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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모 지원, 러브더월드 서지형 사모의 감동 이야기

요약

아픔 넘어 사랑으로, 미혼모들의 어머니

꽃다운 나이에 아팠지만 미혼모들의 어머니가 된 서지형 사모 이야기

안녕하세요, 새롭게 하소서의 주영훈입니다. 오늘 작심 3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힘든 일도 끝까지 감당하며 꽃피울 나이에 아픔을 겪고, 현재는 꽃다운 나이의 미혼모들의 친구이자 엄마가 되어주는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바로 러브더월드 대표이자 웨이처치 서지형 사모님입니다. 귀한 발걸음 해 주셔서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사모님.

사모님, 소개처럼 꽃피울 나이에 마음이 많이 힘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꽃다운 시절에 많이 아팠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꽃다운 나이의 미혼모들을 만나 돕고 계신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 당시 어떤 질병을 겪으셨고, 어떻게 발견하게 되셨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대학교 4학년, 2002년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들떠 있던 시기에, 저는 평소처럼 신앙생활과 학업, 교회 봉사를 병행하며 바쁘게 지냈습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어느 날부터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습니다. 평소 무릎 꿇고 기도하던 것조차 힘들어서 누워서 배에 손을 얹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난생 처음으로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증상은 없었고, 단지 피곤함뿐이었지만, 그 느낌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남자친구(현재 남편)에게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대학교 앞 내과를 찾았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복부 초음파 검사를 받았는데, 여자 선생님께서 초음파를 하시면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겁니다. 진료가 끝나고 의뢰서를 써주시며, “지금 당장 큰 병원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친오빠가 대학병원 의사였기에, 오빠에게 전화했더니 의뢰서를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이 적혀 있었는데, 오빠는 당장 병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남자친구와 함께 오빠가 있는 대학병원으로 갔더니, 이미 입원 수속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여러 검사를 받는 동안, 저는 무슨 병인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나서야 난소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차 수술 후, 부인과 교수님께서 회진 때 “배에서 꺼낸 혹이 사람 머리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22cm, 18cm나 되는 엄청나게 큰 혹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큰 혹이 자라는 동안, 저는 피곤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증상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암세포가 영양분을 빼앗아 피로감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저 열심히 살아서 피곤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렇게 큰 난소암 수술 후 재발까지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처음 수술 후에는 상황 파악도 제대로 안 된 채 흘러갔기에 절망하거나 슬퍼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항암 치료를 시작하고 2차 항암 치료를 앞두고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절망적이었습니다. 1차 수술 당시, 의사 선생님은 난소와 자궁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저는 아직 학생이었고 너무 어렸기에 난소 한쪽과 자궁을 남겨두었습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3개월 만에 재발한 것입니다.

재발 소식을 듣고 2차 수술을 서둘러야 했지만, 그때가 대학교 4학년 2학기,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교수님들과 가족들은 휴학을 권했지만, 저는 학기를 마치고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재발 확인 후에도 12월까지 학교를 다녔고, 이듬해 1월에 2차 수술을 받으면서 남은 난소를 제거했습니다. 수술실 들어가기 직전, 교수님께 간곡히 부탁드렸습니다. “아직 아가씨이고 너무 어리니, 자궁만은 남겨달라”고. 다행히 2차 수술 후 회복실에서 눈을 떴을 때, 제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제 자궁은 어떻게 되었나요?” 였습니다. 의료진은 난소만 제거하고 자궁은 남겨두었다고 했습니다. 벌써 22년 전 이야기네요.

난소를 제거하면 임신이 어려워질 텐데, 결혼과 자녀에 대한 생각 때문에 마음이 많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분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셨나요? 정말 감사하게도, 당시 남자친구는 변함없이 제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남자친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또 아플 수도 있고, 재발할 수도 있고, 평생 약을 먹어야 할 수도 있고, 약 때문에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아이를 낳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면서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그때 남자친구가 펑펑 울면서 “지영아,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왜 아프다는 이유로 헤어져야 하냐”고 했습니다. “오빠가 생각하는 사랑은 뭐냐”고 물었더니, 남자친구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희생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감동받아, “그럼 오빠는 십자가”라고 했죠. 그렇게 우리는 계속 만났고, 결혼해서 21년 차 부부가 되었습니다.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랑 이야기네요.

더욱 놀라운 것은, 난소 제거 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두 분이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아이를 갖게 되셨나요? 결혼 후 11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시험관 시술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시험관 시술에 실패할 때마다 남편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아이를 낳아줄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결국 입양을 결심했지만, 입양 과정 또한 순탄치 않았습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입양 기관에서 거절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입양마저 거절당했을 때, ‘나는 엄마도 될 수 없는 건가’라는 생각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아들 의진이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두 살, 13개월이 지난 아들을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입양 기관에서 보내준 사진 속 의진이는 머리카락도 없는 아기 스님 같았습니다. 남편도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직접 만나보니 너무 예뻤습니다. 처음 만났는데도 낯선 기색 없이 환하게 웃으며 제 품에 안기는 의진이를 보고, 남편과 저는 “이 아이를 우리가 키우자”고 결심했습니다. 정성껏 입양 준비를 해서 두 번째 만남에 의진이를 데려왔고, 지금은 어엿한 가족으로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남편분께서 입양에 대해 처음부터 흔쾌히 동의하신 건 아니었군요. 남편은 입양에 마음을 열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연애할 때부터 입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신앙심이 깊어서 하나님께서 시험관 시술을 통해 친자를 주실 거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1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자, 기도 끝에 입양을 통해 가정을 이루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랑스러운 아들 의진이를 입양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셨는데, 의진이를 키우면서 또 다른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의진이를 만나면서 저와 남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의진이를 키우면서, 이전에는 부모가 아이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의진이에게서 받는 사랑이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인지 깨달았습니다. 의진이 생모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기쁨을 그 생모도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남편과 함께 미혼모를 지원하는 러브더월드 사역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러브더월드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안산에서 백일 된 딸을 키우는 미혼모에게서 온 연락이었습니다. 월세가 3-4개월 밀리고, 전기, 가스도 끊기고, 먹을 것도 없다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겨울 추위 속에 갓난아기와 굶주림에 지쳐있다는 이야기에 남편과 의진이와 함께 그 미혼모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문 여는 순간, 냉골에 깜짝 놀랐습니다. 집 안에 텐트를 쳐놓고, 그 안에서 아기와 함께 추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고요. 밀린 월세와 공과금을 내주고, 먹을 것을 전달해 주면서, 미혼모들을 위한 쉼터 사역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봉사활동으로 미혼모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쉼터, 함께 살아야 하는 사역을 시작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미혼모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정서적인 안정과 지지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미혼모 중에는 어린 엄마뿐만 아니라, 오히려 나이가 많아서 시설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시원에 머무는 임산부들도 있었습니다. 고시원에서는 출산할 수 없으니, 쉼터가 절실했습니다.

쉼터 사역을 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은,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주소지가 없어지거나,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가정폭력 피해로 집을 나와 주소 없이 떠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주민등록이 말소되면 시설 입소도 어렵고, 복지 혜택도 받을 수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에서는 아이를 낳아도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생신고를 못 하면 아이는 예방접종, 어린이집 등 기본적인 권리를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주민등록 말소 사실조차 모르는 미혼모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쉼터에서는 주민등록 말소된 미혼모들을 위해 벌금을 내고 주민등록을 살리는 것을 우선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주민등록을 살리기 위해서는 주소지가 필요했기에, 원룸을 계약해서 주소지를 마련해주기도 했습니다. 주민등록을 살려야 미혼모들이 출생신고를 하고, 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혼모들과 함께 쉼터 생활을 하면서, 사모님의 역할이 정말 막중했을 것 같습니다. 쉼터 생활은 공동생활이기 때문에, 다양한 어려움과 갈등이 있었을 텐데요, 역할 분담은 어떻게 하셨나요? 정말 다시 하라고 하면 자신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때는 눈앞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에 집중했습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기 돌보고, 산후조리 돕고, 퇴소하는 엄마들 방 구해주는 일까지, 정신없이 해냈습니다. 저도 엄마로서 아이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사모님의 헌신에 존경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말 친정엄마, 산후조리원, 보육교사,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감당하신 것 같습니다.

쉼터 사역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미혼모 가정들도 꾸준히 지원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쉼터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미혼모 가정에 기저귀, 분유, 생필품 등을 지원하고, 직접 찾아가 상담도 해주셨다고요. 전라도, 경상도, 전국 어디든 미혼모 가정이 있는 곳이라면 달려가셨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모님께서는 마치 수많은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신 것 같습니다.

쉼터에 위기 임산부나 미혼모들이 들어오면, 얼마나 오랫동안 쉼터에 머물 수 있나요? 쉼터 입소 기간은 엄마들의 상황에 따라 다양합니다. 짧게는 1-2주, 길게는 아기 돌까지 함께 지내기도 합니다. 정말 위급한 상황에 놓인 임산부, 출산을 코앞에 두고 갈 곳 없는 임산부도 쉼터를 찾습니다. 진통이 시작되거나 양수가 터져서 쉼터에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쉼터는 단순히 ‘방 많은 집’과 같았습니다. 방 4개짜리 집에서 저희 가족과 미혼모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많을 때는 18명까지 함께 살기도 했습니다.

쉼터에 다양한 사연을 가진 미혼모들이 머물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위기 임산부, 미혼모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도 쉼터를 찾은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혼모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남편이 쉼터로 찾아와 협박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만삭의 임산부를 폭행하는 남편 때문에 도망쳐 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남편 목사님께서 쉼터 사역을 하면서 불편한 점도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남편은 쉼터에서 3년 동안 한여름에도 반바지 차림으로 편히 지낸 적이 없습니다. 늘 조심스럽게 생활했고, 제가 쉼터에 없을 때는 집에 들어가지 않기도 했습니다. 미혼모들과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희 부부만 불편한 줄 알았는데, 어린 아들 의진이도 쉼터 생활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세 살, 네 살 된 의진이가 “엄마 아빠, 바람 쐬고 싶어요. 쉼터는 우리 집 아니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린 의진이도 쉼터가 진짜 집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 부부가 사역 때문에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역 자체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지만, 정작 우리 가정은 소외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정말 많은 고생을 하셨네요. 정말 훌륭하신 목사님이십니다.

두 자녀를 두셨다고 했는데, 둘째 딸은 어떻게 입양하게 되셨나요? 둘째 딸 여진이는 쉼터에서 일곱 번째로 태어난 아이입니다. 여진이 생모는 쉼터에서 함께 살았던 미혼모입니다. 생모는 아이를 낳고 직접 젖을 물리며 애정을 쏟았기에, 당연히 직접 키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났을 때, 생모가 조심스럽게 “목사님, 사모님, 제 딸 입양해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부탁했습니다. 생모는 보육원 출신으로, 자신처럼 힘들게 자라온 딸을 또 다시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의진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저희 부부를 보면서, 저희에게 딸을 맡기면 안전하게 잘 자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고민 끝에 여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하고, 백일까지는 생모가 키우고, 백일 이후부터는 저희가 키우게 되었습니다. 여진이 생모는 여전히 쉼터를 방문하며 여진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진이 이름도 생모가 출생신고를 하면서 저희에게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의진이와 이름 돌림자를 맞춰 ‘여진’이라고 지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저희에게 딸을 맡길 것을 미리 아셨던 걸까요?

첫째 아들 의진이의 반응은 어땠나요? 동생이 생기는 것에 대한 의진이의 생각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의진이는 여진이를 처음에는 낯설어했지만, 곧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의진이가 “여진이는 왜 이모 딸인데 우리 방에서 자고, 엄마는 왜 여진이한테도 엄마라고 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의진이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의진이도 엄마 배에서 나오지 않았어. 엄마가 아파서 아기를 낳을 수 없었지만, 의진이는 엄마 아들이고 엄마가 정말 많이 사랑해”라고. 의진이는 한동안 많이 울었지만, 곧 여진이를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잘 지내게 되었습니다. 세 살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선한 일을 하다 보면, 보람과 기쁨도 있지만, 지칠 때도 많을 것 같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정말 순수하고 착한 미혼모들도 많았지만, 때로는 저희를 속이거나 거짓말하는 미혼모들도 있었습니다. 미혼모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고, 후원금을 사기당한 적도 있습니다. 미혼모의 아이 아빠들이 찾아와 협박하거나 위협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정말 감당하기 힘든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해를 끼칠까 봐 가장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혼모들은 선량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전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역을 계속 이어오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번은 허리 디스크가 터져서 휠체어를 타게 되었을 때, 사역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서 ‘우리는 이 사역을 감당할 만한 사람들이 아닌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전에 쉼터에서 도움을 받았던 미혼모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미혼모들이 “사모님, 병원에 혼자 계시죠? 간병해 드릴게요. 식사는 잘 챙겨 드세요? 세수도 못 하시죠? 제가 가서 도와드릴게요”라고 연락해 온 것입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미혼모들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저희를 걱정하고 돕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미혼모들에게 오히려 위로와 힘을 얻고, 다시 사역을 이어갈 힘을 얻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내가 사랑이 부족해서 더 이상 못 하겠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2년 전 죽을 병에서 살려주신 은혜, 지금까지 살아있게 하신 은혜를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그 사랑으로 미혼모들을 섬기자고 다짐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다시 일어서서 지금까지 사역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정말 값없이 받은 사랑을 값없이 흘려보내는 ‘내리사랑’을 실천하고 계시네요.

사모님께서 짧게 말씀하셨지만, 지난 10년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역을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10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부족한 저를 하나님께서 성숙의 길로 이끄셨다는 고백밖에 할 수 없습니다. 저를 전적으로 받아주신 하나님 아버지처럼, 미혼모와 미혼부, 아이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사랑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어떤 사역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미혼모 사역은 후원과 기도가 절실히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방송을 시청하시는 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첫째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 아빠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시고, 격려와 지지를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미혼모, 미혼부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여전히 심각합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시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러브더월드 사역에 많은 관심과 기도,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러브더월드는 쉼터 사역은 종료했지만, 여전히 전국 2천 가구 이상의 미혼모 가정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분유, 기저귀뿐만 아니라, 학용품, 생필품 등 다양한 물품과 재정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특히 학령기 자녀를 키우는 미혼모 가정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더욱 필요합니다. 러브더월드 사역에 동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러브더월드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저희 부부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사역자들이 함께 헌신하고 있습니다. 특히 과거에 쉼터에서 도움을 받았던 미혼모들이 이제는 사역 간사로 함께 섬기고 있습니다. 사역자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지 않도록, 강건함을 위해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역 현장에서 물품 후원에 대한 어려움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후원 물품 중에 재활용 쓰레기 같은 물건들이 많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후원 물품 중에 정말 쓸 수 없는 물건들이 많아서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 필요한 물품은 새 물건인데, 헌 옷이나 낡은 물건, 심지어 쓰레기 같은 물건을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후원해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정말 필요한 물품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후원 물품을 보내실 때는 정말 필요한 물건인지, 깨끗하고 쓸 수 있는 물건인지 다시 한번 확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서지형 사모님과의 대화를 통해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어려움, 그리고 러브더월드 사역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사모님의 헌신과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러브더월드 사역을 통해 더 많은 미혼모 가정이 희망을 얻고 자립할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방송을 시청하시는 모든 분들께서도 미혼모 가정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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