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빈 집사 탈북 간증: 두만강, 인신매매, 믿음과 희망 이야기
두만강을 넘은 절규, 김보빈의 희망을 찾아서
처음 듣는 탈북 스토리: "북한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 김보빈 집사 간증 상세 정리
오늘 우리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믿기 힘든 탈북 스토리를 가진 김보빈 집사님의 간증을 통해 북한 주민들의 참상과 그 속에서 피어난 믿음을 깊이 있게 알아볼 예정입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단순히 북한을 탈출한 이야기가 아닌, 죽음과 고난, 그리고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변화된 삶을 생생하게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특히, 그녀의 이야기는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 주민들이 겪었던 끔찍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그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인간의 강인함과 믿음의 힘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김보빈 집사님의 감동적인 탈북 스토리를 함께 들어보시죠.
우리가 뉴스를 통해 접하는 북한 소식은 오물 풍선이나 김정은 관련 뉴스가 대부분이며, 북한 주민들의 실제 삶, 특히 참혹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접하기 어려워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김보빈 집사님의 간증을 통해 북한 주민들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텐데요, 더욱이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어려움을 넘어,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고난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보빈 집사님이 어떻게 살아남았고, 또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교훈을 줄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김보빈 집사님의 입을 통해 직접 그 생생한 스토리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현재 '통일 드라이브'라는 공동체를 운영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이곳은 단순히 탈북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 '통일 오라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적인 조합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탈북민들이 자립하고 성공적인 정착을 돕기 위한 공동체라고 합니다. 특히, '통일 오라'라는 이름은 '통일'과 '오라(Come)'를 결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탈북민들이 함께 모여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더욱이 양평에 위치한 이유는 '양평'을 거꾸로 하면 '평양'이 되기 때문이라는 재밌는 이야기도 덧붙여 주셨는데요, 이는 고향 평양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함께 힘을 모으자는 공동체의 염원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통일 드라이브는 단순한 거주 공간을 넘어, 탈북민들이 신앙 안에서 함께 성장하고 사회에 기여하며 통일을 준비하는 특별한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탈북 후 12년, 2012년 6월 1일에 한국에 정착하셨다고 합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딸과 함께 탈북했으며,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살아왔을 텐데요, 탈북민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많다고 합니다. 오늘 김보빈 집사님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일 것이라고 예상되는데요, 특히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는 북한 주민들에게 죽음과 같은 굶주림의 시간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셨을까요?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요? 이제부터 김보빈 집사님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겠습니다.
김보빈 집사님의 고향은 함경북도 새별군이며, 6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넷째 딸이라는 이유로 설움을 많이 겪었다고 회상합니다. 특히 새 옷이나 새 신발을 제대로 신어보지 못했고, 항상 물려받은 옷을 입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불만이 컸다고 하는데요, 셋째 언니보다 키가 작아 언니가 입던 옷을 물려받을 수 없었던 상황은 어린 김보빈 집사님에게 큰 억울함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넷째 딸을 '웃음딸'이라고 부르지만, 자신은 '썩은 딸'처럼 느껴졌다고 표현하며, 남이 입던 옷조차 제대로 물려받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깊은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김보빈 집사님은 불평불만이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김보빈 집사님은 생계를 위해 시장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꽃다운 어린 시절에 생선 바구니를 들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입니다. 옥수수 배낭을 메고 생선 바구니를 든 채 부끄러움도 잊고 살아야 했던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언니들은 겪어보지 못했던 고난을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언니들은 20살 넘어 결혼하면서 제대로 밥 한 끼 해보지 못하고 시집갔다고 하는데요, 둘째 언니는 몸이 아파 사회생활을 못 했기 때문에 김보빈 집사님이 더욱 힘든 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김보빈 집사님은 이러한 어린 시절의 어려움이 오히려 오늘의 자신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었고, 훈련 과정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회상했습니다. 힘든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 속에서 삶의 강인함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물물교환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생선 사세요"라고 외치고, 생선 한 마리에 옥수수 몇 kg과 바꾸는 방식으로 생활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한국의 60년대, 70년대와 비슷한 모습이었다고 덧붙였습니다. 13살 어린 나이에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김보빈 집사님의 모습은 감동을 자아냅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20살이 넘어서는 어떤 일을 했을까요? 이제 성인이 된 김보빈 집사님의 삶은 어떻게 흘러갔을지 궁금해집니다.
성인이 된 김보빈 집사님은 학교 졸업 후 양치기 소녀, 즉 양 방목공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양을 기르는 일을 하며 생활하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새별에서 청진까지 양파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장사를 통해 돈을 모으면서 언니들이 시집갔지만, 안타깝게도 첫째, 둘째 언니 모두 알코올 중독 남편에게 시집을 갔다고 합니다. 남편들은 술에 취해 일을 하지 않고, 아내들이 시장에서 음식을 팔아 식량을 구해와도 술값으로 탕진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화가 났지만, 아버지와 동생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시집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돈을 언니들에게 주고 중국으로 돈을 벌러 가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가족을 위한 헌신적인 마음이 중국행을 결심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결혼을 앞두고 중국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결혼 날짜까지 정해져 있었지만, 한 달만 돈을 벌어오면 가족들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중국행을 결심한 것입니다. 결혼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중국으로 떠났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1997년 2월 19일, 김보빈 집사님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신부였지만, 그녀의 마음은 오직 가족을 위한 헌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삶은 그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중국에 도착했지만, 브로커에게 속아 인신매매를 당했다고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갔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인신매매라는 끔찍한 현실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탈북민을 신고하면 5,000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브로커들은 탈북민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15일 동안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고, 공안의 감시를 피해 숨어 다니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15일 후, 보스를 타고 길림성 매하구라는 곳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 다시 길림성 려원시라는 곳으로 팔려갔다고 합니다. 일하러 간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인신매매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갈 때 3,000위안, 중국 브로커에게 팔려갈 때 12,000위안이라는 가격이 매겨졌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현실 속에서 김보빈 집사님은 자신의 몸값이 얼마인지조차 모른 채 낯선 곳으로 끌려갔습니다.
농촌으로 팔려간 김보빈 집사님은 마치 원숭이처럼 동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그녀를 구경하러 왔고, 심지어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검사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병원에 끌려가 검사를 받는 것은 물론, 동네 의사가 집으로 찾아와 하체를 검사하는 끔찍한 경험까지 했다고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왔지만, 인신매매를 당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현실에 절망했습니다. 자신을 보러 온 사람들이 일하다가 온 사람들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순수했던 김보빈 집사님은 인신매매라는 현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메이어(없다)"라는 중국어를 처음으로 기억하게 된 것은 당시 절망적인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여성으로서의 수치심과 절망감에 휩싸인 김보빈 집사님은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견딜 수 없는 현실에 김보빈 집사님은 자살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여성으로서의 수치심과 절망감, 그리고 가족에 대한 죄책감까지 더해져 죽음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3일 동안 굶고 전통편이라는 약을 한 줌 먹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쥐약을 먹고, 심지어 퐁퐁까지 마시는 극단적인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죽음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꼈지만, 오히려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경험은 김보빈 집사님에게 삶의 강한 의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죽음조차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이제는 악착같이 살아야겠다" 라는 결심은 그녀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자살 시도 후, 김보빈 집사님은 분가를 결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부모와 함께 살던 집에서 나와 분가하여 살림을 차렸지만, 경찰의 단속은 계속되었고, 닭장, 개장, 심지어 물독까지 숨어 다니며 불안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임신을 하게 되었고, 2004년 4월 26일, 출산을 10일 앞두고 11명의 경찰이 들이닥치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경찰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압박했고, 당시 중국에서는 탈북 여성의 출산이 엄격히 금지되어 강제 낙태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임신 사실을 숨기고 살았지만, 결국 경찰에 발각되어 끔찍한 일을 겪게 됩니다.
경찰에 붙잡힌 김보빈 집사님은 강제 낙태를 당했다고 합니다. 출산을 10일 앞둔 만삭의 몸이었지만, 11명의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끌려가 강제로 낙태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배에 주사 바늘을 찔러 아이를 죽이는 끔찍한 시술을 받아야 했고, 24시간 후 진통이 시작되어 죽은 아이를 낳아야 했습니다. 살아있는 아이를 낳는다는 희망조차 없이 죽은 아이를 낳아야 하는 고통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을 것입니다. 특히 아이가 거꾸로 있어 머리가 자궁 입구를 막아버리는 바람에 의사가 손을 넣어 아이의 머리를 돌려 꺼내는 과정은 더욱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목을 졸라 죽이는 상황은 살인과 다름없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죽은 아이가 딸이었고, 경찰이 딸이라는 이유로 더욱 냉대하며 혀를 가위로 자르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딸을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고, 북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현실에 김보빈 집사님은 깊은 절망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죽은 딸을 보며 김보빈 집사님은 북한에서 '나라 없는 설움이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는 말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상가집 개는 쫓겨나기라도 하지만, 나라 없는 설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산과 들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고"라는 북한 노래 가사처럼 계절은 변하지만, 나라 잃은 설움에 마음속에 꽃 필 날은 언제일까 자문하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정신이 번쩍 들었고,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 해본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고 합니다. 늘 당과 수령만을 위해 살았던 삶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며, 북한 체제에 대한 깊은 환멸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죽은 딸의 죽음은 김보빈 집사님에게 삶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심어주었습니다.
두 번째 임신을 하게 된 김보빈 집사님은 어머니의 고향인 중국 서귀포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첫 번째 아이를 잃은 아픔을 딛고 다시 찾아온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의 고향으로 향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경찰의 감시를 피해 숨어 살아야 했고, 임산부라는 이유로 더욱 힘든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출산 후에는 괜찮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더욱이 시댁에서는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아들을 바꿔오라는 요구까지 했다고 합니다. 딸을 낳은 것도 서러운데, 아들을 바꿔오라는 말에 김보빈 집사님은 다시 한번 절망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딸을 낳은 것도 죄인가, 딸이라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가 자문하며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 낳은 딸에게 '설령'이라는 북한식 이름 (눈 雪, 영리할 伶)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7월에 낳은 아이에게 북한식으로 이름 지어주고 다시 시부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힘든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기가 60일 되었을 때, 누군가로부터 유모차가 필요하냐는 전화를 받았고, 그곳이 교회였던 것입니다. 같은 탈북민 자매가 유모차를 준다는 연락을 받고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교회, 예배당, 하나님이라는 단어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보고 구제소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는 당시 김보빈 집사님의 순수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유모차를 받으러 간 교회에서 김보빈 집사님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교회에 다니기 전, 김보빈 집사님은 18살 때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로부터 신내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르는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경성이라는 절간에 가서 책자를 가져오라고 했지만, 아빠의 반대로 가지 못했고, 이후 6개월 동안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아서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미신적인 믿음이 팽배했던 당시 북한 사회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이후 할아버지는 꿈에 계속 나타나 다음 날 일어날 일들을 예언했고, 김보빈 집사님은 중국에 와서도 할아버지의 지시대로 관상을 봐주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관상을 봐주는 것은 돈벌이가 되었지만, 동시에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컸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에 가게 된 것은 김보빈 집사님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유모차를 받으러 간 교회에서 십자가를 처음 제대로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보는 순간 눈이 이상해지고, 몸이 불편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하는데요,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니 헌금함이 있는 것을 보고 유모차 값으로 20원을 헌금했다고 합니다. 당시 20원은 큰 돈이었지만, 공짜로 유모차를 받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 헌금을 한 것입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전도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계속 김보빈 집사님을 쳐다보며 설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죄인이라는 단어가 거슬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예배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머리는 깨질 듯 아프고, 속은 불편했지만, 왠지 모르게 예배당을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부 예배, 2부 예배, 심지어 3부 예배까지 연이어 드리면서 김보빈 집사님은 묘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교회에 들어갈 때마다 몸이 아팠지만, 왠지 모르게 발길을 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계속 나가면서 4주 만에 영접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예배가 힘들고 불편했지만, 4주째 되는 날에는 자신도 모르게 맨 앞자리에 앉아 영접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머릿속으로는 '내가 뭘 잘못했지?'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찬송가를 부를 때는 마음이 평안해지고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특히 "나의 하나님"이라는 찬송을 부를 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하는데요, 예배가 끝나고 났을 때는 마음이 괴로우면서도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 같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토했을 때 음식물은 나오지 않고 가래 같은 것이 나왔다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토하고 나니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2시간 동안 울고불고했지만, 오히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김보빈 집사님은 예배가 재밌어지고 찬송가가 마음 깊이 와닿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으려고 했지만, 창세기의 족보를 읽다가 포기했다고 합니다. "가라사대", "누구는 누구를 낳고" 등의 어려운 단어와 낯선 이름들이 가득한 성경은 처음 접하는 김보빈 집사님에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주문 외우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표현하며, 성경 읽기를 포기하고 찬송가만 계속 불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토요일마다 교회 자매들이 찾아와 음식을 만들어주고 중보기도를 해주는 등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중보기도가 뭔지도 몰랐지만, 자매들의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경찰 단속을 피해 숨어 다니던 과거와 달리, 교회에서는 안전함을 느끼고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기도를 배우게 되었고, 40일 동안 감사 기도와 씨름했다고 합니다. 교회 자매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고, 매일 저녁 8시부터 감사 100번, 사도신경,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감사 기도는 쉽지 않았고, '감사합니다'만 반복하다가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40일 동안 끈질기게 감사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꿈에 나타나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렸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정말 존재하는지 의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응답해달라고, 증거를 보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40일째 되던 날, 방언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토요일 예배에 참석했을 때, 갑자기 눈물, 콧물이 쏟아지고 방언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방언의 의미도 모른 채 울부짖었지만, 그 순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진짜 있네!"라는 외침과 함께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는 순수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예배에 참석했지만, 여전히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와닿지 않았고, 성경 말씀이 어렵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영접 기도를 한 후 할아버지가 더 이상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합니다. 관상을 봐주면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전도사님은 영적 싸움에서 이겼다고 말하며, 하나님이 할아버지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할아버지 대신 하나님을 선택한 김보빈 집사님은 비로소 영적인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후 부활절, 성탄절 등 교회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말씀 암송, 워십 댄스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탄절 날,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성탄절 연습을 하던 중 경찰에 잡히는 위기를 맞았다고 합니다. 시부모님이 밭 문제로 가족들과 싸운 것이 발단이 되어,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성탄절 예배를 위해 모인 탈북민 가족들이 순식간에 흩어졌고, 김보빈 집사님은 김치 움에 숨었지만 결국 발각되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영하의 날씨에 옷까지 빼앗긴 채 경찰서로 끌려갔고, 친척 때문에 쫓겨나듯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 간 후, 딸 설령이가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 놓입니다. 병원에서도 포기한 딸을 안고 교회 십자가 밑에서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딸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십자가 밑에서 울부짖던 중, 딸에게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날 십자가 밑에 딸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하소연하던 중, 딸이 갑자기 몸부림치며 "엄마"라고 외친 것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딸이 살아나는 기적을 목격한 김보빈 집사님은 놀라움과 감격에 휩싸였습니다. 딸의 이름을 '은혜'라고 부르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딸의 이름을 '설령'에서 '은혜'로 바꾼 것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김보빈 집사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딸 은혜는 건강을 회복했고, 김보빈 집사님은 딸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딸 은혜는 현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태어난 딸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딸 은혜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후, 김보빈 집사님은 한국으로 탈북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탈북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몽골로 향하는 과정에서 국경 경비대에 붙잡혀 23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23일 동안 감옥에 갇혀 굶주림과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감옥 안에서 중국어로 찬송가를 불렀는데, 간수가 오히려 좋아하며 다시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놀라운 경험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감옥 안에서도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하면서 몸은 쇠약해졌지만, 오히려 신앙은 더욱 굳건해졌다고 합니다. 교화소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몸이 쇠약해져 두 발로 걸어 들어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정거리 교화소에서 3년 형을 선고받고 죽음과 같은 감옥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정거리 교화소에서의 3년은 죽음과 고통, 그리고 믿음으로 버텨낸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감자 농사 짓는 곳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굶주림과 질병에 고통받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교화소 안에서 시체가 불에 타다 남은 발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살아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고 합니다. 구더기 가루를 상처 치료제로 사용하고, 굶주림을 견디기 위해 시체에서 나온 구더기를 먹는 끔찍한 현실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고추를 훔치다 걸려 매를 맞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며 전도의 사명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8명의 동료 수감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다. 감옥은 지옥이었지만, 동시에 천국과 같은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고, 김보빈 집사님은 그 은혜를 체험하며 3년의 감옥 생활을 마쳤습니다. 출소할 때 몸무게가 68kg까지 늘어 건강을 회복한 모습은 기적과 같았습니다. 3년 만에 68kg으로 건강하게 출소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출소 후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자신을 팔았던 친구에게도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중국에 두고 온 딸을 데려오기 위해 6개월 동안 탄광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딸을 만나기 전 자궁암 검사를 받았는데, 놀랍게도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기적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3년 동안 딸을 위해 기도했던 간절함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2011년 4월 8일, 딸과 함께 탈북을 감행하여 2012년 6월 1일 대한민국에 입국하는 데 성공합니다. 딸과 재회하는 감격적인 순간, 김보빈 집사님은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국에 와서 가나안에 도착한 줄 알았지만,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는 등 고통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치유 집회에서 용서의 의미를 깨닫고,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며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용서를 통해 비로소 가나안은 눈앞의 현실이 아닌, 광야와 같은 여정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후 고향의 부모 형제, 북한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아가기로 결심하며 간증을 마무리했습니다.
김보빈 집사님의 간증은 단순히 한 개인의 드라마틱한 탈북 스토리가 아닌, 북한 주민들의 고통과 현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믿음의 힘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한 김보빈 집사님의 삶은 우리에게 큰 울림과 도전을 줍니다. 특히 "복수는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처럼, 용서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깨닫게 해줍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김보빈 집사님의 넓은 마음은 감동적입니다. 고난 속에서 만난 하나님,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김보빈 집사님의 앞날에 더 큰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