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솔 처치 이야기: 거리 상담소에서 피어나는 위로와 공감
거리 위의 상담소: 파라솔, 고독한 도시를 위로하다
파라솔 처치: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특별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오늘 우리는 특별한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바로 ‘파라솔 처치’를 운영하시는 장상태 목사님의 이야기인데요, 왠지 이름만 들어도 편안함과 친근함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마치 동네 어귀에서 마주칠 것 같은 푸근한 인상의 장 목사님은, 우리에게 잊고 지냈던 ‘진정한 소통’의 가치를 일깨워줍니다.
장 목사님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 한복판에 파라솔을 치고 앉아, 누구든 찾아와 마음속 깊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교회, 하면 왠지 모르게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를 떠올렸다면, 파라솔 처치는 그 편견을 깨고 우리 곁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온 느낌인데요. 과연 파라솔 처치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어떤 특별한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까요? 지금부터 장상태 목사님의 감동적인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파라솔 처치의 시작: 길 위에서 꽃피운 위로와 공감
장 목사님은, ‘좋은우리교회’의 담임 목사로 섬기기 이전, 거리에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 사역을 먼저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 시작은 아주 우연하고 자연스러웠는데요, 길에서 만난 이들과의 소통을 통해, 지금의 파라솔 처치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대학로나 젊음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로 점이나 사주 상담처럼, 파라솔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공간, 바로 파라솔 처치입니다.
놀랍게도, 파라솔 처치는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뜨거운 여름 땡볕 아래에서도, 매서운 겨울 추위 속에서도, 파라솔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혹시 ‘무료’로 고민 상담을 해준다는 말에, ‘대가를 바라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셨나요? 장 목사님은,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돈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도록, 편안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것이 파라솔 처치의 전부입니다.
이처럼 특별한 사역을 시작하게 된 배경에는, 장 목사님의 특별한 천성과, 굴곡진 인생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따뜻한 마음, 그리고 자신의 아픔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이 모든 것이 파라솔 처치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장 목사님의 굴곡진 인생 여정 속에서, 그를 ‘고민 상담 전문가’이자 ‘목사’로 빚어가셨습니다.
송장 같았던 어린 시절: 어둠 속에서 길어올린 공감 능력
장 목사님의 어린 시절 별명은, 다소 충격적이게도 ‘송장’이었다고 합니다. 움직임 없이 누워있는 송장, 즉 시체를 뜻하는 무시무시한 별명인데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장 목사님이 고등학교 2학년 무렵, 내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감정 표현에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웃을 일이 있어도 웃지 않고, 슬픈 일이 있어도 무표정했으며, 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어둡고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장 목사님의 다크서클은 유난히 짙었던 것 같다고 회상합니다. 마치, 어린 시절 겪었던 마음의 어둠이, 짙은 다크서클로 표현된 듯합니다. 하지만, 장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저의 다크서클까지도 사용하시더라”며, 긍정적인 면모를 보이셨는데요. 그렇다면, 과연 장 목사님은 왜 그토록 무기력하고, 감정 변화 없는 학생 시절을 보내야 했을까요?
장 목사님은, 조심스럽게 가정사를 이야기하며, 당시의 어려웠던 가정 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고백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역기능 가정’과 같았다고 하는데요, 특히 아버님의 잦은 분노 표출이, 어린 장 목사님에게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물론, 아버님 역시,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오셨기에, 마음속 깊은 곳에 많은 상처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분노는, 어머니는 물론, 어린 자녀들에게까지 향했고, 가정은 늘 불안과 고통 속에서 신음해야 했습니다.
식사 시간에 밥상을 엎는 일은 다반사였고,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적인 모습도 자주 목격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매 맞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가정 폭력의 그림자는, 장 목사님의 어린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잦은 폭력과 고통 속에서, 어머니는 늘 불안에 떨었고, 심지어 자녀에게 “내가 너를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까지 해야 했습니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절망적인 외침을 들어야 했던 장 목사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어머니는, 힘든 가정 환경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놓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님은 어머니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책을 찢어버리는 등, 어머니의 신앙생활을 핍박하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굴하지 않고, 몰래 새벽기도를 다니며, 아버님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가정 환경은 나아지지 않았고, 어머니의 고통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짐 보따리를 싸놓고 가출을 시도하는 등, 극심한 고통 속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가정 불화와 불안정한 환경은, 장 목사님에게 고스란히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불안 증세가 심해져, 옷걸이가 쓰러질까 봐 줄로 묶어놓고 자는가 하면, 형광등이 떨어질까 봐 구석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잠자리에 들어도, 불안감 때문에 자주 깨고, 늘 긴장과 불안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친구들이 ‘송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도, 어쩌면 늘 무기력하고 감정 변화 없이 지내던 장 목사님의 모습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 장 목사님에게,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어머니는 안쓰럽고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어머니를 향한 미움: 억압된 감정의 또 다른 발현
장 목사님은, 억압된 감정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표출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무서운 존재였기에, 감히 반항하거나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억눌린 감정은, 결국 가장 가까운 존재, 어머니에게 향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힘없는 아이가, 자신보다 더 약한 친구에게 화풀이하는 것처럼, 장 목사님 역시, 어머니에게 억눌린 감정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사춘기 시절, 어머니를 향한 미움은 극에 달했고, 심지어 어머니가 싸주는 도시락을 거부하고, 밥을 굶는 등,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향한 미움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수련회에 참석하면서, 장 목사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게 됩니다. 사실, 수련회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누나의 강력한 권유로,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장 목사님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찬양과 말씀, 그리고 기도 시간, 특히 밤 기도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장 목사님의 지나온 삶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이 어머니에게 했던 모진 행동과, 잘못된 마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장 목사님은 밤새도록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 나쁜 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께 너무나 큰 상처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회개 기도를 통해, 장 목사님은 비로소,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동시에, 그런 자신을 ক্ষমা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롭고 아름다운 세상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기쁨과 감격이 솟아올랐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장 목사님은 어머니를 안아드렸습니다. 그리고,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담아, 어머니께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머니께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차마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장 목사님이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한 후,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장 목사님은 비로소, 어머니께 “사랑합니다”라고 외쳤지만, 이미 어머니는 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실 때,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던 죄송함과 후회는, 장 목사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슬픔으로 남았습니다.
목회자의 길: 복음의 능력, 사람을 변화시키는 경험
수련회 이후, 장 목사님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고,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으며,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의 능력을 직접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장 목사님은, 앞으로 자신의 모든 시간과 미래를, 복음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길로 이어졌습니다.
상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결혼 후 장모님을 모시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후, 장모님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게 되셨습니다. 단순한 우울감을 넘어, 극심한 고통과 절망감에 휩싸여,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하셨습니다. 장모님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장 목사님은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장모님을 간호하고, 상담학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심은, 훗날 파라솔 처치를 시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파라솔 처치는, 계획된 사역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목회를 하면서, 풀타임 사역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사역 방향을 고민하던 중에, 우연히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장 목사님은, 다일공동체에서 7년 정도 사역하면서, 아내의 건강 문제와, 장모님 간호 문제 등으로, 목회에 어려움을 느끼고 사임을 결심했습니다. 건강 검진 결과, 고지혈증 진단까지 받으면서,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랐음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역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하나님께서는 장 목사님에게, “네게 주어진 환경과 사람 가운데서, 최선을 다해 돕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비록 풀타임 목회는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때, 장 목사님은, 아내와 장모님을 돕는 일 역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귀한 사역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사역에 대한 고민과 기도 중에, 팀 켈러 목사의 ‘센터 처치’라는 책을 접하게 되면서, ‘도시 선교’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아픔과 어려움, 그리고 도시가 선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시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사역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특히,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하는 사역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리하여, 일주일에 단 하루, 가장 자유로운 시간을 내어, 도시의 아픔을 껴안는 파라솔 처치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야탑역 파라솔: ожидания 뛰어넘는 놀라운 만남
파라솔 처치를 처음 시작했던 곳은, 분당 야탑역 앞이었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번화가였지만, 동시에, 외로움과 고독에 지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여러 전철역을 둘러본 결과, 야탑역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임을 확인하고, 용기를 내어 파라솔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긴장감과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찾아올까?’, ‘괜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파라솔을 치고, ‘고민을 들어드립니다 (무료)’라고 쓰인 배너를 설치했습니다. 혹시,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면,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낄까 봐, 최대한 중립적인 모습으로 다가가려 노력했습니다. 분양 상담이나 보험 광고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일단 용기를 내어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선뜻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두 명씩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파라솔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습니다. 마치, 맛집 앞에 줄 서는 것처럼, 파라솔 처치는 순식간에 ‘대박’이 났습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장 목사님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당 상담 시간이 2시간씩이나 걸리다 보니, 기다리는 사람들을 다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너무 오래 기다리다 지쳐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상담을 시작하면, 차마 중간에 끊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하고 간절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상담 내용은, 주변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거나, 불편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함께 귀 기울여 경청하고, 공감하며, 때로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첫날, 장 목사님은, 세상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마치 영화나 드라마처럼, 굴곡지고 깊은 스토리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렇게 첫날 상담을 마치고, 장 목사님은, 파라솔 처치가, 정말 필요한 사역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simple한 행위가, 이토록 큰 힘과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질문이나 조언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맺힌 사연들을 쏟아내고, 후련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부터, 장 목사님은, 본격적으로 파라솔 처치 사역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라솔 처치를 찾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했습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파라솔 아래 의자에 앉아,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초등학생 아이는, 학교 폭력과 왕따 문제로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했던 아픈 사연을 이야기했고, 직장인은, 직장 내 괴롭힘과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분노를 토로했습니다. 주부들은, 가정 문제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힘겨워했고, 노인들은, 외로움과 질병,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했습니다. 파라솔 처치는, 마치 사회의 축소판처럼, 다양한 아픔과 고통을 껴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초등학생 아이의 이야기는, 장 목사님의 마음을 particularly 아프게 했습니다. 5학년 어린 나이에, 학교 폭력으로 인해 자살 시도까지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2년 동안 심한 왕따를 당했고, 부모님께 이야기해도,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핀잔만 들어야 했습니다. 오갈 데 없는 답답한 마음에,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카톡을 보내려다, 엄마의 카톡 프로필 문구를 보고, 겨우 마음을 돌이켰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토요일 단 세 시간만 자유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에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러 나왔다가, 우연히 파라솔 처치를 발견하고, 용기를 내어 고민을 털어놓게 된 것입니다. 낯선 아저씨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이의 마음은 절박했습니다. 장 목사님은,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회가 품고 있는 아픔의 깊이를,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파라솔 처치를 찾는 분들 중에는, 종교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두 번, 세 번 찾아오는 분들은, 장 목사님이 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먼저 성경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장 목사님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제시하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파라솔 처치는, 단순한 고민 상담소를 넘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작은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장 목사님은, 파라솔 처치가, 진정한 교회의 모습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길거리에서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을 만나셨으니, 어쩌면 파라솔 처치가, 예수님의 사역 방식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파라솔 처치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때로는 황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냐?” 며, 금전적인 보상이나, 법적인 해결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땅 문제를 들고 와서, 땅 문서를 보여주며, 해결해달라는 사람, 빚 때문에 힘들어하며, 빚을 탕감해달라는 사람 등, 다양한 요구를 합니다. 하지만, 장 목사님은,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마음의 힘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선생님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드릴 수는 없지만, 이 문제를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드릴 수 있습니다.” 장 목사님은, 물질적인 결핍보다, 마음의 결핍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마음의 힘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합니다. 파라솔 처치는, 문제 해결보다는, 마음의 위로와 지지를 통해,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는 곳입니다. 실제로, 상담의 8, 9할은, 들어주는 것, 즉 경청이라고 합니다.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장 목사님은, 로마서 12장 15절 말씀을 인용하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으라”는 성경 말씀처럼, 마음이 힘든 사람들과 함께 울고, 공감해주는 것이, 파라솔 처치의 중요한 역할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쓰레기통이 없습니다
장 목사님은, 파라솔 처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 장모님 간호, 아내의 질병 등, 굴곡진 인생 여정 속에서 겪었던 모든 어려움들이, 파라솔 처치 사역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장 목사님의 인생이라는 도화지 위에, 다양한 색깔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 모든 경험들을 사용하여, 파라솔 처치를 만들어가신 것입니다. 장 목사님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와, 아픈 상처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감사를 금치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쓰레기통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 심지어, 우리가 버리고 싶어 하는 쓰레기 같은 경험까지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앞으로 파라솔 처치의 비전과 기도 제목에 대해 묻자, 장 목사님은, “파라솔 처치가, 도시의 아픔에 대한 작은 관심의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고 답했습니다. 해외 선교도 중요하지만, 당장 우리 주변에서 고통받고, 죽음을 고민하는 이웃들에게, 먼저 관심을 갖고, 사랑을 전하는 것이, 파라솔 처치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파라솔 처치는,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작고 미약하지만, 도시의 아픔을 치유하고, 희망을 전하는, 의미 있는 움직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장 목사님은, 파라솔 처치 사역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지치지 않는 마음과, 건강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 감각 기관 중에, 듣는 감각 기관이 가장 오래 간다고 합니다. 제 귀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저는, 평생 파라솔 처치 사역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순간에도, 옆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장 목사님이 꿈꾸는, 진정한 파라솔 처치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장상태 목사님의 파라솔 처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소통과 공감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았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먼저 다가가 경청하고, 위로하는 역할,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요? 파라솔 처치가, 대한민국 곳곳에 따뜻한 그늘을 드리우는, 희망의 상징이 되기를 기대하며,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장상태 목사님과 파라솔 처치에, 따뜻한 응원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