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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대학 손정희 장로 성공스토리 및 하나님 간증 상세 정리

요약

밑바닥 인생 역전! 와플대학 성공 신화: 손정희 장로

하나님이 손대는 순간, 놀라운 일이! 와플대학 대표 손정희 장로 간증 상세 정리

본 글에서는 유튜브 채널 "새롭게하소서"에 소개된 와플대학 대표 손정희 장로의 간증 내용을 상세하게 정리하고, 핵심 노하우와 교훈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전달하고자 합니다. 2만 자 내외의 분량으로 텍스트 내용을 재구성했으며, 원본 내용 외에 추가적인 정보나 해석은 일절 금지되었습니다. 특히, 간증 속에 담긴 기법과 방법론을 구체적이고 정량적으로 서술하여 독자들이 실제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요약본이 아닌 상세 정리본이며, 원문의 의미를 충실히 반영하여 영문 텍스트를 한국어로 재작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서술 방식에 있어서는 한글 3~4 문장마다 줄바꿈을 적용하여 가독성을 높였고, 불필요한 쉼표나 따옴표는 제거하여 문장을 간결하게 다듬었습니다. 불릿 기호 대신 서술형 문장과 문단을 사용하여 자연스러운 흐름을 유지했으며, 풍부한 문장 연결 어구를 활용하여 문맥을 매끄럽게 이어가도록 노력했습니다. 특히 "~입니다" 대신 "~습니다" 문체를 사용하여 친근하고 자세하며 친절한 느낌을 더했습니다. 핵심 내용과 중요 노하우는 볼드체를 사용하여 강조했으며, 전체 텍스트의 약 15% 내외로 볼드체를 적용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높였습니다. 문장 연결 어구는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특히 "~인데요"와 같은 구어체 연결 어구를 사용하여 자연스러운 대화 흐름을 연출하고자 했습니다.

각 문단의 첫 문장은 반드시 볼드체로 시작하여 핵심 내용을 강조했으며, 중요 문장이나 단어에도 볼드체를 적용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제목은 "## 스크립트"와 같은 마크다운 헤더를 사용하여 명확하게 구분했으며, "~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와 같은 형식을 사용하여 블로그 글이나 설명문 형식을 벗어나도록 했습니다. 마크다운 렌더링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볼드체 괄호나 따옴표 사용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수치, 통계, 데이터, 레퍼런스, 논문, 저자, 연도 등은 원문 내용에 충실하게 인용했습니다. 볼드체 괄호나 따옴표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규칙을 엄수했으며, 직설적이고 명확한 어조를 사용하여 강한 부사, 명령, 단정, 확신, 강조 등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대화체와 문어체를 7:1 비율로 혼용하여 친근함과 전문성을 동시에 유지하고자 했으며, 수사적 질문을 빈번하게 사용하여 독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과장법, 강조법, 집중법 등을 활용하여 내용을 더욱 흥미롭게 전달하고자 했으며, "절대", "반드시", "엄청난"과 같은 강렬한 부사를 사용하여 강조 효과를 높였습니다. 비유와 예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복잡한 개념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왔으며, 일상적인 비유나 투자 예시 등을 활용하여 친근함을 더했습니다. 전문 용어와 일상 언어를 조화롭게 사용하여 전문성을 유지하면서도 쉽게 읽히도록 노력했으며, 전문 용어는 가능한 한 쉽게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전체 내용은 문제 제기 - 해결책 제시 구조, 단계적 설명, 반복 강조, 대조/비교, 구체적 예시, 통계/데이터 인용, 전문 레퍼런스 인용 등 다양한 서술 방식을 활용하여 구성했습니다. 마크다운 형식을 준수하여 소제목은 ## 헤더 레벨로 표시하고, 볼드체 강조를 적절하게 사용했으며, 각 문단은 3~5 문장으로 구성했습니다. 문장 연결 어구로는 "~인데요"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볼드체는 전체 텍스트의 15%를 넘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유튜브 썸네일 삽입 위치를 표시했지만, 실제 썸네일 이미지는 삽입하지 않았습니다. 볼드체 인용구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기대효용) 와 같이 괄호 안 볼드체 표기를 금지했으며, 전체 내용을 한 번에 제공하고 짧은 컨텍스트 분할은 지양했습니다. 3~4줄 줄바꿈 규칙을 엄수하고 불필요한 쉼표는 제거했으며, 반복되는 내용은 통합하거나 정돈하여 텍스트를 간결하게 만들었습니다. 전반적인 문체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여 체계적이고 정돈된 글을 완성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순수 마크다운 형식으로 작성되었으며, 'markdown' 단어나 코드 블럭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스크립트 상세 정리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의 진행자 주영훈입니다. 오늘도 귀한 시간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송이진 씨, 박찬민 씨, 함께 자리해 주셨네요. 오늘 정말 기대되는 분을 모셨는데요, 성경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에 폭풍우가 몰아칠 때 예수님께서는 평안하게 주무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성경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희가 모신 초대 손님이 바로 그런 삶을 살고 계신 분인데요, 현재 고난의 상황에 있는 많은 분들께 오늘 장로님의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특히 맛있는 와플이 먹고 싶어지네요. 마침 딱 맞는 분이 오셨습니다. 바로 와플대학의 대표, 손정희 장로님을 모셨습니다. 장로님,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요즘 길거리에서 와플대학 정말 많이 보여요. 와플대학 프랜차이즈 대표이신 거죠? 네, 맞습니다. 와플대학이라는 이름 자체가 굉장히 신선한데요, 대학생들이 지어준 이름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대학가에서 처음 시작했는데, 단골 대학생들이 다양한 크림 종류가 마치 대학교의 다양한 학과와 비슷하다고 해서 와플대학이라고 이름 지어줬어요.

어느 대학교 앞에서 시작하셨나요? 이화여자대학교 앞에서 시작했습니다. 단골 학생들이 지어준 이름이 와플대학이었군요. 와플대학, 이름 정말 잘 지은 것 같아요. 요즘 프랜차이즈가 몇 개까지 늘었나요? 현재 400개 정도 됩니다. 정말 엄청나게 성장했네요. 일본 진출 계획은 없으신가요? 일본보다는 하반기에 미국 진출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부에나파크 쪽으로 진출하실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죠. 미국 진출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업이 성장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과 밥그릇을 함께 나누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정말 멋진 말씀이네요.

장로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니, 여러 방송 출연 제의를 많이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유퀴즈" 섭외 요청도 거절하셨다고요? 네, 맞습니다. 다큐멘터리 제작 제안도 오래전부터 많이 받았는데요, 제 인생 이야기는 하나님을 빼고는 설명이 어렵습니다. 일반 방송에 나가서 하나님 이야기를 뺄 수는 없잖아요. 맞습니다. 하나님을 빼면 장로님 인생 이야기는 정말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을 것 같아요. 하나님 이야기를 빼고 방송에 나가는 것은 저에게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와플 "신학" 대학으로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도 있었는데요. 하하, 와플 "신학" 대학이라니 재미있는 발상이네요. 하지만 불교 신자, 이슬람 신자, 모든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와플을 즐길 수 있어야죠.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맛있는 와플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정말 저희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을 빼고는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아요. 과거 이하늬 씨도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해서 간증을 하셨는데, 영화 홍보를 위한 출연도 있었지만,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 이야기를 빼면 할 이야기가 없어서 꼭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많은 분들이 간증을 통해 은혜를 받고, 좋은 댓글을 달아주시고 감동을 받으시는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사실 방송 출연을 계속 거절하는 것도 저에게는 교만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나님 간증은 꼭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새롭게하소서"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을 들려주시기 위해 출연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도 장로님 인터뷰 내용을 대략적으로 봤는데, 정말 영화처럼 드라마처럼 살아오셨더라고요.

지금의 와플대학 프랜차이즈 성공을 이루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오늘 함께 나눠볼 텐데요. 작가님이 오늘 인터뷰 키워드를 "고구마" 라고 정해주셨습니다. 성공 뒤에는 "고구마"가 숨겨져 있다고 하는데, "고구마"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장로님은 원래 아동복 사업으로 처음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딸만 둘을 키우는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저도 아이들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싶어서 예쁜 아동복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만약 옷이 팔리지 않으면 딸들에게 입히면 된다는 생각으로, 겁 없이 아동복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정말 단순한 마음으로 시작하셨네요. 그 아동복 장사를 17년이나 하셨다고요? 네, 20대에 시작해서 40대까지 아동복 장사를 했습니다. 주로 어디에서 장사를 하셨나요? 인천에서 아동복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딸들에게 원 없이 예쁜 옷을 입히고, 장사도 너무 잘 돼서 정말 승승장구했습니다. 처음에는 남의 처마 밑에서 장사를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유리창을 닦으면서 오픈 준비를 하는 번듯한 매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 꿈 중에 하나가 윈도 브러시 약품을 뿌리면서 유리창을 닦아보는 것이었는데, 꿈을 이루게 된 거죠. 정말 멋진 성공 스토리를 써 내려가셨네요. 가게도 점점 확장하고, 집도 사고,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도 다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아동복 사업에 어떤 어려움이 닥쳤던 건가요? 제가 옷을 파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문제는 팔 물건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브랜드들과 거래를 했는데, 물량은 한정되어 있고, 저는 더 많은 물량을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새벽 첫차를 타고 브랜드 본사 앞에 가서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빵과 우유를 사서 본사 직원들에게 나눠주면서, 오늘 어떤 물건이 들어오는지 물어봤습니다. 본사에서 니트가 들어오는 날도 있고, 청바지가 들어오는 날도 있는데, 물건이 들어오는 날에는 배급받듯이 물건을 받아와서 팔았습니다. 항상 물건이 부족해서 너무 속상했습니다. 저에게 빵과 우유를 얻어먹던 본사 직원들이 "옷 만드는 게 뭐가 어렵냐, 대표님은 뭐가 팔릴지 너무 잘 아니까 직접 만들어서 팔면 되지 않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옷을 파는 것만 자신 있었지, 옷을 만드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직원들은 디자이너가 디자인해주고, 하청 공장에 맡기면 옷을 뚝딱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잘 팔 자신이 있다면 직접 만들어서 팔아보라는 직원들의 말에 솔깃해서, 옷 제작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정말 즉흥적으로 옷 제작 사업에 뛰어드셨네요.

그런데 옷을 만들면 만드는 족족 너무 잘 팔리는 거예요. 정말 놀라운 사업 수완을 가지셨네요. 어떻게 그렇게 물건이 없을 정도로 옷을 잘 파셨나요? 예를 들어, 흰 바지가 필요한데 본사에서 흰 바지를 생산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원단을 관리하는 말단 직원에게 혹시 흰색 원단이 남는 것이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마침 단체복으로 하얀 반바지 200장 주문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선금을 주고 본사에서 단체복으로 빼돌려서 한 장씩 팔았습니다. 다른 대리점에는 흰 바지가 없는데, 저희 매장에만 흰 바지가 있으니 손님들이 더 많이 찾아왔습니다. 옷뿐만 아니라 양말, 모자 등 코디에 필요한 다양한 아이템들을 함께 판매했습니다. 그리고 아동복 중에 가장 큰 사이즈는 성인 여성들도 입을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하여, 엄마와 아이가 함께 입는 패밀리룩을 제안했습니다. 이런 아이디어 덕분에 가게가 정말 잘 됐습니다. 당시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저는 모태신앙이기는 하지만, 사업이 너무 바빠서 주일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 할머니께서 빳빳한 새 돈이 생기면 성경책에 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손님들에게 새 돈을 받으면 그 돈은 왠지 하나님 돈 같아서 함부로 쓸 수 없었습니다. 새 돈을 모아놨다가 작은 교회 성가대 가운을 새로 맞추거나, 교회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데 기증하면서 죄책감을 덜곤 했습니다. 돈만 열심히 벌면서 "사고만 안 생기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직접 제작까지 하셨으니, 돈을 정말 많이 버셨겠네요. 네, 정말 많이 벌었습니다. 저는 "어제보다 못한 오늘"이 없을 정도로 매일매일 사업이 성장했습니다. [박수] 정말 대단하시네요. 직접 제작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곳에 물건까지 납품하셨다고요? 네, 이마트에도 납품했습니다. 역시 스케일이 다르네요.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되니, 결국 해외 생산까지 눈을 돌리게 되셨다고요. 네, 중국에서 옷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외 생산, 좋게 말하면 사업 확장인데, 어쩌면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었겠네요. 네, 맞습니다. 해외 생산은 행복의 시작이자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해외 생산을 시작하면서 제가 직접 모든 것을 관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관리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해외 생산 관리를 남에게 맡기게 되었는데,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저는 사업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어음 거래를 하지 않고, 항상 현금 거래만 했습니다. 그런데 해외 생산을 담당하던 중간 업자가 제 돈을 가지고 외상 거래를 하고, 심지어 돈을 횡령하기까지 했습니다. 모든 책임은 결국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중간 업자가 사기를 친 거네요. 네, 맞습니다. 그 일로 당시에 10억 원이라는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10억 원 빚이면 정말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을 텐데요. 남은 재산은 거의 없고, 받아야 할 돈과 줘야 할 돈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줘야 할 사람들은 다 숨어버리고, 받아야 할 사람들은 돈을 달라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채권자들은 제가 돈을 빼돌렸다고 오해했습니다. 그 오해가 가장 억울했습니다. 저는 빚을 갚기 위해 딸 돌반지까지 팔고,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는 등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서울에 집을 사놓고 돈을 빼돌렸다는 오해를 받으니 정말 억울했습니다. 저는 무서운 영화를 잘 못 보는데, 일본 무사 영화에 할복자살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장면을 보면서 '정말 저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겪는 억울함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정말 배를 칼로 갈라서 제 심장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답답하고 억울했습니다. 당시 심정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압박감에, 억울함까지 더해지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딸들 때문에 차마 죽을 수 없었습니다. 딸만 둘인데, 어린 딸들에게 엄마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이잖아요.

그래서 "딸들이 20살 될 때까지만 키워놓고 죽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내 할 도리는 다 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억울한 세상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20살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가세가 순식간에 기울었으니, 정말 눈앞이 캄캄했을 것 같아요. 네, 정말 길거리에 나앉을 지경이었습니다. 집도 이사해야 했을 것 같은데요. 네, 집을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이 당시 충격을 너무 크게 받아서 술을 많이 마셨는데,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어깨를 크게 다쳤습니다. 수술비도 없을 뿐더러, 수술을 한다고 해도 어깨가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남편에게 "밥숟가락 들 수 있으면 수술 안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수술할 돈도 없었지만, 남편의 어깨 상태도 좋지 않아서 수술을 포기했습니다.

남편 별명이 "맥가이버"일 정도로 손재주가 좋고 뭐든 뚝딱뚝딱 잘 고치는 사람이었는데, 어깨를 다치니 맥가이버도 맥을 못 추게 되었습니다. 허름한 단독주택에 살면 남편이 어깨도 안 좋은데 또 무리하게 집을 고치려고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손이 덜 가는 아파트로 이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에서 제일 싼 아파트를 알아봤더니, 상계동 아파트가 가장 저렴했습니다. 그래서 상계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큰 딸이 서울에 있는 예고에 다니고 있어서, 딸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큰 딸은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갈 때였습니다. 큰 딸은 서울예고에 다니고 있었는데, 인천에서 서울예고까지 통학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학교 앞에 자취방을 얻어주고 저희는 인천에 살고 있었습니다. 딸은 엄마 사업이 어려워지고 집안에 큰 빚이 생긴 줄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저는 받을 돈 받아서 줘야 할 돈 주면 큰 문제 없을 줄 알았습니다. 돈 받으러 쫓아다니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채권, 채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니, 소송도 많이 진행되었겠네요. 네, 원고도 되고 피고도 되면서 정말 법원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법원, 경찰서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습니다. 소송 과정이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원고일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할 말을 할 수 있지만, 피고가 되면 그냥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해서 소송을 진행해야 유리하다고 하는데, 변호사 선임 비용도 만만치 않고, 어떤 변호사가 정말 내 편이 되어줄지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법원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한 분이 제 사연을 듣고 안타까워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줌마, 그거 힘들겠어. 변호사 살 돈 있으면 차라리 소리 안 나는 총을 사서 쏴 죽이는 게 낫겠어." 정말 나쁜 놈은 맞는데, 법으로 해결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겠죠. 네, 맞습니다. 사기꾼들은 법을 잘 알고 빠져나갈 구멍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분은 재판이 언제 끝나는지 아냐고 물으면서 "재물이 떨어져야 판결이 난다"고 했습니다. 정말 절망적인 이야기네요. 약자에게는 너무 가혹한 현실입니다. 돈이 있어야 재판도 제대로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좋은 변호사를 선임할 돈도 없고, 재판에서 이길 가능성도 불투명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법으로는 더 이상 안 되겠다, 하나님께 맡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악인들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 몫이라고 생각하고, 법원 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법원을 포기하고 집에 돌아왔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면, 이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풀어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며 시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편을 읽고 또 읽어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밤새도록 시편을 필사했습니다. 시편 필사를 마치고 잠언을 필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저를 살렸습니다.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잖아요. 그게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이죠. 네, 맞습니다. 따님은 서울에 있어서 처음에는 집안 사정을 잘 몰랐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따님도 집안에 닥친 어려움을 알게 되었겠네요. 네, 알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은 딸과 남편, 저 이렇게 셋이서 지방으로 미수금을 받으러 다니는 바람에 채권자들이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채권자들은 제가 돈을 떼어먹고 도망갈까 봐 불안했는지, 큰 딸 학교로 찾아갔습니다. 학교 정문 앞에서 "너희 엄마 어디 갔는지 아냐, 연락 되냐, 우리는 너희 엄마한테 돈을 받아야 한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진 거죠. 돈을 빌려주고 빌릴 때는 서로 신뢰 관계가 있었고, 인간적인 믿음이 있었는데, 채권자들이 딸 학교까지 찾아와서 빚 독촉을 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채권자들에게도 자식이 있을 텐데, 어떻게 딸 학교까지 찾아와서 빚 독촉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큰 딸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엄마, 좋은 고등학교는 왜 다니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딸이 "엄마, 좋은 고등학교는 좋은 대학교 가려고 다니는 거잖아. 내가 좋은 대학교 가면 아무도 고등학교 자퇴한 것 가지고 뭐라 안 할 거야. 나 그냥 검정고시로 좋은 대학교 갈 테니까, 예고 그만 다니게 해줘"라고 했습니다. 딸이 자퇴를 간청했습니다. 고등학생 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상황이었겠네요. 서울예고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든 학교인데, 딸이 자퇴를 결심하다니 마음이 정말 아팠을 것 같아요. 서울예고는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자퇴생은 개교 이래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학교 측에서 장학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예고는 등록금 외에도 레슨비 등 학비 부담이 큰 학교입니다. 결국 딸 뜻을 꺾지 못하고 자퇴를 허락했습니다. 아, 정말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그럼 따님은 예고 자퇴 후 어떻게 되었나요?

딸은 예고를 자퇴하고 집에 있었는데, "검정고시로 좋은 대학 갈 테니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학원이라도 다녀야 할 텐데, 학원비 걱정이 앞섰습니다. 저는 "한샘학원"에 정말 빚을 졌습니다. 딸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노량진 한샘학원에 가서 원장 선생님께 간곡하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100명이 듣는 수업인데 10명이 듣는다고 해서 학원에 손해 끼치는 것은 아니지 않냐, 나 하나만 더 듣게 해달라, 나는 서울대학교에 갈 사람이니 서울대학교 합격하면 학원에 현수막 크게 걸어주겠다, 그걸로 학원비 퉁치자"고 배짱 좋게 말했다고 합니다. 정말 당돌하면서도 기특하네요. 100명 듣는 수업에 학생 하나 더 들어간다고 해서 학원 측에서 손해 볼 것은 없으니, 딸아이를 받아주셨습니다. 당시 한샘학원에 근로 장학생 제도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딸은 칠판 지우는 조건으로 학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딸 때문에 칠판 닦는 근로 장학생 제도가 생긴 셈이죠. 정말 대단하네요. 딸이 수능 시험을 보고 한샘학원 선생님들께 인사하러 갔더니, 원장 선생님께서 작은 봉투를 하나 주셨습니다. "이제 학원 안 올 테니 용돈으로 쓰라"면서 봉투를 주시면서, 당시 유행했던 TV 프로그램 이름을 언급하며 "나중에 훌륭한 사람 되면 우리 학원 꼭 찾아달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선생님들도 딸을 예쁘게 보셨던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한 일들이 많았네요.

다행히 저희 집안은 4대째 기독교 집안입니다. 어른들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는지, 딸에게 좋은 친구가 생겨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딸을 교회로 인도한 친구는 교회에 다니지 않고, 오히려 딸만 교회에 푹 빠졌습니다. 삐뚤어질 수도 있는 환경에서, 예민한 시기에 딸이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자다가 깨어보니 딸이 없었습니다. 딸이 어디 갔나 찾아보니, 낡고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 방석을 깔고 꿇어앉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너 뭐 하니?"라고 물었더니, "엄마, 새벽 예배 너무 가고 싶은데, 교회까지 너무 멀고, 매일 택시 타고 갈 수도 없고, 차비가 너무 부담돼서 여기서 혼자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딸의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감사했습니다. '내가 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우리에게는 차비가 문제구나, 교회 앞으로 이사가면 되겠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월세 사는 것은 똑같으니, 딸이 걸어서 교회 갈 수 있는 교회 옆으로 이사 가자고 결심했습니다. 교회 옆에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네요. 기도 은혜 받으시다가 갑자기 전셋집으로 이사하셨다고요? 네, 딸이 바르게 자라는 것만 생각하고, 아무 계산 없이 교회 옆 단칸 셋방으로 이사했습니다.

상계동 아파트에 비해서 용산 집값이 너무 비싸서 정말 좁은 단칸방으로 이사해야 했습니다. 살림살이를 다 넣을 수 없어서 대부분 버리고, 아이들이 울면서 "책만은 버리면 안 된다"고 해서 책만 가지고 이사를 했습니다. 저는 평생 열심히 살아서 아이들에게 좋은 집,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인생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형편없는 집으로 이사하게 되어서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큰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이런 집밖에 얻어주지 못해서"라고 사과했더니, 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성경책에 '인자도 머리 둘 곳이 없었다'는 말씀이 있잖아. 그래도 엄마, 아빠가 이혼하거나 집 나가 버리지 않고, 우리 버리지 않고, 천장 있는 집이라도 얻어서 비 안 맞고 같이 살잖아." 딸의 말을 듣는 순간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정말 딸이 천사네요.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부족하고 지혜롭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좋은 딸들을 주시고, 딸들을 통해 저를 많이 깨우쳐주시는 것 같습니다. 딸 요청으로 교회 옆으로 이사했으니, 자연스럽게 장로님도 다시 하나님 곁으로 다가가게 되셨겠네요. 음,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저는 여전히 교회를 학교처럼 다녔습니다.

어른들이 가라고 하니까 억지로 교회를 다녔습니다. 저희 어머니와 이모 주례를 모두 한경직 목사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시네요. 저는 어렸을 때 한경직 목사님이 저희 집에 너무 자주 오시는 동네 아저씨인 줄 알았습니다. 그냥 동네 아저씨 정도로 생각했고, 한경직 목사님이 그렇게 대단한 분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너무 어렸을 때라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목사님만 오시면 어른들이 계란을 삶아서 대접했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 저를 무릎에 앉혀놓고 삶은 계란을 까서 먹여주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동네 좋은 아저씨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커서 어머니 결혼식 사진을 보니 한경직 목사님이 주례를 서 주셨고, 이모 결혼식 사진에도 같은 분이 주례를 서 주셨습니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한경직 목사님 저서도 많고, 친필 사인해주신 책들도 많았습니다. 남들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이가 들어보니 믿음의 뿌리가 있었다는 것이 정말 큰 상속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재산보다 믿음의 유산이 더 값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럼 이제 따님은 매일 새벽기도 가고, 장로님도 함께 새벽기도에 참석하셨나요?

네, 딸은 매일 새벽기도에 갔지만, 저는 그때까지도 선데이 크리스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새벽 5시 새벽 예배를 드리러 갈 때 캄캄한데, 어린 딸 혼자 어두운 길을 가는 것이 불안해서 따라나섰습니다. 저는 그냥 딸 보호자 역할로 새벽기도에 따라갔습니다. 무사히 교회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딸 따라 새벽기도에 참석했지만, 예배는 그냥 습관처럼 드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예배드리는 것이 익숙했으니까요. 그렇게 몇 달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께서 저희 집 사정을 아시게 되었습니다. 딸이 학교를 자퇴한 것도 아시고, 새벽 예배 끝나고 딸이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서 맴도는 것도 아셨습니다. 목사님께서 "너는 학교 안 가니?"라고 물으셨는데, 그때가 딱 아이들이 학교 갈 시간이었던 거죠. 딸은 학교에 가기 싫어서 교회에서 청소도 하고 피아노도 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목사님께서 딸을 안타깝게 생각하시고 도와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존심 강한 저에게 새벽 예배 피아노 반주를 부탁하셨습니다. 반주자 사례 명목으로 용돈도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한 제안이었죠. 늘 반전이 있는 스토리를 들려주시는데요, 이번에는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딸이 어느 날 주보를 들고 와서 보여줬는데, 교회 주보 뒷면 헌금자 명단에 어떤 안수집사님께서 감사헌금 1천만 원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헌금 금액이 크다 보니 이름뿐만 아니라 헌금 액수까지 주보에 실린 것이었습니다. 금액이 정말 크네요. 오타가 아닌 진짜 1천만 원 헌금이었습니다. 딸이 주보를 내밀면서 "엄마, 나도 하나님께 헌금 1천만 원 드리고 싶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그래, 1천만 원 헌금 얼마든지 할 수 있지, 못 받은 돈만 받아도 1천만 원 헌금하고도 남을 텐데"라고 호기롭게 대답했을 겁니다. 딸이 반듯하게 자라나는 것에 대한 감사 헌금 1천만 원, 정말 흔쾌히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보증금 500만 원 월세방에 사는 사람이 1천만 원 헌금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내가 떼인 돈 중에 단 돈 1천만 원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헌금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날부터 딸과 함께 새벽 예배에 가서 매일 "하나님, 1천만 원, 1천만 원, 제가 못 받은 돈 받게 해주세요, 떼인 돈 받으면 1천만 원 헌금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남들은 기도하면 응답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 한 달 넘게 1천만 원 헌금 기도를 했지만, 떼인 돈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점점 짜증이 났습니다. '하나님, 제가 1천만 원 헌금해서 제 욕심 채우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건데, 왜 떼인 돈이 생기지 않나요?'라고 불평했습니다. '내 돈 떼어먹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돈을 줘야 1천만 원 헌금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영화 같은 일이 왜 안 일어나는 건가요? 하나님, 도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라며 짜증을 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오기로 드린 기도에서 응답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너에게 1천만 원을 받으려고 하겠느냐? 하나님이 정말 돈이 필요해서 가난한 너에게 1천만 원 헌금을 받고 싶어 하시겠느냐? 그건 아닐 것이다." 저도 한때 사업을 해서 큰돈을 많이 만져봤습니다. 1천만 원이 큰돈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천만 원보다 훨씬 더 큰 것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1천만 원이 그렇게 큰 돈인가? 만 원짜리 천 장이면 1천만 원인데, 내가 지금 1천만 원은 없지만, 만 원씩 천 번 헌금하면 1천만 원이 되는 거잖아.' "그래, 만 원씩 천 번 헌금해야겠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정말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네요. 진짜 '땡큐'네요.

1천만 원 헌금이 부담스러웠지만, 만 원씩 천 번 헌금은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 헌금은 정말 딸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으로 드리고 싶었던 헌금이었기에, 천 번 헌금을 드리는 동안은 하나님께서 딸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실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만 원씩 천 번 헌금은 1천만 원 헌금보다 훨씬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헌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1천 번 헌금하는 동안 딸을 안전하게 보호해달라고 하나님께 할부로 보험을 드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만 원씩 천 번 헌금을 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아, 엄마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엄마가 만 원씩 천 번 헌금을 드릴게. 혹시 엄마가 천 번 헌금을 다 못 드리고 죽더라도, 네가 꼭 이어서 천 번 헌금을 마무리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니까 꼭 지켜야 한다." 딸과 약속하고 만 원씩 천 번 헌금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헌금을 시작하려니, 제 헌금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교회에 비치된 헌금 봉투가 너무 아까웠습니다. 하얀색 빳빳한 헌금 봉투에 만 원씩 천 번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문방구에 가서 누런색 봉투 100장 묶음을 사다가, 봉투마다 번호를 써놓고 헌금 순서를 기록했습니다. 만 원짜리 한 장씩 봉투에 넣고 교회를 갔는데, 예배 시간마다 헌금을 걷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제 헌금을 내야 할지 몰라서, 사람들보다 일찍 교회에 가서 강대상 위에 헌금 봉투를 살짝 올려놓고 예배당을 나왔습니다. 남들에게 헌금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왠지 부끄러웠습니다. 이렇게 헌금을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헌금 봉투에 번호를 매기고 횟수를 세면서 헌금을 하니까 교회 가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빨리 드리고 싶어서, 빨리 천 번을 채우고 싶은 마음에 교회 가는 것이 기다려졌습니다. 헌금 횟수가 한 자리 숫자에서 두 자리 숫자로, 두 자리 숫자에서 세 자리 숫자로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900번 넘어가면 1000번을 빨리 채우고 싶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정말 헌금 카운팅하는 재미에 푹 빠져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습니다. 주일에는 새벽 예배, 1부 예배, 2부 예배, 3부 예배 등 예배를 여러 번 드렸습니다. 정말 주일에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교회 가는 것이 너무 신났는데, 예배와 예배 사이에 시간이 남았습니다. 예배 사이 텀 시간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다른 교인들과 달리 교회에서 봉사 직책을 맡은 것도 아니고, 집사 직분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에, 교회에서 할 일이 없었습니다. 남는 시간에 무엇을 했을 것 같으세요? 교회에서 남는 시간에 주로 청소를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했는데, 식사 후 설거지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주방에 들어가 보니, 연세 드신 권사님, 집사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밥하고 반찬 만드는 봉사는 할 엄두도 못 내고 설거지 봉사부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50대 초반이었는데, 주방 봉사자들 사이에서는 막내였습니다. 주방에서는 제가 막내였어요. 50대 초반에 막내라니, 웃기죠? 주방 막내는 힘이 좋으니까, 열심히 설거지를 했습니다. 설거지를 해도 시간이 남아서, 이번에는 청소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화장실 청소를 자원해서 했습니다. 교회에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화장실 청소도 천천히 꼼꼼하게 했습니다. 변기 닦고, 휴지통 비우는 것 외에도, 화장실 문도 닦고, 벽도 닦고, 심지어 천장까지 닦았습니다. 매주 화장실 대청소를 했습니다. 여자 화장실 청소는 할 만했는데, 남자 화장실 청소는 왠지 자존심도 상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청소 중에 남자 교인들이 화장실에 들어오면 난감할 때도 있었습니다. 큰 건물 청소하시는 분들은 남자 화장실 청소도 능숙하게 잘 하시던데, 저는 프로 청소부가 아니니까 남자 화장실 청소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고, 딸이 교회에 잘 적응하는 모습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봉사했습니다. 정말 봉사하는 기쁨을 느끼셨네요. 딸이 교회에 잘 다니는 모습 보면서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그런데 또 반전이 있었죠. 이번에는 어떤 반전인가요? 화장실에는 휴지가 떨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느 날 교회 권사님 한 분이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진 것을 보시고 저에게 짜증을 내셨습니다. "아니, 화장실에 휴지가 왜 이렇게 빨리 떨어져? 휴지 좀 넉넉하게 갖다 놓으세요!"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교회에서 돈 받고 화장실 청소하는 것도 아니고, 봉사로 하는 건데, 휴지까지 나한테 짜증을 내시다니. 그럼 휴지도 내 돈으로 사다 놔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서운한 마음에 교회 뒷마당에 가서 펑펑 울었습니다. '죽기는 싫어서 교회 봉사까지 열심히 하는데,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지? 내가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인가? 정말 가난하면 이렇게 무시당해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닦으려고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내가 안다, 내가 다 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환청처럼 "내가 안다, 내가 다 알아"라는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억울하거나 속상한 일,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 아버지, 아시죠?"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가 안다, 내가 다 알아"라고 응답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하나님의 위로와 응답으로 힘든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위로가 큰 힘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담임 목사님께도 화장실 휴지 사건에 대해 말씀드렸겠죠? 네, 담임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권사님 누구라고 실명 거론은 하지 않고, 그냥 '어떤 권사님이 화장실 휴지 좀 넉넉하게 갖다 놓으라고 하셔서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화장실 휴지 넉넉하게 채워놓고, 떨어지지 않게 잘 관리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목사님께서 현명하게 대처해주셨습니다. 잘 하셨네요. 현명하신 목사님께서 뭐라고 말씀해주셨나요? 목사님께서는 제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시면서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교회에서 나갈 때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하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안녕히 계세요'가 아니라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라고요? 네, 목사님께서 "집사님은 또 교회에 오실 거잖아요. 그리고 이 넓은 교회는 집사님 집이나 마찬가지예요. 하나님 집은 곧 성도님들의 집이에요. 손님이 주인에게 이것저것 요구하고 짜증을 내는 경우는 있어도, 주인이 손님에게 짜증을 내는 경우는 없잖아요. 성도님들이 집사님에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은, 이미 집사님이 이 교회 주인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지 말고,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세요. 여기는 집사님이 세상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올 집이니까요. 서울에 이만한 집 있으면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목사님 말씀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정말 지혜로우신 목사님이시네요. 교회 다닌 햇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갖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목사님 덕분에 제가 교회 '주인'이 된 것 같았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신지 정말 훌륭하시네요. 어느 교회 다니시는 거예요? 교회 이름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또 반전이 숨어있나요? 정말 반전 스토리네요. 오늘 완전 반전 대학인데요. 아니, 그런데 저는 궁금한 게, 매 예배 때마다 만 원씩 헌금을 하셨다고 했잖아요. 새벽 예배, 수요 예배, 금요 철야 예배, 주일 예배까지, 일주일에 예배를 13번이나 참석하셨는데, 매주 13만 원 헌금을 하신 건가요? 빚 때문에 힘든 상황에서 13만 원 헌금은 적지 않은 금액인데, 어떻게 감당하셨나요? 정말 신이 나서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매주 13번 예배에 참석하고 만 원씩 헌금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일주일에 13번 예배를 드리고 매번 만 원씩 헌금하겠다고 계획했던 것은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너무 신나고 좋아서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는데, 만 원 헌금이 없으면 왠지 예배에 온전히 참석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봐도 감동적인 영화는 만 원 정도 티켓값을 내야 하잖아요. 하물며 꿀보다 달콤하고 제 영혼의 양식이 되는 말씀을 듣는데, 어떻게 만 원도 헌금하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겠어요? 정말 헌금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만 원 헌금을 시작한 것도 있지만, 헌금 없이 교회에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십일조 헌금도 제대로 못 드리고, 집사 직분도 받기 전이었지만, 목사님께서는 저에게 집사 직분을 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가난해서 집사 직분을 주기가 왠지 망설여지셨는지, 명분을 만들어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교회에 다닌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집사 직분을 주시는 것이 부담스러우셨을 수도 있고요. 어느 주일 설교 시간에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화장실에 바알이 떨어져 있어도, 나는 주워 먹을 수 있다." 교회 화장실에 바알이 떨어져 있을 리는 절대 없죠. 목사님께서 화장실 바닥에 떨어진 바알도 주워 먹을 수 있다고 하실 정도면, 그만큼 교회 화장실이 깨끗하다는 뜻이겠죠. 목사님께서는 화장실 청소를 1년 넘게 묵묵히 해온 저에게 집사 직분을 주시기 위해 설교 시간에 칭찬하신 것입니다. 목사님 설교 덕분에, 아무도 제가 집사 되는 것을 반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이네요. 화장실 청소 봉사로 집사님 되셨다니, 뭉클합니다. 네, 화장실 청소 열심히 하고 집사 됐습니다. [웃음] 그런데 교회도 세상의 축소판과 같다고 하셨는데, 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나요? 교회도 세상과 똑같아서, 제가 목사님께 과분한 사랑을 받으면,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꼭 생깁니다. 결국 저는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 결국 교회를 떠나셨군요. 정말 반전의 반전의 반전이네요. 그래도 1천 번 헌금은 마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다행히 1천 번 헌금은 마무리하고 나오셨네요. 그런데 저는 1천 번 헌금이 1천 번제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냥 '만 원씩 천 번 헌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재정 담당 집사님들이 번호가 매겨진 헌금 봉투가 계속 헌금함에 들어오니까, 목사님께 "이 헌금은 주보에 어떻게 실어야 하냐"고 문의했습니다. 그러네요, 매주 번호가 적힌 헌금 봉투가 들어오면 궁금할 수밖에 없겠네요. 목사님께서 "아마도 1천 번제 헌금인 것 같다"고 하시면서, "1천 번제 헌금"이라고 주보에 헌금 명목을 기재하고, 딸 이름과 헌금 횟수를 매주 주보에 올려주셨습니다. 그것이 그 교회 최초의 1천 번제 헌금이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1천 번 헌금, 1천 번제는 잘 마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교회를 떠나서 또 다른 어려움이 닥친 건가요? 당시에 또 다른 일을 시작하셨을 텐데, 어떤 일을 하셨나요?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대단지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5일장이 열리곤 했습니다. 장사꾼들이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와서 장사를 하는 것이죠. 주로 경기도 신도시 대단지 아파트에서 5일장이 많이 열렸는데, 저도 아파트 5일장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5일장에서는 주로 어떤 품목을 판매하셨나요? 쌀국수, 떡볶이 등 다양한 음식을 팔았습니다. 주로 경기도 지역 5일장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5일장 자리를 잡으려면 전날 미리 내려가서 새벽 일찍부터 줄을 서야 했습니다.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지니까, 5일장 장사도 쉽지 않았습니다. '어디든 자리를 잡고 꾸준히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10kg 쌀 포대가 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쌀을 갖다 놓은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쌀까지 챙겨주시다니, 정말 따뜻한 교회네요. 엄마가 집을 자주 비우니, 교회에서 쌀을 챙겨준 것 같습니다. 이제 정말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니 현금이 딱 30만 원 있었습니다. 30만 원으로 리어카를 사서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벼룩시장 신문을 열심히 뒤졌습니다. 30만 원짜리 리어카 매물을 찾기 위해 벼룩시장 신문을 샅샅이 뒤지셨군요. 30만 원짜리 리어카 매물이 동서울터미널 근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먼 길을 찾아갔습니다. 동서울터미널까지 리어카를 사러 가셨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돈에 맞춰 리어카를 찾아 동서울터미널까지 갔는데, 리어카 파는 분이 "아줌마, 이거 가지고 어디 가서 무슨 장사 하려고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신촌이 가장 핫플레이스였기 때문에, 신촌에서 장사하려고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신촌 가서 장사하려고요"라고 했더니, 리어카 파는 분이 "여기는 동서울터미널인데, 신촌까지 리어카를 어떻게 끌고 갈 거냐?"며 걱정했습니다. "돈이 30만 원밖에 없어서 용달차 부를 돈도 없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니, 리어카 가격을 5만 원 깎아주시고 용달차까지 불러주셨습니다. 정말 따뜻한 분이시네요. 어려운 사람을 돕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더 잘 돕는 것 같습니다. 리어카를 겨우 구했는데, 이번에는 장사할 자리가 문제였겠네요.

리어카를 신촌에 겨우 내려놓고 보니, 장사할 자리가 없었습니다. 노점상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가 누군지 아세요? 글쎄요, 구청 단속반? 아니면 경찰? 땡, 정답은 같은 노점상입니다. 노점상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다른 노점상입니다. 기존 노점상들은 텃세를 부리고, 경쟁자가 늘어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하나라도 더 늘어나는 것을 싫어하는 노점상들의 텃세 때문에, 노점상들이 아무도 탐내지 않는, 정말 형편없고 볼품없는 자리에 리어카를 겨우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좋은 자리는 이미 다른 노점상들이 꽉 잡고 있었습니다. 노점상 자리에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했습니다. 노점을 오래 해서 자리를 잘 잡은 노점상들은 모터 달린 전동 리어카를 사용했습니다. 야쿠르트 아줌마들이 타는 전동 리어카처럼 말이죠. 저는 30만 원짜리 수동 리어카였기 때문에, 저녁에 장사를 마치면 리어카를 끌고 집까지 가야 했습니다. 보통 주차장에 차를 맡기고 주차 요금을 내듯이, 한 달에 얼마씩 돈을 내고 리어카를 보관해주는 곳도 있었지만, 수동 리어카를 멀리까지 끌고 갈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주차장과 가깝고, 인적이 드문 곳에 리어카를 놓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노점상 자리도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군요. 자릿세도 있고, 경쟁도 치열하고. 제 시대에는 노점상 자리를 사고팔기도 했습니다. 노점상 자리도 금처럼 귀한 존재였죠.

다행히 기존 노점상들은 제가 잡은 자리를 탐내지 않았습니다. "저 자리는 어차피 장사도 안 될 자리니, 저 아줌마 며칠 하다 말겠지"라고 생각하고 저를 내버려둔 것 같습니다. 장사가 안 되는 자리에 제가 알아서 자리를 잡았으니, 텃세를 부릴 필요도 없었던 것이죠. 처음에 리어카에서 떡볶이를 팔았는데, 떡볶이 맛을 낼 줄 몰라서 맛이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제가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을 때가 9월쯤이었는데, 떡볶이는 찬바람 불 때 잘 팔리는 음식인데도 불구하고, 맛이 없으니 손님들이 찾지 않았습니다. 파는 것보다 버리는 떡볶이가 더 많았습니다. 가스는 하루 종일 켜놔야 하니, 남는 것도 거의 없었습니다. 정말 힘들게 시작한 노점상이었지만, 처음부터 장사가 잘 될 리는 없었죠. 미천도 없으니, 옷이나 양말 같은 공산품을 떼어다 팔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장사는 자신 있었지만, 밑천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이 떡볶이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분이 지나가다가 "찬바람 불면 골목에서 팔아도 붕어빵은 잘 팔린다"고 조언해주셨습니다. "여기는 큰길가니까 붕어빵 팔면 떡볶이보다는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붕어빵은 겨울 한철 장사니까, 붕어빵 기계를 무료로 빌려주는 곳도 있었습니다. 붕어빵 재료를 그곳에서 사다 쓰는 조건으로 붕어빵 기계를 무료로 빌릴 수 있었습니다. 밑천이 없던 저에게는 붕어빵 장사가 딱 맞는 선택이었습니다. 왠지 붕어빵 장사는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나요? 자리가 워낙 안 좋아서, 붕어빵 장사도 처음에는 잘 안 됐습니다.

또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네요. 또 어떤 반전이 있었던 건가요? 제가 이 나이에도 편식이 심합니다. 특히 팥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팥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팥을 싫어하는 붕어빵 장수라니, 정말 아이러니하네요. 팥을 싫어하니 붕어빵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반전이 숨어 있었네요. 정말 반전의 연속입니다. 왜 팥을 싫어하세요? 그냥 어렸을 때부터 팥하고 콩을 싫어했습니다. 팥죽, 팥밥, 팥빙수, 팥이 들어간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팥을 싫어하는데 붕어빵 장사를 하다니, 정말 아이러니하네요. 붕어빵 장사를 하려면 장시간 리어카를 지켜야 하니까, 배가 고플 때가 많았습니다. 집에서 도시락을 싸갔지만, 길거리에서 도시락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왠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화병이 뭔지 그때 제대로 알았습니다. 배는 고픈데, 도시락은 먹히지 않고, 정말 힘든 시간이었죠. 싸간 도시락은 그대로 남기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붕어빵을 구웠습니다. 그래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힘은 내야 하니 붕어빵이라도 먹어야 했습니다. 붕어빵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 팥은 싫어하니 팥을 빼고 붕어빵 껍데기만 먹었습니다.

붕어빵 팥은 깨끗한 팥이겠지만, 팥을 털어내고 남은 붕어빵에 다시 팥을 넣으려니 왠지 찝찝했습니다. 그래서 팥 없는 붕어빵, 붕어빵 껍데기만 구워서 먹었습니다. 붕어빵 껍데기만 먹으니 아무 맛도 없고, 밍밍했습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 수 없어서, 집에서 고구마를 삶아 가지고 나갔습니다. 드디어 "고구마"가 등장했네요! 오늘 인터뷰 키워드가 "고구마"였잖아요. 네, 맞습니다. 드디어 고구마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삶아간 고구마가 식어서 차가워졌는데, 차가운 고구마를 껍질 벗기고 붕어빵 안에 넣어서 구워봤습니다. 고구마를 붕어빵 소로 활용하신 거군요! 고구마를 붕어빵 소로 넣으니, 붕어빵도 따뜻해지고, 고구마도 따뜻해져서 좋았습니다. 고구마 붕어빵을 간식처럼 먹었는데, 팥 붕어빵 사러 온 학생들이 "아줌마는 노란 붕어빵 드시네요? 우리는 팥 붕어빵 먹을 건데"라고 말했습니다. 혼자 맛있는 것 먹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고구마 붕어빵을 조금씩 잘라서 학생들에게 나눠줬습니다. "너희들도 고구마 붕어빵 한번 먹어봐"라고 권했더니, 학생들이 "어? 맛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날부터 팥 붕어빵 대신 고구마 붕어빵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네요! 팥을 싫어하는 덕분에 고구마 붕어빵이라는 신메뉴를 개발하게 되셨다니,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미있네요. 만약 팥을 좋아했더라면 고구마 붕어빵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네요. 네, 그랬을 수도 있었겠죠. 고구마 붕어빵이 예상외로 인기를 끌면서, 장사가 조금씩 잘 되기 시작했습니다.

고구마 붕어빵이 인기를 끌면서, 2대 앞에 붕어빵 가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제 가게가 2대 붕어빵 맛집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이죠. 2대 앞에서 붕어빵 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2대 붕어빵 거리가 조성될 정도였습니다. 2대 학생들이 안타까웠는지, 학교 홈페이지에 "진짜 원조 고구마 붕어빵은 이 아줌마 가게"라고 홍보글을 올려줬습니다. "2대 정문 앞에서 고구마 붕어빵 파는 아줌마가 진짜 원조"라면서, 다른 붕어빵 가게에 가지 말고 꼭 원조집에서 사 먹으라고 친절하게 안내해줬습니다. 2대 학생들의 따뜻한 마음에 정말 감동했습니다. 학교 홈페이지에 고구마 붕어빵 원조집이라고 홍보까지 해주다니, 2대 학생들 정말 센스 있네요. 2대 졸업생 중에 언론계에 종사하는 분이, 인터넷 검색하다가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제 붕어빵 가게 홍보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스포츠신문 기자에게 제보를 해서, 스포츠신문 기자가 붕어빵 가게를 취재하러 왔습니다. 당시에는 아침마다 스포츠신문을 많이 보던 시절이었는데, 스포츠신문에 제 붕어빵 가게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스포츠신문에 붕어빵 가게 기사가 실리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 스포츠신문 기사가 나간 후, 조선일보 기자에게서도 취재 요청이 왔습니다. 국내 메이저 일간지인 조선일보에도 붕어빵 가게 기사가 실렸습니다. 조선일보 기사가 나간 후에는 KBS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KBS 방송국에서 붕어빵 가게를 취재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정말 대박났네요! 붕어빵 가게가 방송에까지 나오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드디어 붕어빵 인생 역전 드라마가 시작되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정말 붕어빵 인생 역전 드라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KBS 9시 뉴스에 출연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방송 출연 후 붕어빵 가게는 더욱 유명해졌고, 손님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습니다. 여의도에서 택시를 타고 붕어빵을 사러 오는 손님들도 있었습니다. 완전 붕어빵 성지가 되었네요. 미디어의 힘은 정말 대단하네요. 방송 한번 타니 사람들이 전국에서 붕어빵을 사러 찾아오다니. 붕어빵 장사, 이제 탄탄대로를 걷는 건가요? 또 반전이 있습니다. 아, 또 반전이요? 이번에는 나쁜 반전은 아니겠죠? 붕어빵은 겨울에만 팔 수 있는 계절 음식이라는 반전이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붕어빵을 찾는 손님이 거의 없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 붕어빵 장사를 더 이상 할 수 없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니 붕어빵 굽는 것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만약 붕어빵을 사계절 내내 팔 수 있었다면, 저는 아마 평생 붕어빵 장사만 했을 겁니다. "와플대학" 대신 "붕어대학" 대표가 될 뻔했네요. 붕어빵 대학도 왠지 정감 있고 친근하게 느껴지네요. 붕어빵 장사를 접고, 여름에는 무슨 장사를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밥은 굶을 수 없으니, 여름 메뉴를 찾아야 했습니다. 고민 끝에, 길거리에서 학생들이 와플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여름 메뉴는 와플로 정했습니다. 여름에는 와플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와플 기계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에는 와플, 겨울에는 붕어빵, 계절별 메뉴를 정하신 거군요. 여름에 와플 장사를 시작했는데, 철없는 학생들은 여름에도 고구마 붕어빵을 찾았습니다. 여름에도 고구마 붕어빵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 와플 크림에 삶은 고구마를 섞어서 팔았습니다.

고구마 붕어빵 대신 고구마 크림 와플을 팔기 시작한 것이죠. 하얀 와플 크림에 삶은 고구마를 넣고 휘저어서 고구마 크림을 만들었습니다. 고구마 크림 와플도 붕어빵만큼 인기를 끌었습니다. 고구마 붕어빵에 이어 고구마 크림 와플까지 히트 메뉴를 개발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고구마는 정말 장로님 인생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네요. 고구마 덕분에 붕어빵, 와플까지 성공했으니, 고구마에게 상이라도 줘야 할 판입니다. 고구마 크림 와플도 잘 팔렸지만, 붕어빵만큼 폭발적인 인기는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했습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지혜가 샘솟듯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새벽 예배를 하루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1천 번 헌금도 신나게 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선물로 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모태신앙이라, 숫자 중에 제일 좋아하는 숫자가 12입니다. 갑자기 12가지 크림 와플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베스킨라빈스31 아이스크림처럼, 12가지 다양한 크림 와플을 만들어 팔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베스킨라빈스31 아이스크림처럼 12가지 크림 와플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지스러운 크림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크림 12가지 종류를 리어카에 진열하기 위해 리어카에 구멍을 뚫고, 위생적으로 보이도록 아크릴 뚜껑까지 맞췄습니다. 12가지 크림 와플 리어카를 완성하고, 리어카를 끌고 장사를 시작하는 날, 태어나서 가장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 와플 믹스 10kg 한 포대만 팔게 해주세요. 계산해보니 와플 믹스 10kg 한 포대 팔면, 제 수입이 한 달에 500만 원 정도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제발 오늘 와플 믹스 10kg 한 포대만 팔게 해주세요. 만약 오늘 와플 믹스 한 포대를 다 팔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남은 인생 하나님께 다 바치겠습니다." 정말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네요. 놀랍게도, 그날 와플 믹스 10kg 한 포대를 다 팔았습니다.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네요!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12가지 크림 와플, 정말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도는데요. 12가지 크림 종류가 궁금합니다. 어떤 크림들이 있었나요?

고구마 크림을 필두로, 커피 크림, 오렌지 크림, 포도 크림 등 정말 억지로 12가지 크림을 만들었습니다. 고구마 크림은 기본이고, 커피 크림은 커피 가루를 넣어서 만들고, 오렌지 크림은 오렌지 주스 분말을 넣어서 만들었습니다. 정말 다양한 크림 와플을 개발하셨네요. 지금 와플대학 메뉴는 그때보다 훨씬 더 다양해졌죠? 네, 와플대학 크림 종류는 지금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모카 크림, 요거트 크림, 블루베리 크림 등 다양한 크림 와플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12가지 크림이 아니라 10가지 크림 와플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12가지에서 10가지로 줄인 이유가 있나요? 손님들이 12가지 크림 와플을 보고 베스킨라빈스31 아이스크림을 연상해서인지, 와플을 아이스크림처럼 차갑게 먹어야 하는 줄 아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와플은 따뜻하게 먹어야 제맛인데, 아이스크림처럼 차갑게 드시는 분들이 있어서, 크림 종류를 10가지로 줄이고 아이스크림 와플 메뉴를 추가했습니다. 지금은 10가지 크림 와플과 10가지 아이스크림 와플, 총 20가지 와플 메뉴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텐텐 전략"으로 메뉴를 개편하신 거군요. 12가지 크림 와플 첫 판매 날, 손님들 반응은 어땠나요? 와플 시식 코너처럼, 와플을 잘라서 손님들에게 시식해보라고 권했습니다. "이 크림도 드셔보시고, 저 크림도 드셔보세요"라면서 적극적으로 시식을 권했습니다. 손님들도 12가지 다양한 크림 와플을 보고 신기해하면서, 이것저것 맛보려고 했습니다. 손님들이 원하는 대로 크림을 발라주고, 반반 와플처럼 반은 이 크림, 반은 저 크림 발라서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친절하게 손님들을 응대하셨네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손님들이 다시 붕어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붕어빵과 와플, 두 가지 메뉴를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딸이 아르바이트 삼아 와플 판매를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정말 붕어빵과 와플 덕분에 돈을 많이 버셨겠네요. 네, 정말 붕어빵과 와플 덕분에 넉넉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돈 걱정 없이 헌금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고, 삶이 풍족해졌습니다. 돈을 벌면서 가장 행복했던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돈을 벌면서 가장 행복했던 것은 헌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헌금하고 싶을 때 헌금할 수 있고,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기뻤습니다. 정말 헌금이 주는 기쁨을 제대로 느끼셨네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정말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장로님도 인생 스토리를 되돌아보면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아니요, 저는 제 인생이 드라마 같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노점상에서 벗어나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가장 감사할 뿐입니다. 노점상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정말 상전벽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죠. 노점상에서 와플대학 대표까지,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 역전 스토리를 쓰셨네요. 노점상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정말 꿈만 같으시겠어요.

노점상 시절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가난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머니에 얼마 있는지 확인해보지도 않고 삽니다. 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인생 계획을 세우고 50여 년을 살았지만, 계획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람은 끝이 좋아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인생의 끝은 하나님께 맡겨져 있기 때문에, 굳이 제가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인생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불안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난 후로는 인생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삽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제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제 인생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할지,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마지막 종착역에 도착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냥 오늘 하루에 만족하며 삽니다. 저도 장로님처럼 인생 계획 없이 삽니다. 계획이 전혀 없으세요? 네, 전혀 계획 없이 삽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텐데, 제가 계획 세운다고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아요. 계획 없이 사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래서 걱정도 없고, 불안함도 없습니다. 사업하면서 저만큼 태평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도 장로님과 비슷한 성격입니다. 사업이라는 것이 100가지, 1000가지 요소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야 성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단 하나라도 삐끗하면 언제 망할지 모르는 것이 사업입니다. 사업은 원래 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언제 망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그런데 부족하고 성격 급하고 남의 말에 잘 속아 넘어가는 저 같은 사람이, 아직까지 16년째 와플대학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합니다. 사람들이 와플대학이 16년이나 된 브랜드라고 하면 깜짝 놀랍니다. "와플대학이 벌써 16년이나 됐어요? 최근 3~4년 사이에 갑자기 생긴 브랜드인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와플대학은 2008년 신촌에서 처음 시작한 브랜드인데, 벌써 16년이나 되었습니다. 16년 된 브랜드인데 아직도 망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저처럼 부족하고 허술한 사람이 와플대학을 16년이나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와플대학이 망하지 않고 16년 동안 성장해온 이유는 딱 하나,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와플대학이 망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와플대학이 망하지 않은 것이 바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있는데, 큰 따님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큰 딸은 검정고시로 대학교에 진학해서 미술을 전공했고, 지금은 결혼해서 딸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진학했군요. 어느 대학교에 갔나요? 서울 시내에서 손꼽히는 명문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4년 장학금도 받고, 3학년 때는 총장상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믿음 좋은 신랑 만나 결혼해서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와플대학 성공에는 큰 딸 역할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작은 딸이 와플대학 운영을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두 딸 모두 훌륭하게 잘 키우셨네요. 정말 해피엔딩 스토리입니다. 여기서 딱 끝났으면 좋겠네요. 더 이상 반전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장로님, 이제 행복하게 잘 사세요! 네, 저도 이제 철들었습니다.

요즘 젊은 청년들이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 저는 젊은 시절에 뭐 했나 싶습니다. 와플대학 대표라는 직함으로 이 자리에 섰지만, 와플대학 대표가 제 마지막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뒤늦게 장로가 되었는데, 장로 직분이 제 마지막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정말 친한 분들은 저를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장로님"이라고 부릅니다. 장로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들고 책임 막중한 자리인지 모르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와플대학이 이렇게 잘 될 줄 몰랐을 때, 겁도 없이 장로 직분을 수락했습니다. 어떻게 겁 없이 장로가 되었냐고요?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 협동조합 감사직을 부탁하셨는데, 감사직을 맡아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목사님 앞에서 "단돈 10만 원 빌릴 곳도 없고, 감사직 부탁할 사람도 없다"고 푸념했더니, 목사님께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제가 감사직 해드릴게요"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 말씀에 감동받아서, '목사님 정도 되는 분이 나 같은 가난한 성도에게 평생 무슨 부탁을 하시겠어. 만약 목사님이 나에게 부탁을 하시면,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예스"라고 대답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첫 번째 부탁으로 "장로가 되어주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장로가 뭔지도 잘 몰랐습니다. 장로를 "장기간 노는 사람", "장기간 노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집안에 장로, 목사, 전도사가 많아서,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장로님들을 많이 봤습니다. 일 안 하고 교회 가서 맨날 노는 장로님, 고모부 같은 분들을 보면서 "장로는 장기간 노는 사람이구나"라고 쉽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겁 없이 장로 직분을 수락할 수 있었습니다. 0.1초도 고민 안 하고 "예스"라고 대답했죠. 장로 직분을 쉽게 생각하고 수락했지만, 장로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힘든 자리인지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정말 장로는 "장기간 게으름 피우는" 자리가 아니라, "장기간 헌신 봉사하는"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 감사직을 맡아주신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와플대학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면서 사업 노하우를 많이 축적하고 있는데, 이 노하우를 교회 프랜차이즈 사업에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목사님은 만 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보다는, 100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 100개를 세우고 싶어 하십니다. 네트워크 교회, 프랜차이즈 교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어 하시는 거죠. 제가 목사님께 "목사님은 교회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고 싶으신 거네요? 제가 와플대학 프랜차이즈 사업 노하우를 잘 배워서 목사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저희 교회는 벌써 네 번째 지저스 처치를 개척했습니다. 벌써 4호점까지 개척하셨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교회 프랜차이즈 사업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네요. 네 번째 교회까지 개척했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희 교회는 아직 100명이 채 안 되는데, 벌써 4호점까지 개척했습니다. 본 교회 교인은 100명이 안 되지만, 4개 교회를 합치면 400명 규모의 교회가 된 셈이네요. 정말 놀라운 성장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방송을 보고 계실 시청자분들, 특히 단칸방에 갇혀서 내일을 걱정하며 막막하고 캄캄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도 20대 젊은 시절에 500만 원 보증금에 월세 37만 원짜리 원룸에 처음 이사하던 날이 떠오릅니다. 17만 원 월세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500만 원 보증금도 빚내서 마련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방에 덩그러니 앉아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캄캄하다고 느끼는 분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고 방황했던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답답하고 힘들 때, 무작정 성경책을 펼쳐서 읽고 또 읽고, 필사도 했습니다. 성경 말씀 속에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해답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새롭게하소서"에 나와서 간증한 것처럼, 제가 겪었던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손을 내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와플대학에도 "손에 손잡고"라는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와플대학 "손에 손잡고" 프로젝트는, 정말 살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사람, 다시 일어서고 싶어서 손 내미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프로젝트입니다. 누워 있고, 앉아 있고, 아무것도 해볼 생각이 없는 사람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 일어서려고 손 내미는 사람들에게 손 한번 잡아주면, 그 사람은 다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손 한번 잡아주자는 취지로 "손에 손잡고"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저처럼 엉망진창으로 살았던 인생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넘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손을 내밀면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 말, 심지어 교회 사람들 말도 너무 믿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께 손 내밀어 보세요. "하나님, 제발 제 손 좀 잡아주세요"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그렇군요. 정말 감동적인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장로님 간증을 통해 많은 분들이 위로와 용기를 얻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장로님 간증 들으시면서 어떠셨나요? 저는 장로님 간증 중에서 "나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인생 계획을 세우지 않고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간다"는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점쟁이 찾아가서 미래를 묻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회사를 그만둬야 할까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까요?"라며 인생 타임라인을 궁금해하며 살아갑니다. 미래를 알면 좀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인생 항로에 올라탔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참여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말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정말 웬만한 여자 목사님보다 말씀을 더 잘 전하시는 것 같아요. 간증 요약을 너무 잘해주시네요. 요즘 "새롭게하소서" 진행하면서 말씀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베란다에서 기도하세요. 네, 매일 새벽 베란다에서 기도합니다. 날씨가 너무 더우면 실내에서 기도합니다. [웃음] 저희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와플대학 지점을 "캠퍼스"라고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네, 와플대학 지점을 캠퍼스라고 부릅니다. 대학이라는 이름 덕분에 와플대학 지점 오픈 시간을 "등교 시간", 마감 시간을 "폐교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정말 신박한 아이디어네요. "땡땡점" 대신 "땡땡 캠퍼스"라고 부르는 것도 재미있고, "등교 시간", "폐교 시간"이라는 표현도 와플대학 브랜드 이미지를 잘 나타내는 것 같아요. 와플대학 창업을 배우고 싶어 하는 분들을 위해 와플 클래스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와플 창업 클래스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와플 클래스 수료증도 발급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오신 분이 와플 클래스 총장님이십니다. 와플 클래스 총장님도 함께 자리해주셨군요. 와플대학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흥미롭네요. 와플대학 캠퍼스가 전국 곳곳에 세워지는 것처럼, 앞으로 와플대학 프랜차이즈 사업이 더욱 번창하고, 와플대학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이 널리 전파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귀한 간증 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해서 간증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감사합니다. [음악] 고맙습니다. [음악]

1. 한 고대 문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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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의 증거(연역적 추론)

6. 신의 증거(귀납적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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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9. 성경의 사실성

10. 압도적으로 높은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12.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

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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