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 박사 최윤식의 실패와 성공 스토리, 고난에서 배운 교훈
미래학 박사의 아이러니: 예측은 신, 현실은 꽝! 롤러코스터 인생 고백
미래를 알면서도 실패를 경험한 사람? 바로 저, 최윤식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래학 박사 최윤식입니다. 오늘, 제가 겪었던 파란만장한 실패와 고난,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흔히 미래학자라고 하면 미래를 꿰뚫어 보고 성공만을 예측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면서도, 정작 제 삶에서는 끊임없는 실패와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마치 남의 집 방향은 잘 알려주지만, 정작 제 집은 길을 잃은 것과 같았죠. 많은 분들이 미래학자를 예언가나 점쟁이처럼 생각하지만, 미래학은 결코 점술이 아닙니다. 미래학은 인간의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학문입니다. 인간은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론들이 발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약 50~60년 전부터 엘빈 토플러와 같은 1세대 미래학자들이 모여 미래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정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미래학자는 미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제 자신의 삶에서는 수많은 실패를 겪었습니다. 기업들의 미래는 그럴듯하게 예측했지만, 정작 제 자신의 미래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죠. 사실, 저는 제 실패와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매우 꺼려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주로 국가 미래 전략이나 기업의 위기 대응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가 실패를 했다는 사실이 때로는 창피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 아내는 종종 저에게 "당신은 미래는 잘 보는데, 현실은 영 꽝이야"라며 농담 섞인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제 실패와 고난의 원인이 제 개인적인 역량 부족이나 잘못된 전략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외부 변수들이 제 사업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물론, 위기 속에서 오히려 성장하는 사업도 있지만, 제 사업의 속성은 안타깝게도 외부 위기에 취약한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번의 큰 위기를 겪으며 사업적으로 큰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사업적인 실패 외에도, 저는 목회자로서의 고난도 경험했습니다. 저는 목회자의 길을 걷다가 미래학자의 길로 방향을 전환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목회자입니다. 제 아버지의 꿈은 아들인 저와 제 동생을 목회자로 키우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저는 신학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미래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순전히 저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미래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처음부터 미래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미래학 공부를 마친 후에도 저는 다시 목회자의 길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의 연이은 실패를 통해 저를 미래학자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저를 목회자보다는 미래학자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사회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는 반면, 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셈입니다.
제 첫 번째 고난은 목회 사역 중에 찾아왔습니다. 저는 사랑의 교회에서 3년간 사역하면서 교육 분야에서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책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유년 주일학교 교육 분야에서 꽤 유명한 교육자였고, 교단 내에서도 교육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갑자기 유학을 떠나야겠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저를 말렸지만, 저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LA에 있는 풀러 신학교로 유학을 가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의 친구 목사님께서 저희 집에 방문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저에게 휴스턴으로 와서 목회를 할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휴스턴에는 신학교도 없었지만, 그 목사님은 3년 후에 은퇴할 예정이니 저에게 후임 목사 자리를 맡기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미국 유학을 통해 미국에서 정착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덜컥 휴스턴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2만 권에 달하는 책들을 챙겨 휴스턴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저는 완전히 이민을 결심했던 것이죠. 하지만 휴스턴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약속과는 달리, 6개월이 지나도록 후임 목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아,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개월 동안 이민 목회를 경험하면서, 저는 이민 목회가 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민 목회는 이민자들의 고충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주는 헌신적인 사역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민자들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짊어질 만큼 그릇이 크지 못했습니다. 저는 6개월 만에 교인들에게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저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문제는 제가 한국으로 호기롭게 돌아갈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랑의 교회에서 잘나가는 교육자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유학을 선택하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미국에서 후임 목사 자리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는 저는, 어떻게 보면 실패자나 다름없었습니다. 저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뭔가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교육학 공부였습니다. 저는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니,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휴스턴에는 휴스턴 대학교와 라이스 대학교가 있었는데, 저는 이 두 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기적처럼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휴스턴 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 과정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만난 한 분이 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그분은 저와 5분 정도 짧게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짧은 만남이 제 미래를 결정지었습니다. 그분은 스쳐 지나가듯이 "휴스턴 대학교에 미래학 과정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교육학을 공부하려고 했지만, 그분의 한마디에 미래학에 꽂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우연한 계기로 미래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첫 번째 목회 실패가 없었다면 저는 미래학을 공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저를 미래학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첫 번째 실패를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미래학 전공으로 진로를 바꾼 것이 실패라고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가 계획했던 모든 것이 틀어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목회자로 정착하려 했지만,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저의 첫 번째 실패였습니다. 하지만 이 실패는, 오히려 저를 미래학자의 길로 인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실패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 미래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겪었습니다. 미국에서 미래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때까지도 저는 미래학자로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목회자의 길을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분당에 있는 한 교회에서 목회 비서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목회 비서로 일하면서 저는 목사님의 설교 준비를 돕고, 책 출판 관련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일반적인 부교역자 사역보다는 비교적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중국 선교사님을 소개받았습니다. 선교사님은 저에게 중국 비즈니스를 제안하는 한 사업가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사업가는 화려한 언변과 인맥을 자랑하며, 자신을 중국 총리 비서실장 출신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중국 비즈니스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고, 많은 사람들이 중국 시장 진출을 꿈꿨습니다. 그 사업가는 저에게 중국에서 교육 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비전 코칭과 미래학을 접목한 교육 콘텐츠 개발에 관심이 있었고, 중국 시장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영재 교육 전문가를 CEO로 영입하고, 친구들과 함께 투자하여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저는 비전 코칭과 미래학 콘텐츠 제작을 담당하고, CEO는 사업 운영을 맡기로 했습니다. 회사를 설립한 후, 중국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중국에서도 한국의 교육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높았고,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습니다.
저는 주변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투자를 제안했고,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중국 사업에 투자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저희가 투자한 회사는, 사실상 사기 집단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들은 최고급 호텔과 식사를 제공하며 저희를 현혹했지만, 실상은 저희 투자금을 빼돌리기 위한 계획적인 사기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저희 투자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사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추가 투자를 거부하자, 그들은 저희 아이템만 빼앗아 독자적으로 사업을 진행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제가 경제적으로 겪은 첫 번째, 그리고 가장 뼈아픈 실패였습니다. 저는 젊은 나이에 큰 빚을 지게 되었고, 2년 동안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당시 막 쌍둥이 막내들이 태어났는데, 2년 동안 제대로 생활비를 벌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결혼반지까지 팔아 분유를 사야 할 정도로 생활은 어려웠습니다. 저는 가장으로서 빚을 갚고 가정을 지켜야 했기에, 무슨 일이든 해야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미래학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미래학을 통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미래 전망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였기에, 미래학 강연은 의외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저는 무료 강연부터 시작하여, 점차 유료 강연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빚을 갚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미래학 강연은, 점차 제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두 번째 실패는 저를 미래학 강사의 길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약 중국 사업 사기를 당하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저를 미래학 강사로 사용하시기 위해 두 번째 실패를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두 번의 실패를 딛고 일어선 저는, 미래 연구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미래학 연구와 강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미래 연구소는 처음에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점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한국 사회는 신종플루와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사회 구조와 경제 시스템에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국제 질서 또한 급변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폭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미래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막연한 예언보다는, 체계적인 미래 예측과 분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제가 미래 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시기적절했습니다. 저의 미래 예측 시나리오는 국가 기관과 기업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미래 연구소를 통해 국가 미래 전략과 기업 경영 컨설팅을 제공하면서, 점차 미래학 전문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실패를 통해 시작했지만, 미래 연구소는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미래 연구소는 꽤 성공적으로 운영되었고, 저는 미래학 전문가로서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래 예측 관련 책을 출간하기 시작했고, 첫 번째 책부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2030년, 부의 미래지도라는 책은 일본과 중국에서도 번역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아마존 재팬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첫 책의 성공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책도 연이어 히트를 치면서 저는 명실상부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책은 국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웬만한 오피니언 리더들은 모두 제 책을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제 책은 10만 부 이상 판매되었는데, 경제경영서 분야에서는 이례적인 기록이었습니다. 저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마치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된 것과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방송 출연 요청이 쇄도했고, 신문과 잡지에서는 저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언론은 제가 엘빈 토플러와 같은 세계적인 미래학자 반열에 올랐다고 극찬했습니다. 강연과 인세 수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강연과 인세 수입만으로 연간 8억 원 이상을 벌어들일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기업 강연 요청도 쏟아졌습니다. 저는 주로 기업 임원, 사장단, 회장님들을 대상으로 강연과 자문을 했습니다. 회장님들은 미래 전략 수립을 위해 저를 찾았고, 저는 3~4시간 동안 강연과 인사이트를 제공했습니다. 회장님들은 제 강연을 듣고 수백억, 수천억 원 규모의 투자를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VIP 강연의 경우, 저는 한 번에 수천만 원의 강연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승승장구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미래 연구소에도,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미래 연구소를 무리하게 확장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미래 연구소가 잘나가자, 저는 연구 인력을 늘리고 사무실을 확장했습니다. 한때 연구원 수가 30명에 달했고, 민간 미래 연구소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강남의 최고급 빌딩에 100평 규모의 사무실을 얻었는데, 연간 임대료만 2억 원에 달했습니다. 무리한 확장은 결국 재정적인 부담으로 이어졌고, 연구소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연구소는 다시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저를 무너뜨린 것은 세 번째 경제적 위기, 바로 코로나19 팬데믹이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모든 것을 멈춰 세웠습니다. 제가 심혈을 기울여 설립하고 확장했던 미래 연구소는,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한국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비대면 사회로 급격하게 전환되었지만, 제 강연은 비대면 방식으로는 진행하기 어려웠습니다. 제 강연은 주로 기업 임원, 사장단, 회장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맞춤형 강연이었는데, 이들은 비대면 강연을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줌이나 화상 회의 시스템을 이용한 비대면 강연은, 소통의 제약이 많고 집중도가 떨어졌습니다. 특히 제가 제공하는 컨설팅, 코칭, 자문 서비스는 쌍방향 소통이 필수적이었기에, 비대면 방식으로는 효과를 보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제 강연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거의 전면 취소되었습니다. 저는 한때 강연 수입만으로 연간 8억 원 이상을 벌었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수입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습니다. 문제는 연구소 운영에 필요한 고정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연구원 인건비, 사무실 임대료 등 매달 막대한 고정비용이 지출되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해서, 직원들을 한꺼번에 해고하거나 사무실을 당장 뺄 수도 없었습니다. 연구소 규모를 축소하려고 노력했지만, 고정비용 부담은 여전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지만 임대료는 꼬박꼬박 지출되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약 15억에서 20억 원에 달하는 고정비용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저는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짓눌려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빚을 갚기 위해 장모님 집까지 담보로 대출을 받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고, 장모님 집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은행은 빚 독촉을 멈추지 않았고, 사방에서 빚에 쫓기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봤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진정한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가족 회의를 열고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아빠, 우리 이제 망한 거야?" 막내아들의 질문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저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야, 아직 희망은 있어. 어떻게든 다시 일어설 거야." 저는 애써 희망적인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저는 큰 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휴학을 제안했습니다. "아빠가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열심히 해볼 테니, 너희도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일을 돕자." 아들들은 묵묵히 제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고등학생 막내아들에게도 아르바이트를 제안했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해." 가족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윗이 고난 속에서 시편을 썼던 것처럼, 저도 고난의 시간 동안 시편을 묵상하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시편 속 다윗의 고백은, 때로는 저에게 위로보다는 절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윗의 절규는, 제 마음속 외침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나를 버리신 것일까? 어제까지 나를 도우셨는데, 이제는 나를 외면하시는 것일까?' 저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괴로워했습니다.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심하게 흔들렸지만, 저는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대로 비행기가 추락했으면 좋겠다'는 위험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보험금이라도 받아서, 아이들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극심한 절망감 속에서 죽음을 갈망했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 절망과 고통, 막막한 현실, 저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가족들을 생각하며, 다시 힘을 내기로 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엔데믹 시대가 되면서 기업 강연 시장이 다시 열리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로 기업들은 다시 긴축 경영에 들어갔고, 강연 시장은 다시 얼어붙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몇 주 안에 진행될 예정이었던 1억 원 규모의 강연이 갑자기 취소되었습니다. 그 강연이 취소되면서, 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저는 절망감에 휩싸여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남은 강연마저 취소될까봐, 강연 담당자들에게 비굴하게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남은 끈마저 끊어버리셨습니다. 저는 야곱이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했던 것처럼,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꼼꼼한 성격이고, 머리도 좋은 편이라 나름대로 100세, 120세까지의 재정 계획까지 세워놓고 살았습니다. 10년 단위, 1년 단위, 월 단위로 수입과 지출을 꼼꼼하게 계산하고 시뮬레이션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계산해도, 현실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계산과 노력을 다 해봤지만,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지할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목회자로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유창한 기도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멋있는 기도, 감동적인 기도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울부짖으며 살려달라는 절규만 쏟아져 나왔습니다. 강연 취소 통보를 받고 절망에 빠져있던 어느 새벽, 저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께서 제게 한마디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그 말씀은, 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그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저는 비로소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시면서, 제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네 계산은 이제 다 끝났느냐?" 칠흑 같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께서 제게 던지신 첫 번째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야곱의 이야기를 묵상했습니다. 형 에서가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철저하게 계산하고 대비했습니다. 재산을 세 떼로 나누고, 종들을 먼저 보내고, 마지막으로 자신과 가족들이 남았습니다. 야곱은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야곱은 모든 계획을 실행하고,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았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셔서 씨름을 거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씨름을 거신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져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처음 나타나셨던 그 순간, 저는 야곱과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주 목사야, 네 계산은 이제 다 끝났느냐? 이제 더 이상 계산할 것이 없지? 계산해도 안 되지?" 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지만, 그 침묵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삶 속에서 어떻게 고난을 복으로 바꾸시고, 고난 가운데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지 보여주셨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난의 시간 동안 저는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하나님께서는 침묵 속에서도 함께 고난을 겪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을 들었지만, 나는 그때도 일하고 있었다." 저는 교회 집회나 목사님들 앞에서 간증할 때,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고난이 오면, 포기하지 말고 버티십시오. 버티면 됩니다." 예레미야 애가에도 "여호와는 자기에게 소망을 두는 자들에게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난이 와도 버텨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세상적인 방법으로 버텨서 이겨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버텨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모든 것을 내려놓도록,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제가 그토록 설교했던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메시지는, 고난을 통해 비로소 제 삶의 실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수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설교했지만, 정작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저는 비로소 하나님만을 붙드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대면한 후에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저도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 속에서도 일하고 계셨고, 제가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역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고난 이후, 하나님께서는 제게 놀라운 회복과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에 완벽한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 평안은 세상적인 평안과는 차원이 다른, 근원적인 평안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평화와 전쟁이 번갈아 나타났지만, 그 뒤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전쟁이 찾아오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완전한 평화가 임했습니다. 저는 제 삶 속에서 예루살렘의 원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계산은 이제 다 끝났느냐?"라고 질문하신 후, 제 마음속 모든 갈등과 불안이 사라지고, 완벽한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미래학자로서 고난을 이야기하는 책을 쓰면서, 저는 앞으로도 고난이 또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며, 누구도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고난을 통해 얻은 경험과 깨달음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고난의 순간은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고통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 눈물, 고통, 그리고 섬세한 음성들을 기록해두면, 훗날 또다시 고난이 찾아왔을 때, 이 기록을 통해 힘을 얻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수많은 책을 썼지만, 정작 제가 반복해서 읽는 책은 바로 이 책입니다. 고난을 통해 경험했던 하나님을 다시 느끼고, 그 힘으로 고난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책을 자녀들에게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고난의 시간 동안 가족 모두가 함께 고통을 나누고, 함께 위기를 극복해나갔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고난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큰 고난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이 책을 읽으면, 아빠가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위기를 극복했는지 깨닫고, 자신들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원고를 완성한 후, 가장 먼저 아내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내는 원고를 읽고 감동적인 편지를 보내주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문구는 "내 마음의 전쟁이 드디어 끝났어요"였습니다. 아내 또한 고난의 시간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입니다. 저는 70권이 넘는 책을 썼지만, 아내는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원고는 다섯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단숨에 읽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저희 가정에 찾아온 첫 번째 하나님의 은혜, 완벽한 평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고난을 주신 이유는, 궁극적으로 제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안, 형통, 물질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제게 되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새로운 사역이었습니다. 저는 미래학자로서 한국 교회와 국가, 민족을 위해 기도해왔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시대 경제 문제로 고통받는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미래학적인 통찰력과 성경적인 지혜를 결합하여 새로운 희망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한국 사회는 점점 세속화되고, 젊은 세대는 하나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는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까요? 저는 남은 인생 동안, 한국 교회의 두 번째 부흥과 성도들의 영적 회복을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마지막 은혜이자, 새로운 사역의 비전입니다. 저는 고난을 통해 얻은 경험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앞으로 더 많은 사역에 헌신할 것입니다.
오늘, 제 이야기를 통해 고난 속에 있는 많은 분들이 위로와 용기를 얻으셨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