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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셉 목사 백인 엄마와 결혼 이야기, 혼혈 인생 고백

요약

왜 백인 엄마와 결혼하셨나요? 김요셉 목사의 인생 고백

왜 아버지는 내 허락 없이 백인 엄마와 결혼하셨을까요? 김장환 목사님의 장남 김요셉 목사님의 파란만장 인생 이야기

안녕하세요, 저는 새롭게하소서의 진행자 주영훈입니다. 오늘 함께해주실 연 PD님, 그리고 이정수 님과 함께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해외에서 유색인종들이 인종차별을 겪는 이야기는 자주 접하지만, 오늘 모신 분은 오히려 반대로 인종차별을 겪으셨다고 합니다. 바로 김장환 목사님의 아들이신 김요셉 목사님이십니다.

오늘 김요셉 목사님께서는 솔직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실 예정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원천침례교회의 목사님이시자, 학교 이사장으로도 활동하고 계신 김요셉 목사님을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목사님,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주영훈) "소개가 아주 대단하네요. 마치 다른 사람이 오는 줄 알았습니다." (김요셉) "소개 감사합니다." (주영훈) "목사님, 유머 감각이 아주 뛰어나시네요. 시작이 아주 좋습니다." (김요셉) "죄송합니다." (주영훈) "소개해 드린 대로 김장환 목사님의 아드님이신데요. 오늘 대기실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 분께서 '어머, 한국말을 너무 잘하시네요?'라고 감탄하시더라고요. 정말 순수 한국인이라고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김요셉) "네, 맞습니다. 순수 한국인입니다. 그런 질문을 정말 많이 받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영어 때문에 엄청 힘들었습니다. 백인 울렁증까지 있었어요. (주영훈) "저희와 똑같으시네요. 한국에서 쭉 자라셨으니 영어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이정수) "목사님, 혹시 미국에 처음 가셨을 때 기억나세요?" (김요셉) "저는 20살 때 처음 갔습니다. 20살 때... 이정수 님도 비슷한 경험 있으시죠? 19살에 미국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정수) "네, 그럼요. 그 느낌 잘 알죠." (김요셉) "저는 한국이 제 고향인데도, 사람들은 계속 '언제 한국에 왔어요?'라고 질문하십니다." (주영훈) "계속해서 질문을 받으시는군요."

그런데 목사님, 아버님이 워낙 유명하신 김장환 목사님이시잖아요. 어머님께서는 어떻게 만나셨고, 수원에서 태어나신 건가요? (김요셉) "아, 부모님 이야기는 정말 길어요. 아버님께서는 15세에 미국으로 건너가셨습니다. 6.25 전쟁 직후 혼란기였죠. 미국 학교 기숙사에서 공부하셨는데, 거기서 어머님을 만나셨어요. 아버님이 2학년으로 편입하셨는데, 어머님은 당시 8학년이셨나, 9학년이셨나... 고등학생이셨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가까워지셨다고 합니다. 어머님은 한국 여성분들보다도 키가 작으신 편이세요. 미국 분이신데도 말이죠. 아버님께서 어머님을 처음 보시고 '한국에 데려가도 튀지 않겠다'라고 생각하셨대요. 키 작은 미국인 엄마를 만나 59년도에 한국에 오셨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2년 뒤에 태어났고요. 어머님은 저보다 2년 먼저 한국에 사신 셈이죠."

(김요셉) "저는 어릴 때부터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뼛속 깊이 새기며 자랐습니다." 아버님께서 항상 강조하셨죠. 아버님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아버님은 53년도에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당시에는 여권도 없어서, 한문으로만 쓰여 있는 종이쪽지 같은 것을 들고 가셨다고 해요. 6.25 전쟁 와중에 미국으로 건너가신 거죠. 보통 그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 가신 분들은 미국이 한국보다 살기 좋으니까, 어떻게든 미국 시민권을 따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희 아버님은 미국에서 10년 넘게 사셨고, 미국 여성과 결혼까지 하셨는데도, 죽어도 미국 시민권을 안 받으셨습니다. 정말 고지식한 한국인이시죠. 제가 어릴 때부터 아버님께서는 늘 "요셉이는 한국 사람이야. 한국 학교를 고등학교까지 다녀야 해. 대학교는 미국에서 가도 좋지만, 한국에서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한국인의 혼을 심어주셨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자꾸 "언제 한국에 왔냐?", "한국말 왜 이렇게 잘하냐?"라고 물어보면, 솔직히 좀 헷갈립니다.

"헷갈린다"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아시나요? (주영훈) "아, 그럼요. 무슨 뜻이죠?" (김요셉) "해가 땅에 쫙 갈라지는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영훈) "아, 헷갈린다는 표현이 꽤 아재 개그였군요." (김요셉) "제가 좀 아재 개그를 좋아합니다." (주영훈) "아닙니다. 권위 있는 분이시라 그런지 재밌는데요." (김요셉) "감사합니다." (주영훈) "수원에서 쭉 나고 자라신 거죠?"

(김요셉) "네, 61년도 수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수원에서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성적이 좋았는데, 3학년 때 너무 안 좋아져서 도피 유학을 떠났습니다. 대학교는 원래 아버님, 어머님께서 기독교 대학을 보내고 싶어 하셨는데, 제가 다른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저는 한국 대학을 갈지, 미국 대학을 갈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꿈이 있었거든요. 제대로 기독교 교육을 공부하고 싶어서 미국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그때가 79년도였는데... 제가 79번 버스를... 아, 죄송합니다. 또 아재 개그를... (주영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세대 차이를 느끼게 해주시는 것도 재미있네요." (김요셉) "정말 죄송합니다." (주영훈)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재미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79년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김요셉) "왜 79년생이 되고 싶으신데요?" (주영훈) "제가 한국말을 좀 하는 외국인처럼 생겼잖아요? 어른이 되어서는 방송 출연이나 주목받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만약 제가 79년생이었다면 샘 해밍턴 씨보다 더 인기가 많았을 것 같아요." (김요셉) "아, 정말요? 샘 해밍턴 씨보다요?" (주영훈) "네, 샘 해밍턴 씨는 '대한외국인' 같은 프로그램에도 나오시잖아요." (김요셉) "맞아요." (주영훈) "저는 너무 일찍 태어난 것 같아요." (김요셉) "혹시 목사님이 아니라 연예인이 되고 싶으셨던 건 아니시죠?" (주영훈) "아, 그건 아닙니다. 연예인은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니까요." (김요셉) "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직업으로 연예인은 못 할 것 같아요."

목사님께서 자라시던 시대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잖아요. 외국인, 특히 백인을 보기 힘든 시대였고, 수원에서 쭉 자라셨으니 더욱 그러셨을 텐데요. 학교 다닐 때 주목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아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요. 어떠셨나요? (김요셉) "어머니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 추억이 가장 강렬합니다. 어머니 등에 업혀 다니던 기억이 생생해요. 세네 살 때였던 것 같은데... 어머님이 미국 분이시잖아요. 59년, 60년대 수원에는 포장도로가 거의 없었습니다.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었죠. 저희 집은 수원 변두리 지역에 있었어요. 아버님 원래 고향은 지동인데, 거기는 수원에서도 외곽 지역이었거든요. 그런데 인계동이라는 곳에 집을 마련하셔서 더 외곽으로 이사 가셨어요. 어머님께서 저를 업고 한 시간, 한 시간 반을 걸어서 장을 보러 다니셨습니다. 어머니 손을 잡고 남문 시장에 갔던 첫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어요. 미국 여자와 미국 아기가 등에 업혀서 장을 보는 모습이 당시 아주머니들에게는 꽤나 충격적이었나 봐요. 저를 막 꼬집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엉덩이를 툭툭 치셨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기도 하셨죠. 마늘 파는 아주머니, 생선 파는 아주머니들... 온갖 냄새가 뒤섞인 시장 풍경과 사람들의 시선이 어린 저에게는 꽤나 힘든 경험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얼굴에 마늘 냄새, 생선 냄새가 배어 있곤 했어요. 그래서 저는 엄마랑 시장 가는 것을 정말 싫어했습니다. 엄마랑 함께 외출하는 자체가 싫었어요. 엄마랑 나가면 사람들이 너무 쳐다보고, 만지고...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게 부담스러웠습니다. 초등학교 5, 6학년쯤 되면서부터는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 그때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영훈) "어떤 이야기였나요?" (김요셉) "어머니께 영어책을 읽어달라고 자주 졸랐는데, 바로 '미운 오리 새끼'였습니다." (주영훈) "아, 미운 오리 새끼요. 유명한 동화죠." (김요셉) "미운 오리 새끼는 사실 백조였잖아요. 오리 알 속에 백조 알이 잘못 들어가서, 하얀 백조가 까맣고 못생긴 오리 새끼들 틈에서 자라게 된 이야기입니다. 백조는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과 다른 오리들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자기가 못생겼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백조는 얼마나 아름다운 새인가요? 백조는 물끄러미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못생겼다고 자책합니다. 저도 거울을 볼 때마다 제 코가 너무 뾰족하고, 눈은 파랗고, 머리카락 색깔도 달라서 늘 고민이었습니다. 제 모습은 못생겼고, 친구들처럼 까맣고 뭉툭한 코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목사님, 저 한국적인 목소리톤으로 바꿔드릴까요? 아니요, 죄송합니다. 또 아재 개그를... 어릴 적에는 정말 백인으로 태어나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생겼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어요. 하지만 저는 친구들과 너무 달랐죠. 영어로 'outsider'라고 하잖아요. 어떻게든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처음에는 동네 과수원에서 서리를 하곤 했습니다. 수원 변두리에는 과수원이 많았거든요. 친구들과 함께 여름에 수박 서리를 했는데, 꼭 원두막 주인이 깨는 바람에 도망치곤 했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도망칠 때마다 저만 붙잡히는 거예요. 다들 머리가 까맣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유독 저만 금발이라 눈에 띄었던 거죠. 과수원 주인이 저희 집까지 찾아와서 항의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너무 억울했어요. 겨울에는 연탄을 갈아야 했는데, 제가 큰아들이라 4학년 때부터 아버지께서 밤에 연탄 가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연탄이 까맣잖아요. 연탄재를 물에 풀어 머리카락에 염색을 하기도 했습니다. 까맣게 염색하면 뺑코라는 놀림을 덜 받지 않을까 싶어서요. 동네 형들이 뺑코라고 놀리면 집에 와서 콧구멍을 넓히는 기구를 코에 꽂고 자기도 했습니다. 콧구멍만 커지고 코는 여전히 뾰족했지만요. 누나들은 코가 높아지려고 빨래집게로 코를 집고 자기도 했다는데... 참, 각자 못 가진 것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정말 한국 사람처럼, 한국인 대접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게 간절한 소망이었어요."

또 특이한 점은, 당시나 그 이후에도 미군 남성과 한국 여성의 국제결혼은 많았지만, 한국 남성과 미국 여성의 결혼은 매우 드물었다는 거죠? (김요셉) "네, 맞습니다. 정말 드물었죠." (주영훈) "네, 맞아요." (김요셉)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사람들이 저를 처음 보면 꼭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초등학교 3, 4학년 때 처음 만나는 분들은 으레 '언제 한국에 왔어요?'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태어났는데요.'라고 대답하면, '어머, 한국말을 왜 이렇게 잘해?'라고 되물으셨죠. 제가 '한국말은 잘하는데, 영어는 잘 못해요.'라고 하면, '아니, 그럼 아버지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질문하셨어요. 대부분 아버지가 미국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제가 '아버지 고향은 수원 지동인데요.'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정말 헷갈려 하셨습니다. 마치 해가 땅에 갈라지는 듯한 혼란스러움을 느끼시는 것 같았어요. '아니, 어떻게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고, 어머니가 미국 사람일 수 있지?'라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되도록 사람들과 긴 대화를 피하고 싶었어요. 요즘은 그런 질문을 받으면 재미있게 옛날이야기를 들려드리곤 합니다. 하지만 어릴 적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상처를 많이 받았죠. 동네에서 놀다가 상처받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과자나 쿠키, 우유 같은 것을 챙겨주시면서 위로해주셨어요. 집은 항상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이었지만, 학교는 늘 걱정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어서는 걱정이 더 커졌어요. 아버님, 어머님이 미국인이시니까, 주변 선교사님들은 대부분 서울 연희동에 사셨습니다. 연희동에는 선교사님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이 있었고, 그 옆에 외국인 학교인 서울외국인학교(SFS)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는 학교죠. 원래는 미국 선교사님 자녀들을 위해 세워진 학교였는데, 할로윈이나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 부모님과 함께 그곳에 놀러 가곤 했습니다. 그 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저처럼 혼혈인 아이들이었어요. 마치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겉모습은 비슷했지만, 영어를 쓰는 아이들이라 말이 잘 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안했어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저는 외국인 학교에 갈 수 있을까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나와 비슷한 아이들이 많은 곳이니까, 부모님이 보내주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날 아버님께서 지방에 출장을 다녀오신 후, 2월쯤에 저희 삼남매를 불러 앉혀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막냇동생은 아직 어려서 알아듣지 못했을 테고, 여동생과 저만 있었던 것 같아요.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아, 너는 네 동생보다 더 미국 사람처럼 생겼지만, 한국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고등학교까지는 한국 학교를 다녀야 한다.' 어머님과 외국인 학교에 보낼까 고민했지만, 결국 한국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무조건 한국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그때 저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학교에 가면 또 놀림 받을 텐데, 누가 나를 보호해줄까?' 그런 불안감이 컸어요. 학교에서 겪는 어려움은 오롯이 제 몫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아버님도 힘드셨겠죠. 입학식 날, 어머니 손을 잡고 학교에 갔습니다. 입학식은 정말 드라마틱했어요. 운동장에 들어서는 순간, 3천 명 아이들의 시선이 저희 모자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한 반에 60명씩, 1학년이 4반까지 있었고, 2부제 수업을 해서 오전반, 오후반 아이들이 모두 입학식에 참석했거든요. 48개 학급, 3천 명 아이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었는데, 저희 모자가 나타나자 모든 시선이 저희에게 쏠렸습니다. 마치 동물원 원숭이를 구경하듯, 신기한 듯 저희를 쳐다봤어요. 3천 명의 시선이 এক꺼번에 쏟아지는 경험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웠어요. 아이들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듯했습니다. 그때 받은 트라우마 때문에, 다음 날 학교에 어떻게 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밤에 오줌을 쌌던 것 같아요. 너무 긴장해서요. 하지만 입학 후에는 학교 생활에 잘 적응했습니다. 4학년 때, 제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주영훈) "4학년 때 어떤 사건이 있었나요?" (김요셉) "4학년이 되면서 6교시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 2, 3학년은 오전반, 오후반 2부제 수업을 했지만, 4학년부터는 하루 종일 학교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죠. 점심도 학교에서 먹고, 오후 수업까지 마친 후 집에 갔습니다. 4학년 담임 선생님은 최정숙 선생님이셨는데, 저를 খুব 좋아하셨어요.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너희는 이제 4학년 형님, 누나가 되었으니, 내일부터 도시락을 싸 오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일본어 '벤또'라는 말을 많이 썼어요. 집에 가서 어머니께 '엄마, 내일부터 도시락 싸 가야 해.'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 양은 도시락에 신문지를 싸서 다음 날 아침에 챙겨주셨습니다. 3학년 때까지는 소풍날 딱 한 번 도시락을 싸 갔었는데, 왠지 소풍 가는 기분이었어요. 다음 날 학교에 갔는데, 도시락 시간 풍경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인계국민학교는 당시 수원에서 16개 국민학교 중 가장 가난한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였습니다. 지금은 많이 발전했지만, 당시에는 그랬어요. 도시락을 못 싸 오는 아이들이 반에 10명 정도 되었고, 도시락 반찬도 변변치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콩자반, 닭 꽝 같은 반찬이 대부분이었죠.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웅성웅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반찬 뭐 싸왔어?'라고 물어보면서 도시락 뚜껑을 열어봤습니다. 어머니께서 도시락을 싸주시면서 '점심시간 전까지 절대 열어보지 마라.'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제가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 몰래 열어볼까 봐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저를 '요셉이는 순종을 잘한다.'라고 칭찬하시면서도, '너는 잡종인데 왜 이렇게 순종을 잘하니?'라고 농담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도시락 시간이 되었고, 아이들이 하나둘씩 도시락 뚜껑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아이가 도시락 뚜껑을 열었는데, 꽁보리밥에 콩자반만 들어있는 거예요. 아이들이 '에이...' 하면서 실망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마치 반찬 오디션이라도 보는 듯한 분위기였어요. 두 번째 아이가 도시락 뚜껑을 열었는데, 흰쌀밥에 계란 프라이, 장조림이 들어있는 거예요.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그 아이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고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아, 콩자반 싸주시면 안 되는데...' 아직 도시락 뚜껑도 열어보지 않았는데, 왠지 콩자반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제가 교회 다니는 것을 아니까, 식사 기도하는 줄 알았겠지만, 사실 식사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어요. 친구들에게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고, 촌스러운 콩자반 도시락 때문에 놀림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콩자반 도시락을 싸왔을까 봐 너무 불안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콩자반이 아니게 해주세요. 콩자반 도시락이라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장조림으로 변하게 해주세요!' 도시락 뚜껑을 열었는데, 웬걸, 어머니께서 샌드위치를 싸주신 거예요. 햄, 치즈 샌드위치였습니다. 왜 샌드위치를 싸주셨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가 큰아들이고, 어머니께서 한국에서 도시락을 싸본 적이 없으셨던 거예요. 미국에서는 도시락으로 샌드위치를 자주 싸줬으니까, 익숙한 샌드위치를 싸주신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에 샌드위치를 খুব 좋아했던 것도 감안하신 것 같고요. 하얀 빵에 치즈, 햄을 넣고 따뜻하게 구운 샌드위치는 정말 꿀맛이었거든요. 학교 가기 전 아침 식사로 샌드위치를 자주 해주셨습니다.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싸주신다고 어머니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신 거죠. 하지만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아이들의 반응이 문제였습니다. 저는 장조림처럼 환호하는 반응을 기대했지만, 아이들은 샌드위치를 처음 보는 듯했습니다.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교실이 এক순간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웅성웅성하던 아이들이 조용해지고, 제 도시락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예요. 샌드위치를 처음 봐서 낯설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원에 롯데리아가 처음 생긴 게 85년도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갔던 때는 60년대 말, 70년대 초였으니, 아이들이 샌드위치를 접해볼 기회가 없었던 거죠. 특히 저희 학교는 수원 변두리 지역, 가난한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였으니까요. 샌드위치를 처음 본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제 도시락을 뚫어져라 쳐다봤습니다. 마치 120개의 눈알이 제 샌드위치를 쫓아오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아이들이 '저거 어떻게 먹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왠지 샌드위치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너는 튀는 존재야. 너는 미국 놈이야.'라고 손가락질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동안 놀림 받았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샌드위치를 먹는 순간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았습니다. 샌드위치를 들고 억지로 한 입 베어 물었는데, 도저히 더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시선을 차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샌드위치를 도시락에 던져 넣고, 책가방을 팽개치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대로 집까지 정신없이 뛰어갔어요.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왔습니다. 샌드위치 사건은 제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모든 게 어머니 탓인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샌드위치를 싸주는 바람에 내 인생이 망쳐버렸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어쩌면 내 허락도 없이 백인 여자와 결혼한 아버지 탓일지도 몰라.'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화가 난 건지, 원망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어머니에게 가장 큰 화가 났던 것 같아요. '왜 엄마는 미국 사람일까? 왜 다른 집 엄마들은 다 한국 사람인데, 내 엄마만 미국 사람일까?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나에게만 이렇게 불공평하실까?' 어린 마음에 하나님께 주먹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께서는 빨래를 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들어오는 소리를 못 들으셨는지, 여전히 빨래에만 집중하고 계셨어요. 저는 동생과 함께 쓰는 방으로 곧장 들어가 2층 침대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었습니다.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서럽게 울었어요. 빨래를 하시던 어머니께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인기척에 울음을 멈추고 어머니를 올려다봤는데, 어머니께서 가까이 다가와 '요셉, 왜 그래?'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울먹이며 '엄마 때문에 내 인생 망했어! 왜 샌드위치 싸줬어!'라고 소리쳤습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셨어요."

어머니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김요셉) "글쎄요, 어머니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던 것 같아요. 아니,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어머니께 여쭤본 적도 없고요." (주영훈) "아, 그러시군요." (김요셉) "어머니께서는 저를 꼭 안아주시면서, 단 한마디 말씀하셨습니다. 영어로 'I understand.'라고 하셨어요. '엄마는 네 마음을 이해한다.'라는 뜻이었겠죠. 뺑코라고 놀림받고, 엄마랑 함께 다니면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제 아픔을 어머니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께 '엄마, 우리는 왜 한국에 왔어? 미국에 가면 안 돼? 우리 그냥 여기서 안 살면 안 될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처음으로 제게, 왜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를 안아주시면서, '요셉아, 엄마가 왜 한국에 왔는지 제대로 말해준 적이 없는 것 같네. 엄마 아빠가 결혼하고 너희를 데리고 한국에 온 이유는, 미국에서 살아도 괜찮지만, 아빠 가족들이 아무도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이야.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사촌들 모두 예수님을 전혀 몰라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알려주려고 한국에 온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영어로 설명해주셨어요. 지금 제가 한국말로 번역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머니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엄마가 생각해보니, 요셉이도 예수님을 만나야 할 것 같아.'라고요. 저도 아이들을 키워봐서 알지만, 4학년짜리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절망에 빠진 어린 아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물론 어릴 적이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머니께서 제게 해주셨던 말씀은 또렷이 기억납니다. 영어로 'Jesus loves you. He loves you just the way you are.' 예수님께서는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 말씀은 제게 정말 복음처럼 다가왔습니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신다고?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때까지 저는 그런 사랑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죄송하지만, 한국 사회에는 인종차별이 없을지 몰라도, 다른 모습,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문화는 부족한 것 같아요.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제게,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기도할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 후, 어머니께서는 또 한마디 말씀을 더해주셨습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이 제게 가장 큰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영어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Jesus loves you just the way you are. 요셉아, 예수님께서는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 But he loves you so much, he is not going to leave you just the way you are.'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를 지금 모습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으실 거라고요. 지금 저는 목사로서 설교를 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때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말씀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셨지만, 아들을 향한 사랑과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하나 되어, 저를 예수님께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예수님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굳건히 자리 잡게 되었죠.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제 정체성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제가 어떤 존재인지 어린 마음에도 분명히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지만, 지금 모습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어머니의 말씀은 제 삶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제 안에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보통 그런 환경에 처하면 어머니 말씀을 안 듣고 삐뚤어지거나 엇나갈 수도 있는데, 복음이 목사님께는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신 거죠. 고등학교 졸업 후 25살 때까지 한국에서 사셨다고 하셨는데, 한국에서 계속 사셨던 이유가 있으신가요? (김요셉) "네, 맞습니다. 저는 88년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전까지는 한국에서 쭉 살았죠. 수원에서 태어나 온갖 놀림을 받고, 아버지의 고지식함 때문에 한국 학교를 고집해야 했던 지난날들이 때로는 제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내 팔자려니, 어쩔 수 없지.' 체념하듯 받아들이기도 했고요. 85년도, 25살 때 처음으로 미국 테네시주에 있는 링컨 메모리얼 대학교에 갔다가 시카고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시카고에서 처음으로 한인 교포 사회를 접하게 되었는데, 정말 놀라웠습니다. 85년도 당시 25살밖에 안 되었던 제가 시카고 한인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국 아이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저와 정반대의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겉모습은 한국인이지만, 한국말을 잘 못하거나 아예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미국 백인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죠. 저는 금발 백인들 틈에서 튀는 존재였지만, 그 아이들은 백인 사회에서 동양인으로 튀는 존재였습니다. '검은 오리 새끼들 틈에 낀 하얀 백조'였던 저와는 정반대로, '백조들 틈에 낀 검은 오리 새끼'처럼 자신을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86년, 아니 88년도였던 것 같아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님이 LA에서 컴패션 앤 머시라는 대규모 집회를 여셨습니다. 저는 당시 총각 전도사였는데, 그 집회에 강사로 초청받았습니다. 1천 5백 명 청소년들이 모인 집회였는데, 제가 간증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샌드위치 이야기,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 등 제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정체성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30분 정도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LA 코리아타운에 살던 한국 아이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백인 전도사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한다는 소문이 나서 아이들이 몰려왔다고 하더라고요. 간증 후, 많은 아이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단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문신을 하고 피어싱을 한 불량 청소년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궁금해서 몇 명 붙잡고 물어봤습니다. '너희는 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니?' 아이들은 '전도사님 간증이 바로 우리 이야기 같았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너희도 뺑코라서 놀림받았니?'라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아니요, 저희는 납작코라고 놀림받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전도사님이 샌드위치 이야기했을 때, 정말 우리 이야기 같았어요.'라고 덧붙였습니다. '너희 엄마도 샌드위치 싸줬니?'라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고개를 흔들며 '아니요, 저희 엄마는 김치, 시금치, 꽁치, 멸치 같은 반찬을 싸줬는데, 학교에서 냄새난다고 놀림받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그들에게도 똑같은 메시지를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어로 'Jesus loves you just the way you are. 하나님께서는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 너희가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 But he loves you so much, he is not going to leave you just the way you are.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희를 지금 모습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으실 것이다.' 간증 집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이렇게 특별하게 만드셨을까? 혹시 이때를 위해서 나를 준비시키신 것은 아닐까?' 6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 교포 1세대는 많지 않았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진학했던 80년대 중반부터 한인 이민이 급증하기 시작했고, 미국 곳곳에 한인 교회가 세워졌지만, 교포 2세, 3세들의 아픔과 정체성 혼란을 이해하고, 영어와 한국어로 동시에 소통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역자는 부족했습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이나, 외모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저는 제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많이 늙었지만, 젊은 시절에는 꽤 잘생겼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물론 잘난 척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 말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라도, 내면의 자존감이 낮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아무리 예쁘다고 칭찬해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저는 복음 메시지가 바로 그 지점에서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존중하신다는 메시지. 제가 설교할 때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도박으로 패가망신했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받아주실까요?' '저는 이혼했는데, 교회에서 받아줄까요?' 제 대답은 늘 같습니다. 'Jesus loves you just the way you are.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저는 이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인생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주영훈) "목사님 말씀이 마치 설교의 한 대목처럼 느껴지네요.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아까 결혼 이야기를 잠깐 하셨잖아요. 결혼할 수 있을까 걱정하셨다고... 지금은 결혼하셨죠?" (김요셉) "네, 결혼했습니다. 아내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주영훈) "아, 결혼하셨군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아내분과는 어떻게 만나셨는지, 러브스토리가 궁금해지네요." (김요셉) "아, 제 아내 이야기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영훈) "고등학교 3학년 때요? 흥미진진하네요." (김요셉) "고등학교 3학년은 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께서 저를 조용히 방으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아, 이제 곧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될 텐데, 아빠가 네게 해줄 이야기가 있다.' 아버님께서는 미국 유학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야기한다. 한국에서는 어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버릇없다고 혼나지만, 미국에서는 눈을 피하면 거짓말하거나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미국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반드시 눈을 쳐다보면서 이야기해야 한다.' '아빠는 영어가 서툴러서 발음이 좋지 않았는데, 구슬을 입에 넣고 발음 연습을 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항상 편지를 써라. 땡큐 노트를 잊지 말고 써라.' 등등, 미국 유학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팁들을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셉아, 아빠는 네 기도 제목이 있다.' '기도 제목이요? 어떤 기도 제목이신데요?' '아빠가 미국에서 공부해보니, 미국 여자들은 정말 예쁘더라.' 아,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네요. (웃음) '미국 여자들이 정말 예쁘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예, 예쁘다고요?' '아빠는 네가 미국에 가서 예쁜 여자들에게 한눈팔까 봐 걱정된다. 아빠는 매일 기도할 거다. 네가 미국에 가더라도 예쁜 여자들에게 눈길 주지 않고, 꼭 한국 여자와 결혼하기를 기도할 거다.' 아, 정말 황당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미국 여자와 결혼하시고, 아들은 꼭 한국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시니... 좀 억울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김요셉) "아버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마치시고 방에서 나오셨습니다." 저는 곧장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엄마, 아빠가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세요? 미국 여자 쳐다보지도 말래요. 미국 여자와 데이트도 하지 말래요. 엄마도 아빠 말씀에 동의하세요?' 어머니께서는 직접적으로 '동의한다, 안 한다'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엉뚱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요셉아, 너는 큰아들이잖아. 한국 문화에서는 큰아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거 알지? 우리도 35년째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잖니.' 네, 저희 어머니는 정말 효녀셨습니다. 큰아들이 부모님을 모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셨어요.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너 생각해봐라. 네가 결혼하면 우리 집에 여자가 둘밖에 없어. 엄마하고 네 아내. 아빠는 늘 교회 일로 바쁘시고, 너도 직장 나가면 집에는 여자 둘만 남게 될 텐데, 엄마 같은 며느리가 들어와야 하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정말 멘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한국 며느리, 어머니는 미국 며느리를 원하시는 건가? 혼란스러웠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 금요일 밤이면 캠퍼스 커플들이 데이트를 즐기곤 했습니다. 저도 금발의 예쁜 백인 여학생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었지만, 고향에 계신 아버지의 '나는 기도하고 있단다.'라는 음성이 귓가에 맴돌아 차마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없었습니다. '데이트 좀 하면 어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습니다. 제가 좀 '잡종 기질'이 있어서 순종을 잘하는 편입니다. (웃음) 아버지 말씀 때문에 데이트를 포기한 건 핑계일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백인 여성에게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던 마음도 있었습니다. 백인 여성들 앞에서면 괜히 주눅 들고, 영어 울렁증도 심해지곤 했으니까요. 한국 학생 두 명이 캠퍼스에 있었습니다. 한국 여성들은 외모는 제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국인이니까 데이트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엄마 같은 며느리...' 결국 4년 동안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못 하고, 공부만 열심히 했습니다.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주말 내내 도서관에서 공부만 했으니, 당연히 성적은 좋을 수밖에요. 4학년이 되었을 때, 문득 심각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한국 며느리, 어머니는 미국 며느리를 원하시는데, 저는 누구와 결혼해야 할까요? 답답한 마음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너무 억울합니다. 어릴 적 혼혈아로 태어나 놀림받았던 것도 억울한데, 결혼 상대까지 부모님 뜻대로 정해야 하다니요. 하나님, 정말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엄마는 미국 며느리, 아빠는 한국 며느리 원하시는데, 저는 누구와 결혼해야 할까요? 혹시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두 명 다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시는 건가요?'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하면서 괴로워했습니다. 신학교에 진학해서도 결혼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였습니다. 그러던 중, 캘리포니아 LA에서 열린 한인 청소년 집회에 강사로 초청받게 되었습니다. LA는 정말 천국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전도 집회 간증하러 가서 딴 생각이나 하고... 하지만 솔직히 LA는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LA 한인 교회들은 규모도 크고, 예쁜 여성 교인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미국 여자들은 예쁘다.' 아버지는 한 가지는 아셨지만, 두 가지는 모르셨던 것 같아요. LA에는 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고생은 전혀 모르고 자란, 예쁘고 세련된 교포 2세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당시에는 아내가 아니었지만요. 부모님은 한국에 계셨고, 저는 LA에서 아내와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아내는 8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가서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말은 서툴렀지만, 영어는 유창했습니다. 저는 영어를 잘 못하고, 아내는 한국말이 서툴러서, 서로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가며 대화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대화가 잘 통했습니다. 아내를 만나면서 저도 영어가 많이 늘었습니다. 아내도 저를 만나면서 한국어가 많이 늘었고요. 데이트를 하면서 점점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고민이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미국 며느리, 아버지는 한국 며느리를 원하시는데, 과연 아내를 부모님이 좋아하실까?' 부모님께서는 곧 LA를 방문하실 예정이었습니다. 저도 LA로 가서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부모님과 아내가 처음 만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내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시며 껴안아주셨습니다. 아직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는데, 외모만 보고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역시 단순하셨습니다. (웃음) 겉모습만 보고 '오케이' 하신 거죠. 하지만 어머니는 좀 달랐습니다. 미국 며느리를 원하셨지만, 왠지 탐탁지 않아 하시는 눈치였습니다. 셋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며칠 더 시간을 보낸 후, 부모님과 호텔 방에 함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화장실에 가셨고, 어머니와 단둘이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조심스럽게 여쭈었습니다. '엄마, 아내 될 사람 어때요?' 어머니께서는 뜸들이시다가, 갑자기 '걔는 바나나야.'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바나나'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죠?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껍데기는 한국인이지만 속은 미국인이라는 뜻으로 교포 2세를 비하하는 표현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걔는 바나나야. 걔는 속으로 완전히 미국 사람이야. 엄마랑 똑같아. 걔 음식 먹는 것 보니까, 한식보다 양식을 더 좋아하고, 젓가락질도 어색하고, 매너도 영락없는 미국 사람이야. 선물 받을 때 포장이 중요하니, 내용물이 중요하니? 걔는 포장보다 알맹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미국 사람이야.' 어머니께서는 아내를 '바나나'라고 폄하했지만, 저는 오히려 기뻤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내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구나! 속으로는 미국 며느리를 원하셨던 거야!' 그때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70년대 초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민 보내시고, 그중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좋아할 만한 '코리안 아메리칸' 며느리를 예비해두셨다니! 정말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는 아내를 바나나라고 했는데, 그럼 나는 뭘까? 나는 겉만 한국인이고 속은 미국인일까, 아니면 겉과 속이 모두 한국인일까?' 어머니께 여쭈었습니다. '엄마, 그럼 나는 뭔데? 나는 바나나야, 아니면 귤이야?' 어머니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너는 계란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란? 왜 계란인데?' '너는 겉은 하얗지만, 속은 완전히 노랗잖아.' 그 말씀을 듣고,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아하! 그럼 결혼하면 분식집을 차려야겠다! 분식집 이름은 '계란이, 바나나를 만날 때'로 지으면 딱이겠네!' 아, 죄송합니다. 또 아재 개그를... (웃음) 결국 아내와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아,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죄송합니다. 결혼 후에도 에피소드는 많지만, 다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제가 이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말씀드렸냐면, 어릴 적부터 미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면서 두 문화를 경험했고, 아내와 결혼하면서 또다시 두 문화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미국인 어머니 때문에 놀림받는 것이 짐처럼 느껴졌지만, 아내를 만나면서 아내의 정체성, 저의 정체성이 묘하게 일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치 오랜 짝을 만난 것처럼 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결혼 후에도 계속 행복하게 잘 사셨나요? 아내분과 찰떡궁합으로 운명처럼 만나셨으니, 싸움 한 번 없이 행복하게 사셨을 것 같은데요? (김요셉) "아, 이정수 님은 정말 예리하시네요. 마치 제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요. 혹시 심리학 전공하셨나요? 왜 이렇게 객관적으로 상황 파악을 잘하시죠? 걔그맨 안 하신 게 천만다행입니다." (주영훈) "그러게요. 이정수 씨, 걔그맨 안 하신 게 정말 다행이네요." (김요셉) "아니요, 결혼 후에도 싸움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주영훈) "아, 역시 그렇군요. 두 분 다 성격이 워낙 좋으셔서 안 싸우실 줄 알았는데..." (김요셉) "남자는 다 똑같습니다. 믿으면 안 돼요." (주영훈) "아, 갑자기 남자를 싸잡아서 비난하시는 건 좀..." (김요셉)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좀 심했나요? 남자 대표로 사과드립니다." (주영훈) "아닙니다. 농담이시죠? 목사님, 설마 진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시겠죠?" (김요셉) "아, 농담입니다. 농담이에요. 물론 아내와 잘 살고 있지만, 부부 싸움은 피할 수 없더라고요. 특히 저희 부부는 문화 차이 때문에 갈등이 더 잦았던 것 같아요." (주영훈) "문화 차이요? 어떤 문화 차이 때문에 갈등이 있었나요?" (김요셉) "아내와 저는 자라온 문화가 워낙 달라서, 가치관, 사고방식, 생활 습관 등 모든 면에서 차이가 컸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서 '정(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아내는 미국 문화에 익숙해서 '합리성'과 '개인주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밥을 먹을 때 찌개 하나를 놓고 다 같이 떠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내는 개인 접시에 덜어 먹는 것을 선호합니다. 저는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내는 샤워만 간단하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달랐어요. 문화 차이뿐만 아니라, 성격 차이도 컸습니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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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의 증거(연역적 추론)

6. 신의 증거(귀납적 증거)

7. 신의 증거(현실적인 증거)

8.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9. 성경의 사실성

10. 압도적으로 높은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12.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

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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