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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아에서 선교사로, 카일 윌슨의 극복과 멕시코 사랑 이야기

요약

고아에서 아빠로: 멕시코 선교사 카일 윌슨의 사랑

외로운 입양아에서 든든한 입양 부모로: 워싱턴 한인교회 카일 윌슨 선교사의 감동적인 이야기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 주영훈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 기쁨이 흐릿할 때, 타인을 향한 헌신을 통해 진정한 감사를 발견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오늘 귀한 손님은,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 속에서 입양 후 학대와 방황을 겪었지만, 결국 타인을 돕는 숭고한 길을 택하신 분입니다. 그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가 지금부터 펼쳐질 텐데요, 함께 만나보실까요? 멕시코에서 사역하시는 카일 윌슨 선교사님을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선교사님!

멕시코의 뜨거운 태양을 닮은 열정, 카일 윌슨 선교사님, 반갑습니다! 정말 멕시코에서 직접 오신 듯한 분위기인데요?

멕시코, 특히 멕시코 목회자들을 향한 깊은 애정이 느껴집니다. 선교사님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셨다고 들었는데, 한국말 실력이 유창하시네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덕분일까요? 20대에 한국어를 배우셨다고요. 능숙한 한국어 실력, 놀랍습니다! 저희 진행자분들의 유창한 영어 실력 덕분에 더욱 편안한 대화가 기대됩니다.

선교사님, 멕시코에서도 특별히 한인 후예들이 1905년부터 정착한 "유카탄" 지역에서 귀한 사역을 펼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칸쿤"으로 유명한 유카탄 반도, 아름다운 곳이죠. 그곳에서 "칼"과 "산 안토니오" 마을 두 곳을 중심으로 삶을 나누는 사역을 하고 계신다고요. 특히 "산 안토니오"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인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가요?

저희 사역은, 단순히 프로그램 중심이 아닌, 삶 속에서 함께하는 "동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 모든 순간을 함께하며, 아이들의 다양한 문제들을 "아빠"의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며 사랑으로 보듬는 사역입니다. "사역"이라는 단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삶 전체를 녹여내는 헌신이라고 할 수 있죠.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하신다고 들었는데, 선교사님의 어린 시절 또한 순탄치만은 않았다고요.

오프닝에서 간략히 소개했지만, 선교사님께서는 어린 시절 미국으로 입양되셨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히 어떤 계기로 입양되신 건가요?

제 이야기는, 다른 고아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서울대학교, 어머님은 이화여자대학교 출신으로, 엘리트셨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곧 이혼하시면서 아픔을 겪으셨고, 당시 한국 사회의 "이혼"에 대한 냉담한 시선"가족" 중심 문화 속에서, 아이를 낳자마자 이혼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아로 위장하여 입양을 보내는 안타까운 선택을 하셨다고 합니다.

여섯 살 무렵, 낯선 땅 미국으로 건너가셨군요.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성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롱아일랜드, 아름다운 부촌으로 유명하죠. 선교사님 가족은 롱아일랜드에서도 넉넉한 형편에 속했을 것 같습니다.

저희 가족은 롱아일랜드 중산층 지역인 "센트럴 아이슬립"에 살았습니다. 아버님은 선생님이셨고, 일곱 형제와 함께 북적이며 자랐습니다. 놀랍게도, 저희 일곱 형제 모두 입양되었습니다. 백인 부모님께서 슬하에 세 명의 백인 아이들과 네 명의 한국 아이들을 입양하신 것이죠.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일곱 형제 모두 입양이라니, 정말 놀랍습니다! 백인 부모님 슬하에서 한국인 형제들과 함께 자라셨군요. 선교사님은 형제들 중 몇 번째이신가요?

저는 일곱 형제 중 딱 중간인 "넷째"입니다. 장남 "크리스", 둘째 "키", 셋째 "캐리", 넷째 "카일", 다섯째 "코리", 여섯째 "키미", 막내 "캐시", 모두 "K"자 돌림 이름입니다. 미국에서도 돌림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니, 신기하네요! 저는 중간이라 형들은 바빠서, 동생들은 어려서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좋은 점보다는 책임감이 더 컸던 "중간" 역할이었죠.

특히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했을 텐데요, 양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양 부모님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었지만, 특히 어머님은 아기를 갖지 못하는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갱년기를 겪으시면서 호르몬 변화가 심하게 찾아오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어머니의 감정 기복이 극심해지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순식간에 천사에서 괴물로 돌변하는 듯한 극단적인 변화에, 학대와 폭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80년대 뉴욕은 호르몬 문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여성들이 호르몬 변화를 호소하면 정신병으로 몰아가 전기 충격 치료와 같은 끔찍한 고통을 겪게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감히 호르몬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고, 저희는 속수무책으로 학대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변화, 정말 충격적이네요. 아버지께서는 가정에 무관심하셨나요?

아버지 또한 어머니를 두려워하셨습니다. 어머니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늦게 귀가하셨습니다. 새벽 4시에 집을 나가 밤 11시, 12시가 넘어서야 귀가하시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일곱 형제를 부양해야 했으니 경제적인 부담도 크셨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양 부모님 모두 마음은 따뜻하셨던 것 같습니다. 갱년기 시기를 제외하면 정말 좋은 분들이셨지만, 사춘기 시절 어머니의 학대는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사춘기 자녀와 갱년기 어머니의 만남, "100년 전쟁"과 같았죠. 특히 어머니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사춘기 자녀와 갱년기 어머니의 갈등, 정말 격렬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학대, 구체적으로 어떠했나요?

청소가 제대로 안 되면 해병대 훈련을 방불케 하는 강도 높은 체벌이 가해졌습니다. 테이블 위에 먼지 한 톨이라도 보이면 닦았던 테이블을 뒤집어 엎으시고, 매를 맞고 구르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미국 사회는 아동 체벌에 엄격하지만, 학대받는 아이들은 오히려 공포 때문에 신고조차 못 합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가정처럼 보였지만, 저희 가족은 "보이지 않는 아이들"처럼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진정으로 학대 속에 신음하는 아이들은 침묵 속에 고통을 감내합니다.

어린 시절, 피부색이 다르고 부모님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정체성 혼란과 방황을 겪으셨을 것 같습니다. 입양아들이 흔히 겪는 갈등, 선교사님 또한 예외는 아니었을 텐데요. 학교생활은 어떠셨나요?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저는 스스로를 "백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인 가정에서, 부유한 동네에서, 학교에서도 인정받으며 자랐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13살 무렵, 학교 댄스 파티에 갔을 때 충격적인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저만 없었던 것이죠. 스스로 잘생겼다고 착각했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샤워 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아무리 봐도 "동양인"이었습니다. 작고 찢어진 눈, 노란 피부, 누가 봐도 동양인이었죠. 그때 처음으로 "나는 백인이 아니구나, 입양아구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예민한 시기에 정체성 혼란과 어머니의 학대까지 겹치면서,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가출을 감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을 최소화하려고 학교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집에 가면 방에 숨어 어머니의 눈치를 봐야 했죠. 어느 날, 차 청소를 제대로 안 했다는 이유로 심하게 혼쭐이 났습니다. 15살 어린 나이에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가출을 결심했습니다. 80년대는 지금과 달리 친구 집이나 선생님 댁에서 며칠씩 묵는 것이 허용되는 인정 넘치는 시대였습니다. 친구 집, 선생님 댁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공원에서 노숙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 와서 날씬한 아가씨들이 다이어트 때문에 남긴 음식을 몰래 먹었던 슬픈 기억도 있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학교는 꾸준히 다니셨다고요. 졸업은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피곤함을 무릅쓰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업 성적은 어떠셨나요? 가출 전까지는 학교에서 인정받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의 칭찬과 격려, 뛰어난 운동 실력 덕분에 학교에서 나름 인지도가 있었습니다. 학교는 저에게 "희망"의 끈이었습니다.

가출 후 고모님을 만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고모님과의 만남, 드라마틱하네요!

가출 후 소식이 고모님께 전해졌고, 고모님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친고모님은 아버님의 여동생으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엘리트 집안이었지만, 복잡한 가정사 때문에 쉽게 연락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고모님은 양부모님께 연락하여 제가 가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고, 저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양부모님은 고모님께 친권을 양도하셨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고모님 댁으로 전학을 가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고모님이 양어머니 역할을 대신해주신 것이죠.

고모님과의 만남은 마치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하지만 새로운 환경은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또 다른 방황이 시작되었다고요.

고모님이 계신 "버팔로"는 롱아일랜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도시였습니다. 뉴욕 주에 속하지만, 롱아일랜드와 달리 시골 분위기가 강하고, 동양인이 거의 없는 백인 사회였습니다. 새로운 학교에 전학 가자마자 인종차별을 경험했습니다. 학교 복도를 걷다 "칭크(Chink)"라는 인종차별적인 단어를 듣게 된 것이죠.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노골적인 인종차별은 점점 심해졌고,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다짐을 벌였습니다.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싸움정학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고모님은 매주 학교에 불려와 곤욕을 치르셨고, 고등학교 졸업은 간신히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저를 문제아로 낙인찍으니, 정말 문제아가 되어버린 것이죠.

고등학교 시절, 방황과 일탈을 거듭하셨군요.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자책하며 자존감마저 바닥으로 추락했다고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고, 잦은 싸움과 정학으로 점철된 고등학교 생활은 저에게 깊은 절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스스로를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자존감은 바닥까지 추락했습니다. 삶의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다행히 고등학교 졸업 필수 과목은 대부분 이수했지만, 영어 과목은 세 번이나 낙제했습니다. 간신히 졸업장을 받았지만, 미래는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관계는 어떠셨나요? 새로운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이전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학교 친구들은 "이탈리아 갱"과 같은 불량 청소년들이었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저를 눈여겨보고 자신들의 "갱"에 끌어들였습니다. 주말마다 어울려 다니며 싸움을 벌이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싸움을 걸고, 저는 주먹을 휘두르는 "싸움꾼" 역할을 했습니다. 폭력과 방황으로 얼룩진 고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졸업 후에도 계속 문제아로 사셨다면, 미래는 더욱 암울했을 텐데요. 해병대에 자원입대라는 의외의 선택을 하셨다고요. 해병대 입대, 어떤 계기였나요?

해병대 입대는 현실 도피였습니다. 더 이상 문제아로 살고 싶지 않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해병대는 저에게 "탈출구"이자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한국 해병대는 아니지만, 미국 해병대 또한 강인한 남성성을 상징하는 곳이기에, "남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 싶었습니다. 해병대 입대는 도피이자 동시에 새로운 삶을 향한 갈망이었습니다.

해병대 입대 후, 군 생활은 어떠셨나요? 해병대에서 힘든 훈련을 이겨내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을 것 같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군 복무 중, 문득 "날 버린 부모님은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실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친부모님을 찾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셨다고 들었습니다.

고모님을 통해 친아버지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고모님은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지내셨지만, 해병대 복무 중 아버지 연락처를 어렵게 찾아냈습니다. 한국에서 "팀스피릿 훈련"에 참가했을 때, 아버지를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고아로 자란 저는 "혹시 어딘가에 나를 그리워하는 아버지가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영화 "애니"의 주제가처럼, "언젠가 아버지를 만나면 모든 상처가 치유되고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뿌리를 찾고 싶은 갈망, 고아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드디어 친아버지를 만나셨군요! 아버지와의 재회, 어떠셨나요?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아버지, 만나보니 기대했던 모습과 같았나요?

아버지와의 만남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한국적인 문화 때문인지, 아버지는 제게 따뜻한 위로와 사랑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습니다. "미안하다, 아들. 사랑한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 말, 한국 아버지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표현일까요? 아버지 학교에 가보니, 한국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조차 제대로 못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와의 만남은 오히려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술자리에서 만난 아버지는 회사 이야기, 술 이야기만 늘어놓으셨습니다.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아버지의 모습은 환상이었던 걸까요?

아버지의 냉담한 모습에 실망하셨군요. 큰 상처를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극심한 절망감자살 시도까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와의 만남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내 아버지도, 나 자신도 희망이 없다. 죽는 게 낫겠다."라는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수면제 180알맥주 12캔을 삼키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고, 3일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따로 만났습니다. 어머니와의 만남은 만족스러웠나요? 어머니 또한 상처가 많은 분이셨다고요. 어머니와의 재회는 어떠셨나요?

어머니 또한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어머니를 만났을 때, "내가 그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한국 어머니들은 자녀에게 미안함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난 후 어머니를 만났기에,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술에 의존하며 과거를 후회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또한 안타까운 인생을 살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외할머니께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습니다. 연변 간호학교를 설립하시고, 평양여자고등학교를 졸업, 서울간호학교 총무, 한국간호협회 총무를 역임하신 윤고라 권사님이셨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제가 입양된 후 매일 새벽 5시마다 "요셉처럼 되라"는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갓난아기였던 저를 눈물을 머금고 입양 보낼 때, 외할머니 또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아버지와의 만남, 자살 시도, 어머니와의 재회까지,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이네요. 자살 시도 후, 삶을 포기한 듯 방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다시 삶의 희망을 찾게 되셨나요?

자살 시도는 실패했지만, 저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숨만 쉬는 송장"처럼,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삶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주말마다 술에 취해 싸움을 벌이고, 갱단과 어울려 다니며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고 절망 속에 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삶이었죠. 그러다 아내 분을 만나 결혼하시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내 분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10년 넘게 방황하며 "죽은 듯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사하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저를 볼 때마다 아들 생각이 난다며 소개팅을 제안했습니다. 그때가 30대 초반,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뉴욕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깡패보다 더 심하게 살았던 시절이었죠.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정말 "막" 살았습니다. 총알을 가지고 다닐 정도였으니, 자포자기 상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해 죽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저야말로 "화약고"였습니다.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듯, 위태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외할머니의 기도, 그리고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개팅으로 만난 아내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내에게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사장님" 소리 한번 듣고 죽자는 심정으로, 이기적인 마음으로 소개팅에 응했습니다. 첫 만남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제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고, 촌스러운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뉴욕에서 자란 저는 시골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내는 첫 만남에서 "저는 나중에 믿음 생활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선교도 함께 나갈 배우자를 만나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본전도 못 찾겠다" 싶어 담배를 꺼내 물고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소개팅 자리였으니, 예의상 저녁 식사는 함께 했습니다. 식사 도중, 아내가 "몇 년생이세요?"라고 물었고, 제가 "88년생입니다."라고 답하자, 갑자기 반말"저는 저보다 어린 사람은 안 만나요."라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1살 연상이었던 아내의 단호한 태도오히려 오기가 생겼습니다. "두고 봐라, 내가 너를 꼬셔서 버려주마." 흑심을 품고 아내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뉴욕에서 두 시간 거리였습니다. 매일 퇴근 후 두 시간을 달려 아내를 만나러 갔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처럼, 끈질긴 구애 끝에 아내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가 아내를 꼬시려 했지만, 오히려 제가 아내에게 "꼬임" 당한 셈이죠. 이 들어버린 것입니다. 버리려 했지만, 버릴 수 없었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아내의 따뜻한 마음과 헌신이었습니다.

아내 분의 헌신적인 사랑, 정말 감동적이네요. 결혼까지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저는 한국 교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차별은 정말 심합니다. 입만 열면 인종차별을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더 심한 차별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자랐지만, 교회에서는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한국 사람들은 "너희 아빠 뭐 하시니?" "너 이름이 뭐니?" 묻기 전에 "너희 집안은 뭐 하시니?"부터 묻습니다. "저는 입양됐습니다. 제 이름은 카일 윌슨입니다."라고 답하면, 어른들은 말문을 잃고 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습니다. 아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했을 때, 솔직히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장모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장모님은 저희 데이트 사실을 알고 3일 금식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기도 응답으로 "과거는 묻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으라"는 메시지를 받으셨고, 저를 조건 없이 받아주셨습니다. 장모님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결혼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만남부터 결혼까지, 정말 "LTE"급 속도였습니다. 2000년에 결혼했는데, 6개월 만에 초고속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 오빠스테이크를 구워주며 "미스터 킴, 내 동생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물었고, 저는 해병대 정신으로 "네, 결혼하겠습니다!"라고 확답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을 망설였지만, 이미 "네"라고 대답했으니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결혼식 당일까지도 아내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결혼식30분이나 늦게 나타났습니다. 결혼식 30분 지각,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요! 신랑이 결혼식에 30분이나 늦다니, 이 됩니까? 일부러 늦으신 건가요? 결혼식 당일 아침, 고프 27홀을 돌고 을 마시며 "결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했습니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결혼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 친구들도 "결혼 하지 마라"며 부추겼다는 것입니다. "저런 여자랑 왜 결혼하냐"며 악담을 퍼붓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네"라고 약속했으니, 해병대 정신으로 약속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30분이나 늦게 결혼식장에 도착했고, 정재훈 목사님주례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목사님께 정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결혼식부터 "속 썩이는 남편"이었던 셈이죠. 결혼식부터 파란만장했던 결혼 생활,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결혼 후에도 방탕했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아내 분 속을 많이 썩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술, 담배, 폭력까지, 사모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텐데요.

아내고생정말 많이 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시골이라 남자나쁜 짓을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천국" 같은 곳입니다. 재미없는 천국이죠. 교회에 가야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저는 남들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체면 차릴 것도 없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장로님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집사님들을 꼬드겨 을 마시고, 심지어 학생들에게까지 을 권했습니다. 제자였던 박선호 선교사는 16살 때 처음 만났는데, 당구 치는 친구에게 "맥주 한잔 할래?"라고 꼬드겼습니다. 미성년자였던 친구에게 "나 서른이야, 괜찮아, 괜찮아." 하며 을 권하는 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격 또한 "괴팍"해서, 만 마시면 싸움을 걸고 욕설을 퍼붓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어느 날은 심한 욕설을 퍼붓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장모님이 울고 계셨습니다. 장모님"태어나서 사람 입에서 그런 "더러운 말"이 나오는 것은 처음 들었다"며 "다시는 너희 집에 안 오겠다"선언하셨습니다. 장모님 앞에서 물건집어던지고 부수는 "난폭한"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장모님"최고""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과거에는 "패륜아"나 다름없었습니다. 해병대에서 을 배웠다고 했는데, 미국 해병대에서 을 배우셨나요? 미국 해병대에 있었지만, 한국에 와서 선배들의 추천으로 포항에 주둔했던 미국 해병대에서 한국 욕을 배웠습니다. 한국 욕미국 욕보다 훨씬 "다양하고 찰지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한국말제대로 못 했던 저는 선배권유통역병으로 한국파견되었습니다. 훈련 때마다 장교들이 통역관을 찾았고, "Are you Korean?" "Yes, of course." "Do you speak Korean?" "Of course." 하며 통역병으로 발탁되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포항 해병대 "똥차 아저씨"들에게 "X발", "X나""찰진 한국 욕"전수받았습니다. 아내한국 욕이해하지 못했지만, "끔찍한 욕설"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혼 위기를 겪지는 않으셨나요? 결혼 초 1년 동안은 "이혼"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아내눈물기도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혼 초읽기 부부"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하지만 1년쯤 되었을 때, 저 또한 지쳐 있었습니다. 꿔왔던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따뜻한 밥을 차려주고, 깨끗하게 청소해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현모양처"기대했지만, 아내제 기대미치지 못했습니다. 실망감분노에 달했고, 결혼 1년 만에 9일 동안 별거했습니다. 다시 "막" 살고 싶다는 유혹"도망"치듯 집을 나왔습니다.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결제 버튼만 누르면 되는 찰나, 아내의 기도, 교회 사람들의 사랑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계신다면, 왜 제 인생은 이 모양입니까?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신기하게도 "네가 변해야 한다"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변하면 된다"메시지, 뇌리하게 울렸습니다. 컴퓨터를 끄고 밤 12시장모님 댁으로 향했습니다. 아내9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죠. 9일째 되는 날,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장모님아내 앞에 무릎 꿇고 "용서해 주십시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눈물사죄했습니다. 그날부터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습니다. 장모님아내기도, 헌신적인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후 정말 "새 사람"이 되셨군요. 하나님매달리고, 아내에게 헌신하며 변화된 삶을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변화 과정은 어떠셨나요? 하루아침변화되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날부터 뒤돌아보지 않고 교회에 나가 헌신했습니다. 교회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 봉사를 시작하고, 성경 공부를 하면서 점점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그 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고요. 통역 봉사도 하시고, 신학교에도 진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시골 교회에서 동시통역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구글 번역기"처럼 "자동 번역"해주는 "기계"가 없던 시절이라, 사전일일이 찾아가며 번역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훈련"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매주 토요일 목사님설교 원고를 받아 12시간 이상 사전을 뒤져가며 번역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사전에서 찾아 번역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체험했습니다. 설교 말씀"부부 싸움"하는 저희 부부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느껴졌습니다. 통역을 하면서 오히려 제가 "은혜"를 받고, "말씀"으로 "치유"받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선택받은 자녀다."라는 말씀"쓰레기" 같았던 저를 "하나님의 자녀"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습니다. 통역하는 저 혼자 "부흥회"를 하는 듯한 "뜨거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설교 말씀통역하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직접 말씀하시는 듯한 "생생한 경험", 정말 놀라웠습니다. 아, 선교사님 간증을 들어보니 "나의 상처가 나의 사명"이 되었다는 고백이 와 닿습니다. 어떤 이야기인가요?

제 멘토였던 김영훈 목사님께서 "만약 좋은 가정에서 입양되지 않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수도 있지 않았겠냐"고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외할머니의 기도를 통해 저를 "요셉"처럼 만드셨습니다. 요셉 또한 "고난""역경"을 통해 "애굽의 총리"가 되었듯, 저 또한 "고난"을 통해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선교지에서 가난하고 "길거리"에 방황하는 아이들"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랑"해야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방황"했기에, "상처" 입은 아이들마음"공감"하고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습니다. 시골 교회에서 2세 학생들을 만나면서, 1세 부모들은 "모르는 2세들의 고아 같은 마음"을 발견했습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미국 문화 속에서 "아버지""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아이들"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 이 아이들이 "나와 같은 상처"를 안고 있구나" "공감"했습니다. 신학교 졸업 후 선생님이 되었지만, 아내를 만나 안정된 삶을 살면서 과거고통잊고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문제아"들을 만나면서 "과거의 상처""사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제가 가르치던 중학생멕시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12살짜리 소녀"화장"을 하고 학교에 오고, "숙제"도 제대로 해오지 않았습니다. "제발 숙제만 해오면 도와줄 수 있다"타이르기도 했지만, 일주일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경찰신고했더니,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멕시코 이민자 부모들은 "투잡"을 뛰며 생계를 유지했고, 소녀"혼자 집"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멕시코 갱단12살 소녀"성매매" "조직"에 넘기려 했고, 호텔감금되어 성폭력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녀"고통""외면"했던 제 자신"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상처"잊지 않게 하시고, "문제아"들의 마음"외면"하지 않도록 "경고"하신 것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안아주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숙제"보다 "사랑"더욱 필요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품에 안고"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습니다. 저의 "아픔""상처 입은 아이들""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음성"을 들으면 "도망"치고 싶을 것 같은데요.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항의"하고 싶을 것 같은데요. 순순히 "순종"하신 것이 놀랍습니다. "순종"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순종"은 쉽지 않지만,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은 "순종""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과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아들"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셔서 "아빠"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기쁨",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령"바람"이 불면, "순종""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방송을 보시는 분들은 "저런 사람""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구나 "놀라"실 것입니다. "하나님"축복" 속에서 자라 "교회"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입니다. 처럼 "극단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쁨", 그 "어떤 기쁨"보다 "크고 놀라운 기쁨"입니다. "순종""어려운 일"이 아니라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내""저""기도""응답"하시고 "모든 것""내려놓"게 하시니, "이 세상""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제가 꿈꿔왔던 "큰 집", "골프장" 근처 "저택", "화려한 삶", "모두 헛된 것"입니다. 큰 집에서 살면 "청소"하는 데 "시간""너무 많이" 걸리고, "잔디 깎는 기계"를 타도 "재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니,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뿐입니다. 제가 "놀랐던" 것은, "과거""선교사""꿈"도 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저""선교사""부르"셨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신학교""진학"해야 했습니다.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아내 분께서 "선교사" 남편을 만난 것을 "후회"하시지는 않으셨나요? 신학교어떤 학교로 가셨나요?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역을 시작한 후, 신학교진학했습니다. 신학교졸업할 때쯤, 하나님께서는 "저""계속해서 깨뜨리"시고 "연단"하셨습니다. 저는 "영원히 미국"에서 "차세대 목회"를 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따뜻한 교회에서 "전도사""청빙"받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오만"했습니다. 시골 교회에서 학생들을 "조금 많이" 모았다고 "교만"해졌던 것입니다. 교회 장로님들은 "당신""더 큰 교회""사역"을 해야 한다며 "풀타임 사역" 자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마음"너무 아팠"습니다. "왜 저에게 유스 목회"를 하라고 하셨으면서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십니까? 멘토 목사님"선교""헌신"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저희학생들을 데리고 "단기 선교""자주" 갔습니다.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 단기 선교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마음"많이 깨졌"습니다. 멘토 목사님"선교지"에서 "하나님의 뜻""구하라"조언을 듣고, 아내와 함께 "선교사""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니제르"라는 아프리카 "오지""홈리스 사역"을 하러 가려고 "준비"했습니다. 니제르 선교"준비"하던 중, 멕시코 선교사"방향""전환"하게 되셨다고요. 어떤 계기였나요? 니제르 선교"준비"하던 ,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습니다. 당시 아들"다섯 살"에서 "여섯 살"이 되었고, 아프리카 오지"선교"를 떠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유카탄 반도한인 교회들은 "단기 선교""많이" 왔지만, "소통""문화 차이""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선교사""파송"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며 "니제르" 대신 "멕시코"로 가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솔직히 "화"가 났습니다. "왜 갑자기 멕시코"냐며 "반발"했습니다. 멕시코"단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위험하다""소문""무성"했습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위험한 멕시코"로 가라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아내""달랐"습니다. "기도"해보자며 "차분하게 설득"했습니다. "화""가라앉지 않았지만", 아내"기도""순종"하기로 했습니다. "멕시코"로 가라는 "하나님의 뜻""순종"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우리의 생각""다르"십니다. "좋은 일" 하려고 "니제르" 간다는 "계획""막으시고",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멕시코""보내"시다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기도""순종"하는 "마음"으로 "멕시코 선교""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멕시코 선교"언제"부터 시작하신 건가요? 2009년여섯 살 아들과 함께 멕시코 선교"시작"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멕시코까지 7일 동안 운전해서 "험난한 여정" 끝에 멕시코에 도착했습니다. 멕시코 "첫 정착",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자비량 선교를 하셨다고요.

처음에는 교회에서 "후원"을 약속했지만, 멕시코에 도착하자마자 교회"문제"가 생겨 "후원""끊겼"습니다.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막막했습니다. 한 달 50달러생활해야 했습니다. 멕시코"아는 사람""교회""없었"습니다. 한국 교회"연""전혀 없"었기에, "홀로" "고립무원" 상태였습니다. "시장"에게 "식당"에서 "일"했던 "경험""어필"하며 "볶음밥 장사""제안"했습니다. "살기 위해" "볶음밥"을 팔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멕시코"평균 40도"를 넘는 "폭염" 지역입니다. "가게""에어컨""없""열악한 환경"에서 "차 뒤""가스 버너"를 놓고 "볶음밥"을 팔았습니다. 시골 마을이라 "많이 팔아봤자 20달러" 정도였습니다. 번 돈"절반""아이들""나눠 먹고", "나머지 절반"으로 "생활"했습니다. "거지"와 다름없는 "비참한 생활"이었습니다. "먹을 밥"조차 "없"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부엌""없는 집"에서 "아내""고생"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을 사람들이 "남은 음식""나눠"주었습니다. "불쌍히 여겨" "도와준 것"입니다. "현지인"들을 "가난"하고 "게으르다""무시"했던 제 자신"반성"했습니다. "선교사""파송"받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이들" 또한 "나의 자녀", "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형제"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선교사의 오만함""깨뜨리"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현지인"들의 "도움""사랑""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여섯 살 아들에게 "밥"조차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현실""가슴""찢어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웃""나눠준 옥수수" 두 개세 식구"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수학 선생님"이었던 "경험"을 살려 옥수수 두 개 "조각"으로 "나눠" "똑같이" "두 조각""나눠 먹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 "가장 하나님""가까이" 느낄 수 있었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선교사님도 "먹고 살기 힘들었을 텐데", "얼마 전"까지 "골프장" 딸린 "저택"에 살았던 "과거""떠오르"지는 않으셨나요? "잔디 깎는 일"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후회"는 없으셨나요? "극과 극""현실", "좌절감""포기"하고 싶지는 않으셨나요? "지난주 한국"에 와서 "새로운 단어"를 배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똘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볶음밥 장사"하며 "힘들게 살았지만", "마음""기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을 누렸습니다. "가정 예배", "새벽 기도", "큐티""시작"하면서 "하나님""더욱 깊이" 만났습니다. "고난" 속에서 "진정한 믿음""싹텄"습니다. "과거"에는 "자신감""믿었지만", "이제""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선교"하겠다는 "굳건한 믿음",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후원하는 "교회""없"어도, "영원히 볶음밥"을 팔면서 "아이들""함께 살고",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선교"라고 생각했습니다. "볶음밥" 팔아 "모은 돈" "만 달러", "렌트""벗어나" "작은 집"이라도 짓고 싶었습니다. "청소년 집회""참석"했을 때, 돌보는 아이들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별"이 보이는 "허름한 집", "지붕""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아이들 집"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알아서 하라""말"했습니다. "집 지을 돈"으로 "아이들 집""지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전 재산" "만 달러""털어" "아이들 집""지어주"었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하신 것입니다. "너희의 힘"이 아닌 "나의 사랑"으로 살아가라 "가르치신 것"입니다. "모든 것""내려놓"으니, "그때"부터 "진정한 선교의 삶""시작"되었습니다. "오픈"하여 아이들"함께 사셨다"고요? "공동체 생활",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저희 가정멕시코 선교 16년 동안 단 "일주일""가정"으로 살았습니다. 나머지 시간"아이들""함께" 살았습니다. "차세대 사역"에 대한 "부르심", "고아"였던 "제 경험" 때문에 "집""항상 오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집""필요한 아이들"에게 "언제든 열려 있는 집", "사랑"으로 "채워주는 집"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볶음밥 장사"를 할 때부터 미국, 멕시코에서 "상처 입은 아이들""저희 집"에 와서 "함께 살았습니다." "방 하나"에서 "줄"을 쳐서 "여자아이들""아내 쪽", "남자아이들""제 쪽"에서 "여섯, 일곱 명""함께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16년 동안 "공동체 생활", "하나의 가족"처럼 살았습니다. 아내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해병대 훈련을 받은 저도 "힘든 공동체 생활", 아내"더 힘들었을 텐데", "묵묵히" "헌신"해 주었습니다. 지금"아이들""허락 없이" "방문""열고 들어"옵니다. 가끔 아내"깜짝 놀랄 때"도 있습니다. "공동체 생활"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우리의 가족""아들"뿐만 아니라 "입양한 딸", "하나님"께서 "주신 큰 가정"입니다. "많은 아이들""함께 먹고 자고"하며 "사랑"으로 "양육"하고 있습니다. 함께 사는 아이들"몇 명" 정도 되나요? 많을 때"열댓 명""함께 살"고, "위탁 센터", "대학교 기숙사"에서도 "아이들""함께 생활"합니다. 위탁 센터에는 "50명", 대학교 기숙사에는 "35명""아이들""함께 먹고 자고" 합니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규모인데요. "어떻게 감당"하시나요? "와싱턴 한인교회""헌신적인 후원" 덕분입니다. 와싱턴 한인교회"혼자""커다란 사역""후원"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 또한 "월급""절반""헌금"하며 "함께 섬기"고 있습니다. "계산"해보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계산"하면 "선교""불가능"합니다. 제 "자녀""신발""없"고, "아이""웃는데 이빨""빠져" 있으면,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아빠의 마음"으로 "사랑"으로 "헌신"할 뿐입니다. "물질"보다 "사랑""먼저"입니다. "동역자"들의 "헌신" 또한 "큰 힘"이 됩니다. 가난하다고 "생각"했지만, "현지인"들이 "돕고 싶어 하는 마음""깨달았"습니다. "함께 걸어왔던 동역자"들과 "기독교 학교""설립"하고 "교장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 딸""8살""만나 새벽 기도""함께"하며 "성장"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졸업"하고 "영어 선생님"이 되었고,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저희"를 위해 "직장""그만두고" "바보 사역""헌신"했습니다. "딸""대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헌신"하며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축복", "현지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일",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십니다. 아까 "따님""입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입양"하셨다고요. "입양" 이야기도 "감동"적이네요.

딸아이13살저희 위탁 센터에 왔습니다. 13살 때까지 16군데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어머니"어려운 환경" 속에서 "미혼모"가 되었고, "딸""낳자마자 버렸"습니다. "버림받은 딸", "위탁 센터"에 맡겨졌지만, "16군데""위탁 가정"을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딸아이""겉"으로는 "반항"하지 않았지만, "제""똑같은 성격"이었습니다. "사람""밀어내""경계"하는 "방어적인 성격", "상처"받을까 봐 "마음""닫아"버린 것입니다. "위탁모""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정부""SOS"를 요청했고, "정부""친엄마"에게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결정"을 내렸습니다. "딸아이""친엄마"에게 "돌아간다"는 소식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친엄마 집""술 취한 남자""전기도 없는 집"이었습니다. "친엄마""남자"에게 "폭행"당해 "얼굴""멍""가득"했습니다. "딸아이""그런 곳"으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변호사 친구"에게 "SOS"를 요청했고, "친엄마""살아있는 경우"에도 "입양""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친엄마"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입양 동의"를 받아냈습니다.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친엄마""동의""구한 것"입니다. "변호사 친구""서류""준비""주"에서 "입양 허가"를 받았습니다. "아내"에게는 "비밀"로 하고 "일사천리""입양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딸아이""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오면서 "아내"에게 "전화"했습니다. "자기야, 우리 딸 생겼어!" "깜짝 놀랄 아내""표정""눈에 선하네요!" 선교사님 "아내 분", "보통 분"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오늘 "아내 분""함께 출연"하셨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정말입니다. "딸아이""지금" "잘 성장"했겠죠?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지금 26살입니다. 18살까지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처음 "저희 집"에 왔을 때 "저희 부부""앉혀놓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토티도 안 먹고, 쌀밥도 안 먹고, 이런 거 안 합니다!" 이미 많은 곳"전전"하며 "상처""받았"기에,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18살까지 "아빠, 엄마"라는 "말""한 번""하지 않았습니다." "아줌마", "선생님", "목사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내""가장 힘들어"했습니다. "딸"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했지만, "딸""마음""열지 않았"습니다. "아내""울면서 하소연"했습니다. "나는 성민이 (아들) 보다 더 잘해주려고 하는데, 왜 얘는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까?" "사람""기대"하는 만큼 "반응""보여줘야" 하는데, "상처 입은 사람""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다려줘야 한다"는 것을 "아내"에게 "설명"했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우리 부부""하나님께 입양"되어 "치유"되었지만, "딸아이""아직 하나님""만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모를 때""저" 또한 "마음""닫고 살았"습니다. "기다려주자""아내""설득"했습니다. 18살 생일, "성인"이 되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인 카드", "주민등록증"을 받고 "성인"이 된 것입니다. 이제 "부모" "말""들을 필요""없""나이", "떠날 수도 있다""불안감""엄습"했습니다. 아내"너무 힘들어"했기에, "딸아이"를 불러 "은행"으로 "향했"습니다. "칼라, 너는 이제 성인이야. 우리 말들을 필요 없어. 지금 떠나도 괜찮아." "요한일서 3장 1절 말씀""인용"하며 "하나님의 사랑""입양""의미""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라고 부르셨는지, "진짜 자녀"가 되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입양""단순한 위탁"이 아닌 "법적"으로 "진짜 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너는 내 딸"이라고 "말씀"하셨고, "법적"으로도 "내 딸"이니 "나의 재산""반""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만 달러""생겼을 때", "5천 달러""딸아이 통장""넣어주며" "이것은 네 재산"이라고 "말했"습니다. "네가 우리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너는 내 딸이니 이 돈네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내일 떠나도 좋지만, 있으면 좋겠다. 네가 진짜 우리 딸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알아주길 바란다."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5천 달러"를 들고 "떠날까 봐" "걱정"했습니다. 멕시코에서 "5천 달러""적지 않은 돈"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음 날" "딸아이""처음"으로 "아빠,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3일 뒤", "딸아이""수줍게"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아빠"라는 "말"을 듣는 순간, "힘든 과거""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엄마"라는 "말"을 들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가슴 벅차게 밀려왔습니다." 그때부터 "진짜 딸"이 되었습니다. "생각""변화"되었습니다. "정체성""확립"되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공부""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교""진학"하고 "법대""졸업"했습니다. "로펌""취직"했지만, "지금""로펌""그만두고" "아빠 사역""돕고" 있습니다. "대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헌신"하며 "새벽 기도""인도"하고 "학생들""돌보고" 있습니다. "선교사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키우신다""간증""들을 때마다 놀랍습니다." "자녀 교육" "걱정"되시는 분들, "선교"하러 "떠나세요!" "하나님"께서 "자녀""잘 키워주십니다!" "로펌 변호사""될 수 있는 딸""선교사""헌신"시키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우간다"어떠신가요?" "로펌" "안 가도 괜찮습니다!" 이번"한국""방문"하셨는데, "아버님""만나 뵙고" 가신다고요. "아버님"과의 "관계""어떻게 변화"되었나요? "아버님""지금" "많이 변화"되셨습니다. "이제는 이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7년 전 "하나님""만나" "목회"를 하고 "치유"받았지만, "과거""상처""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사람들""아버님""용서"했는지, "관계""회복"되었는지 "자주 물어보셨"습니다. "목회자"로서 "당연히 용서했고, 회복되었다""말"했지만, "솔직히 마음""복잡"했습니다. "아버님"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 "혼란스러웠"습니다. "교회""허락"을 받고 "아들, 딸"을 데리고 "아버님""찾아뵙기로 결심"했습니다. "손자, 손녀""보여드리고", "효도"도 하고, "아버님""용서"했다는 "말""전하고", "마무리"하고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마음 편하게 목회""전념"하고 싶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아버님""전화"드리고 "만났"습니다. "삼겹살""함께 먹고", "손자, 손녀""보여드렸더니" "기뻐하셨"습니다. "헤어지기 전", "아버님께 멋있게 'I forgive you'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제가 하고 싶은 말""못 하게 하실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뭔데 아버님을 용서하느냐? 너무 공평하지 않다.""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정체성""변화"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들어오시면", "확실한 정체성""생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과거""돌아보니", "아버지""처음 만났을 때""기대"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이렇게 해주시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남 탓"만 하며 살았습니다. "한국 사람들", "아버지", "경제적인 어려움", "남 탓"만 하며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만난 후", "하나님"께서는 "너는 한 번이라도 아들 노릇 해봤느냐?""물으셨습니다." "무슨 말씀"이시냐고 "반문"했더니, "너는 한 번도 아들 노릇 해보지 못했잖아! 너의 정체성은 아들이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아버님께 용서빌었습니다." "아버님, 50년 동안 효자 노릇 못 했습니다. 아들 노릇 못 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효도하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쿨하게 "오케이, 콜!"이라고 "화답"하셨습니다. "아빠""미안하다""말""안 하셨지만", "쿨"하게 "허락"해주셨습니다. "유머러스하게 넘어가시는 모습", "한국 아버지들의 특징"일까요? "부산 여행""함께 가고", "손자""스피드보트""함께 타셨"습니다. 80대 "아버님"께서 "손"을 흔드시며 "아이처럼 기뻐하시는 모습", "감사"했습니다. 아버님 "연세""젊으셨을 때 낳으셨네요." "아주 일찍 결혼"하셨다고요. "기억안 나실 때" "결혼"하셨고, "입양"을 보내셨군요. "지금 아버님""80대"이시니, "정말 일찍 결혼"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멕시코"돌아가시나요?" "네, 내일 돌아갑니다." 멕시코"돌아가시면" "필요한 것"도 많으시고, "기도 제목"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기도 제목" "나눠주시겠어요?" "늘 기도해주시는 분들", "와싱턴 한인교회", "사랑하는 목사님들", "멕시코 아이들"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에 한국""방문"했지만, "마음""늘 멕시코"에 있습니다. 50명"대학생"들을 "양육"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나이"가 들수록 "보이는 것""의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Living by sight", "현실적인 상황"만 보면 "계속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아무것도 없었을 때 하나님""믿고 시작했던 초심""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국 선교사님"들이 "맨발""뛰어들었던 열정", "지금의 한국 교회""일으킨 원동력"처럼, "저 또한 멕시코 아이들"을 통해 "세상""변화"시킬 "선교사님"들이 "나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내년""기독교 중학교""설립"할 계획입니다. "기독교 초등학교""이미 설립" 허가를 받았습니다. "천주교 국가""멕시코"에서 "기독교 학교""설립"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셨습니다. "중학교 설립" 허가를 받고, "내년"에는 "공사""시작"해야 합니다. "많은 기도""사랑""필요"합니다. "많은 분들"께서 "기도"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무엇보다 "선교사님""사모님" "건강""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건강""돌보지 못하고" "사역""헌신"하시는 "선교사님"들을 "많이 뵙습니다." "선교사님" "자신""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이고 "성전"입니다. "건강""잘 챙기셔야" "오래도록 사역"하실 수 있습니다. "건강"하게 "사역"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일 씨, "오늘 간증" "어떠셨나요?" "시작""외로운 입양아"였지만, "지금""든든한 입양 부모"가 되신 "선교사님""이야기",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아내", "새로운 딸""주시고", "외롭지 않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느꼈습니다." "내 길""하나님의 길""다르지만", "결국 하나님의 길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아픔""상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역시 옳으신 분"입니다. "정수 형제", "오늘 간증" "어떠셨나요?" "아이들 교육""관심"이 많은 저는 "선교사님" "이야기""경청"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두려움""밀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저런 이야기""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로펌" "안 가도 괜찮으니", "제발 저에게는 저런 시련""주시지 마십시오!" "솔직한 마음"입니다. "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선교사님"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멀리서 응원하겠습니다." "응원하고 있다는 것""기억해주십시오." "성경""예수님"께서 "고아와 과부""돌보라""말씀"하셨습니다. "고아와 과부""버림받은 영혼", "외로운 영혼", "의지할 곳 없는 영혼", "굶주린 영혼""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돌보라""명령"하신 것입니다. "입양""선교사님""어린 시절 이야기""우리 모두""고아", "과부""같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 또한 "외롭고",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고", "굶주려 있습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조직"에서 "버림받고", "회사"에서 "버림받고", "늘 외로운 영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품"으시고 "섬기라""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 시절" "상처", "따돌림", "울분""안고 살아오셨을 선교사님", "하나님"께서는 "고아"였던 "선교사님""들어 사용"하셔서 "고아된 자들""섬기게 하셨습니다." "받았던 상처""베푸는 사랑"으로 "승화"시키신 "선교사님""삶", "정말 아름답습니다." "방탕"하게 사셨지만, "40도 폭염" 속에서 "땀 흘리며 볶음밥"을 볶으셨던 "헌신""과거""모든 죄악""허물""씻어내는 정화 의식"과 같았습니다. "땀방울" 속에 "과거""씻어내고", "깨끗한 영혼"으로 "거듭나" "굶주린 영혼"들을 "먹이시는 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사님""들어 사용하심""놀라운 계획"입니다. "부모님""원망"했지만, "나는 과연 부모님께 훌륭한 아들이었을까?" "자신""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돌아가셔서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살리시는 일""더욱 크게 쓰임 받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1. 한 고대 문서 이야기

2. 너무나도 중요한 소식 (불편한 진실)

3. 당신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유

4. 신(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5. 신의 증거(연역적 추론)

6. 신의 증거(귀납적 증거)

7. 신의 증거(현실적인 증거)

8.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9. 성경의 사실성

10. 압도적으로 높은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12.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

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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