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콘텐츠로 건너뛰기

개그맨에서 목회자로, 최형만 목사의 눈물과 웃음 인생 이야기

요약

웃음과 눈물의 인생, 개그맨 최형만 목사

나의 개그는 목사가 되기 위한 훈련: 개그맨 최형만 목사의 인생 이야기

유튜브 썸네일 삽입

(썸네일 이미지: 최형만 목사님 밝게 웃는 모습, "새롭게하소서" 로고)

안녕하십니까,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주영훈입니다. 안녕하세요, 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정범균입니다. 오늘,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셨을 반가운 얼굴을 모셨습니다. 바로 개그맨에서 목회자로, 극과 극의 삶을 살고 계시는 최형만 목사님이십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존경하는 선배님이신, '돌' 김영옥 선생님의 쟁쟁한 강의를 객석에서 듣던 개그맨 시절을 지나, 이제는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이 되셨는데요. 랄랄랄라, 바로 최형만 목사님이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우, 이렇게 쟁쟁한 하나님의 영상 사역자들과 함께하게 되다니, 감개무량합니다. 주영훈 님, 연 자매님, 정범균 씨,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최형만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게 아직은 어색합니다. 개그맨 선배님으로 소개해야 할지, 목사님으로 소개해야 할지 고민했는데요, 오늘만큼은 목사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냥 듣보잡으로 소개해 주세요. 듣도 보도 못한 사람 취급 말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으신 지는 얼마나 되셨죠?

2020년 4월에 안수를 받았으니, 햇수로 4년 정도 되었네요. 시간이 참 빠릅니다.

최근 방송을 통해 목사님의 삶이 공개되면서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작가님께 섭외를 부탁드릴 정도였으니까요. 대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정범균 씨가 섭외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주영훈 씨와 연 자매님 덕분이었네요. 두 분도 뵙고 싶었지만, 특히 연 자매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방송에 출연하신 김에, 예전 성대모사나 모창 실력을 보여주시면 어떨까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시고 말입니다. 과거는 잊어야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되어야 합니다.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해외에서 오래 생활하신 분들 중에는 최 목사님을 코미디언이 아닌 목사님으로만 아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뭘 했던 분인지 전혀 모르는 분들을 위해, 짧게나마 예전 개그를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거절하기는 좀 그렇고, 귀한 프로그램에 초대해 주셨으니, 오랜만에 한번 해보겠습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벌써 긴장되는데요.

저희가 미리 준비했습니다. 예전 개그 영상입니다. 재미없으면 편집하면 되고요. 제 인생이 뭐, 편집의 연속 아닙니까. 오랜만에 한번 해보겠습니다. 카메라는 어디를 봐야 하나요? 아, 저기군요.

(개그 시연)

반갑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강의를 맡은 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서 완전히 바뀐 것이 있습니다. 바로 BC와 AD입니다. BC는 Before Christ, 즉 예수 그리스도 이전을 의미하고, AD는 Anno Domini, 주님의 해, 즉 예수 그리스도 이후를 뜻합니다. BC와 AD는 저와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BC, Before Comedian, 즉 예전에는 코미디언이었던 최형만이, AD, After Deliverance,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의미를 여러분께 전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사도행전의 주역 세 분, 주영훈, 정범균, 연 자매님이 있습니다. 세 분의 이름을 가지고 잠시 설교를 해 보겠습니다. 정범균. '범균'이라는 이름은 '범사에 균등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균등해야 하고, 말씀과 기도가 균등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주영훈. '영훈'이라는 이름은, '영적인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훈'이라는 글자는 훈계, 가르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훈장, 훈계 때문에 목사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다행입니다. 주영하로 개명해야 할까요? 주영하'주 예수 그리스도, 영, 하나님'의 줄임말로, 삼위일체를 의미하며 목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연' 자매님의 이름은 간단합니다. '성경을 펴서 말씀을 전하는', 즉 말씀을 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종교이기에, 최고 권위의 말씀을 가지고 나눠야 합니다. 성경을 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히, 끊임없이 전해야 함을 뜻합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찰리 채플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본질은 잔혹극입니다. 결국 죽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극, 즉 죽음을 막아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자극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자극입니다. 우리는 그분, 십자가 때문에 결국 궁극의 삶,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바로 성경 드라마에 담겨 있습니다. 채널 고정!

(개그 시연 종료)

짧은 설교 말씀 같았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런 개그는 어떻게 즉석에서 나오는 건가요? 준비해 오신 것 같은데요?

준비를 해도 이렇게 짜기가 쉽지 않습니다. 개그에 깊이가 있어야 하거든요. 하루에 30개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덕분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만든 개그를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제는 강대상에서 말씀을 통해, 전형적인 설교 패턴을 벗어나, 가슴에 와닿는 메시지를 전하는 목회자가 되실 것이라 기대합니다. 사실 지금도 개그 무대에 서셔도 많은 분들에게 큰 즐거움을 줄 수 있을 텐데요, 어떻게 하나님의 무대에 서게 되셨는지, 목사님의 인생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나눠 보겠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목사님 아버님도 목회자셨다고요? 정범균 씨, 주영훈 씨, 그리고 저까지, 저희 셋 다 목회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님이 목사님이셨다니, 어떤 환경에서 자라셨는지 궁금합니다.

네, 아버님이 목사님이셨습니다. 사실 아버지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습니다. 숨기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함부로 대하신 것은 아니지만, 아버님은 이북에서 홀로 내려오신 분이셨습니다. 전쟁통에 가족을 두고, 금방 다시 데려오겠다고 약속하고 경계선을 넘었지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죠.

혼자 남한으로 내려오셨다니, 정말 외로우셨겠네요. 아무도 없이, 친척도, 아는 사람도 없이 말입니다. 신앙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남한에서 병을 얻으셨는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리셨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려니 비용이 부담스럽고, 그래서 기도원에 갔다고 합니다. 기도원에 가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기도원에서 기도하시다 은혜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목사가 되셨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살아계셨다면 100세가 넘으셨겠네요. 전쟁통에 남하하셔서 목사님이 되신 것이군요.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 정도입니다. 아버지가 어린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 것은 아니어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습니다.

연세로 보면 목사님을 늦둥이로 보셨겠네요. 당시에는 17, 18세가 결혼 적령기였는데, 아버님은 44세에 결혼하셔서 저를 낳으셨으니, 할아버지뻘에 결혼하신 셈입니다. 목회자 자녀로서 고충도 있으셨을 텐데요. 저도 그렇고, 주영훈 선배님도 목회자 자녀인데, 혹시 비슷한 고충이 있으셨나요?

다른 고충보다는, 아버님이 나이가 많으시다는 사실 때문에 학교에서 창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늘 친구들에게 할아버지라고 놀림을 받았죠. 저희 집이 가난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님 목회도 잘 하셨고, 성경에도 해박하셨습니다. 아홉 살 때, 저희 가족이 이민을 계획했습니다. 아버님이 이민을 생각하고 계셨는데, 이민 사기를 당했습니다.

이민 사기라니, 안타깝네요. 이민 자금을 송금했는데, 사기를 당해서 돈을 날리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것입니다. 집도 팔고, 아버님이 목회하시던 교회까지 팔아서 이민 자금을 마련했는데,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이죠.

송금 사기를 당하셨군요. 정말 힘든 시기를 겪으셨겠습니다. 아홉 살 때 겪은 일이라, 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짐작도 안 갑니다. 나중에 보니, 그때의 경험이 결핍으로 남았습니다. 저의 결핍은 이사였습니다. 1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습니다. 수입이 없으니, 가진 것을 계속 줄여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매년 이사를 다녔다니, 정착하기 힘들었겠네요. 학교에 전학 갈 때마다 강단에 서서 새로 온 학생이라고 소개해야 하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여섯 군데나 다녔습니다. 매년 학교를 옮겨 다닌 셈이죠. 새 학교에 가면 저를 소개하는 시간이 너무 싫었습니다. 선생님 멘트도 늘 똑같았습니다. "착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는 뻔한 소개 멘트 말입니다.

교장실에 불려가 야단까지 맞으셨다니,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막 야단을 치셨습니다. "공부도 못하고, 저렇게 문제아 같은 학생이 우리 학교에 와서 잘 적응하겠냐"고 말입니다. 밖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정말 상처가 되었습니다. '아, 아들이 제대로 못하면 아버지가 욕을 먹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에 잦은 전학은 친구 사귀기에도 어려움을 주었을 텐데요. 새 친구를 사귀는 데 시간이 걸리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맞습니다. 낯가림도 심해졌습니다. 초등학교 때 짝꿍 제도가 있었는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짝꿍을 시켰습니다. 다음 날 짝꿍이 바뀌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여자 짝꿍이 선생님께 짝꿍을 바꿔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마음에 거절감이 엄청났습니다. 그 거절감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거절 경험이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송국에서 PD에게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 거절당하면, 그날 하루 종일 괴로웠습니다. "아이디어가 별로"라고 좋게 말해도 힘든데, "야, 이게 아이디어냐? 수준 이하"라는 식으로 모욕적인 거절을 당하면, 정말 좌절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가정환경 조사서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도 있으셨다고요. "외동 손 들어, 둘째 있는 집 손 들어"처럼, 아버지 직업을 묻는 조사도 있었죠. "아버지 뭐 하시냐"는 질문에 손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거수 방식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직업 종류도 다양하지 않아서, 선생님, 약사, 장사, 택시 운전사 등 뻔한 직업만 나왔습니다. 목회자는 흔한 직업이 아니었기에, 손을 들 수 없었습니다. 목회자는 기타 항목에 속했으니까요.

기타 항목에 목회자가 있었군요. 당시에는 목회자가 흔치 않았던 직업이었나 봅니다. 선생님이 "최형만, 왜 손 안 드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해당 항목에 없어서 손을 안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더니, 선생님이 아버지 직업을 물으셨습니다. "목사입니다"라고 답했죠. 선생님이 그냥 넘어가셨으면 괜찮았을 텐데, "어느 교회 목사인데?"라고 꼬치꼬치 캐물으셨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집에 계셨거든요. "교회 이름이 뭐지?"라고 계속 물어보시는데, 반 아이들 시선이 저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정지 화면처럼 3초간 멈춰버린 듯했습니다. 정말 지옥 같았습니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겠네요. "교회가 없다"고 하면, "너희 아버지 노는구나"라고 생각할 것 같았습니다. 서서 답변하는 짧은 순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 몰려와서 "너희 아버지 목사라며? 교회는 어디야? 너희 교회 이름 뭐야?"라고 물어봤습니다. "방

이 교회"라고 얼버무렸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창문 너머로 교회 예배를 훔쳐보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아버지, 뭐 하세요?"라고 물으니, "교회 예배드리는 거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교회가 없으니, 남의 교회 예배를 훔쳐보셨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께 "제가 돈 벌어서 교회 하나 세워 드릴게요"라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 돈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목회자 자녀로서, 교회에 대한 상처도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목회자 자녀들은 "어느 교회 다니세요?"라는 질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그맨 시절, "요즘 어디 방송에 나오세요?"라는 질문도 상처가 되었습니다. 요즘도 "TV에 왜 안 보이세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질문하는 사람들은 TV를 안 보면서, 묻지도 않습니다. 설명해도 잘 모르고요. 이런 질문들이 제 안에 결핍으로 남아있습니다. 가난한 친구들에게 빵과 우유를 나눠주는 행사도 상처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친구들에게 빵과 우유를 선별적으로 나눠주는 행사라니, 차별적인 처사였네요. 빵과 우유를 나눠주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가난의 기준이 뭘까요? 환경 조사서를 봤는지, 수입 정도를 조사했는지, 아니면 그냥 얼굴만 보고 가난한 학생을 선별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저에게 "너, 빵하고 우유 당첨됐다!"라고 마치 훈장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게 감사할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가난하다고 낙인찍은 것 아닌가?'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습니다. 집에 빵과 우유를 던져버리며 "왜 우리만 이렇게 살아야 하냐? 거지냐?"라고 울부짖었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늦둥이로 낳아 잘 키우려고 노력하셨지만, 가난한 현실이 너무 싫었습니다.

어린 시절이 힘드셨던 만큼, 사건 사고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오늘 새롭게하소서에서 처음 고백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오늘 처음 하게 되네요. 저는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네 살 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수술실에 누워있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옆집에 놀러 갔다가 개에게 물렸다고 합니다.

네 살 때 개에게 물렸다고요? 옆집에서 도사견을 키웠다고 합니다. 개와 평소에도 잘 놀았는데, 어느 날 개가 밥을 먹고 있길래, 꼬리를 잡아당겼습니다. 어린 마음에 친근감을 표시하려고 꼬리를 잡았는데, 개가 위협을 느꼈는지 제 얼굴을 물어뜯었습니다. 개의 공격성은 순식간이었죠. 얼굴을 물어뜯겨, 반쪽이 날아갔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거꾸로 들었는데, 피를 한 통 정도 쏟았다고 합니다. 피투성이가 된 저를 안고 병원에 갔는데, 너무 어려서 마취도 하지 않고 생살을 꿰맸다고 합니다. 남자 네 명이 저를 붙잡고, 의사가 생살을 꿰맸습니다. 얼굴 반쪽이 뜯겨나가, 안에 있던 이빨이 목구멍에 걸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제 안에 분노가 많았던 이유가, 어린 시절 마취 없이 생살을 꿰매는 고통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트라우마로 작용해서 분노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 된 것입니다.

네 살 때 개에게 물린 사고가 트라우마로 남으셨군요. 개에게 물린 상처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위축되기도 했습니다. 개에게 물린 이야기를 숨겼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과격하거나 지나친 행동을 하면, "개 물린 트라우마 때문에 저러는 거야"라고 손가락질 받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개에게 물린 상처가 콤플렉스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 얼굴에 큰 흉터가 있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도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죽을 고비를 또 넘긴 적이 있습니다.

또 죽을 고비를 넘기셨다고요? 아홉 살 때 동생을 심하게 때렸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동생과 분리시키려고, 시골 할머니 댁에 보냈습니다. 저도 스트레스와 분노가 많아서 동생을 자주 때렸습니다. 나중에 동생이 울면서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그리고 형"이라고 말했습니다. 동생 말을 듣고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때린 사람은 기억 못 하지만, 맞은 사람은 기억한다고 하죠. 어머니가 저를 시골에 보내면서 "금방 데리러 올 테니,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조용히 있어라"라고 하셨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나를 버렸구나'라는 생각에, 엄마에 대한 원망이 컸습니다. 열 살 무렵, 길거리를 헤매며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버려졌다, 죽어야겠다, 살아야 할 존재 가치가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한겨울에 집을 나와, 하염없이 길을 걸었습니다. 두세 시간 정도 걸었을까요? 죽고 싶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걷다 보면 죽겠지'라고 생각하며 걷다가, 갑자기 섬뜩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충청도 지역에 한센병 환자촌이 많았는데, '한센병 환자들이 어린아이를 해친다'는 괴소문이 떠돌았습니다. 그 괴담이 떠오르면서, '돌아가야겠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다시 할머니 댁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침도 못 먹고 집을 나섰기에 배가 너무 고팠습니다. 부엌에 들어가니, 고구마가 있었습니다. 고구마를 허겁지겁 먹다가, 탈이 났습니다. 화장실에 가야 했는데, 시골 재래식 화장실은 겨울에는 너무 추웠습니다. 변기에 앉았는데, 어린아이라 몸이 작아서 미끄러져 변기에 빠졌습니다. 깊이가 6~7m 되는 깊은 변기에 빠져,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다행히 할머니가 제 목소리를 듣고,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올려 주셨습니다. 만약 여름이었다면, 변기 속에서 질식사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아찔했습니다. 적절한 때에, 하나님이 할머니를 통해 저를 살리셨다고 생각합니다.

변기통에 빠지셨다니, 정말 끔찍한 경험을 하셨네요. 변기에 빠진 후, 온몸에 독이 올랐다고 합니다. 당시 민간요법으로, 독이 오르면 떡을 해서 동네에 돌렸다고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왜 떡을 해서 동네에 돌려야 하지? 창피하게'라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떡을 돌리면서, 동네 사람들이 저를 보고 "아이고, 고생했다. 변기에 빠졌다면서? 죽을 뻔했네. 살아서 다행이다. 떡 잘 먹고 너 잘 되라고 기도해 줄게"라고 덕담을 해주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따뜻한 위로 덕분에, 변기에 빠졌다는 수치심과 창피함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경험으로 바뀌었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읽다가 깨달았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만나를 똥떡으로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애굽에서 먹던 배설물 같은 수치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먹으면서 씻어낸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만나는 곧 똥떡이다, 저만의 독특한 해석입니다.

어린 시절 학우들에게 느꼈던 거절감, 부모님에 대한 분노 등이 사춘기,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을 텐데요. 네, 당연히 이어졌습니다. 늘 거절에 대한 두려움, 열등감, 낮은 자존감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감정들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저를 내세울 것이 없으니, 겉으로 까불거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미디언 흉내를 내고, 소풍 가면 인기를 얻으려고 애썼지만, 내면은 늘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했습니다.

선배님 정도 되는 베테랑 개그맨도 아이디어 회의에서 아이디어가 자주 거절당하나요? 물론입니다. 저는 카메라 밖에서는 웃긴데, 카메라 안에만 들어가면 긴장하는 울렁증 환자였습니다. PD가 "소주 마시고 와서 녹화하라"고 해서, 술 마시고 녹화했다가 방송사고를 낸 적도 있습니다. 정말 안 되더라고요. 가장 슬펐던 것은, 선배 개그맨들이 모여 있을 때, "쟤는 기회를 줘도 안 뜨는 개그맨"이라고 손가락질당했던 것입니다. 선배가 맥줏집에서 술 마시다가 저를 불렀습니다. "영만아, PD한테 잘 보이고 아이디어도 좀 내라"고 하더니, 술 한 잔 마시고 저를 쏘아보며 "넌 안 돼, 임마. 너는 비호감이야"라고 면박을 줬습니다. 자가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PD님이야말로 비호감"이라고 농담으로 넘길 수 있겠지만, 저는 그 말을 화살처럼 정통으로 맞았습니다. 화살을 맞을 때보다 화살을 뺄 때 더 아프다고 하죠. 그 화살을 빼낼 곳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 아홉 살, 열 살 때 죽으려고 길거리를 헤매던 때처럼, 밤새도록 정처 없이 걸었습니다. 밤은 저에게 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뒤집히는 듯했습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 개그인데, 비호감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방송에 나갈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새벽 1시까지 길거리를 헤매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신고 있던 신발이 천근 무게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PD는 그냥 재미있으라고 던진 말이었을 텐데, 저는 그 말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PD는 귀엽고 예쁜 후배에게는 "너 귀엽다"라고 칭찬했을 것입니다. 별 뜻 없이 던진 말이었겠지만, 저는 어린 시절부터 쌓여온 낮은 자존감 때문에, PD의 말에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결국 방송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까지 하셨다고요. 맞습니다. 유학도 준비했습니다. 외국으로 떠날까 고민했습니다. 큰돈은 없었지만, 생활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정도는 되었기에, 방송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프로그램이 폭소클럽이었습니다. 올빰TV라는 코너에서 '돌

선생' 캐릭터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당시 탈모가 시작되어 머리를 밀게 되면서, EBS 강사 흉내를 내게 되었고, 마지막 작품으로 '돌 선생'을 선보이고 방송을 그만두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코미디언이 아니다'라고 결심하는 순간, 비참한 심정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내려놓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영원히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왜 저를 연단의 도구로 사용하셨는지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저는 개그를 할 때 혼자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꽁트 코미디도 혼자 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앵커 역할, '랄랄라 선생님', '돌 선생' 등 혼자 하는 개그를 많이 했습니다. 목사님은 강대상에서 혼자 설교해야 합니다. 둘이 콤비로 설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혼자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혼자 하는 개그를 즐겼던 경험이, 강단에서 설교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정범균 씨처럼, 웃기는 동료들을 옆에 두고 편하게 웃기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죠. 정범균 씨는 웃기는 동료들을 깔아놓고, 자신은 가만히 있어도 동료들이 알아서 웃겨줍니다. 최영만 선배님 같은 스타일은, 혼자 모든 것을 다 해야 합니다. 폭죽처럼 혼자 터뜨리고 끝내야 합니다. 정범균 씨는 곰과 같습니다. 곰은 재주를 부리고, 사육사는 옆에서 먹이만 줍니다. 곰이 빛나려면 밤이 필요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방송을 그만두고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리셨겠네요. 젊은 시절부터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았습니다. 늘 새벽 4시가 넘어야 잠들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아 벽을 주먹으로 치면서 겨우 잠들었습니다. 분노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우울증인지 몰랐습니다. 신경정신과에 가는 것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신경정신과에 다닌다는 기록이 남으면 불이익을 받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힘들 때마다 술에 의존했습니다.

술에 많이 의존하셨다고요. 주량도 늘었을 텐데요.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저희 집안에는 술 마시는 사람이 없는데, 저는 좌절할 때마다 술을 마셨습니다. 술 마시면 기분 좋을 때는 괜찮은데, 상처를 받을 때는 폭발하게 됩니다. 술에 얽힌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방송을 거의 안 하고 집에만 있으면서, 뭘 해야 할지 몰라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책에 몰입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 10시간씩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 2시까지 책을 쓰다가, 너무 지쳐서 잠깐 인터넷을 봤습니다. 후배 개그맨 기사가 떴습니다. 후배 개그맨이 건물주가 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엄청난 계약 조건에, 출연료가 얼마고, 자동차가 몇 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기사를 보는 순간, 박탈감이 밀려왔습니다. '책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렇게 책 써서 뭘 하겠다는 거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가능성도 희박한데...' 좌절감이 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귀가 제 생각 속에 들어와서 좌절감을 준 것 같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었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 인생은 안 되는 일이 더 많구나.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지 않는구나.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 훌륭한 목사님, 주영훈 MC, 기부 천사 등 다른 사람들은 잘나가는 모습만 보여주는데, 왜 나는 이 모양일까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정범균 씨 건물주 기사를 보면서, '어제까지 13,000원 없어서 돈 빌리던 후배가 100억 건물주가 되다니, 차가 다섯 대나 된다니,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한 걸까?' 질투심과 시기심에 휩싸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좋게 해석됩니다. 마귀가 제 마음속에 들어와서 좌절감을 준 것이라고요.

극심한 박탈감에 괴로워하시던 중에, 해장국집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셨죠? 정말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살던 집, 제가 타던 차,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배가 고픕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배는 고팠습니다. '그래, 힘을 내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밥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목동, 화곡동에 유명한 뼈해장국집이 있습니다. 새벽 시간인데도, 술 취한 손님들이 가득했습니다. 해장국집에 갔는데, 자리가 없어서 합석해야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 앞에 앉아 뼈해장국을 먹는데, 혹시라도 저를 알아볼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밥만 먹었습니다. 옆에 앉은 사람이 저를 툭 치더니, "야, 모자 올려 봐"라고 했습니다. 모자를 벗으니, "야, 이 새끼야! 똑바로 살아, 이 새끼야!"라고 소리쳤습니다. 술 취한 사람의 훈계였지만, 그 말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좌절감에 휩싸여 의욕을 잃었던 저에게, 술 취한 사람의 입을 통해 "똑바로 살아"라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된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은 똑바로 살지도 못하면서, 저에게 똑바로 살라고 훈계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했지만, 그 음성이 제 마음에 깊이 꽂혔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술 취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구나.' 예전에 당나귀가 발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처럼, 술 취한 사람을 통해 저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좌절감을 극복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 좌절되고 힘들 때마다 그 해장국집에 가고 싶어집니다. 어떤 술 취한 사람이 또 저에게 "설교 똑바로 해"라고 훈계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이제 사라지셨나요? 나이가 들어 아버지가 되어보니,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잘못하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민 가서 사기당한 것은 아버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사기를 당해보니, 아버지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성경에 해박하시고, 기도 은사도 있으시고, 신학적으로도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시는 모습이 이해가 안 갔습니다. '왜 아버지는 능력이 있으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고 집에서 뒹굴고 계실까?' 술 취해 집에 들어와 아버지께 "아버지, 하나님은 살아계세요? 왜 집에만 계세요? 뭐라도 하셔야죠!"라고 함부로 말했던 것을 후회합니다. 방송에서 잘리고 집에만 있어 보니, 아버지 심정을 알 것 같았습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무대가 없는 고통, 마이크를 잡고 싶은데 기회가 없는 절망감. 일을 하고 싶은데, 일을 못 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지금도 많은 목사님들이 좌절하고 아파하며 골방에 갇혀 계실 텐데, 그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 하나님은 살아계세요? 왜 골방에 앉아서 성경만 읽으세요? 쌀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 뭐라도 하셔야죠!"라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겪는 고난의 깊이를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에 공감하는 목회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가족들도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텐데요.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수입이 없어 하숙집을 운영했습니다. 방을 내주고, 저희 가족은 좁은 방에서 생활했습니다. 힘든 환경 속에서 점점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데, 하나님을 믿는데, 왜 우리 집만 점점 힘들어질까? 남들은 교회 부흥한다고, 아버지가 잘나간다고 하는데...'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임종 때, 웃고 계시는 아버지 시신을 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삶인가? 왜 웃고 계시지? 슬퍼해야 내가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왜 웃고 계시지?' 아버지의 삶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술을 더 마시고, 타락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더 많이 했습니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더 많이 마셨습니다. 술 마시면 더 비관적인 생각만 들었습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자살 충동이었습니다. 자살 충동을 자주 느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새벽 4시 반에 술 취해 집에 들어오는데, 어머니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잘 갔다 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해도 소용없잖아요. 엄마는 매일 새벽기도 가는데, 나는 새벽 4시 반에 술 취해서 들어오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나를 술에서 끊게 해줘야지, 뭐라도 달라져야 할 텐데, 왜 기도해요? 안 해도 돼요. 나는 늘 똑같을 테니까.' 정말 못된 아들이었습니다.

늘 우울 속에 빠져 살 때, 사모님을 만나셨다고요.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아내와는 오늘이 교회에서 만났습니다.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던 교회입니다. 아내를 처음 본 곳은 결혼식장, 장례식장 같은 곳이었습니다. '참 예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내는 주영훈 씨처럼 푸근하고, 정범균 씨처럼 순수한 스타일을 좋아하고, 저처럼 머리 없고, 말 많은 스타일을 싫어합니다. 제가 딱 싫어하는 스타일이었죠. 개그계 후배였으니까요.

개그계 후배와 결혼하셨군요. 개그 할 때 만나셨나요? 개그 할 때 만난 것은 아니고, 얼굴만 알고 지냈습니다. 개그맨인 줄 몰랐습니다. 얼굴만 보고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오늘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알고, 저도 다니던 교회를 잠시 배반하고 오늘이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사모님 때문에 교회를 옮긴 것이죠. 예식장에서 처음 보고 반했습니다. 후배 결혼식장에서 아내를 봤는데, '저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아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만 있었습니다. 예쁘고 귀여워서, 연 자매님처럼 예뻐서, 그냥 그런 마음을 품었습니다. 아내는 저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못된 남자 1순위가 저였을 것입니다. 인상도 날카롭고, 까칠해 보였으니까요. 후배 입장에서는 선배이고, 게다가 호감형도 아니었으니, 당연히 저를 피했을 것입니다.

사모님이 원래 결혼 생각이 없으셨다고요? 아내는 강남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했습니다. 만두도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는 수밖에요.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고, 손님도 데려갔습니다. 거의 영업부장처럼 레스토랑 일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여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원래 결혼 계획도 있었는데, 저 때문에 독신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저 때문에 독신이 된 것이죠. 계속 아내 레스토랑에 드나들었는데, 아내가 갑상선 저하증에 걸렸습니다. 만사가 귀찮아진 것이죠. 돈을 벌어도 재미없고, 이상한 남자가 매일 찾아와서 "결혼하자, 인생 별거 없다, 다 똑같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둥 헛소리만 하니, 더 짜증이 났을 것입니다. 갑상선 저하증 특징 중 하나가 무기력감입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집니다. 제가 하도 "결혼하자"고 졸라대니, 나중에는 "그래, 그렇게 하자"라고 승낙했습니다. 결혼하게 되었는데, 신혼여행 가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이게 뭐지? 이게 현실인가? 내가 원했던 결혼인가? 이 남자가 내 남편인가? 내가 왜 이렇게 예쁘게 태어났는데, 이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거지?'라는 후회가 밀려왔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기도 응답일 수 있지만, 아내에게는 천벌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사모님이 결혼 후 힘든 시간을 보내셨겠네요. 아내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과 결혼해서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 다른 건 다 빵점인데, 당신과 결혼해서 진짜 하나님을 만났다." 그 말이 정말 중요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가고, 부업하다가 망하고, 아내가 돈 때문에 힘들어하고, 남편은 형편없고, 아내는 돈 때문에 시험에 들고, 각방을 쓰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내가 돈을 벌려고 사업을 기획했는데, 투자 사기를 당했습니다. 남편 사기당한 것도 힘든데, 아내까지 사기를 당하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습니다. 아내가 투자 사기로 날린 돈이 엄청났습니다. 자기 돈뿐만 아니라, 친척 돈까지 빌려서 투자했는데, 몽땅 날린 것입니다. 지금 시세로 목동 아파트 한 채 값 정도 되는 큰돈이었습니다. 사기당한 후, 아내는 기도원

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6시에 기도원에 가서 밤늦게 돌아오고, 1년 동안 기도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무사기 투자 사기, 아파트 경매 투자 사기, 기획부동산 사기 등 온갖 사기를 다 당했습니다. 아내가 1년 동안 기도원 다니면서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습니다. 저는 아내 얼굴 보기도 싫었습니다. '내가 망한 것도 봤으면서, 또 사기당하다니, 돈 때문에 시험 들다니, 쯧쯧' 혀를 차면서 아내를 비난했습니다. 부부는 각방을 쓰면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사모님이 기도원에서 하나님을 만나셨다고요. 아내가 기도원에서 1년 동안 기도하다가, 삶의 의미를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졌습니다. 차에서 잠깐 쉬는데, 창문 틈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고 합니다. 3초 동안 환상 속에서 천국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문틈으로 하나님 나라를 잠깐 엿본 것입니다. 환상 속에서 "하나님,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나요?"라고 질문했고, 그 후부터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짧게 이야기했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빚 때문에, 사기 때문에,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다는 것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내는 지금도 "내 돈은 괜찮은데, 빌린 돈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골프장도 권리금을 주고 인수했는데, 4년 운영하다가 10억 원을 날렸습니다. 아내도 투자 사기로 큰돈을 잃었고요. 저는 1년에 한 번씩 사기를 당했습니다. 주식 투자 사기, 유령 회사 투자 사기 등 온갖 사기를 다 당했습니다.

주식 투자 사기는 어떻게 당하신 건가요? 가수 매니저 형님이 있었습니다. 친한 작가 형님 동생이었는데, "대기업 주식을 하나 사두면, 3년 안에 큰돈을 벌 수 있다"고 꼬드겼습니다. 돈을 송금했는데, 연락이 끊기고 회사는 유령 회사였습니다. 승용차 한 대 값 정도 되는 돈을 날렸습니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어머니 장례식장에 매니저 형님이 찾아왔습니다. 돈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얼굴은 비쳤습니다. 저를 툭 치면서 위로하는 척하는데, 손목에 금시계가 번쩍였습니다. '저 시계, 내 돈으로 산 거 아니야?' 짝퉁 시계였습니다. 사기꾼들은 다 짝퉁을 좋아합니다. 제가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도하지 말고, 네 안에 진짜를 가져라." 내 안에 기쁨이 넘쳐나면, 주변 사람들이 "너 도대체 왜 그렇게 기쁘냐?"고 물어봅니다. "안 가르쳐줄 거야"라고 튕기면, 교회에 찾아옵니다. 전도를 반대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먼저 전도부터 하려고 합니다. 네 삶은 변하지 않았는데, 입으로만 전도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내 안에 진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사기도 여러 번 당하시고, 아내도 사기당하고, 동생까지 사기당했다니,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셨네요. 보통 이 정도 고난을 겪으면 가정이 파탄 날 수도 있는데, 신앙으로 잘 극복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 가족은 엄마까지 사기를 당했습니다. 이제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겼습니다. 대인기피증도 생겼습니다. 사람을 잘 안 만나려고 합니다. 법원에도 자주 가셨을 것 같은데요?

법원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사기를 계속 당하다 보니, 드디어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저에게 "당신하고 살아도 희망이 없다"고 절망했습니다. 저도 인정했습니다. "헤어지는 게 낫겠다. 우리는 애초에 잘못된 만남이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갑상선 저하증 때문에 어쩌다 보니 결혼한 것 아니냐. 맨 정신에 다시 물어봐서, 그래도 결혼하겠다고 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자"라고 말했습니다. 갑상선 저하증 환자는 함부로 남자 만나면 안 된다는 농담도 하면서, 결국 크게 싸웠습니다. 부부 싸움은 결국 돈 문제로 귀결됩니다. "생활비 어떡할 거야? 집 내놨는데 어떡할 거야?" 싸우다 싸우다, "그럼 이혼하자!"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목동에 살 때라, 법원이 가까웠습니다. "법원 가자!"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어디서 많이 뵌 것 같은데..." 얼굴이 알려진 개그맨이었으니, 변호사도 저를 알아봤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런 일도 겪네요." 이혼 법률 사무소에서 이혼 서류를 작성했습니다.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 가장 큰 문제는 돈 문제. 이혼 서류를 다 쓰고, 도장을 찍으려고 하는데, 변호사가 "인감 가져오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아니요. 이혼하는데 누가 인감을 가져와요? 홧김에 이혼하러 왔는데." 변호사가 인감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인감 집에 있는데, 지금 가지러 가겠다"고 말하고 아내와 법원 밖으로 나왔습니다. "인감 어디 뒀어?" 인감 때문에 또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안방에 있어, 네 방에 있어, 당신이 알지, 내가 알아?" 티격태격 싸우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졌습니다. 말장난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별 인감 때문에 이혼 못 하는 거야?" 아내가 피식 웃더니, 화해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만약 인감이 있었더라면, 다음 날 이혼 기사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최형만, 김OO 씨와 이혼, 결별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제 얼굴을 보면, 성격 차이 때문이라고 기사가 났을 수도 있겠네요.

이혼 위기를 겪고, 지금은 아내 분이 많이 기도해주신다고요. 아내는 기도와 환상 체험을 통해 갑상선 저하증을 치유받았습니다. 기도 중에 뜨거운 물이 쏟아져 온몸을 감싸는 환상을 보았고, 다음 날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놀랐다고 합니다. "기도하다 나았다"고 했더니, 의사가 "하나님은 살아계시네"라고 인정했다고 합니다. 갑상선 저하증은 완치되었지만, 갑상선 다른 질병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빚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근 뉴스에 보도된 사건들을 보면, 주변 지인들 중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이 많은데, 100% 빚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제가 아는 치과의사도 빚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빚, 죄, 죽음은 삼위일체처럼 붙어 다닙니다. 빚은 죽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가정 파탄뿐만 아니라, 개인 파산, 자살까지 초래합니다. 저는 빚 때문에 고생한 경험 덕분에, 빚을 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누가 돈 빌려달라고 해도 절대 안 빌려줍니다. 사람들이 저를 피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전화번호도 바꾸고 잠적해야 할까요?

힘든 시간을 보내시다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목회자 아들로 살면서, 인지 부조화를 느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과 세상이 맞지 않으니, 늘 양가감정을 느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내면에는 늑대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짜 신앙인이 되고 싶은데,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모습이 너무 싫었습니다. 존경하는 이재철 목사님 교회로 옮겼습니다. 백주년기념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폭소클럽을 그만두고, 40대 초반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공연을 하자니 찾는 사람이 없고, 강연을 하자니 강연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개그를 하자니 불러주는 곳도 없었습니다. 골프장 행사를 많이 했지만, 골프 치는 것도 싫증이 났습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동양철학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동양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철학 강의를 하면서 인생을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인생의 방황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이재철 담임목사님과 면담을 했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면담하면서, 목사님이 "동양철학보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는 안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 하라는 것이 아니라, 동양철학보다 신학이 더 맞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의 권유였기에, "알겠습니다. 신학대학원에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아들이 네 명이나 있는데, 아무도 신학을 공부하지 않는데, 왜 저에게 신학대학원을 권유하셨을까요? 목사님은 아들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기에, 저에게 신학대학원을 권유하신 것 같습니다. "너 시작해!"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특별한 소명 없이, 가볍게 목사가 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민하면 신학대학원에 못 갑니다. 단순해야 신학대학원에 갈 수 있습니다. 신학대학원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갔습니다. 신학대학원에서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 삶이 얼마나 쓰레기 같았는지' 깨달았습니다. 신학대학원에서 제대로 된 목사님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함부로 목사님들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된 목사님들이 훨씬 많습니다. 제대로 된 개그맨이 훨씬 많고, 제대로 된 신앙인이 훨씬 많듯이 말입니다. 신학대학원에서 목사님들의 삶을 통해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갓 전도사가 된 분과 방을 같이 썼는데, 법대 4년 수석 졸업생이었습니다. 집안은 불교 집안이라, 학비를 지원해주지 않아 밥을 굶는다고 했습니다. "왜 밥을 굶냐?"고 물으니, 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당시 학식 가격이 2,000원이었는데, 2,000원이 없어서 굶는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몰래 한 달치 학식비를 챙겨주기도 했습니다. 신학대학원에서 간증 집회를 자주 했습니다. "어떻게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했냐?"는 질문에, 저는 간증할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냥 이재철 목사님이 신학대학원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다른 신학생들은 삶의 굴곡, 고난 속에서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법고시 두 번 떨어지고, 집에서 버림받고,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다가 신학대학원에 온 사람, 수면제 수십 알을 모아 자살 시도했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학대학원에 온 사람 등 다양한 간증을 들으면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나는 너무 쉽게 신학대학원에 왔구나. 다른 사람들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삶의 밑바닥까지 경험하고 왔는데, 나는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을 했구나.' 신학대학원에서 백혈병 걸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전도사님 간증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무균실에서 6개월 동안 사경을 헤매던 전도사님은, 매일 아침마다 하얀 천에 덮여 나가는 환자들을 보면서 죽음을 눈앞에서 경험했다고 합니다. '나는 다음 차례인가?'라는 두려움에 떨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 양팔을 벌려 안아주시며 "내가 너를 사용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대학원에 왔다는 간증을 들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백혈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전도사님이, 지금은 큰 교회 목사가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작은 교회에서 묵묵히 기도하며 목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화려하고 멋있는 목사, 멘트가 화려한 목사를 높이 평가하지만, 백혈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전도사님처럼, 죽음을 경험한 사람 앞에서는 세상적인 화려함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돈, 인기, 명예,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코미디언 자니 윤 선생님은, 천재적인 유머 감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줬지만, 말년에 요양원에서 치매와 파킨슨병으로 고통받다가 돌아가셨습니다. 3분짜리 자니 윤 선생님 요양원 영상을 보고 밤새도록 펑펑 울었습니다. 인생의 끝이 요양원이라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살아난다면, 이전처럼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배삼룡 선생님, 구봉서 선생님처럼 화려한 인기를 누렸던 코미디언들의 말년이 비참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화려한 인기를 누렸지만, 말년에는 자기 이름도 잊어버리고,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조차 망각한 채 고통 속에 죽어갔습니다. 자니 윤 선생님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이름을 불렀을까요? 그것마저 잊어버린 채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신학대학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신학생이 저에게 "아버지가 뭐 하시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이시다"라고 답했더니, "어느 교회 목사님이시냐?"고 물었습니다. "경북 안동에서 이름도 없이, 빚만 지고, 눈물 흘리면서, 월급 30만 원 받으면서 목회하신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신학생이 "목사님 아버님 보니, 너무 부끄럽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신학생이 저를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신학대학원에서 엄청난 은혜를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신학대학원에서 진정한 목회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신 거네요. 아직도 목회자가 된 것을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 목회자가 맞는 걸까?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죄투성이인데...' 오늘도 여전히 부족함을 느낍니다. 목회자가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오늘도 여전히 빚진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사용하시는구나'라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훌륭한 목사가 와서 간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오늘도 갈등하고, 불평하고, 불만

1. 한 고대 문서 이야기

2. 너무나도 중요한 소식 (불편한 진실)

3. 당신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유

4. 신(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5. 신의 증거(연역적 추론)

6. 신의 증거(귀납적 증거)

7. 신의 증거(현실적인 증거)

8.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9. 성경의 사실성

10. 압도적으로 높은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12.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

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ChatGPT, 유튜브 프리미엄, 넷플릭스 구독료 80% 할인 받는 법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