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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구개열 의사 이기병 교수의 고통과 공감, 삶의 이야기

요약

연결된 고통: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의사의 따뜻한 시선

연결된 고통,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습니다: 이기병 교수님의 깊이 있는 이야기와 공감의 힘

안녕하십니까, 새롭게 하소서의 주영훈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정수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형태의 고통을 경험합니다. 신체적인 아픔일 수도 있고, 마음의 상처일 수도 있죠.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느낄 때, 고통은 더욱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네, 맞습니다. 오늘 "새롭게 하소서"에서는 특별한 분들을 모셨습니다. 과거 낮은 자존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시는 분들입니다. 오늘 방송이 고통 속에 계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큰 위로와 공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모실 분은 내과 의사이자 의료인류학을 연구하시는 한림대학교 춘천성심병원의 이기병 교수님입니다.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교수님께서는 젊어 보이시는데, 백발이 아주 인상적이십니다. 오히려 젊은 감각이 느껴지는데요? 아, 감사합니다. 사실 백발이 된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오히려 환자분들께서는 제 백발을 더 좋아하시더라고요. (웃음) 보통 교수님 정도의 위치에 계시면 학창 시절 공부도 매우 잘하셨을 것 같고, 자존감도 높으셨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오프닝에서 낮은 자존감 때문에 힘든 시기가 있었다고 말씀하셔서 의외였습니다. 자존감이 낮았던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제가 선천적으로 구순구개열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구순구개열은 입술과 입천장이 갈라져서 태어나는 선천 질환인데, 이로 인해 발음과 양악 성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성장기에는 더욱 민감하게 관리가 필요하죠. 저는 돌 무렵에 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에도 발음을 교정하기 위해 언어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성장하면서 얼굴 모습이 계속 변하고, 발음도 완전히 자연스럽지 못하다 보니,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면서 자존감이 많이 낮아졌던 것 같습니다. 수술 시기가 너무 늦어도 안 좋고, 너무 빨라도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린 시절 겪으셨던 콤플렉스 때문에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콤플렉스가 있었지만, 외아들이었던 저를 부모님께서 정말 많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자존감이 더욱 낮아졌습니다. 특히 청소년 시기에는 자존감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스스로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셨는데, 저는 스스로 밥을 제대로 챙겨 먹기보다는 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거나, 잠을 제대로 자지 않는 등 건강하지 못한 생활 습관을 가졌습니다. 마치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처럼요.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제 삶의 가치를 낮게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지금은 이해가 되지만, 그때는 왜 그랬는지 저 자신도 잘 몰랐습니다. 약속 시간도 잘 지키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여러 가지 문제를 겪게 되는데,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당시에는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혹은 약속에 나가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 약속에 늦거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이유를 돌이켜보면, 나 하나쯤 빠져도, 혹은 내가 약속을 어겨도, 사람들은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단정 지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애정을 쏟아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상처와 콤플렉스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학대했던 시기였군요. 그러다가 어떻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셨나요?

제가 처음 교회를 간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당시 남자 고등학생들이 교회를 가는 이유는 뻔했습니다. 여자 친구를 사귀거나, 아니면 교회에서 주는 간식 때문이었죠. (웃음) 저는 딱히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간식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얼떨결에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교회에 예쁜 누나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웃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예쁜 누나들 때문에 교회를 계속 다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회에 있는 시간이 왠지 모르게 편안했고, 제가 그곳에 있다는 것, 존재 자체에 의미를 찾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2학년 겨울, 교회 동계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수련회는 보통 찬양하고, 말씀 듣고, 마지막 날 밤에는 통성기도를 하는 순서로 진행되는데, 저는 처음 경험하는 통성기도 시간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여기는 광신자 집단 같다, 여기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숨었습니다. (웃음) 그런데 친구들이 저를 찾아냈어요. ‘내일은 반드시 도망가리라’ 다짐하며 첫날 밤을 보냈지만, 다음 날도 어영부영하다가 도망치지 못하고 수련회에 계속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집회 시간, 도망갈 곳도 없고 해서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저를 잘 알지도 못하는 교회 친구들과 형, 누나들이 와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의아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나 때문에 울지? 왜 나 때문에 마음을 쓰고, 시간을 쏟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저에게 ‘당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처음으로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기도해도 되나요?’ 라고요. 그 순간이 제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나’라는 존재에 대해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고,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했던 것이죠.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진솔한 기도를 드린 후에, 삶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나요?

네, 먼저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인간관계에 서툴렀는데, 친구들 중에는 그런 저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 친구가 저에게 편지를 써 준 것입니다. 편지 내용은 꽤 직설적이었습니다. ‘나는 네가 싫다’는 내용이었어요. 보통 이런 편지를 받으면 상처를 받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그 편지의 내용이 저에게 와닿았습니다. 친구는 ‘나는 너를 싫어하고 싶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약속을 안 지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모습 때문에 너를 좋아하고 싶어도 싫어하게 된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싶기 때문에 이 편지를 쓴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미 ‘나도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친구의 편지를 통해 ‘내가 약속을 잘 지키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정말 좋은 친구네요. 남자끼리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흔치 않은데, 그 친구는 진심으로 교수님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친구의 진심 어린 편지를 계기로 꿈이나 비전도 갖게 되셨나요?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는 시점에, 맹장 수술 후유증으로 병원에서 피를 토하고 두 달 정도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입원 기간 동안, 이전에는 되고 싶은 직업이 없었는데, ‘의사라는 직업은 아픈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지만, 당시 제 성적으로는 의대에 진학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의사라는 꿈을 꾸게 되면서 ‘정말 한번 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생겼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시작할 무렵,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어머니께서 사업을 하시다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시고, 집안 형편이 기울기 시작한 것이 고3, 수능을 앞둔 예민하고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어머니의 빚이 아버지에게까지 이어지면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께서 퇴직금을 사업 자금으로 탕진하시고, 결국 부모님은 법적으로 이혼까지 하셨습니다. (물론 나중에 다시 재결합하셨습니다.)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죠.

공부를 시작하셨다고 하셨는데, 원래 공부를 잘하셨나요? 저희도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원래 공부를 잘했던 사람들은 조금만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더라고요. 제가 가장 못했던 과목은 수학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겠지만, 수학을 못하면 치명적이죠. (웃음) 수학 성적이 안 나왔던 이유는, 솔직히 말하면 공부를 안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늦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다행히 영어와 국어는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수학은 정말 기초가 부족했습니다. 현역으로 치른 수능에서 수학 점수가 80점 만점에 41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1년 동안 수학에 집중해서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오히려 저에게는 그것이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학원 갈 형편이 안 되어서, 독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죠. 학원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고, 제가 주도적으로 학습 계획을 세우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과목인 수학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1년 동안 도서관에 틀어박혀 수학 공부만 했습니다. 독학으로요. 저는 그 시간이 정말 좋았습니다. 수학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요? 수학 정석 보셨나요? 저도 수학 정석 봤습니다. 기본 편이 있고, 연습 편이 있는데, 연습 편 표지가 초록색이잖아요. 저는 실력이 안 되는데 괜히 자존심 때문에 연습 편 표지를 기본 편에 씌워서 들고 다녔습니다. (웃음) 얼마나 오랫동안 공부하셨나요?

당시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저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끈기 있게 오래 앉아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하루에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공부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했습니다. 억지로 한 것은 아니고, 하루 학습량을 정해놓고, 그 학습량을 채우려면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래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꾸준히 공부하니까 수학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은 없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으셨나요? 사실 오래 앉아 있다 보니 골반 밑에 염증이 생겼습니다. 골반염이었죠.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웃음) 재수할 때 골반염 때문에 꽤 고생했습니다. 앉아 있기가 힘들어서, 나중에는 엎드리거나 누워서 공부해야 했습니다. 오래 앉아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1시간마다 일어나서 스트레칭이라도 해야 합니다. (웃음) 기적처럼 의대에 합격하셨습니다. 고3 때부터 공부하셨다고 하셨는데, 정말 압축적으로 공부하신 거네요.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공부를 잘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이 물어보시는데, 저는 ‘목표를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표가 있어야 공부를 하게 되죠. 학생들이 공부를 통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목표를 발견하도록 돕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어머니께서도 편찮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자궁에 종양이 있다는 진단을 받으셨는데, 수능 시험을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악성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골반염 때문에 몸도 아프고, 치아 문제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장염에도 시달리고, 스트레스도 극심한 상황이었는데, 어머니까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당시 친구가 다니던 교회에서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을 위한 기도회를 한다고 해서,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억지로 간 것은 아니고, 예배드리는 것이 싫지 않아서, 그냥 좋아서 갔습니다. 기도회 자리에서 목사님께서 수능 시험을 보는 사람들은 다 일어나라고 하시고, 축복 기도해주셨습니다. 그날 아침 묵상했던 말씀이 디모데후서 4장 7-8절 말씀이었는데, 목사님께서 기도하시면서 “여기 서 있는 자들이 달려갈 길을 다 달려왔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 말씀처럼요.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울고 싶지 않았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원래 남들 앞에서 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거든요. 그때 하나님께 ‘저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못 달리겠어요.’라고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달려갈 길을 다 달려왔다는 말씀이 맞나요?’라고 묻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확히 어떤 감정이었는지,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때 저를 인정해주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네가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다는 것을 내가 안다’고 말씀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마음의 평안을 얻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어머니는 양성 종양 판정을 받으셨고, 수술 후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의대에 합격하면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하셨는데, 합격증을 보여드리니 그때부터 교회에 나가시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잠깐 나가시다 안 나가셨습니다. (웃음) 의과대학 졸업 후, 봉사 단체와 함께 해외 의료 봉사 활동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대학생 때 캄보디아로, 의사 면허를 따고 난 후에는 아프리카로 의료 봉사 활동을 다녀왔습니다. 해외 의료 봉사 활동을 통해 언어와 문화가 다른 환자들을 만나면서, 의사로서 어떤 어려움을 느끼셨나요? 저는 해외 의료 봉사 활동을 통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며, 아픔을 표현하는 방식도 문화마다 다를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의료 현장에서는 언어와 문화 차이로 인해 환자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는 환자들이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의료 시스템 자체가 한국과 너무 달라서, 제가 가진 의학 지식과 기술을 제대로 적용하기 어려웠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고, 문화가 다르니 환자들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의료 봉사 활동과는 너무 다르다’는 괴리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과연 환자들에게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자문하게 되었고, 의사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부족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봉사 활동 당시, 에이즈 환자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의 고통과 절망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에이즈는 치료제가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심하고,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어떤 환자들을 주로 만나셨나요? 귀국 후에는 대학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면서 다양한 환자들을 만났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오신 분들도 계셨고, 동남아시아에서 오신 분들도 계셨고, 가장 많았던 분들은 조선족 환자분들이셨습니다. 병원이 서울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근처에 거주하시는 조선족 분들이 많이 오셨던 것 같습니다. 전체 환자 중 60% 정도가 조선족 환자였던 것 같습니다. 문화적 습관이나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 때문에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네, 말씀하신 것처럼 문화적 차이로 인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컸습니다. 사실 이것이 제가 의료인류학을 공부하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조선족 환자분들의 경우, 언어가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습니다.

조선족 환자분들이 진료실에 오셔서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라고 물으면, 한두 군데가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8가지, 10가지가 넘는 증상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결리고, 다리도 저리고, 소화도 안 되고, 잠도 안 오고… 이런 식으로요.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곳이 동시에 아플 수 있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환자분이 과장해서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진료를 잘못하고 있는 것일까?’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어디가 가장 불편하세요?”라고 묻거나, “가장 아픈 곳 한 군데만 말씀해 주세요.”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계속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나중에는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응급실은 환자들이 계속 밀려오고, 한 사람에게만 시간을 쏟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학적 진단은 환자의 증상을 듣고, 특정 장기의 문제로 좁혀 들어가서 진단을 내리는 과정인데, 8가지, 10가지 증상을 이야기하면 온갖 장기들을 다 검사해야 하고, 진단이 복잡해집니다. 짧은 시간 안에 정확하게 진단하기 어려워지는 것이죠. 그래서 답답하고, 화도 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러던 중, 의료인류학을 공부하는 후배 한 명이 필드 연구를 하겠다며 저희 병원에 찾아왔습니다. 당시 저는 의료인류학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후배와 밥을 먹다가, 무심코 조선족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털어놓았습니다. 후배는 잠자코 제 이야기를 듣더니, 논문 한 편을 건네주었습니다. 혹시 논문을 읽어보셨나요? 솔직히 말하면 논문은 잘 안 읽습니다. 당직 근무할 때도 논문보다는 잠을 택하는 편입니다. (웃음) 하지만 그 논문은 왠지 읽고 싶었습니다. 뭔가 실마리를 찾고 싶었던 것 같아요. 논문을 읽어보니 정말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논문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마오쩌둥이 정권을 잡고 홍위병을 동원하여 대중을 혁명에 참여시킨 것인데, 이 과정에서 지식인 탄압도 자행되었습니다. 특히 ‘상산하향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도시에서 교사로 일하던 사람들을 갑자기 농촌으로 보내 땅을 개간하게 하는 정책이었습니다. 갑자기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못 하겠다’고 말하면 ‘혁명에 부적합한 인물’로 낙인찍혀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들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고, 대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의 고통을 몸의 증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죠.

아서 클라인만이라는 의료인류학자이자 정신과 의사가 당시 중국의 상황을 연구한 논문이었습니다. 문화대혁명 이후, 마음의 고통이나 갈등을 몸의 증상으로 표현하는 현상을 의료인류학 용어로 ‘신체화(somatization)’라고 합니다. 문화적 배경이 특정 질병의 발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논문을 읽으면서 ‘당시 조선족들도 문화대혁명을 겪었을 텐데, 소수민족으로서 차별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들이 겪었던 문화적 트라우마가 현재 한국에서 겪는 어려움과 관련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70년대 문화대혁명을 겪었던 20대, 30대 조선족들이 40년이 지나 한국에 와서 힘든 노동을 하면서, 과거의 트라우마가 재현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운 것이죠. 조선족 환자들이 호소했던 8가지, 10가지가 넘는 증상 중 일부는,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차별과 냉대, 마음의 고통이 몸으로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조선족 환자들의 증상에 짜증을 냈던 것은, 환자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 좁은 의학적 프레임에 환자들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했던 저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 이후, 진료 방식에 변화가 생겼나요?

네, 의료인류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친구에게 자문을 구해서, 몇몇 환자들에게 조심스럽게 트라우마 관련 정신과 약물을 처방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어떤 환자들은 거짓말처럼 8가지가 넘던 증상이 한두 가지로 줄어들기도 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구나. 내가 무지했구나’ 깨닫게 되었고, 의료인류학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책이 있으시죠? 오프닝에서도 잠깐 소개해 드렸지만, ‘연결된 고통’이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아픕니다. 지금 당장 아프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아플 수 있습니다. 고통은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제가 ‘고통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고통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개인이 느끼는 고통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사회가 ‘가능하면 아프지 않아야 하고, 아픈 것을 숨겨야 하고, 자기 관리를 잘해서 아픔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회라면, 개인이 느끼는 고통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반대로, ‘아프고 힘들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사회 안전망을 통해 보호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회라면, 개인이 느끼는 고통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후자와 같은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면, 고통에 대해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라는 작가가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메타버스와 인공지능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라리는 이 질문에 대해 ‘고통받는 것만이 진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고통만이 실재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제우스 신전이 무너져도 제우스는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은행이 파산해도 은행은 아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총에 맞은 병사는 고통을 느낍니다. 주식 시장이 폭락해서 돈을 잃으면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합니다. (물론 저는 주식을 하지 않아서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웃음)) 하라리는 ‘우리가 헛된 것에 에너지를 쏟지 않기 위해서는, 고통받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고통에 집중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아플 수 있고, 너도 아플 수 있고, 우리는 서로에게 고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이며, 오늘의 가해자가 어제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우리의 고통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고통의 연결성’을 이해할 때, 타인에 대한 배려심과 공감 능력을 키우고,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고통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결된 고통’을 집필하시면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깨달음이었나요? 예를 들어, 고통의 강도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큰 고통을 겪습니다. 에릭 울프라는 인류학자는 사회 계층 구조를 고통의 층위로 비유했습니다. 고통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전략적 기동성’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고통의 층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도망칠 힘조차 없는 것이죠. 반대로, 고통의 구조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은 구조적 고통을 겪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고통 문제 해결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에만 집중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회의 거대한 고통의 총량은 누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저는 ‘중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억압되어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고통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중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새롭게 하소서 시청자분들처럼, 중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숫적으로 많고, 사회적 영향력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고통에 공감하기 시작하면, 사회 구조를 바꾸고 고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고통의 총량을 줄이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중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자존감이 낮아서 힘드셨을 때, 교회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극복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동체의 힘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제가 자존감이 낮았던 시절, 저와 비슷한 고통을 겪었던 친구들과 교회 공동체의 도움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유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 그리고 공동체의 따뜻한 보살핌이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힘들 때 옆에 누가 있느냐는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인류학자이자 감염내과 의사인 폴 파머라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요. 폴 파머 교수가 하버드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좌절과 냉소주의의 유혹 앞에서 어떻게 동력을 유지하십니까?” 폴 파머 교수는 아이티의 결핵 퇴치, 제약 회사 압박을 통한 에이즈 약값 인하 등, 전 세계 보건 의료 발전에 엄청난 공헌을 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하는 분에게도 좌절과 냉소주의의 순간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극복했을까 궁금했습니다.

폴 파머 교수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좌절과 냉소주의에 압도당할 때, 똑같은 사실 앞에서 결코 압도당하지 않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자신을 좌절시키는 문제에 대해,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맞서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아 좌절감을 극복하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대의 공동체가, ‘모든 고통은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개인의 고통뿐만 아니라 이웃의 고통까지 함께 해결해 나가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과거 저에게 해주었던 역할처럼, 한국 사회의 교회 공동체가 이 시대에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명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의료와 교회가 항상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해외 선교사님들이 파송될 때도, 의료 선교를 통해 현지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의료와 교회는 서로 뗄 수 없는 콤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가족 이야기는 많이 못 나눈 것 같은데,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들려주시겠습니까?

아버지는 2019년에 백혈병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백혈병 진단 후 한 달 반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내과 의사이고, 대학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께 최선을 다해 치료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버지께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께서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시고 헌신하셨습니다. 제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이후부터, 아버지의 삶은 제 중심으로 설계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작은 거인’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백혈병 진단을 받으시고,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께 “혹시 하고 싶으신 일, 이루고 싶으신 것, 못다 한 아쉬움 같은 것이 있으시냐”고 여쭤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대답을 망설이셨지만, 병원에 입원하시고 상태가 악화되는 중에도, 정신이 온전하실 때 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나는 그동안 충분했다.”라고요. 저는 아버지의 말씀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삶이 충분히 의미 있었다고 자평하신 것이고, 동시에 아들인 저를 배려하신 것이라는 것을요. ‘아들이 필연적으로 질 수밖에 없는 싸움(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패배감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미리 위로해 주신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정말 깊은 뜻이 담긴 말씀이네요.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교회에 띄엄띄엄 다니셨지만, 독실한 신앙인은 아니셨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아버지께 “천국이 있다면, 나중에 천국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네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다. 만약 아버지께서 “나는 충분했다”는 말씀을 해주시지 않았거나,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아버지의 죽음을 훨씬 더 힘겹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성장하는 동안 아버지께 많은 것을 받기만 하고, 아버지께 제대로 효도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무관심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후회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 덕분에, 슬픔 속에서도 작은 위로와 소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천국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 수험생 절반이 의대를 목표로 할 정도로 의대 쏠림 현상이 심하다고 합니다. 의대 인기가 높아지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 주변 지인들에게 “왜 의대를 선호하느냐?”고 물어보니, “의사는 이직률이 낮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다른 직업은 회사에 입사해도, 적성에 안 맞거나 전망이 불투명하면 이직을 고민하지만, 의사는 의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평생 의료계에서 일하게 되므로 안정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씁쓸했습니다. 의사가 단순히 안정적인 직업으로만 여겨지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오늘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진정한 의사란 무엇인가?’, ‘기독교인 의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환자를 대해야 하는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기독교인 의사라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고, 고통받는 이웃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는 남들이 꺼리는 오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환자들을 통해 진정한 의사가 되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오늘 방송을 통해, 자녀의 의대 진학을 꿈꾸는 부모님들, 의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왜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약자들을 위한 따뜻한 의술 펼쳐주시길 기대하며, 예수님의 마음으로 환자를 치유하시는 교수님을 응원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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