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학대 트라우마, 김유비 목사의 상처 치유와 희망 간증
아픔의 고백, 상처 입은 영혼을 위한 위로와 치유
[수어통역] 정말, 꺼내기 힘든 기억이지만 위로받을 당신을 위한 고백🎞✨ㅣ김유비 목사ㅣ새롭게하소서
안녕하세요, '새롭게 하소서'의 주영훈입니다. 안녕하세요, 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정수입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라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게 되면 바로 회복이 됩니다. 네, 맞습니다. 아동학대로 오랜 시간 고통받다가 죽으러 갔던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극적으로 삶이 달라지신 분을 오늘 모시려고 합니다. 네, 오늘 간증 들으시면서 하나님은 정말 따뜻한 분이구나 하고 느끼시게 될 겁니다. 김유비 닷컴의 대표, 김유비 목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나오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목회가 조금 다른 특별한 목회라고 들었는데요, 어떤 목회를 하고 계시죠? 네, 저는 교회 안에서 목회하지 않고 있고요. 제가 사실은 그 상처 입은 한 영혼의 마음속에 교회를 세운다는 마음으로, 부족함이 많은데요. 김유비 닷컴이라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상처 입은 한 영혼의 내면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우는 마음으로 저의 말과 글을 통해서 한 영혼을 돌보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를 들어서 제가 심적으로 굉장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했을 때, 목사님의 사연을 접하게 되면 저 한 사람을 위한 목회를 하시는 건가요? 네, 제가 시간을 내어 드릴 수 있도록 저의 삶을 열어둔 거죠. 아무래도 목회를 하면 목회를 동반하는 많은 사역들이 뒤따르는데요. 제가 부교역자로 목회할 때 너무나 분주해서 정말 한 영혼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 상처 입은 한 영혼이라는 마음이 절실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 간절함이 있기 때문에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이런 방식의 목회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언뜻 들어서는 쉬울 것 같기도 하지만, 일반 목회와는 다르게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요, 해보시니 어떻습니까? 쉽지 않아요. 아, 그렇죠. 쉽지 않고 항상 제가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하는 말이 "사역을 맡기시면 그에 걸맞은 능력도 주시면 좋을 텐데, 능력은 주시지 않으면서 사역만 맡겨 놓으신 것 같아요."라는 저의 아쉬움입니다. 벌써 6년이 지났는데요. 너무 지치고 힘들고, 외롭고, 또 제 나름의 내면에 고통들이 있고 하니까 그만하고 싶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6년 동안 한 것에 대해서 굉장히 인내심이 강하다고 하는데, 저는 마음속으로 여러 번 포기했다 다시 살아났다 이런 일을 반복하는데 눈에 보이진 않는 거죠.
얼마 전에 아내하고 산책하는데 제가 얘기를 했어요. "이렇게 귀한 프로그램에서 연락이 왔다." 아내가 놀라면서 "어, 하나님이 참 신기하네. 당신한테 이런 일들이 있네. 당신 기분은 어때?"라고 물었는데, 제가 아내한테 갑자기 그 얘기하는데 감정이 복받치면서 "내가 하나님한테 살려달라고 했거든. 더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아서 이제 그만해도 되겠냐고 물어봤었고, 제발 살려달라고 부탁을 했었거든. 그런데 하나님은 포기 못 하게 자꾸 이런 식으로 의미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끌고 가신다, 접을 수 없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때 그 기도를 들으신 것 같다. 저도 사전에 작가님들하고 연락을 하잖아요. 고영 작가님이 몇 시간 동안 제 얘기를 들어주셨어요. 저는 들어주는 사람이었는데, 제 얘기를 몇 시간 동안 편안하게 한 기억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요. 너무 은혜가 되고, 저도 역할을 바꿔서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무능해도 괜찮다. 이런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시간들을 내가 진정으로 원했었고, 작가님의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 속에서 저의 삶을 돌아보고 이런 기회가 많이 없잖아요. 저도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또 살아나고."
예송 작가님도 제가 망설일 때 일주일 동안 기도해 주시면서 같이 기다려 주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 이 공동체는, 이 프로그램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받아줄 수 있는 따뜻함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냈고, 저는 이제 저만 잘하면 될 것 같아요. 저는 은혜를 다 받아서 포기하는 마음이 안 나는 거지, 하나님께서 또 이렇게 은혜로 살려주시고, 또 비밀스러운 관계성 속에서 유지되게 하시고, 제가 부족한 게 많아요. 그런데도 지속되긴 하더라고요. 아, 진짜 오늘 처음 깨달았네요. 저희 방송이 물론 출연해주신 영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만, 출연하는 목사님 같은 분들에게도 늘 남의 얘기만 듣기만 하고 카운슬링을 해주는 입장에서 이 방송을 통해서 인터뷰하는 시간, 이 시간이 내 얘기를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된다는 것을 저 오늘 정말 처음 깨달았네요. 네, 우리 작가들 참 수고가 많죠. 저 이따 커피 쏠게요, 진짜. 우리 작가들이 그렇게 계속 그런 얘기 열심히 듣다 보니까 귀에 이명도 오고 막 그러거든요. 진짜로 그렇다고 그래요.
그래도 오늘 이 방송을 계기로 목사님이 다시 한번 힘을 얻고, 다시 목회에 동기 부여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네, 감사합니다. 목사님 이야기 한번 들어볼게요. 아까 오프닝에 소개해 드린 것처럼 가정 폭력으로 많이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소개를 했는데,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셨나요? 기본적으로 저희 부모님은 고마운 분들이고 고생 많이 하셨죠. 지금도 계속 고생하고 계시고. 그런데 과거 이야기를 좀 하게 되면 굉장히 힘든 시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 같은 경우는 아버님도 상처가 많으신 분이라 가정을 잘 돌보는 방법을 잘 모르셨던 것 같아요. 힘든 일을 하시니까 처음에 술을 마시면서 일을 하셨는데, 무슨 일을 하셨냐면 험한 일을 하셨죠. 일용직 하시고 나중에는 전기 기술을 배우셔서 전기 기술자가 되셨는데, 그래도 건설 현장에 있고 사람들하고 부대끼는데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게 힘드셨던 것 같아요. 처음에 술을 마시면서 그 고통을 잊으셨던 것 같은데, 술이 아버지를 삼키면서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셨고,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풀이를 가족들한테 하신 것 같아요. 저는 소위 말하는 우리가 미디어에서 보는 가정 폭력이라는 끔찍한 장면들이 일상이었고, 제 기억에 한 다섯 살 때였던 것 같은데, 어두운 방 안에서 판자촌이었어요. 판자로 된 조그만 단칸방에서 아버지가 불 다 꺼 놓고 입에 담배 하나를 물고 다섯 살짜리 남자애를 벌거벗겨 놓고 때리는 거죠, 다섯 살 때요.
네, 그런데 저는 그래서 아버지가 때리다 지쳐서 담배를 어둠 속에서 한 모금을 피우실 때, 그 불이 진해지잖아요. 그 공포가 각인이 된 것 같아요. "그게 멈추면 난 이제 죽는다." 그리고 의식을 잃고. 그래서 항상 어릴 때는 반팔, 반바지를 못 입고 다녔어요. 왜냐하면 온몸에 멍 자국이 없기 때문에, 얼굴 빼고는. 그래서 여름에도 긴 옷을 입었죠. 사실 관심 가져 주는 주변의 시선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거를 어린이가 혼자 다 감당하고 받아내고, 몸과 마음이 많이 병들어 있었던 거죠. 아니, 그렇게 학대를 당하는 동안에 지켜보는 어머님은 어떠셨을까요? 어머니도 혹시 학대당하셨나요? 네, 질문해주셔서 너무 감사한데요. 어머니도 사실 불쌍한 거죠. 어머니를 이해를 해요. 하지만 어머니도 가정을 지키려고 하셨겠죠.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자녀들을 보호하려고 했을 텐데, 아버지가 워낙 무서우니까 어머니도 학대당하시고, 제가 학대당할 때는 구해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애착을 제가 안정적으로 아버지하고 못 했으면 어머니하고도 잘 형성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가 견디다 견디다 못 하면 집을 나가시잖아요. 맞아요. 그럼 어떤 때는 저희를 데리고 나갈 때도 있는데, 그러면 거처할 데가 마땅치 않게 되는 거니까, 어떨 때는 급하게 도망치시느라 저희를 두고 나갈 때도 있고.
기억에 어렸을 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데 집에 왔는데 도둑 든 것처럼 되어 있는 거예요. 집이 엉망진창이 된 거죠. 이게 처음이에요. 첫 장면을 기억하는 거죠. 도둑 든 것처럼 살림이 다 나와 있고 옷가지가 다 흩어져 있어서 "이게 뭐지?" 했는데, 어머니가 그날 밤 도망가셨어요. 저는 그때 너무 충격받았던 것 같아요. 지금 성인이 되었을 때 어느 시기에 그걸 이해할 수 있게 됐지, 당시에는 그걸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없잖아요. 그렇게 해서 어머니가 들어왔다가 안심이 돼서 다시 지내다가 또 어머니가 또 나가셨다가 몇 번 반복되니까 저도 모르게 회피가 되는 거죠. 그래서 어머니한테 기대지 않고 저 혼자 그런 감정들을 추스르려고, 기댈 때가 없었던 것 같아요. 아, 형제나 자매는 또 없었어요? 남매, 누구 있었어요? 다행히 여동생이 있었어요.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는데, 그 여동생의 존재가 되게 소중해요. 왜냐하면 그 시간들을 같이 겪었잖아요. 지금도 동생하고 얘기할 때 마음에 힐링이 많이 돼요. 그 시간들을 함께 겪은 거잖아요. 아무도 모르는데, 가정이라는 독특한 문화와 울타리 안에서 같이 그걸 겪었는데, 얼마 전에 명절에 가족들이 다 모였는데, 여동생이 갑자기 울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때 어머니만 계셨는데, 자기는 아직도 어릴 때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그게 가끔씩 생각나면 너무 눈물이 난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뭐야?" 그랬더니, 자기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이 그러니까 제가 유일한 안정 기지였던 거잖아요. 저한테 정서적으로 기댔던 거죠. 저하고 등하굣길 하는 게 집에서 벗어나서 학교 가는 그 짧은 길이 굉장히 좋았나 봐요.
어느 날 여동생이 명절 때 얘기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 그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오빠가 밤새 아빠한테 맞아서 시체처럼 굳어서 방에 뒹굴뒹굴 말려 있었다는 거예요. 발이 하얗게 돼서 여동생 학교 가면서 "제발 학교 끝나고 왔을 때까지 좀 살아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울면서 학교 갔다가 울면서 집에 와서 저를 봤는데, 저는 여전히 방에 뒹굴뒹굴 말려 있었던 거죠. 아버지는 제가 죽은 줄 알고 벽 보고 담배만 피우고 있고, 엄마는 옆에서 소리 없이 울기만 하고. 여동생은 초등학교 1학년이니까 "혹시 오빠를 따뜻하게 해주면 살지 않을까?" 싶어가지고 발을 이렇게 만드는데, 아버지,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면서 건들지 말라고. 자기 기억엔 이게 세 번이었다는 거예요. 자기가 목격한 것만. "아, 그럼 더 많았겠지 않냐."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전에 기억을 보면. "오빠는 어떻게 살아가냐? 어떻게 엄마, 아빠를 따뜻하게 대하고 잘 지낼 수가 있냐?" 저도 얘기했죠. "쉽지 않았다. 오래 걸렸다. 너도 서두를 필요 없다. 천천히 하면 된다." 그런 기억들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너무 고맙더라고요. 너무 마음이 아플 뿐이긴 해요. 아, 그 어린 나이에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랬던 것 같아요.
이웃들이라든지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나요? 그러게요. 제가 성장 과정을 보면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이사 주소지 변경된 것을 우연찮게 보게 돼서, 초등학교 5학년 때 26번을 이사를 했더라고요. 짧게는 3개월에 한 번씩 이사를 한 적도 있고, 길게는 1년, 1년 6개월도 살았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판자촌, 달동네, 반지하방, 홍수 나면 물 차고, 화장실도 여러 세대가 같이 쓰는 공용 화장실 쓰고. 정말 지독하게 가난했던 것 같아요. 집집마다 곡소리가 나요. 저는 다 그런 줄 알았어요. 모든 가정이 그래서 우리 집에서 곡소리가 안 나면 다른 집 곡소리가 들리고, 살림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판자촌은 골목이 좁거든요. 친구하고 거기를 걸어가면 갑자기 벽이 무너져 내려요. 그 집에서 부부 싸움을 한 거죠. 집집마다 청테이프 발라져 있고, 저희 집도 아버지가 술 취하고 이성을 잃으면 판자촌이니까 톱으로 집을 썰었어요. 구멍도 나 있고 청테이프로 붙여 놓고. 그렇게 다 사는 줄 알았어요, 어릴 때는. 사실 가정이야말로 우리가 항상 쉴 수 있는 곳이고,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곳이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 과연 어디에 숨어야 될까. 정말 어린아이에게 매일매일이 지옥 같았을 텐데.
당시 교회는 다닐 때였어요? 교회는 저희 어머니가 유일한 탈출구였던 것 같아요. 신앙이.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 하셨어요. 그때 당시에는 몰입해서 신앙생활을 했던 한국 교회 상황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어머니는 제 기억에 교회에서 봉사하시고 옷만 갈아입고 또 교회 가시고, 어머니도 살려고 하신 거죠. 저는 어릴 때는 그래도 어머니에 대한 어떤, 어린아이들은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잖아요.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교회에 안 가면 엄마가 슬퍼했고, 어머니는 그게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저는 어린 마음에 엄마를 만족시키려고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가면은 저는 반항심이 있는 게, 신앙이 있어서 간 건 아니고,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맞아서 눈에 멍 자국 있고, 얼굴에 흉터 있고, 그런데 또 주일학교 교사를 앞에서 하세요. 수치스럽잖아요. 애들은 철없이 "선생님, 왜 눈이 파래요?" 막 이렇게 얘기를 하면은 "어, 넘어져서 다쳤어." 그러면 저는 뒤에서 쟤가 되게 밉잖아요. 밉고. 어릴 때는 맞지 못해서 했다가 초등 고학년, 중고등학교 때 방황이 시작돼서 사실은 교회를 안 다녔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다 싫었던 것 같아요. 모든 게 다 분노가 있고, 신이라는 존재는 아예 믿지도 않았고, 당시에도. 그럼 아버지는 어떠셨어요? 같이 교회 따라다니셨나요?
아버지도 참 신기한 게, 어머니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셨어요, 포기하지 않고.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데 갑자기 술을 끊으시는 거예요. 저는 뭐 믿지도 않았죠, 전혀. 담배도 끊으시고, 회심하고 거의 동시에 목회자가 되겠다고 하시면서 작은 신학교에 다니시면서 몇 달 뒤에는 시골 오지에, 왕 씨들만 모여 사는 동네가 있어요. 처음 봤어요, 무슨 동네가 다 성씨예요. 지금 동네가 경기도 2천시 율면 땡땡리인데, 1리는 황 씨들이 모여 살고, 2리는 왕 씨들 모여 살아요. 김 씨는 저희 집밖에 없어요. 시골 흉가를 고쳐가지고 목회를 시작하셨는데, 아버지도 회심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열정은 앞서는데, 사실 성도인 적도 없고, 신앙 세계가 뭔지도 모르고, 신앙생활이 뭔지도 모르고, 성화의 과정도 있는 건데 그냥 덥석 열정만 앞서서 하니까 목회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다 친척들이고 하는데, 경고한 그들의 문화가 깨지지 않잖아요. "농사일 도와주면 교회 올까?" 싶어서 방법을 모르니까, 계속 힘들게 힘들게 하시는 거죠. 그런데 그분들이 교회는 안 오죠. 목회는 어렵고 생계는 막막하고. 흉가에서, 쥐들하고 같이 살면서, 2~3일 청소 안 하면 과장하는 게 아니라 쥐똥이 한 주먹 잡히는 그런 집에서 저희가 살았어요. 어머니 아시는 보건소 하시는 집사님이 "온 가족 다 죽는다. 유행성 출혈로." 그래서 예방 접종을 운전해서 몇 시간씩 운전해서 와서 3차까지 맞아야 되거든요, 주사 놔주고 가고.
그러니까 아버지도 분노가 있잖아요. 성정, 옛 성정하고 싸우는 것도 성화의 과정인데, 아버지는 그게 괴리감이 컸던 것 같아요. 그 분노가 또 표출되는 거죠. 참아 있다가 표출이 되면 온 가족이 상처를 받는데, 그때 상황이 달라진 것은 제가 컸잖아요, 몸이. 이때 몇 살입니까? 그때 초등학교 5학년 때 갔으니까 중학교, 고등학교 됐겠죠. 중학교 됐죠. 그런 것을 너무 싫으니까 집에 많이 없었죠. 방황을 많이 하고 친구들하고 어울리고 하면서 방황을 많이 하고, 지긋지긋해서 벗어날 궁리만 했던 것 같아요. 경제적으로 능력만 생기면 내가 집을 벗어나고 싶다. 또 제가 집을 아예 떠나버리면 어머니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으니까 결정을 못 한 채로 계속 고민했던 것 같아요. 집에 오면 정말 분노가 일어나니까 잠깐도 못 있겠고, 밖에 나가면 또 여동생하고 엄마가 걱정되고. 이런 게 반복되었던 것 같아요, 사춘기 때. 아버님이 너무 급하게 목회자까지, 열정은 높이 평가하는데 안타까웠어요. 그게 아버지께 힘드셨을 거예요. 아버지가 좀 어떻게 목회 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 아버지의 본성이나 그 상처가 회복 없이 그냥 겉으로만 변화가 되신 거예요. 아버지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것은 진지했던 것 같아요. 삶이라는 부분은 끊임없는 싸움이잖아요. 목회자인 저도 그렇죠. 사실 그 과정이 없으니까 저는 거기서 더 분노가 있고, 죄송한 얘기지만 과거지만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그때 더 강해진 게, 사람들은 "너네 아버지 봐라. 하나님 살아계시다. 기적이 일어났지 않냐." 하는데 저는 이게 해결이 안 됐었거든요. 아버지의 힘들 때 나오는 모습도 알고 있고, 폭력성은 계속 있겠죠. 참지 못하고 나타날 때가 있었죠. 예전처럼 폭주할 수 없는 게 저희도 컸고 하니까, 해결이 안 됐는데, 다 괜찮아진 걸로 바라보니까 주변에서는. 저는 그게 더 고통스러웠던 것 같아요, 어릴 때니까 더 고통스러웠던 것 같아요.
신앙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었고 집을 탈출할 방법만 궁리하는데, 어리잖아요.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게 결국 집을 벗어나는 건 가출을 하거나, 아니면 공부를 해서 다른 학교를 가거나. 가출하면 제 인생 망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우연찮게 시골 교회니까 단기 선교 대학생들이 가잖아요. 와서 일주일 동안 봉사해주고 책을 하나 떨구고 갔어요. 그때 당시 고등학생들이 보는 큐티 책이었는데, 약간 재밌는 잡지책처럼 구성되어 있었어요. 우연히 봤는데 너무 신기한 거예요. 컬러고 기사들도 있고, "이게 뭐지?" 집이 너무 가난하니까 외삼촌한테 전화를 해서 "이런 잡지책이 있는데, 이거 한 권만 사서 보내달라." 했더니 외삼촌이 그걸 보내줬는데, 우편이 왔잖아요. 펼쳐봤는데 그때 안산에 있는 기독교 학교, 안산 동산고등학교 김민종 목사님이 인터뷰한 기사가 뜬 거예요. 순간 전율이 느껴지면서 "여기로 도망쳐야 되겠다." 기숙사가 있네. 그 생각을 딱 했어요. 보니까 고입선발고사가 연말이잖아요. 11월, 12월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가 여름이었어요. 너무 늦게 본 거죠. 어린 마음에 단순하게 학교를 갔어요. 안산까지 찾아갔어요. 간절한 마음으로 교감 선생님, 나중에 교장 선생님이 되셨는데, 유아원 교감 선생님이 그냥 갔는데 학교를 다 구경시켜 주셨어요. 저를 만나자마자 지방에서 혼자 올라오니까 당돌하잖아요. "너 공부 잘하니? 점수 몇 점이니?" 그때 200점 만점에 88점이었거든요. 잘못 들으신 건지, 희망을 심어주신 건지 "못 들어가거든요, 88점은." 당연히 못 들어가죠. 정성스럽게 학교 구경을 시켜주시는 거예요. 저의 눈을 딱 보면서 "좋다, 논술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주시더라고요.
3개월인데 집에 가서 비닐하우스에서 살았거든요. 비닐하우스 치고 바닥은 흙이고, 나무 깔고 스티로폼 깔고 담요 깔고, 2년을 살았어요. 비닐하우스 덥고 춥고 한데, 이불 밖으로 나오면 바로 흙, 이런 식으로 살았는데, 거기서 3개월 동안 옆에 전구 있잖아요, 키는 전구로, 그 말을 믿고 "될 거다." 생각했어요. 탈출해야 되니까, "이거는 제 인생을 걸고 도망쳐야 된다." 생각하고 3개월 동안 밤을 새워서 마지막 모의고사가 16점 나왔어요. 원서 썼어요, 1번으로 원서 쓰고, 성적은 몇 등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최하위권으로 들어갔겠죠. 간신히 도망치는 건 성공했어요. 들어갔어요, 간신히. 탈출 성공이죠. 합법적으로 도망을 친 거죠. 거의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너무 힘드셨을 텐데, 학교 갔을 때 너무 행복했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하루 좋았고, 그다음부터는 사실 학구열이 불타서 학교 간 게 아니라 탈출한 거잖아요. 목적을 달성했으니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충격을 받은 건, 제 주변은 엉망진창이었던 가정인데, 거기서 보니까 애들이 다 저보다 행복해 보이는 거예요. 공부도 굉장히 잘하고, 기숙사 있었는데 당시 기숙사 친구들은 전국 수재들이 모여 있었어요. 저는 끼어들 틈도 없는, 열등감이 시작되는데, 주말에 기숙사에 애들이 없는 줄 알고 전기를 내리거든요. 밥도 안 줘요. 다 집으로 가니까, 혼자 있었어요.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거죠. 전기도 안 들어오고 밥도 없는데, 교회도 안 가니까 집을 탈출했기 때문에 갈 데가 없고, 가는 게 더 싫었거든요. 빈 건물에 주말에 이불 덮고 우는 거죠. 우울증이 있던 것 같아요. 애들은 주말, 주일 저녁 되면 부모님이 다 데려다 주잖아요. 새 옷, 새 책, 먹을 것 싸오고, 짐 다 정리해주고, 아기들 예뻐하고. 저는 안 간 걸 몰라요, 아무도. 친구들도 몰라요. 애들 올 때쯤 되면 일어나서 씻고 집에 갔다 온 척을 하는 거죠. 주말 동안 식사는 못 먹었죠. 주말에 누워 있었죠. 되게 우울했어요.
우울한 정도가 아니죠. 전기를 아예 내려 버렸으니까. 밖에서 사람 없는 줄 알고 잠글 때도 있었고. 그럴 수 있죠. 건물 관리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겹겹이 쌓이잖아요. 예민해지고, 짜증내고, 화내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너무 안 좋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심하게 감정 표현을 하고, 사춘기 남자아이들이 격하잖아요. 그런 걸 다 표출하니까 거리를 점점 두니까 친구도 별로 없어졌겠죠. 감당이 안 됐을 것 같아요. 공격적으로.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요. 저녁을 먹잖아요, 평일에. 공부를 해야 하는데 관심도 없고, 할 수도 없었고. 저녁에 뒤로 몰래 빠져나와서 운동장 귀퉁이에 소각장이 있어요. 거기 앉아서 계속 울었던 것 같아요. 야자 끝낼 때쯤 화장실 가서 세수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기숙사 들어와서 자고. 1년이 지나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견딜 수가 없어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죽어야겠는데, 이대로 혼자 죽는 건 너무 억울하니까, 부모에게 복수해야 되겠다. 하면 안 되는데, 그때 너무 분노가 있으니까. 계속 그런 고민을 하면서 지냈죠. 3년 내내 집을 안 갔어요.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기숙사 공사를 하게 돼서 일주일 동안 비워야 돼요.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여자 기숙사로 바꾸니까 남학생이 남아 있으면 안 되는 거니까 나와야 됐던 거예요, 부득이하게. 짐을 싸서 오랜만에 집에 갔죠. 부모님 입장에서 1년 만에 본 아들이니까 반가워요. 없는 살림에 맛있는 음식을 해 준 거예요. 저는 이만큼 차서 왔잖아요, 분노가 여기까지 꽉 차서. 아버지도 멋쩍잖아요. 밥 먹다가 통상 한국 남자들 아빠들이 하는 말 "많이 먹어." 딱 했어요. "네." 하고 많이 먹으면 되는데, 그때 그런 정서가 아니라 혼자 미친 사람이 된 거예요. "많이 먹어? 많이 먹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밥 방귀로 이게 해결이 돼? 이게 해결이 된다고 생각해, 지금?" 이성을 잃고 제가 제가 아니었던 거죠. 상을 뒤집어엎고, 손에 잡히는 걸로 집을 다 부수고, 유리창 다 부수고, 부모님을 똑바로 쳐다보고 소리를 지르면서 얘기했어요. "당신들 때문이고 난 죽을 거다. 내일 아침 시체로 발견되면 평생 후회하고 살아라." 하고 집을 나갔죠.
기숙사에서 운동장 가장자리에 앉아서 울 때, 시골 동네 은행나무 큰 게 있어요. 너무 답답할 때 그 은행나무에 기대서 친구처럼 얘기를 했거든요, 나무하고. 나무가 소리 없이 다 들어줬어요. 고등학교 운동장 귀퉁이에서 그 나무가 생각나는 거예요. 애착 대상이 없으니까 나무하고라도 애착이 된 거예요. 은행나무에 목을 매서 죽어야겠다. 계속 상상했어요. 연습했어요. 운동장에서 소각장 옆에서 매듭 짓는 연습하고, 목에 걸고 당겨보기도 하고. 준비한 줄을 가지고 시골에 가로등도 없는데 은행나무한테 간 거죠. 나무에 목을 매면서 줄을 묶으면서 목에다 거는데, 저는 신은 아예 필요가 없었어요. 인식 범위 안에 없었고. 어머니가 매일 하나님, 하나님 했고, 기독교 학교는 매일 예배를 드렸거든요. 예배 시간 자고, 목사님 째려보고 "헛소리하네." 이런 태도였고. 무심결에 "당신을 저주한다." 당신이 있다면 내 인생은 이렇게 될 수가 없다. 목을 매려고 하는데 갑자기 몽환적이 되는 거예요. 해리 상태가 되는 거죠. 어떤 기억이 소환이 딱 된 거예요. 순간에. 다섯 살 때 어두운 방 안에서 아버지 학대할 때 장면이 선명하게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기억이 나는 거예요. 감정이 폭주하더니 "무슨 잘못이 있냐? 저 아이의 유일한 잘못은 저 집에 태어난 거다. 왜 아무도 안 구해줘? 저 아이의 처절한 눈물을 왜 아무도 안 닦아줘? 저 아이가 고통하며 신음하는 소리 왜 아무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아?" 갑자기 아이 등 뒤에 방구석에 하얀색 빛이 제 기억 속에 인식이 되는 거예요. 더 분노가 나는 거예요. "구경했네. 아니, 거기 구경했어요? 말이 돼요? 날 방치한 거예요? 당신이 있다면 그걸 구경할 수 있는 거예요?" 감정이 완전 폭주한 거죠. 엉엉 울고 뒹굴뒹굴 굴렀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통찰이 주어지는데, 고등학교 1학년 아이가 생각할 수 없는 통찰이었어요. 제 수준으로는 제 내면 안에 통찰이 왔는데, "유비야, 미안하다. 내가 너를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냈다. 내가 너의 가정을 보낸 이유는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치유하기 위함이다. 너무 미안하다. 조금만 견뎌다오. 미안하다, 유비야." 하는 거예요. 제 마음에 통찰이. 제 수준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신기한 게 그 하나의 통찰로 인해서 지금까지 고통받았던 삶, 살아온 이유가 명확해졌고 앞으로 살아가야 될 목적이 분명해진 거예요. "왜 이런 집에 태어나서 왜 이렇게 살고, 왜 이렇게 고통받으면서 지내왔나?" 이유가 없으니까 살아갈 이유가 없었던 거죠. 이유가 있었던 거잖아요. 앞으로도 힘든 일이 많았는데, 내가 살아갈 이유가 없어서 죽으려고 했었는데, 살아가야 될 이유가 선명해진 거잖아요. 상처 입은 한 사람, 한 영혼을 치유하는 것. 그때 당시 치유가 일상의 용어가 아니었어요. 국어사전에 찾아봤을 때 치유, 힐링이 사람들이 인식 범위 안에 있을 때가 아니라, 저 혼자만 갖고 있는 일종의 키워드 같은 거였거든요, 저를 이끌어주는. 정말 신기했어요. 어제처럼 생생한데, 새소리가 처음으로 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호흡한다. 산소가 내 몸에 들어왔다 나간다." 인식을 처음 해봤고, 모든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 순간에. 고요하고 평안한 것을 처음 경험해 봤어요. 진짜 성령님을 만났네요. 저는 정말 신기했어요. 밤이 샜어요. 매듭 다 버리고 집에 갔죠. 집에 갔어요? 부모님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집은 다 깨져 있는데 청소가 되어 있는 상태였고, 제가 들어가서 큰절을 하고 무릎 꿇고 울면서 "과거의 아들은 죽었다. 다시 태어났다. 다시 살아갈 거다." 부모님 오열하고 끌어안고, 아버지도 그렇게 시작이 된 것 같아요. 아버지 뭘 하세요? 그 순간에 뭐라고 하시지, 혹시 기억나요? 말을 못 하세요. 표현할 줄 모르니까 술이 들어가면 말을 하시는데, 지금도 똑같아요. 말을 안 하세요. 아버지 당신에 대해서 직접 들은 건 없어요, 지금도. 그래요? 그 이후로 삶이 완전히 달라지셨나요? 학교로 복귀하고 가서도? 그렇죠.
신앙을 갖게 되니까 공부를 해야 되겠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관심이 없었는데 "우리 반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애가 누구지?" 처음 궁금해서 그 친구한테 가서 "야, 네가 우리 반 1등이라며? 공부 좀 가르쳐 줘라." "내가 왜?" "부탁이야. 가르쳐 달라고 부탁이야. 나 진짜 바보인데, 공부 좀 가르쳐 줘라." 너무 착한 친구예요. 마음을 열고, 기숙사 친구였는데 수재예요, 엄청 똑똑한 친구였어요. 자기 짝꿍 하더니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밑줄 치고, 화장실도 못 가게 해요. 수업할 때 화장실 가려고 하는데 "잠깐, 여기 앉아 봐. 지금부터 3분 동안 수업 내용 복귀하고 머릿속에 외워." 일종의 복수 아니었을까요? 그대로 시키는 대로 했거든요. 단순해서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알겠는 거예요, 이해가 되고. 신기한 게 그 친구가 저를 가르쳐 줬는데, 1학년 때 반에서 1등이었고, 다음 시험에서 걔보다 점수가 높았어요. 친구도 놀래고, 선생님도 당황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친구가 적극성은 떨어지더라고요, 다음부터. 고마운 친구죠, 지금도. 지금은 선생님 되어 있어요. 은사가 있나 봐요, 가르치는 은사가. 그때 처음으로 은혜를 경험한 것 같아요. 하나님 은혜요. 선물이었던 것 같아요.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친구들을 얻었어요, 믿음의 동역자들을. 지금도 그때 만난 친구들이 저의 믿음의 동역자예요. 지금도 선생님들이 저를 축복해주고. 신앙생활이 변화되면서 주변도 같이 변화되는 데는 시간의 격차가 있었지만, 진심이 닿으니까 같이 따뜻함을 경험하게 되더라고요. 지금 목소리만 들어봐도 너무 나긋나긋하고 부드럽고 인상도 좋으셔서, 고등학교 때 폭력적이고 반항적이었다는 게 잘 와닿지 않는데, 인터뷰한 것 보니까 폭력 후유증으로 언어장애, 대인기피증까지 있으셨다고 하더라고요. 대신 상태가 심각했어요. 익숙함은 중요하거든요. 대인기피증, 언어장애가 있을 때는 아는 사람하고는 말이 나와요. 익숙해지기까지 오래 걸리겠죠. 남학생 있고 교실 안에 있을 때는 대다수 앞에서 말을 못 했지만, 기숙사 친구들, 같은 방 친구들 정도는 편하게 했는데, 이성은 거의 얘기 못 했어요.
저는 착각이, 저를 보는 사람은 없는데 시선이 두려워서. 지금도 기억나는 게 점심시간에 여학생, 남학생 같이 밥 먹잖아요. 누가 볼까 봐 한 손으로 식판 들고 한 손으로 얼굴 가렸는데, 얼굴이 커서 손으로 안 가려지거든요. 눈만 가렸어요. 된장국을 남겼는데, 가다가 기둥에 박아서 다 뒤집어썼어요. 눈 마주치고 이런 게 두려웠어요. 친구 몇 명은 괜찮았는데, 두려웠어요. 신학교 갔잖아요. 신학교 가면 설교를 해야 하잖아요. 안 되는 거예요, 말이. 극복할 수 있을까? 단순하잖아요. 포기는 안 했거든요. 선교사님이 부흥회 강사로 오셨는데, 신학교 1학년 신학생들 설교하시면서 "신학생이 전도를 안 하면 신학생이냐? 나는 예수 믿은 다음부터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자극이 된 거예요. "나도 하자." 사영리를 샀어요, 소책자를. 500원인데. 일단 외웠어요. 말을 못 하니까 외워서 따라 하려고. 전날 기숙사에서 자는데 "오늘부터 나도 결심했어. 하루에 한 명한테 복음을 전하고 살아야지." 용기가 안 나서 못 하잖아요. 밤 11시 반, 11시 40분 되는데, 20분 지나면 하루가 가는 거예요. 자신과 약속했잖아요. 생각이 딱 나면 옷을 입고 추리닝 입고 나와서 주변 술집 앞, 편의점 앞에 서성이면 어떤 아저씨가 담배 사러 편의점 들어가면 "아저씨, 손 딱 잡고. 아저씨, 죄송한데 교회 다니세요?" "안 다녀요." 12시 직전에 말은 안 나오고 사영리 주고 오면 "했다." 잠이 와요. 안 되겠는 거예요. 화끈하게 해야 한다. 극복해야 한다. 프린트해서 기숙사 벽에 붙여 놨어요, 사람 얼굴을. 눈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데 못 쳐다보겠어요. 연습하기 시작했고, 지하철에서. 교회가 안산, 학교는 사당역, 50분. 지하철에서 사영리를 전해 봐야 되겠다. 맨 첫 칸에 타서 과감하게 끝까지 가려고 했는데, "나도 못해." 평소 지하철 탈 때는 편하거든요. 경치도 좋고. 뭘 하려고 타면 식은땀이 줄줄 나고 다리에 경련이 와요. 서 있었죠. 벽 보고 서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 보고 서 있었죠. 사람들 긴장하겠네, "저 사람 뭘 하려고?" 안 하면 계속 서 있으니까. 다음 칸으로 갔죠. 거기서 생각하다가 다음 칸, 다음 칸으로 가죠. 말을 못 하고 벽을 만났죠. 열면 기관사 분이 계세요. "마지막이구나." 절망하는 거죠. "한마디도 못 하고, 전도 못 하고 끝까지 왔고, 완전한 패자." 절망이 너무 큰 거예요.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오는데, 사영리는 덜덜 외웠어요. 못 하는 거죠. 말을 더듬었고, 너무 두려웠어요.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도 잘 못 했어요. 대중 앞에서. 흔히 아는 말더듬. "선생님, 뭐, 뭐..." 이런 식으로. 심했어요. 지긋지긋하잖아요, 제 자신이. 단순하잖아요. 포기는 안 했거든요. 자연스럽게 역으로 이동하는데, 지하철에서 물건 파는 분 있잖아요. 잊을 수 없는데, 만득이 인형. 풍선에 밀가루 반죽 넣어서 눈, 코 붙여서 1,000원에 팔거든요. 장담하는데 하루만 지나면 굳어서 버려야 하거든요. 만득이 인형을 파는데,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장난감처럼 파는 거예요. 사람들이 사요. "이거 좋으니까." 충격받았어요. "저거 내일 아침에 굳어서 없어질 것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장난감으로 파는데, 나는 영혼을 살리는 복음, 한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인데 부끄러워서 못 전하고 있다니." 전투력이 올라가는 거예요. "나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이 그분 붙여준 것 같아요. 아저씨하고 겹치면 안 되니까 옆 칸으로 가서 또 말을 못 했죠. 쉽지 않아요. 바로 될 줄 알았는데. 다음 칸으로 가고 벽을 만났죠. 포기했었어요. "안 된다. 나는 조용한 목회를 해야 되겠다, 말 안 하는 목회를."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거죠.
결국 성공 못 하고 노상 전도 실패했네요? 그러면 지금 굉장히, 전혀 티 안 나게 말씀 잘 하시는데, 스피치, 언어 극복 계기가 있었어요? 교회에서 늦게까지 사역을 했어요. 막차를 탄 거예요, 지하철 막차. 4호선 막차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누워 계시고, 좀비 세상. 탔는데 너무 피곤해서 기대서 자려고 하는데, 대각선에 알코올에 의식 잃으신 분이 계세요. 가까이 가서 "아저씨, 아저씨." 대답 안 해요. "아저씨, 아저씨, 의식 없어요." "아저씨, 잘 들으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이 있습니다." 조용히 들어주는 거예요, 의식 없으니까. 천상의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할렐루야, 해냈다." 담대해지고. 옆 칸에 갔더니 똑같아요. 세 분이 또 좀비처럼 간신히 몸을 가누면서. 복도 통로에 섰죠. 세 명을 향해서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어요. 신났죠. "나 되는구나." "나는 되는 사람이야." 주말 됐어요. 4호선 서울랜드, 어린이대공원, 경마공원 난리예요. 꽉 찼어요. "말하면 욕먹을 수 있는데." 마음먹고, 사람이 "저 뭐 하는 사람인가?" 쳐다보고, 손에 든 물건은 없고. 벌벌 떨면서 말 더듬으면서 다리 후들거리고 몸이 떨렸을 거예요. "여러분, 저는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4호선 사당역에 있는 총신대 재학 중인 1학년 학생 김유비라고 합니다. 목사가 돼야 하는데, 대인기피증에 말더듬이 있습니다." 고백했구나. "하지만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5분만, 딱 5분만 제 얘기를 들어주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눈물이 나고 벌벌 떨리는 거예요. 나를 이겨내는 순간. 누가 행패 부리고 막을 줄 알았는데, 다 들어주면서 어떤 아저씨 신문 접더니 저를 쳐다보고 장내에 박수 소리가. 울면서 모르는데 와서 안아주고 손잡아주고. "할 수 있어요." 다음 칸은 아무도 모르죠. 또 벌벌 떨면서 또 한 거예요. 신기한 게 다 들어줘요. 만주족 시민 느껴지는 거예요. 점점. 엄청난 경험이었고, 과정을 통해서 말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노상 전도가 많은 사람에게 전도되지만 나를 이겨내는 비법이 된 거네요. 특별한 경험이었죠. 포기했었는데. 지하철에서 선포한 것이 나를 이겨내는 비법이 됐네요. 말을 더듬는 학생들이 자존감이 낮고 표현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텐데, 방송 보시는 분들 중 목사님 간증 듣고 힘나는 분들 계실 것 같아요. 나를 이겨내는 한 순간이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짧은 한 순간이지만 본인에게 열차 가는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요. 이겨냈다는 것에 희망을 얻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너무 감사하네요.
이성에게 말도 잘 못 하셨는데, 여자친구, 결혼은 어떻게? 결혼은 일찍 했어요. 안정감이 그리웠나 봐요. 지하철에서 터진 다음부터 "아가씨, 이거..." 한 거 아니에요. "아가씨, 이쁜데 집 어디 살아?" 한 거 아니에요. "너무 잘돼, 너무 잘돼, 너무 이쁜데." 한 거 아니에요. 어려웠고요. 하나님께서 좋은 아내 만나게 해주셔서 결혼을 일찍 하게 됐어요. 27, 28세쯤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해요. 교회에서 만나서 결혼했는데, 여건이 안 좋았어요. 가난했고. 곰팡이 피는 오래된 빌라에 500에 30 월세로 시작했고, 전도사고. 믿음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사과 농장에 개척된 교회에 전도사로 갔어요. 벅찼던 것 같아요. 사례비도 없거나, 거의 없었어요. 개척 초기에는. 신대원 다니고 있었고, 아이는 태어났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어렵더라고요. 결혼 생활이 너무 어려웠다. 가정 안에서 상처 많고 힘든 시간 많았잖아요. 결혼 생활 자체가 생소하고 어려웠을 것 같아요. 정말 그래요. 혼자 크리스천으로서, 나를 가리면서 내 속에 있는 것들을 정리하면서 지낼 정도는 됐는데, 결혼해보니 부부는 한 몸인데 배우자 사이에는 하나도 안 되어 있는 거예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아내에게 너무 큰 상처 준 기억이 있는데, 기억 있을 때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인데, 아내가 어느 날 고민하다가 "여보, 월세 다섯 달 밀렸고, 기저귀 떨어졌고, 분유 없어." 보통 지금의 저라면 "여보 미안해. 빨리 방법을 찾아볼게. 정말 미안해." 했을 텐데, 그때 너무 부끄럽게도 아내한테 소리 지른 거예요. "아니, 어쩌라고." 격하게 소리 키우면서. 아내가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아서 우는 거예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결혼할 때 두 가지 결심했던 것 같아요. "폭력적인 가장이 되지 않겠다." 죽음과 같은 것. "경제적으로 무능한 가장이 되지 않겠다." 죽음과 같은 것. 아버지에게서 본 거니까. 거울에 비친 저는 두 가지 완전히 다, 짐승인 거예요. 자아가 무너졌어요. 직면한 순간 공포가 커서 거기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앉아서 우는 아내 두고 집을 나가 버린 거예요. 가출했어요, 2박 3일. 개뿔 뭐 했다고. 결핍이 너무 커서, 최악인 거죠. 교회에서 전도사였고, 좋은 평가받았지만 내면은 황폐한 거니까. "어쩌라고" 왜 했을까? 반추해보면 사례비 없는 교회 갔잖아요. 주말 사역 집중, 믿음, 열심히, 신대원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기숙사 들어가야 해요. 4시 반에 학교 나와서 입시 학원에서 영어 가르치면서 밤 12시 반에 와서 학원에서 월급 받은 것 집에 갖다 주고, 학비는 쪽잠 자면서 밤새면서 공부해서 학교에서 장학금 받아서 학비 내고, 교회에서는 내 돈 써가면서 사역하고. 하나님이 복 주실 줄 알았던 거예요, 그때 수준에. 열심히 살고, 학원에서 오다가 졸아서 난간 들이받은 적도 있고, 기숙사 친구들이 "너 이러다 죽는다. 어떻게 좀 해 봐라."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아기는 어리고, 돈은 벌어야겠고, 학교는 다녀야겠고. 꽉 찼던 거죠. 더 할 수 없는데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거죠. 아내 입장에서는 평생 상처가 된 거죠. 빈 차에서 절망적인 거예요.
아버지가 전화 왔어요. "이혼한다." 저희 아버지. 이혼한다고 전화 온 게 기가 막힌 거예요. 웃음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요." 당신들 책임이다. 분노 올라온 거예요. 평범하게 컸으면 이랬겠지. 아버지한테 "그래서요." 했더니 아버지가 말을 안 하세요. "마지막으로 편지 썼으니까 시간 되면 읽어보라." 아버지 당신 이야기 안 하세요. 아버지에 대해서 아예 몰라요. 아버지 완전 닮은 거잖아요. 편지를 썼다고 하니까 궁금한 거예요. 교회 사무실 가서 몰래 이메일 확인해보니 A4 60장 쓴 거예요. 읽어봤죠. 아버지 원가족부터 현재까지 다 쓴 거예요. 처음으로 눈물 나면서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처음 알게 된 거예요.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가해자였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피해자였다." 인식된 거예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나는 아버지에게 피해자이지만, 어쩜 내가 아버지를 꼭 닮았지? 생각과 가치관과 결핍, 어떻게 이렇게 똑같지?" "가만히 있어 봐. 내가 언제까지 피해자야? 나는 내 아내에게 가해자야. 내 아이들에게 가해자라고 내가 이걸 인식하지 못하고 바꾸지 않으면 이 고통은 반복될 거야." 아버지는 영원한 가해자가 아니라 아버지도 피해자였고, 저는 영원히 피해자로 살 수 없고, 저 역시 가해자가 되어 있는 거예요. 아버지를 꼭 닮아서 아내에게 성장 과정 아예 말을 안 했어요. "여자가 왜 나를 좋아하지? 지금의 내 모습 보고 마음을 열었나 보다." 철없었죠. 과거를 극복해왔기 때문에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서 숨겼어요. 아내는 제가 누군지 몰라요. 다 말할 수 없으니까 아내에게 읽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3일 만에 간 거잖아요. 알량한 자존심 남아서 "제발 편지 읽어 줘, 부탁할게." 마음인데, 자존심 때문에 명스럽게 아내에게 주지도 않고 식탁에 던지듯 올려놓고 "이거 버려." 한 거예요. 정반대 얘기. 사람이 못났어요, 상처투성이니까. "버리면 안 돼, 제발 읽어 줘야 돼, 제발 버리지 마." 민망하니까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서 이불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더워요, 답답하고. 이불 뒤집어쓰는 것도 옛날 아버지 스타일. 본 대로 하는 거죠, 학습된 대로. 다행히 아내가 식탁 끄는 소리 들려요. 의자 끄는 소리, 종이 사각사각 넘어가는 소리, 자세히 들려요. 서라운드로 들리죠. 눈물 막, 심장 소리도 들리니까. 아내가 사각사각 넘기는데 페이지 수도 넘어가요. 아내가 울어요. 멈췄다가 또 넘기면서 울고. 60장 다 넘겼어요. 사각사각 걸어오는데 발걸음 소리 커요. 방문 여는 소리, 다가오는 소리, 심장 크게 뛰고, "왜 오지? 와서 어떻게 하려고 하지? 따지고 들면 어떡하지?" 두려움 엄습한 거예요. 아내가 이불 들추더니 저를 바라보면서 울면서 "여보, 살아줘서 고마워. 포기하지 않고 견뎌줘서 고마워." 아기처럼 터져서 울었어요. 아내가 엄마처럼 아기처럼 밤새도록 끌어안고 울더라고요. 아내 품에 안겨서 밤새도록 울었어요. "이 말 듣고 싶었던 거구나." 듣고 나서 알았어요. 사라졌을 것 같아. 극단적인 선택할 때는 개인으로서 주님이 만나주셨고, 아내 품에 안겨서 운 날은 가정에 임해주신 하나님을 만난 것 같아요. 아내 따뜻한 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진 것, 다 개방했을 때, 아버지 언어로 나를 개방했을 때,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준 첫 경험이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고 싶었던 얘기였어요.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아내, 남편, 배우자를 붙여주시는 것 아니겠어요? 이후 아빠로서 가장으로서 변화가 생겼어요? 과정 하나부터 여기까지 다 어려운 거예요. 이민 온 것처럼. 아내, 남편 너무 다르다. 남자들끼리 문화에 익숙하니까 부부 싸움 했잖아요. 다 풀었어요. 미안해서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남자들끼리는 "미안해." 하면 "나도 미안해." 황당한 게 "여보, 내가 미안해." 아내도 "미안해." 할 줄 알았는데, 눈 똑바로 뜨면서 "뭘 잘못했어?" "이게 아닌데." 2차 시도 때 "미안해." "뭘 잘못했어?" "내가 생각해 보니 이런 거 잘못했지. 미안해." "미안해." "또, 진짜 대사 외우듯이. 무조건 사과하지 마. 가볍게 넘기지 말고 자, 서..." "내가 이러이래서 이렇게 잘못했지." "그거 아닌데." 쥐구멍 찾는 거예요. 커졌어. 과장했지만, 아내가 다 이해심 많고, 사과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예 모르는 거예요. 포인트가 다른 거죠. 아내가 안 알려주잖아요. 수첩 들고 따라다니는 거예요. 하루는 울면서 "여보, 내가 스스로 깨닫는 거하고 예수님 오시는 거하고 거의 비슷해. 예수님 오실 때까지 내가 못 깨달을 수도 있어. 당신이 알려 줘." 다 받아 적은 거죠. 아내한테 사과하는 법, 예를 들어 배운다고 하면 아내한테 "언제 사과하는 거야? 어떻게 사과하는 거야?" 수첩 들고 다니는데, 아내가 자기 얘기를 30분 동안 해요. "언제 사과하는 거지?" "됐어. 알겠어." "아니, 여보 사과 언제 하는 거야?" "했잖아, 방금." "왜 나 안 했는데?" "사과, 그게 사과야. 내 얘기 다 들어주는 거, 내가 왜 속상했고, 왜 마음 아팠고, 그냥 있는 그대로 다 들어주는 거." 유레카 외친 거예요. 그런 식이었어요. 상담 정교하게 공부하기 전에 아내 도움이 컸고, 소망 주고 이끌어주고, 아내와 관계는 ABC부터 시작한 거죠. 보고 배운 게 없으니까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아내 도움이 컸고. 아이들도 마찬가지. 부교역자 할 때는 설교 아이들 노출 안 되잖아요. 어떻게 살았는지 아이들도 몰라요. 조금씩 알려질 때, 제 이야기를 다른 매체를 통해서 아이들이 들었고,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현관 앞에 서 있더라고요. 불쌍하게 쳐다보면서 "아빠, 그랬어?" 애들이 안아주는데, 힐링인 거예요. 애들하고 눈으로 놀아주는 거예요. 아내가 놀리면서 "초능력자"라고, "눈으로 놀고, 눈으로 웃는다." 서투름이 끝이 없죠. 달라질 면도 있지만, 자녀 대할 때 "아직 아빠로서, 아버지로서 서투르구나." 느낄 때도 있죠? 많죠. 특히 아들하고 관계가 어려워요. 몰랐어요. 딸, 아들 하나, 딸 둘인데, 딸들은 편안함이 있어요. 아들하고 있을 때는 어릴 때 예뻤는데 소통이 되면서 갈등 있는 거예요. "무시당하나?" 오래 걸렸어요, 인식할 때까지.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고 헤아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좋은 의도겠지만 의지적인 측면 강한 것 같아요. 아들하고 관계에서 두려워하는 게 있는 거죠. 아들과 원만하지 않다는 건 개인적으로 실패했다는 두려움, 결핍이 있던 거죠. 인식하고 나서 관계를 다시 들여다보니 아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너무 예민한 거죠, 결핍 때문에. 고민이 컸던 것 같아요. 아이가 사춘기고 하니까 노력하고 대화 많이 하고. 나의 어린 시절을 투영하게 되니까,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생각했던 것처럼 아이가 나를 생각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아들이 너무 고마운 게 착하고 좋은 아들인 게, 혼내고 나면 자책돼요. "왜 혼냈을까? 얘기를 해도 되는데." 가서 사과하잖아요. 아들이 어릴 때, 5학년, 4학년 때 "아빠, 왜 자꾸 사과하세요?" "아빠도 어른이지만 감정적으로 얘기한 것에 대해서 사과할 수 있어." "아빠, 아빠는 제가 잘못했을 때 혼내셔도 돼요. 아빠가 그렇게 얘기해주셔서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게 됐어요. 아빠가 사과 안 하셔도 돼요. 당연히 그렇게 하셔도 돼요." 막. "그래, 그래." 안방 가서 우는. 사모님이 잘 키워서 그래요. 사모님이 엄청 잘 키우셨네. 감사하죠. 아이들이 오히려 저를 치료해줘요. 둘째 딸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잖아요. "아빠." 먹다가 엄마 눈빛으로 쳐다봐요. "많이 먹어." "왜 그래?" "아빠 어릴 때 이런 거 많이 못 먹었잖아." "내 돈으로 내가 사는데 생색을 왜 내?" 농담인데, "음식이 맵다." 하면서 눈물이 나고. 파스텔 톤이고, 막내는 나이 차이가 많이나요. 첫째하고 여섯 살 차이 나는데, 태어나도 놀아주지 못하는 거예요. 애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아빠, 이리 와 봐. 이거 펴." 피고, "이거 쌓아." 쌓아 올리고. 자책돼요. "왜 애들하고 놀아주는 방법도 모르지?" 애들이 시키는 대로 해요. 아이가 나중에 저를 평가해요. "재밌었다. 아빠 진짜 재밌었어." 시킨 대로만 한 거거든요. 주도권이 없는 거예요. 애들이 저를 품어주고 이해해주는 시간들이 큰 거죠. 배운 적이 없으니까. 목사님은 상처 많이 받으셨으니 상처받은 자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셨잖아요. 앞으로 목회 비전은? 큰 비전 없어요. 상처 입은 한 영혼 마주하는 시간들이 힘들어서 "못 하겠다." 생각 많이 하거든요. 하나님이 아이러니한 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이 자리에 부르셨다는 생각도 있어요. 내적 대화 파괴적, 들어왔던 말들이. 혼자 있을 때 복음으로 처방되지 않으면 파괴적. 예수님하고 정서적으로 멀고 방치되는 정서 많이 경험하고,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다는 감정 많이 경험하는데, 감정이 자주 떨어지는 것 같아요. 상담하다 보면 이야기 들어주다 보면 그 사람 이야기 들으면서 "혼자가 아니구나." 공감되면서, 그 사람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어요. 제 역량의 사랑이 아닌 것 같고, 제 안에 계신 예수님 온기를 느껴요. 그 시간 속에서 제가 살아나요.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영혼 치유하시는 것. 제 능력으로 치유 못 하고, 치유 근원은 예수님, 나는 그 자리만 지킨다는 정체성 분명해지면 제가 살아나고, 감정에 사로잡힐 때는 부족함을 느끼니까 짐을 짊어졌을 때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과정으로 잘 다루려고 하지만, 결핍이 공감되는 내담자가 있을 수 있잖아요. 재경험하는 거예요. 잊고 살고 싶은데, 다 지난 일인데 살아나는 거죠. 역설적인 시간 반복되는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빚어가시는 방식, 나를 살리시는 방식. 예수님 오실 때까지 제 의지는 수십 번 수백 번 포기하겠지만, 예수님은 유효하게 유지시키고 이끌어가실 거라는 잠정적인 인식은 있어요. 목사님 마지막으로 천국에 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인터뷰하셨는데, 이유가 뭘까요? 가서 예수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니냐고. 왜냐하면 인생 개요표 보고 "사인해, 저 집에 태어날 거야." 하면 누가 거기 태어나겠어요? 사람을 잘못 보신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끔 해요. 역량 안 되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옆 사람이 선택받았을지 모르겠다." 생각 가끔 하는데, "하나님, 저 맞아요? 저 진짜 저를 그렇게 생각하시고 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포기하고 싶었어요." 예수님이 "수고했다, 유비야. 고맙다." 한마디 해주시면 눈 녹듯이 사라질 것 같아요. 천국에서 예수님 안아주시는 상상, "수고했다. 고맙다." 해주시면 마음이 녹아요. 꼭 직접 듣고 싶어요. 천국에 가서 그런 얘기 들으실 것 같아요. 오늘 듭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어떻게 들으셨어요? SNS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세상 화려하고 빨리 변하고 그런 것 보면서 마음 지킬 수 있을까, 요동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마음 지키지 못할까 봐 시작 못 했는데, 시작하면서 거의 처음으로 팔로우, 김유비 목사님 팔로우했어요. 연관에 뜨더라고요. 인스타에 글 항상 뜨는데, "어떻게 이렇게 나한테 맞는 말씀을 해주실까? 어떻게 이런 치유 편지를 올려주실까? 어떤 분이길래, 어떤 삶을 사셨길래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를 위로해줄까?" 생각하면서 좋아요 엄청 많이 눌렀어요. 상처 입은 한 영혼 살리기 위해서 목사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게 맞고, 하나님께서 미안하다고 하셨잖아요. 어린 목사님 짐을 무겁게 해주신 게 한 영혼이 아니라 수만 명, 수억만 명이 목사님 치유 편지를 통해서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고, 저도 아침에 눈 뜰 때, 하루 시작할 때 목사님 메시지로 살아요. SNS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 들었거든요. 하나님께서는 부르심과 은사 후회하심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후회하심 없는 것 떠나서 칭찬, 영광, 존귀 목사님 다 받으실 거라는 생각이.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해요. 제 감정이, 혼자 은혜받지 말고 자막으로 SNS 주소 실어주셔서 많은 분들이 SNS 들어가서 연이엘 자매가 늘 감사로 받았던 메시지 매일 치유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감사해요. 설레는 마음으로 왔어요. 사람들이 태어나는 이유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유가 있는데, 사람들 입장에서 내 인생은 너무 엉망이라는 경우 있는 것 같아요. 목사님 같은 경우도 그런 것 같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데, 오늘 방송 보면서 태어난 이유가 잔인하고 이해 안 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답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목사님, 도대체 이 땅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한 해도 안 빼고 출연하시는 모든 분 간증 내용에 아버지란 단어가 빠진 적이 없어요. 친절한 아버지, 상냥한 아버지, 사랑 베풀던 아버지 이야기 들어본 적 없어요. 도대체 이 땅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당신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길래 폭력적이고 저주스러운 상처 언어를 물려주시고 가정 파탄 느낄 정도의 상처를 물려주셨잖아요. 유교 시대 족보에 의해서 표현 못 하고 남자 여자 따로 앉는 것이고 밥상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라고 배워오면서 하셨을 거고, 전쟁이라는 큰 환란 겪으면서 가난 겪게 되면서 입을 막아버리고 폭력적으로 변해버린 아버지 세대 속에서 자랐잖아요. 목사님과 똑같은 상처들을 다 안고 자라왔잖아요. 당신들도 피해자였고 변했듯이 우리도 피해자로 자랐는데, 더 이상 가해자로 살 수 없잖아요. 상처를 우리 대에서 끊고, 성령으로 자식들에게 사랑과 축복 언어를 물려주는 수혜자를, 다음 세대를 그런 수혜를 받는 믿음 축복 언어를 받는 수혜자 1세대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지나온 족보는 다 지워버리고 하나님의 힘으로 딜리트 해버리고, 다음 세대들은 성령의 언어, 남을 사랑하는 언어, 미안할 때 "알았어." 가 아닌 "미안하다." 할 줄 알고, 얼마나 미안한지 모르면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도 모르게 받았잖아요. 아버지가 얼마나 표현 못 하면 지하철에서 말문 막혔던 아들처럼 사과를 메일로밖에 표현 못 하는 당신들처럼 그 언어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입에 달고 살고, 미안하다고 입에 달고 사는 언어를 물려줄 수 있는 수혜 세대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언어 치유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 같아요.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치유해주시고, 다음 세대에게 어떤 표현으로 물려줘야 될지 가르치는 가정 교사, 과외 선생 역할 맡기신 것 같아서 천국에 가지 않아도 이미 이 땅에서 연이엘 자매를 통해서 "너무 수고했다. 너무 잘했다." 칭찬을 예수님이 하고 계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많이 지쳐 계셨다고 했는데, 다시 힘을 얻으시고 치유의 은사를 베푸시는 목사님 목회를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귀한 간증 고맙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