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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소년 서상복 목사, 감동의 인생과 사랑의 신앙 스토리

요약

늑대소년, 사랑을 전하는 목사 되다

가수 선미의 스승이자 우리 모두를 웃기고 울린 감동의 이야기: 서상복 목사의 인생 여정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의 주영훈입니다. 오늘, 늑대와 4년간 함께 뛰어놀며 교감했던 특별한 손님, 상담가이자 목사이신 해피가정사역연구소 서상복 소장님을 모셨습니다. 소장님, 늑대와 실제로 교감하셨다니 정말 놀라운데요, 어린 시절 산에서 늑대와 함께 지내셨다는 이야기가 사실인가요?

늑대와의 특별한 만남: 늑대소년, 현실이 되다

네, 사실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약 4년 동안 산에서 늑대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늑대라고 하니 무섭게 느껴지시죠? 물론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늑대가 늑대인 줄 몰랐습니다. 더 중요한 건, 늑대들도 제가 사람인 줄 몰랐다는 점입니다. 서로 말을 못 하니 짐승과 사람의 구분이 없었던 것이죠. 늑대들은 저를, 저는 늑대들을 그저 '같이 버려진 존재'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깊은 산속, 첫 이웃집까지 88km나 떨어진 외딴 곳에서 늑대들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마치 영화 '늑대소년'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얼마 전 영화 '늑대소년'을 보면서 늑대와 교감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주인공의 모습에 깊이 공감하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영화 속 늑대소년과 늑대와 함께 지냈던 제 어린 시절이 묘하게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부재와 나병 할아버지와의 삶: 깊은 산골, 고독 속에서 피어난 긍정

그렇게 깊은 산속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된 배경에는 아픈 가족사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병(한센병)을 앓고 계셨고, 아버지께서는 일찍 가출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아 집을 자주 비우셨고, 두 누나는 일찍이 남의 집 식모살이를 가게 되면서 저는 자연스레 할아버지와 깊은 산골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공식적으로 저를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저는 혼자 외롭게 지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형제자매 없이 나병을 앓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지내야 했던 어린 시절은 외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고독 속에서 저는 늑대라는 특별한 친구를 만나고 긍정적인 마음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늑대가 집으로 내려오곤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친구도 없고 놀 거리도 없던 저는 늑대들이 내려오면 그들을 따라다니며 함께 놀았습니다.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하고, 늑대 흉내를 내면서 소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늑대들과의 교감은 외로움을 잊기 위한 몸부림이자 즐거움을 찾으려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행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병으로 몸이 불편하셨기에, 산속 밭농사는 온전히 제 몫이었습니다. 낫을 할아버지 팔에 묶어 드리고 함께 밭일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농사일은 어린 제가 감당해야 했습니다. 산에 나무를 베어 밭을 일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저는 씩씩하게 해냈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 저는 역경을 이겨내는 강인함과 긍정적인 마음을 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저는 또래보다 덩치가 컸습니다. 지금 아이들 기준으로 5학년 정도의 체격이었으니, 농사일을 하기에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었죠. 초등학생이었지만 저는 능숙하게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학교에 대한 갈망과 선생님들의 따뜻한 배려: 건빵 한 가마니, 사랑을 싣고

학교는 산을 두 개나 넘어야 나오는 먼 곳에 있었습니다. 등굣길은 멀고 험했지만, 학교에 대한 갈망은 컸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고, 평범한 학생처럼 학교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입학 통지서도 받지 못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무작정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은 제게 "말을 못 하니 1년 후에 다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1학년을 '재수'하게 되었죠. 돌이켜보면 학교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순수한 열망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말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농사일과 할아버지 간호까지 해야 했기에 학교에 자주 갈 수 없었습니다. 결석이 잦았지만, 학교 선생님들은 저를 '결석 처리'하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은 소풍날이나 운동회 날을 기준으로 출석을 인정해주셨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지게에 건빵 한 가마니를 짊어지고 산속 깊은 제 집까지 찾아와 건네주시곤 했습니다. 선생님들의 따뜻한 마음은 어린 제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건빵은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것은 물론, 세상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랑의 선물'이었습니다. 특히 건빵을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났던 기억은 지금도 웃음짓게 하는 추억입니다. 선생님들은 나병을 앓는 할아버지 때문에 직접 집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건빵 가마니를 마당에 내려놓고 가시는 모습에서 진심 어린 걱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9km 떨어진 마을, 골목대장이 되다: 외로움 속에서 피어난 리더십

산속 외딴집에 살았지만, 저는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집에서 9km 떨어진 마을까지 일주일에 한두 번 '출장'을 가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신기하게도, 마을 아이들 사이에서 저는 '골목대장'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골목대장이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운동도 잘하고 덩치도 컸던 제가 아이들에게 왠지 모를 '카리스마'를 풍겼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저를 어려워하면서도 따랐고, 저는 그들과 함께 뛰어놀며 외로움을 잊었습니다. 어쩌면 늑대들과 함께 지내면서 키웠던 야생성과 강인함이 골목대장 리더십으로 발현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놀다 해 질 녘 외딴 산길을 홀로 돌아오는 길은 외로웠지만, 친구들과 함께했던 즐거운 시간 덕분에 그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잔소리 없는 따뜻한 할아버지: 천자문과 새벽기도, 사랑으로 빚어진 인격

할아버지께서는 평생 단 한 번도 제게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따뜻하고 인자하신 분이셨습니다. 제 성격이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따뜻한 성품은 분명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제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글을 배우기도 전에 천자문을 먼저 깨우칠 정도로 할아버지는 똑똑하셨습니다. 할아버지와의 생활은 외롭고 힘들었지만,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과 가르침 속에서 저는 올바른 인격을 형성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마치 예수님처럼 제게 끊임없는 사랑과 격려를 보내주셨습니다. "상보가, 힘내라. 할아버지가 네 신랑이고, 아빠다." 할아버지의 이 말씀은 어린 제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저를 돌보셨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저는 늘 밝고 긍정적인 아이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4~50년 지기 친구들은 지금도 제게 "네가 그때 외로웠는지 전혀 몰랐다. 우리 중에 제일 행복해 보였다"고 말합니다. 잔소리하는 어른 없이 자유롭게 자란 덕분에 오히려 더 행복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안동 성장원으로 옮겨가셨고, 중학교 때 친아버지와 재회하면서 저는 할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안동 성장원을 찾아뵈면, 할아버지께서는 나환자 5~60명을 모아놓고 저를 기다리셨습니다. 제가 찬양 인도를 하고 설교를 하면, 손 없는 팔로 박수를 치며 기뻐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제가 부흥 집회를 인도하는 것 같다며 무척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집회가 끝나면 할아버지께서는 늘 제 손을 잡고 "상보가,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라. 할아버지 외롭지 않다. 네가 전한 예수를 믿고 새벽기도를 네 시간씩 한다. 새벽기도 시간에 거의 세 시간은 너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니 할아버지 걱정 말고 잘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할아버지를 돌본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께서 저를 돌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라에서 나오는 돈과 제가 신문 배달로 번 돈을 모아 학용품과 참고서를 사주셨고, 학원에도 보내주셨습니다. 할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은 가난하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사랑은 곧 예수님의 사랑이었고, 그 사랑 덕분에 저는 가정 사역자와 상담가라는 꿈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라면땅에 이끌려 교회로: 울어도 못하네, 눈물로 시작된 신앙 여정

할아버지보다 먼저 예수를 믿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동네 할머니를 통해서였습니다. 마을에 '출장' 갈 때면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라면땅을 주겠다며 저를 교회로 이끌었습니다. 라면땅에 꼬여 얼떨결에 교회에 가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교회는 초가집이었고, 할머니는 은퇴한 전도사님이셨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교회에 간 날, '울어도 못하네' 찬송가를 듣는 순간, 저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죄를 씻지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큰 공로를 쌓아도 죄를 없애지 못하니..." 찬송가의 가사는 어린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날,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뜨거운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산에서 별을 보며 '분명 신이 있을 것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믿음이 '울어도 못하네' 찬송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산에서 홀로 자연과 교감하며 느꼈던 경외감이 기독교 신앙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매주 교회를 찾아갔고, 집에 돌아와서는 할아버지께 교회에서 들은 설교를 흉내 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구주 예수 의지하여, 죄 사함 받으라고 외치는 어린 손자의 모습에 할아버지께서는 깊은 감동을 받으셨고, 얼마 후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다. 손자가 전해주는 서툰 복음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마음 문을 열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 후 할아버지께서는 새벽기도를 시작하셨고, 매일 새벽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산골 외딴집에서 손주와 할아버지가 함께 예배드리는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 풍경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등장, 탄광 막장 인생으로: 폭력과 고통 속에서 발견한 사랑

중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 가출했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산속 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중학교는 돈이 많이 드니 탄광에서 일해서 학비를 벌어주겠다"며 강원도 탄광촌으로 데려가셨습니다. 탄광 막장 인생은 고통과 위험의 연속이었습니다. 막장은 탄광 갱도 가장 깊은 곳으로,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와 붕괴 위험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돈은 많이 벌 수 있지만,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탄광에서 일하며 술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셨고, 가정은 점점 불행해져 갔습니다. 탄광촌 술집에는 '물망초', '청실홍실' 같은 낭만적인 이름의 술집들이 즐비했습니다. 탄광촌 돼지고깃집은 탄가루에 절어 있었지만, 탄광 노동자들은 술과 돼지고기로 고된 하루를 달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는 알코올 의존증을 비롯해 여러 정신 질환을 앓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술에 취하면 제게 폭력을 휘두르셨습니다. 저와 키와 덩치가 비슷한 아들을 보며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불행한 젊은 시절을 떠올렸는지도 모릅니다. "내 팔자야, 나는 죽어야 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고통을 아들에게 투영하며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아버지의 폭력이 이어졌고, 폭력의 80%는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다녀오면 칼을 들고 찌르려고 하셨고, 심지어 식칼로 머리를 내리찍기도 하셨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넘나드는 고통스러운 날들이었지만, 놀랍게도 저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5분만 지나면 다시 행복해지는 제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어쩌면 성령의 충만함이 아버지에 대한 미움 대신 긍휼한 마음을 갖게 해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은 어린 제게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고통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네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느껴 껴안고 보듬어주고 싶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폭력의 강도가 약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씩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어머니의 폭력은 아버지에 비하면 약했지만, 제 눈앞에서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제게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맞서 싸우다 귀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기도 하셨습니다. 지금 상담가가 되어 청소년들을 상담해보면, 아버지의 폭력은 용서해도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는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저를 지키려고 애쓰셨습니다. "상보가, 너만 믿고 산다. 너는 가출하면 안 돼." 어머니의 말씀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은 점점 심해져 어머니께 쥐약을 먹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쥐약을 먹으라고 강요했고, 어머니는 절망감에 쥐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네 번이나 쥐약을 먹는 어머니를 보며 어린 저는 절망했습니다. 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가 위세척을 하는 과정은 끔찍했습니다. 아들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은 어머니뿐 아니라 저에게도 향했습니다. 어느 날 밤, 자고 있던 저를 칼로 찌르기도 했습니다. 손목과 머리에 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병원에서는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께서는 제 피 위에 쓰러져 잠들어 계셨습니다. 술에 취해 저지른 짓을 까맣게 잊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 저는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실 수 있나요?" 예수님께서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죽을 죄인인데, 내가 피 흘려 너를 사랑했다. 오늘 밤에는 네 아비를 내가 사랑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거든, 내가 사랑하는 네 아비를 용서하고 사랑해 주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저는 아버지의 피를 닦아내고, 잠든 아버지를 껴안고 예수님처럼 영접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아버지에게 했던 기도가 제가 가정 사역과 상담가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 안에서 아버지를 용서하게 하셨습니다. 그 후로도 아버지의 폭력은 계속되었지만, 저는 상처받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축구를 하고, 신문 배달을 하고, 새벽기도를 가는 평범한 일상을 이어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71세에 신경경색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1년 전, 아내에게 "예수 믿어야죠"라는 말을 듣고 "오냐, 믿어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세 분의 목사님을 모시고 영접기도를 하고, 1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천국에 가셨다고 믿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보다는 긍휼한 마음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 긍휼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새벽기도와 성경, 고통을 이겨낸 힘: 학원 강사 섭외 1순위, 웅변대회 동상 수상

중학교 2학년, 예민한 시기에 아버지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를 껴안고 축복 기도까지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바로 '새벽기도'와 '성경'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1년에 300일 이상 새벽기도에 참석했습니다. 새벽기도를 통해 얻는 영적인 힘은 아버지의 폭력과 고통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1년에 3번씩 통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한문 성경, 한글 성경, 영어 성경을 번갈아 읽으며 성경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중학교 입학 당시 꼴찌였던 저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상위 10% 안에 들기 시작했고, 중학교 3학년 때는 전교 1, 2등을 다투는 우등생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얻는 은혜는 국어, 영어, 수학 등 모든 과목에 대한 이해력을 높여주었습니다. 성경이 쉬워지니 공부가 쉬워졌고, 자연스럽게 학업 성적이 향상되었습니다.

학업 성적이 오르자 학원 원장님들이 저를 '스카우트'하려는 경쟁을 벌였습니다. 학원 강사 원장님들은 저를 무료로 학원에 다니게 해주었고, 웅변 학원과 속독 학원에 다니면서 실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웅변 학원에서는 발음 교정을 받고 스피치 능력을 향상시켰습니다. 웅변대회에 참가하여 도 대회 동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속독 학원에서는 책을 세 배나 빨리 읽는 속독법을 익혔습니다. 지금도 책을 빨리 읽는 습관은 그때 속독 학원에서 배운 덕분입니다. 특히 웅변 학원은 말을 제대로 못 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웅변대회에서 '이 연사 외칩니다!'를 외치던 제 모습은 늑대와 함께 했던 야생소년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웅변대회 내용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가득 찬 엉터리였지만, 자신감 있게 연설하는 훈련은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웅변 내용을 암기하느라 밤새도록 선생님께 혼났던 기억은 지금도 씁쓸하게 남아있습니다.

매일 새벽, 안아주던 전도사님: 사랑으로 채워진 결핍, 행복했던 학창 시절

중학교 1학년, 탄광촌 교회 새벽기도에서 만난 전도사님은 제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습니다. 새벽기도에 처음 참석한 날, 빡빡머리에 교복 차림으로 쭈뼛쭈뼛 앉아있는 제게 전도사님은 다가와 "하나님이 너를 위해 기도해주라고 하신다"며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낯선 전도사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 저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날 이후, 전도사님은 매일 새벽기도 때마다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교회 성도들은 돌아가면서 새벽마다 저를 안아주는 '안아주기 당번'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6년 동안, 매일 새벽마다 전도사님과 교회 권사님, 장로님들의 따뜻한 품에 안겨 위로를 받았습니다. 전도사님과 교회 어른들의 사랑은 메마른 제 가슴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분들의 사랑 덕분에 저는 불행하다는 느낌 없이 늘 밝고 명랑하게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부모 복이 많은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저는 행복해 보였다는 뜻이겠죠. 돌이켜보면 새벽마다 저를 안아주던 전도사님과 교회 어른들은 제게 '제2의 부모'와 같았습니다. 그분들의 사랑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의 결핍을 채워주고 상처를 치유해주는 따뜻한 '어머니 품'과 같았습니다. 그 사랑 덕분에 저는 비뚤어지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지금처럼 가정 사역과 상담 사역을 통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된 것도 그때 받았던 사랑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받았던 경험은 사랑을 줄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지는 법이니까요.

초등학교 교사, 건빵 대신 짜장면: 짜장면 배달 택시, 사랑을 싣고 학교로

어린 시절, 건빵 한 가마니를 짊어지고 산속까지 찾아와 주셨던 선생님들의 사랑에 감동받아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대구교육대학교에 진학하여 초등학교 교사가 된 후, 저는 어린 시절 선생님들처럼 제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싶었습니다. 선생님들이 건빵을 주셨다면, 저는 짜장면을 주고 싶었습니다. 한 반에 60명이 넘는 제자들을 모두 집에 데려와 짜장면을 대접했습니다. 한꺼번에 다 데려올 수 없어 반을 나누어 주말이나 방과 후에 돌아가며 제 집에 와서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아내는 제자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짜장면 파티는 늘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짜장면 배달 택시가 아파트 단지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진풍경은 동네 명물이 되었습니다. 저는 짜장면을 통해 제자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문제아 제자들을 위한 특별 치료법: 똥침과 목욕탕, 사랑으로 마음의 문을 열다

특히 기억에 남는 제자는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성향을 가진 '똥침 사건'의 주인공입니다. 수업 시간에 갑자기 뛰쳐나와 제게 똥침을 한 제자. 당황스러웠지만, 저는 그 제자에게서 아버지의 부재와 사랑 결핍으로 고통받는 아이의 슬픔을 보았습니다. 순간적인 분노 대신 연민과 사랑이 마음속에 차올랐습니다. "한 번 더 똥침 해주면 선생님이 더 좋아"라고 말하며 엉덩이를 내밀자, 아이는 신나게 똥침을 했습니다.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아이는 똥침 사건 이후 밝고 긍정적으로 변했습니다. 다음 날, 한 여학생이 울면서 "선생님이 똥침을 당하면서도 웃고, 또 해보라고 하는 모습이 예수님 같았다"는 일기를 써왔습니다. 아이들은 똥침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해, 제 반 학생들의 80%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실은 웃음과 사랑이 넘치는 '천국'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쓴 글들을 모아 문집을 냈는데, 문집 제목은 제자들이 지어준 '천국의 아이들'이었습니다.

학교 부적응 학생들을 위해서는 '목욕탕 치료'를 활용했습니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차갑고 외로운 아이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목욕탕에 함께 가서 때를 밀어주고, 찜질방에서 땀을 빼고, 떡볶이를 사주며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목욕탕에서 등짝을 밀어주는 스킨십은 닫혀있던 아이들의 마음 문을 열었습니다. 목욕탕 치료 후, 아이들은 눈에 띄게 밝아지고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함께 땀을 흘리며 나누는 진솔한 대화는 어떤 상담보다 효과적이었습니다.

원더걸스 선미, 똥침 제자의 감동적인 성장: '아빠'라는 메일 한 통

원더걸스 선미 씨도 제 제자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선미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밝고 긍정적인 아이였습니다. 전교회장에 출마하고 싶다는 선미에게 저는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선거운동 전략도 코치해주었습니다. 선미는 노래와 춤을 활용한 유쾌한 선거운동으로 4학년 학생들의 몰표를 받으며 전교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전교회장 활동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선미는 박진영 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 합격하여 원더걸스 멤버가 되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향해 나아가는 선미의 모습은 제게 큰 감동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선미가 원더걸스로 데뷔할 때, 저는 계약서에 사인을 해주고 추천서를 써주며 격려했습니다. 선미는 연예인이 된 후에도 잊지 않고 제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원더걸스 데뷔 후 딱 한 번 메일이 왔는데, 메일 제목은 '아빠'였습니다. 짧은 메일에는 "열심히 잘 살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선생님은 아빠 같았다"는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메일 한 통에 지난 세월의 모든 어려움과 보람이 녹아있는 듯했습니다. 선미의 성공은 제게 큰 기쁨이자 자랑입니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훌륭한 아티스트로 성장한 선미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뚱뚱했던 제자의 투포환 금메달: 슬픔과 어둠을 던져 희망을 쏘아올리다

말이 없고 소극적이었던 뚱뚱한 여학생 제자에게 투포환 선수로 활동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투포환 연습을 통해 아이는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체육대회 투포환 종목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딴 것입니다. 투포환 금메달은 아이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소극적이었던 아이는 활발해졌고, 살도 빠지고 건강도 되찾았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시를 써서 선물했습니다. "다영아, 너는 아마 너의 슬픔과 괴로움을 투포환에 실어 던졌을 거야. 네 가슴에는 이제 슬픔도 어둠도 없을 거야. 이제 너는 충분히 희망을 던지고 살 수 있을 거야." 투포환 금메달은 아이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던져주었습니다. 저 또한 제자에게 투포환을 가르치면서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던져 희망을 쏘아올리는 '투포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가정 문제 상담, 이혼과 자살: 아픔을 나누고 희망을 찾아주는 상담가

28년간의 교사 생활을 마감하고, 현재는 풀타임으로 가정 사역과 상담 사역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최근 상담 사례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혼' 문제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혼 상담 문의가 쏟아집니다. 이혼 상담을 통해 느끼는 점은, 겉으로 보기에는 남편의 잘못이 명백해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아내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 또한 배우자 선택과 결혼 생활 방식에 있어 잘못된 선택을 했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부부들이 '소통 부재'로 인해 갈등을 겪고 이혼을 선택한다는 점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채, 감정적으로 대응하다 파국을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들이 아내에게 자주 하는 불평 중 하나는 "해줘도 마음이 안 들어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해줘도 아내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오히려 짜증과 불평만 늘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남편들은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난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죠. 반대로 아내들은 남편의 무관심과 무책임함에 지쳐 이혼을 결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대화하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저는 여성들에게 배우자를 고를 때 '두 가지'를 보라고 조언합니다. 첫째, 부모를 사랑하는 남자. 부모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고, 부모와의 관계가 원만한 남자는 인격적으로 성숙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삶을 의미 있게 살고, 타인에게 존경받는 남자. 자신의 삶에 대한 뚜렷한 목표와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남자는 책임감 있고 성실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하는 남자는 인격적으로 훌륭할 가능성이 높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확률 또한 높습니다. 물론 완벽한 사람은 없겠지만, 최소한의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있습니다.

남자들이 여자를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밝은 여자'입니다. 밝고 긍정적인 여성은 남성에게 호감을 줄 뿐 아니라, 가정 분위기를 화목하게 만들고, 남편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존재가 됩니다. 밝은 여자가 되려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딸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남성관을 형성합니다. 아버지가 밝고 긍정적인 딸은 밝고 긍정적인 여성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딸은 남성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고, 결혼 후 남편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황혼 이혼' 상담이 늘고 있습니다. 결혼 20년 차 이상 부부들의 이혼이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독립하고, 부부만 남게 되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갈등이 폭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50~60대 황혼 이혼은 여성들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랜 세월 남편과 자녀를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아내들이 이제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엄마, 이제 그만하면 됐어. 엄마 인생 살아"라며 어머니의 황혼 이혼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남편들은 황혼 이혼에 큰 충격을 받고,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황혼 이혼은 단순히 부부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자살 상담 또한 중요한 상담 영역입니다. 이혼 문제와 함께 자살 상담 문의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살 상담은 개인적인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인간관계 갈등, 정신 질환 등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남성 자살의 주요 원인은 '사업 실패'와 같은 경제적인 어려움입니다. 남성들은 사회적 성공과 성취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면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성 자살의 주요 원인은 '가족 관계 단절'과 같은 인간관계 문제입니다. 여성들은 관계 지향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에게 버림받거나 배신당했다고 느낄 때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자살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상담을 통해 이혼 위기에 놓인 부부들의 70%는 관계를 개선하고, 30%는 이혼 후에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상담은 문제 해결의 만능열쇠는 아니지만,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합니다. 상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찾고, 행복한 삶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아버지의 유언, 천국에서의 재회: 영원한 작별, 영원한 만남

소록도에서 99세로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제게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상보가, 할아버지 죽거든 천국에서 만나자 찬양 불러주고 잔치를 해라. 장례식은 하지 말고."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소록도에서 화장으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례식에는 아버지와 저, 단둘만 참석했습니다. 아버지는 "네가 평생 할아버지 돌봤으니, 마지막 길은 네가 보내드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속 깊은 곳의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화해의 제스처처럼 느껴졌습니다. 할아버지의 시신이 화장되는 동안,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천국에서 만나보자'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화장장에는 나환자 150여 명이 함께 모여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천국에서 만날 소망을 노래하는 나환자들의 모습은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천국에서 만나보자' 찬송가를 부릅니다. 할아버지와의 천국 재회를 소망하며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 화장 장면을 보면서도 울지 않으셨습니다.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습니다. 상담을 통해 깨달은 것은,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슬픔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은 슬픔을 넘어선 절망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아버지 등을 두드리며 "아버지, 우세요"라고 하자, 아버지께서는 "상보가, 나도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난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당신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께서 천국에 가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자, 제게 "그래도 너는 잘 살았다"는 칭찬과 위로, 그리고 그동안 미안했다는 사과의 마음을 전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할아버지 장례 이후, 소록도에는 다시 가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늘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손 없는 팔로 흔드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상보가, 할아버지 외롭지 않아." 할아버지의 따뜻한 음성은 여전히 제 마음속에 울려 퍼집니다. 이제는 제가 할아버지의 사랑을 세상에 전할 차례입니다. 가정 사역과 상담 사역을 통해 세상의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외롭지 않아요. 예수님을 믿으면 괜찮아요. 예수님의 사랑은 상처보다 크니까요"라고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 장례식에서 부르고 싶은 찬양은 '주 예수와 동행하니'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평생을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았다는 고백을 마지막 순간에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양이며, 제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입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현재 상담 사역까지, 감동과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타인을 돕는 삶을 살아오신 목사님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과 도전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방송을 통해 가정 문제나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1. 한 고대 문서 이야기

2. 너무나도 중요한 소식 (불편한 진실)

3. 당신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유

4. 신(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5. 신의 증거(연역적 추론)

6. 신의 증거(귀납적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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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9. 성경의 사실성

10. 압도적으로 높은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12.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

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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