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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윈, 알리바바, 그리고 중국 빅테크의 굴곡: 왜 다시 돌아왔을까?

DODOS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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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클립으로 정리됨 (생성형 AI 활용)

출처 및 참고 : https://www.youtube.com/watch?v=jHL95qTz62o

Generated image중국 전설적 기업가 잭 마(Jack Ma)는 25년 넘는 시간 동안 세 번의 큰 전환을 겪었습니다.

인터넷 초창기 기회를 붙잡아 알리바바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웠고, 이어 세계 최대 규모가 될 뻔한 앤트그룹 상장 좌절을 겪었으며, 한동안 공개 석상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정치·경제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글은 그 과정을 시간순이 아니라,

  • 지금 보이는 현상

  • 그 배경에 깔린 구조

  • 그 구조에서 나온 선택과 결과

  • 거기서 읽을 수 있는 인사이트

이 네 단계로 재구성해 살펴봅니다.

알리바바의 성장 스토리뿐 아니라, 중국 빅테크가 어떤 환경에서 작동하는지, 그리고 창업자가 언제, 어떻게 '무대 뒤'로 물러나는지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의미 있는 사례가 됩니다.

다시 나타난 마윈: 지금 보이는 장면들

2025년 2월, 마윈이 시진핑 주석을 포함한 중국 정부 고위 인사들과 함께 공식 석상에 등장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한동안 해외 언론에서는

  • "구금된 것 아니냐"

  • "해외로 도피한 것 아니냐" 같은 추측이 반복됐지만, 결국 그는 다시 베이징의 정치 무대 중심 가까운 곳에 얼굴을 비쳤습니다.

이 재등장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닙니다. 마윈은 이미 2013년 알리바바 CEO 자리에서 물러났고, 2019년에는 회장직까지 내려놓았습니다. 그 후에는 앤트그룹(Alipay 운영사) 상장 준비와 교육·자선 활동 등 비즈니스 외 영역으로 관심을 옮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AI 경쟁에서 알리바바가 뒤처진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마윈이 다시 움직였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 알리바바의 AI 전략 전환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 그 과정에서 현 CEO 에디 우(Eddie Wu)의 선임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공식 직함은 예전만 못하지만, 알리바바와 중국 디지털 경제를 상징하는 얼굴로 다시 소환된 셈입니다.

다만 최근의 등장은 "완전한 복귀"라기보다, 국가가 필요할 때 등장하는 상징적 인물에 가깝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갈립니다.

거리 영어 통역에서 세계 최대 IPO 직전까지

마윈의 시작은 전형적인 고성장국 창업자 서사와 다릅니다.

1964년, 그는 중국 저장성 항저우의 소박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 배경도, 사회적 인맥도, 기술 전문성도 없었습니다.

10대 시절, 중국이 점차 대외 개방을 시작하면서 항저우에 외국인 관광객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마윈은 외국인에게 무료로 도시를 안내해 주며 거리에서 영어를 배웠습니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 스스로 접점을 만들어간 셈입니다.

학업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 중국 대학 입학시험에서 두 번 떨어졌고

  • 세 번째 도전 끝에 대학에 진학해 영어를 전공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상황이 더 쉽지 않았습니다.

  • 14개 이상 직장에 지원했다가 모두 탈락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본인의 기술·자본이 아닌, 설득과 동원 능력에 기반한 리더 역할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94년, 그는 중국 초창기 번역 회사를 설립합니다. 1년 뒤 정부 프로젝트 통역을 맡아 미국에 갈 기회를 얻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터넷을 접했습니다.

1995년 당시 인터넷에는 중국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 문제의식이 온라인 비즈니스로 연결됐습니다.

처음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 중국판 옐로페이지와 비슷한 회사를 세웠지만

  • 현지 정부와의 마찰 등으로 사업이 사실상 정리됐습니다.

하지만 이 실패가 끝은 아니었습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1999년, 알리바바를 다시 창업합니다.

알리바바 탄생: 비기술 출신 리더의 동원력

1999년 마윈은 17명과 함께 알리바바를 공동 창업했습니다.

구성원은

  • 이전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 대학 친구와 제자

  • 여러 업종에서 온 초기 창업가 등으로, 기술 엘리트보다 사람에 대한 신뢰와 관계 기반이 강한 팀이었습니다.

초기 사무실은 항저우의 작은 아파트였습니다. 방문객이 현관을 보면 창업 멤버들의 신발이 빼곡히 놓여 있었고, 모두가 밤낮 없이 일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고 합니다.

마윈은 스스로도 인정하듯 엔지니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초창기부터 자신보다 기술에 밝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고, 본인은 비전 제시와 팀 동원을 맡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거의 제자처럼 따르던 사람들"이라고 회상합니다.

알리바바는 곧 글로벌 자본의 눈에 띄었습니다.

  • 골드만삭스로부터 초기 투자를 유치했고

  •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으로부터 2,000만 달러 투자

  • 이어 2005년에는 야후가 알리바바 지분 40%를 10억 달러에 인수

특히 야후, 소프트뱅크, 알리바바 사이에는 손정의–제리 양(Jerry Yang)–마윈으로 이어지는 삼각 관계가 형성됐습니다. 당시에는 야후가 중국 사업의 주도권을 넘긴 것이 실수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야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투자 중 하나가 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이 자금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알리바바는 중국 내 B2B·B2C 전자상거래 인프라를 빠르게 확장해 갔습니다.

WTO, 타오바오, 알리페이: 알리바바가 커질 수 있었던 구조

알리바바의 성장은 단순히 "좋은 아이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중국 경제 구조 변화와 정확히 맞물려 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중국은 알리바바 창업 몇 년 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습니다. 이 사건은 중국 기업과 해외 기업 모두에게 온라인을 활용한 거래 수단에 대한 수요를 폭발적으로 키웠습니다.

알리바바는 이 흐름에 맞춰

  • B2B 거래 플랫폼에서 시작해

  • 타오바오(Taobao), 티몰(Tmall)로 이어지는 소비자 쇼핑 플랫폼을 확대했습니다.

마윈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 플랫폼을 쓰는 소상공인이 10~20만이 아니라 1,000만~2,000만 수준이며, 그중 60%는 알리바바가 없었으면 존재하지 못했을 사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수치는 알리바바가 단순 쇼핑몰이 아니라 소상공인 창업 인프라 역할을 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더해 알리페이(Alipay)가 도입됩니다. 알리페이는 온라인 결제 수단이 거의 없던 시기에 등장해, 디지털 결제와 금융 포용(financial inclusion)을 동시에 확대한 서비스였습니다.

  • 현금·카드 중심의 결제 환경을 건너뛰고

  • 바로 모바일 기반 간편결제·송금·소액투자·소액대출까지 연결되면서

알리바바는 커머스–결제–데이터–콘텐츠–헬스케어로 이어지는 거대한 생태계를 구축했습니다.

마윈은 "아마존은 모든 것을 직접 통제하는 제국에 가깝고, 알리바바는 인터넷 기술로 모든 기업이 아마존처럼 되게 돕는 플랫폼"이라는 식으로 양사를 비교했습니다.

즉, 직접 재고를 사서 파는 구조보다 수많은 판매자·사업자를 연결하는 인프라에 가깝다는 자기 정의였습니다.

뉴욕 증시 상장과 '과도한 주목'의 시작

2014년, 알리바바는 뉴욕 증권거래소 상장(IPO)으로 글로벌 자본 시장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습니다. 당시 IPO는 역대 최대 규모였고, 세계 언론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마윈은 누구인가"로 이동했습니다.

이후 마윈은,

  • 다보스포럼 단골 연사

  • 각국 정상과 재계 인사들이 항저우를 직접 찾아와 만나는 인물

  • 미국 대통령과 공식 석상에서 함께 서는 사업가

등으로 부상합니다. 중국에서 미국에 가장 많이 알려진 기업가를 꼽으라면 알리바바의 마윈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때부터 위험 신호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 알리바바는 e커머스, 핀테크, 클라우드까지 영향력을 키웠고

  • 2013년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국가 차원의 통제 강화 흐름이 뚜렷해졌으며

  • 특히 민간 IT 대기업의 금융 영역 확장이 민감한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한쪽에서는 "중국 민간 기업의 성공 상징"으로 마윈을 내세웠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거대 플랫폼과 개인 리더에게 쏠리는 영향력을 경계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앤트그룹 상장 좌절과 '사라진 1인자'

마윈은 2013년 알리바바 CEO에서 물러나고, 2019년 회장직까지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앤트그룹(Alipay 운영사) 준비 과정에서는 여전히 핵심 인물로 남아 있었습니다.

2020년, 앤트그룹은 약 350억 달러(35 billion) 규모의 IPO를 추진했습니다. 실현됐다면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 상장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윈이 앤트그룹 지분의 절반 이상을 사실상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개인 자산 역시 크게 불어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장을 며칠 앞둔 시점에 상황이 급변합니다.

  • 상하이 증권거래소에서 突如(돌연) 상장 연기 발표

  • 해외 기자들은 이미 상하이에 도착해 있을 정도로 임박한 시점

  • 그 배경을 두고 각종 추측이 쏟아짐

그 직전인 2020년 10월, 마윈은 상하이에서 열린 와이탄 금융 서밋(Bund Summit)에서 중국 금융 규제를 강하게 비판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내용은 20단어 이내 인용 규칙상 요약하면,

  • 규제가 낡았고

  • 금융 혁신을 가로막고 있으며

  • 디지털 금융의 잠재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취지였습니다.

이 발언은

  • 현직·전직 규제 당국자를 직접 겨냥한 형태였고

  • 마이크로 대출·소액 신용공여를 대규모로 제공하는 앤트그룹의 비즈니스 모델과 맞물려 리스크 관리에 대한 당국의 우려를 자극한 것으로 보입니다.

앤트그룹은 단순 결제서비스를 넘어

  • 도시 소비자뿐 아니라 농촌 지역 농민에게까지 마이크로 대출을 제공했고

  • 전통적인 담보·담당 심사 인력 없이 데이터와 알고리즘 기반 신용평가에 의존했습니다.

규제 당국 입장에서는

  • 리스크 발생 시 누가 최종적으로 책임지는지

  • 시스템 리스크를 어떻게 통제할지 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고 보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시진핑 주석에게까지 보고된 뒤, IPO 중단 결정이 내려졌다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이 시점부터 마윈은 사실상 공개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해외 언론은 "디플랫폼됐다"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무대 뒤'로 물러난 리더와 알리바바의 경쟁자들

공식 상장 좌절 이후에도 알리바바는 계속 운영됐지만, 빅테크에 대한 중국 정부의 규제 강화는 지속됐습니다.

이 시기에 마윈은

  • 알리바바의 공식 의사결정에서 한발 물러섰다는 평가를 받았고

  • 본인이 세운 경영진에게 규제 환경에 맞춰 회사를 재정비할 권한을 넘긴 것으로 해석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경쟁사에 대한 공개 메시지입니다.

신흥 이커머스 기업 핀둬둬(Pinduoduo, PDD)가 빠르게 성장하자, 마윈은 축하 메시지를 남기며

  • "잘하고 있다, 알리바바가 뒤처지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습니다.

이는

  • 후배 기업에 대한 격려이자

  • 동시에 현 경영진에 대한 간접적인 질책으로 읽혔습니다.

특히 AI 경쟁에서 알리바바가 뒤처진다는 평가가 나왔을 때, 마윈은 이를 알리바바의 '마지막 경고 신호'로 받아들인 듯합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 AI 및 클라우드 사업 강화를 위한 조직 재편

  • 에디 우(Eddie Wu) CEO 선임 등 알리바바의 전략 전환에 다시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외부에서는 "에디 우 뒤에 마윈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창업자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전형적인 빅테크 구조에 가깝습니다.

마윈의 스토리가 남긴 통찰과 한계 분석

마윈의 25년을 관통하는 핵심 포인트는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타이밍과 구조입니다.

  • 중국의 대외 개방

  • WTO 가입

  • 전자상거래와 모바일 결제의 급성장 이 세 흐름이 맞물렸기 때문에, 알리바바 같은 플랫폼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마윈의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더라도, 구조적 기회가 없었다면 동일한 규모의 성장은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비기술 창업자의 역할입니다. 마윈은 스스로 기술 전문가가 아님을 여러 번 언급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알리바바를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 외부 자본 및 파트너를 끌어들이는 설득 능력

  • 내부 인재에게 권한을 주면서도 비전을 공유하게 만드는 동원력 에 있었습니다. 즉, 기술 기업이라고 해서 반드시 기술 출신 CEO가 필수는 아니라는 사례를 보여 줍니다.

셋째, 국가와 빅테크의 충돌 지점입니다. 앤트그룹 사례는

  • 데이터 기반 소액대출이 금융 접근성을 크게 높일 수 있지만

  • 대규모 부채가 한 시스템 안에 축적될 때 규제 당국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를 잘 드러냅니다.

규제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정치 권력이 시스템 리스크를 우려할 때 민간 기업의 성장 궤적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현실이 노출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창업자의 '공적 이미지'가 자산이자 리스크라는 점입니다. 뉴욕 상장과 다보스, 각국 정상들과의 회동은

  • 알리바바와 마윈의 브랜드 가치를 엄청나게 높였습니다. 동시에

  • 특정 개인에게 글로벌 관심이 과도하게 집중되면

  • 정치·국가 권력과의 관계에서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도 확인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등장의 의미에 대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 2025년 시진핑 주석과의 공식 자리 등장은

    • 중국 정부가 마윈을 다시 상징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고

    • 동시에 표현과 행동에 여전히 제약이 존재한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 그의 나이는 이제 60대 초반이지만,

    • 자산과 네트워크, 상징성을 고려하면

    • 완전한 은퇴보다는 특정 분야에서 제한적 역할을 수행하는 모델이 더 현실적인 시나리오로 보입니다.

이 스토리는 종종 "중국판 미국식 성공담"으로 불립니다. 그 표현의 의미는 단순 영웅담이 아니라, 실리콘밸리만이 혁신과 대규모 인터넷 기업의 유일한 무대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줬다는 데 있습니다.

다만 동시에,

  • 해당 성장이 민간 기업의 자유로운 경쟁만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 국가 정책, 규제 환경, 정치적 판단이 항상 강하게 작동했다는 점에서 마윈과 알리바바의 경험은 다른 나라에 그대로 복제하기 어려운 특수한 사례라는 한계도 분명합니다.

마무리하자면, 마윈의 여정은

  • 개인의 역량

  • 거시 환경

  • 국가 권력

  • 기술 패러다임 이 어떻게 얽혀 하나의 거대 플랫폼을 만들고, 또 같은 요인들이 어떻게 그 궤적을 바꾸는지 보여 주는 장기 실험에 가깝습니다.

이후 알리바바가 AI와 클라우드,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어떤 행보를 보이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윈이 어느 정도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는 향후 몇 년간 중국 디지털 경제를 이해하는 핵심 지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출처 및 참고 :

이 노트는 요약·비평·학습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 문의가 있으시면 에서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