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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유튜버 원샷한솔 이야기, 희망과 도전의 간증

요약

원샷한솔: 시각장애를 유쾌하게, 희망을 쏘다

[수어통역] 🎥구독자 45만(녹화일 기준)의 인기 유튜버 원샷한솔의 간증!ㅣ원샷한솔 김한솔 형제ㅣ원샷한솔ㅣ새롭게하소서

동영상 링크

안녕하세요, 새롭게 하소서의 주용훈입니다. 안녕하세요, 안수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정수입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차별이 존재하는데요, 어떤 이는 그 차별 때문에 상처받고 심지어 포기하려는 순간도 있습니다. 오늘 나오신 분 또한 많은 차별과 불행 때문에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하는데요, 하나님을 만나고 아주 마음에 쏙 드는 동역자도 만나 현재는 시각장애인 유튜버로서 선한 영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계신 분입니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영상을 제작하여 세계 최초로 점자로 된 실버 버튼을 만드신 유튜버, 원샷 한솔 김한솔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발음이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요, 저희 한솔 형제는 새롭게 하소서 프로그램을 자주 보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일단 최근에는 제가 맹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동생 지선이가 여기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며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것을 봤습니다. 자주 연락은 못하지만, 그래도 보면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방금 채널 '원샷 한솔'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는데요, 어떤 채널이고 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일단 '원샷 한솔'은 시각장애를 가진 저의 일상을 보여주고자 만든 채널입니다. 이 채널 안에서, 사람들은 장애에 대해 흔히 우울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이미지를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한 장애는 우울하고 불쌍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미있고 즐거운 경험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브이로그, 상황극, 연기 등 다양한 일상적인 모습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아, 장애가 꼭 우울하고 불쌍한 것만은 아니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채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주변에서 채널 운영하는 분들을 보면 정기적으로 꾸준히 영상을 자주 올려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던데요, 김한솔님은 어떠신가요? 보람도 있지만 부담도 되지는 않으신지 궁금합니다.

아, 일단 처음에는 너무 영상을 올리고 싶어서 더 많이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긴 영상은 일주일에 한두 개, 짧은 영상은 매일 올리고 있는데요, 긴 영상은 제작 시간이 오래 걸려서 제 욕심만큼 올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짧은 영상은 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취미 같은 것이라서, "어, 이 메시지를 이런 형태로 보여주면 너무 웃길 것 같은데? 사람들 반응은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댓글을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물론 "벌써 또 내일 올려야 되네?" 하는 부담감도 있지만, 아이디어가 샘솟을 때는 하루에 10개도 찍을 때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과 사람들의 반응이 얼마나 비슷할지 확인하는 재미가 있어서 희열을 느낍니다.

혹시 댓글 중에 정말 보람 있고 뿌듯했던 댓글이 있으셨나요?

채널 자체를 불쌍하거나 우울하지 않게 만들고 싶었고, 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보다는 제 존재 자체로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다행히 댓글에서 "제가 생각했던 장애는 우울하고 불쌍하기만 했는데, 최근에 생각이 바뀌었다"는 반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장애가 있는 것이니까, 존재 자체로 장애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는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어떤 부모님께서 신혼부부인데 아이가 시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부부에게는 처음 겪는 일이라 너무 힘들고,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왔을까" 하는 시점에 제 유튜브 채널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장애 자체가 너무 힘들다고 느껴졌는데, 채널 속에서 제가 다양한 활동을 하고 스스로의 방법으로 해나가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 "우리 아이도 한솔님처럼 밝고 웃으면서 키워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용기를 얻으셨다고 합니다. 이 메시지를 보고 정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김한솔님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데요, 혹시 평소에도 말을 빨리 하는 편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해서 백을 말하고 싶으면 이백을 말하고 싶어 하니까, 더 빨리빨리 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이 빨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튜브를 하는 것이 김한솔님에게 딱 맞는 적성인 것 같습니다. 유튜브 자체가 재미있고 감동도 있어서, 3년 만에 구독자 수가 43만 명이나 되셨는데요, 처음부터 유튜브가 순탄하게 잘 된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유튜브의 '유'자도 몰랐습니다. 유튜브를 보기만 하다가,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조회수는 어떻게 올려야 하는지, 영상만 올리면 저절로 잘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9개월 동안 구독자가 1,00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재미가 없나?" 하는 고민도 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습니다.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평가해 달라고 부탁하고, 어떤 점이 부족한지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과 제가 하고 싶은 것의 접점을 찾아서 재미있게 풀어나가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비장애인들의 시각에서 어떤 부분을 궁금해하고, 어떤 부분을 재미있어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9개월 동안 1,000명이었던 구독자가 1년 2개월째에 10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때 '터지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의 노력들을 사람들이 좋게 봐주신 것 같아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성과입니다. 저희 '새롭게 하소서' 유튜브 영상도 댓글을 보면서 "방송 덕분에 다시 살아났다", "용기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힘이 나는데요, 김한솔님도 댓글을 보면 힘이 되시죠?

네, 저는 일어나자마자 댓글부터 확인합니다. 댓글을 통해 아까 말씀드린 감동적인 메시지도 받고, "너무 힘이 된다", "힐링이 된다"는 반응을 보면서 저 또한 힘을 얻고 보람을 느낍니다.

악플도 있나요?

악플은 당연히 있습니다. 조회수가 높으면 무조건 악플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 척한다", "눈이 보이는데 방금 땅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것을 봤다", "카메라를 통해 나랑 눈을 마주쳤다", "내가 아는 시각장애인은 저럴 수 없다" 등 다양한 악플이 있습니다. 하지만 웃긴 것은 악플을 다는 분들은 실제로 시각장애인을 만나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냥 트집을 잡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조회수가 많아질수록 악플도 많아진다는 것을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99%의 좋은 댓글에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김한솔님은 어린 시절 연이은 불행과 역경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초등학교 때부터 저에게는 여러 명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9살쯤 첫 번째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시고, 아버지와 둘이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출장이 잦아서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외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샷시 일을 하셔서 건설 현장에 자주 나가셨기 때문에, 집에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찬은 사다 놓은 것으로 대충 먹고, 밥은 직접 지어서 먹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에 가면 어머니들이 함께 학교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우리 집에는 어머니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친구들에게 가정 환경을 숨기면서 학교를 다녔고, 어머니가 있는 가정이 부러웠습니다.

11살 되던 해, 두 번째 어머니가 생겼습니다.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소개해주셨는데,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어머니가 생긴다는 사실에 기뻤습니다. 온전한 가족이 생긴 것 같아서 좋았고, 새 학교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 학교생활이 즐거웠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어머니가 크리스천이셨고, 구약, 신약 만화 성경책과 글자 성경책을 선물해주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예쁨을 받고 싶어서 성경책 글씨 연습도 하고, 만화 성경책도 보면서 성경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착한 사람이 많고, 시련도 많지만, 하나님은 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착한 엄마를 만난 걸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새벽에 화장실을 가다가 어머니가 혼잣말로 "아이를 가졌는데, 한솔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면 좋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임신하셨고, 저는 새어머니의 친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책을 선물해주셨던 분이 왜 나를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교회에서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왜 나를 싫어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때부터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내가 잘못하면 다른 곳으로 보내질까' 불안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다툼은 계속되었고, 1년 후 제가 5학년이 되었을 때, 두 번째 어머니와 아버지도 이혼했습니다.

두 번째 이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어머니와 두 아이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어머니는 저보다 세 살, 일곱 살 어린 두 아이와 함께 오셨고, 12살 여름부터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어머니가 생겨서 좋다는 생각보다 눈치를 더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전학을 가게 되었고, 세 번째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과연 나를 잘 대해줄까 하는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눈치를 보는 습관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세 번째 어머니와 살 때는 옷을 입을 때도 제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키가 작은 편이라 세 살 어린 동생과 옷 사이즈가 비슷했는데, 옷을 입으려고 하면 "아이가 입는 게 더 어울린다, 너는 이거 입어라" 하고 옷을 뺏기기 일쑤였습니다.

세 번째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주 놀러 다니셨고, 동생 유치원 등원은 제 몫이었습니다. 동생들 밥을 챙겨 먹이는 것도 제 책임이었습니다. 잘하려고 노력해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면, 세 번째 어머니는 항상 "다섯(저를 지칭하는 듯합니다)"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체 왜 나 때문일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괴로웠습니다. 표현을 하고 싶었지만, 남편으로는 누군가 먼저 나의 어려움을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중, 두 아이는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고, 세 번째 어머니만 집에 남게 되었습니다. 집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집 앞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가면 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집에 안 계셨고, 어디 가셨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 밥을 챙겨 먹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 가면 따뜻하게 맞아주고 밥도 함께 먹을 수 있고, 마음의 안식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교회도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다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외로움을 느꼈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외로움을 잊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집에는 계속 혼자 남겨졌고, 점점 표현이 없는 아이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던 6학년 여름, 세 번째 어머니와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6월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두 분 다 크게 다쳐서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어머니는 다리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두 분 다 회복되어 퇴원했고, 어머니 휠체어를 밀면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너 때문"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대체 뭐가 나 때문이라는 걸까' 괴로웠습니다. 큰아이와 비교하면서 "쟤는 공부도 잘하는데, 너는 왜 이렇게 못하냐"는 말을 계속 들으면서 자존감은 점점 낮아졌습니다. '내가 정말 부족한 사람인가, 왜 나를 좋게 봐주지 않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께서 다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느 날 아침 일찍 출근하시다가 고속도로에서 차가 뒤집히는 사고가 났습니다. 바퀴가 빠지면서 차가 전복되었고, 뒤따라오던 차가 들이받으면서 장 파열이 재발하여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13살, 초등학교 6학년 6월 말, 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고, 세 번째 어머니는 어디론가 떠나시고, 저는 세상에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막막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 친척이나 어른들의 도움은 없었나요?

다행히 큰아버지, 큰어머니께서 저를 거둬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지만, 큰아버지 댁에서 지내게 되면서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때 친어머니를 찾아볼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어머니는 저를 버리고 떠났고,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이 어린 눈에도 느껴졌었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었습니다. 불안정해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술을 많이 드셨던 것도 기억나고요. 어머니와는 연락이 끊긴 상태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쯤 두 번째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었는데,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큰아버지 댁에서 너무 잘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연락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 댁에서 지내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 '아, 이게 가족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늘 원했던 온전한 가족의 형태였습니다. 평범함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가족끼리 모여서 집에서 밥을 먹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얼마나 큰 안정감을 주는지 깨달았습니다. 6학년 2학기 때 네 번째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놀랍게도 전교 1등을 했습니다. 이전 학교에서는 반에서 2~30등 정도 했는데, 서울로 전학 가서 처음으로 전교 1등을 했습니다. 달라진 것은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고, 큰어머니, 큰아버지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환경이었습니다. '내가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환경이 정말 중요하구나' 깨달았습니다.

큰어머니, 큰아버지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학업에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큰어머니의 따뜻한 말투와 관심, 함께 시장에 가고 일상을 나누는 시간들이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시험을 잘 보면 선물도 주시고, 칭찬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큰어머니와 100점 맞으면 만 원 받기로 약속하고 공부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만 원을 받으면 큰어머니와 함께 아울렛에 가서 옷을 사기도 했습니다. 부족하면 큰어머니께 "돈 좀 보태주세요" 하고 장난치기도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머니 부재로 느껴보지 못했던 모정을 큰어머니를 통해 얻게 된 것이네요. 큰어머니는 큰아버지의 형수님, 즉 아버지의 형의 아내이십니다. 형과 누나가 있고, 저는 방도 없이 거실에서 큰어머니, 큰아버지와 함께 잤지만, 전혀 불편함 없이 행복했습니다. 풍족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큰어머니, 큰아버지는 늘 열심히 일하시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자기 몫을 다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큰아버지 자녀들, 즉 사촌 형, 누나와의 관계는 어땠나요? 차별이나 어려움은 없었나요?

전혀 차별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형, 누나들이 저를 잘 챙겨주고, 함께 잘 지냈습니다. 주말에는 늘 큰어머니, 큰아버지와 저, 셋이서 등산을 가기도 했습니다. 함께 등산하고, 해돋이도 보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사진도 찍는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정말 감사한 가족입니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가정의 사랑을 비로소 느끼게 되었습니다.

가정의 사랑 속에서 안정을 찾았는데, 언제 어떤 일로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된 건가요?

큰아버지 댁에서 가족의 정을 느끼고 안정감을 찾으면서 '나도 이제 행복해질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다니지 않았지만, 행복에 대한 기대감이 컸습니다. 평범한 행복을 꿈꾸던 18살, 고등학교 때 버스를 타고 40분 거리의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서 한쪽 눈을 떴는데 세상이 회색빛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피곤해서 그런가' 싶어서 잠을 더 자봤지만,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력이 좋아서 안과에 가본 적도 없었는데, 동네 안과에 가서 검진을 받았더니 오른쪽 눈은 측정 불가, 왼쪽 눈은 0.8, 0.9 정도라고 했습니다. 큰 병원에 가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큰 병원에 갔더니, '신경염' 진단을 받고 스테로이드 치료를 받으면 시력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퇴원 후에도 오른쪽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쪽 눈으로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은 없었기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책도 보고 공부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학원에서 책을 보는데 갑자기 책이 흐릿하게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빛이 이상한가 싶어서 봤지만, 눈에 이상이 생긴 것을 직감했습니다. 안경점에 가서 시력 검사를 했더니, 시력이 0.2, 0.3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안경점에서도 큰 병원에 가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큰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한숨을 쉬면서 희귀병인 '레버 시신경병증'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오른쪽 눈은 이미 실명되었고, 왼쪽 눈도 앞으로 두세 달 안에 실명될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의사 선생님 얼굴도 또렷하게 보였고, 2층에서 1층 사람들의 얼굴도 보였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돼'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눈에 좋다는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었습니다. 생당근, 블루베리, 홍삼 등 좋다는 것은 다 먹고, 초록색이 눈에 좋다고 해서 색종이를 눈에 붙이고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시력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학교에서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지고, 시험지도 보이지 않고, 친구 없이는 집에도 못 찾아갈 정도로 시력이 악화되었습니다. 달력으로 시력을 확인했는데, 점점 눈앞으로 다가와야 숫자가 보이는 것을 보고 절망했습니다.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하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된 날이 남들보다 늦게 주민등록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아쉬움을 느끼던 18살 생일 며칠 후였습니다. 18살 11월 9일, 장애인 복지카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운명처럼 복지카드에는 2010년 11월 9일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가 제가 시각장애인으로 새롭게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시력을 잃는 위기가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매달리지는 않았나요?

네, 맞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학교를 자퇴하고 집에서 누워서만 지냈습니다. 시각장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내 인생은 망했구나, 남들 다 학교 다니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할까' 절망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게는 여전히 잃을 것이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있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나, 어릴 때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성경 이야기도 다 알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가' 원망했습니다.

집 앞 놀이터에 나가려고 했는데,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습니다. 벤치에 앉아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해결되는 것은 없었고, 계속 라디오만 듣고 음악만 들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큰어머니께서 점자를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점자를 배우기 싫었습니다. TV 속 장애인들은 불쌍하고 안타까운 존재로만 비춰졌고, 점자를 배우면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장애인이 되기 전에도 불쌍한 존재가 싫어서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왜 또 불쌍한 존재가 되어야 하나 싶었습니다.

점자를 배우는 것을 거부하고 방에서 라디오만 듣고 있었는데, 큰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속상한 울음소리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큰어머니, 큰아버지는 저에게 은인과 같은 존재였고, 행복을 만들어주신 분들인데, 제가 너무 나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했습니다. 큰어머니, 큰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점자를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맹학교 도서관 선생님을 만나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점자를 배우러 갔고, 나머지 시간에는 집에서 점자 연습만 했습니다. 한번 꽂히면 끝까지 하는 성격이라 점자 배우는 데 집중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점자 쓰는 연습을 반복했습니다.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점자 연습만 했습니다. 2주 만에 한글 점자를 마스터했습니다. 읽기 연습은 쉽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습했습니다. 방에 불을 끄고 이불 속에서 점자 동화책을 만지작거리면서 읽기 연습을 했습니다. 2주 후, 드디어 한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취감은 정말 컸습니다. 한 달 만에 점자 읽기를 마스터했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공부도 할 수 있고, 대학에도 다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20살에 맹학교에 입학하여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남들과 다르게 보이는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점자를 배우니 새로운 길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1년 동안 점자 연습과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9살 때는 남들은 수능 공부할 때 저는 자음, 모음 연습을 하고 있어서 자괴감도 느꼈지만, 점자를 익히면서 성취감을 얻고 자신감을 회복했습니다. 복지관에서 볼링, 컴퓨터 등 다양한 취미 활동도 하면서 재활 훈련을 했습니다. 볼링 대회에도 나가서 최고점수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재활 훈련을 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문과 앞으로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자신감도 많이 떨어져 있었고, 사람들과 대화할 때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던 중, 복지관 직업팀 상담 선생님과의 상담을 통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한솔 씨,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당당해져도 돼요. 고개 숙이고 있는 게 더 이상해요"라고 농담을 건네면서 저를 편안하게 해주셨습니다. 어릴 적 누군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려주기를 바랐는데, 상담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상담이 끝날 무렵, 선생님께서 교회에 같이 가보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또 교회?' 하는 생각에 거절했지만, 계속 교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자꾸 교회 생각이 나는 걸까, 교회에 가면 좋은 사람들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다시 복지관에 가서 교회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교회를 믿어보고, 이번에도 아니면 정말 아닌 것으로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에 가보니 정말 사람들이 좋았고,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마음속 숙제가 해결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외로움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 인생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길로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 말씀처럼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나에게도 고난이 많았지만, 축복도 많았구나,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어주고, 그들을 통해 자신감을 되찾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을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20살부터 신앙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김한솔님을 조금씩 조금씩 부르시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역자들을 숨겨놓으시면서 인도하신 것 같네요. 대학 진학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믿음의 동역자들을 숨겨놓으셨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네, 또 다른 지인을 통해 대학교 기독교 동아리 'IVF'를 소개받았습니다. IVF에 가면 말씀도 나누고, 삶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대학교는 맹학교와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교수님들은 시각장애 학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시험 방식, 교재 제공 등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한 학기 만에 휴학하고 캠퍼스 생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대학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만 이런 어려움을 겪는 걸까' IVF 동아리 친구들과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IVF 친구들은 대학 생활을 돕는 도우미 역할을 자처해주었고, 함께 교재를 한글 파일로 만들어주는 등 도움을 주었습니다. IVF 안에서 '장애인권 소모임'을 조직하여 캠퍼스 내 장애 학생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캠퍼스 내 장애 학생들을 찾아다니면서 어려움을 듣고, 함께 학교 측에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캠퍼스에 경사로, 점자 블록, 휠체어 석 등이 설치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장애인권 동아리는 4명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40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캠퍼스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동아리 활동은 학교 내에서만 이루어졌나요? 외부 활동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2019년 '장애 청년 드림팀'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뉴욕에 가게 되었습니다. '장애와 직업'을 주제로 다른 나라의 장애인 직업 현황을 알아보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당시 경영학과 졸업을 앞두고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매우 한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뉴욕은 장애인들이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해서 뉴욕을 탐방 주제로 정했습니다.

뉴욕에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장애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휠체어를 탄 대학 졸업생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차별과 편견을 경험했지만, 뉴욕에서는 평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장애인 직업 센터에서는 장애인이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기관사가 되고 싶다는 장애인에게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고, 의사가 되고 싶다는 장애인을 위해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등 한국과는 다른 긍정적인 분위기였습니다. 뉴욕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도 한국에 돌아가서 유튜브를 해봐야겠다' 결심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방법을 찾으면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뉴욕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어서 '원샷 한솔' 채널을 만들게 되었는지 궁금한데요, 영상을 함께 보면서 이야기 나눠볼까요?

[영상 시청]

영상 잘 봤습니다. 정말 자연스럽고 재미있네요. 컵라면 점자 아이디어는 정말 기발합니다.

컵라면 점자는 원래 없었는데, 유튜브를 통해 컵라면 점자 필요성을 알게 되면서 생긴 것입니다. 구독자님들이 아이디어를 주시고, 라면 회사에 제안해서 컵라면 점자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정말 감사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책도 유튜브 덕분에 점자로 제작할 수 있었고, 지하철 점자 표지판 문제도 알릴 수 있었습니다. 지하철 점자 표지판이 거꾸로 붙어 있어서 시각장애인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사실을 유튜브를 통해 알리고 개선을 촉구했습니다.

1년 만에 10만 구독자를 달성하고 실버 버튼을 받았는데, 점자 실버 버튼은 특별 제작하신 건가요?

처음에는 일반 실버 버튼을 보내줬는데, 점자로 된 실버 버튼을 요청했습니다. 유튜브 측에서 흔쾌히 점자 실버 버튼을 제작해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받은 점자 실버 버튼은 오타가 있었습니다. 다시 제작을 요청했고, 6개월 만에 점자로 된 실버 버튼을 받았습니다. 점자 문구와 편지까지 점자로 제작된 것을 보고 정말 감격했습니다.

세 번째 만에 점자 실버 버튼을 받았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정말 성취감이 엄청났습니다. 해냈다는 기분, 뿌듯함, 감사함 등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 산 지 10년이 넘었는데, 시력을 잃기 전과 후 삶의 변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오히려 시야가 넓어진 것 같습니다. 시력을 잃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일상에 대한 감사함을 잘 몰랐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했던 것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각장애를 통해 오히려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력을 잃은 것이 저에게 또 하나의 축복이 된 것 같습니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은 마음으로, 다른 감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한솔님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요?

하나님은 저에게 계속해서 행복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시는 든든한 존재입니다. '천로역정' 책을 보면서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저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시고, 캠퍼스 변화를 이루게 해주시고, 유튜브를 통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느낍니다. 앞으로도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계속하면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고, 장애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정말 울림 있는 메시지 감사합니다. 수지 씨는 오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나요?

시종일관 밝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제 마음에도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어린 시절 혼자 밥을 먹던 이야기, 시각장애를 얻게 된 이야기 등 힘든 이야기를 밝게 말씀하시는 모습에 오히려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 다른 장애인들을 돕고, 유튜브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유튜브가 잘 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김한솔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세히 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집에 가서 가족들을 좀 더 자세히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김한솔님 말씀처럼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김한솔님 채널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더 나아가 사회 변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저희도 '원샷 한솔' 채널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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