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비 목사 아동학대 극복 간증과 하나님 만남 치유 이야기
어둠 속 빛을 찾다: 김유비 목사의 치유 여정
꺼내기 힘든 기억을 마주하고 위로를 전하다: 김유비 목사의 고백과 치유의 여정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저는 주영훈입니다. 오늘 함께할 연 자매님도 안녕하세요. 오늘 저희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딛고 일어선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바로 아동 학대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생각했던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 극적으로 삶이 변화된 김유비 목사님입니다.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따뜻하고 놀라운 분이신지 함께 느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김유비닷컴 대표이시자,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한 특별한 사역을 펼치고 계신 김유비 목사님, 어서 오십시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특별한 목회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교회 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목회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교회라는 공간에 갇힌 목회가 아닌, 상처 입은 영혼의 마음속에 교회를 세우는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김유비닷컴이라는 사역을 통해, 상처 입은 한 영혼의 내면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우는 마음으로, 말과 글로 그들을 돌보는 사역을 6년간 이어오고 있습니다. 혹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목사님의 사연을 접하게 되면, 그 한 사람을 위한 목회를 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저는 고통받는 한 영혼에게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제 삶을 열어두었습니다. 과거 부교역자 시절, 너무 분주하여 한 영혼에게 깊이 집중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컸습니다. 상처 입은 영혼에 대한 절실함과 간절함이, 저를 지금의 특별한 목회 방식으로 이끌었습니다.
일반적인 목회와는 다른 어려움도 많으실 것 같은데요, 어떠신가요? 쉽지 않습니다. 매일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사역을 맡기셨으면, 그에 걸맞는 능력도 함께 주시면 좋겠습니다." 능력은 주시지 않고 사역만 맡겨 놓으신 것 같아 때로는 아쉬움도 큽니다. 벌써 6년이나 되었지만, 지치고 힘들고 외로울 때가 많습니다. 제 내면의 고통과 싸우며, 수없이 포기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습니다. 얼마 전 아내와 산책하며 이번 방송 출연 이야기를 꺼냈는데, 아내가 놀라면서 "하나님이 참 신기하시네. 당신에게 이런 기회가 오다니. 기분이 어때?" 라고 묻더군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었다. 더 이상 지속할 힘이 없다고, 이제 그만해도 되겠냐고 물었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었다" 라고 아내에게 털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못하게 계속해서 의미 있는 일들을 통해 저를 이끄시는 것 같다고, 그래서 접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방송 출연도 하나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하신 것 같습니다. 작가님들과 사전 인터뷰를 하면서, 특히 고영 작가님께서 몇 시간 동안 제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셨습니다. 저는 늘 들어주는 입장이었는데, 제 이야기를 편안하게 털어놓을 시간을 갖게 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작가님의 경청 속에서 큰 은혜를 받았고, 저의 삶을 되돌아보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기에, 다시 한번 사역의 의미를 되새기고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예송 작가님께서도 제가 망설일 때 일주일 동안 함께 기도하며 기다려주셨습니다. 이 방송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저를 따뜻하게 받아줄 수 있는 공동체라는 믿음이 생겨 용기를 냈습니다. 이제 저만 잘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작가님들의 따뜻함과 배려 덕분에,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은혜로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비밀스러운 관계 속에서 저를 이끌어주시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역을 지속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저희 방송이 출연자분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희는 늘 출연자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었는데, 목사님처럼 상담과 위로를 전하는 분들에게, 오히려 저희 방송이 당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위로받는 특별한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님들 정말 수고 많으시죠. 작가님들 덕분에, 제가 다시 힘을 얻고 목회에 대한 새로운 동기 부여를 얻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목사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어보겠습니다. 오프닝에서 말씀드렸듯이, 가정 폭력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저희 부모님은 고마우신 분들이고,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고생하고 계시죠. 하지만 과거에는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역시 상처가 많은 분이셨기에, 가정을 돌보는 방법을 잘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힘든 일을 하시면서 술에 의존하기 시작하셨고, 술은 아버지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듯 했지만, 결국 아버지를 알코올 중독의 늪으로 빠뜨렸습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고스란히 가족들에게 향했습니다. 소위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끔찍한 가정 폭력의 장면들이 저희 집에서는 일상이었습니다. 다섯 살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두컴컴한 판자촌 단칸방, 아버지께서는 불을 끄고 담배를 입에 문 채, 벌거벗은 다섯 살짜리 아들을 폭행하셨습니다.
다섯 살 때라니, 너무 충격적이네요. 어둠 속에서 아버지의 담배 불빛이 붉게 타오르는 모습은, 어린 제게 극심한 공포로 각인되었습니다. 불빛이 사라지면, 이제 죽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폭행으로 의식을 잃는 일도 잦았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반팔, 반바지를 입지 못했습니다. 온몸이 멍투성이였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제외하고는 멍 자국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여름에도 긴 옷으로 멍을 가려야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저는 몸과 마음이 병들어갔습니다. 어머니는 어떠셨나요? 어머니도 폭력에 노출되셨나요? 어머니 역시 폭력의 희생자였습니다. 어머니를 이해합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폭력 앞에서 어머니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셨을 겁니다. 어머니 역시 학대당하는 상황이었고, 제가 학대당할 때 저를 구해줄 힘이 없으셨을 겁니다. 아버지와의 불안정한 애착 관계는 어머니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머니는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시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어머니마저 집을 나가셨다니, 어린 유비 씨에게는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겠네요. 어머니는 저희를 데리고 나가기도 했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저희를 두고 혼자 도망치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집에 돌아왔는데 집이 텅 비어있던 충격적인 기억이 있습니다. 도둑이 든 것처럼, 살림살이가 밖으로 널브러져 있었고, 옷가지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습니다. 어린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인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힘든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셨고, 저는 어머니에게 기댈 수 없다는 생각에, 감정을 억누르고 혼자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형제자매는 없었나요? 다행히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여동생의 존재는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힘든 시간들을 함께 겪었기에, 동생과 이야기할 때 큰 위로를 받습니다. 얼마 전 명절에 가족들이 모였는데, 여동생이 갑자기 울면서 어릴 적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떠올라 괴롭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동생분에게도 어린 시절의 상처가 깊이 남아있었군요. 여동생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유일하게 의지했던 존재가 저였다고 합니다. 집에서 벗어나 학교 가는 짧은 등굣길이 여동생에게는 유일한 আনন্দ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밤새 아버지에게 폭행당해 시체처럼 굳어있는 저를 보고, 학교에 갔다고 합니다. 발이 하얗게 질려있는 오빠를 보며,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살아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학교에 갔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저는 여전히 담요에 말려 있었고, 아버지는 제가 죽은 줄 알고 벽만 보고 담배를 피우고, 어머니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 여동생은 오빠를 따뜻하게 하면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 발을 만졌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며 만지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동생은 그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울먹였습니다. 여동생과 아픔을 공유하며 서로 위로받고, 힘들었던 과거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주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은 없었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26번이나 이사를 다녔습니다. 짧게는 3개월에 한 번씩 이사하기도 했습니다. 판자촌, 달동네, 반지하방 등을 전전하며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홍수가 나면 물이 차고, 여러 세대가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정말 지독하게 가난했습니다. 집집마다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모든 가정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저희 집에서 곡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다른 집 곡소리가 들리고, 살림살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판자촌 골목길을 친구와 걸어가다 갑자기 벽이 무너져 내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부부 싸움으로 집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판자촌 집들은 청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져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술에 취해 이성을 잃으면, 톱으로 집을 썰어 구멍을 내곤 했습니다. 저희 집도 청테이프로 구멍을 막아놓은 곳이 많았습니다. 저는 어릴 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가정은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 나를 보호해주는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해야 하지만, 저희 집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어디에 숨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매일매일이 지옥 같았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다니셨나요? 어머니께서는 신앙이 유일한 탈출구였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신앙에 몰입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교회 봉사, 예배, 기도를 삶의 전부로 여기셨습니다. 어머니는 살기 위해 신앙에 매달리셨던 것 같습니다. 어린 저는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교회에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가면, 어머니의 멍든 얼굴, 상처 입은 모습을 봐야 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제게 수치심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선생님, 왜 눈이 멍들었어요?" 라고 물으면, 어머니는 "넘어져서 다쳤다" 라고 둘러대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를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시절부터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교회, 신앙, 모든 것이 싫었습니다. 분노만 가득했습니다. 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에 함께 다니셨나요?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께서 술을 끊으셨습니다. 담배도 끊으시고, 목회자가 되겠다며 신학교에 가셨습니다. 몇 달 뒤, 시골 오지에 흉가를 고쳐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변화네요. 아버님께서 목회자가 되시다니. 아버지께서는 회심 후 열정적으로 목회에 헌신하셨지만, 목회 경험도, 신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도 부족하셨습니다. 성도도 아니었던 분이 갑자기 목회를 시작하셨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교인들은 대부분 친척들이었고, 척박한 시골 환경 속에서 목회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쥐들이 들끓는 흉가에서 살면서, 생계마저 막막했습니다. 어머니는 보건소에서 일하는 집사님의 도움으로 유행성 출혈 예방 접종을 맞아야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셨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했지만, 과거의 상처와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분노는 또 다시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폭력적으로 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저희도 많이 성장했기 때문이겠죠. 저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속에서 고통스러웠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아버지의 변화를 보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기적이 일어났다" 라고 말했지만, 저는 여전히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버지의 변화가 진정한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죠. 계속 힘든 시간이 이어졌겠네요. 저는 신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집을 탈출할 방법만 생각했습니다. 가출은 두려웠고, 공부해서 다른 학교에 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시골 교회에 단기 선교를 온 대학생 누나가 두고 간 큐티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잡지처럼 재미있게 구성된 큐티 책이 신기했습니다. 외삼촌에게 부탁해 큐티 책을 받아보게 되었는데, 안산 동산고등학교 김민종 목사님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기숙사가 있다는 정보를 보고, 안산 동산고등학교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입 선발 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무작정 안산으로 향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교감 선생님께서 학교를 구경시켜 주셨습니다. 교감 선생님께서는 제 눈을 보시더니, "좋다, 논술로 한번 해보자"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88점이라는 낮은 점수였지만, 교감 선생님의 격려에 희망을 얻었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3개월 동안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16점이라는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안산 동산고등학교에 원서를 냈습니다. 1지망으로 안산 동산고등학교에 지원했고, 최하위권으로 간신히 합격했습니다. 합법적으로 집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지옥 같았던 집에서 벗어나 학교에 갔을 때, 정말 행복하셨겠어요. 학교에 합격했을 때는 기뻤지만, 탈출에 성공했을 뿐, 학업에 대한 열정은 없었습니다. 학교에 가보니, 주변 친구들은 모두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듯 했습니다. 저만 불행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기숙사 친구들은 전국에서 모인 수재들이었습니다. 저는 열등감에 휩싸였습니다. 주말, 기숙사에 혼자 남겨지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기숙사에는 전기마저 끊기고, 밥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갈 곳 없는 저는 텅 빈 기숙사에서 홀로 울었습니다.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주일 저녁, 친구들은 부모님 손에 이끌려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새 옷, 새 책, 맛있는 음식을 가득 든 친구들을 보며, 더욱 외롭고 괴로웠습니다. 친구들이 돌아올 때쯤, 저는 씻고 나와 아무렇지 않은 척 했습니다. 주말 동안 굶는 날도 많았습니다. 점점 예민해지고, 짜증이 늘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나빠졌습니다.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감정적으로 격하게 반응했습니다. 친구들은 저를 피하기 시작했고, 점점 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운동장 귀퉁이 소각장에 앉아 밤늦도록 울었습니다.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날 때쯤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기숙사로 돌아와 잠들었습니다. 1년이 지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 부모님께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3년 내내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기숙사 공사 때문에 집에 가게 되셨다고요. 기숙사 공사로 일주일 동안 기숙사를 비워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짐을 싸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1년 만에 집에 온 아들을 부모님은 반갑게 맞이해주셨습니다. 없는 살림에도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에는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색하게 "많이 먹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저는 이성을 잃고 폭발했습니다. "많이 먹으라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냐? 밥 몇 끼로 해결될 것 같아?" 상을 엎고, 집 안의 물건들을 부수고, 유리창을 깨고, 부모님을 노려보며 소리쳤습니다. "다 당신들 때문이야! 난 죽을 거야! 내일 아침 시체로 발견되면 평생 후회하며 살아!" 그렇게 소리치고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기숙사 운동장 귀퉁이에서 울 때 자주 찾았던 시골 동네 은행나무가 떠올랐습니다. 나무는 말없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 같았습니다. 은행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운동장 소각장 옆에서 밧줄 매듭 짓는 연습을 하고, 목에 밧줄을 걸어보기도 했습니다. 준비해 간 밧줄을 들고, 어두컴컴한 시골길을 걸어 은행나무로 향했습니다. 나무에 밧줄을 묶고, 목에 밧줄을 걸려는 순간, 몽환적인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던 찰나, 어떤 기억이 떠오르셨다고요. 다섯 살 때, 어두운 방에서 아버지에게 학대받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 감정이 폭주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저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냐! 저 아이의 유일한 잘못은 당신들 집에 태어난 것이다! 왜 아무도 저 아이를 구해주지 않느냐! 왜 아무도 저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느냐! 왜 아무도 저 아이의 신음 소리를 들어주지 않느냐!" 갑자기, 어린 시절 기억 속 어두운 방구석에 하얀 빛이 나타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저는 더욱 분노했습니다. "당신은 구경만 했느냐! 왜 나를 방치했느냐! 당신이 있다면, 어떻게 나를 이렇게 방치할 수 있느냐!" 감정이 폭발하며 엉엉 울고, 땅바닥을 뒹굴었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1학년 어린 제게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놀라운 통찰이 마음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유비야, 미안하다. 내가 너를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보냈다. 너를 그 가정에 보낸 이유는,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치유하기 위함이다. 너무 미안하다. 조금만 더 견뎌다오. 미안하다, 유비야." 제 수준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깊은 통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통찰은, 제가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동안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고통스러운 삶에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극적인 순간이었네요. 그 통찰 이후, 삶이 완전히 달라지셨나요? 그 통찰을 경험한 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주변의 소리가 처음으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새소리,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모든 소리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산소가 제 몸에 들어왔다 나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했습니다.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밤새도록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부모님은 밤새 잠 못 이루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집에 들어가 무릎 꿇고 큰절을 올리며 울면서 말씀드렸습니다. "과거의 아들은 죽었습니다. 제가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제 새롭게 살아가겠습니다." 부모님도 오열하며 저를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순간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아버지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하십니다. 그 이후, 저는 신앙을 갖게 되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갖게 되면서 학업에도 열정을 갖게 되셨군요.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요? 반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야, 너 우리 반 1등이라며? 나 공부 좀 가르쳐줘." 친구는 흔쾌히 제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저를 짝으로 삼아 1대1 과외를 해주었습니다. 밑줄 긋기, 복습, 암기 등 꼼꼼하게 공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친구가 가르쳐주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다음 시험에서 제가 친구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친구도, 선생님도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선물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믿음의 동역자들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만난 친구들은 지금도 저의 든든한 믿음의 동역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 삶이 변화되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진심은 통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따뜻한 사랑을 경험하며, 저 또한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목소리만 들어도 정말 부드럽고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폭력적인 후유증으로 언어 장애와 대인 기피증까지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심각한 상태였나요? 대인 기피증과 언어 장애는 정말 심각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대화는 극도로 어려웠습니다. 특히 이성과의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점심시간, 식판을 들고 밥을 먹으러 가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밥을 먹었습니다. 된장국을 쏟는 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겨웠습니다. 신학교에 진학해서는 설교를 해야 했지만, 언어 장애 때문에 설교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절망했습니다.
언어 장애와 대인 기피증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단순하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했습니다. 선교사님이 부흥 강사로 오셔서 "신학생이 전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설교하시는 것을 듣고 자극을 받았습니다. 언어 장애가 있지만, 전도에 도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영리를 외워 전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500원짜리 사영리를 구입해서 달달 외웠습니다. 매일 한 명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자신과 약속했습니다. 용기가 나지 않아 전도하지 못한 날에는, 밤 늦게라도 거리로 나가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사러 나오는 아저씨를 붙잡고, 더듬거리는 말투로 "교회 다니세요?" 라고 물었습니다. 말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사영리를 건네주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극적인 전도 방식으로는 언어 장애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정면 돌파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기숙사 벽에 사람 얼굴 사진을 붙여놓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연습을 했습니다. 지하철에서 전도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안산에서 사당까지 지하철로 50분 거리, 매일 지하철에서 전도 연습을 했습니다. 지하철 첫 칸부터 마지막 칸까지 걸어가며 전도하려고 했지만, 막상 사람들 앞에 서면 말문이 막히고,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에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한마디도 못하고 지하철에서 내리는 날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나는 안 되는구나, 조용한 목회나 해야겠다' 라고 체념했습니다.
노상 전도는 실패로 끝났나요? 지금은 말씀을 너무나 잘 하시는데, 어떻게 극복하게 되신 건가요? 어느 날, 늦게까지 사역을 마치고 지하철 막차를 탔습니다. 막차 안에는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각선에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아저씨를 발견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순간, "아저씨, 잘 들으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의식 없는 아저씨는 조용히 제 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순간, 천상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할렐루야, 해냈다!' 자신감이 솟아올랐습니다. 옆 칸으로 가서 또 다시 의식 없는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몇 칸을 더 옮겨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도 할 수 있다' 라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 주 주말, 4호선은 서울랜드, 어린이대공원, 경마공원을 가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지하철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습니다. '여기서 전도해야 한다' 라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몸은 떨리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말은 더듬거렸지만, 용기를 내어 외쳤습니다. "여러분, 저는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4호선 사당역 총신대학교 1학년 김유비 학생입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대인 기피증에 말더듬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5분만 시간을 내어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전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떤 아저씨는 신문을 접고 저를 쳐다보셨습니다. 전도를 마치자, 갑자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격려해주고,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었습니다. 다음 칸, 또 다음 칸으로 옮겨 다니며 전도를 이어갔습니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모두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셨습니다. 노상 전도를 통해, 저는 언어 장애와 대인 기피증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노상 전도는 단순히 전도 활동이 아니라, 저 자신을 이겨내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노상 전도가 목사님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 되었네요.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저에게는 정말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노상 전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제 안에 갇혀있던 두려움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언어 장애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목사님의 이야기가 큰 희망과 용기를 줄 것 같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의 작은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지하철 전도, 정말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텐데, 그 열차 안에서 얼마나 긴장하셨을까요. 하지만 결국 이겨내셨고,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조차 어려워하셨던 목사님께서, 지금은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 되셨네요. 여자친구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결혼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언제 결혼하셨어요? 저는 좀 일찍 결혼했습니다.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갈망이 컸던 것 같습니다. 지하철 전도 성공 후, 자신감을 얻어 적극적으로 이성에게 다가갔… (웃음) 농담입니다. 교회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결혼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곰팡이 핀 오래된 빌라 월세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례비도 없는 개척 교회 전도사로 사역했습니다. 힘들었지만,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가정 폭력으로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건강한 가정생활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부부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많았습니다. 지금도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한번은 아내가 월세가 다섯 달이나 밀렸고, 기저귀와 분유가 떨어졌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보통 남편이라면 "미안해, 빨리 해결해볼게" 라고 말하겠지만, 당시 저는 너무나 부끄럽게도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격한 반응에 아내는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그 순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폭력적인 아버지와 똑같았습니다. 저는 폭력적인 가장은 되지 않겠다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가장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거울 속 제 모습은 짐승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자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여 아내를 두고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2박 3일 동안 집을 나갔습니다.
가출이라니, 정말 충격적이네요. 전도사님 신분으로… 정말 부끄러운 과거입니다. 교회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제 내면은 여전히 황폐했습니다. 왜 아내에게 "어쩌라고" 라고 소리쳤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시 저는 사례비도 없는 교회에서 헌신적으로 사역하고,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쉴 새 없이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지만, 현실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쌓여왔던 분노가 아내에게 터져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을 겁니다. 집을 나가 텅 빈 차 안에서 절망했습니다. 그때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이혼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어이없고 황당했습니다. "그래서요"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말없이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으니, 시간 되면 읽어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으시는 분이셨기에,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교회 사무실에서 몰래 아버지의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A4 용지 60장 분량의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이 담겨 있었습니다. 편지를 읽으며 처음으로 아버지의 삶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이해심이 생겼습니다.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가해자였지만, 당신의 부모님께는 피해자였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소름 끼치도록 놀라운 사실은, '나는 아버지에게 피해자였지만, 어쩌면 아버지를 꼭 닮았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치관, 결핍, 분노, 폭력성까지, 제가 아버지를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언제까지 피해자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내 아내에게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이 고통은 대물림될 수 있다' 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피해자였고, 저 또한 영원히 피해자로 살 수 없으며, 저 또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꼭 닮아, 아내에게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 여자가 나를 좋아할까, 지금의 내 모습만 보고 마음을 열었겠지, 라고 철없이 생각했습니다. 과거를 극복했다고 착각하며, 과거를 숨기고 싶었습니다. 아내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편지를 아내에게 읽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3일 만에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편지를 건네주었습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버려" 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속마음은 제발 읽어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지만, 겉으로는 강한 척 했습니다.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습니다. 아내가 편지를 읽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내는 60장이나 되는 편지를 모두 읽었습니다. 아내가 방으로 다가왔습니다. 방문을 열고 저를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여보, 살아줘서 고마워. 포기하지 않고 견뎌줘서 고마워"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내는 밤새도록 저를 안고 위로해주었습니다. 아내 품에 안겨 밤새도록 울면서, '나는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거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내분의 따뜻한 위로가 목사님께 큰 힘이 되었네요. 그 이후, 변화가 있었나요? 아내의 위로와 사랑 덕분에, 비로소 진정한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던 순간,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났고, 아내 품에 안겨 울었던 밤, 가정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내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제 마음속 깊은 상처를 녹이는 따뜻한 햇살과 같았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통해, 아내를 통해, 제게 치유와 회복을 선물해주셨습니다. 그 이후,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변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어려웠습니다. 아내와 남편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남자들끼리의 문화에 익숙했기에, 부부 싸움 후 '미안해' 한마디면 끝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습니다. "뭘 잘못했어?" 라고 되물었습니다. 저는 당황했지만, 다시 한번 "미안해, 내가 이러이러해서 잘못했어" 라고 사과했습니다. 아내는 여전히 "사과를 제대로 하라" 며 화를 냈습니다. 아내에게 사과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수첩을 들고 아내를 따라다니며 질문했습니다. "언제 사과하는 거야? 어떻게 사과하는 거야?" 아내는 30분 넘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언제 사과해야 하는지 계속 질문했습니다. 아내는 "됐어, 알겠어" 라고 말했고, 저는 "아니, 사과 언제 하는 거야?" 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아내는 "방금 했잖아. 내 이야기 다 들어주는 것이 사과야" 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이 진정한 사과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내의 도움으로, 저는 비로소 사과하는 법을 배우고, 부부 관계를 회복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과 가르침 덕분에, 저는 조금씩 성장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아내분께서 정말 큰 역할을 해주셨네요. 자녀들과의 관계는 어떠신가요? 아이들과의 관계도 처음에는 서툴렀습니다. 특히 아들과의 관계가 어려웠습니다. 딸들에게는 편안함을 느끼지만, 아들에게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저를 무시한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아들과의 관계 어려움은 제 안에 있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아버지로서 실패했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입니다. 저의 결핍이 아들과의 관계에 투영되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착하고 이해심이 많은 아이여서 다행입니다. 제가 혼을 내고 후회하며 사과하면, 아들은 오히려 저를 위로했습니다. "아빠, 왜 자꾸 사과하세요? 아빠는 저 혼내셔도 돼요. 아빠가 혼내주셔서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게 돼요. 아빠 사과 안 하셔도 돼요." 아들의 따뜻한 말에 감동받았습니다. 둘째 딸은 저를 엄마처럼 챙겨줍니다. 밥 먹다가 갑자기 저를 쳐다보며 "아빠, 많이 먹어" 라고 말합니다. 어릴 때 못 먹었던 아빠를 생각하며, 딸은 저를 따뜻하게 챙겨주는 것입니다. 막내는 아직 어려서 아빠를 놀아주는 방법을 모릅니다. 아이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서툰 아빠를 "재밌다" "최고다" 라고 평가해줍니다. 아이들은 서툰 아빠를 품어주고 이해해주는 존재입니다. 아이들을 통해 오히려 제가 치유받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아빠로서 서툰 면이 많지만, 아이들과 함께 성장해나가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많은 상처를 딛고 일어나, 이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앞으로의 목회 비전은 무엇인가요? 거창한 비전은 없습니다. 솔직히, 상처 입은 영혼들과 마주하는 시간이 너무 힘들 때가 많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라는 생각을 수없이 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힘든 사역을 통해 저를 치유하시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십니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나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혼자가 아니구나' 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느낍니다. 그 시선은 제 능력이 아닌, 제 안에 계신 예수님의 온기라고 생각합니다. 사역을 통해, 오히려 제가 살아나고 은혜를 받습니다. 어차피 제 능력으로는 누구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치유의 근원은 예수님이시고, 저는 그저 치유의 통로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감정에 휩싸여 힘들 때도 있지만, 부족함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의지하며 나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빚어가시는 방식, 저를 살리시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제 의지는 수없이 포기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역을 유효하게 유지시키고 이끌어 가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는 천국에 꼭 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인터뷰에서 말씀하셨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천국에 가면, 꼭 예수님께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저를 잘못 보신 것 아닌가요?" 왜냐하면… (웃음) 만약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제 인생 계획서를 보여주시며 "이 집에 태어나 이런 삶을 살 것이다" 라고 하셨다면, 저는 절대 그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부족하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선택하신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끔은, '저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도 많을 텐데, 왜 하필 저를 선택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정말 저를 제대로 보신 건가요? 제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저 정말 너무 힘들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딱 한마디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비야, 수고했다." 그 한마디면, 모든 고통과 아픔이 눈 녹듯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정말 수고했다, 고맙다" 라는 예수님의 칭찬을 듣는 상상을 자주 합니다. 천국에서 예수님께 안기는 상상, 칭찬과 위로를 받는 상상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꼭 천국에 가서 예수님께 직접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위로받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반드시 천국에 가셔서 예수님께 칭찬과 위로를 받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 말씀 정말 감사드립니다. 연 자매님, 오늘 간증 어떠셨나요? 저는 SNS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세상이 너무 화려하고 빠르게 변하는 모습에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SNS를 시작하면서, 목사님을 팔로우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올라오는 목사님의 치유 편지를 보며 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제 마음에 꼭 맞는 말씀을 해주실까, 어떤 분이실까 궁금했는데, 오늘 직접 뵙게 되어 정말 설렜습니다. 목사님의 SNS 글을 보며, 상처 입은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목사님께 무거운 짐을 지게 하셨지만, 목사님의 치유 편지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 또한 목사님 덕분에 매일 힘을 내고 있습니다. SNS를 시작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심과 은사를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는데, 목사님께서는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글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 자매님 말씀처럼, 저희는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목사님처럼,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분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따뜻하고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 많은 분들이 위로와 용기를 얻으셨기를 바랍니다. 지쳐있던 목사님께서 다시 힘을 내시고, 치유 사역을 더욱 힘차게 이어가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 정말 고맙습니다.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다음 주에도 더욱 감동적인 간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