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대표 새롭게하소서 간증: 절망 극복한 엄마의 희망 스토리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엄마의 용기 있는 도전
조용하게 간증하시는데 지진같은 파워가 있으십니다: 이진영 대표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상세 정리
오늘, 새롭게하소서에 특별한 손님, 이진영 대표님을 모시고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주영훈 님, 연 님, 정 님 세 분의 진행자분들과 함께 이진영 대표님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 속으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착한 아이 콤플렉스, 많은 분들이 어린 시절 착함을 강요받으며 자라면서 겪는 마음의 짐이죠. 오늘 주인공이신 이진영 대표님 역시 교회에서는 바리새인, 집에서는 착한 딸로 살아가셨다고 합니다. 과연 그녀에게는 어떤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걸까요?
우리의 습성, 참으로 쉽게 버려지지 않죠. 이진영 대표님 역시 여전히 흔들리고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간증을 우리에게 들려주실 것을 기대하며, 이진영 대표님을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 보겠습니다.
이진영 대표님,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에 귀한 발걸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진영 대표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주영훈 님: 오늘 출연자분께서 입장하시는데 약간 불편해 보이셨어요. 혹시 몸이 불편하신 건 아니신가요?
이진영 대표님: 아, 네. 사실 3일 전에 커피를 벌크로 타다가 옷에 쏟아서 화상을 입었어요. 다행히 얼굴은 괜찮지만, 몸에 화상을 입어서 오늘은 특별히 앉아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주영훈 님: 아이고, 어쩌다가…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녹화에 지장이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진영 대표님: 작가님께 전화 받고 너무 기뻐서 통곡을 했어요. 작가님께서 왜 그렇게 우시냐고 놀라셨죠.
주영훈 님: 작가님께 들어보니 섭외 전화 받기 한 달 전에 꿈에서 섭외 전화를 받는 꿈을 꾸셨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신기한데요?
이진영 대표님: 네, 맞아요. 꿈에서 작가님이 남자분이셨는데, 저에게 새롭게하소서에 간증을 해주시면 어떻겠냐고 제의를 하셨어요. 꿈속에서 제가 "왜요? 제가 뭘 했다고…" 막 당황해했더니, 작가님께서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이야기해주시면 된다고 격려해주셨어요. 꿈에서 화들짝 깨어났는데 새벽이었고, 평소 같으면 꿈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텐데, 이상하게 마음에 계속 남아있었어요.
주영훈 님: 정말 신기하네요. 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본격적으로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나눠볼까요?
이진영 대표님: 네. 사실 저는 주목 공포증이 심한 사람이에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고,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요. 그런데 새롭게하소서에서 전화가 오니, 꿈과 현실이 맞아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저를 준비시키시는 과정 속에 기묘하게 개입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영훈 님: 간증이라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용기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화상 사고가 간증 3일 전에 일어났다고 하셨죠? 큰일 날 뻔하셨네요.
이진영 대표님: 네, 맞아요. 주일 아침에 화상을 입었는데, 평소 같았으면 절망하고 좌절했을 거예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너무 평온했어요. 마치 폭풍이 치는 바다 속 깊은 곳처럼 고요하고 평안했습니다. 말씀이 떠오르거나 환상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마음이 평안했어요. 저도 제 심리 상태에 놀랐습니다.
주영훈 님: 정말 신비로운 경험이네요. 오전에 전화를 안 받으셔서 작가님이 혹시 못 나오시는 건 아닐까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화상은 좀 어떠세요?
이진영 대표님: 어제 병원에서 드레싱을 받았는데, 아침에 진물이 너무 심해서 약국에서 급하게 패치를 사서 붙이고 왔어요. 정신없이 준비하다 보니 휴대폰도 택시에 두고 내리는 바람에… 정말 정신없는 하루였습니다.
주영훈 님: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귀한 간증을 위해 이 자리에 나와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대표님께서 어린 시절에 착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이진영 대표님: 네.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하신 많은 게스트분들처럼 저 역시 결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해군 보안대에 근무하셨는데, 어린 시절 기억 속 아버지는 굉장히 멋있고 자상한 분이셨어요. 아빠 품에서 웃고, 아빠 팔에 매달리던 행복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여동생이 태어날 즈음부터 집안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시는 횟수가 줄어들고, 집에 오셔도 늘 다툼이 잦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집에 안 들어오셨고, 어머니는 생업에 뛰어드셨죠. 저희는 세 자매인데, 집에 덩그러니 남겨져 스스로 서로를 돌봐야 했습니다.
주영훈 님: 어머님께서 전업주부로 계시다가 갑자기 생업에 뛰어드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이진영 대표님: 네, 정말 힘드셨을 거예요. 어머니는 우유 배달, 미군 부대 집 나르는 일 등 힘든 육체 노동을 하시면서 저희 세 자매를 키우셨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시면서도 늘 저희를 챙기셨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니는 안 계시고, 저녁 늦게 잠들 때까지도 안 들어오시는 날이 많았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늘 반찬을 만들어 상에 덮어놓고 쪽지를 남겨놓고 가셨어요. "잘 챙겨 먹고 가라"는 쪽지를 보면 지금도 울컥합니다.
주영훈 님: 어머니께서 정말 고생 많이 하셨네요.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텐데, 어떠셨어요?
이진영 대표님: 네, 정말 힘들었어요. 영문도 모른 채 힘든 상황에 노출되는 것이 버거웠고, 어머니는 언니에게 "동생들 잘 돌봐라"고 위임하셨습니다. 언니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케어를 잘 안 했고, 결국 가운데인 저가 동생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저는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라 동생이 태어났을 때 너무 행복했어요. 동생이 친구처럼 느껴졌고, 동생을 돌보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주로 제가 케어했습니다.
주영훈 님: 언니분은 자유로운 영혼이셨군요. 그럼 대표님은 몇 살 때부터 동생들을 돌보셨어요?
이진영 대표님: 저와 여동생은 다섯 살 차이인데요. 어머니가 언니에게 위임했다고 했지만, 언니는 잘 케어를 안 해서,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저학년 때까지 계속 제가 동생들을 돌봤습니다. 지금 아들을 키워보니 제가 참 어렸을 때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주영훈 님: 케어하는 건 괜찮은데, 학교는 어떻게 다니셨어요? 등교할 때 어린 동생을 혼자 집에 두고 가야 했을 텐데…
이진영 대표님: 네, 등교가 가장 큰 문제였어요. 다섯 살 여동생을 혼자 집에 두고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동생은 저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어요. 언니는 학교에 가야 한다며 억지로 동생을 떼어내려고 했고, 저는 울고, 지각하기 일쑤였습니다. 학교에서도 동생 걱정 때문에 집중을 못 했어요. 어쩔 때는 동생을 집에 혼자 두고 갈 수 없어서 대문 앞에 앉혀놓고 학교에 가다가, 몇 걸음 걷다 돌아보고 또 걷다 돌아보곤 했습니다. 지금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너무 어린 동생이 혼자 문 앞에 앉아있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 혼자 있는 여동생을 돌봐주고, 어린 저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요.
주영훈 님: 정말 마음 아픈 이야기네요. 그 어린 동생은 그 당시 누가 봤어요?
이진영 대표님: 계속 그렇게 혼자 뒀어요. 빈집에 혼자, 길거리에 혼자 둔 적도 많았습니다. 문 앞에 앉혀놨으니 길거리나 다름없었죠.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동생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던 상황이에요. 아동학대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죠.
주영훈 님: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네요. 어떻게 초등학교를 다니셨어요?
이진영 대표님: 어느 날 너무 힘든 마음에 동생을 학교에 데려갔어요. 운동장에 앉혀놓고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아무 데도 가지 마"라고 신신당부하고 교실에 들어갔지만,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죠. 계속 화장실 핑계로 운동장에 나가 동생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3학년 때 곱셈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선생님께서 "100점 맞을 때까지 집에 안 보낼 거야"라고 하셨어요. 계속 틀리니까 남아서 공부를 해야 했고, 동생 걱정에 마음이 불안해서 더 안 되는 거예요. 계속 틀리자 결국 울음을 터뜨렸어요. 선생님께서 왜 그러냐고 물으시길래, 동생 혼자 집에 있다고, 빨리 집에 가야 한다고 울면서 말씀드렸죠. 선생님께서 가정 상황을 알게 되셨고, 어머니와 상담을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동생은 동네 할머니 댁에 맡겨졌어요. 돈이 없어서 할머니 담뱃값 정도 수준이었지만요. 할머니는 술을 좋아하시는 분이셨는데, 학교 갔다 오면 애가 없어지고, 할머니는 술 취해서 누워있고, 저는 애를 찾으러 동네 방방곡곡 울면서 찾아다니고…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교 3학년이 겪기에는 너무 힘든 상황이었죠.
주영훈 님: 지금 아홉 살, 다섯 살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대표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그 어린 나이에 정말 고단했을 것 같아요. 힘들지 않으셨어요?
이진영 대표님: 네, 많이 고단했어요. 하지만 제 힘듦보다 고생하시는 어머니에게 더 집중했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언니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지금도 여전히 자유롭게 지내지만, 저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컸고, 결과가 대단하지 않더라도 늘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도 착한 아이,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로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가정 환경을 아신 후로 저를 많이 챙겨주셨어요. 제 재능을 눈여겨보시고 키워주시려고 노력하시고, 4학년 올라갈 때는 학용품 1년 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집중력이 생겼는지, 성적도 오르고, 학급 임원도 하고, 각종 대회에서 상도 받고 칭찬받는 딸이 되었죠.
주영훈 님: 정말 대견하네요. 하지만 언니분은 그런 대표님을 불편해하셨다고요?
이진영 대표님: 네, 언니는 저를 질투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제가 교육감상이라는 큰 상을 받았어요. 전체 조회 때 교장 선생님 앞에서 상을 받는데, 언니 선생님께서 "어머, 쟤 너 동생 아니야? 너는 동생은 저런데 너는 뭐냐"고 하신 거예요. 집에서도 어머니가 저를 칭찬하고 의지했는데, 학교에서까지 그런 소리를 들으니 언니가 더 저를 괴롭혔어요. 언니는 저에게 상처라고 표현했는데, 제가 잘하면 잘할수록 언니의 괴롭힘은 더 심해졌습니다. 좋은 일이 있거나 잘한 일이 있으면 오히려 두려움이 앞섰어요. "언니가 어떻게 반응할까?" 조마조마하고 불안했습니다. 언니 때문에 상을 받아도 칭찬을 받아도 마음 편히 기뻐할 수 없었어요. 칭찬 받기보다 두려움에 더 많이 노출되었고, 그것에 대한 케어를 못 받다 보니 원래 내성적인 성격에 두려움이 더해진 것 같아요. 잘해도 자신감이 없고, 잘해낸 것도 오히려 두렵고, 결과에 대한 언니의 반응이 두려워서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영훈 님: 어머니께서는 대표님을 굉장히 예뻐하셨다고요?
이진영 대표님: 네, 어머니는 저를 아들처럼 생각하셨어요. 아들 같고, 남편 같고, 친구 같다고 하시면서 어머니의 힘든 이야기를 저에게 다 털어놓으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성장 배경까지 다 들으면서 어머니의 상담사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늘 힘든 이야기를 하시다가 마지막에는 "너 때문에 산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고, 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이 제 인생 목표였어요.
주영훈 님: 어머니께서 한복집도 운영하셨다고요?
이진영 대표님: 네, 계속 힘든 노동일을 하시다가 초등학교 말, 중학교 올라갈 즈음 한복 기술을 배우셔서 한복집을 운영하셨습니다. 한복집 뒤켠에 방 한 칸 딸린 집에서 가족이 함께 살았어요. 한복집에서 옷고름을 다리는 일이 있으면 언니를 시키면 꾀를 부리고 침을 옷고름에 흘리곤 했습니다. 실크 옷감에 침이 묻으면 팔 수 없게 되니까요. 그러면 어머니는 "됐어, 됐어. 진영이 나와 봐" 하시면서 저를 시키셨어요. 제가 열심히 옷고름을 다리면 "너 잘한다. 옷고름 전문이네" 하시면서 칭찬해주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무엇이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면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주영훈 님: 정말 어린 나이에 고단한 삶을 사셨네요.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이진영 대표님: 고단함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나이였어요. 그냥 깜깜한 긴 터널을 혼자 걷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허무하고 가슴이 늘 요동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답답함이 계속되었습니다.
주영훈 님: 힘든 가정 환경 속에서 교회에서는 바리새인으로 사셨다고요?
이진영 대표님: 네, 마당이 있는 한옥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았는데, 주인집 어르신들이 권사님, 장로님이셨어요. 권사님 딸 유년부 선생님께서 저를 교회에 처음 데려가셨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동생들을 돌보느라 또래 친구들과 뛰어놀 시간이 없었는데, 교회에 가니 너무 좋았어요. 친구들도 많고, 사람들도 많고, 찬양과 율동도 신났습니다. 교회는 저에게 삶의 중심이 되었고, 교회 안에서 예쁨 받고 관심받는 것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제 친구와 저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친구가 잘못을 했을 때, 친구 아빠는 "왜 그랬어!" 혼내시면서도 친구를 품에 안아주셨어요. 친구는 "아빠, 알았어" 하면서 애교를 부리고 넘어갔죠. 저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었어요. 칭찬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만 아니라 혼날 일을 안 만들기 위해 늘 긴장하고 자기 검열을 했습니다. 자유함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주영훈 님: 지금 우리 표현으로 바리새인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때 대표님 심리 상태는 어떠셨어요?
이진영 대표님: 잘해야 한다, 흠잡히면 안 된다는 강박이 심했어요. 똑같이 잘못해도 저는 더 크게 혼날까 봐 늘 긴장했습니다. 자기 검열이 심하다 보니 타인에게도 엄격해지고,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었죠. 교회 사람들을 볼 때도 "왜 저렇게 행동할까?" 속으로 판단하고 정죄했지만,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어요. 그냥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늘 흠 안 잡히려고 긴장하고 부단히 노력했어요. 스스로 하나님께 열심히 일해야 한다,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주영훈 님: 예수님을 모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행위가 자신을 결정하고, 축복과 사랑은 자신의 행위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이진영 대표님: 네, 맞아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하나님 안에서 평온함이 없었어요. 교회에서 잠시 분위기에 취해 좋은 감정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마음 속에는 늘 불안하고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실수라도 한 번 하면 엄청나게 자책하고,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어요.
주영훈 님: 그렇게 열심히 교회 다니셨는데,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갖고 계셨어요?
이진영 대표님: 구원이 없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울 때도 예수님이 불쌍해서 우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해서 우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영훈 님: 계속 그런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대학교 들어가서 선교 단체 모임에서 다른 것을 발견하셨다고요?
이진영 대표님: 네, 대학교 1학년 때 선교 단체 모임에서 선교 공부를 하면서 나와 그들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저는 잘 울고 잘 웃는 사람이지만, 재밌고 웃겨야만 웃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뭔가 다르게 웃더라고요. 즐거움과 기쁨이 넘쳐나는 웃음이었어요. 설교 말씀이 나올 때마다 빵빵 터지는 웃음도 신기했어요. 저에게는 없는 웃음이었거든요. 순간 "이게 뭐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는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는 저걸 모르지?" 성경학교 중간에 나와서 기도실에 올라가 "저 웃음이 뭐냐? 나에게도 가르쳐달라"고 때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기도가 정말 기억에 남아요. "하나님, 나도 저렇게 웃을 수 있게 해주세요. 나도 저 웃음이 알고 싶어요"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영훈 님: 그때까지 교회 생활은 교회 문화에 재미를 느끼기 위해 다녔던 것이고, 안정감을 찾기 위한 유일한 곳이었군요. 그런 신앙생활은 대학생까지 이어지다가, 어떻게 진짜 하나님을 만나게 되셨을까요?
이진영 대표님: 대학교 4학년 졸업할 즈음, 3일 성경학교가 있었어요. 3일째 되던 날, 이사를 바친 아브라함의 말씀을 듣고 행사가 끝난 후, 소그룹으로 둥글게 앉아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갑자기 동기 남학생 형이 "제가 오늘 저의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다"면서 "사실 제가 진영 자매를 너무너무 혼자 많이 좋아했고 흠모했던 마음이 제 마음속에 이삭인데, 오늘 그 이삭을 주님께 보냈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저는 그 친구와 커피 한 잔 마신 적도 없는 사이였는데, 갑작스러운 고백에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게다가 제가 누군가에게 주목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데,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 집중되는 거예요. 너무 창피하고 당황스러웠는데, 그 순간 옆에 계시던 일본 선교사님께서 저와 형제를 번갈아 쳐다보시더니 무서운 표정으로 "어디서 남자나 홀리고 다니는 악의 근원 같은…" 막 저를 책망하시는 거예요. 공개적으로요.
주영훈 님: 정말 당황스러우셨겠어요. 그 선교사님도 대표님을 좋아하셨나 보네요 (웃음).
이진영 대표님: 처음 경험이었죠. 예전에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했는데, 저는 복의 근원이 되고 싶은 소원이 컸는데, 악의 근원이라고 공개적으로 선포를 당한 거예요. 그것도 목사님 급의 선교사님께요. 순간 또 젠가 하나 빼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악의 근원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죽는 방법을 몰라서 신문에서 과음으로 죽은 기사를 보고, 술을 마시면 죽을 수 있나 싶어서 슈퍼에서 소주 한 병을 사서 깡소주로 들이켰어요. 술을 전혀 마셔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죽었나 싶었는데 안 죽은 거예요. 소주 한 병 마시고는 안 죽더라고요. 다시 술을 사서 마셔야 하나 생각하다가, 두 병째를 들이키고 기억을 잃었어요.
주영훈 님: 어디서 쓰러지셨나요?
이진영 대표님: 룸메이트가 저를 발견하고 방으로 데려갔다고 하더라고요. 눈을 떴는데 죽지 않아서 속으로 탄식했어요. "죽고 싶은데 죽지 못하는 나"에 대해서요. 그때 누군가가 옆에서 "사람들은 살려고 아둥바둥하고, 응급실 의사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애쓰는데, 얘는 별것도 아닌 일로 죽으려고 한다"는 비난 섞인 말을 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어요. 밤새도록 죽고 싶다고 주정을 했나 보더라고요.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싶어서 또 울게 되었는데, 그 순간 귀에 누군가 대고 말하는 것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너는 내 것이라"는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내 마음대로 죽을 수 없구나" 하는 고백과 함께 말씀과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어요. 술을 마셔도 죽지 않아 곡기를 끊고 방에 계속 누워있었습니다.
주영훈 님: 그때 교회 목사님, 사모님께서 찾아오셨다고요?
이진영 대표님: 네, 목사님 사모님께서 찾아오셔서 "왜 이렇게 힘들어하냐? 진영 자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니면 아닌 거지 털고 일어나야지" 하시면서 저를 붙들고 우시고 기도해주셨지만, 힘이 나지 않았어요. 보통 이런 상황이면 주변 사람들이 선교사님께 사과를 요청하거나, 짝사랑했던 남자애가 나타나거나, 주변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주려고 할 텐데,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저 스스로 털고 일어나기를 바라는 분위기였습니다.
주영훈 님: 버틸 힘이 아예 없으셨나요?
이진영 대표님: 네, 버틸 힘이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반면에 남성에 대한 불편함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어린 시절부터 남성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교 때 미팅이나 누군가가 호감을 표현하면 불편하고 위험 신호처럼 느껴졌어요. 건강하지 않은 이성관을 가졌던 거죠. 그런 상태에서 최대한 정숙하고 신앙 있는 여성으로 고귀하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남자나 홀리는 악의 근원"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무너질 수밖에 없었죠.
주영훈 님: 본의 아니게 상처를 받으셨네요. 서운한 감정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이진영 대표님: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오해든 뭐든, 제가 계속 시뮬레이션을 했어요. "혹시 복도에서 지나가다가 "안녕하세요" 인사한 것이 문제였나?" 계속 자신을 탓하고 자책하는 마음이 계속 들면서 더 무너졌어요. 회복할 힘은 저 스스로에게서 나오지 않으니 일어날 수 없었죠.
주영훈 님: 그 후에 치료는 어떻게 받으셨어요?
이진영 대표님: 방황을 많이 했어요. 우울증도 심해지고, 죄책감에 하늘을 잘 못 쳐다보고 건강하지 못한 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 날 신촌 사거리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맞은편 건물에 큰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거예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라고 쓰여있었어요. 그때 교회도 잘 안 다닐 때라 찬양 제목인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그 말이 순간 저에게 너무 크게 와닿았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느껴왔던 것 같아요. 사랑받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 잘해도 혼나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 자체가 저에게는 크게 다가왔어요. 그 순간 주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버스 정류장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는 쓴뿌리가 남아있었죠. "나는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안 된 것"에 대한 쓴뿌리였습니다.
주영훈 님: 그 후에는 어떻게 변화가 생겼나요?
이진영 대표님: 너무 괴로워서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대상을 바꿔가면서 미워했는데, 주로 남성을 미워했어요. 고백했던 친구, 책망했던 선교사님,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뿌리가 되었죠. 저희 아버지는 저를 정말 예뻐하고 사랑하셨고, 사랑을 늘 표현하셨지만, 어느 순간 단절되고 거절당한 경험이 커서, 그리움이 원망으로, 미움으로, 증오로 확산되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를 그 후로 전혀 본 적이 없어요. 초등학교,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해군 본부로 편지를 썼어요. "너무 보고 싶다, 아빠 사랑이 그립다"고 썼더니, 아버지는 나타나시지 않고, 서울역 어디로 나오라는 연락이 와서 나가보니, 군인 아저씨들이 선물만 전해주고 가셨어요. 제가 보고 싶은 것은 선물이 아니라 아버지였는데… 아버지를 만나서 따뜻한 말 한마디 듣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런 편지를 해군 본부 앞에 막연히 기다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늘 거절당하고 외면당했던 것 같아요. 그게 마음에 컸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고 불균형하고 왜곡되어 병들어있었던 자신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누굴 해꼬지하거나 욕하거나 화낼 용기도 없는, 늘 억눌려 있는 사람이었죠.
주영훈 님: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했군요. 그 미움이 대표님을 괴롭게 했을 텐데,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이진영 대표님: 미움이 저를 너무 괴롭게 해서 어느 날 막 울면서 "정말 죽을 것 같아요. 너무너무 힘들어서 정말 죽을 것 같아요" 하면서 누워있었어요. 그날도 말씀이 제 마음에 울렸어요. "다 이루었다" 하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 그 말씀이 마음에 확 들어왔어요. 저는 용서치 못하는 마음, 증오와 미움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말했지만 죽지 않았는데, 우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정말 "다 이루시고" 죽으셨다는 말씀이 저에게 확 밀려들면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우리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어요. "다 이루었다"는 완성의 선포가 저에게는 너무나 큰 의미로 다가왔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난 거죠. 20대 중반 쯤이었던 것 같아요.
주영훈 님: 교회 다닐 때는 바리새인이었다고 하셨는데, 이제 주님께 탕자처럼 돌아오셨네요.
이진영 대표님: 네, 탕자 이야기가 정말 제 이야기 같아요. 누가복음 탕자 비유를 읽는데, 아직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는 장면에서 와르르 무너졌어요. 아들이 점처럼 보였을 텐데, 아버지는 매일 그 길을 바라보며 기다리셨기 때문에, 점 하나가 나타났을 때 내 아들이라는 것을 아신 거죠. 그것이 저에게 너무 크게 다가왔어요. "아직 거리가 먼데" 나타났을 때 기다리셨다는 것, 우리 하나님께서 저를 그렇게 기다리셨다는 것, 아버지가 계신 곳,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큰 용기가 되었고, 돌아올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주영훈 님: 보통 누군가에 의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는데, 대표님께서는 플래카드 하나로 인해서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고, 스스로 하나님을 다시 마음속에서 찾으신 거네요.
이진영 대표님: 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것 같아요. 늘 말씀을 통해서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는 늘 말씀이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을 열심히 읽고 외우는 사람은 아니지만, 강력하게 마음에 울리는 말씀들이 있어요. 그것이 저에게는 큰 감사 제목입니다. 저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인생의 반전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주영훈 님: 그 이후에 어떤 변화가 생기던가요?
이진영 대표님: 2001년 예수님을 만난 후, 양화진 책을 읽게 되었어요. 조선이 땅끝인 줄 알고 온 선교사님들이 제물포에 내렸지만, 얼마 못 가 풍토병으로 돌아가시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뜨겁게 만난 직후라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도 단 하루를 살아도 선교사의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선교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걸림돌이 어머니였어요. 어머니께서 마트 푸드코트에서 일하시다가 넘어지셔서 어깨 신경을 다치셨는데, 제가 선교를 나간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반대하셨습니다. "엄마가 선교 대상이지, 어딜 나가냐"면서요. 선교 훈련을 받던 중, 비가 엄청 오던 밤, 동생에게 전화가 왔어요. "엄마 베란다에서 죽겠다고 한다"고요. "언니, 빨리 와달라"고 울면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지침도 있었어요. 어머니를 향한 열심이 헛되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였고, 인간적으로도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 어머니와 선교 사이에서 기로에 놓인 거죠. 그날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도하면서 버텼어요.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불을 걷어차는 순간 뛰쳐나가 어머니에게 갈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어요.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정말 기적처럼 어머니가 더 이상 저를 찾지 않으셨어요. 어머니 마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 저를 이삭처럼 우상처럼 붙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하나님의 자녀이지 내 딸 아니다"라고 고백하시면서 신앙적으로 점프업하셨습니다. 그 후 선교를 나가서 지냈지만, 늘 마음에 어머니가 걸렸어요. 매일 새벽 교회에 가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저 대신 어머니를 돌봐주시도록, 공급자, 보호자, 치료자가 되어주시도록" 기도하고 어머니에게도 "내가 기도할 테니 믿음이 안 생기면 물리치료라도 열심히 받으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선교 나갈 당시 이사야서 말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말씀을 받았는데, 광야에 길을 내시는 기적처럼 저에게도 기적을 보여달라고 기도하면서 1년을 보냈습니다. 두 가지 기적을 경험했어요. 첫 번째는 제가 영어를 잘 못하는데, 성경 말씀만 암송하면서 전도를 하는데, 말씀 선포에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두 번째는 비자 만료로 한국에 돌아왔을 때, 공항에서 어머니가 정상 팔이 되신 거예요. 진짜 기적이었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기적, 말씀에 의지해서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기적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주영훈 님: 정말 놀라운 간증이네요. 탁월한 선택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는 해방되셨나요?
이진영 대표님: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늘 존재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자유함은 분명히 찾아왔습니다. 백주년기념교회에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말씀으로 3주 설교를 들었는데, 세 번째 날 관계의 주림에 대한 설교를 하시면서 예시로 다윗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다윗은 평생 관계에 주린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으로 인하여 배불렀다는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늘 하나님을 등 뒤에 두고 관계에 집중하면서 살았는데, 하나님의 외사랑을 외면한 채, 하나님 사랑으로 배부를 생각은 못 하고 관계 개선에만 집중했던 제 모습을 발견했어요. 그 말씀 앞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은 회개를 경험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으로 인해 배부르겠다"고 결단하고 기도하니 더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제 죄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배부르게 해주시는 것들을 계속 경험하게 되었고, 화상 사고 앞에서도 마음이 고요할 수 있게 되었어요. 원래 요동이 심하고, 겁이 많고, 두려움에 늘 긴장하며 살던 저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변화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한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말씀을 통해 또 한번, 두 번의 변화를 겪으면서 한 단계 더 성장한 것 같아요.
주영훈 님: 남자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이진영 대표님: 극복했다기보다,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나아졌어요. 어느 날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 지내는 것이 힘들고,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목사님 소개로 남편을 만났는데, 남편은 저와 완전히 다른 캐릭터였어요. 저는 사인 곡선처럼 요동치는 사람인데, 남편은 늘 일정한 사람이었어요. 목소리도 높낮이 없이 조용하고, 컴퓨터 공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인풋과 아웃풋이 분명한 사람이에요. 그런 남편이 든든하게 느껴졌어요. 울타리가 되어주고, 지붕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저였어요. 남자 형제 없이 자랐고, 아버지도 없이 자라서 남자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습니다. 연애 경험도 많이 없어서 남편에게 미숙한 모습을 많이 보였어요. 실수할 때마다 남편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하고, 남편이 불편한 표현을 할 때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경험 후에는 남편을 대하는 솔루션이 달라졌어요. 남편과 해결하려고 집중하기보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편도 덜 스트레스 받고, 저도 덜 괴롭히게 되었어요.
주영훈 님: 결혼하셔서 어머니가 되셨는데, 어머니가 되어보니 어머니가 이해되거나, 아버지 마음은 어떠셨을까 생각해 보셨나요?
이진영 대표님: 아이가 너무 어렸을 때는 힘들었어요. 아이가 지나치게 예민하고 낯가림이 심하고, 강박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자폐인 줄 알았어요. 자폐적인 성향이 있어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이 때문에 앉아서만 잤어요. 아이를 안고 세 살 때까지요. 기관에 보내면 아이가 적응을 못 해서 힘들었습니다. 왜 그런가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고 상담도 받았는데, 자폐는 아니었어요. 기질적으로 위험 회피가 높고, 사회 민감도가 높은 기질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두 가지가 높으면 캐치를 너무 잘 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반작용이 강해서 감당이 안 되면 폭발하는 기질이라고 하더라고요. 품행 장애로 발전할 수 있는 기질이라고 했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과정에서 제 자신의 무너짐을 경험했어요. "부모 복도 없으면, 남편 복도 없고, 남편 복 없으면 자식 복도 없다"는 자괴감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너무 힘들어서 아이를 두고 화장실에 들어가 수돗물을 틀어놓고 울었어요. "다른 애랑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 마음속에 떠올랐는데, 정신이 번쩍 들면서 "아니요. 안 바꿀래요. 안 바꿔요. 안 바꿔" 하면서 뛰어나가 "엄마가 미안해" 하면서 아이를 안아줬습니다. 어렵게 얻은 아이인데,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후회했어요. 아이를 기관에 적응시킬 때는 6개월간 보조 교사를 하면서 겨우겨우 적응시켰습니다. 유치원에 보낼 때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이가 더 심하게 불안해했어요. 분리불안이 심했던 거죠. 유치원 원장 선생님, 선생님들이 다 크리스천이셨는데, 제 아이를 예사롭지 않게 생각하시고, 6개월간 상주하면서 아이를 적응시키는 것을 허락해주셨습니다. 6개월간 보조 교사를 하면서 아이는 점점 안정되어갔고, 4세 반부터 잘 적응했는데, 5세 반 올라가기 직전 12월 말에 볼거리에 걸린 거예요. 요즘 아이들은 볼거리 백신을 맞아서 잘 안 걸리는데, 개원 13년 만에 처음 본다고 하시더라고요. 볼거리는 약도 없고 격리만 해야 한다고 해서 5일 격리를 했는데, 더 악화되면서 경기까지 일어났어요.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임파선염이라고 하더라고요. 볼거리가 아니라 임파선염이었는데, 잘못 진단해서 병을 키운 거죠. 급하니까 의사 선생님도 균을 키워서 무슨 균인지 봐야 하는데, 그것 없이 칵테일 항생제를 처방하셔서 너무 센 약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하시더라고요. 혈관 주사로 항생제를 투여하고 5일 후부터 열이 내리고 안정되었지만, 퇴원 후 장염도 생기고 퇴행이 왔어요. 더 극도로 예민해지고 발작하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등원은 불가능했습니다. 5세 반 아이들은 눈치가 빨라서 "쟤네 엄마가 여기 와있네" 민원을 넣은 거예요. "엄마는 왜 우리 교실에 안 와있냐"고요. 그래서 유치원에 못 적응시키고 문 앞에서 울고, 아이는 괴성을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때 5세 반 선생님께서 저를 의아하게 생각하셨어요. "왜 훈육을 안 하냐"는 식으로요. 하지만 저는 전공이 기초 의학이라 아이 면역력을 키워주려고 논문도 찾아보고, 좋은 것을 알아보면서 아이를 케어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괴감도 많이 느꼈지만, 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으로 전환되면서 저도 안정되고, 영적으로도 힘이 생기면서, 아이에게 어떻게 솔루션을 제공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엄마가 되어갔습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아이가 많이 좋아졌어요.
주영훈 님: 어떻게 좋아졌어요?
이진영 대표님: 임신과 아이 5세 될 때까지 6년간 전업주부로 지냈는데, 면역력에 대한 키워드로 찾다 보니 장내 미생물, 마이크로바이옴이라는 키워드가 나왔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라 자존심도 상했지만, 들여다보니 장과 뇌가 연결되어 있고, 불안 장애, 우울증 등 뇌 질환과 장내 미생물이 연관되어 있다는 논문들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우리 아이가 장내 미생물에 문제가 생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생제에 엄청나게 노출되었으니 장내 미생물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추정했죠. 장내 미생물 분석을 해봤더니 결과가 너무 안 좋게 나왔어요. 장내 미생물을 회복시키기 위해 음식과 프로바이오틱스를 맞춤형으로 계속 먹이고, 요리해주고, 4개월 정도 지나니 아이가 정말 달라졌어요. 격하게 반응하는 것이 줄어들고, 스스로 자기 컨트롤이 가능해졌습니다. 유치원 선생님도 놀라셨어요. 그때 쯤, 아이 어려움을 겪는 엄마들과 커뮤니티 활동을 했는데,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엄마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내가 이분들을 도와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카페 활동도 하고, 소모임도 결성해서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다가 투자자가 투자를 제안하면서 지금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주영훈 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사업이군요. 카페나 커뮤니티를 통해서 비슷한 고충을 겪는 엄마들을 많이 만나셨을 텐데, 그분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네요.
이진영 대표님: 네, 발달장애 아이들의 특징은 비정형적인 식습관이에요. 제대로 된 식사를 안 하고, 한 가지 음식이나 식재료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영양 불균형이 심각합니다. 장내 미생물이 뇌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정설이고, 발달장애 아이들에게 건강한 사람의 대변을 이식해주면 치료 효과가 증진된다는 연구 보고들도 많이 나와있어요. 장내 미생물을 개선하면 되는데, 식습관 때문에 해결이 안 되는 구조입니다. 엄마들이 저에게 코칭만 하지 마시고, "그냥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셨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잘 먹는 음식을 건강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장내 미생물을 좋게 해주는 맞춤형 도시락과 밀키트를 개발했습니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이윤을 생각하기보다, "하나님, 이거 어떻게 해결하면 돼요?" 사명감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주영훈 님: 정말 의미있는 사업이네요. 부부 관계도 아이가 건강하고 잘 먹어야 좋아지잖아요. 아이가 아프고 힘들면 부부 관계도 힘들어지고요. 발달장애뿐만 아니라 정서 장애 있는 아이들도 많아요. 특별히 발달 장애가 아니어도 문제 있는 아이들이 많고, 부부 사이가 안 좋은 환경에 노출되어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발달장애 부모님들은 편모가 많은데, 아이 어려움 때문에 부부가 못 견디고 결국 엄마가 케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이진영 대표님: 네, 맞아요. 발달장애인들의 평균 수명이 28.5세로 매우 짧아요. 조기 사망하는 경우가 많고, 그 원인 중 하나가 아픈 사연으로 일찍 사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어머니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데, 어머니들이 케어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자녀들도 케어를 받아야 하지만, 어머니들에 대한 케어도 필요하고, 어머니들이 해결하기에 버거운 영역도 누군가는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주영훈 님: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으시는 이유가 있다면 어떤 이유일까요?**
이진영 대표님: 제 동생 다섯 살 때 이야기를 했잖아요. 아이를 키우면서 어머니를 알게 되고, 아이가 저를 투영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들과 제 사이에서 어린 시절 저와 동생 사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아들에게 저희 어머니가 저에게 했던 것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들을 붙들고 제 어려움을 토로하거나, 아들에게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아들 때문에 힘들다고 감정 조절 못 하고 쏟아내는 것을 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면서 저도 성장하는 것 같고, 아이도 변화하는 것 같아요. 아이도 저와 비슷한 성향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사업이 어려워서 밤새고 고생하는 것을 많이 보는데, "엄마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초등학교 2학년 짜리가 엄마 밤새지 마세요, 고생하지 마세요 말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찡했습니다. "엄마는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서 싸우고 있는 거야"라고 말해줬어요. "엄마는 인생이 고달파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야 할 때 용기를 냈더니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는 것뿐이야"라고 설명해주니 아이도 알아듣더라고요. 관계 회복이 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배부르기로 결단하고 소원하니, 저도 바뀌기 시작하고, 관계도 회복되는 것 같아요.
주영훈 님: 마지막으로 기도 제목을 말씀해주시겠어요?
이진영 대표님: 두려움이 늘 껌딱지처럼 붙어있고,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던 저에게,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는 것이 가장 큰 기도 제목입니다. 용기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 그것이 기도 제목입니다. 용기는 늘 필요한 것 같아요.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고, 내려놓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늘 아버지처럼 저를 안아주시고, "잘 싸우다 왔다. 용기 내줘서 고맙다" 칭찬해주시는 신앙생활을 완주하고 싶습니다.
주영훈 님: 오늘 귀한 간증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도 대표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간증 어떻게 들으셨어요?
연 님: 대표님 말씀을 들으면서 찬양 가사가 생각났어요. 잠깐 불러도 될까요?
주영훈 님: 네, 좋아요.
연 님: (찬양)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아멘. 약한 자를 들어쓰시는 하나님, 두려움 아닌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 일을 하는 대표님 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한 거룩하고 깨끗한 그릇이 되어 준비되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채워주시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 님: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나의 약한 것을 쓰시는 하나님, 나의 가장 약한 것을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눠주시는 대표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들 이야기, 가족사 이야기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힘이 되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주영훈 님: 오늘 "주린 자"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는데, 우리 모든 사람이 다 "주린 자" 아니겠어요? 관계에 주렸다고 하셨지만, 부정 결핍, 모정 결핍, 관계 결핍… 온갖 결핍에 시달리며 살아가죠. 우리가 받고 싶은 사랑은 꽃바구니처럼 큰데, 현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으니까요. 어린 시절 우리 마음의 스케치북에 어른들이 분비물처럼 더러운 물질로 오염시키고, 그 오염된 감정을 가지고 다음 세대에게 오염된 언어를 사용하고 오염된 환경을 제공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 때에서 그것이 끝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표님께서 굶주렸던 관계 결핍으로 인해 사랑하는 아들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다른 아이들의 결핍과 아픔까지 치유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굶주림이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많은 곳에서 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용사가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아드님을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진영 대표님: 너무 감사합니다.
주영훈 님: 감사합니다.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