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빈 집사 탈북 스토리: 절망 속 희망과 하나님의 은혜 간증
절망의 끝에서 피어난 희망, 탈북민 김보빈 집사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북한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당신이 처음 듣는 탈북 스토리 - 김보빈 집사 간증 상세 정리
오늘,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북한 주민들의 참상과, 그 속에서 피어난 한 탈북민의 기적 같은 삶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들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아니, 영화조차 담아낼 수 없는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김보빈 집사님의 간증을 통해, 북한의 현실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하게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요? 지금부터 김보빈 집사님의 파란만장한 탈북 스토리를 상세히 정리하여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1. 멈춰버린 시계, 북한에서의 고난
이야기는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땅, 북한에서 시작됩니다. 주영훈 님은 북한 소식이 오물 풍선이나 김정은 관련 뉴스 외에는 접하기 어렵다고 언급하며, 북한 주민들의 참상에 대한 소식은 더욱 찾기 힘들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이에 공감하며, 북한은 지역 간 이동조차 통제되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곳일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자유는 물론 기본적인 이동의 자유조차 없는 북한의 현실, 과연 상상이 되시나요?
김보빈 집사님은 현재 통일드라이브라는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이곳은 단순히 탈북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닌, '통일오라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적인 조합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탈북민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돕고, 더 나아가 통일을 준비하는 공동체입니다. '받기만 하는' 수혜자가 아닌, '주는' 주체로 변화되어, 고향에 돌아가는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는 곳, 그곳이 바로 통일드라이브입니다. 양평을 거꾸로 하면 평양이 된다는 재치 있는 설명처럼, 평양까지 가는 날을 꿈꾸며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공동체, 정말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탈북한 지 12년, 2012년 6월 1일에 사랑하는 딸과 함께 대한민국에 오셨습니다.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요? 수많은 탈북민들의 간증처럼, 김보빈 집사님의 삶 또한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90년대 고난의 행군 당시 북한 주민들이 겪었던 굶주림과 고통은 이미 많은 증언을 통해 알려져 있지만, 김보빈 집사님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을까요?
김보빈 집사님은 80년대까지는 비교적 괜찮았던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90년대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시작된 고난의 행군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6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난 김 집사님은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새 옷, 새 신발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늘 물려받은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특히 셋째 언니보다 키가 작아 늘 '허공에 뜬' 옷을 입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설움은 컸습니다. 북한에서는 넷째 딸을 '웃음딸'이라고 하지만, 김 집사님은 자신을 '썩은 딸'이라고 자조하며 불평과 불만을 품고 살았습니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13살 어린 나이에 생계 전선에 뛰어든 김보빈 집사님은 생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옥수수 배낭을 메고 집집마다 다니며 생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부끄러움도 느낄 겨를 없이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어린 시절, 언니들은 겪어보지 못했던 고난을 홀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계속되는 힘든 일, 겹겹이 쌓이는 어려움 속에서 김 집사님은 어린 시절이 마치 오늘의 삶을 위한 훈련 과정이었다고 회상합니다. 13살 소녀가 생선 바구니를 들고 낯선 집 문을 두드리는 모습, 상상만 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생선과 옥수수를 물물교환하는 방식으로 장사를 하며 10대 시절을 보낸 김보빈 집사님. 20살이 넘어서는 양치기 소녀, 즉 양방목공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친구의 도움으로 샛별에서 청진까지 양파 장사를 하며 더 큰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언니들이 결혼 후 알코올 중독 남편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김 집사님은 가족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의 밑천을 언니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가족을 위한 헌신,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2. 인신매매, 죽음의 그림자 드리운 중국
결혼을 앞두고 2월 19일,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향한 김보빈 집사님. 결혼은 잠시 미루고 한 달만 돈을 벌어 돌아오겠다는 계획이었지만, 중국에서의 삶은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브로커에게 붙잡혀 15일 동안 꼼짝 못 하고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탈북민을 신고하면 5천 위안의 포상금을 받을 수 있었기에, 브로커는 김 집사님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탈북민 한 명당 5천 위안, 돈벌이에 눈이 먼 브로커들의 횡포, 정말 끔찍합니다.
15일 후, 김보빈 집사님은 보스를 타고 길림성 매하구라는 곳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다시 길림성 려원시라는 곳으로 '팔려' 갔습니다. 분명히 '일'을 시켜준다고 했지만, 현실은 인신매매였습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올 때 브로커 비용은 3천 위안, 김 집사님을 '산' 중국 브로커는 12,000 위안을 지불했습니다. 자신의 몸값이 12,000 위안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김 집사님은 낯선 중국 농촌에 던져졌습니다. 인간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인신매매, 상상조차 하기 힘든 현실입니다.
농촌에 도착하자마자 김보빈 집사님을 기다린 것은 인격 모독적인 '검사'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구경거리가 생긴 듯 몰려와 북한에서 온 여자를 구경했고, 심지어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하체를 검사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왔지만, 인신매매로 팔려 온 사실, 여성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수치심과 절망감이 밀려왔습니다. 죽음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 김 집사님은 3일 동안 굶고 수면제, 쥐약, 세제까지 먹으며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죽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현실,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세 번의 자살 시도 끝에 병원에서 깨어난 김보빈 집사님은 '죽음조차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라는 절망과 함께 '이제는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다지게 됩니다. 분가를 감행하고 경찰의 눈을 피해 닭장, 개장, 심지어 물독까지 숨어 다니며 힘겹게 살아가던 중, 임신 사실을 알게 됩니다. 2004년 4월 26일, 출산을 10일 앞두고 11명의 경찰이 들이닥쳐 아이를 지울 것을 강요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탈북 여성의 출산을 엄격히 금지했기에, 김 집사님은 강제로 병원에 끌려가 낙태 시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배에 주사 바늘을 찔러 아이를 죽이는 끔찍한 낙태 수술, 그 고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은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김보빈 집사님은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북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딸을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고 보내야 했던 슬픔, 나라 없는 설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때 김 집사님은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북한 속담을 떠올리며, 깊은 절망과 함께 북한 체제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죽은 딸을 가슴에 묻고, 다시 찾아온 새 생명을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다짐하며, 어머니의 고향인 중국 서귀포를 찾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탈북 여성에 대한 감시는 계속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시댁에서는 딸 대신 아들을 낳아 오라는 터무니없는 요구까지 했습니다. 딸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겪어야 했던 고통, 정말 안타깝습니다.
2004년 7월, 딸 설령이를 낳았지만, 여전히 불안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던 김보빈 집사님. 딸이 60일 되었을 무렵, 유모차가 필요하냐는 전화를 받고 찾아간 곳은 교회였습니다. 유모차를 준다는 사람, 같은 탈북민 자매를 만나러 예배당에 처음 발을 들인 순간, 김 집사님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보고 구제소인 줄 알았던 첫인상, 예배당에서 겪었던 낯선 경험들,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울부짖었던 간절한 기도, 이 모든 것이 김 집사님을 하나님의 품으로 이끄는 시작이었습니다.
3. 십자가, 절망 끝에서 만난 빛
예배당에 처음 간 날, 십자가를 보고 구제소인 줄 알았던 김보빈 집사님. 현금함에 20원을 헌금하며 유모차 중고 가격으로 생각했던 순수한 마음, 하지만 예배는 낯설고 불편했습니다. 전도사님의 설교가 자신을 향한 것 같아 불쾌했고, '죄인'이라는 단어가 거슬렸습니다. 기도 시간에는 '주여'를 외치는 소리가 마치 감옥처럼 느껴졌고, 예배 시간 내내 불편하고 불안했습니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팠지만, 교회 밖으로 나가면 멀쩡해지는 신기한 경험,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유모차를 받기 위해 다시 찾은 교회, 여전히 예배는 불편했지만, 왠지 모르게 발길은 교회를 향했습니다. 3주 동안 예배에 참석하며 불편함과 싸우던 김보빈 집사님은 4주째 되는 날, 영접기도 시간에 자신도 모르게 죄인임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입술로는 죄를 고백하는,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찬송가를 부를 때는 눈물이 났지만, 성경 말씀은 여전히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토요일 저녁, 자매들이 준비해주는 따뜻한 음식과 중보기도를 통해 교회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중보기도가 경찰에게 잡혀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라는 것을 알고, 이제는 돈 대신 기도에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를 통해 삶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1원짜리 10개, 10원짜리 5개, 10원짜리 10장... 잡혀갈 경우를 대비해 돈을 모으던 습관도 사라졌습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하면 된다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저녁 8시 중보기도 시간에는 정신병자들만 있는 줄 알았던 방언 기도,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권사님의 설명을 듣고 방언 기도가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화하는 특별한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도할 줄 모른다는 김 집사님에게 전도사님은 사도신경, 감사 100번,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저녁 8시, 무릎 꿇고 사도신경과 감사기도를 시작했지만, 감사 100번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다 지쳐 쓰러지기를 반복, 하지만 40일 동안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응답을 달라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40일 동안의 간절한 기도, 과연 응답이 있었을까요?
40일째 되던 토요일, 예배에 참석한 김보빈 집사님은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눈물, 콧물, 방언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방언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만 믿고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 후로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예배에 참석했지만, 여전히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와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김 집사님에게 '사랑'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김보빈 집사님을 괴롭히던 '할아버지'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영접기도 후 할아버지가 사라진 것입니다. 전도사님은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이 승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부활절, 성탄절 등 교회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던 김 집사님은 성탄절 날, 갑작스럽게 경찰에 체포되는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이유는 시댁 식구들과의 사소한 다툼, 밭 경계를 놓고 싸운 것이 화근이 되어, 앙심을 품은 친척의 신고로 경찰에 잡혀간 것입니다. 성탄절 연습 중 경찰차가 들이닥치는 긴박한 상황, 탈북민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지만, 김 집사님은 김치움 속에 숨었다가 결국 발각되었습니다. 김치움 속 좁은 틈에 숨어 있던 김 집사님을 남자 다섯 명이 김치독을 움직여 꺼내는 웃지 못할 상황, 하지만 결과는 체포였습니다.
경찰서에서 밤샘 조사를 받고 풀려났지만,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살 수 없게 된 김보빈 집사님은 딸 은혜와 함께 어머니 고향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양력설 날, 딸 은혜가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0일 동안 링거조차 제대로 맞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는 딸,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김 집사님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딸을 안고 교회를 찾았습니다. 차가운 겨울, 십자가 밑에 딸을 내려놓고 맨땅에 앉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죽은 딸의 환청이라도 들려달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울부짖던 그때, 딸에게서 "엄마"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적처럼 딸이 깨어난 것입니다. 딸의 이름을 '설령'이라고 지었지만, 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엄마',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은혜야'라고 외친 김 집사님. 그 순간, 딸의 이름이 '은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은혜, 딸 '은혜'는 그렇게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4. 교화소, 벼랑 끝에서 피어난 전도
딸 은혜의 기적적인 회복 후, 김보빈 집사님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지만,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여전했습니다. 결국 딸 은혜를 데리고 집을 나와 연변으로 가서 백두산 가이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갔더니 자궁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북한에서 암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에, 마지막 가이드라고 생각하고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그곳에서 대구에서 온 부부를 만났고, 그들의 권유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딸을 보육 시설에 맡기고 2007년 7월 9일, 한국으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책과 속옷 한 벌만 챙겨 몽골행 기차에 몸을 실은 김 집사님, 과연 한국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몽골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탈북을 시도하는 일행들과 함께 기도하며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몽골 국경을 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소금과 고춧가루를 뿌리며 미신적인 행동까지 했지만, 결국 국경 경비대에 붙잡히고 맙니다. 세 겹의 철조망, 5m 높이의 전기 철조망, 뚫고 넘기에는 너무나 위험하고 어려운 장벽이었습니다. 일행 중 자신만 붙잡히지 않고 풀밭에 숨어 있었지만, 동료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결국 자수했습니다. 23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며 감옥 생활을 했지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감방 경비원이 몰래 다가와 김 집사님의 아버지 이름을 물으며, 사탕과 쪽지를 건네주었습니다. 쪽지에는 "조금만 참아"라는 짧지만 희망적인 메시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경비원은 김 집사님의 아버지 친구였고, 김 집사님의 딱한 사정을 알고 도움을 준 것입니다. 경비원의 도움으로 김 집사님은 고향 새별로 호송될 수 있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만난 한 줄기 희망, 정말 기적 같습니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가족과의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보위부에서 15일 동안 조사를 받고 대기소로 넘겨졌지만, 그곳에서 감찰과 부과장의 성추행과 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임신까지 하게 되었지만, 결국 강제로 낙태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술 후에도 구치소에 갇혀 모진 고문과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철창 문턱에 무릎 꿇고 엉덩이를 든 채 하루 8시간씩 벌을 서고, 손바닥을 쇠꼬챙이로 맞는 고통,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음력설 날, 감방 안에서 중국어로 찬양을 부르다 간수에게 발각되었지만, 오히려 간수는 찬양을 다시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옆방 자매의 도움으로 찬양의 의미를 전달했고, 간수는 오히려 감동하여 찬양을 세 번이나 더 듣고 감방을 나섰습니다. 절망적인 감옥 안에서 울려 퍼진 찬양, 그 찬양이 김 집사님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3개월의 구치소 생활 후, 김보빈 집사님은 3년형을 선고받고 전거리 교화소로 이송되었습니다.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두 발로 걸어 들어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전거리 교화소는 '불망산'이라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습니다. 교화소에 도착하자마자 시체 썩는 냄새와 타다 남은 시체 발을 목격하며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습니다. 굶주림과 질병, 폭력이 난무하는 교화소, 그곳은 인간 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김 집사님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화소 안에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죽음과 맞닿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김 집사님의 용기, 정말 놀랍습니다.
교화소에서 감자 농사를 짓던 김보빈 집사님은 굶주림을 견디기 위해 시체에서 나온 구더기 가루까지 이용했습니다. 상처를 째고 구더기 가루를 발라 연명하는 처절한 삶,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통입니다. 어느 날, 함께 수감된 노인을 위해 몰래 고추를 훔치다 걸려 뭇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전도에 힘썼습니다. 교화소 내에 열병이 돌 때 병방에 격리되었지만, 그곳에서 윤설이라는 자매를 만나 전도하는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3년 동안 교화소에서 8명을 전도하는 놀라운 결실을 맺었습니다. 화장실에서 방언 기도를 하다가 옆방 자매도 방언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교화소가 천국임을 깨달았습니다. 절망의 끝에서 만난 천국, 아이러니하지만 진실입니다.
3년의 교화소 생활을 마치고 출소할 때, 김보빈 집사님은 건강을 회복하고 68kg의 건장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수감 당시 40kg도 안 되었던 몸무게가 3년 만에 68kg으로 늘어난 기적,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출소 후 가족들을 만났고, 자신을 팔았던 친구 승모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중국에 두고 온 딸을 찾기 위해 다시 북중 국경을 넘나들며 6개월의 사투를 벌인 끝에, 2011년 4월 8일, 드디어 딸과 함께 탈북에 성공합니다. 딸을 찾기 전 자궁암 진단을 받았지만, 기적처럼 암세포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딸을 찾아 나선 김 집사님, 정말 드라마틱한 인생입니다.
5. 대한민국, 용서와 화해 그리고 새로운 시작
2012년 6월, 드디어 대한민국에 입국한 김보빈 집사님은 딸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딸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북한에서의 악몽, 중국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밤마다 김 집사님을 괴롭혔습니다.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유 집회에 참석했지만, '용서'는 쉽지 않았습니다. 종이에 용서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포도주에 담갔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면 용서가 된다는 말에 분노하며 뛰쳐나오기도 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그런 '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고민과 갈등 속에서 김보빈 집사님은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때 김 집사님은 종이에 이름들을 적어 포도주에 담갔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며, 진심으로 용서를 선포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이제부터 이 사람들은 제게 악인이 아닌,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용서를 선포하는 순간, 마음속에 평안이 찾아왔고,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시작되었습니다. 가나안인 줄 알았던 대한민국이 광야임을 깨닫고, 고향의 부모 형제, 북한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새로운 사명, 김보빈 집사님의 인생은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습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지난 삶을 돌아보며, 고난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김 집사님을 단련시키고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수치라고 생각했던 과거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었고,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김보빈 집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이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매일 '절대 감사, 절대 사랑'을 외치며 살아갑니다. 자신 안에 사랑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믿음, 김 집사님은 오늘도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마지막으로, 김보빈 집사님은 북한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북한에는 주님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지금도 북한 주민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북한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통령이 미국에서 당선된다고 해서 북한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문화 콘텐츠를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북한 변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도 북한 어딘가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억하며, 북한을 향한 끊임없는 기도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언젠가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김보빈 집사님과 같은 귀한 탈북민들이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것을 기대하며, 오늘 간증 정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김보빈 집사님의 간증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