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대 윤상혁 교수 가족, 북한 뇌성마비 치료와 선교 이야기
평양 의대 교수의 북한 가족 이야기: 순종과 사랑으로 뇌성마비 아이들을 품다
서울 출생 평양 거주? 온 가족이 북한에 사는 이유: 윤상혁 평양의대 교수 이야기
이번 글에서는 서울에서 태어나 평양의과대학 교수로, 온 가족과 함께 북한에서 생활하는 윤상혁 교수님의 특별한 이야기를 상세히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단순히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내용을 상세히 재구성하여 전달하며, 어떠한 정보나 의견도 추가하지 않고 오직 텍스트 내용만을 충실히 반영하여 작성되었습니다. 특히, 윤 교수님의 삶의 여정 속에서 나타나는 기법과 방법론을 구체적이고 정량적으로 서술하여 독자분들이 그의 경험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삶
윤상혁 교수님은 스스로를 "절대 공부를 못하는 아이" 였다고 소개하며, 어린 시절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나머지 공부를 하고, 시험지를 반도 풀지 못해 종이 치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난독증 증상까지 겪었던 그는 학업에 어려움을 느꼈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과외 덕분에 분수의 개념을 이해하고 처음으로 100점 시험지를 받아보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곧 0점 시험지를 받는 좌절을 겪으며 어머니는 학업 대신 수영을 권유하게 됩니다.
수영 선수로 활동하며 배영에서 두각을 나타낸 윤 교수님은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하며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림프종 발병이라는 가정적인 어려움 속에서 그는 경배와 찬양 집회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됩니다. "너 어디 가든지 순종하라" 라는 찬양 가사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2층 발코니에서 1층의 학생들이 서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윤 교수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신앙 여정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교회 체육 수련회에서 윤 교수님은 "만약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른 나라로 보내 사랑을 전하는 자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시면, '네'라고 대답할 사람 앞으로 나오라" 는 목사님의 메시지에 순수한 마음으로 응답했습니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며 선교사의 삶을 서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얼떨결의 서원은 훗날 그를 북한 선교의 길로 인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수영 선수에서 의사로, 그리고 북한으로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별세 이후, 윤 교수님은 아버지께 휴학을 요청하고 1992년 선교한국 컨퍼런스에 참석하게 됩니다. 랄프 윈터 박사의 "미전도 종족 선교" 메시지를 통해 일반 목회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도 복음이 필요함을 깨닫고, 전문인 선교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슬람권과 공산권 전문 의사 선교사를 일으키실 것이다" 라는 메시지에 다시 한번 순종하여 "수영 코치 선교사" 가 아닌 "의료 선교사" 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공부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고 의과대학 진학을 결심한 윤 교수님은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라" 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고 체육학 교수가 아닌 의사 선교사의 길을 걷기로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와 유학 자금 마련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미국 유학을 위해 친구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시카고로 떠났지만, 토플 점수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12번의 시험에도 500점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던 중, 룸메이트였던 일본인 학생 덕분에 올리벳 나사렛 대학교에 조건부 입학하게 됩니다.
미국 유학 생활 중, 윤 교수님은 아내 조이를 만나게 됩니다. 한국 선교사의 딸로 한국에서 자란 조이는 15세 때 이미 "북한이 너의 집이다"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북한 선교를 꿈꿔왔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조이는 윤 교수님에게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북한에 보내라고 하시면 갈 수 있겠냐" 고 질문했고, 윤 교수님은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니 북한에 보내지 않으실 것" 이라고 확신하며 "가라고 하시면 가겠다" 고 대답했습니다. 이 결혼 전의 대화는 훗날 온 가족의 북한 이주를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의사 면허 취득 후, 윤 교수님은 개업하여 병원을 운영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북한에서 사역하는 선교사 가족을 만나게 되었고, 아내 조이의 적극적인 권유로 북한 선교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부부는 함께 기도하던 중, 요한복음 21장 17절 "내 양을 먹이라" 라는 동일한 성경 구절을 세 번이나 받게 되면서 북한행을 확신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북한 선교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미국 며느리의 정성스러운 식사 대접과 설득에 마음을 열게 됩니다. "북한으로 가기로 했다" 는 아들의 말에 식사 중 숟가락을 던지고 방으로 들어가셨지만, 다음 날 새벽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하시고, "저들의 앞길을 막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몇 주 후, 아버지는 "나도 북한에 같이 가면 할 일이 없겠냐" 며 동행 의사를 밝히고, 온 가족이 북한 선교의 길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3. 북한에서의 의료 사역과 뇌성마비 아이들
2007년, 윤 교수님 가족은 중국을 거쳐 함경북도 라선시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두만강을 따라 북한으로 향하는 길에서 긴장감과 두려움을 느꼈지만, 북한 세관에서 만난 안내원의 환한 미소를 통해 북한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첫 진료 날, 윤 교수님은 "젊고 건강한 환자들만 보내달라" 고 이기적인 기도를 했지만, 치료실을 가득 채운 노인 환자들을 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첫 환자 치료는 기적과 같았습니다. 허리가 아파 제대로 걷지 못하던 노인이 윤 교수님의 치료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집까지 걸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움과 감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후 환자들의 입소문을 통해 더 많은 환자들이 찾아왔고, 윤 교수님은 매일같이 환자들을 치료하며 북한 의료의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8년 동안 팔을 쓰지 못했던 할머니를 치료하던 중, 윤 교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강렬하게 경험합니다. "할머니, 팔을 들어보세요" 라는 말이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나왔고, 할머니가 놀랍게도 팔을 들어올리는 기적을 목격합니다. 이 순간, 윤 교수님은 북한 땅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삭막하게만 보였던 북한 땅에서 하나님의 흔적들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2012년 1월, 뇌성마비를 앓는 복싱이 할머니가 윤 교수님을 찾아오면서 새로운 사역의 문이 열립니다. 중증 경직성 뇌성마비를 앓는 복싱이를 정성껏 치료하며 뇌성마비 치료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 윤 교수님은 한국에서 뇌성마비 치료 전문가에게 배우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와 복싱이를 치료합니다. 복싱이의 호전된 모습에 용기를 얻은 윤 교수님은 뇌성마비 아이들을 위한 전문적인 치료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2012년, 윤 교수님은 평양의학대학 재활의학과 교수로 초빙됩니다. 평양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복싱이를 데려와 치료를 이어갔고, 평양에서도 뇌성마비 아이들을 치료하기 시작합니다. 뇌성마비 치료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고, 9살 뇌성마비 환자 오은미는 윤 교수님의 치료와 수술 후 1년 만에 걸어서 퇴원하는 기적을 보여줍니다. 조선중앙방송은 오은미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북한 전역에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오은미의 기적 이후, 윤 교수님은 한 의사로부터 눈물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그 의사는 과거 수많은 뇌성마비 아이들을 "가망 없다" 고 진단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던 과오를 후회하며 "지금부터라도 뇌성마비 아이들을 살려나가자" 고 윤 교수님께 제안합니다. 이 의사의 고백은 윤 교수님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고, 북한에서 장애인 사역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4. 사랑으로 길을 내다: NGO 설립과 입양
뇌성마비 아이들을 치료하면서 윤 교수님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장애 아동 부모들의 고통에도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아내 조이는 입양에 대한 오랜 꿈을 가지고 있었고, 태국 선교 컨퍼런스에서 만난 12명의 아이들을 입양한 미국인 가족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아 윤 교수님께 입양을 제안합니다. 가족 회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입양을 결정하고, 넷째 딸 사라를 중국에서 입양합니다.
넷째 사라 입양 후, 첫째 딸 사라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아이를 한 명 더 입양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윤 교수님은 다섯째 딸 루시를 그루지야에서 입양하고, 다섯 자녀와 함께 북한에서 생활하는 대가족이 됩니다. 루시는 선천성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윤 교수님 가족의 헌신적인 사랑과 치료를 통해 씩씩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북한 선교의 투명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윤 교수님은 NGO "선양하나" 를 설립합니다. 한국, 미국, 홍콩에 지부를 두고 8개국 39명의 다국적 선교팀과 함께 북한에서 장애인 지원 사업과 인도주의적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선양하나" 는 북한의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사랑으로 길을 내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잠시 한국에 머무르고 있지만, 윤 교수님은 북한으로 돌아가 사역을 재개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을 걸어왔으며, 앞으로도 북한 땅에서 사랑과 헌신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윤상혁 교수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순종의 가치와 사랑의 힘을 일깨워줍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사랑으로 나아갈 때, 기적은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북한 선교와 장애인 사역에 헌신한 윤 교수님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며, 앞으로도 그의 사역을 통해 더 많은 생명이 구원받고 희망을 얻기를 기대합니다.
