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 탈북과 세 번의 이혼… 고난 속에 피어난 믿음
"하나님을 외치며 목숨 건 탈북, 대한민국 1호 귀순 배우 겸 가수 김혜영의 숨겨왔던 이야기"
주영훈 님의 따뜻한 인사와 함께, 새롭게하소서의 문이 열립니다.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의 주영훈입니다. 오늘, 정말 오랜만에 뵙는 반가운 손님을 모셨는데요, 연애 씨, 박 씨, 함께 인사 나누시죠. 안녕하세요, 연애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입니다. 오늘 초대 손님은, 우리 모두가 기다려온 특별한 분입니다. 결혼과 이혼의 아픔을 겪으셨지만, 용기를 내어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오신 분인데요. 대한민국 1호 귀순 가수이자 배우이신 김혜영 님을 모시고, 그 숨겨진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김혜영 님, 어서 오세요.
김혜영 님의 밝은 미소와 함께 스튜디오가 환해집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아, 이거 뭐야? 주영훈 씨, 저는 다른 방송에서 김혜영 님을 자주 봬서, 당연히 새롭게하소서에도 나오신 줄 알았어요. 제가 진행하는 방송에도 나오셨었거든요. 아, 네, 김지선 선배님 프로그램이나, 다른 선배님들 방송에 출연했었어요. 새롭게하소서에는 오늘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아, 다른 방송 출연 경험 때문에, 저도 새롭게하소서에 나오신 줄 알았습니다. 선배님, MC 보시는 모습, 정말 멋지십니다. 잘 지내셨죠? 네, 주영훈 씨 말씀처럼, 저는 귀순 가수 겸 배우로, 한때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었죠. "휘파람" 노래 기억하시죠? 휘, 휘휘. 대한민국에 처음 왔을 때, 제 전공은 원래 연극이었어요. 평양연극영화대학을 다니다가, 방학 때 함경북도 청진 집으로 내려왔었는데요. 전지현 씨, 소유진 씨와 동기였어요. 제 아내가 전지현 씨와 동기인데, 아, 정말요? 신기하네요. 저희 집사람과 동기시라니. 그때, 서로 "어머, 어머" 하면서 놀랐겠네요. 정말 쟁쟁한 탑스타들과 동기였다니, 놀랍습니다. 학교에서 자꾸 저한테 제안이 왔었는데, 저는 불교 학교는 갈 수 없잖아요. 맞아요, 저는 크리스천이니까요. 신도분들이 왜 크리스천인데 동국대를 갔냐고 하시더라고요. 아는 감독님 추천으로 가게 됐는데, 불교 대학인 줄 몰랐어요. 최근에 신곡 "삐딱 삐딱선"을 발표하셨죠? 네, 맞아요. 제가 좀 삐딱하게 살아온 인생이라, 이제는 좀 바르게 살아보자 다짐했는데, 신곡 제목이 "삐딱선"이라니, 아이러니하죠? 하나님이 더 이상 삐딱선 타지 말고, 바르게 살라고 이 노래를 주셨나 봐요. 노래 멜로디가 궁금한데요, 살짝 불러주실 수 있나요? "삐딱선을 타고 저만치 가는 얄미운 사람아, 그 발길을 돌려라." 제가 어제 새벽까지 미스터트롯 심사하다 왔거든요. 여기까지 와서 또 노래 심사를 하게 될 줄이야. 꺾는 솜씨가 대단하신데요? 북한 창법이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네, 북한에서는 "동포 여러분" 할 때, 콧소리 섞인 개꼬리 창법을 많이 쓰거든요. 정경자 선생님께서 한국 창법으로 바꿔보자고 하셔서, 이번 신곡은 한국 창법으로 불렀어요. 20년 넘게 북한 창법으로 노래했으니, 습관이 쉽게 안 고쳐지네요. 그래도 그게 김혜영 씨만의 매력 아닐까요? 저는 본인의 장점은 굳이 버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함이니까요. 저, 소원이 하나 있는데요. 주영훈 집사님 곡, 꼭 한번 받고 싶습니다. 저한테 곡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갑자기 곡 의뢰가 들어왔네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찬양곡 만드는 건 어떠세요? 찬양곡 좋죠. 좋습니다. 이 얘기는 따로 저쪽에서 다시 한번 심도 있게 논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혜영 님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김혜영 님의 스토리를 쭉 훑어보니, 정말 파란만장하더라고요.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들도 많을 텐데, 오늘 용기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 결코 쉽지 않은 인생 여정이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고백해 주셨습니다. 방송 출연을 결심하기까지, 많이 망설였을 것 같아요. 네, 사실 시청자분들이 보시기에는, 제 이야기가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굳이 방송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제 이야기는 그냥 마음속에 묻어두고, 죽을 때까지 숨기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힘든 순간마다,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항상 저를 건져주시고, 구원해주시고, 지켜주셨어요.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방송을 통해 간증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간증 프로그램에 나와서, 하나님 이야기를 빼면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일반 방송에서는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들을, 오늘 새롭게하소서에서 시원하게 풀어내 주시길 기대합니다. 북한에 계실 때도 신앙이 있으셨나요? 네, 저희 외할머니께서, 어머니 어릴 적부터 무릎에 눕혀놓고 찬송가를 불러주셨어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를 자장가처럼 불러주시면서, 성경 말씀도 가르쳐주셨다고 해요. 북한에서는 종교 활동이 금지되어 있잖아요. 성경책이나 찬송가를 소지하거나, 찬송가를 부르면 잡혀가기 때문에, 이불 속에서 몰래 찬송가를 가르쳐주셨대요. 할머니는 어머니 13살 때 돌아가셨지만,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말씀과 찬송가를, 어머니께서 저희에게도 가르쳐주셨어요. 하지만, 어린 저희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와닿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어디 계시지? 어느 나라에 살아? 북한에는 안 계시나?" 엄마한테 엉뚱한 질문만 던지곤 했죠. 엄마는 항상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 라고 말씀하셨지만, 저희는 "에이, 말도 안 돼" 하면서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어머니는 항상 잠자리에 들기 전이나, 어디를 가든, 잠깐이라도 꼭 기도하셨어요. 제가 여섯 살 때, 김일성 생일 잔치 기념 전국 유치원생 독창 가수를 뽑는 대회가 있었어요. 전국에서 단 한 명을 뽑는 엄청난 대회였는데, 함경북도 청진에서만 200명 넘는 아이들이 참가했어요.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어머니께서 간절히 기도하셨어요. 오디션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인지, 최종 2인에 제가 뽑혔어요. 저와 이름이 비슷한 전혜영이라는 친구와 함께요. 심사위원들이 저희 둘 다 실력이 비슷해서 고민하다가, 점수를 매겨서 다시 오디션을 보기로 했어요. 결과적으로, 저는 88점, 친구는 7점을 받아서, 제가 최종 우승자가 되었죠. 유치원 선생님들이 저를 집에 보내주지 않고, 그날부터 계속 안고 주무셨어요. 그런데, 다음 날 갑자기 다시 시연회를 한다고 통보가 온 거예요. 이상해서 알아보니, 최종 2인에 함께 뽑혔던 친구의 부모님이, 남파 간첩을 관리하는 대남 연락소 직원이었던 거예요. 북한에서는 대남 연락소 직원은 자녀들에게까지 모든 혜택을 제공했거든요. 반면, 저희 할아버지는 남한 출신이고, 일본에도 친척이 있었어요. 출신 성분 때문에, 제가 최종 선발에서 탈락하게 된 거예요. 그때는 너무 속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는 "만약 네가 그때 덜컥 뽑혀서 평양에 갔더라면, 우리 가족이 탈북할 수 없었을 거야.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작은 부분까지도 계획하신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후, 저는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진학했고, 대학 방학 때 청진 집에 내려왔는데, 갑자기 부모님께서 친척집에 여행 가자고 하시는 거예요. 온 가족이 여행 가는 건 처음이라, 너무 신났어요. 그런데, 밤에 출발했는데,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기차역까지 쫓아오면서 슬프게 짖는 거예요. 부모님께서는 저희에게 탈북한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으셨어요. 혹시라도 아이들이 발설할까 봐,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저희에게는 그냥 친척집에 놀러 간다고만 하셨어요. 하지만, 강아지가 슬프게 짖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집안의 모든 가전제품을 그대로 둔 채, 몸만 덜렁 빠져나온 것도 이상했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저희 가족은 탈북을 감행하고 있었던 거예요. 양강도 혜산까지 이틀 밤낮으로 기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거기서도 한번 잡힐 뻔했어요. 친척집이라고 둘러댔지만, 사실 그 집은 친척집이 아니었어요. 원래는 무역 쪽 고위 간부 집이었는데, 그렇게 잘 사는 집에서 왜 탈북을 결심했을까요?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버지의 직장 때문이었습니다. 굳이 탈북까지 감행할 이유가 있었냐고요? 북한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곳입니다. 자유라고는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죠. 저희 아버지는 10년 전부터 탈북을 계획하셨다고 해요. 자녀들만큼은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키우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요. 마침 아버지께서 외국 출장을 다녀오시면서, 함께 갔던 직원 중 한 명이 탈북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북한에서는 해외 출장 시,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든 직원을 무사히 귀환시켜야 할 책임이 아버지께 있었던 거예요. 아버지는 이 사건을 계기로, 탈북을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게 저희 가족은 10년간 준비해온 탈북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를 데리고 압록강 국경까지 몰래 이동하셨어요. 국경 경비가 삼엄해서, 압록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위기를 맞았습니다. 경비대들을 따돌리고, 무장 군인들을 피해, 저희 셋(저와 여동생 둘)만 먼저 강을 건너기로 했어요. 당시 저는 22살, 여동생들은 19살, 13살이었죠. 강을 건너 중국 땅에 도착했지만, 약속 장소에서 고모를 만나기로 했지만, 고모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한참을 헤매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저희를 보더니 "너희들 북에서 온 아이들이 아니냐? 어서 우리 집으로 들어가 있어. 여기 있으면 잡혀간다" 하시며 저희를 집으로 데려가 주셨어요. 할아버지 댁에 들어가 보니, 할머니께서 갓난아기를 보고 계셨어요. 저희는 할아버지 댁에 낯선 분위기에 어색하게 앉아 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서 할머니께 "애들 좀 봐줘" 하시더니 밖으로 나가셨어요. 할머니께서 잠시 후, 저희에게 "손주 좀 봐 줘. 잠깐 나갔다 올게" 하시며 나가셨는데,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할머니 집은 대문보다 지붕이 낮았는데, 할머니께서 나가시면서 바깥에서 문을 잠그시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아, 함정에 빠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국에도 탈북자들을 신고하는 경비대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할머니가 저희를 신고하러 간 거라고 직감했어요. 동생들에게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 소리치고, 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미 밖에서 잠겨 있었어요. 담을 넘어야 하는데, 담이 너무 높아서 뛰어넘을 수 없었어요. 시골집이라 장독대가 많았던 게 떠올랐어요. 장독대를 밟고 올라가 담을 넘기로 했죠. 제가 먼저 장독대 위에 올라가 앉아서, 동생들을 어깨로 밟고 뛰어내리게 했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담이 너무 높아서 망설여졌어요. 평소 철봉도 제대로 못 하는 저였지만, 그 순간 초인적인 힘이 솟아났어요. 담을 뛰어넘어, 할머니가 갔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정신없이 뛰었어요. 100m쯤 뛰었을까, 저 멀리서 낯선 여자가 달려오는 게 보였어요. 사진으로만 봤던 고모였어요! 고모도 저희 사진을 보고 저희를 찾아온 거예요. "혜영이, 순영이, 은영이 맞니? 내가 고모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모와 상봉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지만, 기쁨도 잠시, 고모는 "여기 있을 시간이 없어. 곧 경비대가 들이닥칠 거야. 빨리 아빠가 마련해 놓은 은신처로 가야 해" 하며 저희를 재촉했어요. 고모를 따라 아빠가 마련해 둔 중국 은신처로 급히 피신했어요. 두 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아빠, 엄마와 감격적인 재회를 했습니다. 부모님까지 무사히 중국으로 건너오신 거예요! 저는 영영 부모님을 다시 못 만날 줄 알았어요. 셋이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는데, 고모는 "울고 있을 시간이 없어. 빨리 피해야 해. 친척집은 위험해. 북한에서 벌써 탈북자 명단을 확보했을 거야. 중국 공안에 연락해서 우리를 잡으러 올지도 몰라" 하며 저희를 서둘러 다른 은신처로 옮겼습니다. 아빠 친구분이 마련해 준 은신처는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허름한 곳이었어요. 중국식 마루방, '공굴'에서 저희 가족은 7개월을 숨어 지냈습니다. 공안에 잡힐까 봐, 밤마다 창문에 밧줄을 매달아 놓고, 삐삐 소리만 들려도 창문으로 뛰어내릴 준비를 했어요. 2층 은신처에서 밧줄 하나에 의지해 탈출을 감행할 생각까지 했다니, 정말 아찔합니다. 7개월 동안 맘 편히 바깥 구경도 못 하고, 일주일에 한 번,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 장을 보러 나가는 게 전부였어요.
납치, 인신매매 위기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오다. 어느 날, 제가 장을 보러 나갔다가, 정말 끔찍한 일을 겪었습니다.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자루를 제 얼굴에 씌우는 거예요!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차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갔어요. 납치범들은 중국어로 웅얼거렸는데, 7개월 동안 중국에 머무르면서, 중국어를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어요. 납치범들의 대화를 엿들어보니, 저를 인신매매하려는 것 같았어요! 어린아이부터 여자들까지, 인신매매해서 장기를 적출하거나, 팔아넘긴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납치된 상황, 인신매매, 장기 적출...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현실이 눈앞에 닥친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 절체절명의 순간,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엄마, 아빠, 동생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여기서 죽을 순 없어요. 하나님, 제발 저를 지켜주세요." 납치범들은 한 시간 넘게 차를 달려, 어떤 낯선 집에 저를 끌고 갔습니다. 낡은 집 문을 열고 저를 밀어 넣더니, 밖에서 문을 잠그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얼굴에는 자루가 씌워진 채, 손은 묶여 있지 않은 상태였어요. 캄캄한 방에 혼자 남겨졌는데, 갑자기 제 귓가에 "너 빨리 여기서 도망쳐! 안 그러면 죽어!" 하는 환청이 들리는 거예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살아야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솟아났습니다. 묶여있던 자루를 찢고 벗어보니, 낡은 부엌이었어요. 석탄 아궁이와 부삽, 갈고리 등이 널려 있었죠. 밖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내일 아침에 다시 올 테니, 저 여자 잘 지키고 있어." 두 명은 가고, 한 명만 남아서 저를 감시하는 것 같았어요. 부엌을 둘러보니, 다행히 부삽이 눈에 띄었어요. 살아야겠다는 절박함에, 부삽을 움켜쥐고 감시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감시자가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 있는 힘껏 부삽으로 머리를 내리쳤어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감시자가 쓰러졌어요. 저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어둠 속에서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였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있는 힘껏 소리치며, 불빛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저 사람들이 저를 다시는 잡지 못하게 해주세요!"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등 뒤에서 누군가 덮치는 듯한 환영에 시달리며, 쉴 새 없이 뛰었어요. 불빛이 보이는 집 앞에 쓰러지듯 도착해서,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집주인이 문을 열고 나와 "누구세요?" 물었고, 저는 "납치당했어요! 살려주세요!" 울부짖었습니다. 집주인은 일단 저를 집 안으로 들여주었어요. 낯선 집에 갇혔지만, 일단 납치범들에게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정신을 잃을 뻔했어요. 다행히, 그 집에는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세 분이 마작을 하고 계셨어요. 할아버지들은 저를 보더니, 납치당한 사람임을 직감하신 듯했어요. 주변에 인신매매 사건이 빈번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들은 저를 진정시키고, 물을 가져다주시고, 안정을 취하도록 도와주셨어요. "혹시 연락할 곳은 없냐?" 물으셨지만, 저는 핸드폰도 없고, 연락할 곳도 없었어요. 하지만, 문득 아빠 친구분 전화번호가 떠올랐어요! 예전에 아빠 친구분이 비상시 연락하라며 알려주신 번호였죠. 떨리는 손으로 아빠 친구분께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아빠 친구분은 곧장 저를 찾아와 주셨어요. 아빠는 먼 곳에 계셔서, 다음 날 아침에야 도착하실 수 있다고 했어요. 다음 날 새벽, 아빠 친구분과 함께, 엄마, 아빠가 계신 곳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납치 사건은 엄마, 아빠에게는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비밀로 했어요. 심장이 약한 엄마가 충격받으실까 봐,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어요. 대한민국에 도착하고 얼마 후, 용기를 내어 엄마께 납치 사건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엄마는 제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으셨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히려 저를 위로해 주셨어요. 중국 한국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중국에서는 한국 대사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몇 번이고 대사관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어요. 결국, 제3국을 통해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베트남을 경유하기로 했습니다. 탈북 과정, 납치, 인신매매 위기, 제3국 망명... 정말 파란만장한 여정이었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위험 속에서, 저희 가족은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대한민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냉방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동생, 기적적으로 살아나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망명을 기다리는 동안, 또 한 번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베트남 영사관님 댁에 머물게 되었는데, 영사관 부부께서 독실한 크리스천이셨어요. 영사관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하나님 말씀 테이프를 들려주셨어요. 처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흘려들었지만, 제 둘째 동생이 테이프를 듣고 찬송가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둘째 동생이 갑자기 냉방병에 걸려 쓰러졌습니다. 베트남은 날씨가 무척 더운데, 동생이 에어컨 바람을 너무 오래 쐬었던 거예요. 몸이 굳어지고 마비되기 시작했는데, 냉방병은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라고 하더라고요. 당시 저희는 망명 신청자 신분이라, 함부로 병원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영사관님께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동생은 점점 더 괴로워하며,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더니, "하나님 아버지, 살려주세요"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저희는 동생이 죽어가는 줄 알고, 눈물만 펑펑 쏟았죠. 그때, 영사관님이 급히 베트남 병원으로 데려가 주셨지만, 일요일이라 병원 문이 닫혀 있었어요. 하는 수 없이 베트남 현지 병원으로 갔는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며 손을 놓았어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엄마는 동생 손을 잡고 "하나님, 제 딸을 살려주세요. 여기서 죽으면 안 돼요" 간절히 기도했어요. 그때, 나이 지긋한 여자 의사 선생님 한 분이 지나가다, 상황을 보시더니 "왜 이렇게 포기하고 있냐! 살릴 수 있을 때까지 살려봐야지!" 하시며, 갑자기 동생의 가슴을 위에서부터 뼈가 부서져라 누르기 시작했어요. 30분 넘게 심폐소생술을 하셨는데, 놀랍게도 동생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는 거예요! 냉방병으로 죽어가던 동생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순간이었죠. 저는 그 의사 선생님의 손길을 통해, 하나님께서 동생을 살리셨다고 믿습니다. 동생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보면서, 저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어요. 베트남에서 우여곡절 끝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1호 귀순 배우, 김혜영으로 다시 태어나다. 한국 땅을 밟던 순간, 그 감격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3사 방송 9시 뉴스에 제 이야기가 보도되었는데, 저는 뉴스에는 나쁜 짓 하는 사람만 나오는 줄 알았어요. 제가 뉴스에 나올 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당시 김혜영 씨 가족의 귀순은 엄청난 화제였습니다. 귀순 배우 1호라는 타이틀도 얻게 되었고요. 처음에는 방송 출연을 망설였어요. 북에 있는 친척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걱정했거든요. 북한은 연좌제가 심해서, 친척들에게까지 불이익이 가해지거든요. 하지만, 다행히 북한에는 외가 친척밖에 없었어요. 아빠는 함경북도 출신이지만, 할아버지가 남한 출신이셨거든요. 친가 친척들은 이미 한국에 와 계셨고요. 북한에서는 여자는 출가외인이라고 해서, 외가 친척들에게는 피해가 없을 거라고 판단하고, 방송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뉴스 보도 후, 저는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어요. 각종 예능 프로그램 섭외가 쏟아지고, CF도 찍고, 존경하는 이순재 선생님과 보신각 타종 행사에도 참여하고,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강호동 씨와 함께 CF를 찍기도 하고, 드라마,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어요. "귀순 배우 1호"라는 타이틀은 항상 저를 따라다녔죠. 김지선 씨와 함께 출연했던 KBS "코미디 세상만사" 코너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덕분에 저는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북한 말투를 코믹하게 흉내 내는 연기가,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던 것 같아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저는, 정말 쉴 새 없이 활동했어요. 차에서 쪽잠을 자면서, 하루에 4~5개 스케줄을 소화하기도 했죠. TV만 틀면 김혜영이 나왔다고 할 정도로, 방송 출연이 잦았습니다. 승승장구하던 그때, 첫 번째 결혼 발표를 했습니다. 20대 중반, 한창 인기가도를 달리던 시기였죠. 첫 번째 남편과의 만남은, 뮤지컬 "열녀 춘향" 공연 때 이루어졌습니다. 악극 공연이었는데, 장욱제 선생님, 태현실 선생님 등 유명 배우분들과 함께 출연했어요. 첫 번째 남편이 공연을 보러 왔는데, 알고 보니 배우 박주아 선생님 조카의 친구였어요. 공연을 보고 저에게 반해서, 박주아 선생님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꽃다발을 뺏어서 저에게 주면서, 팬이라고, 꼭 만나고 싶었다고 고백하더라고요. 첫 만남부터 강렬했네요? 네, 첫눈에 반했어요. 훤칠한 외모에, 성형외과 의사라는 번듯한 직업까지, 모든 게 완벽해 보였죠. 당시 남남북녀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제가 딱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했어요. 20대 초반, 저는 연애 경험도 부족했고, 순수한 마음에 섣불리 사랑에 빠졌던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손만 잡아도 결혼해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한국에 와보니, 연애 문화가 완전히 달랐지만, 저는 여전히 순수했던 거죠. 첫 번째 남편은 열흘 동안 공연장을 매일 찾아왔어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링거까지 맞아가면서 열정적으로 구애하는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박주아 선생님도 "성형외과 의사면, 얼마나 잘생겼겠어. 한번 만나봐" 부추기셨고요. 성형외과 의사라는 직업도, 당시에는 낯설고 멋있어 보였어요. 북한에는 성형외과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거든요. 야매 성형은 있었지만요. 어쨌든, 첫 번째 남편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마지막 공연 날, 남편 될 사람을 보러 오셨어요. 멀리서 지켜보시더니, "괜찮은 사람 같네. 만나봐라" 허락하셨죠. 그렇게 첫 번째 남편과 2년 열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생활은 얼마나 지속되었나요? 그리고 이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첫 번째 이혼, 엇갈린 사랑과 외도. 첫 번째 남편과는 천주교 신자였어요. 저는 크리스천이었지만, 시댁을 따라 천주교로 개종하고, 미카엘라라는 세례명도 받았어요. 남편은 신앙심도 깊고, 성실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점에 끌려서 결혼을 결심했죠. 하지만, 결혼 후, 저는 쉴 새 없이 바빴고, 남편은 춘천에서 병원을 운영했어요.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어요. 어느 날, 공연을 마치고 팬들에게 받은 케이크와 선물을 들고, 남편에게 깜짝 방문했어요. 남편에게 연락도 없이 춘천 집으로 갔는데, 현관문 비밀번호를 몰라서 문을 두드렸어요. "누구세요?" 남편 목소리가 들리는데, 왠지 모르게 당황한 기색이었어요. 한참 만에 문을 열어주는데,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뭔가 숨기는 듯한 느낌? 김치냉장고, 베란다, 집안 곳곳을 둘러보다가, 베란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여자를 발견했어요! 눈앞에 벌어진 현실이 믿기지 않았고, 충격과 슬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 여자, 대체 누구였을까요? 묻지도 않았어요. 그냥 "당장 나가!" 소리쳤죠. 남편은 무릎 꿇고 빌면서 용서를 구했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뒤였어요. "당신 얼굴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 차갑게 내쫓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계속 용서를 빌었지만, 저는 단호하게 이혼을 결심했어요. 시댁 식구들이 저에게 너무 잘해주셨는데, 이혼 사실을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어요. 이혼 서류 정리가 끝난 후에도, 명절 때 시댁에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며칠 후, 시아버님께서 땅 등기를 떼어보시다가, 이혼 사실을 뒤늦게 아셨어요. 시아버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3년 결혼 생활 동안 한 달에 한두 번밖에 못 만났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첫 번째 이혼 후, 저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어요. 이별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껴봤거든요. 부모님도 이혼하셨지만, 부모님은 너무나 아름다운 부부였기에, 이혼은 상상조차 못 했어요. 엄마는 방에 틀어박혀 기도만 하시고, 밖으로 나오시지 않으셨어요. 제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시고, 밤마다 제 방에 오셔서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해주셨습니다. 새벽에 물 마시러 거실에 나갔는데, 아빠가 캄캄한 거실에 앉아 흐느끼고 계셨어요. 눈물 없는 줄 알았던 아빠의 눈물을 처음 본 순간,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남편을 용서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후회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20대 어린 나이에, 사랑 경험도 부족했고, 배신감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껴봤기에,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엄마는 항상 "결혼하면, 남편밖에 모르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거든요. 저 또한 남편도 그렇게 해주길 바랐고요. 어쩌면, 제가 남편에게 너무 소홀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남편에게 소홀했던 저의 잘못을 회개합니다. 첫 번째 이혼 후, 힘든 시간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북한에서도 신앙생활을 하셨으니, 교회에 다니면서 위로를 받으셨나요?
교회, 새로운 사랑, 그리고 두 번째 이혼. 첫 번째 이혼 후, 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새벽기도회 목사님, 영락교회 목사님께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어요. 새벽교회는 핑클 성유리 씨 아버님이 목사님으로 계시는 교회였는데, 저도 핑클 팬이었거든요. 교회에 가면 성유리 씨도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만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목사님 설교 말씀이 너무 은혜로워서, 교회에 가는 게 즐거웠습니다. 첫 번째 이혼 후, 교회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한동안 교회에 발길을 끊었었어요. 하지만, 힘든 시간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서, 다시 교회를 찾게 되었죠. 교회에 가서 텅 빈 예배당에 앉아, 목놓아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와 함께 기도하면서, 힘든 시간을 견뎌냈어요. 첫 번째 이혼 사실을 방송에서 고백했을 때, 목사님, 권사님들께서 전화하셔서 위로해주시고, 기도해주셨어요. 그분들의 따뜻한 위로와 기도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또 혼자 지내시다가, 두 번째 결혼을 하셨죠? 네, 사랑의 아픔은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말처럼, 두 번째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첫 번째 이혼 후, 너무 힘들고 외로웠어요. 이 사람과의 이별을 후회하기도 하고, 자책하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보냈습니다. 일도 재미없고, 삶의 의욕도 잃어버렸죠. 그때, 이순재 선생님께서 연락하셔서, 뮤지컬 "홍도야 울지 마라" 출연 제안을 하셨어요. 힘들 때일수록 일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으로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뮤지컬 연습을 하면서, 두 번째 남편을 만났어요. 뮤지컬 배우였는데, 첫 만남부터 삐걱거렸습니다. 대본 리딩 때, 제가 북한 말투 억양이 섞인 대사를 했는데, 갑자기 비웃는 거예요! 기분이 너무 나빠서, "나는 뭐 좋아서 북한말 쓰는 줄 아냐!" 쏘아붙였죠. 그랬더니, 미안했는지, 연습 끝나고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고 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북한 억양을 처음 들어봐서 신기하고 재밌어서 웃었다고,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솔직하게 사과하는 모습에,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뮤지컬 배우들은 연습 끝나고 술 한잔하는 게 일상인데, 자연스럽게 술자리에 함께하면서 가까워졌어요. 두 번째 남편은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힘들었던 지난날을 위로해주었어요. 늦은 밤, 집까지 데려다주기도 하고요. 힘든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 남편에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두 번째 남편도 이혼 경험이 있는 분이었어요. 어느 날, 두 번째 남편이 저에게 고백했어요. 같은 배우로서, 서로 의지하고, 배우로서의 고충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두 번째 결혼, 이번에는 행복할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결과는 또다시 이혼이었네요. 두 번째 이혼은 왜 하게 된 건가요? 두 번째 이혼 이야기는, 서로 약속해서 함구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남편과의 이혼보다, 두 번째 이혼은 훨씬 더 힘들었어요. 정신과 상담까지 받아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정신과 의사 선생님도, "두 분은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며, 이혼을 권유하셨어요. 결국, 어린 아들을 위해, 두 번째 이혼을 결심했습니다. 두 번째 이혼 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죠?
세 번째 결혼, 그리고 세 번째 이혼, 끝나지 않는 고난. 네, 두 번째 이혼 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세 번째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MC를 맡았던 낚시 프로그램에, 프로레슬러 이왕표 선생님이 게스트로 출연하셨어요. 녹화가 끝나고, 이왕표 선생님께서 저를 보시더니, "김혜영 씨, 참하고 괜찮은 사람 같은데, 내가 아는 동생을 소개시켜주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이왕표 선생님은 제가 존경하는 분이라, 선생님께서 소개해주시는 분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혼 경험이 두 번이나 있다 보니, 섣불리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기가 두려웠어요.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 더 이상..." 했더니, "결혼하라는 거 아니고, 그냥 한번 만나보라는 거야. 연애만 하든지, 아니면 그냥 친구로 지내든지." 부담 없이 만나보라는 말씀에, 조금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며칠 후, 낚시 프로그램에 세 번째 남편이 될 사람이 게스트로 출연했어요! 알고 보니, 이왕표 선생님께서 제 이야기를 듣고, 세 번째 남편에게 출연을 부탁하신 거예요. 세 번째 남편은 인터넷으로 저에 대해 검색해보고, 제 방송을 찾아보고, 출연을 결심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까맣게 모른 채, 녹화에 임했는데, 녹화가 끝나고, 세 번째 남편이 다가와 사진 촬영을 요청했어요. 사진을 보내주려면 연락처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연락처를 주고받았습니다. 며칠 후, 세 번째 남편에게 연락이 왔어요. 세 번째 남편은 저에게 "혜영 씨의 아픔을 보듬어주고, 아들 희성이를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키우겠다"고 진심을 담아 말했어요. 당시, 아들 희성이가 아빠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눈에 밟혔어요. 놀이터에서 아빠와 함께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들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엄마, 나는 왜 아빠가 없어?" 아들의 물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어요.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들의 간절한 바람에, 세 번째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남편의 진심에 감동했고, 아들에게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세 번째 남편에게도 프러포즈를 받고,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세 번째 결혼 역시 실패로 끝났습니다. 세 번째 결혼 생활은 얼마나 지속되었나요? 세 번째 결혼 생활은 3년 정도 지속되었어요. 세 번째 남편은 결혼 후, 저에게 "이제 방송 활동을 하지 말고, 가정에만 충실해달라"고 요구했어요. 저를 너무 사랑해서, 저를 독점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모든 스케줄을 남편에게 보고하고, 남편 스케줄에 맞춰 생활해야 했어요. 심지어, 남자 연예인 연락처를 모두 지우라고 강요하고, 골프도 남편하고만 치라고 했어요. 옷도 남편이 골라주는 옷만 입어야 했고요. 처음에는 남편의 과도한 집착을, 저에 대한 사랑 표현이라고 착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의 집착은 구속으로 변질되었고, 숨 막히는 결혼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남편이 구속된 상황에서, 남편은 저를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견디다 못해, 세 번째 이혼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이혼은 순탄치 않았어요. 합의 이혼이 아닌, 소송으로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남편이 저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한 거예요. 위자료 때문이었는데, 이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따지기 위해, 저에게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어요. 뮤지컬 공연 당시, 선배 남자 배우들에게 "오빠"라고 불렀다는 이유로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었지만, 소송은 3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마지막 조정 재판에서, 판사님께서 "더 이상 소송을 끌지 말고,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각자 새 출발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어요. 판사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처럼 느껴졌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이혼 소송 때문에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 그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어쩌면, 하나님께서 판사님을 통해, 저에게 응답해주신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세 번째 이혼 소송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긴 이혼 전쟁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세 번의 이혼, 고난 속에서 찾은 하나님의 위로. 세 번의 이혼, 정말 굴곡진 인생 여정이었네요. 아직 다 말씀 못 하신 고통스러운 시간들도 많으실 텐데요. 하지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죠? 네, 맞아요. 특히 세 번째 이혼 후,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이혼 때는, 엄마의 기도 덕분에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세 번째 이혼은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습니다. 정말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했었습니다. 첫 번째 남편과 이혼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서, 손목을 긋기도 했어요. 피가 났는데도, 아프지도 않고, 오히려 웃음만 나왔어요. 그때, 엄마가 제 방에 들어오셔서, 쓰러지듯이 저를 붙잡고 우셨어요. 엄마는 그 후로, 제 곁에서 24시간 떨어지지 않으시고, 밤낮으로 기도해주셨습니다. 세 번째 이혼 후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수면제를 3개월 동안 모았어요. "이제 더 이상 살아서 뭐 하나" 절망감에 휩싸여, 수면제를 모두 털어넣으려고 했습니다. 유서까지 써놓고, 수면제를 손에 든 채, 30~40분 동안 망설였어요. 그때, 여덟 살 아들 희성이가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와, 저에게 안겼습니다. 아들의 따뜻한 품에 안기자,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내가 죽으면 우리 아들은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수면제를 내려놓고, 아들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아들이 저를 살린 거예요. 그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저를 살리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또 어리석은 생각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아들을 안고 한참을 울고 있는데, 김지선 언니에게 전화가 왔어요. 울먹이며 전화를 받았더니, "혜영아,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무슨 일 있어?" 걱정하며 묻는 거예요. 수면제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어서, 그냥 아들이 갑자기 안겨서 울었다고 둘러댔죠. 그랬더니, 지선 언니가 "너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 바람이라도 쐬고, 사람도 만나고 그래야 해. 이번 주에 온누리교회 연예인 연합 예배 있는데, 너 꼭 와." 권유했어요. 지선 언니 덕분에,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또, 고보연 작가님께서 매일 아침 하나님 말씀을 카톡으로 보내주셨어요. 새롭게하소서 출연하기 전날 밤에도, 고보연 작가님과 통화하면서, 멘트 하나하나 꼼꼼하게 코치해주셨어요. 신기하게도, 힘들고 불안할 때,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찬송가를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과 행복이 밀려오는 거예요. 지금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제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지만, 마음이 편안합니다.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셨다고요? 네, 예전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하나님께 "하나님과 결혼하겠다"고 고백했어요. 하나님께서 저를 신부로 받아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제 침대 머리맡에는, 예수님께서 양팔 벌려 저를 안아주시는 그림이 걸려있어요. 밤마다 예수님 그림을 보면서 기도합니다. "예수님, 예수님, 잘생기셨어요. 예수님과 결혼할 거예요." 나이가 들면서, 일도 줄어들고,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올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항상 저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며, 마무리.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활용해서, 찬양 사역자로, 배우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시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응원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신 인생 여정, 결코 쉽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더욱 밝고,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길이 열려있습니다. 좁은 시야에 갇히지 말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마음껏 펼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시청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사랑해주셨습니다.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에 보답하며, 더욱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 목사님, 오늘 김혜영 님 간증 어떠셨나요? 네, 저는 오늘 김혜영 님 간증을 들으면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때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성장시키시는 것 같습니다. 김혜영 님께서 겪으신 고난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고,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세상 사람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널리 전하는 귀한 사역자로 살아가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주영훈 님, 마무리 말씀 부탁드립니다. 네, 오늘 김혜영 님 간증을 들으면서,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연예인으로서 화려한 삶을 살아왔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아픈 시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김혜영 님의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앞으로는 영원하신 신랑,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더욱 행복하고 기쁜 일들만 가득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최근 기사를 보니, 외로움이 담배 15개비만큼 건강에 해롭다고 하더라고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술, 도박, 이성 문제 등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결국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김혜영 님께서 앞으로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교제하면서,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길 응원합니다. 오늘 귀한 간증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김혜영 님의 밝은 미소와 함께, 새롭게하소서 마무리.
## 유튜브 썸네일 삽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