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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유튜버 원샷한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감동 스토리

요약

절망을 희망으로! 시각장애 유튜버 원샷한솔 감동 스토리

[수어통역] 🎥구독자 45만(녹화일 기준)의 인기 유튜버 원샷한솔의 간증!ㅣ원샷한솔 김한솔 형제ㅣ원샷한솔ㅣ새롭게하소서 상세 내용 정리

오늘, '새롭게 하소서' 채널에는 특별한 게스트, 바로 45만 구독자를 자랑하는 인기 유튜버 '원샷한솔'의 김한솔 님이 출연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차별이 존재하고, 이러한 차별로 인해 상처받고 좌절하는 이들이 많은데요, 김한솔 님 역시 차별과 불행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 맞는 동역자와 함께 시각장애인 유튜버로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펼치고 계십니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영상 제작은 물론, 세계 최초 점자 실버 버튼을 획득하며 유튜브 채널 '원샷한솔'을 운영하는 김한솔 님을 모시고,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진행자 톤으로) 안녕하세요! 원샷한솔 김한솔 님, 오늘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발음이 조금 어렵다고 하시는데, '원샷한솔' 채널은 이미 저희 '새롭게 하소서' 시청자분들께도 아주 익숙한 채널이라고 들었습니다. 한솔 님 형제분들께서 '새롭게 하소서'를 자주 시청하신다고 들었는데요, 특히 최근에는 맹학교 동창인 지선 님이 출연하여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것을 보셨다고 합니다. 자주 연락은 못하지만, 방송을 보면서 학창 시절 추억을 떠올리셨다고 하니,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저희가 '원샷한솔' 채널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는데요, 채널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주요 콘텐츠에 대해 직접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샷한솔' 채널은 시각장애인인 저의 일상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채널입니다.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우울하고 불쌍하다는 편견을 가지기 쉬운데요, 저는 채널을 통해 제가 경험한 장애는 슬프고 불쌍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오히려 재미있고 즐거운 순간들이 훨씬 많았고, 그러한 경험들을 영상에 담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브이로그, 상황극, 연기 등 다양한 일상 콘텐츠를 통해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장애도 특별히 불쌍하거나 우울한 것만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채널 운영자 분들을 보면, 정기적인 영상 업로드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한솔 님은 어떠신가요? 채널 운영에 대한 보람과 부담감을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영상을 너무 많이 올리고 싶다는 욕심이 컸습니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두 개의 긴 영상과 매일 짧은 영상을 올리고 있는데요, 긴 영상은 제작 시간이 오래 걸려 제 욕심만큼 자주 올리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짧은 영상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제작하는 편이라, 부담보다는 재미를 느낍니다. "이 메시지를 이렇게 표현하면 웃기겠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궁금해하며 댓글을 확인하는 과정이 굉장히 즐겁습니다. 물론 '내일 또 영상을 올려야 하네' 하는 부담감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하루에 10개도 넘게 영상을 찍을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하고, 실제로 댓글을 통해 반응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큰 희열을 느낍니다.

수많은 댓글 중, 특히 기억에 남거나 채널 운영에 큰 보람을 느꼈던 댓글이 있으신가요? 채널을 통해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었던 저의 의도가 잘 전달되었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댓글을 통해 "장애인은 불쌍하고 우울할 것이라는 편견이 깨졌다"는 반응을 볼 때, 채널 운영의 의미를 실감합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신혼부부로부터 받은 메시지입니다. 시각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은 부부는 처음 겪는 현실에 힘들어하며 제 채널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채널 속에서 제가 다양한 일들을 스스로 해나가고, 밝게 웃는 모습을 보며 "우리 아이도 한솔 님처럼 밝고 긍정적으로 키워야겠다"희망과 용기를 얻었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메시지를 통해 저 또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한솔 님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말씀을 워낙 재밌게 하셔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평소에도 말씀을 조리 있게 잘하시는 것 같은데요, 혹시 평소 말하는 습관이나 유튜브 콘텐츠 제작 방식이 말하기 능력에 영향을 주었을까요? 저는 말하는 것을 워낙 좋아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100만큼 말하고 싶지만, 200만큼 쏟아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말이 점점 빨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튜브 채널 운영은 저에게 정말 잘 맞는 일 같습니다.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줄 수 있고, 3년 만에 43만 구독자를 달성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유튜브 시작 초기에는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구독자 43만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셨는지 궁금합니다. 유튜브 채널 운영 초반 9개월 동안은 구독자가 1,000명에 불과했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안 볼까?', '내 콘텐츠가 재미없나?', '장애라는 소재가 흥미롭지 않은가?' 등 고민이 많았습니다.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구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와 제가 하고 싶은 콘텐츠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비장애인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면서도, 제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아내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9개월 동안 1,000명이었던 구독자 수가 1년 2개월 만에 10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꾸준한 노력과 진정성이 시청자들에게 통했다고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입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희 '새롭게 하소서' 채널도 댓글을 보며 힘을 얻고 보람을 느낍니다. 한솔 님도 댓글을 통해 시청자들의 반응을 확인하며 힘을 얻으실 것 같습니다. 댓글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저는 일어나자마자 댓글부터 확인합니다. 댓글을 통해 시청자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진솔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큰 힘과 보람을 얻습니다. 응원 댓글은 물론, 때로는 악플도 있습니다. 조회수가 높아질수록 악플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시각장애인 척한다", "눈이 보이는데 안 보이는 척 연기한다"는 악플부터, "내가 아는 시각장애인은 저렇지 않다"편견에 기반한 악플까지 다양합니다. 악플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99%의 긍정적인 댓글에 집중하며 힘을 얻습니다. 악플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는 채널을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

긍정적인 댓글에 집중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한솔 님은 연이은 불행과 시련 속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시겠어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저에게는 여러 명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9살 때 첫 번째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시고, 아버지와 둘이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출장이 잦아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외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어머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온전한 가족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1살 때, 두 번째 어머니가 생겼습니다. 새로운 어머니가 생긴다는 사실에 기대감을 가졌고,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어머니크리스천이었고, 저에게 만화 성경책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성경 속 착한 인물들이야기를 보며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불행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두 번째 어머니와의 만남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새벽, 화장실을 가던 중 두 번째 어머니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자신의 아이우선시했고, 저를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을 고려했습니다. 성경책을 선물해 주셨던 다정한 모습과는 달리, 저를 싫어하는 듯한 어머니의 태도에 혼란스러웠습니다.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고, 착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혹시 버려질까 두려워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고, 1년 후 두 번째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어머니는 떠났고, 저는 또 다시 혼자 남겨졌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 착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하나님정말 존재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어머니가 생겼습니다. 두 아이와 함께 였는데요, 12살 여름, 세 번째 어머니새로운 가족과의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세 번째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떠셨나요? 세 번째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눈치를 보는 습관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엄마가 생겨서 좋다는 생각보다는, '이번 어머니는 과연 나를 잘 대해줄까?' 하는 불안감이 컸습니다. 새로운 학교전학을 가게 되면서, 학교가정 모두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을 입는 것부터 일상생활 모든 면에서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세 번째 어머니자신의 친 아이들우선시했고, 저는 늘 뒷전이었습니다. 잘하려고 노력해도 혼나는 일이 잦았고, '왜 나 때문일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자책하며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속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군가 나의 어려움을 알아주고,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두 아이친아버지에게 보내지고, 세 번째 어머니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 더욱 차갑고 외로운 공간이 되었습니다. 먹을 것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않아 배고픔에 지쳐 교회를 찾았습니다. 교회에서는 따뜻하게 맞아주고 도 주었지만, 마음의 안식처는 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좋았지만, 근본적인 외로움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불행 속에서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6학년 여름, 세 번째 어머니와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행이 또 다시 찾아왔습니다. 6월, 두 분 다 크게 다쳐 아버지중환자실에, 어머니다리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두 분 다 회복하여 퇴원했지만, '너 때문'이라는 원망은 계속되었습니다. 큰 아이와 비교하며 "왜 너는 공부를 못 하냐"비난자존감을 깎아내렸습니다. '내가 정말 부족한 사람인가?', '왜 나를 싫어할까?' 끊임없이 자문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휠체어를 밀며 어머니를 간호했지만, 관계개선되지 않았습니다. 한 달 후, 아버지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무리하게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어머니다투고 출근하신 아버지는, 그날 또 다시 교통사고돌아가셨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차량 바퀴가 빠져 전복되는 사고였습니다. 13살, 초등학교 6학년 여름, 아버지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 장례식 후, 세 번째 어머니떠나셨고, 저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막막한 고민과 함께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겨졌을 때, 가족이나 친척의 도움은 전혀 없었나요? 다행히 큰아버지큰어머니께서 저를 거둬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막막함 대신,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친어머니를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어머니는 저를 버리고 떠났고,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에 어린 나이에도 상처를 받았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었기에, 찾아야겠다는 생각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쯤, 친어머니에게 연락이 왔었지만, 저는 이미 큰아버지큰어머니 밑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어머니에게 burden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친어머니연락닿지 않고 있습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와의 만남은 한솔 님에게 큰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 댁에서 지내면서 가족의 따뜻함을 처음 느끼셨다고 들었습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는 어떤 분들이셨나요? 큰아버지, 큰어머니는 저에게 진정한 가족의미를 알려주신 분들입니다. 평범함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행복인지, 안정감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6학년 2학기, 서울에 있는 네 번째 초등학교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학원도 처음 다녀보고, 공부에도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성적이 향상되었습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환경이 중요하구나' 깨달았습니다. 큰어머니따뜻한 말투, 관심, 사랑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긍정적인 자아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시험을 잘 보면 선물도 주시고, 칭찬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큰어머니는 저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친어머니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모정큰어머니를 통해 듬뿍 받았습니다. 큰아버지는 아버지의 형님, 즉 백부이시고, 큰어머니백모이십니다. 누나도 있었지만, 차별 없이 저를 친아들처럼 사랑해주셨습니다. 이 없어 거실에서 큰아버지, 큰어머니와 함께 잤지만, 불편함전혀 없었습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늘 부족함 없이 사랑받고 자랐습니다. 큰어머니미싱 일을 하시며 생계를 유지하셨고, 힘든 상황에서도 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네 몫을 다하는 사람이 되라' 늘 강조하셨습니다. 어릴 때는 반항도 많이 했지만, 큰어머니, 큰아버지사랑과 가르침 덕분에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촌 형, 누나들과의 차별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를 더 챙겨주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주말에는 큰어머니, 큰아버지셋이서 등산을 다니며 소중한 추억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가정의 따뜻함을 느끼며 행복하게 지내셨지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언제, 어떤 일시력을 잃게 되셨나요? 13살부터 큰아버지 댁에서 지내며 가족의 사랑안정감을 느끼고, '나도 행복해질 수 있겠구나' 희망을 품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다니지 않았지만, 마음평온했습니다. 18살, 고등학교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40분 거리의 학교를 다녔는데, 하교길에 갑자기 한쪽 눈안 보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오른쪽 눈을 떴는데, 세상이 회색빛으로 보이고 만 느껴졌습니다. '피곤해서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을 푹 잤지만, 증상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안과를 찾아 검진을 받았는데, 오른쪽 눈측정 불가, 왼쪽 눈0.8 정도의 시력이 나왔습니다. 큰 병원에 가보라는 의사의 말에 불안감이 커졌습니다. 큰 병원에서 신경염 진단을 받고 스테로이드 치료를 받으면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행이다' 안도하며 퇴원했지만, 오른쪽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쪽 눈으로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기에, 일상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을 보는데 갑자기 글자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그런가 싶었지만, 시력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안경점에서 시력 검사를 다시 해보니, 0.2, 0.3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안경을 맞춰도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불안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일주일 후, 큰어머니와 함께 대학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희귀병레버 시신경병증 진단을 내렸습니다. 오른쪽 눈은 이미 시력을 잃었고, 왼쪽 눈두세 달 안에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진단이었을 것 같습니다. 시력 상실이라는 절망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텐데요, 당시 심정은 어떠셨나요? 의사의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눈앞에는 의사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고, 2층 병원에서 1층을 내려다보며 사람들의 모습또렷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말도 안 돼'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눈에 좋다는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었습니다. 생당근, 블루베리, 홍삼 등 좋다는 것은 다 먹고, 초록색이 눈에 좋다는 말에 초록색 색종이눈에 대고 있기도 했습니다. 학교도 계속 다녔지만, 점점 안 보이는 것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길을 걷다 자주 부딪히고,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져 다치기도 했습니다. 프린트물시험지보이지 않아 학습에 어려움을 겪었고, 혼자 에 돌아가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달력으로 시력을 확인했는데, 점점 눈앞으로 다가와야 숫자가 보이는 것을 보며 절망했습니다. '나는 이제 진짜 안 보이는구나' 현실을 인정하고 고등학교를 자퇴했습니다.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된 날남들보다 늦게 주민등록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아쉬움장애인 복지카드를 받으며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2010년 11월 9일, 운명처럼 장애인 복지카드를 받았습니다. 그날은 시각장애인으로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시력을 잃는 절망적인 순간, 하나님기도하지는 않으셨나요? 힘든 시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에게 매달리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요, 하나님간절히 기도하지는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맞습니다. 고등학교자퇴하고 에서 두문불출하며 누워서만 지냈습니다. 시각장애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내 인생은 망했다', '나는 이제 행복해질 수 없는 걸까?' 절망적인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시력을 잃고 보니 여전히 잃을 것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원망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나?', '어릴 때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 이야기도 잘 알고 있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 억울함분노에 휩싸였습니다. 놀이터에 나가려다 길을 잃고 울면서 큰어머니에게 전화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자나무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며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러시는 건가요?' 끊임없이 되뇌었습니다. 하지만 응답은 없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라디오만 듣고 지냈습니다.

절망적인 시간 속에서 점자를 배우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큰어머니께서 점자를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TV불쌍하고 안타까운 장애인의 모습이 싫었고, 점자를 배우면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나는 불쌍한 사람이 싫어서 행복해지고 싶었던 사람인데, 왜 또 다시 불쌍해져야 하나?' 점자 배우기를 거부했습니다. 라디오만 듣고, 음악만 들으며 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어머니울음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속상함미안함이 섞인 울음소리마음이 아팠습니다. '큰어머니, 큰아버지는 나에게 은인인데, 내가 너무 나만 생각하고 burden을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후회죄송함이 밀려왔습니다. 큰어머니, 큰아버지행복했던 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점자를 배워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맹학교 도서관 선생님을 만나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점자를 배우러 갔고, 나머지 시간에서 점자 연습에 매달렸습니다. 한번 꽂히면 될 때까지 파고드는 성격 덕분에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살점자를 시작했으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호기심승부욕이 발동하여 퍼즐을 풀듯이 점자 학습에 몰두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점자외우고, 쓰는 연습반복했습니다. 밥 먹는 시간제외하고는 오로지 점자 연습에만 매달렸습니다. 2주 만에 한글 점자마스터했습니다. 읽기쓰기보다 어려웠습니다. 점자 촉감익히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동화책을 받아 읽으려 했지만, 한 글자읽히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했습니다. 때문에 방해가 될까 봐 불을 끄고 이불 속에서 점자를 만지작거렸습니다. 2주가 지나 드디어 한 글자읽는 데 성공했습니다. 성취감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 달 만에 점자 읽기까지 마스터하며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집념노력입니다. 점자를 익히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셨다고 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희망을 보셨나요? 점자읽게 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다, 공부를 다시 할 수 있다, 대학에 갈 수 있다' 연쇄적인 긍정적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길이 보인다!' 새로운 희망이 샘솟았습니다. 20살, 맹학교 입학결심했습니다. 남들과 다르게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서자'용기가 더 컸습니다. 점자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점자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점자우리가 보는 글자와는 모양다릅니다. 조합으로 글자표현합니다. 한글 자음, 모음은 물론, 영어 알파벳, 숫자, 기호까지 점자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정수'라는 이름점자표기하려면, '이', '정', '수' 각각에 해당하는 점자 기호늘어서서 표현합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익숙해지면 점자를 통해 세상소통할 수 있습니다. 100점 맞으면 만원을 받기로 했던 큰어머니와의 약속처럼, 점자 학습에서도 놀라운 집중력끈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오기집념으로 점자빠르게 마스터하신 비결이 정말 대단합니다.

맹학교에 입학하신 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셨습니다. 학교 생활은 어떠셨나요? 맹학교에서 1년 동안 점자꾸준히 연습하며 마음다잡았습니다. 19살 겨울, 남들수능 공부를 할 때, 저는 자음, 모음익히고 있는 현실이 싫었지만, 성취감자신감을 얻으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변화했습니다. 복지관에서 볼링, 컴퓨터취미 생활을 즐기며 재활에 힘썼습니다. 볼링자세를 배우고, 가이드 레일을 이용해 가운데를 맞히는 연습반복했습니다. 소리 개수이용하여 미세한 감각으로 방향조절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최고 점수300점이었지만, 대회에서는 140점 정도를 기록했습니다. 볼링을 통해 성취감자신감을 얻었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컴퓨터새로운 방법으로 배우며 정보 접근 능력향상시켰습니다. 새로운 인생살아가는 방법배우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문, 시각장애인으로서 세상소통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까?' 자신감많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대학 진학고민하면서도, '사람들과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될까 봐' 걱정이 앞섰습니다. 외로움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하나님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제발 이 문제만 해결해 주세요'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신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었나요? 신기하게도 복지관에서 직업 상담을 받던 중 인생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야 할까?' 진로 고민상담하기 위해 복지관 직업팀을 찾아갔습니다. 상담 선생님대화를 나누던 중, 뜻밖의 위로용기를 얻었습니다. 고개숙이고 이야기하는 저에게 선생님"한솔아, 고개 숙이지 마. 당당해져도 돼. 고개 숙이고 있는 게 더 이상해" 농담처럼 건넸지만, 그 한마디마음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 '누군가 나의 어려움을 알아주고 마음의 문두드려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마음떠올랐습니다. '그래, 누군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겠다' 용기가 생겼습니다. 상담끝나갈 무렵, 선생님조심스럽게 교회함께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또 교회?' 교회에 대한 좋은 기억없었기에 망설여졌습니다. '교회는 나에게 burden만 주는 존재가 아니었나?' '교회는 싫다'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계속 교회향했습니다. '왜 자꾸 교회 생각이 나는 걸까?', '왜 싫지만, 또 가고 싶을까?', '교회좋은 사람들이 있을까?' 고민 끝에, 다시 복지관을 찾아가 교회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도 아니면, 정말 아닌 거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교회가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유모르겠지만, 이끌림따라 교회 문을 다시 두드렸습니다. 5~6년 만에 교회다시 찾은 , 놀라운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찾은 교회에서 어떤 경험을 하셨나요? 교회가보니, 사람들정말 좋았습니다.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진심으로 관심 가져주셨습니다. 오랜 시간 풀리지 않았던 마음속 갈등해소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내 인생 교회계속 등장하는 걸까?' '왜 교회에게 burden이 아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돌아보니, 힘든 순간마다 에는 늘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 부재외로웠던 어린 시절, 큰아버지, 큰어머니를 만나 가족의 사랑듬뿍 받았습니다. 시력을 잃고 절망했을 때, 점자가르쳐주신 선생님, 용기북돋아준 친구들, 교회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까지, 제 곁에는 늘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내 인생결코 혼자가 아니었구나', '외로움주변 사람들을 통해 채워질 수 있구나' 깨달았습니다. 20살 즈음, 설교를 듣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 걸까?', '하나님버리지 않으셨구나' 설교 말씀처럼, '하나님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내버려두지 않으신다'메시지마음깊이 와 닿았습니다. '나에게도 고난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축복많았구나', '나는 어쩌면 복 받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긍정적인 생각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사람들만나게 해주시고, 자신감회복시켜주시고, 새로운 꿈꿀 수 있게 이끌어주신 하나님감사한 마음이 샘솟았습니다. '하나님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알아가고 싶다' 20살, 새로운 신앙의 씨앗마음 심어졌습니다. 19살 겨울부터 교회꾸준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동역자들을 보내주시며 이끌어** 주셨습니다.

대학교 진학 후에도 하나님께서 믿음의 동역자들을 숨겨 놓으셨다고 하셨는데요, 대학교 생활은 어떠셨나요? 대학교진학하니, 기독교 동아리 ivf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ivf말씀나누고, 공유하는 기독교 동아리였습니다. 대학 진학 과정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맹학교에서 점자국어, 영어, 수학, 사회 모든 과목공부해야 했습니다. 점자익힌 지 한 달 만에, 영어 점자까지 마스터했습니다. 수학 점자, 영어 점자활용하여 수능 시험준비했습니다. 수학암산으로 그래프그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특수교육학과, 사회복지학과, 경영학과여러 학과합격했지만, 특수교육학과, 사회복지학과시각장애인들이 안정적으로 선택하는 학과라는 인식 때문에 끌리지 않았습니다. '왜 장애인늘 안전한 길만 선택해야 할까?', '왜 하고 싶은 분야선택하면 안 될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주변에서는 특수교육학과, 사회복지학과추천했지만, 경영학과진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시각장애인경영학과진학하는 것은 무모한 도전일까?' 걱정도 되었지만, 새로운 분야도전하고 싶었습니다. 경영학과 진학 , 현실적인 어려움직면했습니다. 교재점자제공되지 않았고, 수업 자료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시험 시간비장애인동일하게 적용되어 불리함을 느꼈습니다. 캠퍼스 이동 점자 블록설치되어 있지 않아 위험했습니다. 대학교 생활고난과 시련연속이었습니다. 한 학기 만에 휴학결심하고, '대학교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ivf 동아리 에서 고민털어놓았고, 동아리 친구들간사님진심으로 공감하며 도움을 주었습니다. 도우미 제도개선되어 ivf 친구들도우미자처하며 학교생활지원해 주었습니다. 친구들교재한글 파일변환해 주었고, 함께 공부하며 어려움극복해 나갔습니다.

대학교 동아리 활동을 통해 장애인 권익 운동에도 참여하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동아리 활동어떠셨나요? ivf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왜 우리는 하나님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끼리만 위로하고 끝낼까?' '캠퍼스 에서 실질적인 변화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대학교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나만 힘든 일까?' '다른 장애 학생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ivf 친구들함께 장애인 인권 소모임조직하고, '캠퍼스 장애 학생 찾기 프로젝트'시작했습니다. 캠퍼스돌아다니며 장애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함께하며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장애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기독교 동아리 소모임에서 시작장애인 인권 운동점점 확대되어 독립적인 장애인 인권 동아리발전했습니다. 네 명으로 시작동아리40명 규모성장했고, 캠퍼스 장애인 인권 향상을 위해 다양한 활동전개했습니다. 학교 측에 장애 학생들의 어려움알리고, 시설 개선요구했습니다. 휠체어를 탄 학생들을 위해 계단 대신 경사로설치해 줄 것을 요청했고,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점자 블록 설치요구했습니다. 학교장애 학생들의 요구수용하여 캠퍼스 시설개선해 나갔습니다. 경사로설치되고, 점자 블록생기고, 휠체어석마련되는 변화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는구나' 깨달았습니다. 장애인 인권 운동을 통해 하나님사랑실천하고, 세상변화시키는 기쁨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좋은 사람들만나게 해주시고, 캠퍼스 변화이끌어낼 수 있도록 주셨다는 사실깊이 감사했습니다.

학교 내 활동뿐만 아니라, 외부 활동에도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2019년 장애 청년 드림팀 프로젝트참여하여 뉴욕다녀오셨다고 하는데요, 뉴욕에서는 어떤 경험을 하셨나요? 2019년, '장애 청년 드림팀' 프로젝트참여하여 '장애대한 한국다른 나라인식비교하고, 해외 사례탐구해보자'는 주제뉴욕 원정떠났습니다. 경영학과 졸업을 앞두고 진로 고민깊었던 시기였습니다. '시각장애인할 수 있는 직업너무 한정적이다' 공무원, 교사, 사회복지사, 안마사, 음악가 꼽을 정도였습니다. '장애인다양한 직업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정말 불가능한 걸까?' 의문을 품고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뉴욕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장애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휠체어타고 대학졸업한국인 유학생다양한 직업가진 장애인들을 만나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국인 애널리스트"한국에서는 장애인 애널리스트상상하기 어렵지만, 뉴욕에서는 능력있으면 장애문제가 되지 않는다"말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늘 불쌍하게 여겨졌지만, 뉴욕에서는 평범한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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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경의 사실성

10. 압도적으로 높은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12.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

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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