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마음 원곡자 손재석 목사의 감동 간증과 인생 이야기
주님 마음 원곡자 손재석 목사, 기적과 파란만장 인생
"주님 나를 택하사,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원곡자 손재석 목사의 파란만장 신앙 이야기 상세 정리
오늘, 은혜로운 찬양과 함께 시작을 열어볼까 합니다. 바로 여러분께서 방금 들으신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의 원곡자이신 손재석 목사님을 모셨는데요. 목사님께서는 찬양만큼이나 깊고 진한 인생 이야기를 새롭게하소서 채널을 통해 풀어내셨습니다. 과연 목사님의 삶은 어떠했을지, 찬양 가사처럼 주님께서 택하시고 마음을 주신 이야기는 무엇일지, 지금부터 함께 목사님의 감동적인 간증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놀랍게도, 오늘 방송은 손재석 목사님의 눈물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찬양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원곡자로서, 자신의 인생 목적과도 같은 찬양을 직접 부르게 되니 감격스러움이 북받쳐 오른 듯합니다. 목사님의 굵직하고 따뜻한 목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까지 뭉클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데요, 찬양 시작부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에서 진심으로 찬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손재석 목사님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외에도 "부르심", "주님 나를 택하사" 등 많은 찬양곡을 작곡하셨습니다. 스스로는 "히트곡"이라고 칭하기 겸손해하시지만, 성도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찬양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요. 특히, "실로암"이라는 곡은 목사님이 논산훈련소에서 장병들과 함께 찬양한 영상이 유튜브에서 역주행하며 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투는 전투다"라는 댓글과 함께 군대 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하는데요, 덕분에 군부대 행사에서 장병들이 "갓 겟 전투"를 외치며 열렬히 환호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지금처럼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지신 목사님께서 과거 심각한 "음치"였다는 점입니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인데요, 목사님은 고등학교 시절 성가대에 들어가기 위해 지휘자님께 간절히 부탁했지만 무려 세 번이나 거절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성가대는 웬만하면 받아주는 곳인데, "내년에 오세요"라는 답변만 반복되었다고 하니, 당시 목사님의 음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가대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목사님. 대학교 2학년, CCC(한국대학생선교회) 훈련에 참여하던 중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둘째 날, 셋째 날, 학교마저 포기하고 수련회에 집중했을 때, 질병 치유와 함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는데요. 바로 "음치"가 치료된 것입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의 간절한 열망과 믿음에 응답하셨고, 기적적으로 "음치"를 "꿀성대"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깁니다. 목사님의 이름, "손재석"은 개명된 이름이라고 하는데요. 본래 이름은 "이재민", 낯설지 않은 이름입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의 성을 따라 "손재석"으로 개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된 배경에는 가슴 아픈 가정사가 숨겨져 있었는데요. 목사님이 두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누나는 아버지를 따라, 목사님은 어머니를 따라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홀로 아들을 키우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셨고, 외할아버지께서 호적 정리를 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갑작스러운 이름 변경은 목사님께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정체성의 혼란과 함께 심각한 "대인기피증"을 겪게 되었고, 말더듬이까지 생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친구들의 놀림과 따돌림은 어린 목사님에게 더욱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재민"이라는 이름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손재석"으로 바뀌면서부터 놀림거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출석을 불러도 대답하지 못하고,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과 따돌림 속에서 점점 마음의 문을 닫게 되었고, 세상과 단절된 채 고통스러운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사진이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당시 목사님의 힘겨웠던 상황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합니다.
외롭고 힘든 어린 시절, 목사님께서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누나 없이 보내는 시간은 깊은 외로움을 안겨주었는데요. 특히 소풍이나 운동회처럼 가족들과 함께하는 행사는 목사님께 더욱 큰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 손을 잡고,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반면, 목사님은 늘 혼자였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목사님 곁에는 따뜻한 이웃이 있었습니다. 세 들어 살던 집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목사님을 친아들처럼 따뜻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소풍이나 운동회에 부모님 대신 함께 가주시고, 따뜻한 밥을 챙겨주시며 진정한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너는 존귀한 자녀다, 보배로운 자녀다"라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는 어린 목사님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친어머니보다 주인 아주머니, 아저씨로부터 받은 사랑과 위로가 더 컸다고 회상할 정도인데요.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따뜻한 인간관계는 어린 영혼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크리스천이었던 주인 아주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독실한 수녀였고, 목사님을 카톨릭이 아닌 기독교 교회로 인도하려 하셨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뜻에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중학교 2학년 때 반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본격적으로 교회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반 친구의 엉뚱한 제안, "교회에 가면 여자친구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던 것인데요. 순수한(?) 마음보다는 따뜻한 손길, 스킨십에 대한 갈망이 컸던 풋풋한 시절의 에피소드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곧바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CCC 내적 치유 수련회에 참석하면서부터였습니다. 우연히 학교 게시판에서 "내적 치유 세미나" 광고를 보게 되었고, 이끌리듯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낯선 분위기, 뜨거운 기도 열기 속에서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고 합니다.
수련회 셋째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녁 기도 시간에 환상과 음성을 체험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라는 성경 구절이 떠오르면서, 온 몸에 전율이 흘렀고, 6시간 동안 방언을 쏟아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대인기피증, 말더듬이, 낮은 자존감 등 목사님을 괴롭히던 모든 질병이 깨끗하게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소리가 "음계"로 들리는 신기한 체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버스 지나가는 소리, 나무 흔들리는 소리, 심지어 콧바람 소리까지 음계로 들리기 시작했다는데요. 성가대에서 세 번이나 거절당했던 "음치"가 이제는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듣는 "절대음감"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기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곧바로 성가대에 재도전했고, 놀랍게도 "솔리스트" 자리를 꿰차게 됩니다. 세 번 거절당했던 굴욕을 완벽하게 설욕하는 순간이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이후, 목사님은 올네이션스 경배와 찬양팀에서 찬양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특히 "주님 나를 택하사"라는 찬양은 목사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는데요. 이 찬양을 통해 사역을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주님 나를 택하사" 찬양을 직접 불러주셨습니다. (찬양) "주님 나를 택하사 잃어버린 자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나누게 하시네..." 찬양 가사처럼,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찬양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찬양 사역과 함께, 목사님은 대기업에 취업하는 놀라운 이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찬양 사역은 교회 안에서 꾸준히 이어갔지만, 생계를 위해 직장 생활을 병행해야 했습니다. 코리아제록스에서 복사기 판매 일을 하다가, 주임 교수님의 추천으로 대한항공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반지하 단칸방에서 벗어나 햇빛 잘 드는 번듯한 회사에 다니는 것이 꿈이었던 목사님께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대기업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첫 출근 날부터 난관에 부딪혔는데요. 회사 경비 아저씨로부터 "여기는 원불교 회사이니 찬양을 부르면 안 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기독교 기업인 줄 알았던 회사가 불교 재단이었던 것입니다. 찬양을 포기할 수 없었던 목사님은 가사 없이 허밍으로 찬양을 부르며 회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회식 자리에서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신입사원 환영회식 자리에서,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에 휩쓸리게 된 것입니다. 기획실 전무는 신입사원들에게 술잔을 돌리며 강제로 술을 마시게 했고, 술을 못 마시는 목사님에게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저는 크리스천이라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라고 용기 내어 말했지만, 돌아온 것은 전무의 폭력과 폭언이었습니다. 뺨을 맞고, 머리를 얻어맞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결국 입사 첫날, 회사에서 쫓겨나듯 나와야 했습니다.
억울하고 분통했지만, 목사님은 술자리에서 "크리스천"임을 당당하게 밝혔던 자신의 신앙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수 없다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하지만 막막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 원망 섞인 기도를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회사인데, 왜 또 쫓겨나게 하시냐" 며 울부짖었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다음 날, 회사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어제 폭력을 행사했던 전무가 목사님을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전무실에 들어갔지만, 놀라운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전무실 한 켠에 성경책과 찬송가가 놓여 있었고, 전무는 장로 직분을 가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것입니다. 전날 술김에 실수를 했던 전무는 목사님께 진심으로 사과했고, 오히려 목사님의 믿음에 감동받아 수행비서로 채용하겠다는 놀라운 제안을 했습니다. 하루 만에 "쫓겨날 뻔한 신입사원"에서 "전무의 최측근 수행비서"로 신분이 급상승하는 인생 역전 드라마가 펼쳐진 것입니다.
수행비서가 된 후, 목사님의 회사 생활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전무의 신임을 듬뿍 받으며 승승장구했고, 사내 신우회를 창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불교 재단이었지만, 오히려 신우회가 활성화되면서 사내 복음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직장 생활은 안정되었고, 찬양 사역은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을 더욱 놀라운 길**로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전무는 목사님에게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찬양 사역자가 되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안정된 직장, 높은 연봉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찬양 사역자의 길을 걸으라는 제안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뉴욕 지사 발령을 꿈꾸며 해외 생활을 갈망하던 목사님에게는 더욱 뜻밖의 제안이었는데요.
하지만, 전무는 목사님에게 "금일봉"을 전달하며 찬양 사역자의 길을 적극적으로 권유했습니다. 고민 끝에, 6개월 동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10)" 라는 말씀을 통해 찬양 사역자의 길을 결단하게 됩니다. 대기업을 퇴사하고, 찬양 사역에 올인하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회사를 나와 찬양 사역을 시작했지만, 앞길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좋은 조건의 대기업을 스스로 박차고 나왔지만, 후회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컸는데요. "나 같은 사람도 치유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며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찬양 사역을 시작한 후, 음반을 발매하고 예문기획과 계약을 맺는 등 점점 사역의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전무였던 장로님은 물심양면으로 목사님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셨습니다. 든든한 후원자 덕분에, 찬양 사역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장로님은 대장암 초기 진단을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완치되었고, 현재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하며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게 하신 장로님과의 만남은 목사님께 잊을 수 없는 은혜로 남아있습니다.
찬양 사역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목사님은, 9년 전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찬양 사역과는 또 다른 목회는 새로운 도전이었는데요. 개척 교회를 시작하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커피숍에서 예배 공동체를 시작했을 때, "여기가 교회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고, 교회 건축을 위해 기증받았던 드럼을 다시 되돌려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받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안수집사로부터 폭언과 협박을 듣는 충격적인 경험까지 해야 했습니다.
잇따른 시련 속에서, 건강까지 악화되었습니다. 공황장애, 우울증, 부정맥, 중심성 망막염 등 감당하기 힘든 질병들이 한꺼번에 찾아왔습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목회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구원받는 영혼들이 늘어나는 기적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한 성도의 전도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가족 전체로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많은 영혼들이 목사님의 교회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구원받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목사님은 강조합니다.
지난해, 4개월간의 안식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식년 기간에도 교회에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이 닥쳐왔습니다. 장로, 부목사 등 교회 주요 직분자들의 문제로 인해 성도들이 떠나가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50여 명의 성도가 교회를 떠나는 상황 속에서 목사님은 다시 한번 좌절했지만,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라는 말씀을 통해 다시 힘을 내어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놀랍게도, 교회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며 더욱 굳건한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힘든 시간들을 통해, 목사님은 진정한 "목회자"로 거듭났습니다. 성도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며, 진심으로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목회자의 길임을 깨닫고, 매 순간 감사하며 헌신하고 있습니다. 돌아올 교회가 있다는 것,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매일매일 행복한 마음으로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기도 제목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이혼 후 헤어진 누나, "이수연" 씨를 찾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두 살 때 헤어진 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누나. 어머니를 통해 누나가 미국 LA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영상을 통해 누나에게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누나, 이제는 만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연락 주세요." 50대 중반이 된 지금, 핏줄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다고 하는데요.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누나와 재회할 수 있도록, 시청자들의 기도와 관심을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음치에서 찬양 사역자로, 대기업에서 목회자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놀라운 인생 역전을 이루어낸 손재석 목사님. 목사님의 간증은, 듣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위로를 선사하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앞으로도 목사님의 사역과 목회를 응원하며, 누님과의 재회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