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교 목사 간증과 Al 소리 도서관, 시각장애인 희망 이야기
어둠을 빛으로, Al 소리 도서관을 세우다
어둠 속에서 찾은 빛, 정민교 목사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절망을 넘어 희망을 전하다
정민교 목사님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어둠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은 늘 함께 하셨습니다.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하신 정민교 목사님의 간증은 깊은 감동과 울림을 전해주는데요, 오늘은 정 목사님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상세히 정리하고, 그 안에 담긴 노하우와 메시지를 심층적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000자 내외의 방대한 분량으로, 텍스트 내용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전달해 드릴 예정입니다. 추가적인 내용은 일절 금지하고, 오직 텍스트 내용만을 충실하게 담아내겠습니다. 영문 텍스트는 한국어로 재작성하여 의미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기법과 방법론은 최대한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정량적으로 서술하여 추상적인 요약은 지양하겠습니다. 한글로 작성하되, 3~4문장마다 줄바꿈을 적용하여 가독성을 높이고, 불필요한 쉼표나 따옴표는 제거하여 깔끔한 문장을 만들겠습니다. 불릿 기호는 사용하지 않고, 서술형 문장과 문단으로 내용을 구성하며, 풍부한 문장 연결 어구를 사용하여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흐름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직접 설명 방식을 택하여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내용을 전달하고, 핵심적이고 중요한 노하우는 극도로 자세하게, 불필요하거나 중복되는 내용은 최대한 간결하게 정리하겠습니다. 문체는 "~습니다"로 통일하여 친근하고 자세하며 친절한 느낌을 주고, 서술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전체 텍스트 분량의 15% 내외로 핵심 키워드나 중요 내용은 볼드체로 강조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높이고, 문장 연결 어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문맥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가겠습니다. 특히 "~인데요"와 같은 연결 어구를 적절히 사용하여 문장 간의 연결성을 강화하고, 중요 문장이나 단어는 볼드체로 강조하되, 긴 문장은 단락을 나누어 가독성을 확보하겠습니다. 문단의 첫 문장은 볼드체로 처리하여 핵심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돕고, "~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친근함을 더하겠습니다. "블로그 글"이나 "설명"과 같은 단어는 사용하지 않고, 마크다운 렌더링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볼드체 괄호나 따옴표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수치, 통계, 데이터, 레퍼런스, 논문, 저자, 연도 등 풍부한 인용을 활용하여 내용의 신뢰성을 높이고, 볼드체 괄호나 따옴표 오류에 다시 한번 주의하여 작성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겠습니다. 직설적이고 명확한 어조를 사용하여 강한 부사, 명령, 단정, 확신, 강조 등의 표현을 적극 활용하고, 대화체와 문어체를 적절히 혼용하여 친근함과 전문성을 동시에 확보하겠습니다. 수사적 질문을 빈번하게 사용하여 독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고, 과장법, 강조, 집중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내용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겠습니다. 비유나 예시를 적절히 활용하여 복잡한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전문 용어와 일상 언어를 조화롭게 사용하여 전문적이면서도 친근한 글을 만들어내겠습니다. 문제 제기 - 해결책 제시, 단계적 설명, 반복 강조, 대조/비교, 구체적인 예시, 통계/데이터 인용, 전문 레퍼런스 인용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여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고, 마크다운 형식을 준수하여 소제목은 ##, 볼드체 강조, 헤더 ## 레벨 등을 활용하겠습니다. 서술형 문장과 문단을 기본으로 하되, "~인데요"와 같은 친근한 표현을 사용하여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볼드체는 전체 분량의 15%를 초과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볼드체 인용구 오류에도 유의하며, 전체 내용을 한 번에 제공하고 짧은 컨텍스트 분할은 지양하겠습니다. 3~4줄 줄바꿈을 규칙적으로 적용하고, 불필요한 쉼표는 제거하며, 반복되는 내용은 통합 및 정돈하여 체계적이고 정돈된 글을 완성하겠습니다. 마크다운 헤더 ##을 사용하여 내용을 구분하고, 볼드체 강조는 15%를 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순수 마크다운 형식으로 작성하며, 'markdown' 단어나 코드 블럭과 같은 표현은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1. 불우했던 어린 시절: 고통과 절망의 그림자
정민교 목사님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잦은 폭력과 가정 불화 속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포상금을 받았지만, 빚 때문에 가정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는 가족들을 위해 희생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며 술에 의존하게 되었고, 술만 드시면 어머니를 괴롭히는 일이 잦았습니다. 정 목사님은 "아버지가 점심 식사를 하러 집에 오시면 꼭 반주를 하시면서 어머니와 싸우셨고, 심하게 다투실 때는 밥상을 엎는 일도 많았습니다"라고 회상합니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도 어머니 걱정에 마음이 불안했고, 오직 공부만이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학업에 매달렸습니다. 상장을 받아 액자에 넣어 걸어 놓으면 집안 분위기가 잠시나마 좋아지고 아버지의 술 주정도 잦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뇌전증을 앓고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폭력과 불화 속에서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셨고, 정 목사님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늘 마음 아파했습니다.
불안한 가정 환경 속에서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정 목사님은 학교에 가기 싫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지만 어머니의 권유로 등교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다툼 끝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고, 제초제를 마시고 쓰러지셨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정 목사님은 집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불길함을 감지했고, 어머니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방 안에는 피가 흥건했고, 어머니는 이미 제초제를 마신 후 피를 토하고 쓰러진 상태였습니다.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위세척을 받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담당 의사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절망적인 말을 전했고, 결국 어머니는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어린 정민교 목사님에게 큰 충격과 슬픔, 아버지에 대한 깊은 원망을 남겼습니다. 정 목사님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어머니의 입술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고, 호흡기를 낀 채 의식 없이 누워 계신 어머니를 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정 목사님은 아버지와 단둘이 남겨졌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은 컸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도 느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위로조차 받지 못하고 홀로 슬퍼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 아버지에게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정 목사님은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고향인 서천으로 내려가자고 했지만, 정 목사님은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잠시 희망을 보기도 했지만, 결국 아버지와 함께 서천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정 목사님은 더욱 힘든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2. 고난과 고통의 심화: 끝나지 않는 어둠
고향으로 내려간 후, 정 목사님과 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술에 의존하는 아버지, 가난한 형편, 희망 없는 미래는 정 목사님을 짓눌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어머니의 영정 사진을 끌어안고 매일 울면서 슬픔을 달랬습니다. 정 목사님은 그런 아버지에게 "차라리 있을 때 잘하지, 왜 이제 와서 후회하느냐"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매일 아버지와 싸우고 지내는 힘겨운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 목사님은 또 다른 고난과 마주하게 됩니다.
어머니 장례 후 주일, 담임 목사님은 형제들을 맡아 키워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은 정 목사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너희들이 안 가면 나도 죽겠다"며 극단적인 말을 했고, 결국 정 목사님은 목사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 목사님에게 교회는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닌, 따뜻한 사랑과 희망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정 목사님은 참기름 장사를 하던 할머니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교회에 갔을 때, 강대상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목사님의 모습은 낯설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 시각 장애인 목사님에게 축복 기도를 받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고, 시각 장애에도 불구하고 밝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목사님과 교인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장애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나도 하나님을 믿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정 목사님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술에 의존하는 아버지, 가난, 불확실한 미래는 정 목사님을 짓눌렀습니다. 16살 되던 해, 정 목사님은 또 다시 불길한 예감을 느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방에 쓰러져 있었고, 의식이 없었습니다.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냉담했습니다. 오히려 "죽게 내버려 두라"는 차가운 말만 되돌아왔습니다. 결국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고, 정 목사님은 세상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잃은 정 목사님은 깊은 절망감과 슬픔에 빠졌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습니다. 정 목사님은 "엄마 때도, 아빠 때도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으셨다"며 "그때부터 하나님을 떠나 무신론자로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교회에 가자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정 목사님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3. 방황과 좌절: 돈을 쫓는 삶
부모님을 모두 잃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정 목사님은 돈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돈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고,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습니다. 신문 배달, 식당 설거지, 막노동 등 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했고, 대기업에 취업해서는 특근과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취업하여 22살 때까지 3천만 원에 가까운 돈을 모았습니다. 돈을 벌면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돈에 더욱 집착했습니다. 돈을 벌고 쓰는 재미에 빠져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 목사님은 "돈을 벌기 시작하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돈이 있으니 오히려 하나님 믿고 살던 때보다 더 행복했다"고 회상합니다.
하지만 돈으로 얻는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사망 후, 친척 집에서 얹혀살게 되면서 온갖 핍박과 구박을 받았습니다. 친척들은 식당 일을 시키면서 돈을 훔쳐갔다고 의심하고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파라솔 쇠기둥으로 구타당하고, 팬티 바람으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동생 또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자해를 하는 등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절망 속에서 정 목사님은 동생과 함께 바닷가에 빠져 죽으려고 했습니다.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죽지 말아라"라는 환청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고통스러웠고, 결국 동생 몰래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정 목사님은 "사람이 죽는 게 참 쉽지 않다"며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회상합니다. 끊임없는 고난과 좌절 속에서 정 목사님은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4. 신앙의 회복: 다시 찾은 빛
끊어질 듯 이어지던 절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신앙의 끈이었습니다. 동생이 먼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서울로 도망치듯 떠났고, 1년 후 정 목사님도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서울로 향했습니다. 서울에서 우연히 모교회 친구들과 다시 연락이 닿았고, 친구들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을 다시 만났고, 목사님은 정 목사님에게 "다시 신앙생활 해야지"라고 따뜻하게 권면했습니다. 과거 힘들 때 큰 위로와 도움을 주었던 목사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정 목사님은 다시 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정 목사님은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욕을 했을 테지만, 목사님의 말씀은 거절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변화 없는 현실, 여전한 고통 속에서 성경 말씀은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정 목사님에게 가혹하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목사님과 교인들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은 정 목사님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교회는 어려운 형편에도 매달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고, 정 목사님은 그런 사랑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한 신앙생활이었지만, 목사님은 묵묵히 정 목사님을 격려하고 지지했습니다.
목사님의 삶은 정 목사님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19살에 화재 사고로 시력을 잃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아가시는 목사님의 모습은 정 목사님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헌신적인 사역, 변함없는 긍정적인 태도, 늘 마지막 날처럼 최선을 다하는 열정은 정 목사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봐왔지만, 변함없는 목사님의 모습은 정 목사님에게 '분명히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아직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목사님처럼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목회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22살 되던 해, 정 목사님은 꿈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겪은 고통을 안다. 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주지 않겠니?"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황당하고 거부감이 들었지만, 잇따라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꿈을 꾸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이 불타오르는 꿈은 정 목사님에게 강렬한 소명 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오랜 방황 끝에, 정 목사님은 마침내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어린 시절 기도원에서 "목사가 되고 싶다"고 기도했던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고, 이제 그 꿈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단했습니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멘토 목사님의 헌신적인 도움과 지지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삶 자체가 정 목사님에게는 살아있는 교과서와 같았습니다. 장례식장, 심방 등 사역 현장에 동행하며 목사님의 사역 방식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혔습니다. 명절이나 기념일에는 잊지 않고 챙겨주시는 목사님의 따뜻한 마음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정 목사님에게 단순한 멘토를 넘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5. 사역의 시작과 Al 소리 도서관 설립
목사님처럼 시각 장애인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정 목사님은 특별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시각 장애인들의 고통을 더 깊이 공감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돕기 위해 자신도 시각 장애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만류와 현실적인 어려움을 깨닫고, 대신 시각 장애인 아내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주변에 시각 장애인 자매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고, 여러 번의 만남 끝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기독교 동호회에서 만났는데, 처음에는 나이 차이 때문에 망설였지만, 진솔한 대화와 깊은 신앙적 교감, 서로를 향한 끌림을 통해 사랑을 키워나갔습니다. 13살이라는 나이 차이, 주변의 반대, 장인어른의 엄격한 검증 과정 등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을 결심할 정도로,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렸습니다. 정 목사님은 아내에게서 어머니와 같은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꼈고, 아내의 지혜와 사랑은 정 목사님의 삶과 사역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결혼 후, 정 목사님은 아내와 함께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에 헌신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오랜 고민과 기도 끝에, 2023년 6월 15일, Al 소리 도서관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Al 소리 도서관은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기독교 전자책 도서관입니다. 일반 도서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기독교 도서를 데이지 파일 형태로 제작하여 시각 장애인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웹 접근성이 뛰어난 홈페이지를 구축하여 시각 장애인들이 스크린 리더를 통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고, 다양한 기독교 도서, 성경, 묵상 자료, 오디오 콘텐츠 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정 목사님은 "시각 장애인들이 점자책 대신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여 편리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돕고, 나아가 세상과 소통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Al 소리 도서관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도서관 이름에 '소리'를 사용한 것은, 시각 장애인들이 주로 음성으로 정보를 얻는다는 점을 고려한 것입니다. Al은 'All', 즉 '모든' 것을 의미하며, 시각 장애인들이 Al 소리 도서관을 통해 '모든' 종류의 기독교 콘텐츠를 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도서관 설립 후, 많은 시각 장애인들이 Al 소리 도서관을 통해 양질의 기독교 콘텐츠를 접하고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정 목사님은 "Al 소리 도서관을 통해 시각 장애인들이 세상과 소통하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Al 소리 도서관은 단순한 도서관을 넘어, 시각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소통하고 교류하는 플랫폼을 지향합니다. 웹 도서관 운영뿐만 아니라, 향후 오프라인 공간을 마련하여 독서 모임, 북 콘서트, 세미나, 상담 프로그램 등 다양한 문화 행사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이를 통해 시각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어울리며,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정 목사님은 "Al 소리 도서관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꾼다"고 비전을 밝혔습니다. Al 소리 도서관은 현재 100%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도서 제작, 웹사이트 운영, 사역 확장을 위해 더 많은 후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정 목사님은 "Al 소리 도서관 사역은 결코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며 "많은 분들의 기도와 후원을 통해 Al 소리 도서관이 더욱 발전하고 성장하여, 더 많은 시각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간절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정민교 목사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함께,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용기를 줍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그 빛을 세상에 전하는 정민교 목사님의 아름다운 사역에 따뜻한 응원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