도 있어요. 그 문헌엔 ‘곡과 마곡의 땅’이라는 표현도 나오는데, 구체적인 위치는 언급되지 않아요.

진행자 1:
그러니까 초기에 ‘동쪽으로 나아가자’는 포부는 있었지만, 명확한 지리적 근거는 아직 부족했던 거군요.

진행자 2:
맞아요. 하지만 더 구체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동방 시노드 회의 기록인 Synodicon Orientale에서 424년에 열린 회의에 무르브(메르브, Merv)와 헤라트(Herat) 출신의 주교들이 참석한 기록이 있어요. 무르브는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이고, 헤라트는 아프가니스탄에 있어요. 즉, 5세기 초에는 이미 주요 중앙아시아 도시들에 기독교 공동체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거죠.

진행자 1:
그리고 무르브는 동쪽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 중요한 출발점이었죠? 그곳이 특별했던 이유가 뭘까요?

진행자 2:
무르브는 페르시아 제국의 동쪽 경계에 있었고, 교통과 무역의 요지였어요. 동방교회 입장에선 선교의 거점이었죠. '마르바'라는 인물이 무르브에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전설도 있어요. 고고학적 증거는 논쟁 중이지만, 교회로 추정되는 대형 건축물도 발견되었어요. 분명히 무르브는 선교의 발판 역할을 했습니다.

진행자 1:
그리고 거기서 소그디아 지역—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쪽으로—전파되었죠?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같은 곳이요?

진행자 2:
맞아요. 소그디아인들은 실크로드의 핵심 상인이었고, 그들의 문화적 영향력은 중국까지 미쳤어요. 660년경 사마르칸트 근처 아프라시아브(Afraziab)에서 나온 벽화는 정말 인상적이에요. 소그디아인뿐 아니라 투르크인, 중국인, 한국인까지 등장하는 다문화 사회의 모습을 보여줘요. 소그디아인들이 이 교류 네트워크에서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죠.

진행자 1:
그리고 사마르칸트 자체가 동방교회의 대도시 중심지였죠?

진행자 2:
그렇습니다. 사마르칸트는 대교구—즉 대주교가 관할하는 도시가 되었어요. 학자들 사이에서는 정확한 시기를 두고 논쟁이 있지만, 6세기나 7세기 무렵이 유력해요.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죠. 투르크 카간국(Khaganate)[ii]의 흥망성쇠, 중국 제국의 세력 확장, 페르시아 사산 제국의 영향력, 그리고 이슬람 아랍 칼리프의 부상까지. 다양한 권력들이 이 지역을 두고 다투던 시기였어요.

진행자 1:
그런 환경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진행자 2:
그들과 주변 문화 간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591년경 비잔틴 문헌에서는 페르시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힌 투르크인들이 이마에 십자가 문신을 새겼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기독교인들이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하라고 권했다고 해요. 또 644년경 시리아 연대기에는 무르브 근처의 소왕국 지도자와 그의 군대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복음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퍼져나가고 있었던 거죠.

3부: 중국으로 전파된 기독교와 이슬람 시대의 변화

진행자 1:
기독교가 그렇게 멀리까지 전파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중국의 ‘시안 비석’이죠? 정말 놀라운 유물이에요.

진행자 2:
맞아요. 그 비석은 781년에 세워졌고, 635년에 동방교회 선교사 알로펜(Alopen)이 당시 중국 수도에 도착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어요. 그가 동방교회 총대주교의 파견으로 중국에 온 것이고, 당시로선 정말 상상하기 힘든 여정이었죠. 더 흥미로운 건 그 비석에 새겨진 이름들입니다. 전통적인 시리아식 이름도 있지만, 중세 페르시아 이름도 있어요. 그러니까 선교단 자체가 다문화적이었던 거죠. 이 비석을 세운 인물의 아버지도 원래 박트리아 출신이었다고 해요. 얼마나 넓은 네트워크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죠. 그리고 9세기에는 뤄양 지역에 소그디아식 성을 가진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어요.

진행자 1:
그러니까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동방교회는 문화적으로도 매우 다양한 공동체가 되었던 거군요.

진행자 2:
그렇죠. 하지만 이런 확장이 항상 순조롭지만은 않았어요. 7~8세기의 아랍 정복은 이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진행자 1:
특히 651년에 사산조[iii] 페르시아 제국이 몰락한 건 정말 큰 전환점이었죠?

진행자 2:
정말 결정적인 사건이었어요. 물론 페르시아 지역은 빠르게 정복되었지만, 중앙아시아는 시간이 더 걸렸어요. 예를 들어 아무다리야 북쪽, 특히 부하라 같은 곳은 709년에야 아랍에 의해 정복되죠. 몇 세기 뒤 나르샤히가 쓴 『부하라 역사』에 따르면, 당시 아랍인들이 기독교 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했다고 해요. 흥미로운 건 아직 부하라 자체에서는 그 시기의 기독교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주변 지역에서는 발견됐어요. 예를 들어 타지키스탄에서 발견된 시리아어 시편 조각은 소그디아어를 모국어로 가진 사람이 쓴 것으로 보여요—맞춤법 오류가 그것을 보여주죠. 지역 공동체가 그들의 언어에 맞게 기독교 문헌을 변형해 사용했다는 증거예요. 또 헤라트에서는 중세 페르시아어가 새겨진 행렬용 십자가도 발견됐고, 더 멀리 인도에서도 9세기경 중세 페르시아어 문구가 새겨진 십자가들이 발견되었어요. 연결망이 정말 방대했죠.

진행자 1:
이렇게 언어와 유물을 통해 과거의 교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라워요.

진행자 2:
그렇죠.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동방기독교가 현지 문화에 적응했다는 증거들이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사마르칸트에서는 조로아스터교 전통의 유골함(ashuaries)이 기독교 묘지에서 사용되었어요. 문화가 섞였다는 증거죠.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건 7~8세기 사마르칸트, 부하라, 타슈켄트 등지에서 발견된 동전이에요. 거기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거든요. 이는 당시 이 지역에 기독교 군주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해요.

진행자 1:
우와, 중앙아시아에 기독교 군주라니—정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네요.

진행자 2:
그렇죠. 그리고 소그디아 지역에서 발견된 은접시들도 인상적이에요.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제작된 걸로 추정되는데, 우랄 산맥까지 퍼져 있었어요. 일부는 성경 장면과 함께 시리아어 문구가 새겨져 있었어요. 이 역시 실크로드를 따라 종교 이미지와 문서가 퍼졌다는 걸 보여줘요.

진행자 1:
다시 티모시 1세 총대주교 이야기로 돌아가보죠.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탈라스 전투(751년) 이후죠?

진행자 2:
맞아요. 티모시의 편지를 보면, 투르크 왕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8세기 후반쯤 투르크인을 위한 대주교 임명을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아마도 탈라스 북쪽 지역을 통치하던 투르기쉬 왕국을 말하는 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그 수도였던 탈라스(현 카자흐스탄의 타라즈)는 893년에 함락되었고, 교회는 모스크로 전환되었죠. 그런데 탈라스에서도 기독교 유물이 나왔어요. 예를 들어, ‘베드로’와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토기, 그리고 십자가가 새겨진 토기 등도 발견되었죠.

진행자 1: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공동체의 기억과 흔적이 남아 있었던 거네요.

진행자 2:
맞아요. 그리고 더 동쪽이나 남쪽으로 전파된 흔적들도 있어요. 예를 들어, 파키스탄 북부에서 발견된 사비아 문자 십자가는 9세기 중반 것으로 추정되며, 기독교 순례자의 흔적으로 보입니다. 티베트 문헌에서도 동방교회 전통의 십자가가 그려진 것도 발견되었고요. 티베트와도 접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죠.

4부: 문헌, 지식의 전승, 투르판 문서

진행자 1:
그리고 고고학적 발견 외에도, 후대의 문헌들이 이 공동체들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많죠.

진행자 2:
맞아요. 예를 들어 무르브 출신인 이쇼다드(Ishodad of Merv)는 9세기의 저명한 성경 주석가였어요. 무르브에서 그런 학문 전통이 지속되고 있었다는 증거죠. 또 9-10세기의 청동 향로, 십자가 주형, ‘행운’이나 ‘축복’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가 적힌 작은 십자가도 나왔어요. 소그디아 전역에서는 7세기부터 14세기까지의 착용형 십자가들이 다수 발견되었죠. 꽤 오랫동안 이 지역에 큰 규모의 기독교 인구가 있었던 겁니다.

진행자 1:
정말 엄청나네요. 이렇게 광범위하고 다양한 환경 속에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것이요. 마크 디킨스는 발표를 테림 분지 이야기로 마무리했죠? 지금의 중국 서부 지역이요.

진행자 2:
맞습니다. 10~11세기에 이르면, 타클라마칸 사막 지역에서도 기독교의 흔적이 확인됩니다. 거기엔 기독교 수도원이 있었고, 그곳에서 나온 자료들이 바로 ‘투르판 문서’예요. 여기에는 중세 페르시아어와 시리아어로 된 시편, 소그디아어 찬송가, 니케아 신경의 소그디아어 번역본, 그리고 위구르 문자로 적힌 시리아어 시편도 있어요. 즉, 수도사들이 시리아어를 더 이상 모국어로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례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언어로 옮기거나 문자를 바꿔 사용한 거예요. 신앙의 끈질긴 지속력을 보여주는 사례죠.

진행자 1:
정말 놀라운 이야기예요. 신앙과 문화 교류가 이렇게 광범위한 거리와 시간 속에서도 이어졌다는 것이요. 그리고 이렇게 실크로드를 따라 널리 퍼져 있던 동방교회는, 우리가 이제 다룰 두 번째 주제로 연결되죠—고대 지식의 전파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요. 조너선 룹스트라의 발표입니다.

5부: 동방교회와 고대 지식의 전승

진행자 2:
룹스트라는 발표에서 정말 중요한 점을 짚고 있어요. 당시 시리아어 기독교 공동체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정치적 경계 양쪽에 살고 있었으며 여러 문화가 만나는 접점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식 교류의 매개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진행자 1:
그리고 시리아어 자체도 지식 전파에 적합한 언어였죠. 왜 그렇게 평가되는 걸까요?

진행자 2:
시리아어가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라틴어나 그리스어처럼 특정 제국에 속한 언어가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그런 정치적 배경이 없기 때문에 시리아어로 번역된 텍스트는 여러 지역과 정치 체계를 넘나들며 퍼질 수 있었어요. 룹스트라는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을 지적해요—시리아어 번역자들은 국가 권력이나 종교 권위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진짜 관심 있는 텍스트를 자유롭게 번역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러니까 필요에 따라, 혹은 공동체에서 실제로 요구하는 것들을 번역했을 수 있어요.

진행자 1:
그게 참 흥미로워요. 정치적 독립성이 오히려 더 다양한 지식 보존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요.

진행자 2:
맞아요. 그리고 룹스트라는 ‘고대의 메아리(Echoes of Antiquity)’라는 표현을 써요. 시리아어 문학 안에는 분명한 메소포타미아 유산이 남아 있어요. 예를 들어, 시리아어에는 ‘논쟁 시(poem of dispute)’라는 장르가 있는데, 태양과 달, 여름과 겨울이 서로 말싸움을 벌이는 식의 형식이죠. 학자 세바스찬 브록은 이 장르를 고대 수메르 문학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으로 연결지어요.

진행자 1:
그런 시들 정말 재밌죠.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사상과 지혜가 담겨 있어요.

진행자 2:
맞아요. 시리아어로 남아 있는 그런 논쟁 시가 50편이 넘어요. 또 룹스트라는 시리아 기독교가 유대 지식 전통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해요.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와 유대 전통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거죠. 이런 흔적은 시리아어 성경 번역—예를 들어 페시타(Peshitta)—이나 아프로하트(Aphrahat), 에프렘(Ephrem) 같은 초기 작가들의 저술에서도 확인돼요.

진행자 1:
그러니까 시리아 기독교 문화 자체가 다양한 지적 전통의 융합이었네요.

진행자 2:
정확히 그렇습니다. 또 언어적 유산도 중요하죠. 시리아어는 아람어 계열 언어인데, 아람어는 지식 전달과 문서화에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어요. 아르메니아어나 조지아어 같은 기독교 언어들이 문자로 발전하기 전부터 이미 아람어는 문자로 기능하고 있었죠. 실제로 시리아어는 원래 ‘아람어’로 불리기도 했고, 고대 도시 두라-에우로포스 같은 곳에서는 시리아어 비문이 다른 언어 비문과 함께 발견되기도 해요. 또 아히카르(Ahiqar) 이야기처럼 고대 아람어 설화가 시리아어를 통해 전해지기도 했어요. 시리아어가 다양한 문화권의 지식과 전통을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했던 겁니다.

진행자 1:
그래서 시리아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지적 세계를 잇는 매개자가 될 수 있었군요.

진행자 2:
맞아요.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다른 기독교 전통들—비잔틴, 아르메니아, 누비아, 인도 기독교 전통 등—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거예요. 특히 인도에서 발견된 중세 페르시아어가 새겨진 십자가처럼요. 동방교회 사가들의 연대기는 이러한 문화 간 연결을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예요. 어떤 사건들은 이들의 기록이 유일한 자료이기도 하죠.

진행자 1:
그런데 당시 시리아어로 번역된 문서들은 대부분 그리스어 원본이 있었던 거죠?

진행자 2:
네, 대부분 그렇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서방의 그리스 신학 저술에 관심이 많았고, 그리스어는 학문의 언어로 여겨졌어요. 5세기쯤 되면 시리아어로 번역된 세속적 그리스어 문헌도 등장합니다—윤리학, 격언 모음집, 우화 같은 것들이요. 이렇게 해서 그리스 학문이 동쪽으로 전해진 거예요.

6부: 번역 운동과 시리아어의 지식 보존

진행자 1:
그럼 이 번역 운동을 주도한 핵심 인물들은 누구였나요? 특별히 중요한 인물들이 있었죠?

진행자 2:
네, 대표적인 인물이 테오도르 바르 코니(Therapeutikos bar Qōnī)인데, 그는 서시리아계 번역자로서 유명한 의사 갈레노스(Galen)의 저작 30편 이상을 시리아어로 번역했어요. 이 번역들이 당시 동부 지방의 어떤 주교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어요—디알라 강 근처에 살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죠. 그러니까 이미 그 당시에도 의학 지식이 동쪽으로 전해지고 있었던 거예요.

진행자 1:
정말 흥미롭네요. 그리고 나중에 어떤 고문서를 복원하면서, 시리아어 번역본이 그리스어보다 더 오래된 사례도 발견되었죠?

진행자 2:
맞아요. 학자들이 어느 날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를 발견했는데, 그건 오래된 문서를 긁어내고 새로운 글을 덧씌운 필사본이에요. 그런데 그 아래에서 5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갈렌의 시리아어 번역본이 발견된 거예요. 놀라운 점은—이 시리아어 번역본이 남아 있는 어떤 그리스어 사본보다 더 오래된 겁니다! 그러니까 시리아어는 단순히 그리스어를 흉내 내는 수단이 아니라, 어떤 경우엔 가장 오래된 지식의 보존자였던 거예요.

진행자 1:
와... 시리아어가 고대 그리스 지식의 생존자 역할을 한 셈이네요.

진행자 2:
정확해요. 그리고 이렇게 번역된 의학 문헌들은 이후 동방 지역 학교들에서 교육 자료로 사용됐어요. 예를 들어, 니시비스(Nisibis)의 신학교나 아바스 칼리프 시대의 군디샤푸르(Gundeshapur) 의학 학교 등에서요. 당시 칼리프들도 이 지식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고, 티모시 1세 총대주교 역시 이 번역 활동을 강력히 지원했어요. 또 동쪽에서 유입된 지식도 있었죠—인도 우화집 『칼릴라와 딤나』 같은 작품들이 시리아어로 번역되었고, 이건 후에 아랍어로도 번역되죠. 다양한 문화의 지식이 하나로 어우러진 지적 환경이었습니다.

진행자 1:
각기 다른 지식의 흐름이 한곳에서 만나서 융합된 거네요.

진행자 2:
맞아요. 그리고 단지 의학만이 아니었어요. 그리스 철학과 논리학도 번역됐습니다. 서르기우스(Sergius of Reshaina)는 그 작업에 참여한 인물 중 하나고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Organon)』—즉, 논리학의 기본서—에 대해 마르 아바(Mar Aba)와 바울루스 페르시아(Paul the Persian) 같은 동시리아 학자들이 주석을 달았어요. 특히 바울루스는 초기 저술을 중세 페르시아어로 썼다가 나중에 시리아어로 옮겼다는 주장도 있어요.

진행자 1:
그런 철학적 텍스트가 단지 신학 논쟁을 위해 번역된 건 아니죠?

진행자 2: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신학자들이 논리적으로 논쟁하기 위해서라고요. 그런데 최근 연구는 그것들이 학교에서 실제로 교육되었다는 걸 보여줘요. 사이스 사바흐(Sayes Sabah)라는 서시리아 학자는 그리스 학문을 번역해야 하는 이유를 정당화하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 이유가 굉장히 흥미로워요—"시리아인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적 전통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그리스 지식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진행자 1:
정말 멋진 논리네요. 지적 유산을 되찾는다는 의미도 있었군요.

진행자 2:
맞습니다. 그리고 룹스트라는 니시비스 학파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시리아 전통과 어떻게 통합하려 했는지 이야기해요. 학자 아담 베커(Adam Becker)는 이 과정을 ‘레트로피팅(retrofitting)’이라고 불렀는데, 룹스트라는 더 쉬운 비유를 들어요—기존 시스템 위에 새로 덧칠하는 거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겉페인트’고, 그 아래에 있는 ‘기본 프라이머’는 에프렘(Ephrem)의 시리아 전통 사상이라는 거예요. 즉, 그냥 수입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틀 안에 융합시킨 거죠.

진행자 1:
기존에 있는 바탕 위에서 지식을 쌓는 거네요. 무언가를 시작할 땐 항상 바탕이 중요하니까요.

7부: 성경 읽기, 아랍 세계, 그리고 지식의 순환

진행자 2:
맞아요. 그리고 이 철학적 사고방식—특히 논리학—은 단순히 철학과 의학에만 영향을 준 게 아니라, 성경 읽기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시리아어 사본들에는 ‘논리적 독서 부호(logical reading marks)’가 도입되기 시작했어요.

진행자 1:
아, 그 점들이 문장에 붙어서 어디서 끊고, 어디를 강조하고, 어떤 식으로 발음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시들이죠?

진행자 2:
네, 일종의 초기형 구두점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단지 읽기 위한 표시가 아니라, 의미 전달과 암송 방식에도 영향을 주는 도구였죠. 이 시스템의 기원은 아직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 중이에요—일부는 그리스에서 왔다고 보고, 또 다른 학자들은 아람어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죠. 어쨌든 핵심 인물 중 하나는 6세기의 요셉 호시아(Joseph Huzaya)예요. 그는 기존의 시리아 전통을 바탕으로, 그리스 부호 체계를 통합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고, 문장 구조에 대해 설명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도 사용했어요.

진행자 1:
그러니까 철학 개념을 성경 텍스트 해석에도 적용했던 거네요?

진행자 2:
맞습니다. 초기 시리아어 바울서신 필사본을 보면 이 부호들이 명확히 보이죠—문장 연결, 감탄문, 강조 문장(enunciative sentence) 등을 표시하기 위해 쓰였어요. 흥미로운 점은 그 ‘강조 문장’이라는 용어가 바울루스 페르시아가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에서 사용한 표현이라는 거예요. 이 부호 시스템은 성경 사본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초기 동시리아 사본—예를 들어 모건 도서관에 있는 문서들—에도 보입니다. 더 나아가 이 시리아식 체계가 소그디아어, 히브리어, 아랍어 같은 인근 언어의 독서 체계 형성에까지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어요.

진행자 1:
이렇게 보면, 작은 변화처럼 보이는 게 실제론 다른 언어와 전통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거네요.

진행자 2: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슬람 시대의 그리스-아랍 번역운동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동방교회의 학자들, 예를 들어 티모시 1세 같은 인물들도 그리스 문헌을 읽었고,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아랍어 번역자들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수백 편의 그리스 저작이 시리아어로, 그리고 그 후 아랍어로 옮겨졌죠.

진행자 1:
결국 동방교회는 단지 자신들만을 위한 지식 보존자 역할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를 위한 지식 전달자로 기능한 셈이네요.

진행자 2: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후나인 이븐 이샤크(Hunayn ibn Ishaq)는 이 번역 운동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데, 아바스 칼리프 시대에 수백 편의 그리스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했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그 작업은 먼저 시리아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한 거예요. 그 결과, 이 아랍어 번역본들은 이슬람 학문에 막대한 영향을 줬고, 나중에는 유럽으로까지 퍼져서 르네상스 시기 서구 학문의 부흥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진행자 1:
와, 그러니까 그 시리아어 번역자들이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지는 지식의 ‘숨은 주역’이었던 셈이네요.

진행자 2:
정말 그렇죠. 처음에 우리가 이야기했던 이마에 십자가 문신을 한 투르크인들—그들이 전염병을 막기 위해 했던 그 믿음—그것도 결국 시리아어 문화를 통해 퍼진 신앙과 연결돼 있어요. 그와 동시에, 시리아어 필경사들이 성경에 붙인 점 하나하나도 고대 지식의 전달 과정이었던 거죠. 이 모든 게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게 정말 놀라워요.

진행자 1:
맞아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오늘날 우리가 문화와 지식 교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돼요. 그리고 아직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숨은 연결고리’가 얼마나 많을지 궁금해지죠.

진행자 2:
정말 그렇습니다. 수세기 전, 사람들을 연결하고 지식을 나누기 위해 헌신했던 그들의 노력이, 오늘날 우리의 세계 이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인상 깊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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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 학자, 번역가 중심으로 정리:

🔹 1. 티모시 1세 (Timothy I)

시기: 727–823년경 직책: 동방교회 총대주교 (780–823년) 업적:

  • 동방교회의 황금기를 이끈 인물로, 중앙아시아부터 중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선교 활동을 조직.

  • 그의 서신에는 투르크 왕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기록이 있고, 각지에 대주교를 임명하려는 계획도 나타남.

  • 지식 보존과 번역 운동도 적극적으로 장려함.


🔹 2. 마르 아바 1세 (Mar Aba I)

시기: 6세기 중반 직책: 동방교회 총대주교 업적:

  • 아리스토텔레스 『오르가논』에 주석을 남긴 인물 중 하나로, 시리아어 지성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

  • 페르시아 제국 시기 동방교회의 조직을 정비하고 신학과 철학 교육을 강화함.


🔹 3. 바울루스 페르시아 (Paul the Persian)

시기: 6세기 직책: 철학자, 번역가 업적: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시리아어로 해석하고, 중세 페르시아어로 저술 활동을 시작한 후 시리아어로 전환.

  • 『오르가논』에 대한 해설서가 유명하며, 시리아어 논리학 발전에 영향을 줌.


🔹 4. 후나인 이븐 이샤크 (Hunayn ibn Ishaq)

시기: 809–873년 직책: 기독교 아랍계 학자, 의사, 번역가 업적:

  • 아바스 칼리프 시대의 대표적 번역가로, 수백 편의 그리스 문헌을 시리아어와 아랍어로 번역.

  • 갈렌, 히포크라테스 등의 의학서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서 등을 번역하여 이슬람 세계에 지식 전파.


🔹 5. 세르기우스 레샤이나(Sergius of Reshaina)

시기: 6세기 직책: 시리아 기독교인 학자, 의사, 번역가 업적:

  • 그리스 철학과 의학 문헌을 시리아어로 번역.

  • 초기 시리아어 번역 운동의 선구자 중 하나.


🔹 6. 이쇼다드 오브 무르브 (Ishodad of Merv)

시기: 9세기 직책: 동방교회 주교, 성경 주석가 업적:

  • 구약과 신약 전체에 대한 중요한 주석서 집필.

  • 동방교회 내 성경 해석 전통의 정점에 있는 인물.


🔹 7. 아프로하트 (Aphrahat)

시기: 3세기 말 ~ 4세기 초 직책: 초기 시리아 기독교 신학자 업적:

  • 『지혜자의 담론(Demonstrations)』이라는 일련의 설교집을 통해 시리아어 신학 기초를 마련.

  • 유대교적 영향이 강한 시리아어 문헌의 특징적 인물.


🔹 8. 에프렘 시리아인 (Ephrem the Syrian)

시기: 306–373년 직책: 시리아어 교부, 시인, 신학자 업적:

  • 교부 시대 시리아어 문학의 대표적 인물.

  • 찬송시와 신학시를 통해 교리와 윤리를 전달.

  • 나중 시리아 기독교 지식 전통에 큰 영향을 미침—철학과 논리 체계 수용의 ‘기본 프라이머’로 자주 언급됨.


🔹 9. 요셉 후자야 (Joseph Huzaya)

시기: 6세기 직책: 문법학자, 언어학자 업적:

  • 시리아어 독서 부호 시스템 정립에 핵심 역할.

  • 그리스어 문장 구조와 아람어 전통을 통합하여 초기 성경 필사 시스템의 기반을 마련.


[i] 쿠샨 제국은 1세기 초 박트리아 지역의 월지족에 의해 건국된 혼성국가이자 유목제국. 현재의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 동부와 인도 북부의 많은 지역을 아우르는 지역

[ii] 서부 튀르크 카간국은 오노크 또는 서부 괴크튀르크라고도 불리며,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후반까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일부 지역에서 중요한 정치적 실체

[iii] 사산 제국 또는 에런샤흐르(Eranshahr, "이란 왕국")는 AD 7세기 초기 무슬림 정복 이전의 마지막 이란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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