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빚에서 와플대학 성공, 손정희 장로 인생 역전 감동 간증
벼랑 끝 10억 빚, 와플대학으로 인생 역전! 손정희 장로 간증
하나님이 손대는 순간, 놀라운 일이! 와플대학 대표 손정희 장로의 파란만장 인생 역전 스토리
오늘 우리는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파란만장한 인생 역전을 이룬 손정희 장로님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를 깊이 묵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손정희 장로님은 현재 전국 400개 지점을 자랑하는 와플대학 프랜차이즈의 대표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사업 성공과 신앙 간증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계신데요, 과연 그녀의 삶 속에는 어떤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요? 지금부터 손정희 장로님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손정희 장로님은 과거 아동복 사업으로 17년간 승승장구하며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20대에 시작한 아동복 사업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들을 위한 예쁜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했는데요, 놀랍게도 사업은 상상 이상으로 번창하여, 남의 처마 밑에서 시작했던 작은 가게는 번듯한 매장으로 확장되었고, 급기야 직원까지 둘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고 합니다. 당시 손 장로님은 “어제보다 못한 오늘이 없었다”고 회상할 만큼, 매일매일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며 사업가의 꿈을 활짝 펼쳤습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아동복 사업은 해외 생산에 뛰어들면서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나게 됩니다. 사업 확장을 위해 중국에 공장을 설립했지만, 현지 관리 부실과 중간 업체의 사기 행각으로 인해 순식간에 10억 원이라는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것인데요, 이는 당시 감당하기 힘든 거액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업 실패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채권자들의 빗발치는 독촉, 심지어 주변의 오해와 비난까지 겹쳐, 손 장로님은 벼랑 끝에 내몰리는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그녀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억울함에 “배를 칼로 그어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고 당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 고통 속에서 남편마저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다는 점입니다. 남편은 충격으로 술에 의존하다 계단에서 굴러 어깨를 크게 다쳤고, 설상가상으로 수술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요, 설상가상으로 의사는 수술 후에도 완벽한 회복이 어려울 수 있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 장로님 가족은 살던 집을 팔아 빚을 갚고, 서울 변두리 상계동의 싼 아파트로 이사하는 등, 힘겨운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손 장로님은 두 딸을 생각하며 삶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특히 어린 딸들이 엄마 없이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차마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녀는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딸들이 20살이 될 때까지만 “억지로라도 살아가리라” 다짐하며, 힘든 시간을 견뎌냈다고 합니다. 물론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채권자들의 소송에 휘말려 법원과 경찰서를 제 집 드나들 듯 했고, 돈을 받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는 고된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상황 속에서, 손 장로님 가족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바로 큰 딸의 학교 문제였는데요, 엄마의 사업 실패와 가정 형편의 어려움을 알게 된 큰 딸은 “좋은 고등학교는 왜 다니는 거냐”며 자퇴를 선언했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퇴를 감행했습니다. 당시 딸은 “검정고시로 좋은 대학에 진학하겠다”며 오히려 엄마를 위로했지만, 딸의 갑작스러운 자퇴는 손 장로님에게 큰 상처와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명문 예술고등학교를 자퇴한 딸을 보며, 손 장로님은 깊은 자책감과 죄책감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절망의 순간에도 한 줄기 희망은 있었습니다. 바로 딸의 신앙생활이었는데요,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딸은, 힘든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나갔고, 새벽기도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느 날 새벽, 좁은 베란다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딸의 모습을 본 손 장로님은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교회가 너무 멀어 차비가 부담된다”며 집에서 기도한다는 딸의 말에, 손 장로님은 “차라리 교회 옆으로 이사 가자”고 결심했고, 가족은 교회 근처 단칸셋방으로 이사를 감행합니다.
교회 옆 셋방살이는 쉽지 않았지만, 손 장로님은 그곳에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매일 새벽 딸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면서,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된 것인데요, 특히 매주 13번이나 드리는 예배와 봉사활동을 통해,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깊은 영적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신앙생활이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되었고, 때로는 인간적인 서운함과 갈등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손 장로님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교회 봉사에 헌신했습니다. 새벽 예배 반주, 주방 설거지, 화장실 청소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봉사하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소중한 관계들을 맺고, 신앙적으로 더욱 성숙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특히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겪었던 작은 갈등을 통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고, 이후 어떤 어려움과 억울한 일을 겪더라도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 아시죠?”라고 기도하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헌신적인 봉사를 인정받아, 손 장로님은 놀랍게도 교회 집사 직분을 받게 됩니다. 당시 교회 목사님은 손 장로님의 헌신과 성품을 높이 평가하며, “교회 화장실에 바알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먹을 수 있다”는 재치있는 비유를 통해, 집사 임명을 주저하는 교인들을 설득했다고 하는데요, 손 장로님은 화장실 청소 봉사를 통해, 세상적으로는 낮고 천한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과 헌신을 귀하게 보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집사 임명 후 손 장로님은 다니던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교회 내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다른 교회를 찾아 떠나게 된 것인데요, 물론 1천 번의 감사 헌금을 완주하고 교회를 떠났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녀는 1천만 원 헌금을 서원하고 매일 새벽 예배마다 만 원씩 헌금을 드렸고, 힘든 형편에도 불구하고 1천 번의 헌금을 꿋꿋이 완수했습니다. 1천 번 헌금은 그녀에게 단순한 물질적 헌금을 넘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믿음의 행위였으며,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으려는 간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교회를 떠난 후, 손 장로님은 다시 생계를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대단지 아파트 5일장 노점상으로 쌀국수, 떡볶이 등을 팔았지만, 여전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는데요, 그러던 중 우연히 길거리에서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초기 붕어빵 장사는 쉽지 않았습니다. 맛도 엉망이었고, 자리도 좋지 않아 손님들의 발길이 뜸했는데요, 설상가상으로 손 장로님은 팥을 싫어하는 심각한 편식쟁이였다고 합니다! 팥 붕어빵 장사를 하면서 정작 자신은 팥을 먹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역경 속에서도 아이디어는 샘솟는 법일까요? 손 장로님은 팥 대신, 도시락으로 싸갔던 차가운 고구마를 붕어빵 속에 넣어 구워 먹기 시작했고, 우연히 맛본 학생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팥을 싫어하는 개인적인 취향이 오히려 ‘고구마 붕어빵’이라는 획기적인 메뉴 탄생으로 이어진 것인데요, 이후 손 장로님은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빌려 ‘치즈칠리 붕어빵’ 등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며 붕어빵 노점상으로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특히 손 장로님의 붕어빵 이야기는 언론에 보도되면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스포츠 신문, 일간지, 방송 뉴스에 잇따라 소개되면서, 그녀의 붕어빵 노점은 순식간에 ‘명물’로 떠올랐고, 2대 명물 붕어빵으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붕어빵은 겨울 장사였기에, 따뜻한 봄바람이 불면서 자연스럽게 붕어빵 장사를 접어야 했는데요, 붕어빵 장사 성공은 손 장로님에게 경제적 자립의 발판을 마련해주었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노점상 생활은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여름 장사를 고민하던 손 장로님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학생들이 와플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와플 장사를 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와플 역시 붕어빵처럼 초기에는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메뉴 개발에 몰두한 결과, 12가지 다양한 크림 와플을 개발하는 데 성공합니다. 특히 12가지 크림 와플은 젊은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손 장로님의 와플 노점은 다시 한번 ‘대박’을 터뜨리게 됩니다.
손 장로님의 와플은 단순히 맛있는 길거리 간식을 넘어, 하나의 ‘브랜드’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12가지 크림 와플을 개발한 후, 와플 믹스 한 포대만 팔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놀랍게도 그날 와플 믹스 한 포대를 모두 판매하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와플 판매를 통해 월 500만 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게 되면서, 손 장로님은 경제적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고, 어엿한 사업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이후 손 장로님은 와플 노점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어 ‘와플대학’을 설립합니다. 와플대학은 대학가 주변을 중심으로 캠퍼스 매장을 확장해나갔고, 젊은층의 입맛을 사로잡는 다양한 메뉴와 트렌디한 분위기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특히 ‘캠퍼스’, ‘등교’, ‘폐교’ 등 대학 কন셉트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은 젊은 고객들에게 신선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하며, 와플대학만의 독특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놀랍게도 와플대학은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성장해왔습니다. 손 장로님은 “100가지가 완벽해야 성공하는 것이 사업인데, 단 한 가지만 삐끗해도 망하는 것이 사업”이라며, “와플대학이 16년 동안 망하지 않고 성장해온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사업 운영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과 위기가 있었지만, 매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손 장로님은 와플대학 CEO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겸손하고 신앙적인 삶의 태도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는 “와플대학 대표는 마지막 직업이 아니라, 장로 직분이 마지막 직업”이라며, “장로로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더욱 헌신하고 싶다”는 비전을 밝혔습니다. 특히 “만 명이 모이는 교회보다, 100명이 모이는 100개의 교회를 세우고 싶다”는 목사님의 비전에 공감하며, 와플대학 프랜차이즈 사업 노하우를 교회 프랜차이즈에 접목하는 ‘교회 캠퍼스’ 설립을 꿈꾸고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손 장로님은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격려를 전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며, 손 내밀면 반드시 잡아주신다”며, “주변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간절히 기도하며 도움을 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특히 와플대학의 ‘손에 손잡고’ 프로젝트를 언급하며, “살아보려고 손 내미는 사람에게, 우리가 먼저 손 내밀어 주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가자”고 강조했습니다.
손정희 장로님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 스토리를 넘어,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통해,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건히 지키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간다면, 반드시 놀라운 역전의 드라마를 써내려갈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손정희 장로님의 간증이, 삶의 무게에 지쳐 힘겨워하는 많은 분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위한 용기를 북돋아주는 귀한 선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