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아버지와 가족 간병 이야기: 김혜령 교수의 사랑과 동행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 딸과 함께 쓰는 사랑의 연대기 (김혜령 교수)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와의 동행: 이화여대 김혜령 교수의 치매 간병 이야기
[YouTube 썸네일 삽입 예정]
안녕하세요, 새롭기소서의 주영훈입니다. 오늘은 송진 님, 그리고 특별히 이정수 님과 함께 가족과의 가장 슬픈 이별, 바로 치매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 텐데요. 특히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신 아버지와 5년째 동행하고 계신 이화여대 김혜령 교수님을 모시고, 3대가 함께 사는 따뜻한 가정 속에서 겪는 치매 간병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이 이야기가 병환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많은 분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라는 책의 저자이시기도 한 김혜령 교수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신학자이자 이화여대 교목으로 재직 중이신데요, 아버님께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신 지 벌써 5년이나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아버님의 상황은 어떠신가요? 저희 아버지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신 후, 인지 치료와 다양한 치료를 병행하며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병세는 점점 진행되어, 치매 등급이 5등급에서 현재 3등급으로 악화되었는데요, 이는 치매 중증 환자에 해당하며, 숫자가 작을수록 증상이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병환은 저희 가족 모두에게 큰 어려움이지만, 함께 힘을 내어 긍정적으로 극복해 나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평생 목회자의 길을 걸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목회자로서 많은 어려움과 심적인 고통도 겪으셨을 텐데, 치매 발병 초기 증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아버지는 전임 전도사 딸로 태어난 저에게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고, 목사 안수를 받으신 후에는 담임 목회를 하시며 평생을 목회자로 헌신하셨습니다. 제가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 아버지로부터 이상한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요. 평소와 다르게 "아빠 롱한 아빠가 중풍이" 라고 말씀하시는 등, 어눌한 말투와 내용에서 아버지의 인지 능력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습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쓰러지셨고, 다행히 빠른 조치와 치료 덕분에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1년간 안식년을 가지신 후 다시 목회 현장으로 복귀하셨지만, 은퇴 이후 여러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희는 치매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데요.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갑자기 가족을 못 알아보거나, 길을 헤매거나, 대소변을 못 가리는 등의 중증 증상만을 치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치매 초기에는 성격 변화나 우울증과 같은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던 것이죠.
은퇴 후, 아버지는 성격 변화와 함께 우울증 증세를 보이셨고, 가족들과의 갈등도 잦아졌습니다.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평생 없으셨던 부부 싸움이 잦아지면서, 가족들은 아버지의 변화를 더욱 낯설게 느껴야 했습니다. 원래 다정다감하시고 가정적이셨던 아버지가 전형적인 남성처럼 고집이 세지고, 화를 내시는 모습은 가족들에게 큰 혼란과 안타까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러한 성격 변화와 감정 조절의 어려움 또한 치매의 초기 증상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은퇴 후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드리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어머니와의 분리를 시도하고, 새로운 취미 활동을 찾아 드리는 등, 아버지의 활력을 되찾아 드리기 위해 애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오히려 아버지의 무기력증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는데요.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시고, 오히려 과거에 잘하셨던 서예조차 제대로 하시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들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결국 종합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아버지의 병명은 치매로 밝혀졌습니다.
아버님의 초기 증상은 우울증과 무기력증이었군요. 은퇴라는 큰 변화와 함께 찾아온 증상들이어서 더욱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평생 목회에 헌신하신 아버지께 은퇴는 갑작스러운 변화였을 것입니다. 새벽 기도부터 주일 3부 예배 설교, 여름/겨울 수련회, 심방 등 쉴 틈 없이 달려오신 아버지께서는 본인을 위한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셨습니다. 그나마 남는 시간에는 공부를 하시거나, 교회를 위해 봉사하시는 것이 전부였기에, 개인적인 취미나 여가 활동은 거의 없으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은퇴 후 무기력증은 치매의 초기 증상이었지만, 당시에는 목회 은퇴 후 겪는 상실감이나 우울감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취미 활동을 권유했지만, 아버지께서는 새로운 시도를 어려워하셨고, 오히려 무기력증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목사의 은퇴 후 노년 생활이 허망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것은 병의 증상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많은 목회자분들이 은퇴 후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평생을 교회와 성도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오셨기에, 개인적인 취미나 사회적 관계망이 부족하고, 은퇴 후 소속감 상실과 역할 변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죠.
원로 목사님들의 경우, 은퇴 후 교회에 적응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다니시던 교회에 계속 출석하는 것도, 다른 교회에 새로 적응하는 것도 어려움을 겪으시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요. 아버지 역시 은퇴 후 교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셨고, 결국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외부 활동이 더욱 줄어들게 되셨습니다. 교회는 노년에 큰 지지가 되어주는 공동체여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은퇴하신 목사님들께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사모님들 또한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시죠. 평생을 교회 안에서만 생활하셨기에, 교회 사람들 외에는 만날 사람이 없고, 취미 생활도 부족하여 외로운 노년을 보내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매 초기 증상을 발견하고 병원에 모시고 가는 과정 또한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은 치매 검사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고 들었는데요, 아버님은 어떠셨나요? 아버님 역시 치매 검사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약간의 트릭을 사용했는데요. 아버지께 학교 병원에서 교직원 대상으로 효도 상품 검진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학교 병원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종합병원에 직접 모시고 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검사를 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은 치매 검사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치매 진단을 받으신 후, 합가를 결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합가를 결정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아버지가 치매 진단을 받으신 후에도, 몇 개월 동안은 부모님 두 분이서 생활하셨습니다. 초기 인지 장애 단계여서 일상 생활에는 큰 어려움이 없으셨지만, 성격 변화와 감정 조절의 어려움은 여전했습니다. 어머니는 은퇴 후 비로소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며 다양한 사회 활동을 즐기고 계셨는데, 아버지의 간병 때문에 다시 집 안에 갇히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인지 기능에 문제가 생긴 아버지는 어머니를 오해하고 의심하는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부부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서울에 살고, 부모님은 김포에 계셨기에,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달려가 중재해야 하는 상황이 잦아졌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모님 댁에 오가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고, 합가를 통해 문제 발생을 예방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독박 간병의 어려움을 깨닫고, 부모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합가를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합가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요. 일반적으로 합가는 짐이 더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교수님께서는 오히려 눈앞에서 부모님을 지켜보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신 거군요. 맞습니다. 저는 현실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혹시라도 부모님께 사고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컸습니다. 평생 목회에 헌신하신 부모님의 노년이 불행하게 마무리될까 봐 두려웠고, 합가를 통해 부모님을 안전하게 지켜드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합가가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을 눈앞에서 직접 보살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합가를 결정하신 후, 가족 구성원에 변화가 있었나요? 저희 가족은 저와 남편, 딸, 그리고 부모님 이렇게 다섯 식구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목사이고, 딸은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요. 저희 가족 모두 목회자 가정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목회자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셨고, 저희 부부 역시 목회자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온 가족이 함께 합가를 결정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딸이 중학생이면 사춘기가 한창일 텐데, 갑작스러운 합가 결정에 반발은 없었나요? 솔직히 딸에게는 합가 결정에 대해 미리 상의하지 못했습니다. 부모님, 남편, 남동생과는 충분히 논의했지만, 딸에게는 통보하듯이 합가 사실을 알렸습니다. 딸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단란한 핵가족 생활을 즐기던 딸에게, 아픈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동거는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미리 딸과 충분히 대화하고, 합가에 대한 의견을 물었어야 했는데, 그 점이 지금도 후회스럽습니다.
시간이 흘러 딸은 고등학생이 되었는데요, 지금은 합가 생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딸은 여느 사춘기 학생들처럼 평범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살갑게 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약해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수용력을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딸이 "엄마는 참 좋은 사람들이랑 많이 사는 것 같아."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딸의 변화를 보면서, 사랑은 삶을 살아가는 큰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족 안에서, 딸은 사랑의 가치와 의미를 배우고, 자존감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합가라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책임감과 헌신을 동반하지만, 그만큼 큰 기쁨과 성장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딸을 통해 배우고 있습니다.
합가 후, 가족 간의 불화는 없었나요? 불편함은 물론이고, 갈등도 엄청 많았습니다. 특히 어머니와의 갈등이 가장 컸는데요. 저는 긍정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인 반면, 어머니는 꼼꼼하고 계획적인 성격이셔서, 사소한 일상 생활에서도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돈 문제나 집안일 분담과 같은 문제는 의외로 갈등이 적었지만, 성격 차이에서 오는 사소한 문제들이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살다가 다시 함께 살게 되면서, 서로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 차이를 좁히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딸과의 합가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자신 때문에 딸 부부가 불편함을 겪는 것은 아닌지, 혹시라도 딸이 다시 분가를 원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끊임없이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오히려 분가를 생각하고 계셨다고 하는데요, 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습니다.
갈등이 심화되면서, 어머니와의 관계는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갈등 해결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미안한 마음을 이해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점차 갈등은 줄어들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살다 보면,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갈등에 대처하는 노하우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딸과의 합가를 미안해하셨다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어머니는 딸에게 짐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자신 때문에 딸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독립적인 성향이 강하셔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싶어 하셨습니다. 딸에게 짐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혼자서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어머니에게도, 저희 가족에게도 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의 가장 든든한 보호자이시지만, 저희와 함께 살면서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를 찾으셨습니다. 합가를 통해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재건하고, 새로운 활력을 되찾으셨습니다. 합가의 목적은 단순히 아버지 간병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행복과 삶의 질 향상에도 있었습니다.
합가를 통해 가족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합가를 통해 더욱 풍성한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독실한 신앙인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해 배우며 자랐습니다. 대학에서 인성 교육을 가르치면서,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습니다.
제가 가르친 내용처럼, 저 또한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성년이 되면 부모와 자식의 역할이 바뀌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지만, 정작 제 삶에서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신앙 안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깨닫고, 합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합가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저희 가족에게 감사와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평생 목회 활동을 하시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셨습니다. 알츠하이머 진단 후에도 사회성이 남아있을 것 같은데요, 집에서는 어떠신가요? 아버지는 목회자로서 평생을 섬김과 교류 속에 살아오셨습니다. 치매 진단 후에도 사회성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문화적 욕망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지 기능은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가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셨고, 초기에는 신발장에 신발을 여러 켤레 놓거나, 밤에 문을 꼼꼼하게 잠그시는 행동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가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지만, 저희 가족에게는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에게 가장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넘겨주면서, 아버지의 불안감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데이케어 센터에 다니시면서 새로운 사회 생활을 시작하시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데이케어 센터에 가는 것을 지루해하시거나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학교에 가는 것처럼 좋아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 데이케어 센터 일당을 챙겨드리면서, 아버지의 사회 생활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셨습니다. 깨끗한 봉투에 일당을 넣어 "오늘 학교 가서 잘하고 왔다고 주는 월급"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버지는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며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일당을 지갑에 소중히 넣으시고, 어머니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실 때는 일당을 드리기도 하셨습니다. 평생 목회자로서 사례비를 받으면 봉투째로 어머니께 드렸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는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지금은 전화 통화가 가능하신가요? 지금은 전화 통화가 거의 불가능하십니다. 전화와 관련된 슬픈 이야기가 있는데요. 목회자로서 많은 분들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휴대폰은 아버지의 사회 생활의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카카오톡을 사용하시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스팸 메시지나 광고 메시지를 지인들에게 무분별하게 전송하시거나, 잘못된 번호로 전화를 거시는 일이 잦아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사회 생활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휴대폰 사용을 제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아버지 몰래 휴대폰에서 전화번호를 모두 삭제하고, 필요 없는 앱들을 숨겼습니다. 당시에는 아버지 보호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사회적 관계를 단절시킨 폭력적인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사회 생활은 끝났다고 단정짓고, 아버지를 사적인 존재로만 가두려 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치매가 점점 진행되면 가족들을 못 알아보는 상황까지 갈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님은 가족들을 알아보시나요? 치매가 중증으로 진행되면서 언어 능력과 기억력을 많이 상실하셨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어머니와 저를 인식하고 계시고, 우리의 역할 또한 인지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를 아내로, 저를 딸로 인식하시고, 사랑 표현도 자주 하십니다. "사랑한다, 고맙다" 라는 말씀을 하시거나,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시기도 합니다. 제 이름은 잊으셨지만, 저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친밀하고 따뜻합니다.
아버지는 아들도 매우 사랑하셨지만, 아들은 가끔 못 알아보시거나, 인지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아들의 외모가 변한 것도 이유일 수 있지만, 아들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은 더욱 안타깝습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기억 못 하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지만, 저는 슬픔에 갇히기보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찾으려 노력합니다. 제가 딸을 키우면서, 딸의 어린 시절을 기억 못 해도 딸은 여전히 저의 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저를 기억 못 하셔도, 아버지는 여전히 저의 아버지이시고, 저희 가족과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기억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유전되고 공유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가족과 아버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기에, 아버지의 기억 상실은 슬픈 일이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받아들이려 노력합니다. 신앙은 삶의 힘이고,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의미를 찾고, 삶을 살아갈 힘을 주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긍정적이고 현명하게 대처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영상 편지를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요?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지께 영상 편지를 보내려니 갑자기 울컥하네요. (울먹이며) 사랑하는 아버지, 김정용 목사님. (울음)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며 존엄하게 자신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곁에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딸로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늘 예쁘다고 말씀해주시는 아버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눈물)
따님의 진심 어린 영상 편지에 감동했습니다. 오늘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치매 간병의 어려움과 가족의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 딸의 성숙함, 그리고 아버지와의 아름다운 추억은 많은 분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을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귀한 터전이라는 교수님의 말씀처럼, 저희 또한 가족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어머니께서 "하나님은 왜 인간의 끝을 추하게 만들었을까"라고 말씀하신다는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마지막까지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교육" 이라고 말씀하시며, 긍정적인 의미를 찾으셨습니다. 웰다잉에 대한 기도와 함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성을 지키며,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오늘 귀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