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극복 이정훈 사모 300가지 기도 응답과 용서 스토리
가정 폭력 딛고 일어선 이정훈 사모의 감동 스토리: 300가지 기도 응답과 용서
"우리 엄마를 보고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을 남자(?),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충격적인 가정 폭력 트라우마 극복 노하우 대방출
가정은 안식처여야 하지만, 때로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부모로부터 폭력을 경험한 아이들에게 가정은 공포와 고통의 기억으로 가득찰 수밖에 없는데요. 오늘 우리는 수년간 어머니로부터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온 이정훈 사모님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통해, 가정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 진정한 사랑과 믿음으로 가정을 회복하는 놀라운 여정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폭력은 대물림된다"는 슬픈 속설처럼,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폭력적인 모습을 답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정훈 사모님은 이러한 절망적인 고리를 끊고, 두 자녀를 사랑과 기도로 양육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는데요. 하린의 무릎학교 운영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서, 가정 폭력의 상처를 딛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까지,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스토리와 놀라운 회복 노하우를 지금부터 낱낱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과연 그녀는 어떻게 끔찍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사랑과 용서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이정훈 사모님의 감동적인 이야기 속으로 함께 떠나보시죠.
300가지 배우자 기도 조건, 과연 현실 가능한 걸까요?
놀랍게도 이정훈 사모님은 300가지나 되는 배우자 기도 조건을 꼼꼼하게 작성했다고 합니다. 300가지 기도 조건이라니,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숫자인데요.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엄청난 조건들을 대체 어떻게 다 채웠을까요? 더욱 놀라운 사실은 현재 남편분을 만나 단번에 300가지 기도 조건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을 받은 후 미련 없이 기도문을 찢어버렸다는 사모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데요.
그녀의 1번 기도 조건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믿음의 동역자"였다고 합니다. 역시 믿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는데요. 외모 조건도 빼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키 180cm 이상과 같은 외적인 조건을 적기도 했지만, 점차 자신만의 이상형을 구체화시켜 나갔다고 합니다. 여성스러운 스타일보다는 다부지고 남자다운, 피부도 약간 거칠고 여드름 자국이 있는 남자를 좋아했다고 하는데요. 정말 독특한 취향입니다.
놀랍게도 현재 남편분은 사모님의 이상형에 완벽하게 부합했다고 합니다. 소개팅 자리에서 남편의 옆모습을 보는 순간, 여드름 자국마저도 멋있게 느껴졌다고 하니, 사모님의 첫눈에 반하는 기도가 응답된 것은 아닐까요? 이처럼 구체적인 기도는 놀라운 응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300가지 기도 조건 중에는 남들이 생각지도 못할 특이한 조건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과연 어떤 조건이었을까요?
정말 엉뚱하고 발랄한 조건은 바로 "저를 첫눈에 뿅 하고 반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콩깍지가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소개팅 날, 남편분은 사모님을 "천사가 걸어오는 줄 알았다"고 표현하며 첫눈에 반했다는 후문입니다. 이 정도면 거의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죠?
특이한 조건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당시 섬겼던 교회 담임 목사님처럼 인자하고 따뜻한 시아버지를 원했다고 하는데요. 놀랍게도 시아버지 또한 사모님의 기도대로 자상하고 인격적인 분이셨다고 합니다. 심지어 머리 스타일까지 담임 목사님과 흡사했다고 하니, 정말 소름 돋는 응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조건은 바로 "우리 엄마를 보고도 떠나지 않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배우자 기도 조건에 엄마를 언급했을까요? 짐작하시겠지만, 사모님의 가정 환경은 그리 순탄치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폭력에 시달려왔다고 하는데요. 과연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을까요?
분노 조절 안 되는 엄마,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다
사모님의 어머니는 "분노 조절이 안 되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욱하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화가 나면 스스로 제어하기 어려워 폭력과 폭언으로 표출하는 경우가 잦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의 행동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성장하면서 엄마의 분노가 비정상적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가정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지고, 주변 사람들은 사모님에게 "너희 엄마는 왜 그러니?"라며 수군거렸다고 하는데요. 어머니에 대한 부끄러움은 사모님의 어린 시절에 깊숙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사모님은 아버지와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고 회상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관계는 최악이었다고 하는데요. 끊임없는 싸움의 주된 원인은 "돈" 문제였습니다. 장남였던 아버지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많은 돈을 썼고, 어머니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폭력은 주로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말로 시작된 싸움은 점점 격화되어 폭력으로 이어졌는데요. 체격이 왜소했던 어머니는 주로 폭언과 비난을 쏟아냈지만, 분노가 극에 달하면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또한 폭력로 맞대응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의 불화는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상처로 남았습니다.
어머니의 폭력은 사모님과 남동생에게 향했습니다. 주된 폭력 도구는 손이었지만, 주변에 있는 물건도 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옷걸이, 파리채, 효자손 등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무기가 되었는데요. 견디기 힘든 날에는 온종일 번갈아 가며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담배를 피우는 시간만이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가정 폭력은 IMF 외환 위기 이후 더욱 심해졌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정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어머니의 분노는 극에 달했는데요. 하루에도 수백 통의 욕설 문자를 보내고, 전화로 끊임없이 폭언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음성 메시지로 욕설을 녹음하기도 했다는데요. 어머니의 끊임없는 폭력은 아버지의 심장병으로 이어졌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결국 집을 나와 사무실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변함없었습니다. 어머니 몰래 아침, 저녁으로 자녀들을 등하교시키고, 따뜻한 아침 식사를 챙겨주셨다고 합니다. 낡은 트럭 안에서 샌드위치와 김밥을 먹으며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은 사모님에게 유일한 행복이자 위로였습니다. 인자하고 따뜻했던 아버지, 하지만 폭력적인 어머니 밑에서 사모님은 불안과 고통 속에서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쪽잠을 자면서도 매일 김밥과 샌드위치를 준비했던 아버지의 애끓는 마음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지옥 같은 집에 두 아이를 두고 홀로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웠을 아버지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요? 가슴 먹먹한 아버지의 사랑은 사모님에게 큰 힘이 되었지만, 폭력으로 얼룩진 어머니와의 관계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폭력 트라우마, 깊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다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정신적인 후유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모님 또한 어린 시절부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매 맞는 꿈, 가위눌림, 몽유병 등 수면 장애에 시달렸는데요. 불안과 공포 때문에 불을 끄면 잠들기가 어려웠고, 자다가 소리를 지르거나 헛소리를 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결혼 후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악몽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엄마가 흉기를 들고 자신을 죽이려 쫓아오는 악몽을 매일 밤 꿨다고 하는데요.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공황 장애까지 겪었다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차에 치여 죽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배우자 기도에 "우리 엄마를 보고도 떠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조건을 적은 이유, 이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폭력적인 엄마 밑에서 자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해 줄 사람을 갈망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 남편분은 사모님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폭력으로 멍든 몸과 마음을 남편에게 보여주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텐데, 남편은 오히려 사모님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함께 아파해 주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보듬어 주는 것임을 남편분은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시댁 식구들 또한 사모님의 가정사를 모두 알고 이해해 주셨다고 합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모두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격려해 주셨다고 하는데요. 힘든 과거를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시댁의 따뜻한 배려는 사모님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배우자 기도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잃지 않았던 사모님. "우울증이 있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늘 미소가 가득한데요. 과연 그녀는 어떻게 기나긴 어둠을 뚫고 회복의 빛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궁금하시죠?
예수님과의 만남,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오다
사모님은 교회를 다니면서 점차 마음의 안식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집과는 달리 교회는 따뜻하고 행복한 공간이었는데요.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예배와 기도를 통해 위로와 평안을 얻었습니다. 특히 대학부 수련회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너는 왜 그러니?", "너 같은 애는 안 돼" 와 같은 negaitve한 말을 끊임없이 들어왔던 사모님은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밝은 척, 강한 척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상처와 어둠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녀에게 "넌 참 귀하다", "넌 참 소중한 존재야" 라고 따뜻하게 속삭여 주셨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시간은 천국과 같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때릴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는데요. 거리에서 남자나 여자가 지나가기만 해도 움찔하며 몸을 움츠리곤 했습니다. 물건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을 보면 공격당할까 봐 극도로 긴장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불안 증세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특히 딸을 보면 누군가 해치지 않을까, 납치해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딸을 혼자 두는 것이 불안해서 늘 품에 안고 다녔고, 마트에 가는 것조차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견디다 못해 오후 예배 찬양 예배에 참석했을 때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백일도 안 된 아이를 안고 예배를 드리던 중, 갑자기 공황 장애가 재발한 것입니다. 찬양 인도자가 마이크를 들고 자신을 때리러 올 것 같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는데요. 심장이 멎을 듯한 공포에 온몸이 마비되는 듯했습니다.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고통스러워하던 그때, 귓가에 찬양 가사가 울려 퍼졌습니다.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바로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라는 찬양이었습니다.
찬양을 듣는 순간, 하나님께서 사모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정아, 네가 아픈 거, 내가 다 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네가 맞았던 매, 네가 받았던 모든 고통, 내가 십자가 위에서 대신 겪었다. 이제 아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치유했으니, 더 이상 아무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의 따뜻한 음성은 얼어붙었던 사모님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엄마에게 맞으며 아팠던 기억, 힘들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와 평안이 사모님의 마음에 가득 차올랐습니다. 오랜 시간 사모님을 괴롭혔던 공포와 불안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약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치유된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치유 간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모님은 숨을 크게 두 번 쉬며 감격에 젖었습니다.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와 공포가 사라졌지만, 문득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혹시 나도 모르게 폭력성을 대물림하게 되지는 않을까?" 어릴 적 폭력에 노출되었던 경험은 무의식 속에 남아 자신도 폭력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습니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속담처럼, 혹시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닮아 폭력적인 엄마가 될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과연 사모님은 폭력의 대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엄마, 제가 대물림 안 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의 고백
최근 일곱 살이 된 딸을 키우면서 사모님은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옷걸이만 보면 "저건 매다"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른다는 것인데요. 어린 시절 옷걸이로 맞았던 아픈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입니다. 옷걸이를 옷에 걸 때마다 섬뜩한 공포감을 느낀다고 하니, 어린 시절 폭력이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파리채, 효자손 역시 매로 인식된다고 하니, 폭력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훨씬 짙고 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옷걸이를 가지고 놀면서 "엄마, 이거 옷걸이야"라고 해맑게 말하는 모습을 본 순간, 사모님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합니다. 딸에게 옷걸이는 단순한 옷걸이일 뿐, 폭력의 도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 쟤는 옷걸이를 그냥 옷걸이로 대하는구나. 나는 매로 생각하는데..." 깨달음과 감사가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하나님, 제가 대물림 안 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은 뜨거운 눈물로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폭력의 대물림을 끊었다는 확신과 안도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님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간증을 듣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모님의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자신의 고통보다 자녀를 먼저 생각하고 헌신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등불이 되어주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사모님에게 큰 슬픔이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영원히 마음속에 살아 숨 쉴 것입니다.
힘든 순간마다 아버지를 떠올리며 위로를 받았다는 사모님. 직장 생활에 지칠 때,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전화하곤 했다는데요. "여보세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따뜻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전화번호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며 그리움을 달래곤 한다는 사모님의 이야기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아빠, 천국에서 잘 지내시죠? 저 오늘 이런 일이 있었는데, 너무 힘들어요. 아빠 보고 싶어요..." 사모님의 문자 메시지에는 아버지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사모님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머리를 잘랐던 추억을 회상했습니다. 사업 실패로 도망 다니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아픈 와중에도 자녀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애쓰던 아버지의 모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와봐, 가위 가져와 봐라. 너희들 아빠 머리 좀 잘라 봐라. 정은이 너는 미술 했으니까 잘 자를 거야. 아빠 믿어 볼게." 서투른 솜씨로 아버지의 머리를 잘라주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던 사모님. 다음 날, 미용실에서 단정하게 머리를 자르고 온 아버지는 용돈을 쥐여주며 "그동안 못 썼던 거 팍팍 써라"라고 따뜻하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늘 자녀를 먼저 생각했던 아버지의 사랑. 그 사랑 덕분에 사모님은 힘든 시간을 견디고 지금까지 잘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은 사모님의 삶의 원동력이자 가장 큰 힘입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생존해 계시다고 하는데요.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사모님은 쉽사리 답하지 못했습니다. 결혼 과정에서 어머니와 갈등이 극심해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다고 합니다. 남동생 또한 누나를 위해 어머니와 연락을 끊었다고 하는데요. 어머니는 사모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모녀의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첫째 딸을 낳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더욱 커졌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보면서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모질게 할 수 있었을까?" 분노와 원망에 휩싸였습니다. "다시는 엄마를 보지 않겠다" 굳게 다짐했지만, 사역자로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직 마음이 닫혀서 엄마를 용서할 수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모님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찼던 마음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둘째를 임신했을 때였습니다. 첫째를 낳을 때는 무통 주사 덕분에 비교적 순산했지만, 둘째를 낳을 때는 무통 주사도 소용없을 만큼 극심한 진통에 시달렸습니다. "아, 엄마도 나를 이렇게 힘들게 낳았겠구나..." 고통 속에서 문득 어머니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원망만 했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아이가 나왔습니다. 출산 직후, 남편에게 "엄마에게 전화해야겠다"고 말했고, 남편도 함께 울며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굳게 닫혔던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기적적인 화해 후에도 어머니와의 관계는 여전히 불안정했습니다. "또다시 상처를 받으면 어떡하지?" 두려움이 컸지만, 어머니는 먼저 연락해 왔습니다. 용돈도 보내주시고, 아기 보약도 챙겨주시는 등 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연약함 때문에 갈등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시 연락을 끊고 지내기도 했지만, 최근 새롭게하소서 녹화를 앞두고 어머니와 다시 연락이 닿았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미안하다, 정훈아. 내가 너를 힘들게 키웠다. 고생 많았다." 어머니의 진심 어린 사과는 오랜 시간 사모님의 마음을 짓눌렀던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듯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녹화 직전에 어머니와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시고, 마음의 평안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모님은 가정 폭력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전했습니다. "폭력은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폭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며,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호소했습니다. 가정 폭력 피해 아동들은 자신의 고통을 쉽게 드러내지 못합니다.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교회를 비롯한 지역 사회가 폭력 피해 아동들에게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사모님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폭력 피해 아동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습니다. 하은이의 무릎학교를 통해 더 많은 아이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전하고, 상처 입은 영혼들을 치유하는 사역에 헌신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연일 숨 막히는 이야기에 진행자 또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박희 목사는 "사모님의 밝은 모습 뒤에 감춰진 깊은 슬픔과 상처에 마음이 아프다"면서도 "하나님께서 사모님을 통해 수많은 가정을 회복시키실 것을 믿는다"며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연 또한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돕는 사모님의 모습에 감동받았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방송 말미, 주영훈은 교회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교회가 단순히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라, 지역 사회 주민들을 위한 진정한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며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상처 입은 사람 누구나 편안하게 찾아와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교회가 지역 사회와 협력하여 주민 센터와 같은 역할을 하고, 더 나아가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메시지는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프렌즈 교회, 군산 드림 교회처럼 지역 사회를 섬기는 교회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하며, 오늘 방송을 마무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