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자 찾기 기적의 주인공, 이건수 교수 포기하지 않는 열정
포기 없는 열정, 기적을 만들다: 이건수 교수의 실종자 찾기
[이게 된다고?!😲] 실패를 염려하며 주저하는 당신에게, 이건수 교수님의 멈추지 않는 열정과 기적 같은 실종자 찾기 여정
안녕하십니까, 새롭게 하소서의 진행자 주영훈입니다. 반갑습니다, 연애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가족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오늘 모실 분은 바로 이러한 실종자 가족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며, 수많은 실종자들을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달란트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실종자들을 찾으셨고, 세계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신 백석대학교 경찰학부 이건수 교수님을 모시고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사회자: 교수님, 길을 걷다 보면 실종자를 찾는 현수막을 종종 보게 되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게 많은 실종자들을 어떻게 찾으시는지, 교수님만의 특별한 비결이나 방법이 있으신가요?
이건수 교수: 비결이라고 한다면,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실종자 가족들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찾아오십니다. 그분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경찰로서 '어렵다'거나 '안 된다'는 말 대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야 합니다. 물론, 저 혼자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 꼭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주님, 인격적으로도 부족하고, 성격적으로도 훌륭하지 못한 저를 왜 이렇게 들어 쓰셨나요?" 아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회자: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문득 수십 년째 잃어버린 딸 송해의 양을 찾는 플래카드가 떠오릅니다. 그 플래카드를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데요.
이건수 교수: 사회자님의 말씀을 들으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송해의 양 부모님은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딸을 기다리며, 그 플래카드를 생명줄처럼 여기고 계실 겁니다. 가족들에게 희망은 곧 살아있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해의를 찾든 못 찾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옆에서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송해의 양 외에도 기억에 남는 실종자 가족이 있으신가요?
이건수 교수: 안타까운 사연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60대 어머니가 15개월 된 딸을 두고 떠났다가, 수십 년 만에 딸을 찾고 싶다고 찾아오셨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찾은 후, 평생 먹지 않았던 요구르트를 딸에게 건네셨습니다. 가난 때문에 딸이 이웃집 요구르트 빈 통을 빨던 모습이 잊히지 않아, 차마 요구르트를 먹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딸은 엄마를 만나 결혼식 때 외롭지 않게 되었다며 기뻐했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삶의 행복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사회자: 정말 사람을 찾아주는 것은, 단순히 실종자를 찾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을 구원하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교수님을 이 일에 사용하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텐데요. 교수님은 언제 처음 교회를 접하게 되셨나요?
이건수 교수: 저는 철저한 불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절에 다니셨습니다. 대학교에 가서 미팅으로 교회 다니는 여학생을 처음 만났는데, 너무 예뻤습니다. (웃음) 역사의 시작은 대개 미팅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가 이 방송을 안 봐야 할 텐데... (웃음) 그 여학생이 예뻐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옷에서 빛이 날 정도로 옷을 제대로 빨아 입지 못했습니다. 빚 때문에 옷을 제대로 빨지 못한다는 말, 요즘 젊은 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울 텐데요. 어릴 적 전남 바닷가 섬에서 부산으로 유학 와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혼자 살았는데, 제대로 챙겨 입을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성공해서 좋은 일을 해야지'라는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미팅에서 만난 예쁜 여학생 때문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더벅머리에 옷에서는 빛이 나는 저를 교회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6개월 동안 열심히 교회에 다녔지만, 그 여학생은 저를 피하더군요. (웃음) 그래서 교회를 그만두려던 찰나, CCC (대학생 선교회) 활동을 하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님께 "무조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며, 집안의 연등을 모두 불태우고 부모님을 전도했습니다.
사회자: 부모님의 반대는 없으셨나요?
이건수 교수: 저희 어머니는 아들 말이라면 무조건 믿으시는 분이셨습니다. 아들을 신처럼 믿고 사셨죠. (웃음)
사회자: 대학교 졸업 후, 어떻게 서울로 상경하게 되셨나요?
이건수 교수: 부산 상고를 졸업하고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습니다. 은행 취업 대신 법대에 진학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가진 돈도 없고, 잠잘 곳도 없었습니다. 여의도 한강변 벤치에서 이틀 밤을 노숙했습니다. (웃음) 당시 제 꿈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만 시켜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시원 총무를 하면서 밥을 해결하고, 틈틈이 고시 공부를 했습니다.
사회자: 꿈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인데요.
이건수 교수: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볼까 봐 망설여집니다. 영적인 체험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이 신비주의로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습니다. 대학교 졸업 후, 고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미래는 불투명했습니다. 29살, 주변 친구들은 결혼하고 자리를 잡아가는데, 저는 여전히 고시원에서 캄캄한 미래를 헤쳐나가고 있었습니다. 절박한 마음에 기도원에 올라가 밤늦도록 기도하고 내려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밤, 기도원에서 내려와 고시원에 도착해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속에서 하얀 방에 혼자 누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자승 세 명이 나타나, 한 명은 머리를 누르고, 한 명은 가슴에 올라타 목을 조르고, 나머지 한 명은 발목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가위눌림과는 달랐습니다. 너무나 생생하게 현실처럼 느껴졌습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 "억!" 소리를 내며 깨어났습니다. '산기도를 함부로 하면 안 되겠구나.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다시는 산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음 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 이름으로 산기도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습니다. '그래, 딱 한 번만 더 해보자. 그래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면 절에 가야겠다.' 생각하고 다시 산기도를 했습니다. 결과는 똑같았습니다. 하얀 방, 동자승 세 명, 목을 조르는 고통... 두 번 연속 악몽에 시달리니, '이건 단순한 꿈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는 기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며칠 후, 다시 도서관에서 나와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도했던 장소를 지나치는데, '내일부터 부처님을 믿어야 하나? 예수님을 포기하고 절에 다녀야 하나?'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도해 보고 결정하자.' 생각하고 다시 기도원에 올랐습니다. 여전히 검은 구름 같은 것이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 번째 꿈 역시 같았습니다. 동자승 세 명이 나타나 목을 졸랐습니다.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저도 모르게 입에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손이 저절로 공중으로 뻗어지면서, 짐승 털 같은 것이 손에 잡히는 촉감이 느껴졌습니다. 고양이나 개의 머리털 같은 부드러운 털과 몸통이 잡혔습니다. 꿈에서 깨어났는데,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꿈속에서 귀신들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내가 고시 공부할 때가 아니라, 전국을 다니며 귀신을 쫓아내고 산당을 무너뜨려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경찰 시험을 보게 되었고, 일반 경찰과 청와대 경호 101단 시험에 모두 합격했습니다. 마치 기적과 같았습니다. 이후,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고시 공부를 계속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고시 낭인으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회자: 정말 놀라운 체험이네요. 예수 이름의 권세를 경험하신 거군요.
이건수 교수: 저는 분명히 귀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제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온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라는 외침, 그리고 손에 잡혔던 짐승의 촉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사회자: 교수님의 간증을 들으니, 저도 어릴 적 화장실 변기가 고장 나서 수리공을 여러 번 불렀지만 고쳐지지 않았던 경험이 떠오릅니다. 어머니께서 꿈에 변기에 귀신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밤새도록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기도하신 후, 변기가 고쳐졌다고 합니다.
이건수 교수: 영적인 체험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사회자: 그 이후로 영적으로 눌리거나 힘든 경험은 없으셨나요?
이건수 교수: 한 가지 고백하자면, 경찰이 되고 아내와 결혼하는 등 모든 일이 잘 풀렸지만, 처갓집에서 밤에 화장실에 귀신이 나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얀 소복 입은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꿈이었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관점이 다릅니다. '아, 내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구나. 귀신이 방해하려고 꿈에 나타났구나.' 오히려 안심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악한 영들의 미혹과 유혹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사회자: 경찰이 되신 후, 바로 실종자 찾기 수사에 착수하신 건가요?
이건수 교수: 실종자 찾기는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처음 발령받은 곳은 구리 갈매 파출소였습니다. 갈매는 서울과 경계 지역인데, 겨울에는 눈이 무릎까지 쌓이고, 여름에는 개구리가 울어대는 촌 동네였습니다. 당시 파출소는 수배자 검거 기간이었는데, 수배자를 잡지 못하면 퇴근도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갈매 파출소 관내 수배자는 김 모 씨와 공 모 씨 두 명이었습니다. 10년 이상 된 장기 미제 수배자들이라, 선배들은 "찾을 수 없으니, 서울 수배자를 잡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번 찾아보자'는 무모한 도전을 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수배자들의 예전 주소를 찾아갔지만, 이미 이사를 갔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마지막 희망을 걸고 동네 할머니에게 수배자들에 대해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김 모 씨는 남대문 시장에 있는 중국집에서 일하고, 언덕배기에 산다고 하더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드디어 잡았다!' 확신했습니다. 파출소에 연락해 의경 김광철 씨와 함께 새벽 4시에 택시를 타고 남대문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남대문 시장은 생각보다 훨씬 컸습니다. 수많은 중국집과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습니다. '이 많은 집 중에 어떻게 김 모 씨를 찾는단 말인가?'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김광철 씨는 피곤했는지 골목길 구석에서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정말 안 되는 건가?' 포기하려는 순간, 저 멀리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8시까지만 더 찾아보고 안 되면 포기하자' 생각하고 다시 힘을 냈습니다. 해 뜰 무렵, 저 멀리 철문이 열리면서 어떤 사람이 나왔습니다. 흑백 사진 속 김 모 씨와는 전혀 다른 빼빼 마른 남자였습니다. '아, 헛수고였구나.' 실망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 모 씨 되시죠?"라고 물었습니다. 남자는 어깨를 움찔하며 멈칫했습니다. '혹시 잘못 짚었나? 죄송하다고 하고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남자가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소름이 돋았습니다. 기적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수갑을 채우고 택시에 태워 파출소로 돌아오는 길,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찾은 거지?' 김광철 씨도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파출소에 도착해서 조사를 하던 중, 김 모 씨에게 친구 공 모 씨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김 모 씨는 순순히 공 모 씨의 은신처를 제공했고, 공 모 씨 역시 검거되었습니다. 작은 파출소에서 수배자 검거 1위를 차지하는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후, 수배자 검거 기간 동안 단 한 명의 수배자도 잡지 못했지만, 3등을 했습니다. (웃음) 무모했던 믿음이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사람 머리로 계산하면 불가능했지만,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가니, 하나님께서 결과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이 경험이 지금까지 실종자 찾기 사역을 계속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사회자: 정말 놀라운 경험입니다. 첫 단추를 잘 꿰신 덕분에 실종자 찾기 전문가가 되신 것 같습니다. 승진도 빠르셨을 텐데요.
이건수 교수: 그때는 상만 받았습니다. 저는 학구파였습니다. 공부해서 승진하는 경찰이 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실제로 승진도 빨랐습니다. 동기들은 순경이었는데, 저는 경사였습니다. 경사 계급으로 민원실장, 파출소장까지 역임했습니다.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보과에서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정보과는 양복 입고 다니며, 시장님, 군수님 등 높은 사람들을 만나는 곳입니다. 민원복 입고 흙먼지 날리던 저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주저 없이 정보과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퇴근 후 잠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머리만 대면 바로 잠드는 스타일입니다. 아내가 "몽둥이를 준비해 놔야 겠다"고 할 정도로 잠귀가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새벽 2시까지 뒤척이다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님, 왜 오늘따라 잠이 안 오죠?" 기도하는 중, 문득 '정보과'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너 정말 정보과에 갈 거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림이 왔습니다. '네, 가고 싶습니다.' '정보과에 가면 정말 행복할 거 같니?' 되물음이 이어졌습니다. '아니요, 행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정보과에 가면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실종자 가족들의 눈물이 자꾸 떠오를 것 같았습니다. 민원실을 떠나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 거니?' 다시 물음이 왔습니다. "하나님, 정보과 포기하겠습니다." 저절로 답이 나왔습니다. '아, 내가 가야 할 길이 이 길이구나.' 소명을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출세가 아니라, 실종자 가족들을 찾아 위로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승진 공부를 위해 잡았던 책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실종자 찾기에 올인했습니다.
사회자: 소명이 참 중요합니다. 승진을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 소명을 따라 실종자를 찾기 위해 공부했더니,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셨네요. 보통 직장과 소명을 분리해서 생각하는데, 교수님은 직장 안에서 소명과 접점을 찾으셨네요.
이건수 교수: 저는 가난뱅이였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나아가니, 하나님께서 모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대학원 진학도, 방송 출연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회자: 실종자를 찾을 때 특별히 유의하는 점이 있으신가요?
이건수 교수: 저는 편지를 많이 보냅니다. 2012년에는 13만 통 넘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 이름이 '김정자'라면, 전국에 있는 '김정자'라는 이름을 가진 수만 명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물론, 무작정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실종자 정보와 일치하는 사람들을 추려내고, 2~3천 명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에는 실종자의 간절한 사연과 연락처를 적어, 혹시 아는 사람이 있으면 연락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수많은 편지를 쓰고 보내는 일은 정말 고된 작업입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학생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봉사 활동 시간을 인정해주는 대신, 편지 봉투에 주소를 적는 일을 부탁했습니다. 학생들 덕분에 3천 통 넘는 편지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경찰서 경비로 공문서를 발송하니, 비용 부담도 덜 수 있었습니다. 3천 통 편지를 보내면, 신기하게도 꼭 연락이 옵니다. 진심은 통하는 것 같습니다. 편지 외에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1년 전에 실종자를 봤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정보망을 활용해 추적합니다. 매달 제보자에게 전화해 "혹시 또 보신 적 없으신가요?" 끈질기게 확인합니다. 미국에 사는 누나가 장애가 있는 남동생을 찾는 사건에서, 2년 만에 남동생을 찾은 적도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물론, 어려움도 많습니다. 실종자 주거지에 찾아가 탐문 수사를 하다 보면,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아 경찰에 신고당하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경찰관 맞느냐?" 신분증을 보여줘도 의심합니다. 심지어 보이스피싱 범으로 오해받기도 합니다. "장난치지 마세요!" 욕설을 듣는 경우도 많습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분들은 편지 봉투를 집어 던지기도 합니다. 플라스틱 통에 맞아 옷이 찢어지고 피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분들을 신고할 수는 없습니다. 에로 사항이 많지만, 포기하지 않고 찾아야 합니다. 물론 억울한 일도 많지만, 사람을 찾았을 때 느끼는 행복은 그 모든 어려움을 잊게 해줍니다. 대학교 강단에 설 때 공허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종자를 찾아 가족에게 돌려보냈을 때, 그분들이 웃는 모습을 보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이구나. 나로 인해 저 분이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구나.' 생각합니다. 마약처럼 헤어나올 수 없는 보람과 행복을 느낍니다.
사회자: 실종 사건 발생 시, 경찰에 직접 접수하거나 112, 182에 전화하면 되는데요. 직접 접수하는 가족들의 심리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건수 교수: 솔직히 말씀드리면, 20년 넘게 실종자 찾기 사역을 해왔지만, 여전히 가족들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고통입니다. 우울증, 자살 시도, 생계 포기, 가정 파탄 등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에게 직장,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가족들의 아픔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평생 지속되는 고통입니다. 예전에 너무 힘들어 "실종자 찾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을 때, 한 가족이 울면서 "형사님, 저희는 살아있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어요?"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 후로는 감히 포기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은 17년 전 병원에서 뒤바뀐 아이 사건을 맡았을 때였습니다. 혹시 '궁금한 이야기 Y' 큐브 사회 제네 편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사회자: 네, 본 적 있습니다.
이건수 교수: 딸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 아무리 봐도 자신과 닮지 않은 것 같고, 가족 성향과도 너무 달라 의아하게 생각하던 어머니가 딸의 혈액형을 검사했더니, 자신과 남편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혹시 아이가 바뀐 것 아닐까?' 의심하며 출산했던 병원에 문의했지만, 병원에서는 "절대 그럴 일 없다"며 부인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저에게 사건이 접수되었습니다. 병원 측은 계속 정보 제공을 거부했고, 수사에 난항을 겪었습니다. 결국 법원 영장을 받아 병원 출생 기록을 확보하고, 1년 동안 출생 신고된 아이들의 명단을 전부 확인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직원들과 갈등이 심했습니다. "왜 경찰관이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느냐? 업무 범위를 벗어난 일 아니냐? 괜히 잘못되면 어떻게 책임질 거냐?" 질타와 압박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 수사를 계속해야 하나? 그만둬야 하나?'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기도 중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따라, 수사를 계속했습니다. 마침내 한 가정을 찾아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집 역시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아이가 바뀐 집은 부유하고 화목했습니다. 1년 넘는 긴 시간 동안 수사한 끝에, 마침내 두 집 딸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유전자 검사 결과도 일치했습니다. 가난한 집 부모님께 유전자 검사 결과를 전달했을 때, 아버지는 눈 내리는 마당에서 통곡하셨습니다. "우리 딸은 어떻게 되는 거냐?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절규하셨습니다. 부유한 집 부모님은 "두 딸 모두 키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두 가정 모두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밝혀졌으니, 이제 두 가정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후에 드라마 소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이라는 드라마였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제가 겪었던 사건과 너무나 흡사했습니다. 작가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사회자: 그 후, 두 가족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건수 교수: 두려웠습니다. 제 역할은 진실을 밝히는 것까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나아가 두 가정을 흔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찾아주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정말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하지만 기도 중 "그래도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는 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회자: 혹시 교수님 가족 중에 실종자가 발생한 적은 없으신가요?
이건수 교수: 개인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큰누나와 조카들을 데리고 어린이대공원에 갔었습니다. 오후 4~5시쯤 되었을 때, 아들 손을 잡고, 누나는 조카 딸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차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는데, 문득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카딸 해원이가 없어진 것입니다. "누나, 해원이는?" "나는 네가 데리고 있는 줄 알았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차를 세워두고 미친 듯이 해원이를 찾아 뛰쳐나갔습니다. 200m 거리를 미친 듯이 뛰어가며 "해원아!"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다행히 어린이대공원 정문 앞 가판대 근처에서 혼자 울고 있는 해원이를 발견했습니다.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해원이를 데려갔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 경험 후, 정신이 나갈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끔찍합니다.
사회자: 저도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실종 예방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이건수 교수: 아이들에게 반드시 이름, 부모님 연락처, 집 주소를 알려줘야 합니다. 그리고 길을 잃으면 절대 아무 곳에나 가지 말고, 제자리에서 "도와주세요!" 외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 데려가려고 하면 절대 따라가지 말고, "싫어요! 도와주세요!" 크게 외치라고 교육해야 합니다. 어둡고 컴컴한 곳은 혼자 가지 않도록 주의시키고, 부모님들은 경찰청 '실종아동 찾기 센터'에서 제공하는 '사전 지문 등록' 앱을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 얼굴 사진, 지문, 인상착의 등을 미리 등록해두면, 실종 시 신속하게 아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정말 유용한 시스템입니다.
사회자: 교수님, 저는 양부모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38년 만에 친어머니를 기적적으로 만나 뵙게 되었는데요. 상봉 현장에서 울지 않으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어머니께서 대성통곡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어머니를 안아드리며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요. 엄마를 용서해요." 저도 모르게 용서의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수많은 상봉 현장을 지켜보셨을 텐데, 기억에 남는 특별한 상봉 장면이 있으신가요?
이건수 교수: 정말 훌륭하십니다. 대부분의 실종자 가족들은 친부모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용서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가지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입양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입니다. 두 분의 천사를 만난 것과 같습니다. 길러주신 부모님과 낳아주신 부모님, 두 분 모두 소중한 천사입니다. 상봉 현장은 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입니다. 50년 만에 만난 모자는 말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정적 속에 흐르는 애틋함과 안타까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10분 정도 침묵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껴안고 울기 시작합니다.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눈물입니다. 저 역시 수없이 많은 상봉 현장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이 메말랐다고 생각했는데, 상봉 현장만 가면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쏟습니다. 실종자 가족들의 아픔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합니다. 수십 년 만에 만났지만, 여전히 그때 그 시절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메일을 보내온 김영숙 씨 사연이 가슴 아팠습니다. 김영숙 씨는 6살 때 아버지에게 버려졌습니다. 아버지와 남동생과 함께 낯선 집에 가서 닭 요리를 먹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아버지는 남동생만 데리고 떠나버렸습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김영숙 씨는 평생 남동생을 찾아 헤맸습니다. 미국 군인과 결혼해 간호사로 일하며 안정된 삶을 살았지만, 남동생 생각에 늘 마음 한켠이 아팠습니다. 50년 넘게 찾아 헤매다 포기하려던 찰나, 딸의 권유로 마지막 희망을 걸고 저에게 메일을 보낸 것입니다. 1년 가까이 수사한 끝에, 남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찾아 연락했습니다. 김영숙 씨는 "오 마이 갓!" 외치며 30분 넘게 통곡했습니다. 추석 3일 전, 미국에서 날아온 김영숙 씨는 남동생에게 줄 선물과 손편지를 가득 챙겨왔습니다. 특히 남동생이 좋아했던 동요가 나오는 엽서를 준비했는데, 엽서에는 남동생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만남 당일, 남동생은 비닐하우스 촌 공장에서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나타났습니다. 누나와 남동생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김영숙 씨는 "내 동생일 리가 없다"며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동생의 손과 발을 보더니 "내 동생 맞다"며 확신했습니다. 유전자 검사 결과 일치 판정이 나왔고, 두 남매는 50년 만에 눈물의 상봉을 했습니다. 김영숙 씨는 늘 동생을 그리워했지만, 정작 만났을 때 50년 세월의 격차를 실감하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여전히 동생은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 멈춰 있었던 것입니다. 실종자 가족들은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삶을 살아갑니다.
사회자: 다른 사람들의 실종자를 찾고 가족 상봉을 돕는 교수님은, 정작 가족들에게 소홀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건수 교수: 어머니 생각만 하면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어머니는 겨울마다 섬에 가셔서 미역 줄기를 떼고, 미역 대를 찢는 고된 일을 하시며 자식들을 키우셨습니다. 손톱이 빠지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붓는 고통 속에서도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일하셨습니다. 저는 경찰 일에 파묻혀 바쁘게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정말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까?'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장례 예배 후, 식사 시간에 수저를 들다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하며 대성통곡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 생각만 하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대학교 교수가 되어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은 곳에 갈 때마다 "어머니도 함께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합니다. 어머니께 잘해드리지 못했던 죄송함에 5년 넘게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회자: '스포츠카 비유'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포츠카를 너무나 갖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못 샀는데, 돈을 모아 살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나이가 들어 스포츠카를 탈 수 없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었지만, 바쁘게 살다 보니 결국 기회를 놓쳐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건수 교수: 100% 공감합니다. 너무 늦게 철이 든 것 같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어머니께 소홀했을까요? 어머니 생각만 하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사회자: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과 더불어, 아내분께도 미안한 마음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헌신적인 아내의 내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교수님은 존재하지 못했을 텐데요.
이건수 교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내에게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빵점 남편이었습니다. 아내와 단둘이 여행 한번 가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는 늘 저에게 "교만하면 안 돼.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잖아. 늘 겸손해야 해." 신앙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새벽 기도회를 함께 가면 눈물로 기도합니다.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눈물로 기도하는 아내를 보면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아내의 눈물의 기도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믿습니다. 아내는 곧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아내를 극진히 외조해야겠습니다. (웃음)
사회자: 자녀들은 어떻게 성장했나요?
이건수 교수: 자녀들에게도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직원들이 "교수님은 아이들을 방치한다"고 핀잔을 줄 정도였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거의 없습니다. 처가 식구들과 제주도 여행 갔을 때 찍은 사진이 전부입니다. 막내아들은 친구 집에 갔다가 "아빠가 7시에 퇴근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우리 아빠는 밤 12시에 나 들어오는데, 어떻게 아빠가 7시에 퇴근할 수 있지?"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딸아이에게 "아빠하면 떠오르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했더니, 온통 '일' '일' '일' 뿐이었습니다. '내가 아이들을 너무 방치했구나.' 뒤늦게 후회했습니다. 2017년 2월 대학교 교수가 되었는데, 3월 교단에 서기 전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내 아이들은 방치하면서, 남의 아이들만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아이들을 불러놓고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아빠가 지금까지 너무 잘못 살아왔다. 너희들을 방치하고, 일만 쫓아다녔다. 아빠를 용서해줄 수 있겠니?" 아이들은 "용서해요" 따뜻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의 용서에 큰 힘을 얻고, 대학교 강단에 설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아이들이 아빠를 어려워하는 것 같아, 가장 자리를 내려놓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늘부터 이 집 가장은 예수님이다. 나는 너희들과 똑같은 가정 구성원 일 뿐이다." 선언했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었지만, 일주일 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딸아이가 거실에 드러누워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는 것입니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집안 주인이 된 것입니다. '진작 가장 자리를 내려놓을 걸.' 후회했습니다. 가장 자리를 내려놓으니, 오히려 가정이 행복해졌습니다. 책임감과 의무감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국의 아버지들에게 강력히 추천합니다. 가장 자리를 내려놓고, 가정 구성원의 일원으로 돌아가십시오. 가정이 천국으로 변할 것입니다.
사회자: 정말 주옥같은 말씀입니다. 저는 반대로 아내와 자녀들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아내와 장모님을 극진히 모시며 살고 있는데, 교수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가장 자리를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웃음)
이건수 교수: (웃음) 남편은 늘 종입니다. 진작 가장 자리를 내려놓았다면, 실패하지 않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후회스럽습니다. (웃음)
사회자: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잃어버린 가족 때문에 애타는 마음으로 이 방송을 시청하고 계실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이건수 교수: 실종자 가족 여러분, 무엇보다 건강을 챙기십시오. 건강이 무너지면, 가정도 파탄나고, 불행해집니다. 자녀를 찾았을 때, 부모가 돌아가신 경우도 많습니다. 너무 아파하지 마시고, 부디 건강하게 가정을 지켜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실종자 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해주십시오. 함께 아파하면 기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작은 관심과 사랑이 실종자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회자: 오늘 천국에 계신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을 진솔하게 말씀해주셨는데요. 교수님은 정말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자랑스러운 아버지이고, 자랑스러운 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3,600가정 이상의 찢어진 마음을 봉합해주신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더 많은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아주시길 기대하며, 더 나아가 실종 예방 시스템 구축에도 힘써주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 감사합니다.
이건수 교수: 감사합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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