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 꿈꾸던 소년, 다니엘 조 목사의 회심과 영혼 구원 이야기
마피아 꿈꾸던 소년, 살인병기에서 영혼 구원자로: 다니엘 조 목사의 드라마틱 인생
[수어통역] 🎩마피아를 꿈꾸던 어린 소년이 하나님을 만나고...ㅣ다니엘 조 목사ㅣ고경희 수어통역사ㅣ새롭게하소서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의 주영훈입니다. 안녕하세요, 연예입니다. 안녕하세요, 정복입니다. 우리가 액션 영화를 볼 때, 그 영화 속 주인공이 1대 수십 명으로 악당들을 제압하는 장면을 종종 보게 되는데요, 오늘 저희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바로 그런 분이라고 합니다. 네, 맞습니다. 제가 이분 이야기를 살짝 봤는데요, 영화 한 편이 아니라 영화 몇 편을 모아놓은 것 같은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사셨더라고요. 고통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나중에 시간이 다 지나고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재료가 된다고 고백하신 분입니다. 바로 다니엘 조 목사님을 모셔보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아, 우리 목사님은 다른 목사님들과 다르게 제복을 입고 나오셨어요. 그 미국 미군 제복이죠? 예, 맞습니다. 미군으로 이제 은퇴를 했거나 미군으로 복무한 사람은 공식 석상에서는 이렇게 제복을 입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굉장히 여러 가지 훈장을 많이 받으셨네요. 미군들은 서로 군복만 봐도 그 사람의 군대 생활과 전쟁 경험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 훈장 하나가 6개월의 전쟁 경험을 의미하는데, 지금 목사님 군복에는 4개가 있으니 2년 동안 전쟁 지역에서 복무하셨다는 것이죠. 훈장은 대충 알겠는데, 저 선들은 그냥 디자인인 줄 알았어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게 훈장입니다. 군 생활을 30년 이상 하신 분들은 훈장이 정말 많아서 군복을 가득 채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병장 전역하신 줄 알았는데, 훈장이 4개나 되시는군요. 옛날 한국 군대 기준으로 병장 계급장이 거의 똑같아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군복이 아주 컬러풀하고 화려하네요. 감사합니다. 우리 목사님, 지금 웃으시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이 좋으십니다. 그런데 목사님 별명이 '살인 병기'였다고요? 예.
아니,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 '아저씨' 같은 영화를 보면 특수 훈련을 받은 주인공이 살인 병기처럼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잖아요. 리암 니슨 같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그런 역할 말이죠. 그런데 목사님이 그런 별명을 가지셨다니 놀랍습니다. 제가 최고로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친구'라는 영화이고, 그다음으로 '아저씨'라는 영화인데요, 이런 영화들을 볼 때 저에게 굉장히 친근감과 동질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따가 말씀드리겠지만, 특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 몸이 얼마나 살인 병기가 되었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공격하거나 위협을 가할 때, 자기도 모르게 급소를 때리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죠.
옛날 해병대 시절에 후배 한 명이 있었는데, 둘이 싸우길래 싸우지 말고 해병대끼리 잘 지내라고 타이르다가, 그 후배가 나이는 어린데 기수는 높아서 말을 잘 안 듣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해병대는 기수가 중요하고, 나이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훈계했더니, 여전히 말을 안 듣는 것 같아서 돌려차기를 했습니다. 그때가 밤 7시쯤 어두울 때였는데, 갑자기 후배 눈에서 눈물이 아니라 피가 쏟아지는 거예요. 저는 또 사람 하나 실명시켰구나 싶어서 너무 놀랐는데, 다행히 눈 위쪽이 조금 찢어진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그 후배에게 사과를 했죠. 싸움이 그렇게 큰 사고로 이어지다니, 정말 끔찍하네요.
맞습니다. 영화에서는 툭 쓰러지는 장면을 보면서 '좀 오버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특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급소를 정확하게 가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중에 교도소 사역을 할 때, 재소자들이 왜 목사님을 함부로 못 건드리냐고 물어봤더니, 제가 특수 훈련을 받아서 몸이 살인 병기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건드리면 자기도 모르게 급소를 때릴 수 있다는 소문이 교도소 내에 쫙 퍼져서, "저 목사님은 건드리면 곧장 천국이나 지옥으로 갈 수 있다, 건드리지 마라"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북파 공작원 훈련이 제 삶 속에서 평생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큰 힘이 되고 도움이 되었습니다. 도움이 된다고요? 정말 놀랍네요.
네, 정말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지금은 교도소 밖에서 교도소 안을 전도하고 계시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안에 영원히 갇혀서 전도를 받을 뻔했습니다. 예, 맞습니다. 하나님이 밖에 계시게 하셨네요. 안에 계실 뻔한 분을... 아무튼, 거의 김성모 만화 주인공 같아요. 예. 오늘 정말 이 '살인 병기'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격렬하게 살아오신 목사님이 어떻게 목회자로, 하나님께서 세우셨는지 그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목사님 인터뷰를 보니까 어린 시절 꿈이 마피아였다고 하시던데요? 정말 특이한 꿈을 가지셨네요. 맞습니다.
남다르죠. 우리 보통 꿈은 대통령, 장관, 법조인 뭐 이런 건데 어떻게 마피아를 꿈꾸셨어요? 제가 그때, 40년도 더 된 옛날인데요, 그때 당시 한국 사회가 여러 가지로 살기 어려웠고 힘들었습니다. 영화를 볼 때마다 두 가지 그룹이 눈에 들어왔어요. 조폭 그룹과 마피아 그룹이었죠. 조폭은 좀 약해 보였고, 마피아 영화, 주로 외국 영화에 나오는 마피아들은 삶이 너무 멋있어 보였습니다. 제가 볼 때 마피아는 권선징악을 실현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경찰도 함부로 못 건드리고, 좋은 차는 다 몰고 다니고, 돈도 많고 권력도 있고... 와, 정말 멋있어 보였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세상을 보니, 고등학교 2학년 때 완전히 거꾸로 된 세상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바보 같고, 양심이라는 것이 소용없이 힘없이 당하기만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그걸 보면서 '아, 나는 마피아가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어렴풋이 예수님이 33살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누가 나를 잡기 전에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잡히기 전에 죽기 전에 한번 다 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처럼 33살에 딱 끝내는 것이 너무 멋있는 인생 같다고 느꼈어요.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래서 저는 꿈을 확고하게 정했습니다. 누가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이미 정해졌다고 대답했죠. 친구를 사귈 때도 "너 사람 때릴 수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라고 물어보고, "할 수 있다"고 하면 친구가 되고, "할 수 없다"고 하면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꿈이 아주 분명했던 것 같아요. 그런 영화를 보면서... 지금도 사실 액션 영화를 엄청 좋아합니다. 리암 니슨 같은 배우 좋아하시겠네요.
예, 아주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좀 세셨어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었어요. 해병대 군대 훈련을 받으면서 훈련을 시키니까 몸이 자연스럽게 바뀌었습니다. 예, 훈련을 통해서 강해지셨군요. 예, 자연스럽게 몸이 바뀌어서, 지금도 조심하려고 노력합니다. 저희도 조심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조심하고 있어요. 아니, 마피아가 꿈이셨다고요? 마피아 지망생이셨네요. 예. 꿈을 이루기 위해서 뭔가 노력하신 게 있나요? 학교 다닐 때 노력을 해야 하잖아요. 제가 중학교 때 성수중학교를 졸업했는데, 3년 동안 너무 재미있게 놀다 보니 고등학교에 들어갈 실력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벼락치기로 공부해서 간신히 들어간 학교가 서울 강원전자공고 야간이었습니다. 2.3대 1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죠. 그때부터 제가... 그때 당시 클럽이 두 가지가 있었어요. 학교에서 정해준 정식 클럽과 학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우리끼리 만든 클럽, 음성 클럽이 있었죠.
우리는 '우정파'라는 음성 클럽을 만들어서 활동했고, 다른 친구들은 '흙탕물파'라는 클럽도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름이 참 착하네요. 그래서 우리는 이름도 좀 멋있게 '우정파'라고 지었습니다. 한번은 노상 유기, 무기 뭐 이런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맨날 교무실 앞에서 손들고 벌서고, 화장실 청소하고 그랬습니다. 정말 누구 말대로 껌 좀 씹고 침 좀 뱉으면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다가 졸업을 했는데, 졸업 후에 선배들도 찾아오고 그랬습니다. 미아삼거리, 그 미아삼거리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사건이 벌어졌어요. 어, 예. 졸업을 너무 기뻐서 친구들과 지나가는데, 설악벌,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기 같이 졸업했는지 지나가다가 어깨를 툭 치면서 시비가 붙었습니다. 어깨를 안 부딪쳐도 되는데 일부러 부딪치더라고요. 그래서 졸지에 거기서 패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당시 미아삼거리가, 제가 기억하기에 거의 5차선 도로였던 것 같은데, 굉장히 큰 도로에서 완전히 영화를 찍는 듯한 패싸움이 벌어졌어요. 양쪽에서, 미아삼거리 양쪽 사방에서 차와 버스들이 꼼짝 못 하고 멈춰 서고, 우리끼리 그 안에서 막 싸우고 있으니 아무도 접근을 못 하고, 간판, 술병, 책상, 있는 것 없는 것 다 부수고 던지고 난리가 났었죠. 그런데 왜, 어깨 부딪친 것,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싸우신 거예요? 네, 그렇죠. 그때 당시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다른 학교 학생들이고, 졸업할 때쯤 되면 다들 흥분해서 사소한 일에도 싸움이 붙곤 했습니다. 그래서 다 잡혀갔나요? 아, 잡혀간 건 우리 선배들이고, 우리는 튀었죠. 우리는 재빨리 도망쳤습니다. 그러면 어디, 약속 장소 같은 게 있었나요? 항상 만나는 장소가 있었어요.
그곳에 가서 만나서 상황을 파악했죠. 연일점이라고,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그 당시 무슨 공고라고 하면 싸움을 잘하는 학교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야간 공고는 주간보다 10배는 더 세다고 소문이 났어요. 주간에 못 간 친구들이 야간에 몰려들어서 더 과격하고 싸움도 잘하고 그랬죠. 제가 전자과였기 때문에, 전자과 친구들은 드라이버, 펜치, 망치, 니퍼 같은 공구를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유사시에 그냥 자동으로 공구를 사용하게 되는 거죠. 그냥, 야... 그런데 제가 볼 때, 어릴 때부터 꿈이 마피아였다는 것은, 뭔가 싸움을 좋아하고, 가정 환경에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어린 시절은 어떠셨어요? 저희 부모님은 4남 5녀, 9남매를 두셨고, 제가 남자 막내였습니다. 위로 세 분 형님이 계시고, 여동생이 하나 있었죠. 둘째 형님이 좀 험악한 삶을 사셨어요. 예. 저희가 동자동에 살았는데, 꽤 괜찮은 집에 살았습니다.
아버님이 만주에서 태어나시고, 어머니를 신의주에서 만나 북한에서 살다가 6.25 전쟁 때 남한으로 오신 분들이셨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배운 것이 없어서 6.25 전쟁 때 운전병으로 참전하셨고, 전쟁 후 경기여객 버스 회사에 들어가 처음에는 운전기사를 하다가, 나중에는 버스 한 대, 두 대 사서 버스 회사를 운영하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형님이 버스 운전 면허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버스를 몰고 나간 거예요. 승객을 태운 상태에서. 그래서 어딘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사고가 나서 차가 불타고 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집안에 있던 재산을 모두 털어 사고 피해자들에게 보상해야 했죠. 변호사 비용까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손해를 봤을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갑자기 집을 팔고, 지금은 없어졌는데 3일아파트라고 5층짜리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습니다. 방이 정말 작았어요. 여기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였죠.
큰 형님이 결혼해서 방 한 칸을 쓰고, 나머지 가족들은 어머니, 아버지, 저, 이렇게 좁은 방에서 함께 잤습니다. 잘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죠. 화장실 가는 게 제일 큰 문제였어요. 새벽에 화장실 가려면 자는 가족들을 다 밟고 지나가야 했습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니까 머리 밟고, 배 밟고, 자다가 발에 얼굴을 밟히기도 하고, 그런 기억이 많습니다. 예. 그런 상황에서 아버님이, 형님 때문에 충격을 받으셔서 중풍에 걸리셨어요. 보험도 안 될 시기였으니 경제적으로 더욱 힘들었겠죠. 예, 맞습니다. 형님 때문에 충격을 받으셔서 중풍을 세 번이나 겪으시고, 말을 제대로 못 하시게 되었습니다. 평생 일을 하시던 아버지가 일을 못 하시게 되니,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게 되셨죠. 그런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너무 힘들게 하셨어요. 폭행도 하시고. 그래서 제가 15살 때 정말 제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예, 어머니는... 아버님이 늘 어머니를 폭행하셨어요. 제 앞에서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 발을 잡고 "제발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가 무슨 죄가 있어요"라고 애원했지만, 어린아이였으니 아버지 힘을 감당할 수 없었죠. 상대가 안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이렇게 아버지 같은 사람 만나서 이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나'라고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도 나름대로 둘째 형님 때문에 받은 상처와 아픔 때문에 힘드셨을 거예요. 그 스트레스를 가장 약한 어머니에게 푸신 거죠. 어머니는 그런 고통스러운 시간을 믿음으로 견디셨던 것 같아요. 기도하셨다고 하셨잖아요. 목사님도 그때 신앙생활을 하고 계셨어요? 네, 그때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사실 저희 아버지 쪽은 완전히 유교 집안이고, 어머니는 선교사님을 통해 증조할머님이 예수님을 믿으셨다고 해요. 증조할머니부터, 저희 어머니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제가 4대째, 제 자녀가 5대째 신앙입니다. 하지만 저는 모태 신앙이라는 말 자체가 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태 신앙이라는 것은 아기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모태 신앙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어릴 때부터 모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태 신앙의 의미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냥 엄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교회를 다녔고, 그때 당시 10원 헌금을 내면 사탕을 줬는데, 10원 내기가 아까워서 5원짜리 두 개로 바꿔서 5원은 헌금하고 5원은 사탕을 사 먹었습니다. 동생에게는 "오빠 교회 갔다 온 증거"라며 주보 두 개를 가져오라고 해서, 제 주보를 동생에게 주고 그랬죠. 예. 그러다가 어머니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저희 이모님 중에 한 분이 자궁암에 걸리셨어요. 예, 네. 그래서 저희 누님과 어머니, 이모님 세 분이 삼각산, 북한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이 낫게 해주시면 살고, 안 낫게 해주시면 죽겠다"는 각오로 올라가셨죠. 일주일 정도 산에서 기도하시는데, 식량이 필요해서 제가 식량을 가지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서 거기서 정말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이모님의 암 투병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만나신 거네요? 그렇죠. 산에 올라가서 보니, 사람들이 비닐을 뒤집어쓰고, 담요를 덮고 밤새도록 괴성을 지르며 기도하는 모습에 너무 놀랐습니다. 여러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마치 광신도 집단이나 정신병동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밤이라 위험하다고 혼자 내려갈 수 없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며칠을 산에서 지내게 되었죠. 왜 비닐을 쓰고 기도해요? 너무 추우니까요. 영화 17, 8도 되는 겨울이었으니 너무 추워서 비닐이라도 덮어야 했습니다. 며칠 지나서 키가 작은 전도사님, 지금은 목사님이신 김홍찬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전도사님이셨는데, 그분이 거기 계시더라고요. 할 일이 없어서 전도사님께 질문했습니다. "전도사님,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답변을 명쾌하게 해주시면 좋겠어요." "뭔데요?" "당신 예수님 만났어요?" 전도사님이 너무나 흔쾌하게 "당연하죠, 예수님 만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보이지도 않는 예수를 어떻게 그렇게 확신 있게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 같은 사람도 예수님 만날 수 있어요?"라고 물었더니, "너도 예수님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만날 수 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럼 이 산에서 제일 아찔한 낭떠러지가 어디예요?"라고 물었더니, "저쪽으로 조심해서 가면 낭떠러지가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낭떠러지는 한 사람이 겨우 서서 기도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이었고, 발을 헛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일부러 저를 그곳으로 인도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면 오늘 나를 만나주실 것이고, 살아계시지 않다면 여기서 뛰어내려 인생을 끝내겠다는 마음으로 낭떠러지로 갔습니다. 낭떠러지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주기도문을 외웠는데, 아무런 감동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떨어져 죽는 것이 내 팔자인가'라고 생각하며 회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회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손톱만 한 작은 영화 필름 같은 화면에, 어릴 때 아기 때 기억도 못 했던 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거예요. 지금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는 죄들이 쫙 펼쳐졌습니다. 그때 정말 주님 앞에 처음으로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회개를 마치자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눈을 털어내는 모습이 마치 산천초목이 저의 구원을 축하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생생한 경험이었어요. 그날 예수님을 만나고 산에서 내려온 날부터 거리의 소년 전도자가 되어 예수님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 이후로 세상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보였네요. 그렇죠. 예. 완전히... 저는 졸업하자마자 조폭에 들어가 경력을 쌓고, 내 사람을 만들어서 마피아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 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죠. 전도도 많이 하셨겠어요? 기쁜 마음으로 전도하셨겠네요.
예, 전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전도를 어떻게 했냐면, 버스를 타면... 저희 집이 신설동이었는데, 황학동 이마트... 아니, 제가 전도를 시작하면 계속 이야기를 들어야 해서 무서워서 못 하겠어요. 저는 내려야 하는데 계속... 아, 듣고 가세요, 끝까지. 종점까지 가는 거예요. 그 사람을 위해서. 아, 목사님이 끝까지... 예, 제가 가는 거죠. 아, 예. 저는 이미 내릴 정류장을 지났는데, 제 마음속에는 '예수님, 제발 이 사람과 대화가 여기서 끝나면 제가 내리겠습니다'라고 기도하지만, 서론만 겨우 시작했는데 어떻게 본론도 없이 내릴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내릴 때까지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너무 많은 날 종점까지 가버렸죠. 막차 타고 집에 오고... 버스에 탄 사람들 반응이 궁금하네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여자분이 옆에 앉아 계시면 전도를 시작하는데, 갑자기 "왜 남자가 나한테 말 걸지?"라고 오해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 말을 거는 것이 아니고, 제가 만난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당신도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라고요. 그렇게 전도를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전도가 많이 됐어요? 예, 버스에서 전도가 많이 됐습니다. 사람이 많을 때는 버스 중간에 서서 연설하듯이 전도했고,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외치면, 버스 안내양이나 기사님이 "여기는 전도하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말려도 "잠깐이면 됩니다"라고 말하고 계속 전도했습니다. 좌석 버스에서는 옆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람들이 혹시 '도를 아십니까'처럼 도망가거나, '나한테 관심 있나' 오해하지 않았나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아니, 그럼 마피아의 꿈은 어떻게 된 거예요? 포기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 꿈이 너무 허황되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꿈을 포기하고 나서, '그럼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뭘 하면서 살아야 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삼총사, 친한 친구 셋이서 하늘산기도원에 가서 3일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기도하면서 마지막 새벽 기도 시간에 주님께서 저에게 너무나 분명한 사명을 주셔서, 고등학교 졸업 후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니, 기도원에서 어떠셨어요? 기도원에서 하신 기도 제목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주님, 저를 구원해주셨는데, 제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서 뭘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분명하게 말씀해주십시오." 마지막 새벽 기도 시간에, 정말 머리가 쭈뼛 서면서 뱀들이 주변을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처음 겪는 경험이었죠. 그런 불안감을 참고 기도하니, 마지막 순간에 처음으로 주님께서 제 마음속에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주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거의 즉각적으로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네가 말한 것이 맞다"라고 하시면서 "내 앞에 올 때까지 복음을 증거하다가 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께 두 가지를 답변해주시면 이 길을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뭐냐?"라고 물으셔서, 제가 "주님, 제가 주의 종, 목사가 되겠다고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이 길을 끝까지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시면 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주님께서 "끝까지 책임지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어릴 적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들으면서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이 너무 길게 느껴졌는데, 기도 응답이 너무 질질 끌리면 저는 못 참겠다. 제깍제깍 응답해주실 수 있느냐"라고 여쭤봤더니, 주님께서 "기도 응답은 내가 결정해서 주는 것이니, 너는 무조건 내게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신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예. 야, 그런데 목사님, 저는 제일 궁금한 게, 이렇게 같이 마피아 꿈을 키웠던 친구들 있잖아요. 그분들은 나중에 나이 들고 어떻게 되셨나요? 후에 마피아가 되신 분 있어요?
마피아가 되신 분은 없어요. 교도소 생활을 하시나요, 교도소 밖에 계시나요? 아니요, 우리 친구들은 거의 다 평범하게 전자과를 나왔기 때문에 전자 계통 일을 하거나,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릴 때만 잠깐 그랬고, 그 이후로 감옥에 간 친구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군요. 아, 꿈을 이룬 친구가 없네요. 그런데 굉장히 어린 나이에 하나님을 만나셔서 목회자의 길을 결심하셨는데, 어떻게 북파 공작원 훈련은 어떻게 받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신학교 2학년에 들어가서, 검정고시나 수능을 보고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울 야간 신학교를 다니면서 2학년을 마치니 군대 영장이 나왔습니다. 예, 예. 육군 군복을 보니 너무 형편없어 보인다고 할까, 너무 약해 보인다고 할까... 그런데 어느 날 해병대 군인이 정복을 입고 세무워커를 신고 버스를 탔는데, 링을 차고 걷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제가 속으로 박수를 치면서 '바로 저거다! 내가 갈 곳은 바로 저기밖에 없다! 저기를 가면 공부도 할 수 있고, 훈련도 받을 수 있고, 시간 낭비가 아니고 너무 좋은 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책임지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예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예수님을 시험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또 나 자신이 예수를 얼마나 믿는지' 두 가지 이유로 해병대에 지원해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 들어갔는데, 진짜 40년 가까이 되었네요. 81년도니까. 그 당시 해병대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을 초월하는 해병대였습니다. 거의 한 달에 한 명 정도는 자살하거나 맞아 죽는 것이 일상이었고, 사고로 죽는 일도 많았습니다. 우리 선배가 맨날 아침에 일어나면 "너는 오늘 죽는다. 언제 죽을래? 맞아 죽을래, 혼자 죽을래, 싸우다 죽을래?" 하면서 죽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밥을 주는데, 밥을 한 숟갈만 줘서 밥 먹고 나오면 밥을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배가 고팠습니다. 맨날 죽을 둥 살 둥 굶주림에 시달렸죠. 어느 날 중대장이 집합을 시키더니, 해병 특수 수색 훈련 지원자를 모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 가면 생명수당을 주고, 월급을 더 많이 주고, 밥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세 가지 조건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거다! 이거야!' 싶었죠. 예, 예. 특수 수색 훈련에 지원해서 갔더니, 계급장을 다 떼라고 하고, 번호판을 나눠주고 번호판을 붙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번호로 불린다"라고 하면서 작은 편지 봉투 하나와 하얀 종이를 주었습니다. "받아 적으라"고 해서 뭘 적으라는 건가 했더니, "지금부터 훈련을 받는 도중에 어떠한 일이 생겨도 이 모든 것은 내가 책임을 지고, 국가를 위해 장렬하게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서약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하고, 머리카락, 손톱, 발톱을 잘라서 봉투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죽으면 그걸 집에 보내준다는 것이었죠. 그렇게 해서 졸지에 북파 공작 대원으로 선발되어 훈련을 받게 되었고, 유사시 북한으로 침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네요.
저한테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죠. 제가 81년 1월부터 3월까지 겨울에, 정말... 북한에서 남한으로 300번 이상 침투한 사람이 와서 북한말을 가르쳐주고, 북한의 상황을 알려주고, 북한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훈련했습니다. 그분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북한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에게 북한 침투 훈련을 받는데, 정말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강도 높은 훈련을 20살 어린 나이에 받았습니다. 예전에 영화 '실미도'라는 영화가 있었잖아요. 하루... 예, 제가 '실미도' 영화를 보면서, '진짜 내가 겪었던 훈련과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의 흡사한 훈련을 했으니까요. '실미도'를 보면서 '정말 그때 힘들었던 훈련이 생생하게 떠오르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예를 들면 어떤 훈련을 받나요? 주로 훈련은 밤에 진행되었습니다. 훈련 장소까지 잠수복을 입고 보트 벨트를 타고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이동해서, 침투 훈련을 매일 했습니다.
어느 날은 담력 훈련을 한다고 했습니다. 담력 훈련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했는데, 보트 벨트를 타고 한참 이동해서 야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밤이라 어디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산에 내리니 이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서 '여기서 좀 쉬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또 산을 올라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관들은 보트 위에서 계속 압박하고 재촉하면서 "여기까지가 인간이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점이다. 여기부터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 정말 너무 힘들다' 생각하면서 한참 산길을 올라갔는데, 드디어 다 왔다고 했습니다. 여기가 어디냐면, 사람을 화장하는 화장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신이 들어가는 작은 통로 같은 곳, 사람을 넣고 태우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냄새가 너무 이상하고... 캄캄한 밤에 순번대로 화장터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화장터에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벽에 자기 번호표를 꽂아놓고 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번호표를 떼어서 교관에게 줘야 화장터에 갔다 왔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죠. 어떤 친구들은 "내 번호표도 떼어 와라"라고 부탁하기도 했지만, 저는 제 번호표 떼기도 바빴습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였지만, 겨우겨우 제 번호표를 찾아서 꽂아놓고, 화장터에서 나왔습니다. 갑자기 인생이 너무 처량하고 불쌍하고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군대 와서 이런 훈련을 받다가 화장터까지 들어가야 하다니...' 그래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화장터에 다녀온 것을 간증할 수 있다면 꼭 간증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하고 나오니, 남들보다 조금 늦었습니다. 깜깜한 화장터 안에서 갑자기 교관이 야구 방망이 같은 것으로 저를 심하게 때렸습니다. 귀신이 때리는 줄 알았어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심하게 맞았습니다. 그런 화장터에 들어가 번호표를 떼오는 훈련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예. 야, 정말 상상도 못 할 훈련을 받으셨군요. 그런데 화장터에서 기도하신 것이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 무서운 상황에서... 예, 기도 이야기만 나오면 참 좋아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의 힘이죠. 그런데 어떻게 북파 공작 교육 훈련을 받으시고, 공격적인 삶을 사셨던 분이 또 어떻게 미군 군목이 되셨어요? 네, 어떻게 또 미국으로 가셔서 군목이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머니께서 이미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미국으로 초청하신 거죠. 그래서 제가 89년도에 미국으로 갔습니다. 미국에 가기 전에 충주에 있는 충주제일기도원에 가서 3일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다음 주에 미국으로 가는데, 오늘부터 시작해서 정확히 10년 후에 저를 한국 목회가 아니라 외국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축복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 그리고 그 이전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해병대 시절 사단 교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해병대에는 군종병은 없지만, 군종병과 비슷한 군종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군종병들이 교회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너희들은 여기서 뭐 하냐?"라고 물었더니, "목사님이 주보를 주면 등사기로 밀고, 교회 전화 받고, 교회 청소하고, 목사님 심부름 하는 것이 우리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와, 너희들은 정말 꿀 보직이네! 나는 특수 수색대에서 맨날 훈련만 받는데...' 군종병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몇 개월 동안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병장으로 제대하면 저를 군종병으로 보내주세요." 그런데 주님께서 야속하게 다른 사람을 군종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주님께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아, 주님이 나를 배신하실 수 있나? 6개월 동안 간절히 기도했는데... 너무 야속하다.' 주님께 너무 서운하고 화가 났습니다. '주님, 저를 사랑하신다는 말 하지 마시고, 저를 미워한다고 열 번만 말씀해주세요. 그게 더 마음 편할 것 같아요.' 그때 주님께서 "군종병보다 더 나은 것으로 응답해줄 테니, 때를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그 말씀을 그냥 위로해주시는 말씀으로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께서 군목의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만 10년 만에 미국에 와서 신학교 졸업하고 10년 만에, 후배 목사님이 LA에서 크리스마스 시즌 행사를 준비하다가 라스베이거스로 놀러 오셨습니다. 후배 목사님이 새 차를 뽑았는데, 라스베이거스 한복판에서 차가 고장나 버린 거예요. 저에게 연락이 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형은 LA에서 뭐 하세요?"라고 물었더니, "미군 군목이 되려고 플로리다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차를 렌트해주면서 저에게 "조 목사님은 해병대 갔다 왔지, 미국에서 공부했지, 목사 안수도 받았지, 담력도 있지, 딱이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딱은 무슨 딱이야, 나는 군대는 질색이야"라고 했죠. 저는 군대라면 끔찍했습니다. 해병대에서 너무 힘들게 군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군대는 절대 안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새벽 기도 시간에, 늘 한국말로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저에게 영어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무나 분명하게 "Become a US Army Chaplain (미 육군 군목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주님은 영어로 말씀하시고, 저는 한국말로 마음속으로 대답해야 하나' 생각하면서 "주님, 저는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하는 목사입니다. 교회를 어떻게 하라고요?"라고 여쭤봤더니, "교회는 내 교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어는 어떻게 하냐?"라고 여쭤봤더니, "건강 걱정 말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어가 서툴러서 군목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성령께서 너의 입술과 함께할 것이니, 영어 걱정은 하지 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군목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계속 외국인을 군인으로 채용할 때는 영어 시험을 봐야 했는데, 제가 지원할 때만 주님의 은혜로 영어 시험이 면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 가운데 군목이 되었습니다. 아, 10년 만에 정확하게 기도 응답을 받으셨네요.
예, 제가 그렇게 군목이 되었습니다. 어, 그럼 이제 군목이 되어보니, 북파 공작원 훈련을 받으셨던 경험이 도움이 되셨나요? 아, 그럼요. 첫 목회지, 첫 군대 목회지가 신병 훈련소 부대였는데, 신병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장난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점이요? 정말... 레펠 훈련을 예로 들면, 일반 군인들은 레펠 타워에서 벽을 보고 줄을 잡고 내려오잖아요. 제가 훈련받을 때는 800m가 넘는 높은 산에서 배낭을 메고 총을 들고 앞을 보면서 뛰어내려왔습니다. 그 높은 산도 1분 안에 내려왔죠. 그런 훈련을 받은 사람이, 신병들이 레펠 훈련을 하면서 발발 떨고, 못 내려가겠다고 울먹거리는 모습을 보니... 그래서 제가 레펠 타워에 올라가서 줄을 잡고 "군목이 줄 하나 들고 설교하겠다!"라고 외치고, 뛰어내려왔습니다. "나는 너희보다 나이도 두 배나 많고, 이런 훈련도 받은 사람인데, 나도 할 수 있다면 너희도 다 할 수 있다!"라고 격려하면서 레펠 훈련을 시켰습니다.
뛰어내리면 바로 땅에 닿을 정도로 낮은 높이였기 때문에, 뛰어내려와서 "브라보!"라고 외치면 신병들이 "예스!"라고 대답하고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병 훈련소에서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또 미군들은 해병대 이야기를 너무 좋아합니다. 아, 그래요? 예. 그래서 제가 북파 공작원 훈련 이야기를 해주면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어 했습니다. 와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도하고, 세례 교육을 시켰죠. 세례 교육이라고 하지만, 사실 교회에 의자를 놓고 전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미군 역사상 아마 전무후무하게 500명 가까이 세례를 준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 실제로 그 당시에 해병대들은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뱀 잡아먹고 나뭇잎 갉아먹고 정말 야생 생활을 하시나요? 그렇죠. 그 이야기를 미군들에게 해준 거죠. 예. 막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정말 뱀 잡아먹고 그래요?"라고 물어보더라고요. "아, 그럼요!"라고 대답했죠. 우와.
그냥 뱀을 잡아가지고... 아, 저는 뱀을 잡아가지고 바로 먹으면 균이 나올 수 있어서 구워 먹어야 하는데, 어떤 친구는 뱀을 잡자마자 껍질을 벗겨서 그냥 씹어 먹더라고요. 저는 아무리 그래도 뱀은 날로 못 먹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훈련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북한에 침투했을 때 가장 빠른 시간에 땅굴을 파서 숨는 훈련이었습니다. 저는 땅굴 파는 훈련이 정말 싫었어요. 왜냐하면 땅굴에 숨는다는 것은 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와. 땅굴을 파는데, 혼자 들어갈 공간을 파야 하니 좁은 공간을 깊게 파야 했습니다. 땅을 파는 것도 힘들고, 흙이 계속 무너져 내려서 더 힘들었습니다. 또 우리가 쓰는 무기들은 땅속에 숨겨야 하고, 땅굴 안에 들어가서 며칠씩 생활해야 하니까... 그런 훈련들이 저에게는 너무 힘든 훈련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미군 병사들에게 해주니 얼마나 재미있어했겠어요. 완전히 영웅담처럼 들렸겠죠. 예, 완전히 영웅담처럼 받아들였죠.
야, 이런 전도가 어디 있어요? 북파 공작 전도대, 헬기 레펠로 전도하는 사람은 목사님밖에 없을 거예요. 예, 아니 그렇게 군목으로 미군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아프가니스탄에도 파병되셨다고요? 네, 맞습니다. 아, 제가 이라크에 1년 파병되어 다녀왔고, 2009년부터 2010년까지 하와이에서 근무할 때 두 번째 파병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다녀왔습니다. 아, 아프가니스탄은 정말 험준한 산악 지대잖아요. 예. 높은 산악 지역에서 제가 속한 부대가 수색 대대, 경호 부대였는데, 경호 부대에 있을 때 여러 가지 물자들을 각 지역에 있는 군인들에게 보급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일반 군목은 본인이 원하면 작전에 참여하기도 하고, 후방에서 기도만 하기도 하는데, 저는 군대에 온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이 우리나라를 위해 젊은 사람들을 많이 희생했으니, 나도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군들이 "목사님은 한국 사람인데 왜 미군이 되었어요?"라고 물어보면, "미국 젊은이들이 한국을 위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아느냐? 나도 빚을 갚으러 왔다. 그리고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너희가 죽으면 나도 같이 죽고, 너희가 살면 나도 같이 살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미군 군목은 비전투 요원이기 때문에 무기가 없습니다. 예, 목사님은 무기가 없으시죠? 예, 무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군인 친구들은 M4 소총, M9 권총, 칼, 수류탄 등 무장을 하고 작전에 투입되는데, 저는 무기가 하나도 없이 성경책만 들고 다녔습니다. 구약 성경, 신약 성경. 그렇죠. 그런데 친구들이 권총을 슬쩍 쥐여주면서 "혹시 모르니 주머니에 넣어두세요"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적군 스나이퍼들은 군목을 1순위 표적으로 삼습니다. 제일 먼저 공격하는 대상이 군목이에요. 왜냐하면 군목은 군인들이 싸우다가 지치고 힘들 때 정신적으로 격려하고, 계속 싸울 수 있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적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것이죠. 으, 정말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 상황이 많았겠네요. 다른 위험한 일들도 많았겠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을 것 같아요. 파병 생활 중에.
예, 우리 군사용어로 '킬링 존'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습니다. 킬링 존에 들어가면 적군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공격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동하는 도로에 폭탄을 설치해놓고, 우리가 지나갈 때 폭탄을 터뜨리는 것이죠. 제가 장갑차를 타고 킬링 존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폭탄이 터지면서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정말 '주님, 이제 제가 주님 곁으로 갈 때가 되었나' 싶었습니다.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아, 제가 그때 계급이 대위였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면 사상자 수를 빨리 보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장갑차에서 나와서 인원 점검을 했습니다. 그때 28명의 미군 병사와 2명의 아프가니스탄 통역관, 총 30명이 함께 작전에 투입되었는데, 오른쪽에 앉은 사람부터 차례대로 나오라고 했더니, 다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이쪽, 이쪽에 앉은 사람은 다 괜찮고, 반대쪽에 앉은 사람은 다치거나 죽거나... 한 명씩 나오는데 "목사님, 괜찮습니다!", "오케이!", "아, 오케이!" 하면서 28명의 미군 병사와 2명의 통역관 모두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정말 마이크 타이슨이 바로 앞에서 주먹을 수십 번 휘둘렀는데, 한 대도 맞지 않은 것 같은 기적적인 경험이었죠. 그런 특별한 경험을 그때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정말 죽다 살아난 경험을 했습니다. 정말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겠네요. 사실 군목은 후방에 있어도 되는 위치인데, 직접 위험한 현장에 가서 군인들과 함께하는 모습이 정말 대단합니다. 위험한 순간들이 많았을 텐데, 기억나는 순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아요. 아니, 뭐...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몇 시간 후에 "목사님, 아무개 중사가 전사했습니다"라는 소식을 듣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러면 전사자 장례를 준비해야 하고, 미군들이 작전에 나가서 폭탄에 의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도 매우 힘들었습니다. 군목으로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전사자가 발생했을 때 후방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사 소식을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전사 소식을 전할 때는 항상 군목과 군 관계자 두 사람이 함께 갑니다. 군 관계자가 정식으로 전사 소식을 전달하고, 군목은 옆에서 위로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정복을 입고 집으로 가면, 미국 집들은 문 옆에 유리창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가 문 앞에 서 있는 모습만 봐도 가족들이 직감합니다. 전사 소식을 듣는 순간 젊은 부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몇 시간 동안 통곡하는 모습을 보면,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순간들이 군 생활하면서 가장 힘들었습니다. 정말 마음이 무너지네요. 전사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집 문을 두드리는 순간, 가족들은 이미 남편이나 아들이 전사했다는 것을 직감하는 것이겠죠. 예, 문을 열기도 전에,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아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쉽게 이야기를 듣지만, 목사님은 그 엄청난 시간을 보내신 거잖아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큰 일을 겪으시면서 PTSD 같은 정신적인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그렇죠.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을 수 있거든요. 실제로 많은 영화에서 전쟁 후유증으로 PTSD를 겪는 군인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자가 되거나 힘든 삶을 사는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해안선'이라는 영화도 있었고, 외국 영화도 많죠. 사실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이라크에 1년 파병되었을 때는 PTSD를 잘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에 1년 파병되었다가 돌아오면서, 폭탄 공격을 받고 도망치다가 머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제가 철모를 쓰고 있었지만, 비포장도로에서 막 뛰어가다 보니 머리를 부딪히면서 뇌진탕을 입은 것 같아요. 아, 제가 돌아와서 한동안 일시적인 기억 상실증에 걸려서 매우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하와이에서 길을 걷다가 집에 가려고 했는데, 집 가는 길을 잊어버린 거예요.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집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그래서 아내에게 전화해서 "여보, 나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데, 집에 가야 하는데 길이 기억이 안 나"라고 했더니, 아내가 "당신 차에 GPS 있으니 GPS 켜고 홈으로 설정하면 안내해줄 거예요"라고 알려줘서 겨우 집에 돌아갔습니다. 비가 오는데 와이퍼 켜는 방법도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와이퍼 버튼이 이쪽에 있는지, 저쪽에 있는지... 그런 적도 있었습니다.
일상생활조차도 힘들 정도로 기억력이 감퇴했었군요. 그런데 저는 PTSD는 저에게는 안 생길 줄 알았어요. PTSD, 전쟁 후 스트레스 장애 말이죠. 그런데 저에게도 PTSD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세 가지 증상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생존자 죄책감'이었습니다. '왜 나는 살아남았을까? 왜 같이 작전에 투입되었던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데, 나는 살아 돌아왔을까? 왜 그 사람은 젊은 나이에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죽었는데, 나는 살아남았을까?' 하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계속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두 번째는 항상 죽음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 오늘 죽을 수도 있고, 내일 죽을 수도 있고, 몇 시간 후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히면서 돈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돈을 물 쓰듯이 썼습니다. 나가서 500달러, 1000달러, 심지어 몇 천 달러씩 돈을 쓰고 오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이해를 못 하더라고요. '사람이 왜 이렇게 변했지?' 나중에 보훈처에 가서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받았는데, 의사가 "남편분이 PTSD 때문에 정신적인 문제가 있으니 이해해야 한다"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증상은 분노 조절 장애였습니다. 저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온순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PTSD 때문에 분노 조절이 안 되는 거예요. 갑자기 화를 내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사실 지금도 가끔씩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운전하지 마십시오. 확확 올라올 때가 있어서... 저희도 한국에서 운전하다 보면 가끔씩 올라올 때가 있는데, 목사님은 더 심하시겠네요. 여기서 그냥 대중교통 타세요. 늘 급소를 가격하시니까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위험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면 PTSD 증후군으로 힘드셨을 때, 또 목사님이시잖아요.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결이 되셨어요? 그래서 어느 날 토요일 아침에 너무 마음이 힘들고 답답해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일생에 두 번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한 번은 꿈속에서 천국에 갔었고, 한 번은 기도 중에 실제로 천국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 있었는데, 고린도후서에 사도 바울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겠노라"라고 고백한 구절이었습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알지, 어떻게 자기 몸 안에 있었는지 몰랐다는 걸까?'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는 순간, 갑자기 제 영혼이 몸을 떠나 천국에 가게 된 거예요. 천국에 들어가 보니,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천국에 가본 사람은 천국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거예요. 천국에 가본 사람은 압니다, 느낍니다. 주님이 바로 제 앞에 계셨는데, 세마포 옷을 입으시고 발이 찰랑찰랑 빛나는 모습만 보였습니다. 그 발만 보고도 '아, 내가 정말 천국에 왔구나'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가 너에게 평안을 주노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 말씀을 그냥 듣기만 했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제 영혼을 꿰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온 영혼을 통과하는 주님의 평화를 경험하면서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고백한 심정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 여기가 천국이구나!'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네가 아직 완전히 올 때가 아니다. 이제 돌아가라"라고 말씀하셔서 천국에서 돌아가야 했습니다. 돌아가려고 하는데, 마치 아프리카 정글에서 미국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길을 모르는 것처럼 막막했습니다.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있는데, 순간 몸이 다시 연결되면서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눈을 떠보니 아내가 옆에서 자고 있더라고요. 그 천국 경험이 PTSD로 고통받던 저를 치유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청자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천국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천국과 예수님의 존재는 제가 분명히 확신합니다. 정말 간절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때 천국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마음에 평안을 얻었을 때, 예전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감정들은 어떻게 되셨어요?
아버지, 15살 때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그 분노... 제가 군 생활하면서 병원 목회, 병원 원목 과정을 밟기 위해 임상 목회 훈련(CPE)이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했습니다. CPE 과정에서 여러 명과 팀을 이루어 훈련을 받는데, 슈퍼바이저 목사님이 저에게 분노가 많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저는 '다들 분노가 있지, 왜 나만 가지고 그러지?'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병원에 가서 환자와 상담하고 돌아와서 상담 내용을 기록하고 보고하는 과제를 했습니다. 제가 상담했던 환자는 저에게 기도 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목사니까 "선생님, 기도해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어보고 기도해드렸습니다. 보고서를 제출했더니, 팀원 중 한 목사님이 "그 환자가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니요,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목사니까 병원에 가면 당연히 환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대답했더니, "그것은 너를 위한 기도였지, 환자를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 환자는 기도받고 싶어 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너 혼자 좋아서 기도한 것이다. 모든 것이 너 중심이지 않느냐"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제가 화를 심하게 내자, 슈퍼바이저 목사님이 훈련 끝나고 따로 이야기하자고 하시면서 "목사님의 분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릴 때 아버지 때문에 분노가 쌓였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슈퍼바이저 목사님은 저에게 숙제를 내주셨습니다. "다음 주에 올 때는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를 써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고, 아버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이번 기회에 아버지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숙제를 해야 하니까 집에 가서 기도하면서 아버지께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정말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바로 제 앞에 주영훈 씨처럼 앉아 계신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편지를 써 내려갔습니다. 편지를 쓰면서 아버지가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던 어려움들, 많은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던 책임감, 아들 때문에 상처받았던 마음 등 아버지의 힘든 삶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어려움을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편지를 쓰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를 진심으로 용서했습니다. 눈물 많이 흘리셨겠네요. 어, 그럼요. 지금도 그 생각하면 눈물이 글썽거립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셨군요. 그렇죠. 그전까지는 불만과 원망만 가득했는데,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왜 아버지는 나에게 그렇게 하셨을까?' 원망만 했었는데, 편지를 쓰는 과정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느끼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제 군목을 그만두시고 교도소에서 목회하시잖아요. 재소자들을 만나면 어떠세요? 미국 재소자들은 우리나라 재소자들과 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미국 교도소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강력 범죄자들이 수감되는 교도소, 중간 정도 범죄자들이 수감되는 교도소, 여자 교도소, 정신 질환자들이 수감되는 교도소 등 다양합니다. 저는 중간 정도 범죄자들이 수감되는 남자 교도소에서 7년 동안 사역했습니다. 뉴저지 교도소에서요. 어떠세요? 복음을 전하면 잘 받아들이나요?
재소자들은 대부분 재범으로 교도소에 다시 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굳게 닫힌 사람들이 많죠. 그래서 제가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해도, 이 사람들이 정말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 정말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몇 개월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들 눈앞에서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을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계속 기도하면서 교도소 사역을 하던 중, 주님께서 "너만이 할 일이 있다"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7년 동안 교도소 사역을 하면서 주님의 특별한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예, 예. 저희 교회에 출석하는 재소자들이 80명 정도 되었는데, 그중 10여 명이 정신 질환 진단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집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죠. 죽어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인데, 그분들을 전도해야 했습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재소자들을 전도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굳게 닫혀 있어서 주님의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 문을 열지 않거든요.
그래서 계속 기도하면서 사역을 하던 중, 어느 주일 예배 시간에 설교를 하는데, 갑자기 상상하지 못했던 성령의 음성이 제 마음에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데이빗에게 집에 갈 준비를 하라고 설교하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이지?' 20년 넘게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람인데... 하지만 성령의 음성이 너무 강렬해서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여러분,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 잘 들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재소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데이빗, 당신은 곧 집에 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곧 데이빗이 여러분 눈앞에서 집으로 석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정신 질환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재소자인데, 어떻게 석방될 수 있겠어요? 더블 종신형에 10년 형까지 추가된 사람인데요. 묻고 더블로 가는 형벌이죠. 그러니까, 많은 재소자들이 예배 중이라 소리 내어 말은 못 했지만, 속으로 '목사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에요'라고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여러분이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나기 몇 주 전, 백악관 책상에 전국에서 올라온 수만 명의 탄원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퇴임 전에 그 탄원 서류들을 검토하다가 두 사람을 특별 사면했습니다. 그 두 사람 중 한 명이 제가 사역하던 교도소의 데이빗이었습니다. 와, 더블 종신형인데 석방되다니, 정말 로또보다 더 기적적인 일이네요. 생명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죠. 자유를 얻었잖아요.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누구도 준비하라, 누구도 준비하라" 하면서 총 9명의 종신형 재소자가 제가 사역하는 동안 석방되었습니다. 와, 정말 놀랍네요. 하나님께서 미리 음성을 통해 예언하신 것이네요. 저에게 돈을 벌게 해준다거나, 복권 당첨된다거나 하는 음성은 안 들려주시나요?
정말 놀라운, 정말 주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제 삶 속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신 것이죠. 정말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아오셨는데, 마지막으로 한국에 특별한 일로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우리 교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으세요?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 인생 62년을 살아오면서 제 믿음이 완전히 바닥을 쳤던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나 힘든 군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음성도 듣고, 힘든 순간들을 이겨냈지만, 왜 믿음이 이것밖에 안 될까?'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제 스스로 믿음에 실패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아내와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주님께 기도했지만, 주님께서는 침묵하시더라고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흐른 후, 주님께서 제 마음속에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니?"라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때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정말 어릴 때부터 해병대 북파 공작원 훈련을 받고, 아버지와의 갈등, PTSD 등 힘들었던 모든 경험들이 결국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시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제가 주영훈 씨 질문에 답한다면, 한마디로 '충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 세상에 문제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제가 볼 때 진정한 신앙,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안고 묵묵히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문제가 있어도 묵묵히 참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아름답게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유, 영화 같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연애 씨, 오늘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어요? 저는 고린도후서 말씀, "우리의 고난이 넘치는 것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는 위로도 넘치는도다"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고,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길까?'라고 생각했던 경험과 시간들이 결국에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 계획 안에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참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고, 목사님 삶이 너무 드라마 같고 영화 같은데,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드라마 같고 영화 같은 일이 생길까 궁금해지고, 또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너무 기대되고, 또 뵙고 싶어지네요. 예, 박규형 씨는 오늘 어떠셨어요? 저는 오늘 들으면서 두 가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공감'과 '용기'입니다. 군인들에게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인데, 목사님이 그들보다 더 힘든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그렇게 좋은 멘토, 목사님이 되어주시지 못했을 거예요. 공감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공감을 위한 시간들을 보내셨고, 교도소라는 곳은 정말 용기가 필요한 곳인데, 북파 공작원 훈련을 받을 때 '나는 힘이 세다'라는 자신감을 얻었던 훈련이 없었다면 지금 교도소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사님을 준비시키셨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위해 앞으로 주님이 어떤 길을 계획하고 계실지 저도 함께 기도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하게 되는 모든 경험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시고 다 사용하신다는 생각이 오늘 다시 한번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폭력에 노출되었던 경험조차도,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서 목사님을 전방으로, 그리고 지금은 교도소로 보내셔서 가장 거칠고 드센 사람들을 섬기게 하시고, 그들과의 싸움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힘을 만드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제복에 달린 훈장들은, 목사님께서 그동안 구원하신 많은 생명들이 훈장처럼 달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 곁에 많은 생명 구원의 훈장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야 할 텐데, 지금 목사님처럼 저는 혹시 벌거벗은 상태로 가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지금 목사님의 제복에 달린 훈장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지금 죽음의 끝에서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느끼고 있을 재소자들에게 마지막 생명의 구원 티켓을 주는 훌륭한 역할을 하고 계시잖아요.
앞으로도 그 사역 위해 저희도 열심히 기도하고, 더욱 힘써주시길 응원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오셨는데, 좋은 추억 많이 만드시고 돌아가세요. 감사합니다. 오늘 귀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