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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아에서 멕시코 선교사로, 카일 윌슨의 감동 실화

요약

외로운 입양아, 멕시코 고아들의 든든한 부모로

외로운 입양아에서 든든한 입양 부모로 발돋움하기: 워싱턴한인교회 카일 윌슨 선교사의 감동적인 여정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 주영훈입니다. 안녕하세요, 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정수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기쁨이 없을 때, 남을 돕게 되면 무엇이 감사한 건지 깨닫게 된다고 하죠. 맞습니다. 오늘 저희가 초대한 특별한 손님은 바로 입양 후 학대를 겪고 방황했지만, 굳건히 일어서서 결국 타인을 돕는 삶을 선택하신 분입니다. 이 분의 드라마 같은 인생 이야기는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데요, 어서 모셔보도록 하겠습니다. 멕시코에서 오신 카일 윌슨 선교사님,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선교사님! 정말 멕시코에서 바로 오신 것 같은 분위기인데요? 네, 멕시코에서 왔습니다. 멕시코 목회자들과 함께 왔습니다. 왠지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뵌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데요? 혹시 드라마 촬영도 하시는 건 아니시죠? (웃음) 있을 수도 있겠죠. (웃음) 선교사님은 미국에서 계속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한국말은 괜찮으신가요? 네, 한국 피가 흐르지만, 한국말을 20대에 배웠습니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아, 훌륭하십니다. 저희 프로그램에는 영어 잘하는 두 분이 계시니, 혹시라도 한국말이 어려우시면 영어로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선교사님께서는 멕시코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계신다고 소개를 받았는데요, 멕시코 어디에서 사역하시나요? 멕시코, 특히 한인 후예들이 1905년도에 멕시코로 건너가 힘든 노동을 했던 유카탄 주에 있습니다. 그곳의 칼(Cal)이라는 마을과 산 안토니오(San Antonio)라는 두 마을에서 삶을 나누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샌안토니오는 많이 들어본 지명인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가요? 저희는 사역이라는 단어보다는 '삶을 함께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곧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사역 개념은 너무 좁게 느껴집니다. 아이들의 문제는 정말 다양하잖아요. 정말 아빠가 아이를 키우듯이,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기도 안에서 함께하며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하시는군요.

오프닝에서 선교사님께서 어린 시절 미국으로 입양되셨다고 간략하게 소개했는데요, 자세한 입양 스토리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제 입양 스토리는 다른 고아 출신 아이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아버님은 서울대학교, 어머님은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신 엘리트셨습니다. 결혼 후 제가 태어나자마자 두 분은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의 체면 문화와 여러 상황 때문에, 이혼 사실을 숨기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시 집안 어른들이 이혼은 집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 아이를 지우거나 숨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서류상으로 저를 고아로 만들어 미국으로 입양 보내셨습니다. 여섯 살 무렵에 미국으로 입양되게 되었습니다.

미국, 어디로 입양되셨나요? 처음에는 뉴욕에서 자랐습니다. 뉴욕 롱아일랜드라는 곳인데, 좋은 동네로 기억합니다. 롱아일랜드는 부촌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부촌도 있고 다양합니다. 저희 가족은 중간층 정도인 센트럴 아이슬립(Central Islip)이라는 동네에 살았습니다. 양아버지는 선생님이셨습니다. 일곱 형제와 함께 자랐는데, 특이하게도 모두 입양아였습니다. 양부모님께서 남매를 입양하신 거죠.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백인 어머니, 백인 아버지셨고, 일곱 형제 중 세 명은 백인, 네 명은 한국인이었습니다. 저는 그 중간에 있었고요. 남매인데 딸도 있고 아들도 있었나요? 네, 크리스, 키, 캐리, 카일, 코리, 키미, 케시, 이렇게 'K' 돌림자를 사용했습니다. 미국에서도 가끔 돌림자를 쓰나요? 특이하게 저희 집은 그렇게 돌림자를 사용했습니다. 선교사님은 몇 번째였나요? 저는 네 번째, 딱 중간입니다. 중간은 왠지 어정쩡한 위치일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안 좋은 중간이죠. (웃음) 형들은 이미 커서 자기 일로 바쁘고, 밑에 동생들은 너무 어려서 제가 중간에서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청소부터 시작해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죠. 어머니, 즉 양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양부모님 두 분 다 좋은 분들이셨지만, 특히 어머님은 아기를 갖지 못하셨습니다. 갱년기를 심하게 겪으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갱년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중학교 때쯤, 어머니의 호르몬 변화가 극심해지면서 예측 불가능한 감정 기복을 보이셨습니다. 평소에는 다정하시다가도 갑자기 괴물처럼 돌변하셔서 저희를 공포에 떨게 하셨습니다. 학대, 폭언, 폭력 등 힘든 시기를 몇 년 동안 겪었습니다. 1980년대 뉴욕에서는 호르몬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요즘은 병원에 가서 상담만 받아도 되는 문제였지만, 당시 여성들은 갱년기 증상을 호소하면 정신병으로 오인 받아 강제로 정신병원에 끌려가 전기 충격 치료와 같은 끔찍한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 어머니는 혹시라도 정신병원에 끌려갈까 봐 두려워 갱년기 증상을 숨기셨고, 저희는 어머니의 학대를 속으로 감내해야 했습니다. 아버지, 즉 양아버지는 어떠셨나요? 어머니가 무서우셨겠네요. 네, 아버지는 어머니를 무서워하셨습니다. 어머니를 피하려고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지셨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투잡, 쓰리잡을 뛰시면서 돈을 버셨습니다. 저희 일곱 형제를 부양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을 겁니다. 일곱 명이나 입양할 정도면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크셨을 텐데요. 양부모님은 마음은 따뜻하신 분들이었습니다. 갱년기 시기를 제외하면 정말 좋은 분들이셨습니다. 다만 제가 사춘기를 겪을 때 어머니의 갱년기 학대가 심해져서, 그때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사춘기 자녀와 갱년기 어머니가 충돌하면 누가 이길까요? 갱년기 어머니가 훨씬 강하죠. (웃음) 저희 어머니는 정말 힘이 세셨습니다. 청소를 제대로 안 하면 해병대 훈련을 방불케 하는 강도 높은 체벌이 가해졌습니다. 먼지 한 톨이라도 보이면 바로 뒤집어엎으셨고, 심하게 맞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아동 체벌은 불법인데, 신고는 하지 않으셨나요? 학대받는 아이들은 오히려 공포 때문에 신고를 잘 못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학대받지 않는 아이들이나 신고하지, 진정으로 학대 속에 고통받는 아이들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합니다. 저희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아이들'처럼 살았습니다. 진실로 학대 속에 사는 아이들은 밖으로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습니다.

어린 시절 피부색이 다르고, 양부모님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정체성 혼란과 방황을 겪으셨을 것 같습니다. 입양아들이 흔히 겪는 갈등인데, 학교생활은 어떠셨나요? 처음에는 제가 백인인 줄 알았습니다. 스스로 백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인 가정에서 자랐고, 동네에서도 좋은 가정으로 인정받았고,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했으니까요. 13살 때 댄스 파티에 갔는데, 친구들은 모두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저만 여자친구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잘생겼다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웃음) 샤워하고 거울을 보니, 동양인, 눈이 작은 아이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제가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하게 된 거죠. 예민한 시기에 어머니의 학대까지 겹치면서,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집에 되도록 늦게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집에 가면 어머니 눈치를 보며 방에 숨어 지냈습니다. 어머니 발소리만 들려도 방에 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한번은 차를 제대로 닦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하게 혼났습니다. 주말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렌트비도 보탰는데… 저도 반항심이 생겨 일부러 더 삐뚤어지게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일로 엄청나게 맞았습니다. 15살 때,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지금과 달리, 친구 집이나 선생님 집에서 며칠씩 머무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법적인 제약도 크지 않았고요. 친구 집에서 두 달, 선생님 집에서 두 달 정도 번갈아 가며 지냈습니다. 오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친구 집이나 공원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했습니다. 노숙 생활을 한 거죠. 한국에 오면 날씬한 아가씨들이 다이어트한다고 새 모이만큼만 먹고 음식을 버리잖아요. 그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려진 음식을 먹기도 했습니다. 정말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학교는 꾸준히 다니셨나 봐요. 학교는 되도록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피곤해서 학교에 갔다가 조퇴하는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감사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출하기 전까지는 학교에서 꽤 인정받는 학생이었습니다. 미국 학교에서 한국 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 편이라 선생님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고, 운동도 잘해서 학교에서 꽤 유명했습니다. 학교에 가면 그래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가출 후 고모님께서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친고모님, 즉 친아버지의 여동생 분이셨습니다. 제가 가출했다는 소식이 친척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고모님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입양 간 조카를 친고모님이 찾아오신 거군요! 부모님은, 즉 친부모님은 나름대로의 상처 때문에 저를 찾지 못하셨지만, 고모님은 계속 저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고모님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의사로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엘리트 집안이셨던 것 같습니다.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찾으셨나요? 능력 있는 집안이라서인지, 양부모님께 연락이 닿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가출한 상태라는 것을 아시고, 고모님께 연락을 주셨습니다. 양부모님은 고모님께 친권을 넘겨주는 것에 동의하셨습니다. 가출 청소년 신분으로는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고모님께 가는 것이 제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고모님 댁으로 전학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양고모님께 입양된 것과 마찬가지네요. 네, 고모 아들이 된 셈이죠. 정말 신기하고 드라마 같은 만남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안정적으로 생활하셨던 것 같은데, 고모님 댁에 가서는 갑자기 삐뚤어지기 시작하셨다고요? 고모님 댁으로 이사 간 후, 롱아일랜드에서 버팔로(Buffalo)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뉴욕 주에 속해 있지만, 버팔로는 롱아일랜드와는 전혀 다른 시골 분위기의 도시였습니다. 특히 동양인이 거의 없는 지역이라, 인종차별을 처음 경험했습니다. 학교에 갔는데, 처음으로 '칭크(Chink)'라는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들었습니다. 책을 들고 지나가는데, 누군가 "칭크!"라고 소리쳤습니다. 다음 날에는 더 크게 "칭크!"라고 외치더군요. 참다못해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주먹으로 그 아이를 때려눕혔습니다. 그 일로 교장실에 불려가 '문제아'로 낙인찍혔습니다. 학교에서는 싸움 잘하는 '문제 학생'으로 찍힌 거죠. 고모님께 울면서 "차라리 길에서 노숙하는 게 낫겠다, 다시 롱아일랜드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소연했지만, 고모님은 저를 설득해 버팔로에 남게 했습니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는 여전히 '문제아'로 낙인찍혀 버렸습니다. 사람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저를 문제아로 대하니, 정말 문제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학교에서 싸움만 일삼고, 퇴학 위기에 놓이고… 고모님은 매주 학교에 불려와 훈계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2년을 문제아로 살다가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선교사님 스스로도 '쓰레기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네, 그렇게 되니 정말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구나'라는 자괴감에 휩싸였습니다. 자존감은 바닥까지 추락했고, 스스로를 '쓰레기' 취급하며 살았습니다. 감사하게도 고등학교 졸업에 필요한 과목은 거의 다 이수했지만, 영어 과목 하나 때문에 세 번이나 낙제했습니다. 간신히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어울렸던 친구들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버팔로에서는 이탈리아 갱단과 어울렸습니다. 싸움을 워낙 많이 하다 보니, 학교에서 '눈에 띄는 존재'가 된 거죠. 싸움 실력 덕분에 갱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먹깨나 쓰셨나 봐요? 네, 주먹 좀 썼습니다. (웃음) 덩치도 크시고, 주먹도 굵으시네요! 네, 덩치가 좀 큽니다. (웃음) 옛날에는 '한 방'이 있었죠. (웃음) 원래 살던 롱아일랜드와 새로 이사 간 버팔로의 분위기가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롱아일랜드는 유대인 친구들이 많고 학구적인 분위기였지만, 버팔로는 이탈리아 갱단과 어울리며 밤거리를 배회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주말마다 갱들과 어울려 싸움을 벌였습니다. 갱 친구들이 싸움을 걸면, 선교사님이 해결사 역할을 하신 거군요! 네, 갱 친구들이 시비를 걸면 제가 나서서 싸웠습니다. 그렇게 문제아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버팔로에 있었다면 정말 안 좋은 길로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신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나요? 네, 해병대 입대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체성을 찾고 싶었던 걸까요? 어쩌면 현실 도피였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투성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해병대에 지원했습니다. 한국 해병대처럼, 미국 해병대도 남자라면 한 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곳인가요? 네, 미국 해병대도 강인한 남자의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해병대 복무 후, 성인이 되셨는데, 이때쯤 되니 자신을 버린 친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셨나요? 고모님과 연락이 닿았으니, 친부모님 소식도 들을 수 있었을 텐데요. 고모님은 친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지내셨습니다. 정말 아침 드라마 같네요. 네, 친부모님의 아픈 과거 때문에 고모님은 아버지와 연락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혼 후부터 거의 연락을 끊고 지내셨다고 합니다. 해병대 복무 중에, 우연히 친아버지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팀스피릿 훈련을 받을 때, 친아버지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고아 출신 아이들은 누구나 친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힘들게 살면서, '애니(Annie)'라는 영화를 보며 '어딘가에 나를 버린 것을 후회하는 아버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꿈속에서 친아버지를 만나 뿌리를 찾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미래를 꿈꿨습니다. 고아들은 잘 살아도 늘 친부모를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드디어 친아버지를 만나게 되셨네요! 기대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미국에서 상상했던 아버지와 한국에서 만난 아버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만나면 "미안하다, 아들아. 너무 사랑한다. 그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와 같은 따뜻한 위로와 사랑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아버지들은 감정 표현에 서툴고, 특히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쑥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버지 학교에 가보니, 한국 아버지들은 체면 때문에 아들에게 쉽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큰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를 만난 후, 삶의 희망을 잃고 자살 시도를 하셨다고요? 네, 아버지의 실망스러운 모습에 '나에게는 희망이 없구나, 나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구나'라는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수면제 180알맥주 12캔을 한꺼번에 마셨습니다. 다행히 누가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건졌습니다. 정신병원에서 3일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어머니, 즉 친어머니는 나중에 만나셨나요? 보통 고아들은 어머니를 더 많이 그리워하는데… 네, 어머니도 나중에 찾았습니다. 어머니도 만나 뵈었지만, 어머니 역시 상처가 많은 분이셨습니다. 어머니를 만났을 때도, '내가 그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한국 어머니들은… 제가 하나님을 만난 후에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이 미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상처만 받았지만, 하나님을 알고 어머니를 만났을 때는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습니다. 어머니는 늘 죄책감에 시달리며 술에 의존하고, 후회하며 사셨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불행한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외할머니께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다고 합니다. 외할머니는 연변에 간호학교를 세우고, 평양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간호학교 총무한국간호협회 총무를 지내신 윤고안 권사님이셨습니다. 믿음이 아주 강한 분이셨습니다. 제가 입양된 후, 매일 새벽마다 6시간씩 "요셉처럼 되라"고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어머니가 저를 입양 보낼 때 외할머니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요… 친아버지를 만나 실망하고 자살 시도까지 하셨으니, 정말 막 사는 인생을 사셨겠네요. 네, 자살 시도 후,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숨만 쉬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되는대로 살았습니다.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갱단과 싸움질을 밥 먹듯이 하고, 주말마다 술에 취해 싸움판을 벌이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 후, 지금의 사모님과 결혼하셨다고요? 네, 그렇게 10년 정도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장사하는 분을 만났는데, 저를 볼 때마다 돌아가신 아들 생각이 난다고 하시면서 지금의 아내를 소개해주셨습니다. 뉴욕에서 아내 분을 만나셨나요? 네, 미국 뉴욕에서 만났습니다. 깡패보다 더 험악하게 살 때였다고 하셨는데… 정말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깡패보다 더 심했습니다. 저는 늘 총알을 소지하고 다녔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요. 술에 취해… 정말 화약고나 다름없었습니다.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지경이었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외할머니의 기도 덕분에 살아남은 것 같습니다. 저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개로 아내 분을 만나셨군요.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사는 자매를 소개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간호사라고 해서, 속으로 '그래도 간호사 정도면 괜찮겠지' 생각하고 아내를 만나러 노스캐롤라이나까지 내려갔습니다. 사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소개팅에 응했습니다. 첫 만남에서 아내는 제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촌스러운 분위기였달까요… 저는 뉴욕에서 자랐기 때문에, 뉴욕 사람들은 노스캐롤라이나 사람들을 촌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뉴욕 사람이 버지니아를 촌스럽다고 하고, 버지니아 사람은 노스캐롤라이나를 촌스럽다고 하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웃음) 아내의 첫인상이 제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아내가 첫 만남에서 "저는 나중에 믿음 생활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선교도 같이 나갈 배우자를 만나고 싶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비슷한 뉘앙스였습니다. 아내의 첫인상이 제 스타일도 아니고, '이건 꽝이다' 싶어서 담배를 꺼내 물고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라고 쏘아붙였습니다. 그래도 소개팅 예의상 저녁 식사는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내가 저에게 "몇 년생이세요?" 라고 물었습니다. "88년생입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갑자기 말투가 바뀌면서 반말로 "어, 저는 저보다 어린 사람은 안 만나요" 라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연상이었던 거죠! 1년 연상이었는데, 엄청 기분이 나빴습니다. '이 촌스러운 여자가 뉴욕에서 온 나를 무시하다니… 두고 봐라, 내가 꼬셔서 버려주마' 라고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날부터 두 시간 거리를 매주 왕복하며 아내를 찾아갔습니다. "나오십시오!" 하고 전화해서 억지로 데이트를 강행했습니다. 정말 한국 속담처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결국 아내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음을 뺏은 건가요, 억지로 뺏은 건가요? 억지로 뺏으려고 했는데, 제가 작전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아내에게 정이 들어버린 거죠. 버려야 하는데… 버려야 하는데 하면서도, 점점 아내에게 빠져들었습니다. 사실 열 번 찍은 건 아내가 아니라 저였던 것 같습니다. (웃음) 정말 감사한 것은, 아내의 믿음이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차별이 정말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입만 열면 인종차별 운운하지만, 사실 한국 사회만큼 인종차별 심한 곳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에 가면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한국 교회는 실망스러웠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이름이 뭐예요?" 가 아니라 "아빠가 뭐 하는 분이세요?" 부터 묻습니다. "저는 입양됐어요. 제 이름은 카일 윌슨입니다" 라고 대답하면, 어른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저를 멸시하는 눈빛으로 쳐다봤습니다. 아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을 알았을 때, 솔직히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장모님은 정말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셨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분들이셨습니다. 제 과거를 뻔히 알면서도, 장모님은 저희 교제를 허락하셨습니다. 장모님께서 친구들과 3일 금식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받아주라, 과거를 따지지 말고 사랑으로 품어주라" 는 응답을 주셨다고 합니다. 장모님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확신을 얻으시고, 제 과거와 상관없이 저를 받아주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아내와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만난 지 얼마나 되어서 결혼하셨나요? 아주 짧은 시간에 결혼했습니다. 2000년에 결혼했는데, 6개월 정도 교제하고 결혼했습니다. 결혼 전에 아내 오빠가 저희 집으로 초대해서 스테이크를 구워주면서 "미스터 킴, 우리 동생 어떻게 할 거예요?" 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의 피가 흐르고, 한국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해병대에서 배운 것은 "형님 말씀에는 무조건 '네'라고 대답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결혼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해 버렸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결혼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결혼식 날까지 아내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결혼식에도 30분이나 늦게 나타났습니다. 신랑이 결혼식에 일부러 늦었다고요? 네, 일부러 늦었습니다. 결혼식 당일 아침, 골프를 27홀이나 돌고 술을 마시면서 '결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오후 4시가 넘도록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제 친구도 미국 친구라서 "결혼식 안 가도 돼, 여자 친구랑 싸웠어" 라고 말하더군요. '나쁜 친구'죠. (웃음) '또 나쁜 친구 만났네' 하면서 갈등했지만, 그래도 해병대에서 "한번 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억지로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30분이나 늦게 결혼식장에 도착했습니다. 저를 사랑해주셨던 정재훈 목사님께서 첫 번째 교회에서 주례를 맡아주셨는데,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지금도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우리나라는 보통 결혼식장에 신랑 신부가 함께 차를 타고 가기 때문에, 신랑이 늦는 경우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데요.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결혼식 날부터 아내 속을 썩이셨다니,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결혼 후에도 술, 담배, 갱단 친구들과 어울리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사모님께서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네, 아내가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저희 부부에게 재미있는 것은, 노스캐롤라이나는 남자가 나쁜 짓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촌구석이라는 겁니다. (웃음) 정말 재미없는 천국입니다. 교회에 가야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저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고 막 살았으니까요. 체면 차릴 것도 없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장로님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집사님들을 꼬드겨 술을 마시고, 심지어 학생들에게까지 술을 권했습니다. 지금은 선교사가 된 박선호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16살 때 처음 만났습니다. 당구 치는 친구에게 "야, 맥주 한잔 할래?" 라고 물으니, "형, 저 16살인데요" 라고 하더군요.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술을 권했습니다. 성격도 워낙 괴팍해서, 술만 마시면 싸움을 벌이고, 심한 욕설을 퍼붓곤 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욕설을 퍼붓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장모님이 울고 계셨습니다. 장모님께서는 "나는 태어나서 인간 입에서 그런 쌍스러운 말이 나오는 것을 처음 들었다, 너는 다시는 우리 집에 발도 들여놓지 마라" 라고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장모님 앞에서 물건을 집어던지고 부수는 등 난폭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정말 끔찍한 사람이었습니다. 장모님께 정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장모님은 저를 가장 아끼는 사위로 여기시게 되었지만… 해병대에서 욕설을 배웠다고 말씀드렸는데, 미국 해병대 욕설인가요? 제가 미국 해병대 복무했지만, 일본 오키나와에서 선배님 추천으로 포병 4단에서 한국에 주둔할 때 한국 해병대 욕설을 배웠습니다. 한국 욕이 훨씬 다채롭고 찰지더군요. (웃음) 당시 한국말을 전혀 못 했기 때문에, 선배님이 "한국 훈련에 통역병으로 가면 좋을 것" 이라고 추천해주셨습니다. 장교가 통역병을 찾으면 분명히 얼굴을 보고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하고, 제 얼굴을 보고 "Are you Korean?" 이라고 물으면 "Yes, of course!" 라고 대답하고, "Do you speak Korean?" 이라고 물으면 "Of course!" 라고 대답하라고 미리 연습시켰습니다. 덕분에 통역병으로 한국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한국에 와서 포항 해병대 병사들, 똥차 아저씨들에게 "X나, X발, X먹었냐" 와 같은 찰진 한국 욕설을 배웠습니다. (웃음) 아내가 한국 욕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내는 제가 하는 욕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요. 그 정도면 이혼 위기를 겪으셨을 것 같은데요? 결혼 초 1년 동안은 아내가 눈물로 기도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혼 직전 부부'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1년쯤 지나서, 저도 지쳐갔습니다. 저도 꿈꾸는 이상적인 아내상이 있었는데, 아내는 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저는 늘 따뜻한 밥을 차려주고, 깔끔하게 청소해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아내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요리 솜씨도 없고, 청소도 엉망이었습니다. 아내에 대한 불만과 실망감이 커져갔습니다. 결혼 1년 만에 아내와 9일 동안 별거했습니다. 다시 옛날처럼 막 살고 싶다는 유혹에 휩싸였습니다. 다시 방황하는 삶으로 돌아가려고 비행기표를 예매하려는 순간, 아내의 기도와 교회의 사랑이 떠올랐습니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계신다면, 왜 제 인생은 이렇게 꼬였습니까? 왜 저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때, "네가 변해야 한다, 네가 변하면 된다"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이 제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래, 내가 변해야 하는구나.' 컴퓨터를 끄고 밤 12시쯤 아내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는 제가 집을 나간 후 9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9일째 되던 날, 너무 지쳐서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해야겠다, 이혼으로 끝내야겠다' 고 생각하는 순간, 제가 아내 집 문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아내와 장모님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해주세요, 제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세요" 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때부터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모님과 아내의 기도가 기적을 만들어낸 거군요! 네,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이후, 하나님께 매달리고, 장모님께 용서를 구하면서 변화되기 시작하신 건가요? 하루아침에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날 이후 뒤돌아보지 않고 한 걸음씩 교회에 나가면서,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봉사도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시골 교회에서 동시통역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한국말도 조금 할 줄 안다고 해서, 담임 목사님께서 동시통역을 맡겨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구글 번역기처럼 편리한 번역 도구가 없어서, 사전을 일일이 찾아가며 번역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훈련시키시는 놀라운 방법으로 통역 봉사를 활용하셨습니다. 토요일에 목사님께서 설교 원고를 보내주시면, 12시간 넘게 원고를 붙잡고 씨름했습니다. 사전을 찾아 단어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확인하고, 설교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번역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저희 부부 싸움 이야기를 아시는 것처럼, 설교 말씀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메시지처럼 제 심장을 꿰뚫었습니다. 통역 봉사를 하면서, 목사님은 조용히 설교하시고, 저는 뒤에서 통역하면서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교인들이 제 진심을 느꼈는지, 통역을 통해 큰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통역 봉사를 하면서, 설교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서 제 안에 심어주시는 말씀을 통해 '예수 안에서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녀다' 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 같은 쓰레기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니!'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는 통역 봉사하면서, 저 혼자 뒤에서 부흥회를 하는 것처럼 큰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설교 말씀을 통역하면서,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에게 메시지를 주시는 것처럼 느끼셨군요! 정말 놀라운 경험입니다. 선교사님께서는 '나의 상처가 나의 사명이 되었다'고 고백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제 멘토셨던 김영 목사님께서 언젠가 제게 물으셨습니다. "만약 좋은 가정에 입양되어, 학대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자랐다면, 훨씬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저는 오히려 반문했습니다. "제가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지금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돕는 선교사의 길을 선택했을까요?" 외할머니의 기도 덕분에 요셉처럼 험난한 인생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을 묵상하면서, 고난과 역경을 통해 연단된 사람이 더욱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선교지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아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지만, 진정으로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통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 입은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밑바닥 인생을 살아본 사람은, 겉으로는 거칠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상처투성이인 아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2세 학생들을 만나면서, 1세 부모들이 모르는 2세들의 고아 같은 마음을 발견했습니다. 미국에 이민 온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위해 쉴 새 없이 일하지만, 2세들은 부모와의 소통 부재와 정체성 혼란으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겪었던 고통과 비슷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사로 재직하던 중학교에서 멕시코 아이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한 아이가 매일 화장을 하고 학교에 왔습니다. 12살 어린 나이에… 숙제도 제대로 해오지 않았습니다. "예은아, 제발 숙제만이라도 해오면, 선생님이 너를 도와줄 수 있다" 고 타이르곤 했습니다. 어느 날, 예은이가 일주일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학교 경찰에 문의해보니,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멕시코 이민자 부모는 생계를 위해 투잡을 뛰고, 예은이는 집에 혼자 남겨져 있었는데, 멕시코 갱단이 예은이를 성매매 시킨 것입니다. 12살 어린 소녀가 갱단에 성착취를 당하고 호텔에 감금되어 있다가 경찰에 구출된 것입니다. 예은이와 같은 아이들을 보면서, 제가 얼마나 안일하게 살았는지 깊이 반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과거의 고통을 잊고 편안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은이와 같은 상처 입은 아이들을 다시 만나게 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으로 보듬도록 이끄셨습니다. 그 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신 '안아주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숙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으로 보듬는 것이었습니다. 학교 밖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안아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주었습니다. 저의 아픔이, 상처 입은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사명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두렵지는 않으셨나요?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도망치고 싶을 것 같은데… 순순히 순종하신 것이 놀랍습니다. 순종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은, 오히려 순종하기 쉬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아들'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셔서 저를 '아빠'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한번 불면, 순종이 오히려 쉬워집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이 방송을 보시는 분들께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처럼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사람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데, 하나님 품 안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닐 수 있는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은 얼마나 더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처럼 극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정말 순종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내와 저에게 기도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셨을 때, 지금처럼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갈망했던 큰 집, 성공… 막상 가져보니 별것 아니었습니다. 큰 집에서 살아보니 청소하는 데만 엄청난 시간이 걸리고, 잔디 깎는 것도 처음에는 멋있어 보였지만, 몇 번 하다 보니 지루하고 힘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니,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옛날에 아내와 처음 선교사 훈련을 받을 때 했던 이야기를 잊고 살았습니다. 편안하게 목회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에 젖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저를 신학교로 보내셨습니다. 아내는 제가 신학교에 진학하자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신학교 졸업 후, 어떤 길을 걸으셨나요?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편안하게 차세대 목회를 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따뜻한 교회에서 안정적인 목회를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신학교 졸업 후, 교회 장로님들께 "이제 전도사 풀타임 사역을 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더니, 장로님들께서는 "당신은 좀 더 큰 교회나, 해외 선교를 하는 것이 좋겠다, 풀타임 자리는 줄 수 없다" 고 거절하셨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저에게 차세대 목회를 하라고 하셨는데, 왜 교회 문을 열어주시지 않는 걸까?' 그때, 멘토 목사님께서 "단기 선교를 떠나,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고 제안하셨습니다. 아내와 함께 단기 선교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니카라과로 단기 선교를 떠나 홈리스 사역을 했습니다. 함께 단기 선교를 갔던 목사님께서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내와 함께 선교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니카라과로 선교를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니카라과 선교 대신, 멕시코 선교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니카라과 선교를 준비하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저희 아들이 5~6살 정도였는데, 니카라과로 떠나려고 짐을 꾸리고 있을 때, 교회 목사님께서 멕시코 선교를 제안하셨습니다. 유카탄 반도에 한인 교회들이 단기 선교를 많이 갔었는데, 단기 선교로는 현지 사역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언어, 문화 차이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선교사 헌신은 우연이 아니다, 니카라과 대신 멕시코로 가달라" 고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솔직히 화가 났습니다. 갑자기 멕시코로 가라니… 멕시코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멕시코는 위험하다는 소문도 많고, 뉴스에서도 멕시코 관련 안 좋은 소식을 자주 접했기 때문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멕시코에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정말 화가 났지만… 기도하는 아내 덕분에 마음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안 된다, 니카라과로 간다, 이미 니카라과로 가기로 결심했고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어떻게 3개월 앞두고 멕시코로 바꿀 수 있느냐" 고 반박했지만, 아내는 "그래도 기도해보자" 고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멕시코로 가라,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다" 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때로는 야속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저희는 좋은 일을 하려고 니카라과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니카라과행을 막으시고, 계획에도 없던 멕시코로 가라고 하시니… 아내의 기도와 순종하는 마음 덕분에, 결국 멕시코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2009년, 6살 아들과 함께 멕시코로 떠나셨군요! 네, 2009년, 6살 아들을 데리고 멕시코로 떠났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멕시코까지 7일 동안 자동차를 운전해서 멕시코에 도착했습니다. 멕시코 선교 초기,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으셨을 텐데요? 초창기에는 교회에서 어느 정도 후원을 약속했지만, 멕시코에 도착하자마자 교회에 문제가 생겨 후원이 끊겼습니다. 돌아갈 수도 없고… 한 달에 50달러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멕시코에 아는 교회도 없었고, 오직 파송 교회만 믿고 멕시코에 왔기 때문에, 정말 외톨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마을 시장님께 식당에서 일했던 경험을 말씀드리고, "시청 앞에서 볶음밥을 팔아도 되겠느냐" 고 허락을 구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볶음밥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멕시코는 평균 기온이 4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입니다. 가게도 없이, 에어컨도 없이, 차 트렁크에 가스 버너를 싣고 볶음밥을 팔았습니다. 시골 마을이라 하루 종일 팔아도 20달러 벌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나마 번 돈의 절반은 볶음밥 재료를 사고, 남은 돈으로 생활하고, 남은 볶음밥은 마을의 가난한 아이들과 나눠 먹었습니다. 거지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끼니를 잇기도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부엌도 없는 렌트 집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마을 사람들이 저희를 불쌍히 여겨, 남은 음식이나 식재료를 나눠주었습니다. 저희는 흔히 현지인들을 가난하고 게으르다고 멸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멕시코에서 오히려 현지인들의 도움과 사랑을 받으며 생활했습니다. 선교하러 왔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들도 나의 자녀다, 이들도 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형제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선교사의 오만한 눈을 깨뜨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현지인들의 도움과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6살 아들에게 밥 한 끼 제대로 먹일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가난한 이웃이 나눠준 옥수수빵 두 개를 세 식구가 나눠 먹으며, '수학 선생님' 답게 빵을 세 조각으로 잘라, 셋이서 똑같이 두 조각씩 나눠 먹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가장 힘들었지만,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교사님도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인데, 얼마 전까지 골프장에서 살았던 호화로운 생활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 잔디 깎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셨나요? 정말 힘든 시기였는데,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지난주 한국에 와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에는 '똘기'가 생긴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웃음) 저희 부부는 힘들었지만, 멕시코에서 정말 기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멕시코 선교를 사명으로 여기고 헌신했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 예배를 시작하면서, 새벽 기도도 시작했습니다. 고난 속에서 비로소 기도를 시작하게 된 거죠. 전에도 혼자 기도했지만, 멕시코에 와서부터는 아내와 함께 가정 예배큐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동안 저는 제 자신감, 제 능력을 믿고 살았지만, 멕시코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원 교회도 없고,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지만, 멕시코에서 선교하겠다는 굳건한 믿음 하나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볶음밥을 팔면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멕시코 선교를 영원히 계속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당시 볶음밥 장사로 모은 돈이 만 달러 정도 있었습니다. 아내와 상의 끝에, 렌트 생활을 청산하고 작은 집이라도 지어서 렌트비 걱정 없이 살기로 했습니다. 청소년 집회 강사로 초청받아,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아이들 집을 방문했는데,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아이들 집은 지붕에 구멍이 숭숭 뚫려, 별이 쏟아지는 듯했습니다. 아내에게 아이들 집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아내는 "알아서 하세요, 집 지을 돈으로 아이들 집을 고쳐주든지 말든지"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아내의 허락을 받고, 집 지으려고 모아둔 돈으로 아이들 집을 고쳐주었습니다. 돈이 바닥나자, 하나님께서는 저희 부부를 더욱 연단시키셨습니다. '돈이 없어도, 너희 힘으로 살지 말고, 나를 믿고 사랑으로 살아가라' 는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텅 빈 손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멕시코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선교사님께서는 집을 오픈해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멕시코 선교 시작 후 16년 동안, 저희 부부끼리만 생활한 적은 단 1주일밖에 없습니다. 늘 아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차세대 사역에 대한 비전도 있었고, 저 또한 고아로 자랐기 때문에, '우리 집은 늘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집, 집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언제든 쉼터가 되어주는 집' 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멕시코에 처음 왔을 때, 볶음밥을 팔면서도 미국과 멕시코에서 상처 입은 아이들이 저희 집에 와서 함께 살았습니다. 좁은 방에 줄을 쳐서, 여자아이들은 아내와 함께, 남자아이들은 저와 함께 잠을 잤습니다. 방 하나에 6~7명이 북적이며 살았습니다. 16년 동안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아내에게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해병대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험한 환경에도 잘 적응했지만, 아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지금도 저희 집은 아이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무 때나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가끔 아내가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웃음) 저희 부부는 '공동체' 보다는 '하나님의 가정' 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저희 가족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저희 아들, 입양한 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큰 가족' 이 있습니다. 많은 아이들과 함께 먹고 자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저희의 일상입니다.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은 몇 명 정도 되나요? 많을 때는 10명이 넘을 때도 있습니다. 저희 집뿐만 아니라, 위탁 센터대학교 기숙사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위탁 센터에서는 50명, 대학교 기숙사에서는 35명의 학생들이 함께 먹고 자고 있습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찬 규모인 것 같은데요? 어떻게 이 모든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가요? 정말 놀라운 것은, 워싱턴한인교회 성도님들의 헌신적인 후원 덕분입니다. 워싱턴한인교회 성도님들께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주시고, 사랑하는 목사님들께서 기도해주신 덕분에 이 모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도 월급의 절반을 멕시코 선교 사역에 헌금하고 있습니다. 저는 멕시코 선교를 하면서, 단 한 번도 계산기를 두드려본 적이 없습니다. 계산적인 마음으로는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자녀가 신발이 없고, 어떤 아이가 웃는데 이빨이 흉하게 썩어 있고, 이빨 교정이 필요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빠'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사랑하다 보니, 돈보다는 사랑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멕시코 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 동역자들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난하게 볶음밥을 팔면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고, 현지인들이 저를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함께 동역해온 현지인들과 함께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제가 교장 선생님을 맡고, 교장 선생님 딸은 8살 때부터 저희와 함께 새벽 기도를 했던 학생인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영어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저희 사역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은 바보사역에 풀타임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제 딸은 대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새벽 기도와 학생 관리를 돕고 있습니다. 저는 인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현지 동역자들과 함께 멕시코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처럼 부족한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큰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늘 함께해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아까 따님도 입양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멕시코에서 입양하신 건가요? 네, 멕시코에서 딸을 입양했습니다.카라는 13살 때 저희 위탁 센터에 오게 되었습니다. 13살 때까지 무려 16군데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힘든 일을 하시다가 임신했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버려진 아이입니다. 위탁 센터에 오게 되었는데… 카라는 겉으로는 밝게 웃지만, 속으로는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저와 성격이 똑같았습니다. '가시 돋친 아이' 였습니다. 상처받을까 봐, 먼저 사람들을 밀어내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아이였습니다. 위탁 가정을 운영하던 할머니께서 더 이상 카라를 돌볼 수 없다고 정부에 통보했고, 정부는 카라를 친어머니에게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카라는 친어머니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카라의 딱한 사정을 듣고, 친어머니 집을 방문했습니다. 친어머니는 술 취한 남자와 함께 살고 있었고, 집에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친어머니는 남자에게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카라를 저곳에 보낼 수는 없다" 는 생각에, 변호사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멕시코 법에 따르면, 친어머니가 살아있는 경우라도 친어머니의 동의를 받으면 입양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 변호사에게 입양 서류를 부탁해서 친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제발 카라를 입양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 재정적으로 돕고, 카라를 잘 키우겠다" 고 간곡히 설득했습니다. 다행히 친어머니는 제 진심을 알아주시고, 입양에 동의해주셨습니다. 주 정부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카라를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에게는 미리 알리지 않았습니다. 급한 마음에… 딸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하면서 아내에게 전화했습니다. "자기야, 우리 딸이 생겼어!" 사모님은 정말 보통 분이 아니시네요! 오늘 아내가 이 자리에 함께했어야 했는데… 정말 아내에게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따님은 지금 많이 컸겠네요? 네, 지금 26살입니다. 잘 자라주었습니다. 사실 18살까지는 딸과의 관계가 쉽지 않았습니다. 딸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13살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세상 풍파를 겪을 만큼 겪은 아이였습니다. 우리 부부를 앉혀놓고 "나는 또띠아도 안 먹고, 쌀밥도 안 먹고, 이런 음식은 안 먹어요" 라고 선언하더군요. 이미 수많은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 같습니다. 상처받을까 봐, 먼저 벽을 치고 사람들을 밀어내는 아이였습니다. 18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아빠, 엄마" 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줌마, 선생님, 목사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내가 딸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내는 딸에게 잘해주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딸은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힘들어하며 울면서 들어오는 날이 많았습니다. "나는 성민이보다 카라에게 더 잘해주려고 노력하는데, 카라는 왜 이렇게 마음을 안 열까요? 아무리 상처가 많아도, 예의상 '고맙습니다'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나요?" 아내를 야단쳤습니다. "미안하지만, 당신과 나는 하나님께 입양되어 치유되었지만, 카라는 아직 하나님을 모르잖아. 나도 하나님 몰랐을 때는 그랬잖아. 우리는 사람들이 이 정도 해주면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상처 입은 사람은 그렇지 않아. 우리가 기다려줘야 해." 18살 생일날, 딸은 성인이 되었습니다. 성인이 되면 부모 말을 안 들어도 되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딸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아내가 너무 힘들어해서, 딸을 불러 은행으로 데려갔습니다. "카라, 이제 너는 성인이야. 우리 말을 안 들어도 돼. 지금 당장 떠나도 돼. 하지만 너는 여전히 우리 딸이고, 우리는 너를 사랑해.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신지,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잖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너는 법적으로 우리 딸이야. 하나님의 재산은 곧 우리 재산이고, 우리 재산의 절반은 네 거야. 성민이와 너, 둘이 50%씩 나눠 가질 거야. 5천 달러를 줄 테니, 네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이 돈은 네 거야. 네가 우리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너는 법적으로 내 딸이고, 이 돈은 네 몫이야. 떠나도 좋지만, 우리 곁에 있어주면 더 좋겠다. 네가 진정으로 우리 딸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달았으면 좋겠다." 딸이 돈을 들고 떠날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멕시코에서 5천 달러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딸은 처음으로 "아빠, 엄마" 라고 불렀습니다. 며칠 뒤, 딸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딸도 자존심이 있어서, 며칠 동안은 아빠, 엄마 소리를 안 했지만, 3일쯤 지나서 처음으로 "아빠" 라는 말을 건넸습니다. "아빠" 라는 말 한마디에,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엄마" 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딸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진정으로 '딸'이 되셨군요! 네, 딸도 마음을 열고, 저희를 부모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딸의 생각과 행동도 긍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체성이 회복된 거죠. 공부도 열심히 해서 명문 대학 법대에 진학했고, 졸업 후 로펌에 취업했습니다. 로펌에서 잘나가는 변호사로 활동하면서도, 주말에는 멕시코에 와서 아빠 사역을 돕고, 풀타임으로 대학교 기숙사 사감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35~40명의 대학생들을 돌보며 새벽 기도를 인도하고, 학생들을 관리하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선교사님 자녀들은 정말 하나님께서 키우시는 것 같습니다. 선교사님 자녀들의 간증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양육하시는 자녀들의 결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게 됩니다. 자녀를 잘 키우고 싶으시다면, 선교를 떠나십시오! (웃음) 하나님께서 친히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주실 것입니다. 로펌 변호사도, 멕시코 선교 사역도,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입니다. 최근 한국에 방문하셨는데, 친아버님도 만나 뵈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친아버님도 만나 뵈었습니다. 친아버님도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이제는 많이 편안해지신 것 같습니다. 7년 전, 제가 하나님을 만나고 목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간증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이제 아버님을 용서하셨나요? 관계가 회복되었나요?" 라고 물어봤습니다. 목사로서 당연히 "네, 용서했습니다. 지금은 관계가 회복되었고, 괜찮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솔직히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었습니다. 친아버지를 다시 만나면 어떨까… 늘 혼란스러웠습니다. 교회 허락을 받고, 아들과 딸을 데리고 한국에 와서 친아버지를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손자, 손녀를 보여드리고, 효도를 하고, "아버님, 제가 하나님을 만나서 아버님을 용서했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멕시코로 돌아가 목회에 전념하고 싶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 친아버지를 찾아뵙고, 삼겹살을 대접해드렸습니다. "손자, 손녀를 보니 기쁘시죠?" 라고 여쭤봤더니, 아버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에, "아버님, 이제 아버님을 용서했습니다" 라고 멋있게 말하고 싶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뭔데 아버지를 용서하느냐, 너무 주제넘은 행동이다" 라고 꾸짖으시는 듯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정체성을 바꿔주셨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나는 버림받은 아이' 라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친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도, '아버지가 나를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남 탓만 하면서 살아왔던 거죠. '아버지가 나를 버려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나를 차별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라고 남 탓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아들로서 아버지께 효도해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너는 단 한 번도 아들 노릇을 해본 적이 없잖아, 너의 정체성은 '버림받은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구나.' 친아버지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버님, 50년 동안 아들 노릇 제대로 못 했습니다. 효도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제게 효도할 기회를 주십시오." 아버님께서는 "그래, 좋다" 라고 쿨하게 허락해주셨습니다. "나도 미안하다" 와 같은 감동적인 말씀은 없었지만… (웃음) 아버님은 쿨하신 분입니다. (웃음) 저희는 어색할 때 유머로 넘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후 저희 가족은 부산 여행을 함께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80대 노령에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손자, 손녀들과 함께 스피드보트를 타시며 즐거워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아버님이 젊은 시절에 선교사님을 낳으셨나 보네요? 네, 아주 일찍 결혼하셨습니다. 아버님 연세가 80대 후반이시라는 것을 보니, 정말 젊은 나이에 결혼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시나요? 네, 내일 멕시코로 돌아갑니다. 멕시코로 돌아가시면 또 필요한 것도 많으시고, 기도 제목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기도 제목을 나눠주시면, 저희 프로그램 시청자분들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늘 기도해주시는 워싱턴한인교회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워싱턴한인교회 담임 목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멕시코 아이들을 위해서도 기도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한국에 오랜만에 방문했는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멕시코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50명의 대학생들을 양육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굳건히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나이가 들수록 현실적인 어려움에 압도될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이 사역을 계속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이 엄습해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 하나님만 믿고 멕시코 선교에 헌신했던 초심' 을 되새기며 힘을 냅니다. 한국 초기 선교사님들이 맨발로 낯선 땅에 뛰어들어 헌신했던 것처럼, 저 또한 멕시코 아이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멕시코 선교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내년에 기독교 중학교를 설립할 계획입니다. 이미 초등학교 설립 허가를 받았고, 천주교 국가인 멕시코에서 기독교 학교 설립 허가를 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중학교 설립 허가도 받았으니, 내년부터는 학교 공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기독교 중학교 설립을 위해 많은 기도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무엇보다 선교사님과 사모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건강을 돌보지 못하고 사역에만 몰두하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한국에 돌아오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교사님과 사모님께서도 건강을 잘 챙기시면서 멕시코 선교 사역을 감당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선교사님 자신도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이고, 건강한 육체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해야 멕시코 선교 사역도 더욱 힘차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늘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귀한 간증 말씀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 들으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저는 오늘 간증을 들으면서, 선교사님의 인생이 너무나 외로운 시작이었지만, 지금은 기도하는 아내, 사랑스러운 딸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로운 선교사님 곁에 늘 함께해주셨고, 아름다운 동역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선교사님께서 "제 길과 하나님의 길은 다르다" 고 말씀하셨는데, 결국 하나님의 길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시작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과 같았지만, 결국에는 그 아픔과 상처를 통해 일하시는 오른손으로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시 오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멘. 정수 형제님은 오늘 간증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저도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은 아빠로서, 오늘 선교사님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저런 길을 걸으라고 하시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엄습해왔습니다. (웃음) 로펌 변호사는 포기 못 하겠지만… (웃음) 진심으로 선교사님을 응원합니다. 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숭고한 길을 걷고 계십니다. 멀리서나마 늘 응원하겠습니다. 선교사님의 헌신적인 삶을 기억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부모 없는 고아, 남편 잃은 과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버림받은 영혼, 외로운 영혼, 의지할 곳 없는 영혼, 굶주린 영혼' 들을 돌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입양아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신 선교사님처럼, 우리 모두는 때로는 고아처럼, 과부처럼 외롭고 힘든 시기를 겪습니다. 사회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가족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외로운 영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와 같은 고아와 과부를 품으라고, 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 시절 수많은 상처와 따돌림, 울분을 겪으셨던 선교사님께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고아들을 섬기는 숭고한 사명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버림받았던 영혼이, 이제는 버림받은 영혼들을 품는 '사랑의 메신저' 가 되신 것입니다. 방탕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4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볶음밥을 볶으면서 흘린 땀방울 속에,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죄악과 허물을 깨끗이 씻어내셨습니다. 이제는 깨끗한 영혼으로, 굶주린 영혼들을 먹이는 숭고한 사명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정말 '고아와 과부를 먹이시는 일' 을 몸소 실천하고 계신 선교사님을 하나님께서 크게 칭찬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간증을 통해, '우리를 늘 원망했던 부모님께, 나는 과연 훌륭한 아들이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께서 앞으로도 멕시코에서 굶주린 영혼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살리시는 일에 더욱 크게 쓰임 받기를 저희도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음악)

1. 한 고대 문서 이야기

2. 너무나도 중요한 소식 (불편한 진실)

3. 당신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유

4. 신(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5. 신의 증거(연역적 추론)

6. 신의 증거(귀납적 증거)

7. 신의 증거(현실적인 증거)

8.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9. 성경의 사실성

10. 압도적으로 높은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12.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

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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