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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광규 목사 간증: 간첩 아들에서 복음으로 인생역전 성공기

요약

나락에서 천국으로, 간첩 아들 인생역전

사람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가? - 연광규 목사, 새롭게하소서 간증 상세 정리

이번 글에서는 유튜브 채널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하신 연광규 목사님의 간증 내용을 20,000자 내외로 상세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텍스트 내용을 최대한 충실하게 담아내되, 추가적인 내용은 덧붙이지 않고, 영문 텍스트를 한국어로 재작성하여 의미를 정확하게 반영하였습니다. 특히, 간증 속에 담긴 변화의 기법과 방법론을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정량적으로 서술하여 독자분들이 핵심 노하우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요약은 최소화하고, 상세한 내용 전달에 집중하였으며, 한글 텍스트는 3~4문장 줄바꿈을 적용하여 가독성을 높였습니다. 불필요한 쉼표나 따옴표는 제거하고, 불릿 대신 서술형 문장과 문단을 사용하여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문장 연결 어구를 풍부하게 사용하여 매끄러운 연결을 지향하고, 직접 설명 방식을 통해 친절하고 자세하게 내용을 전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핵심 내용과 중요 노하우는 극도로 자세하게 서술하되, 불필요하거나 중복되는 내용은 최대한 간결하게 정리하여 핵심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친근하고 자세하며 친절한 "~습니다" 문체를 사용하여 서술형으로 작성되었으며, 중요 키워드 및 내용은 볼드체(15% 내외)로 강조하여 핵심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문장 연결 어구는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특히 "~인데요" 연결 어구를 적절히 사용하여 자연스러운 흐름을 더했습니다. 중요 문장이나 단어는 볼드체로 강조하고, 긴 문장은 단락을 나누어 가독성을 높였으며, 문단의 첫 문장은 반드시 볼드체로 처리하여 핵심 내용을 강조했습니다. 글의 제목은 "~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대신 더욱 친근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작성하였으며, "블로그 글" 또는 "설명"과 같은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마크다운 렌더링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볼드체 괄호나 따옴표 사용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수치, 통계, 데이터, 레퍼런스, 논문, 저자, 연도 등의 인용은 최소화하고 텍스트 내용 자체에 집중했습니다. 볼드체 괄호나 따옴표 오류 방지 규칙을 엄수하였으며, 직설적이고 명확한 어조를 사용하여 강한 부사, 명령, 단정, 확신, 강조 등의 표현을 활용하여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대화체와 문어체를 7:1 비율로 혼용하여 친근함과 전문성을 동시에 유지하고자 했으며, 수사적 질문을 빈번하게 사용하여 독자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고, 과장법, 강조, 집중 등의 표현을 통해 내용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습니다. 비유와 예시를 활용하여 복잡한 개념을 쉽게 설명하고, 전문 용어와 일상 언어를 조화롭게 사용하여 전문 용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노력했습니다. 문제 제기 - 해결책 제시, 단계적 설명, 반복 강조, 대조/비교, 구체적 예시 등의 방법을 활용하여 내용을 체계적으로 구성하고, 통계/데이터 인용 및 전문 레퍼런스 인용은 최소화했습니다. 마크다운 형식을 준수하여 소제목은 ##으로, 볼드체 강조를 활용하고, 헤더는 ## 레벨로, 서술형 문장과 문단(3~5문장)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인데요" 연결 어구를 적절히 사용하고, 볼드체는 15% 내외로 유지하며, 유튜브 썸네일 삽입은 생략되었습니다. 볼드체 인용구 오류에 주의하여 텍스트를 작성하였으며, 전체 내용을 한 번에 제공하고, 짧은 컨텍스트 분할은 지양하며, 3~4줄 줄바꿈, 불필요한 쉼표 제거, 반복 제거/통합/정돈 등의 과정을 거쳐 문체를 통일하고 체계적이고 정돈된 글을 완성했습니다. 마크다운 헤더 ##을 사용하여 내용을 구분하고, 볼드체는 15% 내외로 제한하여 강조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순수 마크다운 형식으로 작성되었으며, 'markdown' 단어 또는 코드 블럭과 같은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간첩 아버지,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 삶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려고 합니다. 제 이야기는 평범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제 아버지가 간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남파 간첩 말이죠. 여러분은 간첩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아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셨던 것처럼 비밀스럽고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실 텐데요. 네, 실제로 제 아버지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남한에 침투하여 간첩 활동을 하셨던 거죠.

아버지는 고정 간첩들과 함께 활동하며, 비밀 자료를 수집하여 북한으로 보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무선 통신을 이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북한에서 무장 군인 그룹이 내려와 직접 자료를 받아 가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데려오고 데려가는 일도 아버지의 임무 중 하나였죠. 정말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DMG, 즉 비무장지대에서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도 아버지의 몫이었습니다. 개척조가 먼저 들어가 지뢰를 해제하면, 침투조가 그 길을 따라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고 다시 지뢰를 묶는 방식이었죠. 약속된 날짜에 다시 선발대가 나가 지뢰를 해제하고 침투조가 복귀하는, 정말 위험천만한 일들을 아버지는 감당해야 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무려 세 번이나 남북을 오가는 침투를 감행했습니다. 조장을 맡아 조원들을 이끌고 임무를 수행했죠. 두 번까지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지만, 세 번째 침투 때 국군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상황은 정말 긴박했다고 합니다. 총격전이 벌어졌고, 아버지와 대원들은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대원들은 모두 전사하고, 아버지 혼자 복부에 관통상을 입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총알이 몸을 뚫고 지나가면서 장기가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끔찍한 상황이었죠. 당시 아버지는 혀가 말려 기도가 막히는 것을 막기 위해, 총기 손질 도구인 '소재'를 혀에 꽂아 고정시키고, 쏟아져 나온 장기를 쓸어 담아 기어서 월북했다고 합니다. 정말 상상하기 힘든 고통과 사투 끝에,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북한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영웅 칭호를 받을 만했지만, 조원들을 모두 잃었다는 이유로 영웅 칭호 대신 '국기훈장 1급'이라는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김일성 고당 학교라는 곳으로 보내졌죠. 고급 학교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전상자들을 위한 병원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안북도 선천군에 있는 전상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났다고 합니다. 어머니 역시 특수부대 출신으로, 낙하 훈련 중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수혈을 해 주면서 사랑이 싹텄다고 합니다.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죠?

그렇게 부모님은 1970년대 후반, 전상자 병원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아버지는 간첩으로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북한에서 꽤 잘 살았다고 합니다. 키도 훤칠하셨어요. 아버지는 180cm, 어머니는 170cm나 되셨다고 합니다. 저도 부모님 덕분에 키가 큰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치료 후 동부 철도 관리국 당 조직 비서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고, 김일성에게서 명절 때마다 선물도 받았다고 합니다. 사슴 고기, 꿩 고기, 귤, 심지어 100년 된 산삼까지 선물로 받았다고 하니, 당시 아버지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총상 후유증 때문이었죠. 몸속에 박힌 총알 파편이 염증을 일으키고 합병증을 유발한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는 제가 12살 때 합병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간경화, 복수, 기관지 천식, 폐결핵, 신장염 등 여러 병이 한꺼번에 찾아왔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없는 설움, 방황의 시작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린 시절은 정말 힘겨웠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놀림과 멸시였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고아'라고 놀리고 깔봤습니다. 저는 마음이 여리고 순한 아이였는데, 북한 사투리로 '어지다'라고 하죠. 그런 성격 탓인지 아이들이 저를 만만하게 보고 괴롭혔습니다. 키는 컸지만, 늘 맞고 다니기 일쑤였죠. 맞고 울면서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속상해하셨습니다. 어느 날, 또 맞고 들어온 저를 보시더니 어머니는 엉덩이를 때리시며 "나가서 너를 때린 녀석을 때리고 오기 전에는 집에 들어오지 마라"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저는 겁이 났지만, 어머니의 불호령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때릴 용기는 나지 않았죠. 밤늦도록 밖에서 سر성이다가 새벽녘에 몰래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주무시지 않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반겨줄 줄 알았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더 화를 내셨습니다. 때리고 왔냐는 질문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아신 거죠. 결국 저는 또다시 쫓겨났습니다.

이번에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벽돌 조각을 들고, 저를 괴롭히던 아이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주먹으로는 이길 자신이 없었기에, 벽돌로 기습 공격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이를 불러내어 벽돌로 머리를 내리치고 도망쳤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숨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아이를 보며 아이 엄마는 격분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내 아들을 잘못 키웠다"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이 엄마를 돌려보낸 후, 어머니는 저를 칭찬해주셨습니다. "잘했다" 하시면서 엉덩이를 토닥여 주셨죠.

그날 이후, 어머니는 저에게 싸움 기술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특수부대에서 배운 실전 격투 기술이었죠. 멱살 잡혔을 때, 가까이 붙잡혔을 때,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등 상황별 제압 기술을 어머니는 자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멱살을 잡혔을 때는 상대방 팔을 꺾고, 가까이 붙잡혔을 때는 어깨와 겨드랑이를 이용하여 몸을 틀어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 등을 배웠습니다. 한번 싸움에서 이기고 나니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학교에서 싸움 잘하는 아이, 즉 '불량배'가 되었습니다.

불량 학생, 패싸움과 범죄의 늪

싸움 기술을 익힌 후,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맞고 다니던 아이였지만, 이제는 오히려 친구들을 때리고 다니는 불량 학생이 된 것입니다. 13살, 14살 무렵부터 패싸움을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경찰인 '안전부'도 두려워하지 않았죠. 거리에서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기도 하고,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질렀습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특수부대 출신 형님들에게도 싸움 기술을 배우며 실력을 키웠습니다. 저녁마다 훈련을 하고, 배운 기술을 거리에서 실전처럼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도서관 위치를 묻는 척하며 기술을 사용해 쓰러뜨리고 도망가는 식이었죠.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였습니다. 경제난이 극심해지면서 사회 분위기도 흉흉해졌죠. 먹고 살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범죄가 만연하는 시기였죠. 저는 그때 싸움을 함께 했던 친구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대부분 '사회 불량배' 소탕 작전 때 총살당했습니다. 김정일이 사회 불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보위사령부에서 직접 내려와 사회 불량배들을 색출하여 처형했다고 합니다.

저의 이모부 역시 고난의 행군 시기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집에 갔더니, 이모부가 이미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먹고 살기 힘든 고난의 행군 시기에 중국에서 먹을 것을 구해 오려다 국경 경비대에 붙잡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19살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정말 꼭지가 돌았습니다. 술을 마시고 대낮에 이모부를 고문했던 국경 경비대 책임자를 찾아가 폭행했습니다. 상관 폭행죄로 체포되었고, 결국 그 책임자가 폭행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저는 살인죄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보위부 출신이었지만, 예외는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공로 덕분에 보위부에 입대했지만, 범죄 앞에서는 그 어떤 배경도 소용없었습니다. 당시 보위부는 북한의 국정원과 같은 곳이었죠. 권력은 막강했지만, 감옥행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감옥은 정말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800명 수용 시설에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었고, 매년 1,500명 이상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 나갔습니다. 쥐를 잡아먹고, 뱀을 뺏어 먹는 생지옥이었습니다. 저 역시 영양실조 3도 진단을 받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옥에서의 복음, 새로운 삶의 시작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감옥 당국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감옥에서, 저를 병보석으로 석방해 준 것은 아버지의 공로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3년 만에 감옥에서 나왔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렸죠.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 역시 감옥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러던 중, 감옥에서 들었던 '복음'이 떠올랐습니다. 감옥에는 중국에 갔다가 잡혀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중국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이야기해주었던 것이죠. 아침, 저녁으로 흰쌀밥을 먹고, 남은 밥은 개에게 줄 정도라고 했습니다. 감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똥 묻은 쥐를 뺏어 먹고, 뱀에 물릴까 봐 걱정하기보다 뺏길까 봐 전전긍긍하던 감옥 생활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중국에서는 기름을 국자로 퍼서 요리를 한다고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기름 한 방울도 귀하던 시절이었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저에게 '복음'처럼 들렸습니다.

저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을 이끌고, 한겨울 두만강을 건너기로 한 것입니다. 구정 명절이라 경비가 소홀할 것이라고 판단했죠. 하지만 두만강 얼음을 절반쯤 건넜을 때, 국경 경비병들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저는 필사적으로 뛰었습니다.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뛰었습니다.

두만강을 건너 쓰러졌을 때, 저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소리를 따라 내려가 보니, 골짜기 아래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당에는 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주인은 중년의 중국인이었습니다. 한국말을 할 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는 언어 장애가 있는 척하며 배고픔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집주인은 한국말로 "북조선 사람이냐"며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켜주고, 새 옷을 입혀주고, 따뜻한 저녁 식사까지 차려주었습니다. 쌀밥에 고기 반찬, 정말 꿈같은 식탁이었습니다.

식사를 하던 중, 집주인은 저에게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너를 위해 기도해 줘도 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기도가 시작되었는데, 밥 냄새, 고기 냄새가 코를 찌르는 상황에서 기도는 너무 길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집주인의 기도는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북한에서 죽어가는 동포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의 모습은, 저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집주인은 저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술을 좋아했던 저는 기대했지만, 집주인은 술 대신 간장처럼 보이는 검은 액체를 따라주었습니다. "콜라"였습니다. 난생 처음 맛보는 콜라의 맛은 정말 황홀했습니다. 저는 그날 콜라 한 병을 다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집주인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도둑과 선교사, 충격적인 용서

다음 날, 집주인은 시내에 볼일이 있다며 집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소와 집을 맡기고 말이죠. 어제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것도 탈북자 신분의 저에게 집과 소를 맡긴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함정은 아닐까, 의심도 들었지만, 집주인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소똥을 치우고, 집안일을 도우며 집주인을 기다렸습니다.

저녁 늦게 집주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짐을 보니, 헌 옷들이 가득했습니다. 헌 옷을 천장에 숨기는 것을 도왔는데, 그 안에는 옷뿐만 아니라 식량, 돈, 책 등 다양한 물품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북한에서 자매 세 명이 찾아왔습니다. 집주인은 저에게 했던 것처럼 친절하게 자매들을 맞이했고, 헌 옷과 식량, 돈, 책 등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돈을 주는 것을 보고, 저는 '이 집에 있으면 나도 갈 때 잘 챙겨주겠구나'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북한에서 아버지와 아들, 삼촌으로 이루어진 세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집주인은 그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고, 다음 날 아침 새 신발을 신겨 보내주었습니다. 저는 소를 몰고 산으로 갔다가, 왠지 모르게 집에 내려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집에 도착해보니, 집안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식량과 기름이 사라졌습니다. 도둑이 든 것이었습니다. 발자국을 보니, 어제 새 신발을 신고 떠났던 세 남자의 발자국이었습니다.

저는 화가 났습니다. 도둑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칼을 들고 발자국을 따라 산을 넘었습니다. 마침내 세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국경 근처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혜를 발휘하여 삼촌을 먼저 제압하고, 아들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도망가지 못했죠. 세 남자를 묶어 창고에 가두고, 실컷 때려주었습니다. 도둑을 잡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집주인이 돌아오면 칭찬받을 생각에 들떠 있었죠.

저녁 늦게 집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의기양양하게 도둑 잡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집주인은 창고로 달려가더니, 묶여 있는 도둑들을 보고 갑자기 저에게 화를 냈습니다. "너도 사람이냐!" 집주인은 도둑들을 풀어주고,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묻지 않고, 주고 싶은 것만 주었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둑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잘못했다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집주인의 행동은 저에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저도 예수님을 믿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둑들 역시 집주인의 용서에 감동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집주인은 도둑들을 데리고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가 훈련시킨 후, 북한으로 파송했다고 합니다.

성경과의 만남, 신학교 그리고 북한 선교

그날 이후, 저는 성경책을 다시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창세기부터 막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고작 네 명밖에 없는데, '만나는 자'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이해되지 않는 구절들이 계속 나타났습니다.

집주인에게 물어봤지만, 집주인 역시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명쾌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냥 믿으라는 말만 되풀이했죠. 답답했지만, 성경을 계속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집주인이 저에게 신학교에 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더 깊이 배우라는 것이었죠. 저는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왔는데, 신학교는 망설여졌습니다. "신학교 가면 돈 줍니까?"라고 물었더니, 집주인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라고 답했습니다. 그 말을 믿고, 저는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주인은 저를 중국 길림성 장춘에 있는 신학교로 데려갔습니다. 허름한 개인 주택이었지만, 그곳은 북한 선교사를 양성하는 귀한 곳이었습니다. 한국인 선교사님과 중국인 사모님이 저희를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신학교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저를 만나주셨고, 출애굽기 3장 10절 말씀을 통해 저를 북한으로 보내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성령 체험을 하고, 뜨겁게 회개하며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신학교에서 20일 금식 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께서는 제 머리에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싸움으로 인해 머리에 큰 흉터가 있었는데, 금식 기도 중에 흉터가 아물고 머리카락이 자라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하게 체험했습니다.

북한으로, 죽음을 각오한 선교 여정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후, 저는 북한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보위부 출신이었기에, 북한에서 선교 활동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북한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분명한 소명을 주셨기에, 저는 두려움 없이 북한으로 향했습니다. 성경책 26권, 라디오, 십자가, 제자양육 지침서, 설교 CD 등 선교 물품을 가득 챙겨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국경 초소를 통과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초소를 통과하게 해주셨습니다. 초소 근무자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무사히 초소를 통과한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 당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저에게도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저는 북한에 들어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지하 교회를 개척하며 4년간 사역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보위부에 체포되어 4년간 감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지하 교회 사역을 포기하지 않고, '여호와 닛시'라는 지하 교회를 설립하여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보위부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고, 결국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탈북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바다를 통해 탈북하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기도 하고, 러시아 해상에서 표류하다 구조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후, 저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 실망했습니다. 통일에 대한 무관심, 다음 세대의 영적 침체 등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2017년 추석, 탈북민들과 함께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0장 1절 말씀을 통해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저는 탈북민들을 위로하고, 남북한 청년들이 하나 되는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비전 유니피케이션'이라는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현재 미국 텍사스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달라스 통일 광장 기도회'를 통해 통일 운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통일의 문이 열릴 날을 소망하며, 북한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할 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저를 훈련시키시고, 인도해주셨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통일 한국을 위해, 북한 복음화를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까? 혹시 삶의 어려움 속에서 방황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희망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저의 간증이 여러분에게 작은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1. 한 고대 문서 이야기

2. 너무나도 중요한 소식 (불편한 진실)

3. 당신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유

4. 신(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5. 신의 증거(연역적 추론)

6. 신의 증거(귀납적 증거)

7. 신의 증거(현실적인 증거)

8.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9. 성경의 사실성

10. 압도적으로 높은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12.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

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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