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장로 간증: 두 번의 죽음 극복과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
두 번 죽음 넘고 '광대' 자처…찬양 대부 박종호의 은혜 간증 쇼!
복음성가 대부 박종호 장로의 진솔한 신앙 고백: 36년 찬양 사역 여정과 하나님의 은혜
오늘날 한국 CCM계를 대표하는 찬양 사역자, 박종호 장로님을 모시고 그의 파란만장했던 36년 찬양 사역 여정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미국에서 갓 귀국한 피곤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귀한 시간을 내주신 박종호 장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유의 유쾌한 입담과 진솔한 간증으로 가득 채워질 이번 글을 통해 독자 여러분들은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극적인 만남, 찬양 사역의 시작점이 되다
박종호 장로의 찬양 사역은 대학교 4학년 시절, 예수님과의 극적인 만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예수가 진짜'라는 강렬한 확신에 사로잡혔고, 예수전도단(YWAM) 구세군에 발을 들였습니다. 예배에 대한 그의 기존 관념은 완전히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요. 1985년 당시, 교회에서 익숙했던 엄숙하고 정적인 예배와는 달리, 예수전도단의 예배는 기타 3대와 몇몇 젊은이들이 '하나님, 우리 예배를 받아주세요'라고 외치는 자유롭고 열정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이는 박종호 장로에게 문화적 충격과 같은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전도단 예배에서 받은 충격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조성환 목사의 권유로 예수전도단 찬양 앨범 제작에 참여하게 된 그는, 얼떨결에 찬양 사역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 그의 마음속에는 '마귀의 인생'을 살았던 과거에 대한 회개와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공존했습니다.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열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찬양 사역은 3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오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은혜를 선사했습니다.
복음성가 경연대회 출전은 그의 찬양 사역에 또 다른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예수전도단에서의 예배 경험은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고, 찬양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87년 복음성가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며 본격적인 복음성가 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대회에서 그의 재능을 알아본 작곡가 최덕신은 그를 위해 곡을 써주었고, 이는 그의 음악적 역량을 더욱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최덕신 작곡가와의 인연은 특별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성악과 동기였던 두 사람은 대학 시절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최덕신과 달리, 박종호 장로는 불교 신자 집안에서 성장하며 교회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종호 장로가 예수님을 만난 후 최덕신과의 인연은 다시 이어졌고, 복음성가 경연대회를 통해 재회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의 악연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귀한 만남으로 변화되었고, 이는 박종호 장로의 찬양 사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화려함 뒤에 감춰진 고뇌, 그리고 미국 유학 도전
찬양 사역자로서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뒤에는 깊은 고뇌와 갈등이 존재했습니다. 끊임없는 빚과 경제적인 어려움, 교만하다는 비난과 세속적인 유혹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특히 교회 집회 대신 공연 사역에 집중하면서 교회 안팎으로 많은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만 노래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성가 가수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더욱 발전된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갈망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1999년 세종문화회관 고별 콘서트를 기점으로 그는 새로운 도전을 결심합니다. 더 나은 음악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로 한 것입니다. 늦은 나이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더욱 온전히 감당하기 위한 용기 있는 발걸음이었습니다. 2000년 2월, 그는 뉴욕으로 떠나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음악적 역량을 갈고닦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는 그에게 또 다른 성장통이었지만, 더욱 성숙한 찬양 사역자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미국 유학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2002년 2월,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영하 7도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보일러를 끄고 잠을 자는 무모한 행동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뇌졸중은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했고, 앞으로의 사역에 대한 불확실성을 더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진솔한 고백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동안의 교만함과 욕심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구했습니다.
뇌졸중 투병 중, 그는 과거 찬양 사역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더 멋진 소리로 돌아오겠다'는 세종문화회관 고별 콘서트 당시의 다짐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겸손함을 배우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뇌졸중은 그에게 진정한 신앙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뇌졸중에서 간암까지, 연이은 고난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은혜
뇌졸중을 극복한 후, 박종호 장로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2017년, 건강검진에서 간암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미 간경화로 악화된 상황이었고, 간 이식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수술조차 불가능하다는 절망적인 진단 앞에서 그는 다시 한번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그를 Rescue하셨습니다.
간 이식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의 체격 때문에 일반적인 간 이식 수술은 불가능했고, 생체 간 이식만이 유일한 대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생체 간 이식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그의 체격에 맞는 간을 한 사람에게서 모두 얻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전 세계에 단 한 명뿐인 '2대 1 생체 간 이식' 기술 보유자, 이승규 박사가 한국 아산병원에 있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승규 박사는 박종호 장로의 고등학교 13년 선배였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드라마틱했습니다.
기적적인 만남은 곧바로 수술로 이어졌습니다. 두 딸이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간 이식을 결심했고, 막내딸은 혼자서 두 사람 몫의 간을 이식하는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수술은 18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지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박종호 장로는 다시 한번 생명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두 딸의 숭고한 희생과 이승규 박사의 뛰어난 의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만들어낸 기적이었습니다. 수술 후, 그는 딸들의 헌신적인 사랑에 깊이 감동했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간 이식 수술 후 회복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정신적인 어려움 속에서 그는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더욱 굳건한 믿음을 다지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수술 후 6개월 만에 막내딸의 간은 90% 이상 재생되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었고, 박종호 장로 또한 건강을 되찾아 다시 찬양 사역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의 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광대로서, 세상 곳곳에 사랑과 나눔을 전하다
두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박종호 장로는 '하나님의 광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간증 집회와 찬양 콘서트를 통해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고난 속에서 만난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선교사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미국 시골 교회들을 순회하며 집회를 열고, 헌금을 모아 선교지에 전달하는 사랑의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가 지난 20여 년간 선교지에 전달한 후원금은 수십억 원에 달합니다. 이는 단순한 물질적인 지원을 넘어, 복음 전파와 사랑 나눔을 실천하는 귀한 헌신입니다.
그의 선교 후원 사역은 2000년 미국 LA 집회 당시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선교사 선배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쓰레기통을 뒤져 연명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선교사 후원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후, 그는 미국 전역의 작은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집회를 열었고, 교인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놀라운 액수의 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빚어낸 아름다운 결실입니다.
특히 2023년 현재, 박종호 장로는 암 투병 중인 선교사들을 위한 의료 지원 사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신 또한 간암 투병을 통해 죽음의 문턱까지 경험했기에, 고통받는 선교사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모금한 후원금을 통해 2천 명이 넘는 선교사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동정심을 넘어, 고난을 함께 겪는 동역자로서의 깊은 연대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의 사역은 물질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영적인 위로와 격려를 함께 전달하며 선교 현장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박종호 장로는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의 광대'라고 겸손하게 표현합니다. 그는 무겁고 진지한 메시지보다는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웃음과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달합니다. 그의 찬양과 간증은 마치 코미디 쇼와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진솔한 신앙 고백과 깊은 영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고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광대'를 자처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귀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다
박종호 장로의 대표곡 중 하나인 "그래도"는 그의 신앙 고백을 잘 담아낸 찬양입니다. 송명희 시인의 가사에 곡을 붙인 이 찬양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네가 나를 떠나가도', '네가 나를 버려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네가 지은 죄 많으나', '네가 천하고 미련하나'와 같은 가사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표현합니다. 박종호 장로는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원사이드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래도"는 단순한 찬양곡을 넘어,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신앙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박종호 장로님의 진솔한 간증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변함없는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두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오히려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세상 곳곳에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그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광대'로서, 그의 찬양과 간증을 통해 더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며 응원합니다. 박종호 장로님의 건강과 사역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그의 찬양이 세상 끝까지 울려 퍼지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