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기적까지, 김창옥 소통 간증과 9시 기도의 힘
절망 끝에서 만난 기적, 9시 기도
## [최.초.공.개 간증] 소통이 안 되면? 고통이 온다! ㅣ소통전문가 김창옥 강사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에게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드릴 김창옥입니다. 여러분, 혹시 소통 때문에 힘든 적 있으신가요? 살면서 관계가 막히고 마음이 답답할 때, 고통이 찾아오곤 합니다. 하지만 소통 전문가로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제 삶 속에서 소통이 어떻게 기적을 만들어냈는지,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얻은 노하우를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저의 간증을 통해, 소통의 본질과 힘에 대해 함께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오늘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단순한 강연이 아닙니다. 제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고백이자, 여러분의 삶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소통은 단순히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마음과 마음을 잇는 다리이자, 관계를 회복시키고 성장시키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도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삶 속에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저의 인생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긴 이야기지만, 지루하지 않으실 겁니다. 때로는 웃음이 터지고, 때로는 눈물이 핑 도는, 인간 김창옥의 솔직하고 담백한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준비되셨나요? 그럼 함께 소통의 놀라운 세계로 떠나보시죠!
아버지와의 불통, 고통의 시작
제 어린 시절은 아버지와의 불통으로 인한 고통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버지는 청각 장애를 가지고 계셨고, 이로 인해 일상적인 대화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물론 아버지께서 폭력적이거나 무관심하신 분은 아니셨습니다. 하지만 귀가 들리지 않으시면서, 정서적인 교류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습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속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방향을 잡지 못하는 막막함, 그것이 어린 시절의 저를 짓눌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불통이 오히려 편안함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간섭하는 어른이 없으니, 자유롭게 뛰놀 수 있었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어른의 guidance, 조언이 필요한 시기가 되자, 아버지의 부재는 더욱 크게 느껴졌습니다.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한 허전함,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저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가까이 있지만, 닿을 수 없는 벽과 같았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마치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릿하고 차가웠습니다. 건장하시고 인물도 좋으셨지만, TV 속의 배우처럼 일상과는 동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노동일을 마치고 땀에 젖은 작업복 차림으로 골목길을 들어서는 아버지의 모습은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아빠!"하고 뛰어나가 안기거나, 자랑스럽게 "우리 아빠 최고!"라고 외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존재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는 제 삶 속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애쓰셨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어머니 역시 자신의 고통과 burden에 짓눌려 힘겨워하셨습니다. 부모님 사이의 불화는 일상이었고, 집은 늘 냉랭하고 tension이 감도는 공간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과 외면뿐이었습니다. 소통 부재의 가정에서 자란 저에게 세상은 차가운 벽으로 둘러싸인 듯 했습니다.
방황의 끝, 교회와의 만남
중학교 3학년, 방황하던 제게 교회는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었습니다. 친구의 이끌림에 처음으로 교회 문턱을 넘었지만, 솔직히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친구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 때문이었죠. 하지만 교회는 제게 예상치 못한 따뜻함과 welcome을 선물했습니다. 사춘기 시절, 여 자매들의 따뜻한 관심은 어색하면서도 기분 좋았습니다. 어딜 가나 환영받고 챙겨주는 분위기는 낯설지만 나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열린 문학의 밤 행사에서 경품으로 받은 두툼한 이불은 교회에 대한 좋은 impression을 심어주었습니다. 추운 겨울, 따뜻한 이불은 육체적인 온기뿐 아니라, 마음의 허전함까지 채워주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교회에 발을 들였지만, 6개월 정도 지나자 교회 생활은 routine해졌습니다. 자매들의 관심도 시들해지고, 목사님의 설교는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장로님의 기도는 pattern이 뻔하게 느껴졌고, 더 이상 교회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우연히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면서 제 신앙에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종말론이 유행했는데, 저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호기심에 종말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봄방학과 부흥회 기간이 겹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놀랍게도 강사 목사님의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특히 헌금에 대한 설교는 제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습니다.
헌금 설교 중 목사님은 보물 비유를 example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은행이 없어 보물을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돈이 생기면 장판 밑에 숨겨두곤 했던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목사님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가장 먼저 주변을 살피고, 도로 묻어두고, 온 재산을 팔아 밭을 샀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는 설교는 제게 헌금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헌금은 단순히 돈을 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보물을 향한 investment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저녁, 기도 시간에 저는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제 삶의 잘못과 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웠습니다. 기도 중에 회개가 터져 나왔고, 진정한 신앙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부흥회는 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9시 기도, 기적을 만들다
부흥회 이후, 저를 포함한 5명의 남자아이들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재건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예배당을 짓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예배당 건축을 위해 매일 밤 9시부터 10시까지 기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9시 기도는 무려 5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매일 저녁 교회에 모여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우리는 함께 힘을 내고 서로를 격려하며 기도를 이어갔습니다.
9시 기도는 우리에게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어른들의 인도 없이, 오직 우리끼리 자유롭게 기도했습니다. 돌아가면서 기도를 인도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교회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토요일이면 거리로 나가 찬양 집회를 열고 전도 활동을 했습니다. 9시 기도는 제 신앙의 foundation이 되었고, 지금의 저를 만든 근본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9시 기도는 제 인생의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기였습니다.
9시 기도 시간은 눈물과 웃음, 기대와 소망이 공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뜨겁게 통성기도를 하고, 마음속에 있는 슬픔과 아픔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눈물은 마음속 수증기가 신앙의 햇빛을 만나 비가 되어 내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가정 환경의 어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다양한 burden들이 눈물과 함께 씻겨 내려가는 듯 했습니다. 매일 울다 웃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점점 더 강해지고 성장했습니다. 9시 기도는 우리 5명에게 단순한 기도 모임이 아닌,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꿈을 키워나가는 소중한 공동체였습니다.
9시 기도를 5년 동안 지속하면서 우리는 모두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신학대학에 진학하거나 선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 역시 영화 "미션"을 보고 선교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영화 속 가브리엘 신부의 헌신적인 모습과 아름다운 음악은 제 마음을 deeply 감동시켰습니다. 특히 원주민들과 함께 음악을 통해 소통하고 변화시키는 장면은 제 꿈을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음악을 통해 세상에 희망을 전하고 싶다는 열망이 제 가슴 속에서 불타올랐습니다.
좌절과 절망, 바닥을 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실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막연히 신학대학에 진학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대학 입시를 앞둔 고3이 되어 있었습니다. 선교사의 꿈은 여전히 가슴 속에 있었지만, 당장 눈앞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결국 일반 대학에 지원했지만 results는 낙방이었습니다. 재수까지 했지만 전문대 입시에서도 고배를 마셨습니다. 연이은 실패에 자신감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제가 집에 들어서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 막내가 또 떨어졌대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울대 낙방도 아니고, 지방 전문대 낙방 소식에 어머니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순간 제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어머니의 한숨은 비수처럼 제 가슴에 꽂혔습니다.
교회에 가는 것도 점점 꺼려졌습니다. 대학에 합격한 친구들은 캠퍼스 life를 즐기고 있는데, 저는 여전히 재수생 신세였습니다. 청년부 예배에 참석해야 했지만, 왠지 낯 부끄럽고 초라한 기분이었습니다. 고등부 시절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친구들은 벌써 대학생이 되었는데, 저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교회 사람들의 시선도 따갑게 느껴졌습니다. 집사님이나 권사님들이 "어이구, 학생은 아직도 청년부야?"라고 물어볼 때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hide하고 싶었습니다.
교회 예배 참석은 점점 뜸해지고, 마음은 더욱 deep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멍청이"라는 말은 마지막 남아있던 자존감마저 무너뜨렸습니다. 더 이상 살아갈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둠이 발 밑에서부터 slowly 올라와 저를 삼키는 듯 했습니다. 마지막 hope으로 바닷가 방파제에 섰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파도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눈을 감고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지려는 순간, 문득 친구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죽기 직전,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 너무 힘들다... 죽고 싶어..." 제 입에서 힘겹게 message가 흘러나왔습니다. 친구는 잠시 침묵하더니,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야, 죽지 마." 그 짧은 한마디가 제 마음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죽지 말라는 말, 살아 달라는 말, 누군가 제 존재를 value있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해야겠다는 용기가 솟아올랐습니다.
기적적인 합격, 새로운 시작
친구와의 통화 후, 다시 삶의 의지를 다잡았습니다. 3수 끝에 겨우 대학에 합격했지만, 기쁨보다는 불안감이 컸습니다. 음악대학 성악과, 제 실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공고 출신에 음악 기초 zero인 저에게 음대 생활은 넘어야 할 산과 같았습니다. 주변 동기들은 예중, 예고 출신에 오랜 lesson 경력을 가진 실력자들이었습니다. 그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밤낮으로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음대 생활은 자존심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부족한 실력을 감추기 위해 더욱 악을 쓰고 버텼습니다. 군대 제대 후 곧바로 음대에 입학했기 때문에, 늘 군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여자 동기들은 저를 "제주도에서 온 또라이"라고 놀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감은 더욱 떨어지고, 목소리는 점점 굳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제 인생의 mentor가 되어주신 지도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교수님은 단순히 노래 skill뿐 아니라, 삶의 태도와 가치관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느 날, 교수님은 저에게 가곡 "헌정"을 부르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사랑, 당신 없이는 못 살아"라는 가사를 힘겹게 불렀지만, 교수님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창옥아, 노래에 love가 없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