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피아니스트 백혜선 서울대 교수직 사퇴와 신앙 고백
좌절 전문가 백혜선 피아니스트, 서울대 교수 사표내고 뉴욕 바닥에서 찾은 신앙
좌절의 스페셜리스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혜선 교수: 서울대 교수직 사퇴 후 미국에서 만난 진정한 자아와 신앙의 힘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께서는 특별한 여정을 걸어오신 한 분의 이야기를 통해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으실 것입니다. 바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혜선 교수님인데요, 화려한 성공 뒤에 감춰진 좌절과 고난,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놀라운 신앙의 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망했다'라는 표현을 실패와 끝으로 생각하지만, 백혜선 교수님은 오히려 그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었다고 고백하십니다. 정상에 섰을 때가 아닌, 가장 어려웠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는 진솔한 고백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줄 것입니다.
백혜선 교수님은 32년 전, 지금으로 치면 조성진, 임윤찬과 같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떨치셨습니다. 당시 국제 콩쿠르 자체가 흔치 않았기에 그녀의 등장은 파격적이었는데요,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최근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라는 다소 역설적인 제목의 책을 발간하셨습니다. 좌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녀가 이런 제목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출판사에서는 교수님의 삶을 '매일매일 닥치는 문제들을 끈기 있게 극복해 나가는 여정'으로 보았습니다. 원래 책에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담길 예정이었으나, 출판사의 요청으로 다소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방송에서는 제약 없이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예정인데요, 교수님께서는 책을 통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내며 느낀 감정과 주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고난과 좌절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통해 우리는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백혜선 교수님의 인생 속 좌절의 순간들을 어떻게 '스페셜'하게 바꾸셨을까요? 교수님은 피아노를 치면서 기도의 힘을 놀랍게 느끼셨다고 합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기도의 힘을 경험한 것은 1989년, 첫 국제 콩쿠르에 참가했을 때였습니다. 이 콩쿠르는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권위 있는 대회였고, 1등에게는 뉴욕 데뷔와 다양한 연주 기회, 상당한 상금이 주어졌습니다.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교수님은 매일 기도를 드리며 콩쿠르에 임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잡지에서 어려움에 처한 장애인 가족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싱글맘이 두 장애 아이를 키우며 힘겹게 살아가는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받은 20대 초반의 백혜선 씨는 이 가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콩쿠르에서 상을 받게 된다면, 특히 준결선 이상 진출 시 받게 되는 상금과 부상을 이 가정을 위해 쓰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새롭게하소서 방송 출연을 준비하며 잊고 지냈던 과거를 떠올리며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당시 순수했던 마음으로 돌아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에게 기도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콩쿠르 기간 동안 백혜선 씨는 매일 '이 가정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잘 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이 가정이 어떻게든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했는데요, 놀랍게도 1등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기도의 힘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심지어 콩쿠르 당시에는 예상치 못한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연주 도중 피아노 줄이 끊어지는 황당한 사고가 발생했는데요, 줄이 끊기면서 긴장했던 탓인지, 그 다음 순서가 기억나지 않는 당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최측의 배려로 잠시 후 다시 연주를 이어갈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1등이라는 기적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콩쿠르 우승 후 백혜선 씨는 잡지사를 통해 그 장애인 가정을 찾았습니다. 어머니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자, 어머니께서는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가정을 찾는 것을 도왔습니다. 상금은 당시 돈으로 거의 2만 불에 달하는 큰 금액이었는데요, 어머니께서는 백혜선 씨가 외국에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가정을 챙겼고, 소녀는 피아노를 배우며 성장해 피아노 선생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백혜선 씨에게 기도의 힘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머니 또한 백혜선 씨에게 큰 영향을 준 '기도의 어머니'였습니다. 콩쿠르에 참가할 때면 늘 함께 가지는 못했지만, 늘 전화로 기도하겠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집에 돌아가 보면 어머니는 밤낮으로 기도에 매달리셨는데요, 병원을 운영하며 환자와 직원들로 북적이던 집안에서 어머니는 늘 안방에서 조용히 기도하셨습니다. 어린 백혜선 씨는 어머니의 기도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기도가 가족을 위한 간절한 염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는 가정이라도 누구나 말 못 할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데요, 당시 사회 분위기는 이러한 어려움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웠습니다. 백혜선 씨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아버지의 재혼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어느 날 친구의 놀림을 통해 가족 관계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요, 초등학생이었던 그녀에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들의 존재, 조카들의 탄생 등은 혼란스럽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습니다. 부모님 또한 이러한 이야기를 자녀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돌싱이 많아지고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운 현재와 달리, 당시 사회는 재혼 가정에 대한 편견이 컸습니다. 장로로서 사회 활동도 활발히 하셨던 아버지에 대한 걱정, 중학생 때부터 혼자 서울에서 유학 생활을 했던 딸에 대한 염려 등 어머니는 늘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어머니처럼 백혜선 씨를 위해 기도해 준 또 다른 분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일하시던 나이 많은 도우미 아주머니는 백혜선 씨에게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아침마다 머리맡에 다가와 축복 기도를 해주셨고, 밥 짓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다락방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주머니, 뭐 하세요?" 라고 물으면 "기도해야 한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주머니는 백혜선 씨의 어머니에게 40일 금식 기도를 권유하기도 했는데요, 어머니를 기도의 길로 이끈 분이 바로 이 도우미 아주머니였습니다. 기도원 같은 분위기의 병원에서 수녀 원장님 같은 역할을 하셨던 아주머니는 백혜선 씨에게 "하나님을 믿음으로 만났다" 고 이야기하며,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가르쳤습니다. "너에게는 큰 축복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게 될 것" 이라는 예언과 함께, 힘들 때마다 기도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백혜선 씨는 새롭게하소서 출연을 준비하며 이 아주머니의 존재를 떠올리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집안 기도의 원천은 바로 이분이었던 것입니다. 늘 기도로 삶을 살아가셨던 아주머니는 백혜선 씨에게 끊임없는 축복을 기원해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셨던 분들을 떠올리며 백혜선 씨는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어머니의 기도와 도우미 아주머니의 헌신적인 기도 덕분에 오늘의 자신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미국 유학 길에 오른 어린 백혜선 씨는 낯선 환경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매일 일기장에 기도문을 쓰며 하루를 마무리했는데요, "하나님, 죄송해요. 오늘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공부를 게을리했어요. 연습을 충분히 하지 못했어요." 대학교 시절에는 연애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았습니다. "연애를 하면 꼭 결혼해야 하나요? 연애해도 되는 건가요?" 순수했던 청년 시절에는 연애와 결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고, 연애는 곧 결혼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일기장에는 회개와 반성의 내용이 가득했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이러한 기도 습관은 도우미 아주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습니다.
보스턴에서 음악 공부에 매진한 백혜선 씨는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20대 후반에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용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20대에 국내 최고 명문 대학교의 교수가 된 것은 놀라운 성공이었는데요, 정작 본인은 서울대학교에서 자신의 미래를 그리지 못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첫 발을 디딘 날, 이곳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직감을 받았습니다. 숨 막히는 듯한 갑갑함을 느꼈다고 하는데요, 1994년 임용 당시 대학교 내 문화는 매우 권위적이었습니다. 교수들은 절대적인 존재였고, 특히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타이틀은 엄청난 권위를 상징했습니다. 하지만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 서울대학교는 스탠포드나 하버드와 같은 세계적인 대학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오랜 유학 생활 후 한국 사회의 유교적인 문화는 백혜선 교수에게 더욱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어머니가 다니시는 교회에 나가면 교인들은 "서울대 교수님" 이라며 극진히 대접했지만, 교수라는 직함이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섬기고 싶었지만,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교수로서의 권위보다는 인간적인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권위적인 대학 문화와 쉽게 융화되지 못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남학생들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 교수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오히려 편안하게 다가오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보다는 "서울대학교 졸업" 이라는 타이틀을 목표로 음대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던 것도 교수로서 큰 괴리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1, 2학년 때는 미팅에 여념이 없고, 3, 4학년 때는 취업이나 유학 준비에 매달리는 학생들의 모습은 음악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음악 연주자는 끊임없는 노력과 연습이 필수적인데, 학생들은 연습 부족에 대한 자각 없이 안일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백혜선 교수는 큰 갈등을 느꼈고, 결혼 후 남편과의 가치관 차이까지 겹치면서 점점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결국 백혜선 교수는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합니다. 주변에서는 만류했지만,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10년을 고민했다는 표현처럼, 오랜 시간 동안 내적 갈등을 겪어온 결과였습니다. 가족들과 충분히 상의하고 동의를 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혼 당시 남편에게 외국으로 나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아이가 태어나면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고, 20대 후반에 얻은 안정적인 직장에 안주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고 싶었습니다. 교수 직은 안정적이었지만, 가르치는 일에 매몰되어 정작 자신의 음악적 역량은 점점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끊임없이 배움을 갈망했지만, 현실은 만족스럽지 못했고 불안감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남편은 안정적인 삶에 만족하기를 바랐지만, 백혜선 교수는 끊임없이 외국으로 나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방학 때마다 해외 연주를 나갔지만, 근본적인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편과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별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둔다는 소식에 주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안정적인 직장과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당시 자신은 다소 자만했던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국내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피아니스트였기에 어디를 가든 잘 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외국에 나가서도 아이들을 잘 키우며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혼 요구 또한 이기적이고 못된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었습니다. 이혼 후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 백혜선 교수는 뉴욕에 아파트를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뉴욕,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 중 하나입니다. 맨해튼 중심에 아파트를 구하는 것은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의미했는데요, 당시 백혜선 교수는 무모하게도 최고급 아파트 세 채를 계약했습니다. 아이들을 최고의 환경에서 교육시키고 싶었던 욕심이었을까요? 유치원조차 최고를 고집하며 유명 인사 자녀들이 다니는 초호화 유치원에 아이들을 보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수입 없이 지출만 늘어가는 생활은 점점 위험해져 갔습니다. 은행 잔고는 줄어들고, 불안감은 커져갔지만, 애써 현실을 외면했습니다. 친구는 수입 없이 재테크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고급 아파트 세 채는 재테크 수단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흥청망청 소비하며 화려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면서 미국 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은행들이 무너지고, 주택 가격이 폭락하면서 백혜선 교수의 재정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아파트 가격은 반토막이 났고, 이자율은 폭등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집을 포기하고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뉴욕 중심부에 위치한 백혜선 교수의 아파트 또한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매달 수천만 원에 달하는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졌고, 세 채 아파트에 대한 압박감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도망칠 곳은 없었습니다. 결국 은행은 아파트를 압류했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백혜선 교수는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 백혜선 교수는 그제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승승장구하며 성공을 거듭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두는 것도, 재테크로 성공하겠다는 것도 모두 자신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뉴욕에서 겪은 쓰라린 실패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했고,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리게 했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며 막막한 현실에 직면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진정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힘든 상황을 털어놓을 수 없었고, 도움을 청할 곳 또한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의 어리석은 선택에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멀쩡한 결혼을 깨고,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난 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집까지 잃었다는 소식에 어머니의 마음은 더욱 무너져 내렸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던 백혜선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며 40일 작정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놀랍게도 40일 작정 기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 가톨릭 대학교에서 석좌 교수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한 학기에 일주일만 출강하면 되는 조건이었기에, 외국에 거주하면서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뉴욕을 떠난 지 6, 7년 만에 찾아온 기회는 백혜선 교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가져가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때부터 백혜선 교수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광야 같은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40일 작정 기도 후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백혜선 교수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계획과 선택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요.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감사함 없이 내려놓은 선택에 대한 댓가를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갚아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여쭙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선택했던 결과는 쓰라린 고통으로 돌아왔습니다.
음악 전문가로서 가장 궁금한 점은 회심 후 연주가 달라졌는지 여부일 것입니다. 뉴욕에서의 광야 같은 삶 속에서 백혜선 교수를 붙드신 것은 뉴욕 한인교회였습니다. 컬럼비아 대학교 앞에 위치한 교회는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교회로, 미국 동부 교회들의 모 교회와 같은 존재입니다. 보스턴 교회와 비슷한 분위기로, 학생들이 많고 활기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처음에는 유년 주일학교에서 봉사했지만, 교회 성가대 지휘자의 권유로 2007년부터 성가대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음악의 본질은 노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부의 아름다움, 모든 악기는 결국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피아노는 다양한 성부를 표현할 수 있지만, 다른 악기들은 단선율 위주입니다. 단선율 악기 연주는 결국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것입니다. 10년 넘게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했고, 예배에서 성가대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전 찬양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영적인 치유를 일으키는 역할을 합니다. 목사님께 미리 설교 말씀을 받아 성경 봉독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찬양을 선곡하고,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합니다. 뉴욕에는 세계적인 성악가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는데요, 교회 성가대에는 20대부터 85세 이상의 다양한 연령대의 교인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음악 전공자들은 나이 많은 성가대원들의 열정과 신앙심에 감동받고, 나이 많은 성가대원들은 젊은 음악가들의 재능에 힘입어 더욱 풍성한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음악은 기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으로 소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백혜선 교수의 음악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마음과 영으로 드리는 음악,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주하는 음악으로 바뀐 것입니다. 성가대 지휘 이야기를 하면서 백혜선 교수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교인들은 성가대 찬양에 큰 은혜를 받고, 목사님 또한 성가대를 극찬하며 교회의 자랑으로 여깁니다. 백혜선 교수는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은혜를 받는다며 감사**를 표했습니다.
화려했던 피아니스트 시절을 뒤로 하고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백혜선 교수는 여전히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제2의, 제3의 백혜선을 꿈꾸는 후배 음악가들과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을까요? 백혜선 교수는 무엇보다 자신의 최선을 다해 모든 일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혼신을 다해 매진해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자녀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선입견을 갖지 말고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나이 들어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자기 계발을 해야 합니다. 편안한 삶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늘 기도 제목이 주어집니다. 기도해도 응답 받지 못할 때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계발과 배움을 추구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힘든 일이 닥쳤을 때는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매달리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젊은 시절 피아니스트로서 최고의 명예를 누렸지만, 인생이라는 악기는 조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같은 시간을 통해 백혜선 교수를 조율하셨고, 이제 그녀의 인생은 더욱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피아노 연주보다 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백혜선 교수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성공을 향해 질주하던 젊은 시절, 백혜선 교수는 스스로 영감을 받아 음악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세상의 모든 영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은 매일 무릎 꿇고 기도하셨던 어머니의 기도, 그리고 축복 기도를 해주셨던 도우미 아주머니의 기도 덕분입니다. 그 기도들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오늘의 백혜선을 만든 것입니다. 앞으로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고, 후배들을 양성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감을 전하는 음악가, 교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