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 탈북, 세 번 북송 끝에 만난 구원과 믿음의 힘 김애란 간증
네 번 탈북, 세 번 북송, 그리고 하나님: 김애란 전도사의 드라마틱 생존기
4번의 탈북, 3번의 북송…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김애란 전도사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
새롭게하소서 유튜브 채널에 공개된 순복음삼마교회 김애란 전도사의 간증은, 단순한 탈북 스토리를 넘어 한 여인이 겪은 극적인 고난과 그 속에서 발견한 불변의 믿음을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주영훈, 연애, 이정수 세 MC의 따뜻한 진행과 함께 김애란 전도사는 네 번의 탈북과 세 번의 북송이라는 믿기 힘든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고, 마침내 진정한 정체성을 찾게 된 감동적인 이야기를 2만 자 내외의 분량으로 상세히 풀어냅니다. 스크립트 내용을 꼼꼼히 정리하여, 마치 한 편의 인간 드라마를 읽는 듯한 깊은 여운을 선사하는 이번 글은, 김애란 전도사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독자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와 믿음의 힘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1. 고난의 씨앗: 북한에서의 삶과 탈북의 결심
1990년대,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이 시기에, 김애란 전도사의 가족 역시 굶주림과 절망 속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90년대가 북한에서 배급도 끊기고 엄청 어려운 시기였어요. 고난의 행군 때 사람들이 많이 굶어 죽는 그 시기였는데..." 김 전도사의 회고는 당시 북한 사회의 참혹한 현실을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특히, 두 다리를 잃은 부모님을 봉양해야 했던 소녀 가장 김애란에게 가난은 더욱 뼈아픈 현실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몸이 많이 불편하니까 일을 할 수 없고, 저희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좀 그런 걸 많이 했어요. 그런데도 그거 가지고 모자라는 거죠."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고된 생활 속에서, 김 전도사는 중국에 가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중국에 가면 잘 산다고, 먹을 거 많다고, 그리고 돈도 벌어서 올 수 있다고 이런 소문을 북한에서 들었어요."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가족을 살리고자, 17세 소녀 김애란은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하기로 결심합니다.
2. 첫 번째 탈북: 두만강을 건너 희망을 찾아
"첫 번째 탈북이 너무 생생하죠." 김애란 전도사는 첫 탈북 당시의 긴장감과 두려움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국경 경비가 삼엄한 두만강을 건너기 위해, 그녀는 이틀 밤낮을 걸어 국경 연선에 도착했습니다. "이틀 동안 정말 꼬박 걸어갔는데, 참 무서운 그런 장면들도 많이 지나쳤죠." 차량 불빛과 인적을 피해 숨죽이며 이동해야 했고, 3월의 매서운 추위 속에 온몸이 얼어붙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엄청 추웠어요. 겨울 3월 1일, 섣달 그믐 엄청 추워요. 너무 추워서 온몸이 다 막 다 얼어 있었어요." 밤 12시가 넘어, 김 전도사는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는 위험천만한 시도를 감행합니다. "두만강 옆에도 철길이 있거든요. 무산 백무선 철길에 거기에서 이제 보니까 군대들이 한 두 시간에 한 번씩 또 순찰을 하더라고요. 그걸 기다려서 군대들이 순찰 끝난 다음에 또 철길을 넘어서, 그 두만강 옆에 건너 섰어요. 그래 가지고 이제 건너 뛰었죠." 두만강은 이미 녹기 시작했지만, 김 전도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강을 건넜습니다. "정말 여기서 죽나 가다 죽나 뭐 이런 각오로 가셨을 거 아니에요? 예, 각오를 가지고, 죽을 각오를 가지고, 붙잡힐 각오를 하고 해서..." 그녀의 간절한 염원은 기적처럼 이루어져, 마침내 중국 땅을 밟게 됩니다.
3. 중국에서의 5년: 위장 결혼과 불안한 삶
중국에 도착했지만, 김애란 전도자를 기다린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닌 또 다른 고난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의지할 곳 없이 헤매던 그녀는, 우연히 만난 조선족 할머니의 도움으로 연길로 향하게 됩니다. "중국 땅을 갔는데 새벽이든, 어, 내 생각에는 한 3시, 4시, 5시, 그 정도 같아요. 그때 갔는데 막 개도 짖고 농촌, 중국 쪽의 농촌 마을이에요. 그런데 이제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렸어요." 할머니의 따뜻한 배려로 잠시 안정을 찾았지만, 공안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고, 탈북자 단속은 강화되었습니다. "갑자기 이제 그 인신 매매 단속인가, 그런 검사가 이제 한 번씩 쳐요. 공안국에서 북한 사람들 붙잡는 그런 검사가 있는데 갑자기 심해진 거예요." 불안한 상황 속에서 김 전도사는 위장 결혼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북한으로 나올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이 분들은 지금 나를 데리고 있으면 안 돼요. 자기들도 위험하잖아요. 아이, 어떻게 할지 모르는 거예요." 생존을 위해 택한 결혼이었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먼 불안과 고독의 연속이었습니다. "가정 생활은 뭐 행복하지는 않았죠. 그리고 이제 맨날 사실은 목적이 돈 벌러 들어왔잖아요. 아버지 어머니도 이제 계속 걱정이 되고, 동생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고, 그냥 그 근심이..." 5년 동안 위태로운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중, 결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4. 첫 번째 북송: 원성 보위부 감옥의 끔찍한 기억
"걸렸어요. 그럼 어떻게 되셨어요? 다시 북송되는 거예요." 김애란 전도사는 담담하게 첫 번째 북송 당시를 회상합니다. 중국 감옥을 거쳐 북송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북한에 이제 가자마자, 그 뭐, 아니 그러면 고문 같은 것도 막 당하고 막 그래요? 네. 제가 이제 탈북했을 때는 탈북한, 탈북했다 붙잡힌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마 그게, 이렇게 아마 그런 검사를 여러 곳에서 심하게 하면서 많이 붙잡혔다 봐요, 중국의 여러 곳에서." 운 좋게 직접적인 고문은 피했지만, 원성 보위부 감옥에서의 40일은 인간 이하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좁디좁은 감방에 4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수감되어, 숨 막히는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습니다. "감방은 작은데 사람을 너무 많이 밀어 넣으니까, 어, 그 사람이, 뭐 내 생각에는 한 10명 정도도 좁아 꽉 막힐 것 같은데 거의 40명을 밀어 넣어요. 그래 놓으니까, 이게, 이게 사람이 이렇게 무릎 위에 다른 사람이 앉고, 그 무릎 위에 다른 사람이, 그러니까 안고 이렇게 책책책 앉아서, 그나 이렇게 다 또 붙어 앉아 있는 거예요. 이게, 그런데 내 무릎 위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거예요." 서서 잠을 자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강제 노동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원성 노동 단련대라고 불렀어요. 거기는 노동으로 사람을 개조한다는 것이니까, 노동으로 사람을 개조한다니까 한번 일 해 봐라, 이거예요. 그러니까 혼나 봐라는 식으로 일을 시키니까, 얼마나 이제 일을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무슨 일을 시켜요." 힐을 신은 채로 산을 오르내리며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끔찍한 기억은, 그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제가 제일 처참했던 광경인 것 같아요."
5. 두 번째, 세 번째 탈북과 북송: 끝나지 않는 고난
"그렇게 고생을 하셨는데, 또 이제 2차 탈출을 하신단 말이에요? 탈북을 하신단 말이에요? 이런 상황인데 만약에 잡히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이미 체험을 하셨는데도 이제 탈북을 또 시도하신 거잖아요?" MC의 질문처럼,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두 번째 탈북을 김애란 전도사는 감행합니다. 북송 후 보름 만에 다시 탈북을 시도한 이유는, 중국에 두고 온 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딸을 중국에 두고 나왔기 때문에, 일단은 몸은 살아서 집은 갔어요. 어쨌든 몸은 살았어요. 집은 갔는데, 어, 계속 딸 생각이 너무 나는 거예요." 그러나 두 번째 탈북은 이틀 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또 다시 북송되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세 번째 탈북 역시 성공하지 못하고, 연이어 북송되는 고통을 겪습니다. 세 번의 북송을 통해, 김 전도사는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북한 감옥의 실상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한번 붙잡혀 나왔다가, 그럼 중국에 갔다는 게 이제 다 알았잖아요. 전에는 행방불명이 됐었는데, 이제 중국 탈북 했었구나 이걸 알았잖아요. 그다음부터는 이제 우리 동생들이랑 좀 안 좋더라고요. 직장에서도, 어, 이제 여러 가지 정치적으로 많이 걸려 걸리고, 친척들한테도..." 탈북과 북송의 악순환은, 그녀의 삶을 더욱 깊은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6. 네 번째 탈북: 새로운 시작을 향하여
세 번의 북송이라는 끔찍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김애란 전도사는 네 번째 탈북을 감행합니다. 이번에는 사전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국경 경비병에게 뇌물을 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번에 붙잡혔기 때문에 계획이 없이 이제 가다가 붙잡혔기 때문에, 이번에 좀, 2년 동안에 있으면서 좀 짰어요. 예, 어디로 갈 것이며, 몇 시에 어디로 가서 어떻게 할 것이다를 계획했죠. 그리고 그때 듣기로는, 어, 국경 경비대들한테 돈을 어느 정도 주면은 이렇게 무사하게 넘어갈 수 있다고..." 네 번째 탈북은 마침내 성공했고, 김 전도사는 다시 중국 땅을 밟게 됩니다. 그러나 감옥에서의 트라우마는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이제 딱 가서, 예, 그다음부터 이제 내가 정신적으로 좀 이상했던 것 같아요. 이게 왜냐하면 감옥에서 여러 가지 트라우마를 겪고, 항상 조마조마 숨을 죽이고 뛰어다니고, 숨도 못 쉬고, 이제 숨가쁜 그런 어떤 압력 속에, 어떤 이런 그 압도적인 그런 분위기 속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항상 살아서 그랬던가 봐요." 불면증에 시달리고,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휩싸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불면증을 한 7, 8년을 앓았어요. 잠을 못 잤어요. 정말 한 잠도 못 잤어요. 정말 못 잤어요. 새벽에 4시, 그때 조금 잠이 와서 자면은 악몽을 꾸는 거예요. 계속 사람 죽은 시체 보이고, 장례식을 하고 다니고, 이 꿈에서 계속 뱀 무리가 보이고, 이거 계속 꾸니까 이거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예요. 잠도 안 자는데 조금 자면, 그래서 또 잠을 못 자겠는 거예요. 제가 이런 시간을 정말 7, 8년을 보냈어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던 김 전도사에게, 교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7. 교회와의 만남: 절망 속에서 찾은 구원의 빛
"어디 이제 헤매다가 생각하는 게 교회예요, 교회였어요." 삶의 벼랑 끝에 선 김애란 전도사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교회의 문을 두드립니다. 집사님의 도움으로 교회에 발을 들인 그녀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교회, 한 집사님 집에 들어가서, 그 집사님을 통해서 교회로 인도받고, 예. 그때부터 저의, 제가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됐던 거 같아요." 낯선 중국 교회에서, 김 전도사는 오직 성경에 매달리며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교회니까 TV 없어요. 다른 책들도 없어요. 딱 성경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에 이제, 일요일 날 하고 수요일 날 예배 외에는 나 혼자 계속 있어야 되는 거예요. 하루 종일 나 혼자 있어야 되는 거예요."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예배에 참석하는 단순한 일상 속에서, 그녀의 마음에는 서서히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보니까 내가 이렇게 마음에 어느 정도의 평안함이 오더라고요. 예. 아, 교회 안에서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너무 이렇게 마음이 너무나도 전보다 평안해지는구나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한국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깊은 은혜를 받고, 말씀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정말 그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듣고 듣는데, 자꾸 어느 순간에 내 속에 쌓여 있더라고요. 어느 순간에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거예요. 어느 순간에 내가 기도하고 있고, 어느 순간에 내가 이 성경을 안 읽으면 안 된다는 이렇게 이런 사람이 됐더라고요."
8. 구원과 정체성 회복: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다
"하나님을 만나면서 어떤 깨달음이 생겼어요?" MC의 질문에 김애란 전도사는 구원의 의미와 정체성 회복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면서 제 가장 중요하게는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제가 깨달았는데요. 구원은 내가 이렇게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오늘날 보니까 자꾸만 생각에서 그 복잡하고 그 트라우마 이런 생각들이 자꾸만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지고, 얼굴도 자꾸 펴지고, 마음이 자꾸, 그러니까 이제 힘이 나니까 뭘 일을 하고 싶잖아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고, 말씀과 기도, 헌신을 통해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김 전도사는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나의 자존감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하면서 내가 오늘날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구원을 받았구나. 이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구나. 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내가 말씀 속에 내가 한 거는 예배와 기도드리고, 교회 안에서 헌신한 것밖에 없는데, 내가 점점 점점 달라지고 있구나. 1년, 2년, 점점점점 다른 사람이 돼 버리는 거예요." 세례를 받던 날, 그녀는 확실한 구원을 체험하고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제가, 지금도 제일 잊혀지지 않는, 아까 언제 구원을 받으신 것 같으신가 물어보셨잖아요? 그, 교회에 와서 한 반년 정도 됐을 때, 제가 이제 세례를 받았어요. 세례를 받을 때 그날을 잊을 수가 없는데, 그때 너무 눈물이 나고, 정말 내가 이렇게 너무 감격스럽던, 그, 그런 심정이었어요. 근데 그때 내가 구원받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확실한 구원을 받지 않았나, 하나님의 구원이 그때 내 영혼 속에 큰 울림이 있지 않았나..." 상처와 원한으로 가득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영과 육이 동시에 회복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9. 내면의 싸움: 영적 전쟁과 자아와의 투쟁
"광명한 천사"라는 남편의 지적은, 김애란 전도사에게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면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그러는 거예요, 나를 보고 강명한 천사라는 거예요. 광명한 천사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가서는 그렇게 일을 잘하고, 엄청나게 사람들한테서 전도도 많이 하고, 인정을 받고, 너는 집에 오면은, 어, 딱 마귀 같다는 거예요, 날 보고." 겉으로는 천사처럼 행동하지만, 내면에는 분노와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녀는 자신과의 영적 싸움을 시작합니다. "한번 이 속에서 울분이 이제 터져 오르면 걷잡을 수가,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떤 분노나, 이 울분이 올라오면 참을 수가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폭력으로, 내가 이제 그것을 이제 하는 거예요, 반응을 하는 거예요, 폭력으로. 예. 근데 폭력이 어떻게 바뀌냐면, 막 그 손에 리모컨이나 핸드폰이나 지면은 그냥 꽉, 부숴 버리는 거예요, 쉰다고. 예. 꽉, 부숴 버리는 거예요." 마태복음 12장 28절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의 내면에 귀신의 나라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영적 전쟁에 돌입합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의 말씀을 보고, 아, 내가 이렇게 변덕도 많고, 앞뒤가 이렇게 막, 그, 집에 와서 하는 행동이 다르고, 이 행동이 왜 이럴까? 그게 내 안에 사실은 귀신의 나라가 있구나. 귀신이 이게 뭔가를 틀고 있구나." 거울을 보며 자신의 눈을 응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 번씩 기도하는 강렬한 영적 훈련을 통해, 그녀는 내면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칩니다. "거울을 보고 내 눈을 계속 보면서 고백을 했어요. 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 속에 들어간 이 분노와 혈기, 너는 지금 내 속에 머무르지 말고 떠나가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끊임없이 이런 영 싸움을 아주 강력하게 했어요." 10년에 걸친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영적 투쟁은, 마침내 그녀를 내면의 평화와 진정한 자유로 인도합니다. "정말 자신과 지금, 지금도 많이 싸우고 있고요. 지금도 만약에 아, 이제 어떤 문제가 생기가 좀 괴롭다, 좀 힘들잖아요? 그러면 제가 즉시 내 기도를 해요. 제가 진짜 이거 나만의 공간이 있는데, 나만의 거울을 놓고 들어가서, 내 얼굴을 보면서, 네 표정이 지금 어떠냐? 네가 지금 섭섭해 하는 표정이냐? 아니면 누구를 미워하는 표정인가? 아니면 네가 지금 화가 난 표정이냐? 얼굴을 확인해요. 그러면서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 속에 이 생각이 뭔가 조금 섭섭하거나, 기분이 안 좋거나, 뭔가 이런 게 오잖아요? 자존심이 상하거나. 그러면 그걸 순간에 내가 또 기도하면서..."
10. 사역자의 길: 북한 복음화와 통일을 향한 비전
"사역자 우울증"이라는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김애란 전도사는 기도와 헌신으로 사역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갑니다. "한국에 딱 왔는데 이게 돈을 벌어야 되는지 사역을 해야 되는지, 이게 모르겠는 거예요. 돈은 벌어야 살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이런 상황에서 조금 제가 갈등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아르바이트와 사역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녀는, 새벽 기도를 통해 신앙을 회복하고, 삼마교회를 만나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새벽 기도를 다 10년 동안 하던 새벽 기도를 다 잊어버리고, 왜냐하면 알바를 다닌다고 하니까 새벽 기도도 안 하고. 저 자신을 보면서, 나의 신앙생활이 점점 다운되고 있구나.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이제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묵상하며,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오직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합니다. "사도 바울이 했던 이 사도행전 20장에 22절부터 24절의 말씀이 가장 나를 강력하게 울려 줬던 거 같아요. 그 말씀이 뭐냐면요, 성령의 매인 바 돼 가지고, 내가 앞으로 갈 바를 알 수가 없지만, 그러나 나는, 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복음 전파함에, 어, 목, 생명도 아끼지 않는다고,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바울이 고백했던 그, 그 말씀이 딱 찔러 들어오는데요." 교회 옆으로 이사하여 새벽 기도와 예배를 회복하고, 훈련에 매진하며, 사역자로서의 삶에 집중합니다. "제가 어느 정도로 결단을 했냐면요, 어, 서울에서 교회 옆으로 아예 이사를 갔어요. 아, 교회 옆에 가서 다시 새벽 기도를 회복해야 되겠다. 내가 이전에 10년을 드렸던 새벽 기도 회복하고, 예배를 회복해야 되겠다. 어, 교회 가서 기도해야 되겠다. 교회 가서 훈련을 확실하게 교회 옆에서 훈련 받아야 되겠다." 잃어버렸던 딸과의 재회는, 김애란 전도사에게 또 다른 기쁨과 위로를 선사합니다. "딸이 일곱 살 때 헤어지고 못 만났어요. 얼굴 한 번도 보지는 못했어요. 커서 대학교 갈 때, 그때 엄마하고, 어, 이제 연결이 된 거예요. 영상으로. 예. 연결이 돼 가지고, 어, 지금은, 년, 지금 3년째 만나고 있고요." 영상 예배를 통해 딸과 영적인 교류를 나누고, 관계 회복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그녀의 사역에 더욱 큰 힘을 실어줍니다. "지금은 매일 예배드리고 있어요, 같이 영상으로. 예. 그리고 엄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엄마, 엄마 따르고, 그, 딸이 또 이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가지고..." 통일을 향한 간절한 소망과 북한 복음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김애란 전도사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동력입니다. "저는 앞으로 통일이 되기를 고대하는 사람이 한 사람으로서, 어, 이제, 저 북한에 2,500만 저 영혼들이 사실은 가짜 하나님을 섬기고 있잖아요. 제가 하나님 만나고 보니까, 저 북한에는 똑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님 자리에다가 김일성, 김정일을 딱 옮겨 놨더라고요." 북한 땅에 진정한 복음을 전하고, 고통받는 영혼들을 치유하는 치유 사역자로서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김애란 전도사는 오늘도 믿음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복음 통일을 준비하면서, 앞으로 통일이 되면 내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이런 부분을, 저 땅에 또 많은 사람들이 서, 저에게 이제 그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알려 줘야 되겠죠. 또, 그리고 그래서 진짜 구원받게 해야 되고, 이때까지 왜 이렇게 저주 속에 살았고, 왜 이렇게 고통 속에 살았는지, 하나님을 떠난 사람과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흑암에 잡혀 있는 이 땅이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분명히 설명해 주고 싶고요. 또, 사람들 심령 속에 자리 잡았던 그 모든 아픔들 있잖아요, 슬픔들, 분노와 상처들 있잖아요, 살인과 충동들 있잖아요. 이런 것들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그런, 그런 치유 사역자로 준비하고 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