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가 메모리를 집어삼킬 때, GPU와 SSD에 벌어지는 일들

GPU 대신 돌멩이를 받는 시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온라인에서 비싼 그래픽카드를 주문한 뒤 박스를 열었더니, 반짝이는 기판 대신 돌덩이가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은 남의 일로 치부합니다. 그런데 최근 RTX 5080을 주문한 소비자가 실제로 이런 일을 겪었고, 환불조차 거절당했다는 사례가 퍼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PC 하드웨어 시장이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로 굴러가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가격보다 위험해지는 것들
이 사건에서 눈에 띄는 지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밀봉이 이미 풀린 상태의 고가 제품이 별도의 포장 없이 그대로 배송됐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객이 수령 직후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유통사가 자체 조사 뒤 환불과 재발송을 거부했다는 결정입니다. 어느 단계에서 바꿔치기가 일어났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책임 소재보다 "고가 하드웨어를 믿고 살 수 있느냐"입니다.
국내에서도 중고 거래 플랫폼과 오픈마켓을 중심으로 그래픽카드, SSD 관련 분쟁이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제품 가격이 오를수록 사기 한 번의 피해액이 커지기 때문에, 이제는 최저가보다 거래 구조와 보증 조건을 먼저 확인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사실상 "구매 경험" 자체가 리스크 관리의 대상이 된 셈입니다.
플랫폼보다 '거래 구조'를 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이제 유통사는 단순히 물건을 전달하는 창구가 아니라, 리스크를 얼마나 흡수할 의지가 있는지가 경쟁력이 됩니다. 반품 프로세스가 투명한지, 분쟁 발생 시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않는지, 중고나 위탁 판매 구조라면 검수와 보험이 어떻게 설계돼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국내에서도 하드웨어 특화 중고·리퍼 시장이 커지는 만큼, 앞으로는 카드 성능보다 플랫폼 신뢰도를 비교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큽니다.
AI가 먹어치운 메모리, Crucial와 트랜센드가 사라진 이유
많은 사용자가 체감하는 변화는 그래픽카드 가격이지만, 실제로 더 큰 지각변동은 메모리와 스토리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이크론이 소비자용 브랜드인 Crucial 메모리와 SSD 사업을 접겠다고 선언한 결정입니다. 수년 동안 가성비 좋은 램과 SSD로 사랑받던 브랜드가 한순간에 사라진 셈입니다.
AI 데이터센터가 빼앗아가는 소비자 물량
마이크론의 설명은 의외로 솔직합니다. AI 중심 데이터센터 수요가 폭증해, 한정된 생산능력을 기업 고객과 고부가가치 제품에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트랜센드가 낸드 플래시 공급에서 사실상 제외되었다는 내부 공지까지 겹치면서, 대형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업체가 메모리 시장의 우선 고객이 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구조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품귀 현상이 아닙니다. 생산량은 한계가 있고, 가장 많이 사 주는 쪽이 가격과 물량을 좌우하는 구도가 고착된다는 점입니다. AI 서버 한 랙에 들어가는 메모리와 SSD 용량을 생각하면, 일반 소비자용 노트북이나 데스크톱 수십 대가 경쟁도 되지 않습니다. 결국 제조사는 가격에 민감한 소비자 시장보다, 계약 단위가 큰 데이터센터 고객을 선택하기 쉬운 상황으로 기울어집니다.
한국 소비자에게 다가올 파장은 무엇인가
국내 시장은 이미 메모리 가격 변동에 민감한 구조입니다. 자가 업그레이드 비율이 높고, 조립 PC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Crucial나 트랜센드처럼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가격대의 브랜드가 빠지면, 선택지는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가격 경쟁도 약해집니다. 여기에 PC 완제품 제조사가 최대 20% 수준의 가격 인상을 검토한다는 해외 보고까지 더해지면, "조금 기다렸다가 사면 싸진다"는 기존의 경험칙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GPU의 미래, VRAM 조달 전쟁과 제품 라인 축소 가능성
그래픽카드 시장에서는 또 다른 변화가 조용히 진행 중입니다. 엔비디아가 앞으로는 GPU 칩과 메모리를 묶어서 공급하지 않고, 보드 제조사가 직접 VRAM을 조달하도록 할 수 있다는 소식이 나온 것입니다. 단순한 공급 방식의 변경처럼 보이지만, 지금 같은 메모리 대란 상황에서는 게임의 판도가 바뀔 수 있는 변수입니다.
소규모 AIB에게 VRAM은 생존의 문제
현재도 그래픽카드 한 장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원가 비중은 상당히 높습니다. 만약 GPU 제조사가 메모리까지 함께 공급하지 않고, AIB 파트너가 시장에서 직접 VRAM을 확보해야 하는 구조가 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대형 업체는 장기 계약과 규모의 힘으로 물량을 확보하겠지만, 중소 규모 보드 제조사는 AI 데이터센터와 같은 거대 수요처와 같은 선상에서 경쟁해야 합니다.
이미 트랜센드 같은 메이저 스토리지 브랜드조차 낸드 공급에서 밀려난 사례를 떠올리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AIB가 HBM이나 GDDR 최신 메모리를 안정적으로 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결국 일부 회사는 고성능 제품만 제한적으로 생산하거나, 아예 GPU 사업에서 손을 떼는 선택지를 고민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EVGA의 퇴장이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의 서막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저가 그래픽카드의 '공백 구간' 리스크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AMD와 엔비디아 모두 메모리 단가 때문에 중저가 GPU 라인을 정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장당 붙는 메모리 용량은 늘어나지만, 소비자가 지불할 수 있는 가격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수익성이 낮은 구간을 통째로 비우는 전략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FHD 게이밍용 20만~40만 원대 그래픽카드" 같은, 지금까지 시장을 넓혀온 구간이 갑자기 허전해질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시기에 AMD가 9850X3D와 듀얼 3D V-Cache를 탑재한 9950X3D2 같은 새로운 플래그십 CPU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CPU는 더 강력해지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적당한 가격대의 GPU나 충분한 메모리를 구하기 어려워지는 기묘한 조합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사용자의 체감 성능은 결국 플랫폼 전체의 균형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이 불균형은 향후 몇 년간 PC 업그레이드 전략을 복잡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비자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가격이 오르고 선택지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그냥 안 사면 된다"는 말은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습니다. 업무와 학습, 콘텐츠 제작과 게임까지, 디지털 하드웨어는 사실상 필수 인프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달라져야 할까요.
단기적 구매 요령보다 '주기 관리'가 중요해진다
지금 같은 공급 환경에서는 몇 달 가격 추이를 지켜보다가 저점에서 사겠다는 전략이 통하기 어렵습니다. 생산과 공급이 AI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한 번 오른 가격이 예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언제 가장 싸냐"보다 "언제 반드시 교체해야 하느냐"를 기준으로 업그레이드 주기를 설계하는 편이 낫습니다.
GPU나 SSD가 실제 업무 생산성과 직결된다면, 성능이 부족해지는 시점을 미리 가정해 두고 예산을 나누어 확보하는 방식이 유리합니다. 반대로 취미용이라면, 지금 쓰는 장비의 수명을 늘리는 방향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상도와 그래픽 옵션을 낮추거나, 대용량 게임을 정리해서 SSD 여유 공간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체감 수명이 연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공급 리스크 시대의 첫 번째 행동
지금 시점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첫 행동은, 본인이 사용하는 장비의 "목록과 우선순위"를 정확히 정리하는 일입니다. 어떤 PC와 저장장치를 어떤 용도로 쓰고 있는지, 고장 나면 업무가 멈추는 장비가 무엇인지부터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그런 다음 필수 장비에는 교체 예산과 예상 시점을 미리 붙여 두고, 나머지는 가능한 한 버티는 전략을 세우는 편이 안전합니다.
더불어 중고·리퍼 시장을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검증된 플랫폼과 판매자를 고르기만 한다면, 제조사가 철수한 브랜드의 제품도 일정 기간까지는 충분히 가성비 있는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메모리와 GPU를 둘러싼 구조적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소비자에게 남은 선택지는 반응 속도와 정보 격차를 줄이는 것뿐입니다. 준비된 사용자와 그렇지 않은 사용자의 체감 격차는 앞으로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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