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빈 집사 탈북 스토리: 절망 속 희망과 신앙의 기적 이야기
절망 끝 희망과 신앙, 김보빈
절망의 끝에서 마주한 희망, 김보빈 집사의 파란만장한 탈북 스토리: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마주하며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들
오늘 우리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온 김보빈 집사님의 충격적인 탈북 스토리를 통해, 우리가 뉴스 너머 잊고 지냈던 북한 주민들의 현실과 마주하고, 그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나아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를 갈망하며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뉴스를 넘어,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인류 보편의 문제인데요. 특히 김보빈 집사님의 이야기는, 단순히 탈북 과정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북한 사회의 끔찍한 현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강인한 생명력과 신앙의 힘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김보빈 집사님의 믿기 힘든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볼까요?
멈춰버린 시계, 고난의 행군 속에서 꽃피운 소녀의 강인한 생명력
김보빈 집사님은 북한에서도 가장 가난하다는 함경북도 새별군에서 넷째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찢어지는 가난과 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80년대까지는 배급 체계가 유지되어 그나마 괜찮았지만, 90년대 김일성 사망 후 시작된 고난의 행군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윗옷은 물론, 변변한 새 신발 하나 제대로 신어보지 못했고, 늘 물려받은 옷을 입어야 했던 어린 시절. "썩은 딸"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처럼, 그녀는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 속에서 힘겨운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요. 하지만 이러한 극한의 환경은 오히려 그녀를 강하게 단련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3살 어린 나이에 생계를 위해 시장에 나선 김보빈 집사님은 옥수수 배낭을 메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생선을 팔았습니다. 부끄러움도, 어려움도 잊은 채, 오직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는데요. 언니들이 겪어보지 못했던 고난 속에서, 그녀는 생존을 위한 강인한 의지를 키워나갔습니다. 생선 한 마리에 옥수수 몇 kg을 바꿔오는 물물교환 방식의 장사는, 그녀에게 험난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고난의 경험은, 훗날 그녀가 겪게 될 더욱 험난한 역경들을 이겨낼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벼랑 끝에서 만난 희망, 중국에서의 인신매매와 절망, 그리고…
20살이 넘어서면서 김보빈 집사님은 양치기 소녀, 즉 양 방목공으로 일하다 친구의 도움으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새별에서 청진까지 양파 장사를 하며 돈을 모았지만, 언니들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어려운 가정 형편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알코올 중독 남편 때문에 고통받는 언니들을 보며, 그녀는 가족을 위한 헌신을 결심하게 됩니다. 자신의 결혼 자금까지 털어 언니들에게 나눠주고, 중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한 것인데요.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현실이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떠난 중국에서, 김보빈 집사님은 인신매매 브로커에게 속아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일자리를 찾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인간 이하의 취급과 감금이었습니다. 브로커에게 12,000 위안이라는 거액에 팔려간 그녀는, 자신의 몸값이 얼마인지조차 모른 채 중국 농촌 마을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동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심지어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강제로 하체 검사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여성으로서의 존엄성은 짓밟히고, 희망은 사라진 절망적인 상황. "메이어(없다)"라는 중국어 단어만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극심한 절망감에 휩싸인 김보빈 집사님은 세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전통편이라는 약을 먹고, 쥐약을 먹고, 심지어 세제까지 마셨지만, 죽음조차 그녀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죽음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악착같이 살아남기로 결심합니다. 분가를 감행했지만,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닭장, 개장, 심지어 물독까지 숨어 다니는 고통스러운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임신을 하게 됩니다.
2004년 4월 26일, 출산을 10일 앞둔 만삭의 몸으로 11명의 경찰에 붙잡힌 김보빈 집사님은 강제로 병원에 끌려가 낙태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너는 여기서 살 수는 있어도, 자식은 낳을 수 없다"는 경찰의 냉혹한 말은, 그녀를 더욱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배 속에 주사 바늘을 찔러 넣어 아이를 살해하는 끔찍한 낙태 수술. 죽은 딸을 눈 앞에서 마주해야 했던 그녀의 고통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나라 없는 설움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는 북한 속담처럼, 그녀는 철저히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나라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함께, "언제쯤 내 마음에도 꽃이 필까"라는 절망적인 탄식만이 가득했습니다.
절망 끝에서 움튼 신앙의 씨앗, 그리고 기적 같은 변화
죽은 아이를 가슴에 묻고, 김보빈 집사님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지켜내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고향인 중국 연변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시련은 계속되었습니다. 딸이라는 이유로 손녀딸을 인정하지 않는 시댁의 냉대, 그리고 아들을 낳으라는 압박. 견디다 못해 그녀는 딸 설령(후에 은혜로 개명)을 데리고 시댁을 탈출, 연길에서 백두산 가이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자궁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삶의 벼랑 끝에서 김보빈 집사님은 우연히 교회를 방문하게 됩니다. 유모차를 얻기 위해 찾아간 교회에서, 그녀는 십자가를 처음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구제소로 착각했던 그녀는, 교회에서 난생 처음 예배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설교 시간 내내 느껴지는 두통과 불편함, 죄인이라고 외치는 기도는 그녀에게 낯설고 거북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두통은 사라지고 마음은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20원이라는 헌금을 내고 받은 유모차와 신생아 용품은 그녀에게 "오늘만 교회에 가면 땡"이라는 계산적인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하지만 토요일 저녁,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강한 이끌림에 휩싸인 김보빈 집사님은 다시 교회를 찾게 됩니다. 강박증처럼,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교회로 향했습니다. 여전히 예배는 고통스러웠지만, 4주째 되던 날, 그녀는 영접 기도를 통해 난생 처음 "죄인입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고백했습니다. 찬송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처음으로 마음의 평안을 느꼈습니다. "가라사대 누구는 누구를 낳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족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성경 말씀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찬송가의 가사 하나하나가 그녀의 마음을 깊이 울렸습니다.
40일 동안 매일 100번씩 감사 기도를 하면서, 김보빈 집사님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진짜 살아계십니까? 저에게도 보여주세요!" 그리고 40일째 되던 토요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방언이 터져 나왔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는구나! 이제부터 하나님만 믿고 살겠습니다!" 그녀는 비로소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여전히 낯선 단어였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녀의 삶을 180도 바꿔놓았습니다. 오랜 시간 그녀를 괴롭혔던 관상쟁이 할아버지는 더 이상 꿈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축복의 통로, 북한에서의 옥살이와 전도, 그리고 꿈에 그리던 탈북
하지만 김보빈 집사님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다니던 중 성탄절 행사 연습을 하다가, 시댁 식구들의 모함으로 인해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김치움 속에 숨었지만 결국 발각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딸 은혜와 함께 쫓겨나듯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이사 간 곳에서 딸 은혜는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 믿으면 좋은 일만 생긴다면서요! 왜 저에게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절망적인 심정으로 교회 십자가 밑에 엎드려 울부짖던 그녀에게, 기적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딸 은혜가 갑자기 "엄마"라고 외친 것입니다. "설령"이라는 이름 대신 "은혜"라는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 은혜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셨구나!" 그녀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딸 은혜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후, 김보빈 집사님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 탈북을 시도하다 붙잡혀 3년간 교화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끔찍한 환경, 굶주림과 질병, 폭력이 난무하는 죽음의 수용소였습니다. 시체 발을 보고 밥을 먹지 못하고, 구더기 가루를 약으로 쓰고, 굶주림에 고추를 훔쳐 먹다 매를 맞고… 인간 이하의 삶이 계속되었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 안에서 전도의 사명을 깨닫고, 8명의 동료 수감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중국어 찬양을 부르며 위로를 얻고, 방언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감했습니다. "이곳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3년간의 옥살이 끝에, 그녀는 68kg의 건강한 몸으로 교화소를 나섰습니다. 40kg도 안 되던 몸무게가 옥살이 중에 오히려 늘어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화소를 나온 후, 김보빈 집사님은 딸 은혜를 데리고 2012년 6월 1일,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됩니다. 탈북 과정에서 겪었던 자궁암은 기적처럼 사라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만 섬기며 살겠습니다!"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딸 은혜는 현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습니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새로운 시작: 끝나지 않은 여정
한국에 도착했지만, 김보빈 집사님은 여전히 악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북한과 중국에서 겪었던 끔찍한 기억들은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치유 집회에 참석하여 용서를 배우게 되었지만, 종이에 이름을 적어 포도주에 담갔다가 십자가에 못 박는 방식은 그녀에게 진정한 용서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이게 진짜 용서입니까?" 울부짖는 그녀에게,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그냥 너나 행복하게 살아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녀는 비로소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사람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했습니다. 용서를 선포하는 순간, 그녀의 마음에는 평안이 찾아왔고, 비로소 한국 생활이 광야임을 인정하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습니다.
현재 김보빈 집사님은 고향의 부모 형제, 그리고 북한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고난을 통해 더욱 강해지는 인간의 의지, 그리고 역경 속에서 피어나는 신앙의 힘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 "사랑은 받은 자만이 줄 수 있고,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사랑과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며, 북한 동포들을 향한 끊임없는 관심과 기도를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통일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안에서 이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며, 우리 모두 북한을 위해, 그리고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