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폭력과 상처, 김진혁 목사 성장과 용서의 간증
아버지의 폭력, 상처를 넘어 목사가 되기까지
[수어통역] 관리집사였던 아버지, 그 아버지로 인해 받은 상처를 극복하기까지...ㅣ김진혁 목사ㅣ새롭게하소서
(유튜브 썸네일 삽입)
이번 글에서는 김진혁 목사님의 간증을 상세히 정리하여, 아버지와의 상처를 극복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감동적인 이야기를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김 목사님은 새롭게하소서 채널에 출연하여, 관리집사였던 아버지로 인해 받은 상처와 그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하기까지의 과정을 진솔하게 털어놓으셨는데요.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적인 고백을 넘어, 깊은 상처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받을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갈등,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며,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아버지, '너 아버지 뭐 하시노?'
김 목사님은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라는 책 제목에 얽힌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신학교 기숙사 시절, 최병락 목사님과의 대화 중 "너 아버지 뭐 하시노?"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버지에 대한 상처 때문에 쉽게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주변의 동료들이 자신의 아픔을 먼저 이야기하며 용기를 주었고, 그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비로소 꺼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경험은 김 목사님에게 큰 위로와 공감을 주었으며, 감추고 싶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김 목사님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요?
김 목사님의 아버지는 교회 관리 집사로,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 한국 교회가 성장하던 시기에 큰 교회에서 오랫동안 궂은 일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교회가 집과 같았던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관리 집사 아들로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교회 청소는 가장 힘들고 귀찮은 일 중 하나였는데요. 교회 행사가 있는 날이면 늦은 밤까지 청소를 해야 했고, 군대 휴가를 나와서도, 결혼 후 신혼여행을 마치고 와서도 교회 청소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일상은 어린 김 목사님에게 교회에 대한 반감과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키우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직책 때문에 겪어야 했던 멸시와 천대는 어린 아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당시 교회 어른들은 관리 집사인 아버지를 하대하며 종처럼 여겼고,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장로님은 자신의 차를 맡기며 "차 잘 보고 있으라"는 명령조의 말을 서슴없이 했고, 심지어 담임 목사님조차도 아버지에게 함부로 대하며 지팡이로 때리거나 '기사'라고 칭하는 등 무시하는 언행을 일삼았습니다. 이러한 부당한 대우를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어린 김 목사님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함께 교회에 대한 깊은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경험들이 김 목사님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는 김 목사님을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기도나 찬양, 예배는 그에게 아무런 은혜를 주지 못했고, 예배 시간은 그저 졸음과 지루함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습니다. 교회는 그에게 আনন্দ와 기쁨의 공간이 아닌, 억압과 고통의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역시 교회에서 겪는 어려움과 상처를 자녀들에게 제대로 표현하거나 위로하지 못했고, 오히려 폭력적인 모습으로 표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는 어떠했을까요?
아버지의 폭력, 멈출 수 없었던 분노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의 폭력적인 성향 뒤에는 월남전 참전 후 겪었던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트라우마는 아버지의 정신 건강을 갉아먹었고, 때때로 통제 불능의 분노와 폭력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김 목사님은 아버지로부터 잦은 폭력에 노출되어야 했습니다. 단순한 체벌을 넘어, 아령과 같은 위험한 물건으로 폭행을 당하는 일도 있었고, 심지어 어머니가 폭행당하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폭력적인 환경은 어린 김 목사님에게 깊은 트라우마와 아버지에 대한 깊은 원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폭력의 기억들은 그의 어린 시절을 고통으로 물들였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은 예측 불가능했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별안간 아버지의 눈빛이 변하며 폭력적인 모습으로 돌변하는 것은 어린 김 목사님에게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며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은 가정 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어린 김 목사님은 그 폭력의 그림자 속에서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폭력에 맞서보려 했지만, 아버지의 완강함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마음속 깊이 쌓여갔고, 언젠가 터져 나올 듯 억눌려 있었습니다. 이렇게 억압된 감정은 과연 학교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억눌린 분노는 학교에서 반항적인 모습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걷는 폐품 수집과 우유 급식 비용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가난했던 가정 형편에 1200원이라는 돈은 큰 부담이었고, 폐품을 가져오지 못하면 돈을 내라는 학교 방침에 불합리함을 느꼈습니다. 결국, 친구와 함께 학교의 부당함을 알리는 익명의 대자보를 만들어 붙였지만, 학교의 권위에 도전한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학생 주임에게 불려가 폭력적인 체벌을 당했고, 선생님들의 차별과 멸시 또한 감수해야 했습니다. 집에서 받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학교에서 또 다른 상처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선생님에게 촌지를 건넨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학교와 선생님에 대한 실망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학교생활에 대한 흥미를 잃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학교는 더 이상 그에게 배움의 공간이 아닌, 억압과 불평등, 그리고 상처만이 가득한 공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김 목사님은 방황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학교를 자퇴하고 전주로 내려가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리며 거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3만원짜리 연탄 창고를 개조한 자취방에서 생활하며,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삥'을 뜯거나, 고속버스 털이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매일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았고, 폭력과 범죄가 일상인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그 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들과 밤거리를 배회하며 불안한 미래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 방황의 끝은 어디였을까요?
방황은 예기치 못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막을 내립니다. 함께 거리 생활을 하던 가장 친했던 친구가 새벽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김 목사님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자신의 방황하는 삶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삶의 끝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방황하다가는 자신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결국, 김 목사님은 방황을 멈추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친구의 죽음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신학대학교, 새로운 길을 찾아서
고등학교에 다시 입학했지만, 학교생활은 여전히 순탄치 않았습니다. 1년 늦게 입학한 탓에 동급생들과 나이 차이가 났고, 전주에서의 방황했던 생활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잦은 싸움과 학교 폭력 사건에 휘말렸고, 학교는 여전히 그에게 낯설고 불편한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학교를 포기하지 않고 억지로 버텨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신학대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거리에서 방황하던 불량 청소년들을 선도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품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과연 신학교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처음부터 신앙심이 깊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불량 청소년들을 변화시키겠다는 의욕은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변화되지 않은 채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신학교 선배들과 함께 불량 청소년들을 위한 캠프를 열었지만, 프로그램과 노력만으로는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캠프에서 폼만 잡는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최병락 목사님을 비롯한 선배 목사님들의 권유로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을 읽게 됩니다. 이 책은 그의 신앙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그의 닫힌 마음을 열고, 진정한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통해 김 목사님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변화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인간은 변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변화는 프로그램이나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인도하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김 목사님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주었고, 말씀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은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말씀에 대한 열정이 생기면서 예배가 기뻐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졌던 예배가 이제는 আনন্দ와 기쁨,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해 그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경험하고,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예배 시간은 그에게 힐링과 회복의 시간이 되었고, 말씀을 통해 얻는 깨달음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예배를 통해 그는 아버지로부터, 교회로부터 받았던 상처들을 치유받고, 새로운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그의 신앙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목회자의 꿈을 키워나가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의 화해, 그리고 용서
하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였습니다. 신앙적으로 변화되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상처와 원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쓰러지시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간 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김 목사님과 형님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간 이식 수술을 결심합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어머니는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놀랍게도, 과거 김 목사님이 상처를 받았던 교회들이 어머니의 수술비를 위해 헌금을 보내주는 등 도움을 주었습니다. 교회의 따뜻한 손길은 김 목사님에게 큰 감동과 위로를 주었고,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조금씩 녹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변화는 아버지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어머니의 간 이식 수술을 계기로 아버지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수술 후, 아버지는 그동안 자녀들에게 간 이식을 부탁하지 못했던 미안함과, 폭력적으로 대했던 과거에 대한 후회를 털어놓으셨습니다. 자녀들에게 짐이 될까 봐,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 차마 간 이식을 부탁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진심 어린 후회와 자책은 김 목사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아버지에 대한 묵은 감정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수술을 위해 교회가 보여준 따뜻한 마음은 아버지와 교회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랜 시간 묵묵히 교회를 섬겨온 아버지의 헌신이 비로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질병은 역설적으로 가족 관계를 회복시키고, 아버지와의 화해를 이끌어내는 뜻밖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2014년, 동생이 이집트 성지 순례 중 테러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가족 모두에게 큰 슬픔과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큰 슬픔에 잠겨 "왜 그렇게 때리고 못살게 굴었을까" 후회하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동생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는 과거 자신의 폭력적인 행동을 깊이 뉘우치고, 자녀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아버지의 슬픔과 후회는 김 목사님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앙금을 녹여내렸습니다. 동생의 죽음은 슬픔과 고통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시키고,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생의 장례 후, 아버지는 다시 교회 관리 집사로 돌아가겠다는 뜻밖의 결정을 하십니다. 동생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아버지는 오히려 더욱 굳건한 믿음과 사명감을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를 떠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다시 관리 집사로 헌신하겠다는 아버지의 모습은 김 목사님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굳건한 믿음과 헌신적인 모습은 김 목사님에게 큰 귀감이 되었고, 목회자의 길을 걷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결정은 김 목사님에게 진정한 사명감과 소명 의식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목회자의 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헌신적인 모습은 김 목사님이 목회자의 길을 걷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버지의 삶을 통해 진정한 사명감과 소명 의식을 깨달은 김 목사님은 목회에 더욱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도전과 영감을 바탕으로 '아산 뿌리교회'를 개척하고 목회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교회 이름 '뿌리교회'는 '야곱의 뿌리'에서 영감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개척 초기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고 헌신적인 목회를 통해 교회를 성장시켜나가고 있습니다. 특히, 상가 지역에서 붕어빵을 구워 나누며 주민들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독특한 전도 방식으로 지역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 목사님은 앞으로 어떤 목회자로 기억되고 싶을까요?
김 목사님은 성도들과 함께 성장하는 목회자, 하나님께 칭찬받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습니다. 자신 역시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임을 인정하며, 성도들과 함께 말씀을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완벽하고 권위적인 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공감하고 함께 짊어지는 동반자로서의 목회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김 목사님의 이야기는 아버지와의 상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성장해가는 한 인간의 감동적인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의 이야기는 상처 입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달하며, 진정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진혁 목사님은 아산 뿌리교회를 소개하며 마무리 인사를 전했습니다. 아산 뿌리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상처와 아픔을 딛고 일어선 김 목사님의 이야기는 아산 뿌리교회를 통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해줄 것입니다. 오늘 김진혁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으셨기를 바랍니다. 긴 시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