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튜링 CEO가 말한 '데이터 라벨링의 죽음'과 SaaS 종말 논쟁

데이터 라벨링 회사의 시대는 끝났는가
많은 사람이 아직도 AI 하청 일감을 떠올리면 '데이터 라벨링'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튜링의 조너선 시다르트가 던진 선언은 꽤 급진적입니다. 이제는 라벨링 회사가 아니라 '리서치 액셀러레이터'의 시대라는 주장입니다.
단순 라벨에서 복잡한 '지식 작업' 데이터로
과거에는 고양이 사진에 박스 치고, 간단한 문장 분류를 하는 식의 데이터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양상이 완전히 다릅니다. 보험 언더라이팅, 세일즈 리서치, 의료 문서 해석처럼 실제 직무를 그대로 옮긴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코딩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숫자를 정렬하는 파이썬 코드" 수준이면 됐지만, 이제는 "의사와 환자를 잇는 B2B 마켓플레이스를 안드로이드, iOS, 웹으로 각각 구현하라"는 식의 전체 제품 단위가 데이터가 됩니다.
이 단계로 오면 중저숙련 크라우드 워커로는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각 도메인 전문가가 직접 참여해야 하고, 그 지식이 통째로 모델에 증류됩니다. 제 기준에서는 이 지점에서부터 기존 '라벨링 아웃소싱 회사'와 '리서치 파트너' 사이의 간극이 결정적으로 벌어진다고 봅니다.
챗봇 훈련에서 에이전트 훈련으로의 전환
시다르트가 강조한 부분은 또 하나 있습니다. 이제는 채점 답안 맞추는 챗봇이 아니라, 실제 업무를 대신 수행하는 에이전트를 훈련하는 단계로 넘어갔다는 점입니다. 이때 핵심 키워드는 강화학습과 'RL 환경'입니다.
단순히 프롬프트와 답변 쌍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영업사원이 링크드인, 세일즈포스, 줌인포를 넘나들며 미팅을 준비하는 과정을 가상 환경에 그대로 구현합니다. 그 안에서 에이전트가 여러 도구를 호출하며 시행착오를 겪고, 성공과 실패가 모두 학습 데이터가 됩니다. 한국식 표현으로 하면, 직장인의 클릭 하나하나가 통째로 시뮬레이터에 복제되는 셈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데이터 비즈니스의 승패는 더 이상 "라벨 단가를 얼마나 낮추느냐"가 아닙니다. 실제 산업별, 직무별 워크플로를 얼마나 정교하게 디지털 쌍둥이로 만들 수 있느냐가 승부처입니다. 국내에서 단순 주석 사업에 안주하는 회사라면 이 변곡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지식 노동 자동화' 선언이 불편한 이유
AI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지식 노동은 결국 자동화된다"는 문장은 점점 상식처럼 회자됩니다. 시다르트 역시 같은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기업과 직장인의 현실을 떠올리면, 이 말은 동시에 매혹적이면서도 상당히 불편합니다.
생산성 100배 시대, 진짜로 올까
그가 그린 그림은 단순합니다. 화면을 보고, 정보를 해석하고, 여러 툴에 입력하는 일이라면 결국 에이전트가 대신합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프로젝트 수가 지금보다 10배, 100배로 늘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 회사를 동시에 경영하거나, 여러 직업을 병행하는 것도 가능해진다는 상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이 생산성 점프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가, 아니면 소수의 상위 플레이어에게만 집중되는가입니다. 시다르트는 "20달러로 최고의 지능을 빌릴 수 있는 시대"라서 격차가 줄어들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한국 현실을 생각하면, AI 도구를 스스로 탐색하고 업무에 녹여낼 만큼의 동기와 디지털 리터러시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제 기준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현실적인 리스크입니다.
AI 버블 논쟁과 '능력 오버행'이라는 불편한 진실
그는 AI 버블을 부정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미 모델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우리가 실제로 활용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는 주장입니다. 적절한 프롬프트 설계, 도구 연동, 컨텍스트 공급만 해도 성능이 눈에 띄게 튀어 오르는데, 대부분의 조직은 그 기본조차 제대로 시도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많은 한국 회사가 빠지는 함정이 드러납니다. 사내 데이터는 엉망인 채로, 챗봇 하나 붙이고 'AI 도입' 보도자료를 내는 수준에서 멈춥니다. 결국 파일 서버, ERP, CRM이 연결되지 않으니 모델의 능력 오버행을 전혀 쓰지 못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데이터를 어설프게 만져볼 의지도 없는 조직이라면 AI 투자 논의 자체가 공허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회사에겐 버블이 맞고, 준비된 회사에겐 아직도 저평가된 자산에 가깝습니다.
SaaS는 정말 죽는가: 에이전트 시대 B2B 소프트웨어의 운명
SaaS는 끝났다는 말만큼 B2B 업계 사람을 자극하는 문장도 드뭅니다. 시다르트는 두 가지 리스크를 짚습니다. 기업이 직접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앱 개발이 쉬워졌다는 점, 그리고 에이전트화된 대형 모델이 중간 앱 없이 바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에이전트가 앱을 건너뛰기 시작할 때
현재 대부분의 업무 소프트웨어는 사람이 클릭하기 좋게 만들어진 GUI를 전제로 설계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이전트가 크롬을 직접 조작하거나, API를 통해 내부 시스템에 접근한다면 화면은 필수가 아니라 옵션이 됩니다. "휴가 신청해줘", "새 직원 온보딩 세팅해줘" 같은 자연어 명령만으로 백오피스 업무가 끝나는 그림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사람 손을 타는 화면이 핵심이 아닙니다. 내부 데이터 모델, 권한 구조, 외부 에이전트와 안전하게 통신하는 인터페이스가 핵심이 됩니다. 고객센터용 챗봇, 티켓 관리처럼 이미 텍스트 중심인 SaaS부터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큽니다. 반대로 복잡한 도메인 지식과 규제가 얽힌 분야, 예를 들어 특허, 제약, 금융 리스크 관리 같은 영역은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깊이가 있어서 한동안 방어력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한국 SaaS에게 남은 기회와 오해
시다르트는 "기업이 직접 커스텀 앱을 쉽게 만든다"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한국의 중소기업 현실을 생각하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수십 개 SaaS를 동시에 유지하는 것조차 벅찬 조직이 많고, 사내 개발 인력이 거의 없는 회사도 수두룩합니다. 이런 곳에서 '우리가 직접 만든다'는 전략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에이전트 시대에 살아남을 한국 SaaS는 두 가지 유형일 가능성이 큽니다. 첫째, 특정 산업의 워크플로를 끝까지 쥐고 있는 제품입니다. 데이터 구조, 규제 대응, 조직 내 권한 모델까지 함께 설계해주는 도구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둘째, 에이전트가 올라탈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하는 제품입니다. 예를 들어 내부 로그, 문서, 대화 데이터를 잘 구조화해서 LLM이 쓰기 좋게 만들어 주는 계층입니다. 화면 기능만으로 승부하던 SaaS라면 전략 수정이 불가피합니다.
이 변화가 내 일과 사업에 맞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
AI 이야기는 언제나 거대 담론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국 중요해지는 것은 "지금 내 자리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입니다. 시다르트의 주장도 이 관점에서 다시 걸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유리하고, 누가 당분간은 불리한가
AGI와 에이전트, RL 환경 이야기가 반가운 사람은 이미 디지털 도구를 즐겨 쓰고, 스스로 업무 프로세스를 뜯어고쳐 본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개발자, 데이터 분석가, 프로덕트 매니저처럼 도구를 손에 쥐고 일해 온 직군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에이전트가 '경쟁자'가 아니라 '부하 직원'처럼 붙습니다.
반대로, 사내 시스템 접근 권한도 제한적이고, 본인 업무가 어떤 데이터 흐름 위에서 돌아가는지 감이 없는 직군은 당분간 소외될 가능성이 큽니다. 단순 반복 업무를 많이 맡는 지원 조직, 문서만 작성하고 시스템에는 거의 손대지 않는 실무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 그룹이 그대로 머무르면, 자동화 파도가 올 때 방어권이 약해집니다.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한 가지 행동
현실적으로 모든 조직이 RL 환경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에이전트 시대를 준비하는 가장 저렴한 방법은 자신의 업무를 '워크플로 단위'로 언어화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메일 확인 → 관련 티켓 찾기 → CRM 업데이트 → 팀 채널 공지"처럼 매일 하는 일을 단계별 절차로 써 내려가는 연습입니다.
저라면 이 워크플로를 기준으로, 현존하는 LLM 도구로 어느 단계까지 자동화가 가능한지부터 테스트하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데이터, 권한, 시스템 연결이 무엇인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 다음에야 "우리 회사는 에이전트를 도입할 준비가 되었는가", "SaaS를 갈아탈지, 붙일지, 직접 만들지" 같은 전략 논의가 의미를 가집니다.
기술은 이미 상당 부분 준비되어 있습니다. 뒤처지는 쪽은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없는 사람과 조직입니다. 한국의 IT 실무자라면 시다르트의 과감한 선언을 과장된 미래 예언으로 넘기기보다, 지금 내 자리에서 바꿀 수 있는 한 단계부터 찾는 편이 훨씬 이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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