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의미와 영원을 향한 삶의 소망, 성경적 해답 찾기
영원을 향한 고통의 의미
인생은 고통일까요? 고통 속에서 낙심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 알아볼까요?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는 말, 혹시 공감하시나요? 중학교 2학년 학생도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말할 정도인데요, 숙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합니다. 물론 이유는 다를 수 있지만, 12년이라는 짧은 인생 경험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본질을 꿰뚫어 본 듯하여 놀라웠습니다. 실망, 상실, 고통 없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도 깨달았다니, 정말 놀랍지 않나요?
만약 고통을 피해 갈 수 없다면, 우리의 질문은 달라져야 합니다. “어떻게 평생 아프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가 아니라, “어떻게 고통 가운데서도, 상실과 실망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 되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마주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깨어진 관계, 깨진 가정, 깨져버린 기대와 소망 속에서 낙심하지 않기, 과연 가능할까요?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그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 말입니다. 그리고 더욱 감사하게도, 사도 바울은 그 비밀을 성경에 상세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은 바로 그 비밀을 담고 있는데요, 함께 살펴볼까요?
겉사람은 낡아가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16) 사도 바울은 낙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만큼 매를 맞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하고, 감옥에 갇히고, 굶주림과 헐벗음까지 겪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이기에,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낙심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고백이 가능했을까요?
사도 바울이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속사람’에 있었습니다. 환난과 고통을 통해 겉사람은 낡아지고 쇠퇴해 가지만, 그 속에서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솟아나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낡은 겉모습과는 달리, 내면은 싱싱하게 유지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들으면 이런 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나요? “내 몸은 병들어 부서져 가고, 가정은 깨어지고, 사업은 망했는데, 속사람이 새로워진다고요? 말도 안 돼요!”
왜 사도 바울은 고통 속에서 속사람이 새로워진다고 확신했을까요? 16절과 17절 사이에 숨겨진 접속사, ‘for’ 즉 ‘왜냐하면’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왜냐하면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린도후서 4:16-17) 여기서 핵심 단어는 바로 ‘이루게 하다’ 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prepare’ 즉 ‘준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겉사람의 낡아짐과 속사람의 새로워짐,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두 가지가 ‘이루게 하다’ 라는 단어 안에서 조화롭게 연결됩니다. 우리의 겉사람을 부수고 낡게 만드는 고통이, 역설적으로 속사람을 영원한 영광을 위해 준비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속사람은 영원한 것을 담을 수 있도록 빚어지고, 성장하고, 준비되어 갑니다. 성경은 이 과정을 ‘속사람이 새로워진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여전히 이런 의문이 남습니다. “이 쓸모없어 보이는 고통이 어떻게 나를 영원을 위해 준비시킨다는 걸까요?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고통은 어떻게 우리를 영원으로 향하게 할까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서 16절부터 18절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왜냐하면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16-18) 고통이 우리를 영원한 영광을 위해 준비시키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시선’ 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도록 이끌어줍니다. 군대에 가면 우리는 ‘저녁’ 즉 제대 날짜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죠. 학생들은 불만족스러운 현실 속에서 졸업 후의 미래를 꿈꿉니다. 만약 우리가 상실, 실패, 고통 없이,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영원한 것을 갈망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눈앞의 것들로 만족하는데, 굳이 보이지 않는 영원을 생각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고통, 상실, 죽음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90년 남짓한 짧은 인생이 전부가 아니다. 영원한 세계가 있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나라와 영원히 살아갈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식하게 됩니다. 고통이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원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쉽게 낙심합니다. 텅 빈 통장 잔고, 실망스러운 성적표, 거울 속 늙어 보이는 얼굴, 깨어진 관계… 이런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리를 낙심시키려고 할 때,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감아보세요. 눈을 감으면 무엇이 보이나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죠. 바로 그때, 이 진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낙심하지 않도록 붙들어 줄 것입니다.
정신승리? 철학적 관념? 영원한 소망의 실체는?
물론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말은 좋지만, 정신승리와 뭐가 다르죠? 철학적, 종교적 관념일 뿐 아닌가요?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떻게 실제적인 소망을 줄 수 있나요?”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에게,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아십니까?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아십니까?”
성경은 그 사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4)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영원한 것이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믿음을 걸어야 한다는 막막함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스스로 보이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종교적 관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자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통해, 우리의 고통은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죽음은 절망적인 끝이 아닌 영원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비극적인 존재는 영원한 희극, 해피엔딩으로 바뀔 수 있다는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올 때 겪는 고통은, 산모보다 10배나 더 극심하다고 합니다. 아기는 좁고 어두운 뱃속에서,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터널을 지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아파야 하지? 따뜻하고 편안한 뱃속이 훨씬 좋은데… 이 고통은 무의미해!”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기는 곧 뱃속 밖에는 전혀 다른 세상, 아름다운 빛과 색깔, 사랑하는 부모의 품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속사람은 영원을 향해 끊임없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 진리가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고, 영원한 소망으로 가득 채우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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