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텍사스 30년 약국, 이미선 약사의 헌신과 감동 스토리
미아리 텍사스 30년 약국, 고난과 헌신
고난의 시간을 견디고, 빛을 향해 나아가다: 이미선 약사의 삶과 헌신
이번 글에서는 유튜브 채널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하신 이미선 약사님의 간증 내용을 상세하게 정리하여 전달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미선 약사님은 성북구 하월곡동, 과거 미아리 텍사스라 불렸던 성매매 집결지에서 '건강한 약국'을 30년 넘게 운영하며 겪었던 고난과 그 속에서 발견한 희망,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해주셨는데요, 약사님의 이야기는 단순한 약국 운영기를 넘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사랑과 연대를 실천하는 한 개인의 용기 있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지금부터 이미선 약사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미선 약사님은 현재 근무하시는 약국이 특별한 곳에 위치해 있다고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곳은 바로 성북구 하월곡동, 과거 유명했던 미아리 텍사스 성매매 집결지 인근인데요,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이 지역은 저소득층, 홀로 사는 노인,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로 거주하며, 한쪽에는 여전히 성매매 집결지가 남아있는 곳입니다. 약사님은 아직도 성매매 집결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란다고 언급하며, 이 지역의 특수한 환경을 설명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저소득층 주민들이 많은 동네에서 혼자 약국을 운영하는 것에 대한 우려에 대해 약사님은 오히려 노련함과 짬에서 나오는 여유를 보여주시는데요, 약사님은 "딱 보면 짬이 된다" 라고 말씀하시며, 나이와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을 드러냅니다.
약사님은 약국에서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웃음을 자아냅니다. 비아그라를 처방전 없이 요구하거나, 10만원짜리 수표를 내밀며 엉뚱한 약을 요구하는 손님, 심지어 자신이 청와대 누구라고 허세를 부리는 손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약국을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약사님은 재치 있게 대응하며, 심지어 "나는 대통령 딸이다" 라고 맞받아치기도 하고, 영업 방해를 하는 손님에게는 즉시 112에 신고하는 단호한 모습 을 보이기도 합니다. 약사님은 본인 약국이 대한민국에서 112 신고를 가장 많이 하는 약국일 것이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하며, 112 경찰들이 이제는 약국에 자주 출동하다 보니 VIP 대우를 해준다는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를 덧붙입니다. 물론 웃지 못할 위험한 순간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취객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위협적인 상황에 놓이기도 했지만, 약사님은 특유의 강단과 노련함으로 이러한 어려움들을 헤쳐나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저희 지역은 좀 리드미컬하다" 라는 표현으로 위험하지만 재미있는(?) 동네 분위기를 설명하며, 이 동네에서 예쁜 약사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농담 섞인 이야기도 덧붙입니다.
약사님은 약국을 30년 동안 한 자리에서 운영하게 된 배경에는 개인적인 아픔과 힘든 시절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인천에서 10년 정도 살다가 이혼 후 어린아이들과 빚더미를 안고 친정인 하월곡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요, 약사님은 "어린아이들 손을 붙잡고 한쪽엔 어린애들, 한쪽엔 빚더미, 이렇게 두 개만 딱 쥐고 왔다" 고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묘사합니다. 하월곡동은 약사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맑은 개울이 흐르던 아름다운 동네였지만, 이혼 후 선택의 여지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약국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친구 어머니가 건물주였던 덕분에 거의 공짜로 약국 자리를 빌릴 수 있었고, "네가 장사해서 돈이 되면 그때 가서 월세를 내라" 라는 친구 어머니의 배려 덕분에 약국을 운영하며 빚을 갚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혼과 빚, 그리고 힘겨운 약국 운영까지 겹치면서 “오늘 밤에 자면 내일 아침 눈 안 떴으면 좋겠다” 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고 고백하며 당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약사님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경제적인 어려움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약국이 위치한 곳이 성매매 집결지였고, 1990년대 후반 당시에는 미성년 성매매 여성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약사님은 약국에 찾아오는 어린 여성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고, 그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약사님의 인생에 깊숙이 들어온 한 어린 성매매 여성 에 대한 이야기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17살의 어린 소녀가 피임약 복용법을 묻는 순진한 질문을 던졌을 때, 약사님은 소녀의 순수함과 현실의 괴리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소녀는 1990년대 말 청소년 핸드폰 요금 폭탄 사건으로 인해 300만원의 요금이 나오자 엄마에게 혼날까 두려워 집을 나와 성매매 업소에 들어왔다는 슬픈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300만원만 벌면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라는 소녀의 말에 약사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소녀의 손을 잡고 이곳을 떠나라고, 이곳에서의 1년은 바깥 세상의 10년과 같다고 진심으로 조언했지만, 소녀는 결국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약사님은 성매매 집결지가 늪과 같아서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이후에도 비슷한 경험들을 통해 성매매 여성들을 돕는 일에 더욱 헌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빚을 갚아나가던 힘든 시기에도 약사님은 나눔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보여줍니다. 외국인 노동자 상담 센터를 운영하는 선배의 부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미얀마 노동자들에게 1년 반 동안 무료로 한약을 제공한 것입니다. 자신도 빚에 허덕이는 상황이었지만, "언니가 내 사정을 아는데 오죽했으면 나한테 전화를 했을까, 오죽 비빌 데가 없으면 이 거지, 내 코가 30자인 나한테 비볐을까" 라는 생각으로 선뜻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미얀마 노동자들은 다른 약국에서 거절당하고 최소 10만원을 내야 한다는 말에 좌절했지만, 약사님의 따뜻한 배려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약사님은 작은 나눔이 주는 큰 기쁨을 깨닫게 되었고, 이후 본격적으로 이웃을 돕는 사역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과 함께하는 것, 콩알 반쪽이라도 쪼개서 나누는 것이 큰 기쁨"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강조합니다.
2005년 약국 앞에서 발생한 성매매 업소 화재 사건은 약사님의 삶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화재로 인해 5명의 성매매 여성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고, 그 중 한 명은 약사님과 친분이 있던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고아였던 그녀는 남편과의 불화와 양육권 문제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 변호사와 상담 후 양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성매매 업소에 들어온 지 보름 만에 변을 당했습니다. "돈 1억을 모으겠다고 왔는데..." 라며 안타까워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약사님의 마음속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화재 현장에서 하얀 천에 덮여 작게 변해버린 시신들을 보며, 약사님은 큰 슬픔과 함께 이들을 돕지 못한 미안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약사님은 성매매 여성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사회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이후 약사님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상담 공부를 시작하며 전문적인 사회복지 활동에 나섭니다. 50이 넘은 나이에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취득하는 열정을 보여주셨는데요, "머리 터지는 줄 알았다" 고 표현할 만큼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결국 해내셨습니다. 사회복지사가 된 후에는 성매매 여성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암에 걸렸지만 수급자 혜택을 몰라 어려움을 겪는 여성에게 수급자 신청을 도와주고, 노부모를 봉양하는 여성에게 노인 장기 요양 제도를 안내하는 등, 약보다는 사회복지사 일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다 고 이야기하며, 이들을 돕는 일에서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낯선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성격 또한 사회복지사로서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약사님은 성매매 여성들이 쉽게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심층적인 분석을 제시합니다. 감금이나 강압적인 상황 때문이 아니라, "세상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 이라고 진단합니다. 스마트폰은 있지만, 세상과의 소통은 단절되어 있고, 사회 경험 부족과 낮은 학력 때문에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성매매 업소에서 생활한 여성들은 사회성이 부족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크며, 편의점 아르바이트조차 꿈꿀 수 없을 정도로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 고 안타까워합니다. 약사님은 이들을 위한 대안으로 예배, 교육, 직업 훈련을 제공하는 쉼터 공간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미용, 애견 미용, 바리스타 등 여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직업 훈련을 통해 자립 기반을 마련해주고, 자신이 "매니저 역할" 을 자처하며 이들을 세상과 연결해주고 싶다 는 소망을 밝힙니다. 과거 실제로 약사님의 도움으로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성매매 업소를 벗어난 사례를 언급하며, "늪과 같은 곳에서 아이들을 건져낼 수 있다" 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약사님은 현재 운영하는 약국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 '바하밥집' 에 매달 밥을 제공하고, 파스와 쌍화탕을 후원하며, 미혼모 가정을 정기적으로 지원하고,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들을 위한 '푸른고래 리커버리 센터' 의 이사장직을 맡아 활동하는 등, "온라인 앵벌이" 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SNS를 통해 후원 물품과 후원금을 모으는 적극적인 모습도 보여줍니다. 특히 '푸른고래 리커버리 센터' 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며, 고래가 아픈 새끼나 친구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에 감동받아 센터 이름을 '푸른고래' 로 지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고래처럼 서로를 지탱하고 일으켜주는 공동체" 를 꿈꾸며,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들이 사회에 건강하게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약사님은 앞으로의 소망과 굳건한 신앙심을 드러냅니다. 70세가 되기 전까지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하고, 그들을 돕는 일에 더욱 헌신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힙니다. "나는 죽었다, 십자가에 나를 걸었다" 라는 고백처럼, 자신의 삶은 이미 십자가에 죽었고, 주님의 보혈로 다시 태어났으며, "내 안에 내가 아니라 주님이 살고 계신다" 는 강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주님이 가라고 명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우리 모두는 결국 죽는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는 삶의 유한함을 강조하며,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고 싶다" 는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힘든 시기마다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찬송 '선한 능력으로' 를 언급하며, 죽음을 3일 앞두고 쓴 보네 횔퍼 목사의 가사 에 담긴 깊은 의미를 되새깁니다. 자신은 보네 횔퍼 목사처럼 위대한 사람은 아니지만, "발꿈치의 때만큼이라도 따라가고 싶다" 며 겸손하지만 굳건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지금까지 겪었던 고난과 역경은 모두 "나를 사랑하사 이 땅에 보내주셨고, 빚으로 훈련시키셨다" 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으며, 앞으로도 "아이들과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 는 간절한 소망을 밝힙니다. 마지막으로 약사님은 방송 말미에 택시비를 요구했던 이유에 대한 질문에 솔직하게 답변하며, 약사로서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현실 과 선교사적인 사명감으로 약국을 운영하고 있음 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자신을 약사가 아닌 "선교사" 로 봐달라는 겸손한 부탁과 함께, 교회가 사회의 어두운 곳, 소외된 이웃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감동적인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