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선교사 이상훈, 25년 헌신과 언더우드 선교상 간증
르완다의 언더우드, 이상훈 선교사의 25년 헌신
"르완다의 언더우드" 이상훈 선교사 간증 상세 정리: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25년 헌신 여정
오늘, 2018년 언더우드 선교상을 수상하신 이상훈 선교사님의 감동적인 간증을 통해, 르완다에서 25년간 묵묵히 복음의 씨앗을 뿌려온 그의 헌신적인 삶과 사역 여정을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이 간증은 단순한 내용 요약이 아닌, 선교사님의 삶과 사역 속에 담긴 깊은 의미와 핵심 노하우들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마치 옆에서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리고 마치 선교 현장의 생생한 기록을 펼쳐보는 듯한 깊이 있는 텍스트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 감동과 도전을 선사할 것입니다.
선교사의 길,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다
이상훈 선교사님은 7살 때부터 모태신앙으로 자랐지만, 대학 시절 격동의 시대 속에서 방황하며 신앙의 회의를 겪었습니다. 1980년대 격렬했던 학원 민주화 운동 시기에, 그는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깊은 고민과 번뇌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친구의 권유로 참석한 성경통독 수련회에서,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것처럼, 그의 마음속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성경 말씀이 강렬하게 와 닿았습니다.
처음에는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기자가 되려고 했지만, 기아대책기구의 선교사 모집 광고를 보면서 그의 인생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제3세계 빈곤 지역에 복음을 전할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광고 문구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당시 27세였던 그는 ROTC 전역 후 사회 초년병으로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였지만, 주저 없이 선교사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주변의 만류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맹인처럼 오직 하나님의 이끄심만을 따라 미지의 땅 아프리카, 르완다로 향하게 됩니다.
르완다, 비극의 땅에서 희망을 심다
1994년 르완다 내전 직후, 이상훈 선교사님은 난민 구호 활동을 위해 콩고 난민촌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마주한 것은 처참한 현실, 길거리에 방치된 시신들과 헐벗은 난민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극한’을 목격하며 큰 충격과 슬픔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이 땅에 희망의 씨앗을 심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난민 캠프에서 그의 인생의 동반자,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구호팀의 일손이 부족하여 한국에서 자원봉사자가 파견되었는데, 그 자원봉사자가 바로 지금의 아내입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구호 활동을 하면서, 서로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주며 사랑을 키워나갔습니다. 만난 지 2주 만에 운명적인 프로포즈를 했고, 아내는 세 가지 질문 끝에 그의 진심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르완다 땅에서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동역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5년 헌신, 교육과 의료로 르완다를 섬기다
이상훈 선교사님은 르완다 현지 교단과 협력하여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며 교육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전쟁으로 파괴된 폐허 위에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복음과 함께 미래를 향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현재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 운영하며, 교실을 확장하는 등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개신교 연합대학에서 개발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르완다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5년 전에는 한국에서 온 후배 선교사 부부와 함께 병원 건립을 추진하여, 르완다 의료 환경 개선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병원 건립에 대한 부담감이 컸지만, 후배들의 열정과 헌신에 감동받아 도전을 결심, 마침내 병원 건축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교육과 의료, 다방면에서 르완다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며,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습니다.
선교사 가정의 고난, 자녀 교육과 깊어진 믿음
선교사로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자녀 교육 문제입니다. 아프리카의 열악한 교육 환경 속에서 자녀들을 키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의료 시설이 부족하여 자녀들이 아플 때마다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대학 진학을 앞두었을 때, 재정적인 어려움은 더욱 크게 다가왔습니다.
큰 딸이 미국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학비 마련이 막막했던 상황. 딸은 재수까지 하며 SAT 시험을 준비했고, 장학금 신청을 해야만 했습니다. 장학금을 신청하면 합격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딸에게 솔직하게 재정 상황을 이야기했고, 딸은 묵묵히 장학금 신청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상훈 선교사님은 아버지로서의 무력감과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싱가포르 대학에서 가족 초청 행사가 있어 방문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대학 측에서 두 딸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원해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는 마치 기적과 같은 현실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자녀 교육이라는 어려움을 통해, 오히려 더욱 깊고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역의 고난과 깨달음, 사랑과 연민의 마음
선교 사역은 늘 기쁨과 보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동역자들의 배신과 실망, 예기치 못한 어려움과 마주하기도 합니다. 특히 아프리카 현지인 동료들의 금전적인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모습은 그에게 큰 상처와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책임자로서 동료들을 징계해야 하는 상황은 그에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우간다에서 인사 책임자와 함께 해고 직원 명단을 확인했을 때, 지난 4년간 해고된 직원이 86명이나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르완다로 돌아온 후, 이전 인사 책임자로부터 놀라운 사과를 받게 됩니다. 그녀는 과거의 강압적인 태도를 후회하며, 직원들의 어려움을 헤아리지 못했던 점을 반성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상훈 선교사님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008년 한국에 잠시 귀국했을 때, 동생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동생을 간호하면서 인간의 유한함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호스피스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섬김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동생의 죽음을 통해, 그는 아프리카에서 돌보던 수많은 고아들의 죽음에 대해 무관심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장례식에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고, 사망 보고서에 서명만 했던 자신의 냉정함을 깨닫고 깊이 반성했습니다.
이후 그는 아프리카로 돌아가,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고 섬기는 데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업적이 아니라,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르완다 사람들에게 더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아이, 프리실라
수많은 아이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선교 사역 속에서, 이상훈 선교사님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바로 심장병을 앓던 소녀, 프리실라입니다. 우간다 고산지대 마을에서 심장병을 앓던 두 소녀, 베나와 프리실라. 한국의 독지가 도움으로 수술 기회가 주어졌지만, 두 명 모두를 한국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더 위급했던 베나에게 먼저 기회가 주어졌지만, 프리실라는 수술 순서를 기다리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프리실라의 죽음은 이상훈 선교사님에게 큰 슬픔과 자책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만약 순서를 바꾸었다면, 프리실라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프리실라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이름은 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소대원을 잃은 친구의 위로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더 큰 아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상 수상, 그리고 앞으로의 기도
2018년, 이상훈 선교사님은 "르완다의 언더우드"라는 영예로운 칭호와 함께 언더우드 선교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과분한 상이라며 겸손해했지만, 25년간 묵묵히 르완다를 섬겨온 그의 헌신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합니다. 수상 소감에서 그는 개인적인 영광보다는, 앞으로 더욱 열심히 사역하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르완다와 한국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자원도 부족하고 국토도 좁지만, 한국처럼 경제 성장을 이룬 르완다의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더욱 성숙하고 발전하여, 르완다를 비롯한 세계 열방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기를 기도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르완다에서 하는 사역들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상훈 선교사님의 간증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선사합니다. 그의 삶은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 절망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갈 수 없다면 보내는 선교사, 보낼 수 없다면 기도하는 선교사"라는 말처럼,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이상훈 선교사님의 헌신과 사랑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하며, 그의 사역과 가정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